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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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를 기다리며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문학동네, 201.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이 책 제목만큼 절실한 문장이 있을까 싶다. 최근 몇 년 사이 어떻게 페미니즘이 흘러왔는지는 옆눈으로 보았다 해도 알만큼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었다. 지금도 사건들의 줄잇기는 마찬가지지만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논의는 더욱 거세질 듯하다.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운동가 벨 훅스 역시도 모든 페미니스트가 주장하듯이 페미니즘은 ‘남성혐오운동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외쳐왔듯 단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라고 거듭 외친다. 벨 훅스처럼 거의 모든 페미니즘 운동가들이 페미니즘이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고 더더욱 남성을 역차별하자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 무엇에 의해서도 억압받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 위해 함께 하자는 것이라고 부르짖는데도 어찌하여 페미니즘은 자꾸 여성만을 위한, 남성을 혐오하는 운동이란 이미지로 굳어가고 있는 걸까. 더 이상의 공감도 더 이상의 연대도 필요치 않는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가 자고 일어나면 쌓여만 간다.

  벨 훅스는 자신이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늘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남성을 혐오하고 늘 화가 나 있는 ‘진짜’ 페미니스트 같지 않다고, 당신은 다른 것 같다고.”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벨 훅스와 같은 말을 들은 일이 적지 않음을 고백한다. 이쯤되면 페미니스트들에게 고정된 편견이 가득히 덧씌워져 있거나 그들 운동 방식의 전략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소위’ 페미니즘 시위에 대한 우려와 반감은 어쩌면 이 시위야말로 페미니스트에 대해 가지는 고정관념과 편견에 찬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제야 ‘진짜 페미니스트가 나타났다’고 외칠지도 모른다. 저 멀리 떨어져서 말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으로 갑자기 페미니즘 서적 또한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다.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서 흥미를 떨어뜨렸고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출판사들이 쏟아낸 책으로 인해 페미니즘이 가볍게 다뤄지고 여겨지는 것 같아 우려되기도 했다. 그래도 이만큼이나 관심도가 증가되었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확산되었으리라 했는데 그것이 아님을, 그렇지 못함을, 오히려 지금까지 있었던 관심이 좋지 못한 쪽으로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짜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껏 먼발치서 인터넷 기사를 클릭하며 가지는 감정인데 현장에, 보다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시각은 어떨까.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직접 운동을 이끄는 축에 있지 않고 그저 페미니즘 서적을 들척이고 좋은 의견에 동조하고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의견에 반대할 뿐인 일반인으로서의 내 목소리는 어쩌면 페미니즘 운동사에 전혀 가닿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건대 페미니즘은 운동가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차별과 억압받지 않고 산다는 것은 나에게도 필요한 일이기에 시선을 거둘 수는 없는 일이다.

  정말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없는가. 지금처럼 이렇게 충격적인 일이 가득한 시위의 현장을 기사로 접하면 정말로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특정한 이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니면 정말로 페미니즘 운동이 아니라 다른 세력인 것인가. 많은 이들에게 생존과 존재 자체로서의 삶이 걸린 페미니즘이 왜 희화화되는지, 왜 일베스러워졌는지가 의아할 뿐이다. 이런 형태로 페미니즘은 나아가는 것일까. 

  다른 책들에 비해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흥미로웠던 건 편하게 읽힌다는 점 이외에 그동안의 페미니즘의 논쟁, 각기 주력하여 주장하는 바가 달랐던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소개하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개되어온 페미니즘 이론과 페미니스트들의 투쟁 노선과 방법들은 직접 현장에 있지 않았다면 잘 알지 못했을 세세한 부분에서의 문제점을 벨 훅스는 잘 지적하고 있다. 다양한 페미니즘 이론의 역학 속에서 페미니즘이 변화·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겠지만 분명 그로 인한 한계가 있었고 여전히 지속되는 한계가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혜화역의 시위가 그저 페미니스트들 간의 이론과 투쟁 방법상의 차이가 있고 특정 계파의 투쟁방법이 대두되었다고 하기엔 그동안 페미니즘이 이루어낸 역사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 방식이 과연 페미니즘인가의 의문과 함께 그렇다면 왜, 그 방식이 선택되고 이루어지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왜, 한국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의 방식은 이렇게 혐오에 기반하여 달려가고 있는가.


한쪽에서는 캐럴 길리건 같은 페미니즘 사상가들이 질리지도 않고 여성이 더 다정하고 더 윤리적이라고 말했지만, 여성들이 자신보다 더 힘없는 다른 여성들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도무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여성들이 자신이 속한 정체성이라 생각하는 같은 민족이나 인종 집단에 보이는 보살핌의 윤리는, 그들이 공감할 수 없고 동질성이나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최근 시위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까페)의 정체성과 다른 이들에게 가하는 행동을 보면 도무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페미니즘, 성차별 철폐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로지 혐오만이 목소리 높다. 페미니즘이 목적이 아니라 조롱 자체가 목적이 된 듯한 생각마저도 든다. 지금의 페미니즘 운동이 흘러가는 방향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많은 이들이 지향하는 바일까. 이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이렇게 흘러가는 이유가 페미니즘을 이끌어갈 운동 세력의 리더가 부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혁명을 거치며 특정 리더가 아니라 자발적인 시민의 의식이 의견을 형성하고 주장을 높이는 형태가 여성운동에서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인가.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데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적인 페미니즘 이론이 운동의 방식이 이것을 이끌어갈 주체가 격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외면받고 비난받는 운동이 되기엔 차별의 역사는 너무나 길었다. 그리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한 살아야 할 생이 아직 너무도 많다. 그러기에 벨 훅스의 주장처럼 우리나라에도 워마드가 이끌어가는 운동이, 시위가 아니라 합리적이면서 모두에게 공감을 이끌어가는 페미니즘 운동이 확산되기를 바란다. 존경받는 페미니스트의 존재가 보고프다.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비록 대중 기반의 운동 역량은 갖추지 못했지만 그러한 방향으로 운동을 새롭게 시작하는 게 우리의 첫번째 목표다. 우리 삶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선구적인 페미니즘 이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 우리의 현재를 고심하게끔 끊임없이 생산되고 재생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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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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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蟲)전쟁

세상 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사계절, 2013.


매우 억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있다. 아저씨 혹은 아줌마라는 호칭에서 누구도 품격과 인격을 연상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아저씨와 아줌마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명사는 뻔뻔함, 능청스러움, 악착스러움 등이다. “혈연관계가 없는 남자 어른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이라든가 “아버지의 친형제를 제외한 남자를 이르는 말”과 같은 사전에 등장하는 아저씨의 뜻은 잊어야 한다. 상식적으로 사용되는 아저씨라는 단어에는 돈 자랑이나 지위 자랑질을 일삼는, 상쾌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중년 남자라는 뉘앙스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그런 단어들이 있다. 품격과 인격을 배제하기 위해 만든 단어, 충(蟲). 그래도 한때는 김치녀, 개똥녀, 된장녀 등등으로 사람임을 분명히 하는 ~녀(女), ~남(男)이 꼬박꼬박 붙었더랬는데 충성스럽게도 충(蟲)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진 지 오래되었다. 일상생활에 사람을, 행동을 벌레처럼 바라보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하루가 멀다고 인터넷을 장식하는 충(蟲)에 관한 기사는 마치 그 단어를 직접 들은 것처럼 진절머리가 난다. 그런 일들이 벌어진 이 사회를 살고 있다는 사실에, 그 일로 오가는 제2차 충(蟲)의 전쟁에.

  이 글은 일찌감치 ‘세속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진절머리를 절절하게 고민한 학자 노명우의『세상물정의 사회학』중 ‘성숙’이라는 제목 아래에 있다. 배운 괴물들의 사회라는 부제를 달고서 그려놓은 이 글이 어제, 오늘 인터넷을 달구는 ‘맘충’이란 단어 때문에 떠올려졌다. 그와 함께 주목한 것은 이 사건들이 전해지는 경로였다. 일명 태권도 사건과 신도시 오줌사건이라 불리는 두 사건 모두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이해’라는 말로 문제를 ‘지적’하고 문제를 ‘무효화’ 하려 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한 아이의 성장과 교육에 사회의 역할이 필요한 시대다. 아이를 위한 공동체의 협력과 지원이 필요하지만 비상식적 행동에 대한 정당성과 타당성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나서서 그 올바르지 않음, 타인에 대한 배려없음을 교육하는 것이 사회가 할 일일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맘충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몰상식과 배려없음을 질타하는 것이겠지만 왜 맘충만 있고 파파충은 없냐는 목소리 또한 제기된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과 마음은 없이 돌고 돌아 혐오의 감정만을 발산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두 사건 모두 관련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인터넷에 게시했다. ‘올릴 게요’ ‘신고할게요’. 다툼이 벌어졌을 때 ‘소문낼거야’와 같은 말부터 쏟아내고 써내려간 글은 당연 사건의 일부만이 게재될 뿐이다. 다툼이 일고난 뒤 답답함과 억울함으로 하소연하고 조언받기를 원하는 심정을 모르지는 않으나 지인이 아니라 익명의 사람들부터 떠올리는 일은 어느틈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걸까. 이것 또한 SNS 중독과 관련있는 인정욕구의 한 부분일까, 아니면 투쟁의 방법일까.


개인을 공적 의제로 삼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강해질수록, 방송국에 소소한 사연을 보내는 사람들은 늘어난다. 공적 세계에서 개인이 무존재가 될수록, 사람들은 집요하리만큼 사적인 개인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개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공적 세계와 개인이 과잉으로 넘치는 사적 생활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처량하게도 진자운동을 한다.


  장소와 인물만이 바뀐 비슷한 일이 매일 넘쳐나는 세상에서 각각의 사건은 개별적이지 않고 특정 군집이 되어 혐오의 카테고리에 안착한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라도 충(蟲)을 붙일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충(蟲)을 붙일 집단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면 되는 건가. 저자는 무관심은 관념적 살인 무기이며 모욕은 자기 존엄을 추구하는 개인에 대한 관념적 살인이라 했다. 그러나 모욕은 일상이 되고 사람들은 관심과 무관심이라는 무기를 기막히게 잘 휘두르는 무사가 되었다.

  세속의 풍경은 평범한 일상의 나날이란 없는 듯이 흘러가고 있다. 좋은 삶을 살아보자는 학자의 시선이 세상을 두루 살피고 점검하는 동안 과연 좋은 삶을 살 수가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너무 많은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기에 차라리 보지 말고 듣지 말자는 생각까지도 들지만 이러한 세상을 잘 보고서 이치를 잘 알아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방어술을 익힐 수 있다는 저자의 말로 다시금 세상을 본다. 삶의 세태에 대한 저자의 설명과 통찰이 너무나 적확하기에 그래도 허허로운 감정이 길게 든다. 어떤 사건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피하고 싶지만 저자의 글은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어서 계속 보고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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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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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같은 사회


이상한 정상 가족, 김희경, 동아시아, 2017.


  ”모든 출생에 대한 차별없는 지원에 중점을 두고 출산율 위주 정책에서 삶의 질 개선을 위한 방향으로 전환“한다는 정부의 저출산대책이 발표됐다. 구체적인 내용과 집행은 정책의 방향을 따른다. “모든 아동과 가족에 대한 차별없는 지원”이라는 기조 아래 비혼 출산에 대한 지원을 시작으로 점점 확대될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한 지원을 기대하면 좋은 걸까. 정치권은 선거가 끝나서인지 다른 일로 바빠서인지 내가 몰라서인지 저출산대책의 방향과 수준에 대해 딴지없이 조용한 듯하다. 이런 정책방향을 놓고 포퓰리즘, 세금낭비라 외치는 이들은 아직은 없고 실행력이 미흡하다는 지적만이 쏟아지고 있다. 이제 ‘가족’ 의미에 대한 변화를 인정하고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정책 집행의 편리성을 위해 만들어진 ‘표준’, ‘규격’이 사회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만드는 요인이다. 특히 군사정권은 획일화된 시스템으로 일군 정책을 최고의 문화와 가치인 것처럼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처럼 고정·확장시켜 따르도록 강요했다. 자세히 알아보면 생각보다 많은 규율이 모두, 그 시절에 한사람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가족주의’가치·이데올로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한국식 가족주의의 토대가 어떻게, 언제 ‘정책방향’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였는지를 알려준다.


전근대사회에서 가족주의가 지배주의적이었던 건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한국 사회의 특이한 점은 흔히들 가족주의가 약해지기 마련인 근대화 과정에서 가족주의가 더 강력해졌다는 점이다. 근대화 과정 내내 국가가 ‘선 성장, 후 분배’의 논리하에 거의 모든 사회 문제를 가족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가, 정권을 위해 ‘가족이데올로기’가 펼쳐졌고 국민들은 신들린 듯이 그것을 따랐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불편하고 부당하게 타인을 억압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때부터 모든 문제를 가족이 책임지고 희생하는 것을 수용하고 신화처럼 퍼뜨리면서 국가에서 사회문제를 책임지고 복지를 확대하는 필요성을 불편하고 부당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의 근원에 이처럼 특정 정권에 의해 세뇌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근대화시키기에 약화되는 가족주의가 한국에서 강력해진 바탕에 국가가 개입되어 있던 시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가족에 관해서는 다시 근대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인가.

  ‘가족이데올로기’는 가족의 부정적인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 왔다. 특히 아내와 아이에 대해 ‘폭력’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인식을 비롯해 비혼·재혼·한부모·다문화 가정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 여성에게 부과되는 출산·양육·돌봄에 대한 과도한 책임, 국가주도로 이루어진 해외입양 등이 한국식 가족주의가 양산하고 있는 실태다. 나아가 한국식 가족주의가 결과적으로 양극화를 가중시키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회정책이 가족 단위로 설계되는 방식이 지속되면 가족을 형성치 못한 개인, 가족에게서 충실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개인에게는 사회가 또다시 불이익을 가하는 셈이 된다. 또한 소득보장, 교육, 돌봄의 양과 질 등이 가족에게 의존적일 경우 계층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질이 달라지므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양질의 교육과 돌봄 서비스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가족에게 주어진 자유선택이란 곧 개별경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책은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고 흔히들 ‘정상’이라 규정짓는 가족에게만 제도적인 혜택을 부여해왔다. 존재하는 모든 가족형태를 인정하는 정책방향에 지속적이고 굳건하게 굳어져 온 편견이 소멸될까. 저자는 ‘가족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도 제시한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저자는 ‘개인적 삶의 독립성을 보장하되 개인 삶의 질은 집단적 책임에 달려 있다’는 스웨덴의 예를 자주 들고 있다. 부모 체벌금지법이나 스웨덴의 보편적 공공보육방법, 육아상담소를 중심으로 한 부모교육 등 스웨덴의 전반적 복지정책에 대해 인상깊게 서술한다.

 

스웨덴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 찾을 때 저출산을 비롯하여 우리가 겪는 위기를 해소할 길이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거꾸로다. 삶은 집단주의적이고 해법은 개인주의적이다. 개인의 개별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 온갖 배타적 관계에 둘러싸여 집단주의적으로 살아가면서 육아, 교육, 주거 등은 다 각자 알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


  ‘내 가족일이니 관여치 말라’는 인식속에서 고준희양 사건과 같은 아동학대·살인이 지속되었고 아내에 대한 폭력을 넘어서서 ‘내 여친’을 들먹이며 데이트 폭력 또한 확산되고 있다. 이 폭력의 근원에 아이와 여성을 소유물로 보는 가부장제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 존재한다. 우스운 것은 이러한 가족주의는 가족내에서만이 아니라 회사와 사회에서도 확산되는데 회사는 늘 ‘가족처럼’을 강조하며 사원들을 부림으로써 이익을 취득한다. 언론에 대고 변명인지 인식하지 못해서인지 들먹이는 각종 사장·대표·회장의 말은 “가족처럼 여겨서”이다. 가족처럼 여겨서 착취하고 때리고 막막하고 성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렇듯 한국식 가족주의는 힘의 논리에, 입맛에 맞게 그 의미가 달라진 채 진행되어 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에 반대하는 개인의 인권의식이지 남의 아이도 내 자식처럼 돌보는 엄마의 눈, 전 사회의 ‘확대가족화‘가 아니다.


  저자는 촛불혁명을 거쳐 변화된 의식이 차별없이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를 형성하는데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여전히 배타적이고 편견과 차별은 이루어지고 있다. 의식은 양심에 기대어 변화하지 않고 욕망과 이익이 양심을 덮기도 한다. 일련의 사안들에 대해 근거없는 가짜뉴스들이 횡행하며 합리적인 판단을 흐리게 한다면, 편견과 차별을 부추기며 개인의 이익을 자극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 가족주의를 벗어나는 일도 힘겹지만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가 모두에게 어느 정도 합의된 수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막연하게 느껴진다. 저자의 기대만큼, 정말로 기대해도 좋은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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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지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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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그리고 편


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저, 민음사, 2014.


  2018년 6월 22일자 중앙일보는 [강남엔 112개, 도봉엔 1개···한국점령 스타벅스의 비밀]이란 기사를 실었다. 소위 ‘문화를 판다’는 스타벅스의 전략이 한국시장에 ‘먹히며’ 승승장구하며 영업이익 증가는 물론 신규 매장 또한 줄을 있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서울의 스타벅스 매장수가 미국 맨해튼을 포함한 뉴욕시 5개구 전체 매장수보다 100개가 많다고 한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스타벅스가 파는 문화라는 게 ‘소비’에 초점 맞춰진 자본주의의 문화 그 이상의 특별한 게 있는가 생각되지만, 한정판 스타벅스 아이템을 사기 위해 밤새 줄짓고 스타벅스 매장만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보지 못하는 스타벅스의 ‘매력’이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적지 않게 스타벅스 매장을 이용했는데 그것은 언제나 ‘눈에 잘 띄었기에’ 그랬다. 어쨌든, 이 기사는 편의점의 출발지인 미국과 최대 발흥지라는 일본을 제치고 인구 대비 편의점이 가장 많은 나라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완전한 스타벅스 공화국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편의점 사회학』에서 보는 모습과 닮았다.

  전상인 교수는 『편의점 사회학』에서 우리나라에 편의점이 성행하는 현상에 관해 설명했다. 놀랍게도 편의점은 울릉도, 백령도, 마라도, 금강산, 개성공단, 구치소에도 입점되었고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것 이상의 영역을 확보해가고 있다. 각종 공과금 수납 서비스, 민원서류 발급 등의 공공서비스 이외에도 아동 안전 지킴이와 같은 치안 영역이나 독거 노인 보호・관리라는 사회 복지 부문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이처럼 편의점이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것 이상의 기능을 확장하려는 이유는 뭘까. 

  저자는 일상에서 편의점을 편리하게, 부담없이, 시시때때로 이용하는 상황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무엇을 사고, 왜 사는가. 저자는 “오늘날 우리는 편의점에 의해 ‘소비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지고 길들여지는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필요에 의해서 편의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편의점에 의해서 필요가 생기는 논리 구조”이며 편의점은 소비는 “무언가 고상한 행위를 하고 있다”라는 문화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도록 만드는 영업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편의점에서는 점원과 손님의 물건 거래 이외에 인간적인 교류는 없다. 하지만 이 기계적인 무관심이 도시적 심성에 부합하는데 일명 ‘무관심의 배려’라고 표현한다. 편의점이 가지는 편리성, 깨끗함의 속성에 특별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다양한 상품을 구비하고 있는 편의점이긴 하지만 ‘푸드몰’인듯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음식 판매가 증가하고 있다. 나라 전체가 ‘먹방’ 프로그램이 대세이기도 하지만 ‘편의점 푸드점화’ 현상은 사회 양극화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88만원 세대의 밥집이 편의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경제적 약자들이 편의점 이용률이 증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편의점은 눈에 띄게 띄지 않게 ‘을’을 낳는 공간이다. 알바생의 일터로 자리잡아 열악한 임금노동의 ‘을’이 되게끔 하고, 가맹점주는 본사의 횡포를 감내하는 ‘을’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렇다면 편의점을 애용하는 소비자는 ‘갑’인가. 편의점 계산기는 상품 바코드를 찍은 뒤 ‘객층키’를 누른다고 한다. 이것은 손님의 계층을 확인하는 것으로 손님이 연령과 성별에 따라 구매하는 상품에 대한 정보가 입력된다고 한다. 자신도 모르게 편의점에서는 개인 정보가 수집당하고 있는 것이다. 익히 알다시피 점유율 빅3 편의점 본사는 대기업이다. 결국 편의점을 움직이는 힘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 혹은 신자유주의다. 앞서 지적했듯 ‘소비당하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소비가 조작되거나 유도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이쯤 되면 우리는 ‘편의점 사회학’의 또 다른 임무를 각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편의점 스스로 주장하는 ‘편의성’의 의미 혹은 ‘편리성’의 본질을 묻는 일이다. 편의점이 사람들 소비주의 사회에 길들이는 데 편리하고, 편의점이 사람들을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시키는 데 편리하며, 편의점이 신자유주의 유목화 시대에 사람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 편리하고, 사회 양극화에도 불구하고 편의점이 사람들에게 일상의 행복을 제공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데 편리하다면, 이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편의이고, 무엇을 위한 편리인가? 편의점의 ‘불편한 진실’은 이제 더 이상 모르는 척하거나 감출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첨단 화두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편의점을 사용할 때면 이런 생각은 잊어먹는다. 편리함에 취할 뿐. 사건이 터진 공간으로의 편의점이 나오면 그제야 불편한 편의점을 인식한다. 스타벅스도 마찬가지다. 스타벅스에 대한 수많은 논란이 있다 한들 언제나 빛나는 스타벅스일 뿐이다.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확장되는 편의점의 ‘노력’을 편리로 수긍했지만 이 책으로 생각해보지 못한 편의점의 역기능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였다. 편의점도 스타벅스도 이용하지만 뭔지 모르게 찜찜함을 달고 있는 것, 이것이 저자가 지적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편의점’이 가리키는 사회의 모습이 슬프게 흘러가는 문화가 되지 않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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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솔로사회 - 2035년 인구 절반이 솔로가 된다
아라카와 가즈히사 지음, 조승미 옮김 / 마일스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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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마케팅

초솔로사회-2035년 인구 절반이 솔로가 된다, 아라카와 가즈히사, 2018.


  미혼율이 증가하고 전세계적으로 솔로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일본의 칼럼리스트 아라카와 가즈히사는 2035년이면 인구의 절반이 솔로가 되는 사회가 도래한다며 이에 대해 이해하고 대비할 것을 《초솔로사회》를 통해 이야기한다. 이 책의 분류가 ‘경제’로 되어 있음을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후반부를 읽어가며 왜 경제에 방점을 두었는지 알았다.

  솔로 사회란 미혼, 비혼이 증가하는 사회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결혼을 했어도 솔로가 되는 사회다. 이혼이 증가하고 무자녀 가정을 선택하는 기혼자들도 증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령화 시대 남성과 여성의 서로 다른 평균 수명은 필연적으로 솔로가 되는 사회를 만들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저자는 초솔로사회란 “‘혼자가 될 가능성’이 특례가 아니라 범례가 된 사회”라 칭한다.

  저자는 일본의 빠른 솔로사회화를 다양한 통계를 활용해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통계를 통해 미혼과 비혼이 증가하는 이유와 오래도록 지배되고 있는 결혼규범이 변화하는 사회에 어떻게 작용되고 있는지를 분석했다. 결론은 일본사회는 피할 수 없는 초솔로사회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 ‘솔로로 살아갈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에 저자는 솔로의 소비 형태에 주목했다. 솔로사회, 1인 가구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소비형태와 가치관을 지닌다. 저자의 분석에 의하면 솔로의 소비는 ‘물건의 소유를 중시하는 소유가치에서 경험을 중시하는 체험가치를 추구’하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른바 ‘에모이’소비라 불리는 형태로 한번 가치를 인정한 것에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쓰는 것이다. 그러니 솔로들을 위한 마케팅을 하려면 ‘에모이’ 소비에 중점을 두고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소비시장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솔로는 변화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저자는 정신적인 자립인 ‘솔로로 살아갈 힘’을 키워야 한다고 얘기한다.


솔로로 살아갈 힘이란 물리적으로 혼자가 됐을 때에도 고립감을 느끼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려면 한가지 사물이나 한 사람에게만 의존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타인, 사회와 폭넓게 연결되고, 연결성을 유지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즉 솔로로 살아갈 힘이란 기존의 직장, 가족, 지역뿐만 아니라 다양한 커뮤니티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힘이기도 하다.

  

  솔로사회라고 해서 개개인의 생활만 중시하는 고립된 형태일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물론 어느 정도 지역사회간의 관계성은 약화되기도 할 테지만 또다른 형태의 커뮤니티는 증가하게 된다. 단,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비혼이든 어느 시점에는 분명 솔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홀로’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관계망을 구축하며 지나치게 타인에게 의존적이지 않도록 하는 힘을 길러 초솔로사회에 대비하자는 것, 이것이 저자의 주요 메시지다.

  이러한 메시지를 만들기 위해 저자가 분석한 일본사회의 특성과 결혼규범에 관한 저자의 견해가 재미있다. 결혼하지 않은 이들을 일종의 실패에 가까운 자로 여기는 것, 결혼이 인생 최대의 성공이며 정상인 것처럼 여기며 미혼자들을 향해 간섭하는 행동들을 보고 있으면 ‘종교 강요’같다고.


결혼이란 건 어떤 의미에서 모종의 종교에 가까워졌다. 미혼자에게 “결혼하라”고 참견하는 게 종교에서 “신을 믿어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나뿐일까. 결혼을 권유하는 기혼자들은 ‘결혼교’ 선교사나 전도사라 할 수 있다.

 애초에 남이 결혼을 하든 말든 내버려두면 좋을 것을, 이런 결혼교도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한다. 자신의 믿음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불쌍하니 구제해줘야 한다는 마음이 작동된다. 기혼 의원이 “부모의 심정으로 결혼하라고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런 속마음이 바로 느껴진다.


  초솔로사회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결혼하라’ ‘아이를 낳아라’가 대비책이 되는 시대는 정말로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통계를 통해 저자가 분석하듯 기혼자도 필연적으로 솔로가 되는 시간이 온다는 것을 그저 결혼하지 않음에 따른 ‘문제’로 보고 있으면 어떤 대안이 나올 수 있을까. 그렇다고 발빠르게 초솔로사회의 소비 마케팅 전략을 부각하는 저자의 견해도 감탄스럽진 않다. 기업체에서 솔로활동을 하는 남성 연구 프로젝트팀에서 광고·홍보 일을 한다고 하니 저자의 견해가 기승전 왜 소비로 흘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그것이 트렌드일 수 있겠지만 특정한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에 의해 ‘트렌드화 되어버린 삶’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초솔로사회에 자본주의의 마케팅에 끌려가지 않는 ‘솔로의 삶’을 위한 기술이 필요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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