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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평점 :
리더를 기다리며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문학동네, 201.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이 책 제목만큼 절실한 문장이 있을까 싶다. 최근 몇 년 사이 어떻게 페미니즘이 흘러왔는지는 옆눈으로 보았다 해도 알만큼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었다. 지금도 사건들의 줄잇기는 마찬가지지만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논의는 더욱 거세질 듯하다.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운동가 벨 훅스 역시도 모든 페미니스트가 주장하듯이 페미니즘은 ‘남성혐오운동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외쳐왔듯 단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라고 거듭 외친다. 벨 훅스처럼 거의 모든 페미니즘 운동가들이 페미니즘이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고 더더욱 남성을 역차별하자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 무엇에 의해서도 억압받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 위해 함께 하자는 것이라고 부르짖는데도 어찌하여 페미니즘은 자꾸 여성만을 위한, 남성을 혐오하는 운동이란 이미지로 굳어가고 있는 걸까. 더 이상의 공감도 더 이상의 연대도 필요치 않는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가 자고 일어나면 쌓여만 간다.
벨 훅스는 자신이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늘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남성을 혐오하고 늘 화가 나 있는 ‘진짜’ 페미니스트 같지 않다고, 당신은 다른 것 같다고.”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벨 훅스와 같은 말을 들은 일이 적지 않음을 고백한다. 이쯤되면 페미니스트들에게 고정된 편견이 가득히 덧씌워져 있거나 그들 운동 방식의 전략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소위’ 페미니즘 시위에 대한 우려와 반감은 어쩌면 이 시위야말로 페미니스트에 대해 가지는 고정관념과 편견에 찬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제야 ‘진짜 페미니스트가 나타났다’고 외칠지도 모른다. 저 멀리 떨어져서 말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으로 갑자기 페미니즘 서적 또한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다.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서 흥미를 떨어뜨렸고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출판사들이 쏟아낸 책으로 인해 페미니즘이 가볍게 다뤄지고 여겨지는 것 같아 우려되기도 했다. 그래도 이만큼이나 관심도가 증가되었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확산되었으리라 했는데 그것이 아님을, 그렇지 못함을, 오히려 지금까지 있었던 관심이 좋지 못한 쪽으로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짜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껏 먼발치서 인터넷 기사를 클릭하며 가지는 감정인데 현장에, 보다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시각은 어떨까.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직접 운동을 이끄는 축에 있지 않고 그저 페미니즘 서적을 들척이고 좋은 의견에 동조하고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의견에 반대할 뿐인 일반인으로서의 내 목소리는 어쩌면 페미니즘 운동사에 전혀 가닿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건대 페미니즘은 운동가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차별과 억압받지 않고 산다는 것은 나에게도 필요한 일이기에 시선을 거둘 수는 없는 일이다.
정말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없는가. 지금처럼 이렇게 충격적인 일이 가득한 시위의 현장을 기사로 접하면 정말로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특정한 이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니면 정말로 페미니즘 운동이 아니라 다른 세력인 것인가. 많은 이들에게 생존과 존재 자체로서의 삶이 걸린 페미니즘이 왜 희화화되는지, 왜 일베스러워졌는지가 의아할 뿐이다. 이런 형태로 페미니즘은 나아가는 것일까.
다른 책들에 비해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흥미로웠던 건 편하게 읽힌다는 점 이외에 그동안의 페미니즘의 논쟁, 각기 주력하여 주장하는 바가 달랐던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소개하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개되어온 페미니즘 이론과 페미니스트들의 투쟁 노선과 방법들은 직접 현장에 있지 않았다면 잘 알지 못했을 세세한 부분에서의 문제점을 벨 훅스는 잘 지적하고 있다. 다양한 페미니즘 이론의 역학 속에서 페미니즘이 변화·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겠지만 분명 그로 인한 한계가 있었고 여전히 지속되는 한계가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혜화역의 시위가 그저 페미니스트들 간의 이론과 투쟁 방법상의 차이가 있고 특정 계파의 투쟁방법이 대두되었다고 하기엔 그동안 페미니즘이 이루어낸 역사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 방식이 과연 페미니즘인가의 의문과 함께 그렇다면 왜, 그 방식이 선택되고 이루어지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왜, 한국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의 방식은 이렇게 혐오에 기반하여 달려가고 있는가.
한쪽에서는 캐럴 길리건 같은 페미니즘 사상가들이 질리지도 않고 여성이 더 다정하고 더 윤리적이라고 말했지만, 여성들이 자신보다 더 힘없는 다른 여성들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도무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여성들이 자신이 속한 정체성이라 생각하는 같은 민족이나 인종 집단에 보이는 보살핌의 윤리는, 그들이 공감할 수 없고 동질성이나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최근 시위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까페)의 정체성과 다른 이들에게 가하는 행동을 보면 도무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페미니즘, 성차별 철폐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로지 혐오만이 목소리 높다. 페미니즘이 목적이 아니라 조롱 자체가 목적이 된 듯한 생각마저도 든다. 지금의 페미니즘 운동이 흘러가는 방향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많은 이들이 지향하는 바일까. 이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이렇게 흘러가는 이유가 페미니즘을 이끌어갈 운동 세력의 리더가 부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혁명을 거치며 특정 리더가 아니라 자발적인 시민의 의식이 의견을 형성하고 주장을 높이는 형태가 여성운동에서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인가.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데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적인 페미니즘 이론이 운동의 방식이 이것을 이끌어갈 주체가 격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외면받고 비난받는 운동이 되기엔 차별의 역사는 너무나 길었다. 그리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한 살아야 할 생이 아직 너무도 많다. 그러기에 벨 훅스의 주장처럼 우리나라에도 워마드가 이끌어가는 운동이, 시위가 아니라 합리적이면서 모두에게 공감을 이끌어가는 페미니즘 운동이 확산되기를 바란다. 존경받는 페미니스트의 존재가 보고프다.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비록 대중 기반의 운동 역량은 갖추지 못했지만 그러한 방향으로 운동을 새롭게 시작하는 게 우리의 첫번째 목표다. 우리 삶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선구적인 페미니즘 이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 우리의 현재를 고심하게끔 끊임없이 생산되고 재생산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