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 아직 행복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곰돌이 푸 시리즈
곰돌이 푸 원작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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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우~잔소리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아직 행복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어린 시절의 동화, 만화를 다시 보는 일은 옛 기억이 떠올라서, 그때의 감정에 젖고 싶어서일지 모른다. 곰돌이 푸에 관한 관심은 그 연장선이었을 거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책이었지만, 생각했던 것에 미치지 못해서 ‘멈춤’보다는 주루룩 책장이 넘어간 책. 다만, 곰돌이 푸와 친구들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위로받았다. 그림책마냥 그림들이 좋았다.

  하필이면 이 책을 읽기 전 『긍정의 배신』을 읽은 것이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모르긴 해도 그럴 것이다. 게다가 긍정적이기보다는 차라리 부정적인 편이니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는 곰돌이 푸와 만나 대화를 한다면 우리의 대화는 ……이 길어질 것이다. 그래도 한번쯤은 곰돌이 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공감하기도 하겠고 또 때로는 딴지를 걸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스토리가 있지 않았다. 그냥 곰돌이 푸의 그림을 배경으로 어쩌면 익히 아는 에피그램을 시화전처럼 담았다. 그렇기에 왜 곰돌이 푸가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고 페이지마다 담긴 문구들은 그냥 보기에 좋은 말 정도로 여겨졌다. 어쨌든 이런 문구들은 마음에 확 와닿아 실천해 나가면 좋은 것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면 ‘잔소리’와 다를 리 없는 것 아닌가. 나이를 먹어서만은 아니겠지만 좋은 말도 쇠귀에 경읽기와 같음을 오래도록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아, 하며 감탄하게 되는 경구들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앞에 한 말들에 대해 다른 문구가 나와 앞의 말을 반박하는 형태가 된다. 매일 행복하게 살기 위해 그런 자세를 견지하기 위한 좋은 생각들을 일러주는 방법이라도 상황이 늘 같지 않을 터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봐야 할까. 그러나 여기, 상황은 주어지지 않았으니 인생은 이런 건가 싶어진다. 언제나 갈등이 존재하고 상반된 견해가 존재하고 있는. 어쩌면 절대적으로 딱 들어맞는 문구란 없는 것인지도.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태도를 설정하는 힘이 굳건하다면 흔들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아서인지 마냥 좋게 말하는 이 메시지에서 웃음이 난다. 아니, 어릴 때였다면 좋았으려나. 나이듦은 온갖 좋은 말에도 딴지걸고 싶은 건지, 그렇지 못한 생에 대해 한탄하고 싶은 건지, 곰돌이 푸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지 못해 미안해지기까지 하다.

  전체적으로 행복을 위해서 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메시지가 들린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의견과 타인의 상황에 귀기울이고 받아들이라는 반복된 메시지를 보낸다. 그렇지. 세상살이는 타인과의 관계맺음에서 오는 경쟁과 갈등과 어울림이니까.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말 행복한 일은 매일 있는가라는 물음보다도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야 하나, 그러니까 하루를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가 싶다. 그러니까 내 스스로 생각하는 ‘행복’이란 기준이 무엇이든 좀더 오바스럽게 ‘행복’거리를 만들고 강박적으로 행복하다 생각하면, 정말로 그 하루는 행복한 것인가 싶은.

  곰돌이 푸는 내게 긍정을 심어주고 더 좋은 하루를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텐데 그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그냥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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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미술관 - 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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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사회


불편한 미술관-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창비, 2018-01-08.


  오늘 하루도 인터넷 포털 실시간 검색어와 상위에 랭크되는 기사는 온통 부정적인 내용 일색이다. 몰카 유출 사건이 세 건이나 되고 성폭력과 폭력과 살인은 빠짐없이 일어나고 있는데다 폭력과 살인의 이유는 너무나 어이없어서 할말을 잊게 한다. 더구나 코미디를 넘어선 짜증나는 정치권 의원, 경쟁이라도 벌이듯 다양한 갑질 레파토리를 내보내는 재력가들의 기사가 체한듯 속을 답답하게 한다. 그 와중에 체증이 내려갈 듯 긍정적인 기사 하나가 눈에 띈다. ‘배려’다.

  대통령의 배려. 업무를 위한 이동임에도 교통통제로 출퇴근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려 야간 헬기 이동을 했다는 기사다. 벌써 대통령 선거를 한지 1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정권으로부터 ‘시민들을 위한 배려’로 정권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을 본 적이 있었던가. 무엇보다 이런 일화를 종종 접했기에 일회성이 아니라 진정성과 지속성이 있음을 믿게 된다. 그동안 도넘은 ‘권위주의’에 매몰되었던 권력자들로 인해 국민이 존중받고 배려받아야 할 존재라는 당연함이 무너진 세상에서 살았다. 대통령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배려’라는 메시지가 얼마나 필요했는지, 필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착하다거나 나쁘다거나 흑백논리를 들이대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이 정답이다. 요즘 우리 주위에서 마주치는 인권의 문제는 선과 악의 대립보다 ‘배려하는 생활’ 대 ‘무신경한 태도’라는 구도로 보아야 할 때가 많다. 어떤 의미에서는 앎과 모름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혐오표현의 경우가 그러한데, 어떤 말이 상처를 주는지 미리 알면 가해자가 되지 않지만 잘 모르고 있다가는 가해자가 되기 십상이다.


  『불편한 미술관』은 그림을 통해 보는 ‘인권’이야기다. 저자의 말처럼 인권에 대한 문제는 배려하지 않음에서 일어난다. 물론 선악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볼 수 없다. 하지만 절대 악이 아니라 무신경함으로 모름으로 인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면 정말 심각하지 않은가. 작가는 이것이야말로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알아야 하지만 간과하는 기본적인 인권과 명확하게 답하기 어려운 인권 문제를 그림으로 풀어가고 있어서 이미지에 힘입어 강렬하게 다가온다. 미술책에서 본 고대 그리스의 그림과 조각들,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그림을 넘나들며 시대를 뛰어넘어 여성, 장애인, 인종, 성소수자, 이주민, 빈곤인 차별에 관해 이야기하고 표현과 신앙의 자유에 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지나친 미화 역시 일종의 차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것이다. 타히티 섬에서 신비로운 원주민의 생활을 강렬하게 그린 화가로 평가받는 고갱, 그는 식민지 여성을 대상화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같은 화가들에게도 욕을 먹었다 한다. 고갱처럼 그림 속에서 여성, 장애인, 노인, 흑인 등은 늘 과도하게 희화화하거나 미화되었다. 같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타자화, 대상화되었다. 고통받는 이들의 상황을 즐기며 간음의 시선으로 여성을 보는 그림들. 이런 시선들이 고착화되어 점점 ‘혐오’로 번져간다. 그런 시선을 두는 것을 당연시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 인생의 세 단계를 그리면 어떻게 될까. 친구가 이렇게 농담을 했다. “할아버지는 ‘태극기집회’, 아버지는 ‘깨시민’, 아들은 ‘일베’.” 섬뜩한 느낌이 들어 나는 웃지 못했다. 정치적 지향의 문제가 아니다. 세대 사이 적대감이 문제다. 아들이 일베를 하고 할아버지가 태극기집회를 나가는 이유는 어쩌면 아버지가 깨시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너무 싫은 나머지, 서로가 더 싫어할 일만 골라서 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나도 이 말에서 끔찍함을 느꼈다. 하지만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우리 사회에 가족들 간에도 ‘배려’가 무너지고 있는 사실은 경쟁사회의 교육이 만든 비극이다. 차별을 당연하게 가르친 결과다. 같은 단지임에도 임대 아파트 주민은 놀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거나 적은 평수,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가르치는 어른들이 ‘배려’라고 가르칠까. 배려를 몸소 보여주었을까. 본 적 없는 ‘배려’를 통해 우리가 배울 것은 없다. 그러니 새삼 작은 ‘배려’ 하나하나가 주는 놀라움이 크다.

  난무하는 불편한 기사가 많은데 이제는 하다하다 그림을 보면서까지 불편해 해야 하느냐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길러지는 ‘시선’을 통해 우리는 불편함을 불편하지 않음으로 인식할 것이다. 제 권리만 주장하며 타인의 권리는 간과하는 이기심은 그렇게 길러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세상이 만든 비극이다. 이제 우리는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은가. 배려가 난무하는 세상이라 끔찍한 기사가 나올 틈이 없는 세상을 보고프다면 익숙하게, 뿌리박힌 타인에 대한 ‘타자화’의 시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사사건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트집’이기도 하지만 인권에 관한한 예민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언제나 작은 불편함이 큰 변화의 시작이었다.” 무엇이 불편함인지 느끼며 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한 ‘배려의 사회’가 되기를 불편한 미술관에 들렀다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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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술연구소 - 생활인을 위한 자유의 기술
제현주.금정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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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드기는 기술들

일상기술연구소-생활인을 위한 자유의 기술, 제현주·금정연, 어크로스, 2017-05-17.


  언제부터 일상이 흐트러졌는지 모르겠다. 일상의 게으름이 규칙적으로 안착되는 것도 참으로 끈질기다. 균열은 한번인데 파동은 징하다. 그렇기에 때때로 일상을 ‘잡아놓고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같다. 물론 꾸준히 지켜지지 않을 것들이다. 현안에 매몰되어 하려고 하는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돌려놓았지만 어쩔 수 없는 찝찝함에 마치 새로운 결심이라도 하는 양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맞이한 것인 양 하루하루를 계획적으로 사는 일에 대해 고민한다. 어쩌면 이런 반복은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련다와 나는 그렇게 못 살겠다는 것을 더욱 확고하게 굳혀 촘촘한 시간을 쓰려는 나를 해방시키려는 진득한 노력의 과정일 것이다. 맘과는 다른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며 방어막을 형성하는 모습은 아닐까.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일정한 삶의 양식이 있잖아요. 그런 사회에서 내가 스스로 생각한 것을 실천하고 유지하면서 살려면 스스로 생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일상은 흐트러졌고 일은 미뤄놓았고 그렇기에 일은 쌓였고 난관을 파헤치기 위해서 규칙과 정리라는 단어를 일부러 끌어다 놓는다. 그래서 굳이 ‘일상기술'을 집어 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사회가 강요하는 일정한 삶의 양식을 잘 살고 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하면서 그것대로 살기 싫어 발광하는 것일 게다.

  돈을 주고 배우라고 해도 배우지 않을 ‘기술’을 기우적거리며 관심있는 척했는데 이 책은 방학 생활계획표처럼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형성시키는 기술에 관한 책은 아니었다. 미래를 생각하면 답이 보이지 않고 불안하기에 일과 삶에 대해 가깝게 초점을 맞추어 하루를, 미래를 살기 위한 방편을 얘기한다. 오늘 하루를 잘 보내려 하다 보면 내일을, 한주를, 한달을, 점점 멀리까지도 잘 살아갈 힘이 생길 거라는 것이 좋은 일상을 만드는 구체적인 기술이라는 생각으로 이 책은 기획되었다.

  몸은 따라 주지 않지만 마음속에 한번쯤은 저장해 놓은 삶의 방식을 몸으로 행하고 있는 이들의 일상을 얘기한다. 각각의 이야기에 딱 맞는 사람이 돈관리, 일벌이기, 배우기, 운동하기, 독립하기, 함께 살기 등등에 자신의 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큰 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어떤 면에선 따라하기엔 너무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여러 기술 중에서 “함께 살기의 기술”에 눈이 갔다. 셰어하우스처럼 공동주거생활을 하지만 공간나눔만이 아니라 경제와 생활까지도 공유하는 함께 살기의 유용성에 혹하기도 했다. “느슨한 관계”. 느슨한 공동체적 삶은 이상적인 환상인지 실천가능한 대안인지가 궁금해진다. 같은 취미나 신념을 공유하는 이들과 적당한 거리에서 관계맺고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 필수적인 개인적인 공간에 관한 욕망이 어떻게 조절될지는 겪어봐야 아는 것이니까. 


일에는 자아를 채워주는 일과 통장을 채워주는 일이 있다는 거예요. 자아를 채워주는 일은 페이가 좀 적어도 어떻게든 조건을 맞춰서 웬만하면 하고요. 통장을 채워주는 일인데 클라이언트가 딱 봐도 까다로울 것 같고 일정도 촉박하다 싶으면, 페이를 많이 요구해서 협상이 되면 그 일을 수락하죠.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그 두 개를 동시에 할 때인 것 같아요.


  맞다. 일은 자아와 통장 모두를 채워줘야 만족된다. 이 책은 한편으론 어떻게 될지 모를 ‘직장인의 삶’에 대비하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도 같다. 삶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경제적인 면과 추구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삶을 위해 경제적인 면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가 다양한 기술을 전수하는 사람들의 기본 전제로 깔려있다. 한편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이 직장인이기보다는 프리랜서 혹은 자영업자들이라는 점에서도 직장인이 아닌 삶을 준비하기 위한 기술책인 것도 같다. 왜 이토록 ‘직장인’ 아닌 삶을 원하는가 생각하면서 씁쓸하다. 취업난으로 직장인이 되지 못해 힘겨워하면서 직장인이 되어서는 만족하지 못하고 충족되지 못한 욕구에 힘겨워한다.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선택한 이들의 결과물을 사람들은 궁금해하고 그 방법들을 알고자 한다. 소소하게 준비해야 할 것은 많다. 돈관리 방법도 알아야 하고 손기술을 익히는 것도 더 많은 것들을 배워나가야 하기도 하고 생각들을 끌어모아야 한다. 이 어렵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한 사람들은 “꼬드기고” 이런 일들이 궁금한 이들은 “또 기꺼이 꼬드김을 당하려” 한다.

  책을 보다 보면 기술을 터득한 이들의 삶은 모두 좋아 보이고 내게는 어떤 기술이 있나 두리번거리게 된다. 사는 일이란 늘 이렇게 남이 하는 일엔 끌리면서 내가 하는 일은 비루해 보이나 싶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들이 꼬드긴 기술들에 쉬이 꼬드김 당하지 않으려면 내 삶의 방식을 잘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내 삶의 태도와 취향을 잘 알아야 얇은 귀가 벌인 일로 실패하지 않는 확고한 내 삶의 완성을 이루어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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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다빈치 art 18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신성림 옮김 / 다빈치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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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보는 시선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J.M.G. 르 클레지오 저, 다빈치, 2008.


  프리다 칼로의 바비인형이 제작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칼로의 인형은 칼로가 입었던 옷을 입고 칼로의 상징인 눈썹을 하고 닮은 듯 아닌듯한 자태로 서 있다.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미국 완구회사가 제작했다는데 현재는 가족들의 초상권 제기로 판매금지 상태라고 한다. 가족이라는 얘기에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자녀를 먼저 생각했다. 그들에게 자녀는 없고 그들의 부모도 형제들도 사망했을 테니까. 기사엔 칼로의 조카딸과 가족이 초상권을 독점 소유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칼로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영감을 불어넣는 여성’으로 선택되어 자신을 닮은 바비인형의 탄생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초상권 제기로 인해 판매 금지가 되었다는 한국 기사엔 ‘여류 화가’라고 강조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여성을 억압한 관습에 저항한 페미니스트라 소개하면서 ‘여류 화가’임을 절대 놓치지 않는 기사를 보면서 칼로는 뭐라고 말했을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클레지오는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기술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지만 무게중심은 프리다 칼로 쪽으로 기운다. 프리디 칼로의 전생애를 중심으로 한다면 리베라는 연인이자 남편으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그 영향력은 무시못할 만큼이긴 하다. 화가로서 프리다 칼로의 그림도 책속에 나타나는데 그림 때문에라도 프리다 칼로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프리다가 자화상을 주로 그렸기 때문이다. 화가로서는 칼로보다는 디에고의 활동이 방대하고 ‘화가’로서의 명성이 큰 것 같다.

  반면에 프리다 칼로는 그림보다도 자신의 생애 자체로 회자된다. 프리다는 한순간도 편치 않고 급박한 삶속에 있었다. 프리다가 살아간 시대는 1907~1954년의 멕시코. 프리다는 화가로서의 명성보다는 유명한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 끔찍한 사고 후에도 굳건히 생을 살아간 여성으로 위치되었던 삶이기도 했다. 이런 프리다에 대한 평가는 차츰 변화되어 혁명가로서 페미니스트로서 강렬한 인상을 전한다.


이십 년이 지난 뒤에도 프리다 칼로는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기막힌 시절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 만났던 모든 이들, 그들이 투쟁하던 이상을 고스란히 기억 속에 간직했다. 사실 그녀의 그림은 혁명적이지 않고 벽화주의 화가들의 웅장한 작품처럼 정치적 참여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혁명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의 예술은 참여예술이 아니다. 그녀의 투쟁이 내면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상과 그녀의 고독한 삶에 대해, 고통의 감옥에 대해, 그녀의 자존심이 입은 상처에 대해, 그리고 남성이 지배하는 멕시코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섯 살에 소아마비로 인해 장애를 갖고 있는 프리다가 18세에 겪은 버스 사고는 ‘끔찍했다’는 한마디 말로 하기엔 프리다의 고통을 너무나 가볍게 만드는 것 같다. 버스와 전차가 충돌하며 금속 기둥이 프리다의 몸을 관통했고 폭발한 버스의 잔해가 프리다의 몸속에 박혔다. 수술은 끝이 없이 반복되었고 회복은 더뎠고 소녀가 가진 꿈도 날아가 버렸다. 늘 침대에 있어야 했던 프리다는 자신의 고통을 그림으로 그리며 삶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어쩌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프리다가 화가인 디에고와 결혼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르겠다. 프리다에게 있어 그림이 고통을 견뎌내는 힘이었다면 프리다의 그림을 알아봐준 디에고에게서 고통을 나눌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스물 한 살 연상의 바람둥이 화가에 대한 끌림은 의지하고픈 마음과 자유스럽지 못한 자신의 상황을 투사한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어쨌든, 내가 어찌 그 심정을 알겠으며 프리다가 끝없이 한 남자로서 ‘사랑’했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사랑이 고통을 더하는 데 결코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디에고의 심각한 여성 편력과 동생과의 불륜을 끝없이 참은 것이 사랑의 힘이었을까. 신체적 고통을 넘어선 정신적 고통을 주는 존재,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의 남편. 왜 프리다는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 역할을 놓지 못했을까. 상처입은 프리다의 자존심도 고통을 이겨낼 의지도 모두 프리다의 내면에서만 일어나고 있었다. 프리다는 계속 ‘디에고의 여자’를 놓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프리다는 심각한 몸 상태에도 몇 번의 유산에도 아이 갖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또다시 상처받았다. 아이를 낳지 못한 것에. 프리다가 디에고를 떠났을 때는 유산 후였고 여전히 디에고는 자신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으니 프리다의 인내심이 다한 것은 디에고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혼과 재결합을 제시한 것은 항상 디에고였다. 그래서인지 프리다 칼로의 ‘페미니스트’로서의 부각은 강한 울림으로, 느낌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하긴 프리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자처한 적은 없다.

  초기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활동 또한 디에고를 위해, 디에고에 의해서인 것도. 프리다 칼로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프리다에게 강렬하게 매료되었던 것 같은데 프리다의 그림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시선을 끄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쩜 프리다에 대한 매혹은 프리다 생애 자체가 주는 스토리에 대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새삼 다시 이 책을 훑어보며 처음과는 달리 프리다의 ‘주체적’인 면을 찾게 된다. 디에고의 엄청난 ‘성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줄어들지 않았고 디에고는 그런 일로는 화가로서 혁명가로서 달리 평가받는 일은 없었다. 오로지 그의 아내 프리다만이 상처입었을 뿐이다. 

  그런 상처를 프리다는 그림으로 그렸다. 한편으로는 디에고로 인해 상처와 고통받은 아내로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그림으로 형상화낸 것이 의지와 주체적인 표현이기도 하겠다. 이런 면에서 예술이 가진 힘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말할 것을 알았던지 프리다는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프리다가 ‘원하는 여인’은 어떤 상이었을까. 프리다는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광기의 장막 저편에서는 내가 원하는 여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난 온종일 꽃다발을 만들고 고통과 사랑과 다정함을 그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그러면 모두들 말하겠지. 불쌍한 미친 여자라고(난 무엇보다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나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겠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모든 세계와 조화를 이루리라. 내가 살아갈 날과 시간과 분은 내게 속한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속하겠지. 나의 광기가 작업 속으로 도주할 수단이 되지 못할 테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들 작품의 포로로 가둘 것이다. 혁명이란 형태와 색채의 조화이며, 모든 것은 생명의 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머문다. 누구도 다른 누군가와 헤어질 수 없다. 누구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 만물은 전체인 동시에 하나이다. 불안, 고통, 쾌락, 죽음은 존재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고 결국은 하나이다.


  쉬이 무너지지 않고 초기 생의 고통을 예술혼에 투영하였던 프리다의 삶은 경이롭다. 아마도 그렇기에 프리다의 삶이 강렬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들 두 화가의 삶이 너무나 비교된다. 내가 그들의 삶을 모르기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이 책을 통해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클레지오 작가는 이들의 삶을 한편의 소설처럼 엮어 놓은 솜씨가 있다. 실존 인물의 삶을 전하는 클레지오의 시각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프리다의 힘겨운 삶과 그 고통의 면면들이 연민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반면에 디에고는 너무도 열정적이고 천재적인 화가이자 혁명가로 부각되는데 프리다는 늘 디에고에 대한 사랑에 목말라 하는 존재로 그려져 있는 것도 같다. 제 아무리 디에고를 언제고 사랑했다 하지만 늘 디에고로 귀결되는 이 집착과도 같은 사랑은 아름답고 열정적인 사랑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환멸스러움을 더하기도 한다. 어쩌면 불편하고도 짠한 이 연민은 이렇게 묘사한 작가의 언어때문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부 예술가의 삶은 전문가적인 역량에선 늘 여성이 남성보다 ‘못한’ 것으로 표현되는 듯하다. 여성의 예술혼은 늘 남성에 ‘의해’ 강화되는 것으로 만든다. 늘 고정적으로 묘사되는 예술가로서의 남성과 여성, 부부들. 그것이 사실일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더불어 늘 ‘그렇게 보는’ 시각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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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소문…?


언어의 온도-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말글터, 2016년 8월.


  작년 봄이었던가. 선물을 받았는데 1년이 지나도록 읽지 못했다. 책이란 소유하게 되면 어쩐 일인지 최대한도로 늦게 읽으려는 의지가 발동하는 것 같다. 어쩌면 뭔가 손이 가지 않은 이유가 은연중에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매번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는 광고를 마주하기도 했는데 얼른 읽을 생각을 하지 못한 이유가. 분명 그때에는 제목에 끌렸고 책을 감싼 보랏빛 디자인에 끌렸고 읽고픈 감정을 가졌다. 이 정도 페이지의 에세이는 한시간이면 읽게 되는 점을 고려하면 일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책을 위한 그 한시간의 짬을 내지 못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일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에세이류를 넘어서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을 이제는 ‘나도 읽었다’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입소문으로 만든 베스트셀러’라는 문구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 100만부를 돌파한 책이니 당연히 부럽지만 나는 또한 베스트셀러와 나의 궁합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좋다고 하는데, 나는 왜 아닌가. 나의 시선은 감정은 도대체 무얼까. 거기에 더해 도대체 ‘입소문’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궁금해졌다. 희한하게도 책을 읽었다는 내 주위의 절대가 ‘좋지 않았다’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과 먼저 이야기했더라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까. 아니면 어쨌든 베스트셀러라니 사람들의 소문으로 이룬 힘이니 그 힘이 궁금해 읽었을까.

  책을 읽고 난 후에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으니 그들의 관점은 내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니 전반적으로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했고 다른 이들의 감상을 들었고 좀더 깊이 들어가 작가에 대한 이야기와 뒷담화와도 같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처음 느낀 감정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거였다. 정확히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책이든 개인의 취향을 타겠지만 에세이는 저자의 생각과 실생활모습이 은근히 드러난다. 에세이가 주는 이야기들과 문장들이 감정을 더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의 끌림은 글을 읽고 난 후 절실하게 다가오는 진정성의 힘 아닐까. 알지도 못하는 저자의 글에서 뭔가 모르게 진솔하고 정겨운 기분이 아니라 한뜻 꾸며낸 듯한 기교가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가지지 않고 자꾸만 멀찍이 떨어져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를 느꼈다. 다른 이들과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진 베스트셀러에 대한 나의 옹졸한 질투인가 생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난 꿋꿋하게 맘에 들진 않았다라고 말했고 다른 이들이 전해준 어떤 입소문에 대해 들었다. 작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어쩌면 홍보라고 할 수 있는 방법들에 관한 것도 있었다. 정치적 성향에 관한 것이야 따질 일은 아니지만 닐로의 차트 석권, 국정원과 드루킹의 매크로 조작 등을 보면서 ‘언어의 온도’를 생각했다. ‘입소문이 만든 베스트셀러’. 나는 언어의 온도에 관한 입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내가 책을 읽고 느낀 감정을 같이 느낀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내가 옹졸하게 베스트셀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보내려는 힘을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어 안심했다.

  사람들의 취향이 다를 수 있음을 알면서도 가끔은 이렇게 소심해진다. 많은 이들이 좋아한 책이나 영화가 내 취향이 아닐 때면 말이다. 그러다가 취향 별나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굳이 기껍지도 않고 말이다. 더해서, 나는 좋다 좋다 하는데 그 좋음을 알리고 싶은데 뭔가 조~용할 때도 기꺼울리 없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이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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