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어디서든 문학이라는 작은 방이 닫혀버리면 머지않아 벽이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독서도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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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2-13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어서 근질근질 ^^

유부만두 2015-02-14 08:57   좋아요 0 | URL
맘 단단히 먹고 시작하셔야 할거에요.... 두께가 ....^^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 재직중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 사진의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의 주동자로 현진건은 검거 투옥된다. (146)

"과거를 더듬으며 한숨 쉴 일이 아니요 미래를 바라보며 팔만 벌리고 있을 것이 아니다. 손아귀에 단단히 힘을 주어 현재를 움켜쥘 것이다" 라는 그의 말대로 현진건은 리얼리즘을 자신의 작품세계로 규정했다. (146-147)

식민지 사회의 민중은 모두가 노예애 지나지 않음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오늘 운수 좋은 누군가는 동포에게 자기의 불운을 전가시키거나 결국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유예시키고 있을 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147)

채민식의 대부분의 작품에는 이광수나 김동인에게서 보이는 전근대적인 `치기`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178)

[`치숙`에서] 모든 가치는 거꾸로 반전되어 있고 선악도 뒤바뀌어 있으며, 조카의 부정적 비난은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간다. 아이러니는 희극과 비극의 미묘한 경계에 서기 마련인데,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희극적으로 그려져서 더욱 눈물겨운 비극적 아이러니라면, `치숙`은 가치가 전도된 비극적 현실이 조카의 입을 통해서 희극으로 변하는 아이러니다.

이 작품의 조카와 고모부는 서로를 투영한 타자의 `거울`을 통해서 원주민의 소외를 드러내고 있는데, 프란츠 파농은 이러한 소외와 부재를 식민지 사회의 `심인성 장애`라고 썼다. (17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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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알던 나치가 모두 잡혀간 것도 아니고,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에서 환영받은 것도 아니었다. 3년전까지만 해도 나치 이데올로기로 학생들을 교화시키던 선생들이 이제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민주주의의 축복에 대해 찬양했고, 매일같이 오스트리아를 해방시켜준 미국에 진정 어린 감사를 돌렸다. (23)

 

 

뇌스틀링거는 탐욕스럽게, 하지만 선택의 여지 없이 생필품 창고를 털었던 일과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미군들이 묵는 학교 앞에서 "츄잉껌 플리즈, 츄잉껌"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가끔씩 미군들은 아이들 속으로 껌을 딱 한 개 던졌는데, 그러면 아이들은 그 껌을 주우려고 몰려들었다. (25)

 

 

이번에는 남성을 위한 소박한 요리 모음집으로 <개 한 마리가 부엌에 왔다>라는 책이다. (45)

 

 

 

이웃한 헌책방에서 2.5실링을 내고 책을 한 권 샀다. 600쪽 짜리 책에서 200쪽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그렇게 싼 거였다. <백작부인 빌레스코프스카의 일기>라는 책으로, 어린 시절의 두 해나 붙잡고 살았다. 그 이유는 먼저 이 책은 옛 활자로 쓰여 있어서 어린 그녀로서는 전부 다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그 백작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궁리하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백작부인이 수도원에서 난폭한 승려에게 폭행당할 위험에 빠졌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책장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거의 200쪽이나 떨어져 나간 다음에 백작부인은 어떤 파리 백작의 연인이 되어있었다. 어린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틈나는 대로 백작부인이 맞딱뜨렸을지도 모를 장면과 상황들을 상상해보았다. 이 책이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책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떨어져 나가 사라진, 책에 들어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67-68)

 

 

어떤 아이가 학교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그애는 학교 부적응아가 등장하는 책을 보지 않아요. 마법사가 등장하는 책을 즐겨 읽지요. (70)

 

 

독서 능력 저하는 상상력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해요. 읽은 단어가 정확하게 머릿속에서 연상되지 않는 거죠. 그림이 언어를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게 거의 확실해요. 여가 생활에 수많은 그림들을, 특히 움직이는 화면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아주 편리한 오락의 한 방식이에요. 그리고 자주, 오랫동안 이러한 오락에 젖어들면 텍스트를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 내는 능력은 녹이 슬지요. (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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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합총서>에서는 우리나라의 전통 음식문화를 한 문장으로 대변하고 있다. "밥 먹기는 봄같이 하고, 국 먹기는 여름같이 하고, 장 먹기는 가을같이 하고, 술 마시기는 겨울같이 하라"고 했다. 밥은 따뜻하게, 국은 뜨겁게, 장은 서늘하게, 술은 차게 즐겨야 제맛이라는 것이다.
(241)

 

모든 행위가 먹는 행위에 우선할 수는 없지만 먹는 것에 견줄만한 유일한 행위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말하기다. 먹기와 말하기가 동등한 이유는 두 행위 모두 입과 혀를 거치기 때문이다. 입은 우리 몸의 외부와 내부 사이에 위치하며 통과와 중계를 위한 장소이다. 외부의 음식은 입을 통해 들어오고 내부의 말은 입을 통해 나간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도덕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입안에서 교차한다. 입이라는 장소에서 외부와 내부를 중계하는 주인은 혀다. 혀 주위에는 중계의 과정만이 아니라 전환의 과정까지 펼쳐진다. 혀는 자신이 받아들였던 것, 먹었던 것, 즐겼던 것을 언어로 다시 돌려준다.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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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분명히 그 사람들은 진실에 가까운 말을 하고서도 맞아 죽지도 않고 미치광이가 되지도 않고 살아남을지도 모르지. 그 작자들은 픽션의 틀로 사람들을 온통 기만하지. 그러나 픽션의 틀을 덮어씌우면 아무리 끔찍한 일도, 위험한 일도, 파렴치한 일도, 자신의 신변은 안전한 채로 말해버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작가의 직업을 본질적으로 취약하게 만들고 있어. 작가 자신이 아무리 절실한 진실을 말할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픽션의 형태로 무슨 일이건 말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신이 말하는 모든 진실의 독성에 대해 미리 면역이 되어 있는 거야. 그건 결국 독자한테도 전달되어서 픽션의 틀 속에서 얘기되는 내용에는 벌거벗겨진 영혼에 직접 적나라하게 파고드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깔보이게 되는 거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문장이 되어서 인쇄된 것 중에는 내가 상상하고 있는 종류의 사실 얘기란 존재하지 않지. 기껏해야 진실을 말할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포즈를 취하는 소설을 만나는 정도야.
(294)

나는 뒤뜰의 구덩이에 숨어서 아침을 맞이했을 때 똑같이 불타오르는 빨간 산딸나무의 잎을 보고, 이 분지의 지옥도의 인상을 떠올리고 신호를 받아들인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그때는 불확실했던 신호의 의미를 나는 지금 쉽사리 해석한다. 지옥도에 정착된 이 빨강의 '위무'는 가장 단적으로는, 그들 자신의 지옥을 정면에서 받아들이고 극복해가는 무서운 사람들의 위협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면서, 좀 더 어두컴컴하고 불안정하며 애매한 현실 생활을 얌전하게 살아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자기 위안을 위한 빛깔이다. (505-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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