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계속 (아직도?) 읽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어제 세 편을 읽어서 이제 세 편만 남아있다. 단편 읽기는 바쁜 와중에 하나씩 사탕 빼 먹는 기분이 든다. 단편을 한 자리에서 내리 서너 편 읽으면 줄거리가 엉켜서 (그건 자네 머리가 나쁜 탓일세) 하나씩 따로 따로, 부엌에서 한 편, 쇼파에서 한 편, 해우소에서 한 편 읽었다.

 

'흙 한 덩이'에는 기구한 운명에 맞서 억척스레 사는 여인의 시어머니가 화자다. 첫 두어 문장으로 며느리 다미의 고단한 생활이 보인다. 다미의 남편은 병석에서 팔 년을 누워지내다 사망했고 시어머니 스미는 어린 손주와 밭일을 버리고 다미가 따로 나갈까봐 (일본은 남편 사망 후 시댁에 붙잡힐 의무는 없나 보다) 걱정한다. 그래서 (도박을 이제는 끊은) 조카와 재혼시켜 다미를 붙잡으려 하는데 다미는 재혼 생각 없다고, 자신이 열심히 밭을 일구며 돈을 벌고 아이를 키우겠노라 말한다. 마을의 남자들 품앗이 일 (무덤 파기 등)도 척척 해내고 이웃 마을 까지 나가 일을 해내 돈을 모으는 다미. 그 바람에 늙은 시어머니는 쉬지도 못하고 집안일에 육아를 떠맡았다. 재혼하라며 며느리를 채근하는 것도 실은 쉬고 싶은 속마음의 표현. 밖에서 칭송이 자자한 며느리가 밉고 밉다. 학교에서 엄마 칭찬을 들은 손주에게도 애엄마 욕을 늘어놓고 급기야 고부간에 전쟁이 난다. 팔년 병치레 후 아들/남편 장례를 치렀던 스미와 다미. 이 두 여인의 종이 안팎처럼 닮은 인생. 일은 일대로 해도 표시를 낼 수 없는 집안 일과 생계와 연결되는 바깥일. 옛이야기 같은데 툭, 떨어지는 결말은 의외로 서늘했다.

 

'두자춘'은 정말 옛날 이야기다. 중국 낙양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서있는 '왕년에' 잘나갔지만 지금은 무일푼인 두자춘. 도사님을 만나서 두 번이나 황금을 파내 부자가 된다. 그리고 두번 다 삼년 안에 탕진하고 그 많던 친구들도 두번 반복해서 등을 돌린다. 그러자 돈 보다 도술, 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을까, 도사님을 붙잡고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한다. 도사는 아미산 꼭대기에 두자춘을 놓아두고 '절대 말하지 말라' 는 명을 내리고 사라진다. 그가 입을 다문다면 선인, 도사가 될 수 있을터였다. 온갖 허깨비와 허깨비와 허깨비가 나타나 위협을 해도 두자춘은 입을 다물었는데, 아, 이건 허깨비인지 진짜인지 모를 지경이 반복되고 (따져보니 삼세번의 법칙이 있다!) 최후의 도전은 역시나 부모님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흙 한 덩이'의 시어머니 스미였다면? 잠시 여러 얼굴의 모성과 아들의 효심 전형들을 저울질 해본다. 말 참는 것의 가치와 의미를 생각해 .... 보지 않아도 이야기는 재미있다, 는 결론.

 

이 단편집은 후반부로 갈 수록 인간의 바닥을 '옛이야기', 특히 신의 세계를 통해 보여주는데 '거미줄' 역시 신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려주는 동앗줄, 아니 거미줄 이야기다. 핏물 호수에서 벌을 받으며 비명 지를 힘도 없이 허부적 거리던 세상 최고의 악인. 그가 그 거미줄 이나마 붙잡을 수 있었던 건, 생전에 단 한 번의 선행, 길에서 거미를 밟지 않은 일 덕이다. 그는 그 가늘고 빛나는 거미줄을 붙잡고 영차영차 지옥에서 저 위쪽 밝은, 천상의 연못 바닥까지 기어 올라간다. 그러다가! 짠! 이 악당의 영혼, 혹은 고통을 받아내는 감각,의 구원 따위는 사실 신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신은 뭐, 눈에 띄고 살짝 불쌍하면 땅속의 금을 주거나 거미줄을 내려줄 수는 있다. 그리고 일이 틀어지더라도 그건 네 복이고, 라며 샬랄라 천상의 산책을 이어간다. 신의 눈길, 은총, 거미줄을 기다리며 목 빠지게 기다리는 인간들. 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정말 인간을 측은하게 여기는 작가네. 멋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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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1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작가에게도 천년 수도 낙양은
소설의 소재로 써먹게 되는군요, 대단하네요.

일본의 괴담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지 않
나 싶기도 하구요.

항설백물어 시리즈가 생각나네요.

유부만두 2018-07-11 07:42   좋아요 0 | URL
항설백물어... 검색해봤어요.
이런 괴담 시리즈도 있군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이 이런 옛이야기, 혹은 전설 쪽 분위기인줄 몰랐는데 읽을수록 재미가 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