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난다, 2018-06-25.


  여기 묶인 글들은 2013년에서 2016년에 쓰인 것이 많았다. 그 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아는 까닭에 많은 글이 힘있는 비판의 어조인 것에 고개를 끄덕했다. 그렇지만 씁쓸하게도 느껴졌다. 문득 불문과 전공 교수들의 글이 유려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글의 내용은 달랐겠지, 다른 글들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이 겹쳐 왔다.

  유독 올해 많은 작가들의 부고를 들었다. 세상의 한부분이 허전하게 느껴진다. 어린 왕자 번역본에 관한 글이 있어 책장을 뒤져 어린왕자를 꺼내놓고 선생이 지적한 부분을 찾아본다. 수정되어야 할 일본판을 참고한 번역본임을 알고 빛바랜 책에 소혹성 3251에서 1을 지우고 마흔 세 번이 아니라 마흔 네 번의 해가 지는 걸 구경하며 마흔 네 번의 쓸쓸함을 느끼는 것으로 고치고 나서 그만큼의 쓸쓸함에 물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세상에서 문학으로, 프랑스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뇌한 작가의 글에 먹먹한 오후 노을이 유독 짙어 보인다.


흉악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형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기에 우리의 패배를 증명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문제는 없어지지 않는다. 흉악범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일상이기 때문이다.



  흉악 범죄가 일어나는 것처럼 그 때에 벌어진 모든 것들이 우리에겐 일상이었다. 그 일상을 견뎌내고 또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무뎌지고 그랬는데 새삼 그 시절의 뚜렷이 드러나는 글들을 보고 있자니 그런 글들을 억압하고 몰아내고 흉악 범죄만을 일으키던 사람들의 세상에서 살아야 했던 때가 더더욱 억울해진다. 그러하기에 이런 글들에 푸욱, 위로를 받게 되는 모양이다.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와 먹먹함이 있는 내게 말이다. ‘사소한 부탁’을 해야 할만큼 사소한 것들도 지켜지지 않았던 그때. 그때의 분노와 아픔이 없었다면 작가의 병은 없었을까.


 진보주의를 삶의 방식으로만 말한다면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다. 한 사람의 진보주의자가 미래의 삶을 선취하여 이 세상에서 벌써 미래의 토인으로 살지 않는다면 그 미래의 삶에 대한 확신과 미래 세계의 건설 동력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그의 존재는 이 불행한 세상에 점처럼 찍혀 있는 행복의 해방구와 같다.


  진보주의는 좌빨이라는 목소리가 너무 크고 시끄럽게 세상을 도배하기에 그 단어에 열내고 반박하는데 급급했지 새삼 내 언어로 정의내리는 일엔 소홀했다 싶었는데 황현산 선생님의 진보주의의 정의가 콕 박힌다. 그래, 그것은 정치의 방식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고 삶의 방식으로서 얘기되는 것이었다.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 이 글은 책에서 한번 더 반복된다. 사소한 것들을 지켜낸다면 사소한 것들을 지키고 산다면 소소한 행복들은 지켜질 것이겠지만 그 사소한 것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말해야 하는 세상은 불행한 세상일 터이니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선생이 써내려간 글에서 그의 분노를 비판을, 부탁을 눈여겨 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 안 읽는 이유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백세희, 흔, 2018-06-20.


  제목이 주는 놀라운 힘, 이 책 또한 그 하나가 아닌가 싶다.

  개인의 치료기록, 나는 기분부전장애(심한 우울 증상을 보이는 주요우울장애와는 달리, 가벼운 우울 증상이 지속되는 상태)라는 병명을 보고는 세상에 우울증이 아닌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증상으로 전문가를 찾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고 그들의 그 적극성, 의지에 놀랐다. 심한 우울증에도 병원을 찾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축적된 이야기였기에 통계는 언제쯤부터 바뀌었을까, 상황을 기민하게 보는 기사는 없던가,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책 제목이 여기저기서 보이고 들렸을 때 나 역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었던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 제목에 공감했지만 굳세게 나를 끌어당기진 않았기에 만날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덧 이 책이 회자되는 것만큼이나 팔리는 만큼이나 반향은 생각과는 달라서 책을 읽진 않았다. 그럼에도 강하게 남는 이 제목. 역시 판매의 힘은 제목이 반이다라는 생각을 거듭 했다. 다시 한번 이 책을 떠올린 건 얼마 전 기사 때문이다.

  

벽도, 책장도 있는데 왜 책은 안 읽는가. 솔직히 우린 답을 이미 안다. 다른 이유는 핑계일 뿐, 간단하게 말해 필요 없어서다. 책 읽기를 그토록 권하는 건 공감의 힘을 높이고 시야를 넓히고 논리를 밝혀 줘서다. 우리 사회에서 공감, 시야, 논리란 쓸데 없는 짓이다. 바깥 세상을 이렇게 접어 버리고 나면 남는 건 자기에 대한 몰입이다. 아무리 ‘책에도 귀천은 없다’지만 그저 ‘불쌍한 나’를 쓰다듬는 나르시시즘 에세이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을 채우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 [한국일보, 책 안 읽는 이유, 2018.10.19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0191513342440?did=da]


  책을 안 읽는 이유가 어디 하나뿐이겠는가. 독서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퇴폐시켜 버린 그 누군가의 그토록 순수한 교육적 열의가 먼저 떠오른다만 그것을 제쳐둔다면, 베스트셀러 목록을 채우는 것이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책을 읽는 이유가 된다. 지금 책을 읽는 이유가, 이 책을 읽는 이유가 기자가 지적한 대로의 이유라 할지라도 말이다.

  기자의 글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책이 이 책이라서 책을 들춰보고 우울해졌다. 아, 시월의 마지막 날이라 바쁜 일들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시간을 소비하고 난 뒤의 허탈감에 그리고 몇 장 남지 않은 달력에 온 신경이 쏠리며 오로지 나라는 존재가 소멸된 느낌이 들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추워진 날씨가 달갑게 느껴진다. 지금 기분부전장애상태인 건가.

  세상에 자기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저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 거기에 마케팅에 어울리는 글이 있고 아닌가가 있을 뿐. 어쨌든, 작가는 이 우울을 좋은 결과물로 만든 사람이고 나는 아니다. 그렇기에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최근처럼 넘쳐나는 조현병 환자, 우울증 환자들의 끔찍한 범죄 기사들을 접하다보니 거듭 저자의 우울에 경의를! 그리고 이 책은 사람들에게 많이 읽혔고 팔렸다. 그렇게 만들어 준 힘에도 경의를!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어쨌든 누군가를 탓하고 누군가를 해하는 대신에 자신의 내밀한 기록들을 출간한 저자의 우울증을 다시금 보게 된다. 책을 쓴 건 저자일지라도 세상은 상업자본의 힘이라, 출간한 이들의 승인없인 이루어지지 못할 터이니 저자가 출판사 마케팅 일을 하고 있다는 그 놀라운 우연에 놀라움이 사그라든다. 뭔가, 잘 짜여진 판에서 내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느낌이다. 글에 대한 응원이 아니라 우울을 앓고 있는 저자 개인에 대해 응원하고 싶어진다 할지라도 나는 그 마무리를 할 수가 없다. 저자가 다시 2권을 들고 돌아오기까지는.

  그것을 더 부추기는데 내 어릴 적 친구들이 동원되는데 떡볶이쯤이야. 미키도 미니도 도날드 덕도 구피도 플루토도 앨리스도 곰돌이 푸도 어릴 적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 나와 다시금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느낌을 전한다. 나에게만 알려주는 비밀이라는 듯 시크릿, 시크릿을 외친다. 죽고 싶은 일이 있을지언정 그런 생각이 들지언정 떡볶이를 먹다 보면 멋진 인생이 다시 시작될 거라는 이야기는 분명 친구들 모여 한탄하듯 위로하듯 나누는 이야기이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조금만 무엇을 찾아보면 자신을 위로할 이야기들을 만나고 보다 전문가의 견해들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이 뻔하디 뻔하게 흘러 온 말들에 지금, 이 시점에 열광하게 되는 건 정말로 “책 안 읽는 이유” 때문인가. 아니면 그런 책들이 무수히 진열되어 있기 때문인 걸까.

  어떤 책들에선 감정의 격랑으로 피곤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주는 맛을 잊지 못하기에 다시금 슬금슬금 책을 찾게 된다. 믿고 찾는 출판사도 있겄건만. 하지만 이쯤되면 나는 내 취향으로 인해서, 내 성질로 인해서, 정말로 점점 책을 읽지 않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을, 독서의 계절이 이르게 온 추위만큼 완전히 사라지는 이 막연한 기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독한 나에서 함께하는 우리로 - 다양한 분야 학자들의 인문학적 소통과 상상
유범상 외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엇을 생각할까

고독한 나에서 함께하는 우리로-다양한 분야 학자들의 인문학적 소통과 상상 


  ‘함께하는 우리’ ‘공동체’ ‘연대’는 복잡한 사회의 질서가 무너질 때, 상식이 통하지 않고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 대한 대응으로, 구원으로서 이야기되곤 한다. 함께하는 것, 연대는 부조리를 타개하며 실존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한 힘이 된다. 우울한 한국사회에서 ‘함께하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가 위한 조건들과 방법들을 이 책에선 모색하고 있다. 개인차원에서 고민하고 질문해 봐야 할 주제, 공동체에 관한 성찰, 미래사회를 위한 주제로 나누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견해를 피력한다.

  공동체삶을 중요하고 필요한 가치로 이야기하지만 때로는 어떤 연대의 형태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게 되기도 한다. 지난 촛불집회와 같은 연대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연대방식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사립유치원의 비리근절 토론회에서 보여준 사립유치원연합회의 연대와 같이 특정집단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연대를 위해 올바름에서 비켜선 행동을 보일 때면 함께한다는 가치가 폄하되고 위험해 보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책은 공동체의 삶, 미래사회를 위한 사회의 연대를 생각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는 성찰부터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당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 생각이 무엇인가도 중요한 부분이다. 자칫하다간 악의 평범성의 대명사 아이히만처럼 되어갈 지 모른다는 무서운 경고, 때론 이익 앞에 무너지고 마는.


현재 추진되고 있는 의료민영화 정책은 국민의 건강증진보다는 시장과 영리를 지향하는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추구에 우선적인 목적을 두고 설계되었으며, 그 정책내용에는 소자본 의료공급자(개원의사), 사회·경제적 소외 지역이나 집단에 대한 이해를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이익’에 관한 집착이 공동체 생활을 저해하는 요인이라면 국민의 건강을 두고 벌이는 의료 관련 정책에 대한 의사집단의 이익추구를 위한 연대만큼 빼놓을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수술실 CCTV 설치에 대해서는 절대 찬성하지 않으며 파업결의를 하며 의사 폭행 문제에만 목소리를 높이는 의사협회의 집단행동. 물론 의사를 폭행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고 강력히 처벌해야 할 일이지만 의료사고, 수술 과정에서의 비상식적 행동, 대리 수술 등의 일들이 부지기수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선 그 어떤 반성도 하지 않는.


민주라는 보편적 가치가 생활화하고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사회참여에 나서는 것뿐이다.


  ‘민주라는 보편적 가치’의 실현이 중요하다 ‘함께 하는’ 것의 중요성에 ‘무엇을’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따지고 보면 조폭들은 항상 그들끼리 조직화된 연대를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고독한 시시포스들이 무한질주하는 전쟁터”라고 책에서는 말한다. 소위 헬조선이라 불리는 그 모든 상황들은 가혹한 형벌에 처한 시시포스와 다를 리 없는 삶이라고 말이다. 카뮈가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형벌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자살과 종교를 제시했지만 자살은 자신을 살해하는 것이고 종교는 현실도피라는 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저항’이다. 이 저항은 부조리에 대한 자각에서 이루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자각해야 할 부조리는 많다.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친일 과거사, 끊이지 않고 발생하지만 처벌 수준은 턱없이 낮은 성폭력 문제, 복지사회에 대한 불편한 반응, 갑질 문화, 혐오의 확산과 차별 등 백세 사회가 되는 미래사회에서 수명은 길지만 정서적으로는 편안치 못한 환경에 놓이게 되는 일이 확대된다.


하지만 고독한 개인의 자각과 저항은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지 모른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각한 개인은 무기력함으로 인하여 더 깊은 좌절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따라서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자신을 더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런 부조리를 자각하는 것, 중요하지만 혼자라면 오히려 더 고독하고 비참해질 수 있다는 말이 수긍이 된다. 지난 몇 년간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하여 함께 하는 행동을 위해 연대했을 때 사회의 변화 하나는 이루어내었다. 여전히 이뤄가야 할 변화가 많다는 점에서, 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고독한 시시포스가 되지 않기 위하여 나를 성찰하고 ‘민주라는 보편적 가치’의 정의를 정립하면서 연대해야 한다. 이 책은 함께의 가치와 더불어 ‘무엇을’에 대한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의 전망 -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노라 칼린.콜린 윌슨 지음, 이승민.이진화 옮김 / 책갈피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지개가 떴다

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의 전망, 책갈피, 2016.


[다섯 무지개/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8100514351457949]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뒷면 무지개가 뜨곤 했다. 콩레이는 무지개를 보여주진 않았지만 허리케인 플로렌스가 지나가고 난 뒤 미국 뉴저지주에 뜬 다섯 개의 무지개 사진을 보았다. NASA는 ‘과잉 무지개(supernumerary rainbows)’라며 드문 현상이라 했다. 직접 보았다면 얼마나 경이롭게 느껴졌을까.

 최근엔 무지개를 본 기억이 없고 대신 무지개 하면 동성애가 생각난다. 이래서 상징을 만드는 일이 중요한 모양이다. 내게도 레인보우 깃발이 동성애문화상징으로 보다 강하게 각인된 것은 지난 대선전 문재인 후보 국회연설 당시 성소수자 단체의 기습시위 때문이니까 말이다. 레인보우 깃발 제작 당시엔 분홍색이 포함된 여덟색에 ‘섹슈얼리티, 삶, 치유, 태양, 자연, 예술, 조화, 영혼’을 의미하였고 1979년 게이 퍼레이드에 활용할 때부터 남색을 뺀 여섯색이 되었다 한다. 

      최근 지역 곳곳에서 퀴어축제 개최로 보수·기독교 단체와의 충돌이 연잇는다. 기독교인 친구의 동성애 견해에 놀라 이 책을 집어들었지만, 기대했던 바를 충족시켜주진 못했다. 이 책은 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풀어내고 있다. 동성애라는 개념은 19세기 후반에 생겨났고 산업자본주의와 관계가 있고 이전에도 동성애자들은 존재했지만 자본주의에 이르러서야 동성애자 처별과 차별이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에서나 로마에서나 지배계급 부의 주된 원천이 노예제가 성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특히 로마에서는 노예를 부리는 것이 사치스런 소비의 한 형태였다는 게 중요했다. 로마제국 말기에 노예제가 농노제 생산양식으로 완전히 대체된 후에야 비로소 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등장했다.


동성 관계 문제는 가족의 역사와 관련지어 바라봐야 한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동성애자 억압 문제도 풀 수 없다. 모든 계급사회에서 가족은 성적 순종을 강요하는 핵심 제도였다. 그러나 가족의 형태나 가족이 생산과 맺는 관계는 생산양식이 변할 때마나 매우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19세기에는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등장은 기존 관념을 완전히 바꿨다. 가정과 일터가 분리됐고, 이 ‘분리된 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의 임무가 철저하게 나뉘었고, 개인과 사생활이 새롭게 강조됐다. 그 결과 성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사회의 성에 대한 태도는 생산양식과 관계있다는 관점은 기독교의 에이즈의 원인이 동성애라는 주장과 대립된다. 친구는 교회에 강연 온 의사의 “동성애의 결과는 에이즈다”라는 말을 진리라 믿고 있다. 그리하여 그 결과를 생각할 때 동성애에 찬성할 수 없는 일이라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걸 몰랐단 말이야?”

  이 책의 저자들은 ‘동성애자가 에이즈를 퍼뜨린다’는 것은 편견이라고 주장한다. 대다수 에이즈 환자가 에이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성애자의 수도 증가하고 있으며 안전하지 않은 성생활의 문제이다. 그러나 에이즈는 동성애들에 의한 것이라는 거짓말을 언론이 확산하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HIV에 감염된 압도 다수는 가난 때문에 처참한 조건에 놓인 이성애자들이다. 캐냐에서는 인구 18명 중 한 명꼴인 4만 명이 에이즈에 감염됐다. 짐바브웨에서는 성생활이 가능한 5명 가운데 1명이 에이즈에 걸렸다.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서는 젊은 여성의 4분의 1이 HIV 보균자다. 이들 중 절대다수가 남녀 사이의 성행위로 감염됐다. 나머지 사람들은 종합병원이나 전문 병원에서 다른 환자에게 사용된 주사 바늘을 통해 HIV에 걸렸다.


  거의 모든 차별의 근원으로 지적되는 기독교에 의하면 동성애든 여성이든 영원히 차별받아야 하는 존재가 된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생산양식이 차별의 요인이기에 그것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가 보다 싼 값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가족관계와 역할의 억압을 주요 수단으로 삼고 차별을 강행하며 여성과 성에 대한 차별을 부각시켜 왔기에 이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동성애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므로 동성애 억압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사회변혁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에서 벗어나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여기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다.

  고대 사회로부터 동성애가 있었지만 특별한 차별과 처벌이 없던 시대에서 현재에 이르러 혐오와 차별, 처벌이 자행되고 있는 시대에 동성애자들의 차별과 억압에 맞선 투쟁도 지속되었다. 이 책은 동성애 차별 철폐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 각각의 투쟁에서의 쟁점과 한계와 대안을 제시한다.

  기독교인 친구들의 동성애에 견해는 뚜렷한 혐오에서 시작하며 그들의 확고한 종교적 신념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의한 의견의 대립은 쉬이 끝나지 않는다. 나와 친구도 이럴진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의 대치가 오랫동안 이어진 것이 이해가 됨직도 하다. 어떤 무엇에 대한 강력한 반박과 주장은 확고한 이론 정립, 명백한 사실에 기반한 증거, 그리고 어떤 형태가 됐든 강력한 믿음이기에 이 책을 보았지만 속시원하진 않았다. 아마도 이 주장은, 분석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이 유명한 원인 분석을 놓고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바리안 데이즈 - 바다가 사랑한 서퍼 이야기
윌리엄 피네건 지음, 박현주 옮김, 김대원 용어감수 / 알마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포 또는 허풍

바바리안 데이즈-바다가 사랑한 서퍼 이야기, 윌리엄 피네건, 2018.


  태풍 소식과 함께 비바람이 몰아친다. 산 이름이라는 태풍 콩레이가 바다에 거대한 파도를 남긴다. 제주도에 몰아치는 파도 사진을 보다가 이 위험상황에 안전을 대비해야 함에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갑자기 가슴 떨림을 느낀다. 이런 기분은 어쩌면 파도를 타는 서퍼의 이야기, 『바바라인 데이즈』때문이 아닌가 싶다. 파도를, 물을 무서워하는 내 마음에 파도에 대한 환상과 도전의식을 함께 심어준.

[태풍 콩레이가 몰고 온 파도/ https://news.v.daum.net/v/20181005111056827]


  이런 마음으로 바다에 나간다거나 황홀경에 잠겨있다면 나도 자르징 노파에게서 저주를 들을지도 모른다.


“당신들 서퍼는 부모님에 대한 존경도 없고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한 존중심도 없어. 저런 바다에 나가서 목숨을 걸어? 뭐를 위해서? 이 마을에 대한 존경심도 없는 거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수 세대에 걸쳐 바다에 목숨을 걸어온 어부들을 존중하지 않는 거야. 여기 사람들은 이 바다에서 자기 목숨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어. 당신들은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없다고!”


  누군가에게는 생활의 터전인 곳, 그렇기에 위험에 맞서는 곳에서 목숨을 건 유희를 벌이는 서퍼들이 낭만적이지도 아름답지도 대단하게도 보이지 않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파도를 타는 일이 살아가는 힘이고 존재를 상기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바로 이 책의 저자와 그와 함께 한 서핑 동료들이 그렇다.

  2016 퓰리처상 수상작인데다가 ‘버락 오바마가 선택한 책’이란 수식을 받는 이 책은 저널리스트인 작가의 서핑과 함께 한 삶의 이야기다. 수영장에서도 허우적이는 내게 파도를 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세계에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파도를 타는 것 자체보다 수려한 이국의 해변풍경, 남태평양, 오스트레일리아, 아시아, 아프리카, 페루 등 작가가 간 모든 장소에 때한 끌림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거침없이 파도를 탈 때의 그 기분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한동안은 이 파도타기를 앓을 듯하다.


커다란 파도 속으로 나아가는 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공포와 황홀이 사물의 가장자리 주위를 돌면서 밀려갔다가 밀려오며 각기 꿈꾸는 사람을 덮치겠다고 위협했다. 지상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움이, 움직이는 물과 잠재된 폭력, 지나치게 진짜 같은 폭발, 그리고 하늘이 들어선 거대한 경기장으로 스며들었다. 장면은 펼쳐질 때도 신화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늘 광포한 양가성을 느꼈다. 나는 다른 곳 어디에도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른 곳 어디든 있고 싶었다.


  일찌감치 이 세계에 빠진 작가는 세계에서 유명한 서핑 장소로 꼽히는 10곳을 선정한 시기에 벌써 아홉 곳에서 파도를 탔을 만큼 서핑에 중독되었다. 그에게 서핑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어린 시절 하와이에서 하울리로서 이방인으로 낙인찍힌 순간부터 그는 서핑의 세계를 즐기며 자유에 대한 탐닉을 모험의 강렬함에 빠졌다. 서핑의 세계에만 빠져 오로지 세계를 돌아다니고 파도만 탔을 듯하지만 사랑도 우정도 일도 한다. 정치사회에 무관심하지 않고 학위를 땄고 저널리스트가 되어 있다.

  저자가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서핑을 하면서 깨달아가는 삶과 죽음과 인생에 관한 생각 덕분이다. 저자의 인생의 스승은 서핑을 통해서 얻어지는 생생한 감각과 관조로 가능하다. 파도에 쓰러져 부상을 입기도 하고 겨우 살아남은 일도 수두룩하지만 강렬한 태양 아래 푸른 파도의 소리는 심장을 벌떡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는 모양이다. 서핑은 저자에게 마리화나와 약물보다 더 중독되어 그를 이끄는 것이었다. 종군 기자로 활동을 할 때에도 결혼하여 아이가 태어났어도 딸과 함께 파도를 타는 그가 노년에 이르러 점점 거친 파도를 타는 것에 힘들어 하게 되더라도 그에게 파도를 타는 일은 멈출 수 없는 심장이었다. 자기탐색의 과정이었다.


남태평양을 전전하는 동안, 내 안에 뭔가 다른 것이 일어났다. 브라이언의 관점으로 보면 수염보다도 더 곤란한 것이었다. 나는 자기 변혁에 관심이 생겼다. 나는 우리가 옮겨 가며 함께 살아온 섬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괌에 가기 전부터 그렇게 해왔다. 폰페이에서 사람들이 사카우 잔을 둘러싸고 느긋하게 살아가며, 산호돌이 가득한 소세계에 깊이 빠져들었을 때부터였다. 나는 여기에 배우러 왔다고 생각했다. 그저 멀리 떨어진 장소와 사람들에 관한 몇몇 가지를 배우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존재의 새로운 방식을 배우고 싶었다. 바뀌고 싶었고, 존재적으로 덜 고립된 느낌을 받고 싶었으며, 뼛속까지, 사람들 말대로 이 세계에서 편안해지고 싶었다.


  서핑을 하는 동안 나이가 들어간다는 점도 있지만 서핑을 하기 위해 찾은 곳곳에서 매번 느끼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탐색 또한 저자를 성장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많은 나라를 돌면서 파도에 몸을 맡기는 그의 서핑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실제 파도를 타고 있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래서 저자의 희열과 공포와 두려움을 내가 느끼는 듯한 착각이 들면서 파도가 환영처럼 느껴지게 된다. 서핑을 하는 그들에게 전해오는 두 개의 상반된 말이 있다.

 

“큰 파도는 높이가 아니라 공포의 정도로 재는 것이다.”

“큰 파도는 높이로 재는 것이 아니라 허풍의 정도로 재는 것이다.”


  이 역설의 말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파도타기를 나는 해보지는 못할 것이다. 강렬한 끌림을 느끼지만 실행력이 떨어지느니만큼 인생의 버킷리스트에 올려두어 단지 동경으로만 간직하고 말지 모른다. 대신 인생의 파도에서는 이 두 가지 역설을 재볼 수는 있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