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사회학 - 당신은 대한민국 몇 %입니까?
정태석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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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복의 지분

행복의 사회학-당신은 대한민국 몇 %입니까?, 정태석, 2014.


  지난달 한창 뉴스를 달군 건 통계청장 교체에 관해서다. 삶의 지표를 가늠하는 통계, 그 중 가계동향조사 표본 선정에 관한 논쟁에서 촉발되어 통계의 신뢰성 문제로 정치권은 대립했다. 이 책에서는 권력이 숨기고자 하는 숫자와 불평등, 자본이 반복해서 말하는 프레임이 삶의 행복을 어떻게 방해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출간이 2014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행복은 얼마나 멀어져 있었을지 가늠하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속 유명한 첫 문장처럼 행복한 가정이 모두 비슷한 모습이라면 행복한 사회도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행복에 대해 세상은 어느 정도 규격화시켜놓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유엔은 매해 국가별 행복지수를 발표한다. 2018년도에는 행복지수의 지표는 국내총생산(GDP), 기대수명, 사회적 지원, 선택의 자유, 부패에 대한 인식, 사회의 너그러움 등을 기준으로 했다고 한다.


타인 지향형 사회에서 인간은 특정한 가치관을 갖지 않고 타인이나 세상의 흐름에 자기를 맞추며 살아간다.


  대한민국은 얼마나 타인 지향형 사회인가. 타인을 위한 배려가 넘치는 사회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삶. 언제던가 나라별 중산층 기준에 관한 비교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은 다를 줄 악기가 있는지,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지,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지는지,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가였는데 대한민국은 은행잔고와 월급여가 얼마 이상 되는가, 자동차와 아파트를 일정급 이상을 보유하였는가였다. 지금이라도 달라졌을까,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건 이런 ‘급’에 선을 맞추어야 행복할까 말까한 삶이다.

  그렇지만 이런 기준이 아니라 서양의 기준이나 유엔의 기준을 들이댄대도 행복할까 말까하다. 이 나라의 부패는 생각했던 것보다 끈끈해서 도통 깔끔하게 떨어질 줄 모른다. 부정과 불법을 자행하고 그것을 지켜가려는 소위 노블레스의 노력은 2014년을 보내고 2016년을 보내고 행복을 기다리던 수많은 국민들을 위협하고 여전히 분노케 한다. 기대했던 새로운 나날들을 만들어가는 건 그런 이들에 의해 이토록 버겁다.  

  그들이 외치는 경제 민주화의 다른 이름은 재벌가의 지속적인 성장이며 이를 위해 당연 지속적인 착취구조를 공고히 하려고 한다. 이를 위한 무수한 노력들을 위해 그들은 서로 뭉치고 결속하며 단결하고 있다. 한 목소리로 외친다. 복지는 안돼! 분배는 안돼!

  

부유층일수록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더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금을 낮추고 복지 지출을 줄이고 또 부유층에 대한 증세에 반대하는 보수 정당에 대해 확고한 지지를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보수정당이라 할 때 ‘보수’가 표방하는 것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냐가 핵심이 될 것이다. 그 정당이 주장하고 지향하는 바가 많은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인지를 말이다. 상식적이고 논리적이고 사실에 근거한 ‘말’만을 들어도 행복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러므로 아직도 나는 행복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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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코리 스탬퍼 지음, 박다솜 옮김 / 윌북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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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만드는 일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코리 스탬퍼, 2018.


  “세상에, 그렇게 재미없는 일도 있군요.”

   책 속 10대인 딸 친구가 말했듯이 매일 단어를 만드는 일이란 재미없는 일이고 기대를 크게 가져서인지 단어를 만드는 일은, 아니 단어를 만드는 일에 관한 코리 스탬퍼의 이야기는 재미있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이 일이 매우 재미있고 이 일에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무려 20년을 웹스터 사전 편집자로 살아온 코리 스탬퍼가 차근히 보여주는 사전 편집자로서의 일상은 아, 막연하게 상상하는 이미지는 사라져버리고 그냥 직장인의 모습으로 남았다. 직업적인 면보다 단어에 관해 더 알고자 했으니 말이다. 사전 편집자의 일을 기술하고 있으니 그 세계에 관해 잘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그 일은 고체로 분류될 만큼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고 새뮤얼 존슨에 의하면 “무해한 노역자”다.

   그렇다. 단어를 찾는 일도 역시 재미있지 않다. 나이듦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강하고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단어를 찾는 일이 재미없는 건, 그렇게 사용된 단어의 의미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요즘은 대체로 차이를 두기 위해, 그리고 차별하기 위해, 혐오하기 위해 생산된 말이 많아지니까 더욱 단어를 찾는 일은 재미없는 일이 되어버린 듯하다. 

  어떤 단어는 사전에 올라가지만 어떤 단어는 찾을 수 없다. 인터넷 세상이 되어 종이 사전을 쓸 때보다 사전을 검색하는 일은 훨씬 쉽고 빠르게 되었다. 물론 그때보다 사전을 찾을 일도 무진장 많아졌지만 찾지 못하는 단어가 훨씬 더 많아졌다. 새롭게 등장하는 단어들을 감으로 맞추기도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어쩌면 그 이유를 사전편집자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단어는 빠르게 변하고 무수히 생성되지만 사전 속으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다. 한달, 심지어는 아홉달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한 단어의 의미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문법과 쓰임들에 관해서도 꼼꼼히 기록해야 한다. 어원에 관해서도 기록한다. 어원을 안다는 것은 단어가 만들어지던 시기와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어’를 만드는 일은 단지 세상에 생성된 말을 사전이라 불리는 곳에 옮겨다 놓는, 모아 놓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무해한 노역자들은 칸막이 책상에 하루종일 틀어박혀 가장 적확한 단어와 쓰임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매일 이 일을 반복하고 있다.


사전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단어가 뜻하는 바와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냉정하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릴과 로맨스를 기대하며 사전을 펼치지 않는다.


  그러나 사전편집자들은 단어와 사전과 사랑에 빠지고 인해 스릴과 서스펜스를 느끼며 일한다. 심지어 천국의 직업이라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어떤 면에선 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전류가 통하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단지 직업적으로만 회사원으로서 사전편집자로서의 역할을 진행할 수 있을까.

 

사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에 관한 귀하의 질문은 저희가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사전 편찬자들이 할 줄 아는 일은 단어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깊은 인간적 감정의 속성과 영구성에 관한 질문은 저희가 다루는 범위를 약간 벗어납니다. 더 큰 도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독자의 편지에 답에서 사전편집자들에게 단어를 정의할 뿐 단어가 지닌 ‘깊은 인간적 감정의 속성’에 관해서는 멀리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미 인간적 감정을 담은 단어들이 수없이 생성되고 있고 그 단어의 의미를 기재하기 위해 의미를 찾고 어원을 찾고 쓰임을 찾고 있지 않나. 사전에 등재되는 단어는 모든 단어가 아니라 깊은 고뇌와 논의 끝에 편집자들에 의해 걸러지고 합의된 단어라는 점, 그 행위에 감정적 속성이 개입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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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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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길로 전진하다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2018.


   한 나라의 정상이 갈라진 국경을 넘는 방법은 발자국 한번 떼면 되는 일이었고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일은 발자국 한번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는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뚜렷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서로간 교류가 없이 흘러간다면 그 차이는 더더욱 커지며 의사소통을 위한 통역가와 전문번역가가 필요하게 될 지도 모른다. 육십여년의 단절은 반만년 역사의 언어를 갈라놓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언어가 국경을 넘는 일은 어렵고 더디게 흐른다. 여전히 우리 국경을 넘지 못한 언어가 있고 언제 올 지 기약도 없다.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은 정영목 번역가가 국경 너머의 글들을 불러낸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세계,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읽고 생각하고 느낀 세상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작가들과 작품세계는 책 뒷페이지 역자의 말에서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작가와 작품세계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었던 글을 생각나게 한다.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했지만 저자에게 인상깊은 작가와 작품을 선별하여―필립 로스, 주제 사라마구, 헤밍웨이, 존 업다이크, 이창래, 알랭 드 보통, 오스카 와일드, 존 밴빌, 코맥 매카시, 윌리엄 트레버, 커트 보니것,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작가들의 생애와 글쓰기 특징들,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작가들과 그들의 평가, 저자 자신의 평가가 더해져 이들 작가들의 작품을 다시 읽고프게 만든다.

  특히 낯설지 않으면서 낯선 작가 이창래의 이름을 보고선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인이 위안부의 삶을 다룬 글을 썼다는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기억의 주인공이 바로 이창래 작가임을 알았다. 매해 노벨상 유력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다는데 번역본으로 읽어야 하는 한국인이었던 작가. 저자는 인종은 한국인이지만 국적은 미국인이며 영어로 글쓰는 이 작가의 글을 번역하면서 느낀 소회를 이렇게 말한다.


억측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이창래 같은 작가―영어를 사용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를 다른 외국의 작가들보다 더 거북해하는 것 같다. 아주 얕은 수준에서 보자면, 미국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한국과 관련된 사항―상황이든 등장인물이든 간판이든- 이 나왔을 때 받는 왠지 편치 않은 느낌(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지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번역된 ‘외국’ 소설에서 기대하는 상황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지는 것에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설사 준비가 되어 있다 해도, 외국 언론에서 한국 상황을 보도하는 기사를 읽을 때처럼 그 묘한 객관성이 가지는 시원치 않은 느낌, 남이 머리를 감겨주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우려가 남을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니 내가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입술의 움직임과 말의 부조화로 20%는 생각을 곁으로 흘려보내며 보게 되는 더빙 영화처럼. 이제는 이런 기분을 멀리 던지고 이창래 작가의 책을 편케 읽을 수 있을까. 

  정영목 작가는 알랭 드 보통의 책을 번역하면서 보통의 까칠한 성격을 매끈한 성격으로 바꾸어 번역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토로한다. 번역을 하게 되면 그들의 음영을 그대로 드러내려고 노력한다고 하니, 나 또한 정역목 작가의 글이 자신의 음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정영목 작가의 글을 읽다보면 이 분의 결이 섬세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정갈하고 맑게 느껴진다. 그래서 작가에 대한 인상도 그렇다. 갑자기 정역목 작가의 책이 연달아 출간되었을 때 잠시 놀랐다. 어떤 신변의 변화가 있어서 책을 낸 것은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러니까, 어딘가 아프다거나 더 이상 번역일을 하지 않겠다거나 뭐 그런. 그것이 아닌 것을 알아서 편하게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인생의 한부분에 대한 정리이자 자신의 일에 더 전진하리라는 다짐이리라 생각하며 나도 ‘전진하다’가 자동사라 여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세상을 겪을수록 개인에게든 집단에게든 전진이냐 퇴행이냐 하는 흐름의 결정은 평지가 아니라 비탈에서 이루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전진이란 늘 비탈을 올라가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루어낸 모든 인간적 성취도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함께 안간힘을 써서 밀어올린 것이어서 사실 그 자리에서 간신히 지탱하는 것만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전진하다’가 자동사라고 믿고 두 손을 내려놓는 순간 그간의 성취는 내리막길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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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 2009 용산참사 헌정문집 실천과 사람들 2
작가선언 6·9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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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게 세우고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작가선언 6·9, 200.


   비정한 나라에 무정한 세월이 흐른다.

   이 세월을 끝내야 한다.

   사람의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09년 출간된 이 책을 2014년의 어느 날 들춰보다가 첫 페이지 이 단락에 너무 놀랐다. 처음에는 은유로 보았을 그 글귀가 다른 의미로 다가와서 더 아프게 다가왔다. 모든 것이 제대로 해결치 않았고 이제 진도 팽목항 분향소는 철거되고 경찰청 인권침해 진상조사위원회의 용산참사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그때 제기된 여러 문제들을 입닫고 있던 언론은 마치 처음 드러난 일인 양 정부가 한 일을 보도했고 책임자들은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곳곳에서 건물이, 담이, 무너지고, 토사가 유실되고 또 곳곳에서는 건물을 세우겠다고 아우성이다. 무너지고 세우고, 무너지게 세우고….  


끊임없이 무엇인가 세워지는 곳에 사는 일은, 폐허에 사는 일보다, 더 고통스럽다.


  이 책은 192명의 문화예술인의 ‘용산참사’를 겪으며 기고한 작품 모음집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철거민들의 어려움과 아픔, 용산참사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애도, 용산참사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들과 정의를 모르는 정권에 대한 분노와 비판 등이 시와 산문, 사진과 그림, 판화로 표출되고 있다.

  나희덕 시인의 「신정 6-1지구에서 용산 4지구까지」의 위 문장처럼 아파트공화국, 건물주의 나라에서 사는 일은 고통스럽다. 새소리를 들으려 하면 여지없이 들리는 망치질소리에 하늘을 보려 하면 여지없이 가려버리는 건물을 보며, 그럼에도 살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실감할 때면 말이다. 일년에 3일 자기도 힘든  123채를 가진 전직 검사는 여전히 집이 123채일까, 1234채일까. 가진 거라곤 집 한 채가 전부라는 죄인이 그 한 채의 집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가슴을 무너뜨렸는지, 그 집에 수많은 이들에게서 강탈한 것을 채워놓았는지 모르지 않는데 뻔뻔함을 세우고 있다.

  오랜 동안 이 나라가 정의와 행복을 세우는 일보다는 무너뜨리는데 힘쓰며 오로지 건물 세우기에 혈안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건물을 세우는 일이 가능한 것을 보면, 무너뜨릴 것이 아직 많다는 이야기같다.

  한지혜 작가는 「누가 망루에 불을 붙였는가」라는 글에서 문예창작 전공 시절의 이야기를 적었다. 학기마다 써내는 글의 주제가 ‘철거’였다고. 그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고, “다 지나간 시대를 붙잡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했다. 현실을 외면 혹은 왜곡한 감상주의라는 비판까지 받았다는데, 나도 작가처럼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알면서도 자꾸 눈물이 났다. 나는 하루 종일 강의실 복도에 앉아 울었다. 억울했다. 내가 쓴 글이 다 지나간 시대요, 왜곡된 감상이라니 방학 내내 쿵쿵 울리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내가 다 허상같았다. 그리고 당황스러웠다. 무너지는 집에 앉아서도 무섭지 않았는데. 내가 처한 현실과 전혀 다른 동시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내 현실의 고통이나 분노는 가상세계와 마찬가지일 수도 있는 사실을 깨닫자 비로소 두려웠다.


  그런 시대를 살아왔다. 지워지지 않을 시대의 일들이 묻히고 덮일까봐 걱정스럽다. 아직도 철거라는 게 현실에서 보이는 일인데, 그것이 ‘시대를 벗어난 이야기’라는 생각 자체가 현실을 왜곡한 감상주의라는 비판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 시대를 살았는지를 더욱 각인하게 한다.    

  비정한 나라에 무정한 세월이 흐른다. 이 세월을 끝내야 한다.

  용산참사의 일을 가해자와 언론이 모르쇠 하는 동안 사건의 진상조사도 처벌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그렇게 비정한 나라가 계속되어 세월이, 되었다. 많은 것이 감춰지는 나라에서 그것을 들추어 소리높이던 이들도 블랙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달라질 세상에 기대와 희망을 가졌지만 모르쇠의 무리들은 그들의 세를 쌓아올리며 승자의 기록이라고 외치고 있다. 백무산 작가의 말처럼 ‘승자의 담론 개발윤리’로 이 세상을 일구고 일궈온 이들이 그동안 ‘무너지게 세운 것‘이 나올 때마다 달라질 세상을 보기 위해선 더 달려야 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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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하는 페미니즘 - 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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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그리고 건조기


빨래하는 페미니즘-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저, 2014.


  쨍쨍한 하늘 그리고 폭염, 빨래가 잘 마르겠구나.

  찌뿌둥한 하늘 그리고 폭우, 빨래가 안 마르겠구나.

  날씨가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팔할의 빨래 생각은 지극히 현실적인 반응일 게다. 내일을 위한 옷과 양말 유무는 밖으로 나가는 데 최소로 필요로 되는 것이니까. 또한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빨래 담당자’의 역할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나와 같이 빨래에 민감한 여성이 있으니 남편의 빨랫감을 집어던진 여자, 스테파니 스탈이다. 최근 페미니즘 경향과 변화의 움직임을 위해선 신간을 읽는 것이 적절할 텐데도 신간들에는 관심과 흥미가 떨어진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의 고전이랄 수 있는 책엔 여전히 관심이 간다. 실천적, 운동적인 접근보다 이론적이고 논쟁적인 책들에 대한 관심일까. 아무튼 그렇기에 페미니즘의 대표적 고전 도서를 ‘다시 읽기’하는 이 책은 다시 또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스테파니 스탈식으로 재세탁된 고전들은 저자의 경험과 버무려져 쉽게 다가온다. 원제보다도 한국판 제목이, 그리고 책표지가 아주 맘에 든다.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고 이야기한다. 인류를 바꾼, 가장 혁명적 발명품으로 세탁기가 상위를 차지하곤 하는데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 사회로 진출할 수 있게끔 했기 때문이다. 분명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의 발명으로 인한 가사노동시간의 단축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제는 날씨까지 극복하는 건조기, 건조기능이 부가된 세탁기도 등장하였으니 ‘여성’의 일이 얼마나 줄어들었는가. 그렇다. 여성의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여전히 빨래를 비롯한 가사일은 여성의 일일 뿐이다. 그것만은 세탁기가 발명되든 건조기가 발명되든 변하지 않았다.

  스테파니 스탈은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겪으면서 페미니즘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문을 갖는다. 일을 가진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던 그녀의 ‘여성’의 자각은 꿈을 비롯한 많은 것을 포기하게끔 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현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이야기다. 이 혼란과 절망에서 사랑, 죄책감, 좌절이라는 어려움에 맞서기 위해서 스테파니 스탈이 선택한 것은 페미니즘 고전 읽기이다. 그녀의 이 선택은 그녀 자신을 혼란에서 나오게 해줄까. 같은 상황에 처해 같은 감정에 휩싸인 또다른 여성들의 삶의 변화를 이끌어 줄까. 페미니즘 고전이 등장할 때마다 그 책은 여성에게, 세상에 용기를 북돋워주고 모순된 것들을 일깨워주었을까. 페미니즘은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자조에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스테파니 스탈이 들여다본 페미니즘 고전의 목록은 메리 울스턴그래프,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 베티 프리단, 게이트 밀렛,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개럴 길리건, 주디스 버틀러 등 초기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 프랑스 페미니즘 등 다양하다. 이 책들을 개괄하고 요약하면서 스페파니 스탈이 처한 개인적 상황에서 느낀 감정을 이야기하기에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셜리의 어머니인 메리 울스턴그래프트와 시몬느 드 보봐르의 개인적인 생애에 쏠리는 관심은 그들이 주장한 페미니즘의 이론과 연계해서 더욱 생각거리를 안겨다 준다. 그들 작가들도 완벽한 생활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이론을 쓰윽 그려낸 건 아니었다. 한계에 부딪치면서 생각하고 깨치고 생각한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다.


한때 육아와 가사 노동은 여자들을 연대하게 만들어 주는 주제였습니다. 2세대 페미니즘은 그러한 연대의 힘을 바탕으로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가사 노동은 인종과 계급을 나누고 이민자와 비이민자를 가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남자들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 여자들을 진정으로 해방시켜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공통의 어려움을 가지고 연대했던 여성들이 같은 문제로 서로가 대립하는 상황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같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면 이제는 같이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쓴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서 비켜난 지엽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며 그렇게 연대의 틀은 무너져간다. 이러한 역할을 누가, 하고 있는 것인가.

 

일과 양육이 주는 만족도가 얼마나 큰지, 두 가지가 자아실현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비교해 보려는 시도는 허울만 그럴듯할 뿐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종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직장 맘 대 전업 맘 전쟁’ 같은 자극적 기사들을 내보내면서 그런 중요한 차이를 언급하지 않은 채 오만하게 넘어가 버린다. 


  스테퍼니 스탈을 힘들게 했던 이 세상에서의 여성이라는 자각, 여성 성역할로 인한 스트레스와 히스테리와 함께 찾아왔던 가족과의 불화는 페미니즘 고전을 다시 읽으면서 화해 무드로 나아간다. 상황의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자의 생각의 변화, 인식의 변화가 동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스테파니 스탈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경험이었고, 이 경험의 이야기를 저자는 세상에 들려주어 다른 이들로 하여금 혼란의 극복방법을 제시하게 한다.


정체성은 지식의 주체가 되는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존재란 과정, 이야기, 대화입니다. 항상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노력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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