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의 죽음>이 언급된 코니 윌리스 단편집을 읽고나서 검색을 했더니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했다. (그게 2020년이었고)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소설을 나는 분명 읽었는데 정작 읽으면서는 푸아로의 느끼한 대사 말고는 모두 새로웠다. 넘치는 낭만, 차곡 차곡 쌓이는 디테일, 첫눈에 어쩐지 의심스러운 그 사람이 바로 범인이었구나 했는데 역시 사랑과 돈, 그리고 열정에 불타는 젊음이 화근이었다. 그토록 많은 것을 가지고도 더 원하는 속성이란 어쩔 수가 없다. 날 줘바요, 난 착하게 살 수 있는데.


이어서 읽은 <ABC 살인사건>은 이미 여러 식으로 변주된 낡은 옛 고적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섬세하게 짜여졌지만 어쩐지 피해자들 보다는 가해자를 향한 동정심을 강요하는 듯하다. (가해자의 목소리를 사이사이에 삽입하는 방식은 얼마전 읽은 '코믹'호러 소설에서도 보였는데 영 찜찜하다) 역시 첫 인상이 쎄한 그 사람이 범인, 진짜 '설계자'였고 그의 그 계산들이 (아, 이렇게 열정적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려는 그 마음을 어쩔거냐) 하나씩 놓치고 흘리는 조각들을 우리의 푸아로 탐정은 읽어간다. 여기서도 랜덤 혹은 겨냥된 피해자들의 사연들이 공허하다. 상류층 작가의 손으로 그려진 비상류층은 별 가치가 없다. 안됐지만 딱 그만큼이 그들의 목숨값이다.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결말의 '해설' 장면을 위해서 아끼는 작가와 푸아로에게 감탄했다.



딱 한 권만 더 읽기로 했다. 어차피 유럽 상류층 이야기가 느끼하지만 책장에 덮어둔 다른 책도 프루스트인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이번 살인 사건은 친숙한 홈즈-왓슨 구조로 전개되는데 누구의 눈으로 사건을 걸러서 볼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여러 겹의 인물 관계, 과거, 어긋나는 시간 프레임, 속다르고 겉다른 인간들과 '첨단 테크놀로지' 까지. 매우 화려한 전개와 더 화려한 푸아로의 자부심이 펼쳐진다. 더해서 역시나 놓칠 수 없는 사랑 이야기 까지. <나일강의 죽음>처럼 이 살인사건에서도 범인을 움직이는 오만과 욕망은 결국 비극적인 파국으로 (시스템을 믿지 않으시는 므슈 푸아로) 매듭지어진다. 짜라라란. 이 셋 중 단 한 권만 추천한다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입니다. 


마음이 벌렁벌렁해서 (일주일간 몇 명을 죽인거야?!) 작고 귀여운 동화책을 읽었는데 그래도 제목에는 힘을 조금 줘 봤다. 하지만 고양이가 진짜로 죽인 건 아니고, 그러니까 뭐 킬러 본성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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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06 2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한창 읽다가 이제는 시들해졌네요. ㅎㅎ

유부만두 2021-03-06 23:59   좋아요 2 | URL
그 바통을 제가 받았습니다! ^^

하나 2021-03-06 23: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날 줘바요, 난 착하게 살 수 있는데 222

유부만두 2021-03-07 00:00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줘봐요, 쫌?;;;

라로 2021-03-07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으면서 조마조마 했어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실지,,,저도 아주 좋아하거든요. 작년에 다시 읽었는데 그 생각도 나고요,,,언젠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책을 다 읽는 한 해를 목표로 갖고 있기는 한데,,,읽을 책들이 밀물처럼 밀려드니 원~~.

유부만두 2021-03-07 17:33   좋아요 0 | URL
라로님도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좋아하시는군요! ^^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고전극을 읽는 기분도 들고요, 색다른 책 읽기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어릴적엔 그저 범인 찾기와 트릭에 집중했다면 이젠 인물들 사이의 관계와 비밀에 더 관심이 가네요.

읽을 책들, 관심 작가들은 밀물처럼 밀려들어 저를 집어삼켜요. 그런데 전 계속 목이 마르다니, 이게 무슨일이래요?!?!?!

psyche 2021-03-08 0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거서 크리스티 보니 옛날 생각나네. 중고등학교 시절에 엄청 읽었었는데... ㅎㅎ 사실 나는 그때 애거서 크리스티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이모가 좋아하셔서 이모댁에 가면 책이 많았거든. 덕분에 그때 나온 크리스티 책은 거의 다 읽었던 거 같은데 그중 기억에 남는, 재미있게 읽었던 책 중 하나가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유부만두 2021-03-08 08:34   좋아요 0 | URL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다른 것들과 분위기가 다르고 특별한 분위기가 있어요. 저도 이 책이 마음에 들었어요. 애거서 크리스티는 예전 보다 요즘 다시 읽을 때 더 좋아요. 예전엔 홈즈가 더 좋았어요. 그런데 홈즈보단 푸아로 시리즈가 더 어른들 이야기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psyche 2021-03-08 08:39   좋아요 1 | URL
완전 동감! 나도 그런 생각했어. 어릴 때는 홈즈가 더 좋았거든. 이모가 특히 미스 마플 좋아하셨는데 그때는 진짜 이해가 안 되었거든. 어른이 되니 알 거 같더라고. 미스 마플 좋아

유부만두 2021-03-08 08:54   좋아요 0 | URL
앗, 미스 마플을 잊고 있었어요! 챙기러 뛰어갑니다! ㅎㅎㅎ

라로 2021-03-08 19:57   좋아요 1 | URL
저는 푸아로보다 미스 마플!!!

우리 다 비슷한 시기에 자라나서 그럴까요? 저도 홈즈를 처음 만났는데 나중에 미스 마플을 더 애정하게 되었지요!!ㅎㅎ

유부만두 2021-03-09 07:52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세대별로, 또 성장기의 나이별로 좋아하는 탐정 소설들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 아이들은 초등 때 홈즈를 별로 안 좋아해서 내심 섭섭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