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가‘족’같은 사회


이상한 정상 가족, 김희경, 동아시아, 2017.


  ”모든 출생에 대한 차별없는 지원에 중점을 두고 출산율 위주 정책에서 삶의 질 개선을 위한 방향으로 전환“한다는 정부의 저출산대책이 발표됐다. 구체적인 내용과 집행은 정책의 방향을 따른다. “모든 아동과 가족에 대한 차별없는 지원”이라는 기조 아래 비혼 출산에 대한 지원을 시작으로 점점 확대될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한 지원을 기대하면 좋은 걸까. 정치권은 선거가 끝나서인지 다른 일로 바빠서인지 내가 몰라서인지 저출산대책의 방향과 수준에 대해 딴지없이 조용한 듯하다. 이런 정책방향을 놓고 포퓰리즘, 세금낭비라 외치는 이들은 아직은 없고 실행력이 미흡하다는 지적만이 쏟아지고 있다. 이제 ‘가족’ 의미에 대한 변화를 인정하고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정책 집행의 편리성을 위해 만들어진 ‘표준’, ‘규격’이 사회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만드는 요인이다. 특히 군사정권은 획일화된 시스템으로 일군 정책을 최고의 문화와 가치인 것처럼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처럼 고정·확장시켜 따르도록 강요했다. 자세히 알아보면 생각보다 많은 규율이 모두, 그 시절에 한사람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가족주의’가치·이데올로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한국식 가족주의의 토대가 어떻게, 언제 ‘정책방향’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였는지를 알려준다.


전근대사회에서 가족주의가 지배주의적이었던 건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한국 사회의 특이한 점은 흔히들 가족주의가 약해지기 마련인 근대화 과정에서 가족주의가 더 강력해졌다는 점이다. 근대화 과정 내내 국가가 ‘선 성장, 후 분배’의 논리하에 거의 모든 사회 문제를 가족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가, 정권을 위해 ‘가족이데올로기’가 펼쳐졌고 국민들은 신들린 듯이 그것을 따랐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불편하고 부당하게 타인을 억압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때부터 모든 문제를 가족이 책임지고 희생하는 것을 수용하고 신화처럼 퍼뜨리면서 국가에서 사회문제를 책임지고 복지를 확대하는 필요성을 불편하고 부당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의 근원에 이처럼 특정 정권에 의해 세뇌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근대화시키기에 약화되는 가족주의가 한국에서 강력해진 바탕에 국가가 개입되어 있던 시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가족에 관해서는 다시 근대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인가.

  ‘가족이데올로기’는 가족의 부정적인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 왔다. 특히 아내와 아이에 대해 ‘폭력’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인식을 비롯해 비혼·재혼·한부모·다문화 가정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 여성에게 부과되는 출산·양육·돌봄에 대한 과도한 책임, 국가주도로 이루어진 해외입양 등이 한국식 가족주의가 양산하고 있는 실태다. 나아가 한국식 가족주의가 결과적으로 양극화를 가중시키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회정책이 가족 단위로 설계되는 방식이 지속되면 가족을 형성치 못한 개인, 가족에게서 충실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개인에게는 사회가 또다시 불이익을 가하는 셈이 된다. 또한 소득보장, 교육, 돌봄의 양과 질 등이 가족에게 의존적일 경우 계층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질이 달라지므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양질의 교육과 돌봄 서비스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가족에게 주어진 자유선택이란 곧 개별경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책은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고 흔히들 ‘정상’이라 규정짓는 가족에게만 제도적인 혜택을 부여해왔다. 존재하는 모든 가족형태를 인정하는 정책방향에 지속적이고 굳건하게 굳어져 온 편견이 소멸될까. 저자는 ‘가족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도 제시한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저자는 ‘개인적 삶의 독립성을 보장하되 개인 삶의 질은 집단적 책임에 달려 있다’는 스웨덴의 예를 자주 들고 있다. 부모 체벌금지법이나 스웨덴의 보편적 공공보육방법, 육아상담소를 중심으로 한 부모교육 등 스웨덴의 전반적 복지정책에 대해 인상깊게 서술한다.

 

스웨덴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 찾을 때 저출산을 비롯하여 우리가 겪는 위기를 해소할 길이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거꾸로다. 삶은 집단주의적이고 해법은 개인주의적이다. 개인의 개별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 온갖 배타적 관계에 둘러싸여 집단주의적으로 살아가면서 육아, 교육, 주거 등은 다 각자 알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


  ‘내 가족일이니 관여치 말라’는 인식속에서 고준희양 사건과 같은 아동학대·살인이 지속되었고 아내에 대한 폭력을 넘어서서 ‘내 여친’을 들먹이며 데이트 폭력 또한 확산되고 있다. 이 폭력의 근원에 아이와 여성을 소유물로 보는 가부장제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 존재한다. 우스운 것은 이러한 가족주의는 가족내에서만이 아니라 회사와 사회에서도 확산되는데 회사는 늘 ‘가족처럼’을 강조하며 사원들을 부림으로써 이익을 취득한다. 언론에 대고 변명인지 인식하지 못해서인지 들먹이는 각종 사장·대표·회장의 말은 “가족처럼 여겨서”이다. 가족처럼 여겨서 착취하고 때리고 막막하고 성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렇듯 한국식 가족주의는 힘의 논리에, 입맛에 맞게 그 의미가 달라진 채 진행되어 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에 반대하는 개인의 인권의식이지 남의 아이도 내 자식처럼 돌보는 엄마의 눈, 전 사회의 ‘확대가족화‘가 아니다.


  저자는 촛불혁명을 거쳐 변화된 의식이 차별없이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를 형성하는데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여전히 배타적이고 편견과 차별은 이루어지고 있다. 의식은 양심에 기대어 변화하지 않고 욕망과 이익이 양심을 덮기도 한다. 일련의 사안들에 대해 근거없는 가짜뉴스들이 횡행하며 합리적인 판단을 흐리게 한다면, 편견과 차별을 부추기며 개인의 이익을 자극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 가족주의를 벗어나는 일도 힘겹지만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가 모두에게 어느 정도 합의된 수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막연하게 느껴진다. 저자의 기대만큼, 정말로 기대해도 좋은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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