윤서. 동화 주인공, 열세 살 부잣집 아이, 밝고 명랑하며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아이.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고 때론 어려운 환경의 아이도 친구로 잘 지내는 아이. 공주 같은 아이. 자기 배역에 만족하고 작은 불협화음에도 슬퍼하고 주변의 위로와 즉각적인 해결을 가져야 하는 아이. 그 외에는 자신의 행복에 의심을 품지 않는 아이.

 

희주. 하루하루가 불안한 아이. 주눅들고 조심해야 하는 아이. 부럽고 샘났지만 친구 사이니까 그냥 보고있었는데 자신을 홀대하고 학대하고 천대하는 어른들에게 쌓인 분노가 터지지도 않고 그대로 속에서 곪는 아이. 차라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게 다행으로 보이지만, 내가, 어른인 내가 뭘 해줄 수도 없는 아이.

 

영선. 가장 멀리서, 그리고 가장 가까이서 보고 들은 아이. 따뜻한 위로나 입에 말린 달콤한 칭찬의 무의미를 깨친 아이. 하루 하루 일상이, 그 무덤덤한 맨밥 같은 맛이 생각나는 아이. 섣불리 나서 이야기 하지 않아서 차갑다는 말도 듣지만 겉치장과 자랑같은 행복이 불안한 걸 알아보는 아이. 이 이야기, '3일간'의 사건과 그 아래 이야기들을 그나마 다 알고 있는, 하지만 주변 어른들이나 친구들에게는 하지 않을 아이.

 

세 아이가 겪은 사흘간의 이야기다. 전형적인 공주와 하녀 캐릭터, 그리고 관찰자 캐릭터를 사용하고 시간과 사건을 집중시켜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사흘 동안 세 명의 아이와 여러 어른들의 폭력적인 이야기. 조금 더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읽자니 섬뜩하기도 하다. 일요일 아침, 일상 속에서 읽은 흔들리는 일상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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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긴 단편 '지옥변'을 읽었다. 어제의 뜨거운 날씨에 꽤 어울리게 뜨겁고 시끄러운 소설이었다. 화공 요시히데는 밉살스럽고 오만하며 소란스러워서 원숭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많은이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하지만 그의 생생한 그림은 기괴한 소문을 만들어낼 정도의 수준이다.

 

화자는 수십 년 전의 '그 사건'을 둘러싼 문제의 '그 인물'이 그려낸 '그 그림', 지옥변, 지옥의 그림을 이야기로 보여준다. 악인의 영혼을 태우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불타는 마차, 화차, 를 생생히 그리려는 화공 요시히데의 예술적 욕망과 그에게 고통을 주려는 호리카와 대신. 그 사이에 낀 요시히데의 딸. 병풍의 여러 면 만큼이나 접을 수도 넓게 펼 수도 있게 인물들이 쓰인다. 비열하고 욕심 많은 화공과 대신, 천하고 소란스럽지만 애착하는 대상에는 한없이 부드러운 화공과 원숭이, 자존심에 있어서는 신분에 맞지 않게 오만한 화공과 딸. 죄악과 징벌이 뒤엉키고 징벌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지옥도와 이 세상.

 

지옥을 표현하려 애쓰다 지옥을 만들어버리는 화공과 대신은 김동인의 소설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수십 년 전의 그 '자애로우신' 대신님 댁에 끔찍한 지옥도를 바친 비열한 화공과 여러 인물들을 모두 뒤집어 이야기의 선후(인과)를  멋대로 배열해 놓는 화자는 이 그림, 이야기의 진짜 주인이 되었다. 얼핏 예술지상주의 소설로 읽혔지만 여러번 뒤집어 놓은 인물과 사건 관계도, 지옥에서 쭈뼛 거리며 눈치껏 숨죽여 모든 것을 보고도 침묵하며 살아남은 화자, 소설가의 자신 만만한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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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0일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생일.

그의 생일을 맞이하야 (147세) 잃어버린 독자 되찾으시고 내 책장과 많은 이들의 책장에서 장수하시길.

 

1880년대, 대작가로 자리를 굳히기 훨씬 전, 십대 소년 프루스트는 친구인 앙뜨와네트가 준 영어로 된 설문지에 (그녀의 추억 만들기의 일완으로) 답을 적었다. 오늘날 유행하는 심리테스트의 빅토리아 시대 버전인 셈인데, 프루스트의 사망 2년 후, 1924년에서야 발견되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프랑스 티비 쇼 사회자 베르나르 피보가 1970, 80년대에 이 질문들을 인터뷰에 썼고, 1993년엔 미국에서 베니티 페어가 유명인들에게 이 설문지를 다시 쓰면서 '전통'은 다시 살아났다.

 

이렇게 책도 나와 있다. 프루스트 님의 생일을 축하하며, 영어로 해피 버스데이 투유, 그리고 불어로 봉 아니베르세르. 

 

https://en.wikipedia.org/wiki/Proust_Questionna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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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계속 (아직도?) 읽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어제 세 편을 읽어서 이제 세 편만 남아있다. 단편 읽기는 바쁜 와중에 하나씩 사탕 빼 먹는 기분이 든다. 단편을 한 자리에서 내리 서너 편 읽으면 줄거리가 엉켜서 (그건 자네 머리가 나쁜 탓일세) 하나씩 따로 따로, 부엌에서 한 편, 쇼파에서 한 편, 해우소에서 한 편 읽었다.

 

'흙 한 덩이'에는 기구한 운명에 맞서 억척스레 사는 여인의 시어머니가 화자다. 첫 두어 문장으로 며느리 다미의 고단한 생활이 보인다. 다미의 남편은 병석에서 팔 년을 누워지내다 사망했고 시어머니 스미는 어린 손주와 밭일을 버리고 다미가 따로 나갈까봐 (일본은 남편 사망 후 시댁에 붙잡힐 의무는 없나 보다) 걱정한다. 그래서 (도박을 이제는 끊은) 조카와 재혼시켜 다미를 붙잡으려 하는데 다미는 재혼 생각 없다고, 자신이 열심히 밭을 일구며 돈을 벌고 아이를 키우겠노라 말한다. 마을의 남자들 품앗이 일 (무덤 파기 등)도 척척 해내고 이웃 마을 까지 나가 일을 해내 돈을 모으는 다미. 그 바람에 늙은 시어머니는 쉬지도 못하고 집안일에 육아를 떠맡았다. 재혼하라며 며느리를 채근하는 것도 실은 쉬고 싶은 속마음의 표현. 밖에서 칭송이 자자한 며느리가 밉고 밉다. 학교에서 엄마 칭찬을 들은 손주에게도 애엄마 욕을 늘어놓고 급기야 고부간에 전쟁이 난다. 팔년 병치레 후 아들/남편 장례를 치렀던 스미와 다미. 이 두 여인의 종이 안팎처럼 닮은 인생. 일은 일대로 해도 표시를 낼 수 없는 집안 일과 생계와 연결되는 바깥일. 옛이야기 같은데 툭, 떨어지는 결말은 의외로 서늘했다.

 

'두자춘'은 정말 옛날 이야기다. 중국 낙양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서있는 '왕년에' 잘나갔지만 지금은 무일푼인 두자춘. 도사님을 만나서 두 번이나 황금을 파내 부자가 된다. 그리고 두번 다 삼년 안에 탕진하고 그 많던 친구들도 두번 반복해서 등을 돌린다. 그러자 돈 보다 도술, 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을까, 도사님을 붙잡고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한다. 도사는 아미산 꼭대기에 두자춘을 놓아두고 '절대 말하지 말라' 는 명을 내리고 사라진다. 그가 입을 다문다면 선인, 도사가 될 수 있을터였다. 온갖 허깨비와 허깨비와 허깨비가 나타나 위협을 해도 두자춘은 입을 다물었는데, 아, 이건 허깨비인지 진짜인지 모를 지경이 반복되고 (따져보니 삼세번의 법칙이 있다!) 최후의 도전은 역시나 부모님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흙 한 덩이'의 시어머니 스미였다면? 잠시 여러 얼굴의 모성과 아들의 효심 전형들을 저울질 해본다. 말 참는 것의 가치와 의미를 생각해 .... 보지 않아도 이야기는 재미있다, 는 결론.

 

이 단편집은 후반부로 갈 수록 인간의 바닥을 '옛이야기', 특히 신의 세계를 통해 보여주는데 '거미줄' 역시 신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려주는 동앗줄, 아니 거미줄 이야기다. 핏물 호수에서 벌을 받으며 비명 지를 힘도 없이 허부적 거리던 세상 최고의 악인. 그가 그 거미줄 이나마 붙잡을 수 있었던 건, 생전에 단 한 번의 선행, 길에서 거미를 밟지 않은 일 덕이다. 그는 그 가늘고 빛나는 거미줄을 붙잡고 영차영차 지옥에서 저 위쪽 밝은, 천상의 연못 바닥까지 기어 올라간다. 그러다가! 짠! 이 악당의 영혼, 혹은 고통을 받아내는 감각,의 구원 따위는 사실 신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신은 뭐, 눈에 띄고 살짝 불쌍하면 땅속의 금을 주거나 거미줄을 내려줄 수는 있다. 그리고 일이 틀어지더라도 그건 네 복이고, 라며 샬랄라 천상의 산책을 이어간다. 신의 눈길, 은총, 거미줄을 기다리며 목 빠지게 기다리는 인간들. 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정말 인간을 측은하게 여기는 작가네. 멋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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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1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작가에게도 천년 수도 낙양은
소설의 소재로 써먹게 되는군요, 대단하네요.

일본의 괴담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지 않
나 싶기도 하구요.

항설백물어 시리즈가 생각나네요.

유부만두 2018-07-11 07:42   좋아요 0 | URL
항설백물어... 검색해봤어요.
이런 괴담 시리즈도 있군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이 이런 옛이야기, 혹은 전설 쪽 분위기인줄 몰랐는데 읽을수록 재미가 있네요. ^^
 

표지나 제목, '운동장려' 라는 속보이는 표지 문구에 계속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던 책인데 ...사 놓고도 침대 옆에서 책을 묵혔다가 어제야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 운동을 하고 싶어지고 몸이 생기를 찾거나 가벼워질 ..... 리는 없고, 의외로 진지한 작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가쿠라 미츠요, 는 낯선 이름이다, 싶었는데 '종이달'의 작가였다. 그의 여러 소설과 엣세이가 번역으로도 나와있는데 저 소설을 읽고 (은근)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먼저 봐서인지 지루했던 서술이나 대책없이 멍청한 주인공이 싫었기 때문이다.

어째, 불안한데, 하면서 시작했다. 표지의 설렁설렁 만화체나 쉬엄쉬엄 놓여있는 제목은 요즘 흔히 보이는 '위로'와 '만족' 류 아닐까 싶었다. 마흔 넘었으니 운동해, 그런데 별거 없어, 라는 걸 읽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첫 장부터 운동화 끈 꽉 조여매고 달린다. 마라톤. 하프 아닌 정식 마라톤. 완주 기록은 네 시간 43분. 이 책에는 일곱 번의 마라톤 완주 기록과 네 번의 트레일 러닝(산에서 뛴다!)와 등산, 심지어 야간 등산의 기록도 담겨있다. 이런 배신.

 

책의 서문에는 나이드는 것과 건강에 대한 순진한 생각과 자신이 얼마나 운동을 '싫어하는'지 천연덕스럽게 써놔서 힘을 빼고 읽기 시작했는데, 첫 챕터부터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다. 하지만 책 절반에 이르기 까지 저자는 '아 싫어, 뛰기 싫어, 힘들어' '걷고 싶어'를 반복한다. 자신은 그저 어쩌다보니 9년에 걸쳐 1키로 뛰기 부터 해서 43킬로는 뛰게 되었을 "뿐" 운동형 사람은 아니라....고, ... 이제는 믿기지 않는다. 그런 사람인 것이다. '종이달'의 작가는. 주말에만 달릴 수 있어서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속으론 '앗싸, 운동 거를 핑계가 생겼어' 라며 좋아하지만 주중에는 9시부터 5시까지 일을, 작가의 글쓰는 일과 다른 여러 '일'로 바쁘게 규칙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러고도 계속 피곤과 오른 발 엄지의 기형과 전날의 과음의 숙취, 그리고 이런 저런 핑계로 몸이 힘들다고, 그런데 지금은 달린다고, 시침 뚝 떼고 적는 사람이다. 무서운 사람이다. (그래도 '마녀체력'의 저자처럼 철인삼종을 하지 않으니 다행) 달리다가 '심심해서' 소설 구상도 해보고 주위의 풍광에 감탄도 하지만 결국 마지막 오킬로를 뛰게 만드는 힘은 '맥주'라고 속의 말을 적는 사람이다. 결승전을 지나서 쨍하게 시원한 맥주를 마시려는 일념으로 그저 달렸다고. 몸은 아픈데 다리는 앞으로 나가는 신기한 경험, 그리고 아주 가끔, 등산 혹은 트레킹 중 자신을 넘어선 어떤 '환희'가, 절로 하하하 웃음이 나는 (몸은 뽀개지게 아프면서) '하이' 상태가 되기도 한다고 적어놓았다. 프랑스에서 와인, 굴, 스테이크와 함께하는 마라톤 코스는 결국 달리기 행사라 몸은 괴롭다고, 하지만 신선한 굴과 화이트 와인의 조합은 환상적이라고 독자를 약올리기도 했다. 다 읽고 나면 장딴지가 뻐근하고 목이 말라 맥주와 와인 생각이 간절해진다. (이 책은 음주 장려 엣세이, 아닐까)

 

귀여운 책의 삽화 캐릭터도 꾸준하게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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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7-0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이달은 나도 별로였는데... 그건 그렇고 후기 읽다보니 운동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맥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더 드네 ㅋ

유부만두 2018-07-08 16:48   좋아요 0 | URL
그렇드라구요~! ^^
전 지난달부터 금주라 더 목이 마른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