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동화와 페로 동화 등 여러 옛이야기들의 모음집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 중 낯선 "롬펠슈틸츠헨"편을 찾아 읽었다. 


엉뚱한 거짓말로 딸 자랑을 한 아버지 때문에 소녀는 욕심 많은 왕 앞에 끌려간다. 아버지의 장담 대로 "짚을 황금실로 만드는 재주"를 증명해야 한다. 난감한 소녀가 엉엉 울자 그 앞에 키작은 남자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줄테니 뭘 줄래? 하고 묻고 소녀는 목걸이를 약속한다. 그리고 작은 남자가 만들어낸 황금실 뭉치에 목걸이를 내준다. 욕심이 생긴 왕은 더 많은 짚으로 다음 과제를 내고 이번에도 작은 남자가 소녀에게서 반지를 약속 받고 황금실을 만든다. 모든일은 삼세번, 세번째에 고비가 온다. 세번째 더 많은 짚더미를 주며 왕은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왕비가 될 것이라고 소녀에게 말한다. 그러나 소녀에겐 작은 남자와 거래할 보석이 없다. 그러자 작은 남자는 소녀에게 나중에 네가 낳을 첫아이를 달라고 한다. 급한 마음에 소녀는 약속을 하고 황금실 더미와 함께 왕비가 된다. 하지만 약속은 잊어버린다. 



빚은 사라지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왕비 앞에 그 키작고 기분나쁜 남자가 찾아와 아이를 요구한다. 왕비는 울며 호소하지만 작은 남자는 흥정이랍시고 사흘 안에 자신의 이름을 알아내면 거래를 취소하겠노라고 한다. 왕비는 부하들을 온 나라 방방 곡곡에 풀어 그 이름을 알아낸다. 다 이긴 내기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분을 못이기고 자기가 자신의 몸을 찢어(!!!!) 죽고 만다. 그리고 왕과 왕비는 잘 먹고 잘 살았다고. 


애초에 거짓말로 딸 자랑으로 자식을 곤경에 빠뜨린 아버지, 짚으로 황금을 얻을 욕심에 찬 왕, 자신을 도와준 사람과 거래에 대해 쉽게 잊어버리고 도망갈 생각만 한 소녀/왕비. 이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후환도 없이 잘 먹고 잘 산다. 하지만 감히 아름다운 소녀에게 집적댄 키작은 (못생긴) 숲속의 외톨이 남자는 황금을 만드는 기술을 갖고도 어음 회수를 못하자 자기 성질을 다스리지 못하는 바람에 죽고 만다. 만만하고 못생긴 비호감 기술자를 왕과 그 일족이 잘 뽑아먹어도 된다는 의미인가? 매우 찜찜한 옛이야기다. 


그 작은 남자, 숲속에 혼자 살며 콩콩 튀는 이상한 춤을 추고 생명 있는 어린 아이를 가져가겠다는 끔찍한 추물. 그의 이름을 알아내야 한다는 것의 의미는 뭘까. 얼마전 본 김은희 작가의 공포물 "악귀"에서도 주인공 김태리의 몸에 깃든 악귀의 생전 이름을 알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이 악귀 역시 처음에는 원하는 것을 준다. 돈,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이를 해하는 것. 악귀의 이름이 아는 건 그 정체를 아는 것이니 그 자체가 상대를 무찌를 힘이 된다. 이름을 아는 것은 이름을 지어주는 것 만큼이나 강력한 행위이다. 


이 동화집의 작은 남자, 그 서양 도깨비의 이름이 바로 롬펠슈틸츠헨(Rumpelstilzchen)이었고 이는 딸랑이 요괴, 악령, 시끄러운 도깨비 쯤의 뜻으로 poltergeist와 비슷하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퇴마의식에도 악령의 이름을 부르고 그다음 물러가라고 외친다. 이런 퇴마식이 스티븐 킹의 페어리 테일 후반부에도 벌어진다. 차마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거대 악, 그것에 맞서 그 이름을 부르고 사라지라고 외치려면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리라. 그러니까 왕비가 된 아름다운 소녀는 작은 남자가 나타나 요술을 세 번이나 부리고, 아이를 요구하며 협박할 때도 정신줄 놓지않고 맞선 것이다. 네 이름이 롬펠슈틸츠헨이렸다, 이 놈아! 이렇게 생각하면 왕비의 싸가지 없음 만큼이나 그 당당함에 감탄하게 된다. 익명의 인터넷 세상에서 필요한 용기 (더하기 뻔뻔함)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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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롬펠슈틸츠헨 그 후의 이야기 두 편
    from 책읽기의 즐거움 2023-12-09 20:46 
    제목도 살벌한 이 책은 조이스 캐럴 오츠, 셜리 잭슨, 닐 게이먼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다시 쓴 옛 이야기 후속편 모음집이다. 그리고 앤절라 카터에게 헌정되어 있다. 41편의 단편 중 두 편이 롬펠슈틸츠헨 이야기다. "로라 시티"의 작가 케빈 브록마이어가 쓴 "반쪽 룸펠슈틸츠헨의 어느 하루"는 옛 이야기의 분노의 비극적 결말에 반으로 쪼개진 한 쪽 룸펠슈틸츠헨의 그 이후 이야기다. 아침에 그는 꿈을 꾸다 깬다. 자신의 지푸라기 몸 오장 육부가 물레
 
 
건수하 2023-12-06 09: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림책과 옛이야기 공부(?)하다가 봤었던 기억이 나네요. 어떤 판본에서는 아기를 요구하지 않고 아가씨에게 아내가 되어달라고 하는데 그러면 뉘앙스가 좀 다르더라고요.. ^^;

유부만두 2023-12-06 10:45   좋아요 1 | URL
아이를 달라는 것 보다는 청혼(?)이 나아보이.... 아 이것도 무섭고 싫으네요. 대단한 마법을 부려서 널 도왔으니 니 미래(결혼이나 아이)를 내놓으란 거.

하지만 롬펠슈틸츠헨(이름도 드릅게 어렵..)이 자폭하는 결말은 (이게 스티븐 킹 소설선 두 캐릭터로 더블 출연) 너무나 희화되버리니까 오히려 측은한 맘도 좀 들고 그래요. 그러면 안되는데 말이죠. 저열하고 흉한 놈이잖아요.

그나저나 그림책과 옛이야기 공부하셨다니 그 시절 이야기 좀 나눠주세요. (안그러신다고 잡아먹으지는 않습니다만 ㅋㅋ)

건수하 2023-12-06 13:30   좋아요 1 | URL
아 그냥 지인들과 같이 발제하고 뭐 그런 거였습니다 제가 룸펠슈틸츠헨 부분을 맡았었거든요 ^^;;

레삭매냐 2023-12-06 10: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꼬맹이에게 <룸펠슈틸츠헨> 이야기를
읽어 주면서 이것이 동화인가 사회 풍
자를 빙자한 엽기 소설인가 하는 생각
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서양 동화들 살발합니다 고저.

유부만두 2023-12-06 11:14   좋아요 2 | URL
맞아요. 엄청 살벌해요.

지푸라기를 금실로 만드는 요술로 (이거 어쩐지 코인 같기도 하고요) 사람 목숨을 흥정하고요, 약속 한 번 잘못해서 끔찍한 덫에 걸리고요. 그리고 죽여도 곱게 죽이질 않더라고요. 엽기죠.

서곡 2023-12-06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 안녕하세요 룸펠슈틸츠헨 반가워서 댓글 남깁니다 저 이 캐릭터 좋아해요(!) 성명마법이란 것도 재미있고요...

유부만두 2023-12-06 18:30   좋아요 1 | URL
그쵸. 성명마법이란 것이 유럽에서 매우 보편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이 이상한 캐릭터는 비호감인데 연민도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캐릭터에요. 전 좋아하긴 어렵지만 흥미롭다 쪽으로 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