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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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蟲)전쟁

세상 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사계절, 2013.


매우 억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있다. 아저씨 혹은 아줌마라는 호칭에서 누구도 품격과 인격을 연상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아저씨와 아줌마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명사는 뻔뻔함, 능청스러움, 악착스러움 등이다. “혈연관계가 없는 남자 어른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이라든가 “아버지의 친형제를 제외한 남자를 이르는 말”과 같은 사전에 등장하는 아저씨의 뜻은 잊어야 한다. 상식적으로 사용되는 아저씨라는 단어에는 돈 자랑이나 지위 자랑질을 일삼는, 상쾌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중년 남자라는 뉘앙스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그런 단어들이 있다. 품격과 인격을 배제하기 위해 만든 단어, 충(蟲). 그래도 한때는 김치녀, 개똥녀, 된장녀 등등으로 사람임을 분명히 하는 ~녀(女), ~남(男)이 꼬박꼬박 붙었더랬는데 충성스럽게도 충(蟲)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진 지 오래되었다. 일상생활에 사람을, 행동을 벌레처럼 바라보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하루가 멀다고 인터넷을 장식하는 충(蟲)에 관한 기사는 마치 그 단어를 직접 들은 것처럼 진절머리가 난다. 그런 일들이 벌어진 이 사회를 살고 있다는 사실에, 그 일로 오가는 제2차 충(蟲)의 전쟁에.

  이 글은 일찌감치 ‘세속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진절머리를 절절하게 고민한 학자 노명우의『세상물정의 사회학』중 ‘성숙’이라는 제목 아래에 있다. 배운 괴물들의 사회라는 부제를 달고서 그려놓은 이 글이 어제, 오늘 인터넷을 달구는 ‘맘충’이란 단어 때문에 떠올려졌다. 그와 함께 주목한 것은 이 사건들이 전해지는 경로였다. 일명 태권도 사건과 신도시 오줌사건이라 불리는 두 사건 모두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이해’라는 말로 문제를 ‘지적’하고 문제를 ‘무효화’ 하려 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한 아이의 성장과 교육에 사회의 역할이 필요한 시대다. 아이를 위한 공동체의 협력과 지원이 필요하지만 비상식적 행동에 대한 정당성과 타당성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나서서 그 올바르지 않음, 타인에 대한 배려없음을 교육하는 것이 사회가 할 일일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맘충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몰상식과 배려없음을 질타하는 것이겠지만 왜 맘충만 있고 파파충은 없냐는 목소리 또한 제기된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과 마음은 없이 돌고 돌아 혐오의 감정만을 발산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두 사건 모두 관련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인터넷에 게시했다. ‘올릴 게요’ ‘신고할게요’. 다툼이 벌어졌을 때 ‘소문낼거야’와 같은 말부터 쏟아내고 써내려간 글은 당연 사건의 일부만이 게재될 뿐이다. 다툼이 일고난 뒤 답답함과 억울함으로 하소연하고 조언받기를 원하는 심정을 모르지는 않으나 지인이 아니라 익명의 사람들부터 떠올리는 일은 어느틈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걸까. 이것 또한 SNS 중독과 관련있는 인정욕구의 한 부분일까, 아니면 투쟁의 방법일까.


개인을 공적 의제로 삼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강해질수록, 방송국에 소소한 사연을 보내는 사람들은 늘어난다. 공적 세계에서 개인이 무존재가 될수록, 사람들은 집요하리만큼 사적인 개인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개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공적 세계와 개인이 과잉으로 넘치는 사적 생활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처량하게도 진자운동을 한다.


  장소와 인물만이 바뀐 비슷한 일이 매일 넘쳐나는 세상에서 각각의 사건은 개별적이지 않고 특정 군집이 되어 혐오의 카테고리에 안착한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라도 충(蟲)을 붙일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충(蟲)을 붙일 집단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면 되는 건가. 저자는 무관심은 관념적 살인 무기이며 모욕은 자기 존엄을 추구하는 개인에 대한 관념적 살인이라 했다. 그러나 모욕은 일상이 되고 사람들은 관심과 무관심이라는 무기를 기막히게 잘 휘두르는 무사가 되었다.

  세속의 풍경은 평범한 일상의 나날이란 없는 듯이 흘러가고 있다. 좋은 삶을 살아보자는 학자의 시선이 세상을 두루 살피고 점검하는 동안 과연 좋은 삶을 살 수가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너무 많은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기에 차라리 보지 말고 듣지 말자는 생각까지도 들지만 이러한 세상을 잘 보고서 이치를 잘 알아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방어술을 익힐 수 있다는 저자의 말로 다시금 세상을 본다. 삶의 세태에 대한 저자의 설명과 통찰이 너무나 적확하기에 그래도 허허로운 감정이 길게 든다. 어떤 사건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피하고 싶지만 저자의 글은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어서 계속 보고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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