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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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견뎌야 하는 사막


문맹-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한겨레출판, 2018.


  이 짧은 책을 사두고서 한해가 지났다.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거라고,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지만 읽고 싶어 ‘산’ 책은 왜 이다지도 책장 속에 오래도록 묵혀두게 되는지 모르겠다. 이 책은 그나마 책꽂이에 꽂아 둔 지 짧은 시간에 읽힘을 당한 책이다. 두루두루 보니 아직 묵혀둔 책이 많다. 사두고서 10년이 훨씬 지나서야 읽힘을 당한 책이 1년짜리 문맹을 꼴아보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매일 읽기만 하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줄을 모르는, 가장 나태한 소일거리를 하는, 게으른 자”인 줄 알았는데, 이 정의는 내게 허용되지 않게 되는 건가. 질병에 빠져 있었다 싶었지만 치유의 시기가 지나고 다시 질병에 들까 말까 했는데 새삼, 질병이랄 것도 없었다 생각하게 든다. 아무튼.

  작가의 어린 날의 기억과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과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이야기가 흐른다는 점에서 굳이 줌파 라히리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가 생각난다.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일과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프랑스어를 배우는 일은 엄청난 간극이 있지만 한편으론 끊임없이 타자로, 이방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심정은 큰 간극이 없다.

  읽기와 쓰기에 관한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에는 생존을 위해 말을 삼키고 달려야 했던 역사가 있다. 작가의 생애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언어로 표현해도 부족할 만큼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언어는 담백하다. 그날을 탈탈 털어 빨랫줄에 수백번은 걸어놓은 것처럼 건조하다. 그것이 사막을 견디어낸 작가의 언어였을까. 이 반복된 건조함이 작가의 생애에 대한 관음증적인 호기심을 지우게 한다.


아무도 러시아어를 알지 못한다. 독일어나 프랑스어, 영어 등의 외국어를 가르치던 선생님들은 몇 달 동안 러시아어 속성 수업을 배웠지만, 그들은 그 언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것을 가르칠 마음이 전혀 없다. 그리고 어쨌든 학생들도 그것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국민적인 지식의 사보타주를, 당연히 미리 계산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수동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저항을 목격하게 된다.


  헝가리 태생인 작가는 1956년 소련이 쳐들어왔을 때 여러 나라를 도망친 끝에 스위스에 정착했다. 작가는 모국어를 죽이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어를 적의 언어라 부른다. 그나마 러시아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얼마나 다행인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위로뿐. 마침 3.1절, 상황의 차이가 있었다 할지라도 헝가리인의 러시아어에 대한 ‘저항의 방식’이 부럽게 느껴진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려고, 일본어를 쓰고 말하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저항으로 스러져간, 수동적인 저항조차도 해보지 못한 그들을 생각하면…. 

  

공장에서는 모두들 우리를 친절히 대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 웃고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언어로든 글을 읽고 썼으리라는 작가의 글에 대한 갈망은 단지 작가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재적 의미를 얘기하는 것 같아서 숙연하게 느껴진다.

  나도 점점 문맹이 되어 간다. 시시각각 변하는 인터넷 상의 문자어를 이해하지도 적응하지도 못해 당황한다. 세상의 흐름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가 늘어만 간다. 그럼에도 알고 싶지 않은 말들이 넘쳐 나고 간극은 더욱 커져간다. 이것은 내가 견디어야만 하는 사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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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 스스로 ‘정상, 평균, 보통’이라 여기는 대한민국 부모에게 던지는 불편한 메시지
오찬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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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해!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오찬호, 휴머니스트, 2018.


  한국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삶은 아주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한번만 돌려 생각하면 이만큼 쉬울 수도 있을까, 그런 극과 극의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 어쩌면 양육의 다른 가치관이 개입할 여지가 없이 방식이나 태도가 획일적이기 때문일 거다. 좌우를 쳐다보며 결국엔 모든 것이 특정한 대학에 진학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으니까. 양육이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동일시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아이의 생각은 없는 채로 일관되고 획일적인 목표로 전진하면서 지켜야할 다른 많은 것들은 외면하려니 어렵고 힘든 건 아닐까.

  저자는 한국의 육아 문제, 한국 부모들의 육아 행태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출발선은 ‘출산과 육아’ 즉, 부모 됨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 이전, 연애와 결혼을 시작점으로 한다. 이는 한국의 육아에 관한 한 결혼 이전의 ‘무언가’에 의한 연장선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결혼한 이에게도 결혼하지 않은 이에게도 공감적 요소가 있을 것이다.

  우선 저자는 부모가 되는 선택을 한 이들에게 자식키우기는 일종의 과시적, 증명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비혼이 증가하는 사회에서 결혼을 왜 선택했는가에 대한, 아니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문제는 비혼에서 기혼자가 되는 그 ‘선택’이 가진 어쩔 수 없음에서 시작한다.


그만큼 비혼자들은 연애-결혼-출산에 대해 가장 현실적으로 고민한 사람이다. 이들이 드러낸 공포, 그러니까 ‘그 부모'와 다른 레일로 들어선 결정적인 계기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존재를 미약하게 만드는 경제적 사정이고 둘째, 면역이 없기에 버티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인간관계의 문제, 마지막은 지금껏 배운 것이 너무나도 무용함을 인정해야 하는 빌어먹을 성 불평등의 세상이다. 이를 감수할 각오가 있어야 기혼자가 된다.


  현실은 특히 여성에게 독박 육아와 강요된 모성에 놓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 현실에서 충분히 탈피할 수 있기란 어렵다. 은연 중 수긍하면서 과거로부터 답습된 잘못된 관행에 길들여지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은연 자기계발의 형태를 띠면서 흘러간다고 저자는 말한다.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했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친구들이 결혼 이후 변했다. 기혼자들은 평등이라는 이론을 화석화시키고 전통적 질서, 즉 ‘기울어진 운동장’에 적응하면서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고 있었다.


  저자가 관찰한 것일 테니 ‘과도한 육아 현장의 사례’는 흥미를 돋운다. 종종 기사로 접하기도 했고 익히 들어왔고 소문으로 접하기도 했던 그 사례들을 보고 있으면 역시나 답답하다. 한국에서는 ‘맘’은 유일하게 모든 것이 통용되고 이해되는 (부정적인 의미의) 만능프리패이며 이유를 막론하고 욕을 들어먹는 벌레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결코 자정되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다. 부정적인 현상은 난무하는데 그대로 굳어져서 흘러가버린다. 그리고 그 자체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이다.


자녀를 ‘내가’ 보호해야 한다는 범위를 넘어선 ‘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에는 정말로 많다. 많은 이들이 자녀보호와 자녀소유를 혼동한다. 마치 소유권이 있으니 어떻게 보호하든 간섭하지 말라는 식이다.


  저자도 상황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지만 서두에서 말했듯 특별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도대체 답없는 이 현상에 대해서 그저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는 방법만이 있을 뿐하다. 그러나, 누가 깨닫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냥 끊임없는 도돌이표, 뫼비우스의 띠 같기만 하다.


자녀소유는 ‘내 것’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올바른 사회적 가치에 자녀가 노출될 수 있도록 부모가 더 노력하겠다는 의미여야 한다. 그래야 내 아이 더 바르게 키우겠다는 다짐이 가능하고 내 아이 멋대로 키우겠다는 자기소유의 강박이 사라질 수 있다.


  그 노력이란 스카이캐슬과 같이 극단적인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면 형성이 되는 건가?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한데 그동안 엄마 혼자만이 아이를 키워왔기에 문제가 되었나? 육아의 책임이 엄마에게, 모성에게 짐지워진 현실에서 이 책 역시도 이 과도한 자녀소유로서의 육아방식은 엄마가 주도하는 것으로 말한다. 동조자이자 방관자는 아빠다.

  가만 생각해보면 서양에서도 ‘모성’이 강요되었다고 얘기하고 육아는 엄마에게 독박된 현실을 부르짖으며 이러한 ‘가부장제’의 가족구조의 해체를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나타나는 현실은 다르다. 물론 나라마다 형성된 사회문화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토록 심한 차이는 어떤 이유일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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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 소설가가 되는 길, 소설가로 사는 길
박상우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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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키가 컸을 거야


소설가-소설가가 되는 길, 소설가로 사는 길, 박상우, 해냄, 2018.


 하루에도 수백권의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모든 책들을 다 따라잡아 읽을 이유는 없음에도 어떤 날은 감격에, 어떤 날은 버거움에 벅차오르기도 한다.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시대, 시간 중고 거래가 활성화되는 시대, 작가 수입은 0으로 수렴해 갈 텐데도 끝없이 책들은 쏟아지고 작가 또한 탄생하고 이내 사라진다. 에세이에 대한 대중 반응은 높아가며 누구나, 저자가 되는 시대가 되고 있다는 점은 굳이 좋지 않게 볼 이유는 없겠지만 이런 시장을 보고 있을 때마다 시인, 소설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직업으로서의 시인, 소설가들을.  


책이 많이 팔리지 않더라도 10년, 20년, 30년 묵묵히 소설가로 정진하는 사람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책을 많이 팔아 돈을 벌진 못하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선 보이지 않는 재물을 쌓아가는 사람들이다. 인간과 인생의 뿌리를 들여다보며 그 스스로 뿌리가 되어가는 소설가들.


  ……그래도 경제적으로 힘들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게 되진 않을까. 아무리 ‘좋은 소설’을 쓰리라는 마음으로 정진한다 해도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힘겨움을 디디고서 정신의 재물이 차곡차곡 쌓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현실적인 꿈을 꾸고 실행해 가는지도 모르겠다. 

 

“나 3년 동안 노래연습 하루도 거른 적 없고, 뮤지컬 오디션도 빠짐없이 다 봤어.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건 없지만 내안에서 뭔가가 이만큼 키가 컸을 거야. 꼭 통장잔고가 늘고 취직을 해야만 발전하는 건 아니다.”  ―드라마 <메리대구 공방전> 中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귀를 뚫고 지나가는 드라마 대사, “내 안에서 뭔가가 이만큼 키가 컸을 거야.” 이 말은 머리를 때리고 심장에 묵직함을 주었다. 당장의 성과에 연연하는 것에 반성했지만 드라마가 나온 만큼의 세월이 지나서 내 안에서 ‘커진 키’보다 쌓이지 못한 통장 잔고에 집착하게 된다. 어쩌면 소설가가 못되는 이유, 또는 무언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에서 커져갈 무엇을 키우는 일보다 늘어가는 숫자에 대한 욕구가 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쉬이 ‘자기 부정과 비관’에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자기 부정과 비관은 인생의 어느 분야에서도 생산적인 길을 가지 못하게 만든다. 깊이와 넓이와 높이의 인생이 아니라 퇴보와 정체와 나락의 삶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끊임없는 질문이자 끊이지 않는 탄식이다. 나이 한 살 더 먹는다고 해서 판단과 결단이 명쾌해지지는 않는다. 자아는 혼란에 빠지기 일쑤다. 어떻게 하면 살에서 ‘무아’에 이를 수 있을까.


어떻게 살건 문제의 관건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예술가적 삶에 최대의 적이 되는 건 말하나 마나 ‘나’라는 망상체이다. 그것과 싸워 이기지 않는 한 원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를 버리고, 부수고, 비워야 한다는 점에서 예술도 도를 닦는 행위와 하등 다를 게 없다. 2,500년 전 석가모니가 설파한 ‘무아(無我)’를 소설 창작의 정신적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섬뜩한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책은 ‘소설가’가 되는 길에 관한 글이다. 소설을 써야 소설가가 된다는 점에서 소설쓰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소설가의 자세나 소설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글이 많다. 소설가로 산다는 일은 어떤 이들에겐 멋있어 보이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베스트셀러 작가는 몇몇에게 해당되는 천운이 필요한 일로 대체로 고난과 고독의 길임을 알려준다. ‘소설가’라는 제목에 맞게 소설가로서 경험을 알려주지만 굳이 소설가가 아니라 세상에 어떤 ‘꿈’을 가진 이들에게 들려주는 인생 선배의 경험담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 인생의 진로에서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 담겨 있다. 또한 소설독법에 대한 안내도 되어 있는데 소설 읽기가 어려운 이들이 참고하면 독서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느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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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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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합니다. 취향해 주시죠.

쾌락독서-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문학동네, 2018.


이 책에 등장하는 책들은 ‘추천도서’나 ‘필독도서’가 아니다. 누구 마음대로 ‘필독’이니? 난 ‘필’자만 들어도 상상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완장 찬 사감 선생이 고리타분한 책을 코앞에 억지로 들이미는 느낌이 든다(물론 그 필독도서가 내가 쓴 책인 경우에는 팅커벨이 반투명 날개를 흔들어대며 보물 상자에서 책을 꺼내주는 느낌이지만). 여기 등장하는 책들은 ‘그저 어떻게든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이다. 선정 기준은 ‘지금도 뭔가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지 여부’.


  작가는 이렇게 말하지만 어쩌면 작가가 읽은 책들만 리스트업 되고 있을 것이다. 애초 이 책 자체가 출판사의 요청에 의해 ‘기획된’ 것임을 밝히고 있듯이 말이다. 누구에게나 영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강력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책은 있다. 그들의 기억 속 책들에 관해 이야기를 풀기를 아무도 요청하지 않기에 글을 쓰는 일도 출판하는 일도 없을 뿐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 기억을 간절히 소환해 줄 것을 바란다. 그 자체가 결국 ‘추천’이란 이름을 달게 될 것이고 ‘필독’ 목록에도 올라가게 될 것이다.


나는 솔직히 취향으로 차별화하는 우아한 ‘인생 책’ 리스트를 볼 때마다 궁금해진다. 저 책들도 물론 좋았으니 언급했겠지만, 정말 저 책들이 평생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들이었을까?


  그러니 취향의 문제라면서 ‘우아한’ 책에 대해 굳이 하는 의문 속에서 책에 대한 차별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밖에 없다. 저자에게는 ‘우아한’ 책들에서 잊지 못할 인생의 기억을 안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말이다. 어떤 기억이든. 그냥 저자의 기억을 소환하는 책들을 ‘우아한’ 책들과 비교하는 것, 이것 역시도 ‘우아한’ 책과 그 책을 읽은 이들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는 듯하다. 대표적인 것이 거짓과 허세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으론 독서 취향을 가져볼 수 없도록 책과 멀어지게끔 자라도록 한 것이 누구냐, 그런 한탄을 하고 싶다. 그런 이유로 우아한 책을 읽었다 한다면 의문을 갖고 검증하려 하거나 마치 나쁜 일을 한 것쯤으로 여기는 태도가 형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작가는 ‘지식인들의 글에는 독자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삼엄한 차단 장치’가 있고 ‘생동감이 없고’ ‘비슷한 관 속에 누워 있는 귀족의 시신들처럼 우아하게 죽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문유석 작가가 읽은 책을 이야기하는 이 글들은 ‘삼엄한 차단 장치’를 치우고 생동감 있게 쓰려 한 듯하다. 수다를 떨듯 가볍고 경쾌하게 딱딱한 책보다는 ‘야한 것’을 기준으로 책을 선택하고 재밌고 즐거운 책들만을 골라 읽었던 지난날의 독서취향을 얘기한다.

  지난날 작가는 놀이보다 책장에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읽는데 몰두했었다고 말한다. 무협만화, 순정만화, 심지어 요리대백과 까지도.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도 만화책이나 무협지를 친구들과 돌려보며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고 말이다. 이쯤되면 작가에게 동류의식을 느끼며 제법의 사람들이 하이파이브를 날리려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는 ‘이문열을 거쳐야 하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이야기하며 1등을 달고 사는 학생임을 말한다. 반 전체에 국어를 가르치기까지 하는. 이쯤되면 완벽한 뒤통수요 배신자라 아니 할 수 없다.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고 그저 ‘우아하게’ 남아 있는 많은 ‘우아한’ 책들이 있었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지만 어떤 기억을 소환하든 독서가 주는 즐거움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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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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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손홍규, 교유서가, 2018-12-05.


  한파에 눈물이 떨어지지 않고 머물러서가 아니라 한해를 마감하는 날이라서가 아니라, 돌아보면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저녁’인 나날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저 인생사가 희로애락인지라… 흐르는 시간탓이라고 말할 밖에.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점점 이 세상과의 안녕과도 가까워짐을 자꾸 인식하며 그런 일들 또한 많아진다. 다친 마음과 몸이 한번에 돌아오는 날 또한 다반사이다. 새삼 나만이 겪는 일이 아닐진대 무어 이리 허우적거리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저녁』속에서 너무나도 닮은 아버지, 어머니를, 할머니를 만난다. 심지어 소까지도…. 짜장면이 싫다는 어머니는 이제 햄버거를 맛나게 드시는 광고가 등장하는 판인데 부모님은 여전히 ‘너희 먹어라, 나는 됐다’를 시전하신다. 까마득한 어느 때 손가락이 잘린 아버지는 붕대를 감아 시림을 막았다. 작가가 제 아비의 잘린 손가락을 보며 소설을 영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손가락을 보며 무엇을 했던가. 반복된 수술로 힘겨운 어머니가 내 끼니를 걱정할 때 나이든 딸의 끼니 걱정일랑 마시라며 서로 핑퐁처럼 걱정과 안부를 오가다 결국엔 무조건적인 ‘나는 괜찮다’는 말씀에 버럭으로 마감했던 날들을 떠올리는 것이 정말 사실인가. 그런가,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이 너희가 하는 대로, 하라는 대로, 너희 좋은 것이면 다 좋다더니 어찌 그리 선거에서만은 끝끝내 좋고 싫음이 분명하신지 꽁한 얼굴로 노여움을 풀지 않던 할머니…가시던 날도 선거 무렵이었으니 오히려 결과를 보지 못하고 가신 것이 더 나았으려나. 이산가족 상봉은 취소되고 북으로 띄운 편지만이 되돌아왔으니 직접 그곳으로 가셨던 게 더 빨랐을지도.


사실 나는 절망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 가운데 정말 절망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 싶다. 멀쩡하게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인데 깊이 절망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이토록 진부하게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손가락을 잃은 뒤로 아버지가 어떻게 절망했는지, 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절망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왔는지를 쓰고 싶다.


  우습게도 절망하는 건 나다. 누군가로 인해 생의 피폐함에 있었을 때도 절망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왔던 그들의 삶 옆에서 젊은 나의 포효가 가장 높았고 지속되었다. 그들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저 ‘아짐찮다’를 온몸으로 내보이고 있을 뿐. 통곡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어디에다 쏟고 있는 걸까. 

  이 책 작가인 아버지는 딸의 아픈 팔을 보며 아이가 자라 마음이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 많아질 것을 염려하는데 나는 조금이라도 몸이 아픈 채 돌아온 어머니를, 아버지를 보며 훗날 내 마음이 다쳐 돌아갈 저녁을 염려한다. 아직 닿지도 않은 날을 당겨와 마음이 푹푹 꺼지는 감정을 경험하는 이것은 두려움일까. 정직하게 흘러가는 시간으로 그들을 ‘여읠까’ 싶은 마음에는 그들보다 나의 감정만이 우선하여 있다는 생각에 미치도록 놀란다.

  이제는 몇 번을 확인하여 되묻고, 부연 설명을 곁들어야 그들, 내 부모님과의 이야기 한뼘이 지난다. 누군가를 말한대도 몇 번의 사람을 거치고, 몇 번의 사건들을 거쳐야 지칭하는 대상이 명확해진다. 단어는 또 말해 무엇하랴. ‘체험하는 순간에야 오롯이 내 말이 되기에’ 그들 세대의 단어와 지금의 나의 단어가 얼마나 먼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그리하여 돌고 돌아서 말하는 사이 이제야 세월이 품은 그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간다. 살면서 직접 보지 않은 것들 이외에 알지 못했던 것. 진즉 묻지 않았던 그들의 삶, 이야기.


이야기는 실제 삶을 불안에서 건져주지는 못하겠지만 그 불안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만약 이게 최소의 원칙이라면 좋은 문학은 이 최소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존재든 그 존재의 의미는 그의 내부에 있지 않다. 의미는 그에게 허락된 것을 넘어서는 순간 태어난다. 우리가 서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우리가 지난 세월 서로에게 무심했음을, 우리에게 사연이 없다면 우리가 헛되이 함께 살아오기만 했음을 말해준다. 이야기꽃은 남루한 삶 한가운데서 피어나 우리의 사연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꽃이다.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단어와 문장으로 써 내려간 작가의 지난 시간의 이야기가, 그를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가 작가에게 불안을 무사히 건너가는 기제가 되었을까. 작가가 쓴 소설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꿈을 꾸듯이 이 책의 문장속에서 허우적인다. 타인의 슬픔과 비극을 외면치 않고 ‘사람과 세상에 대한 예의’를 배우며 작가가 세상을 담는 동안 이 위안과 후회를 머금게 해주는 시선에서 나도 오래 머물게 된다.

  그토록 말없이 품고 있던 그들 생의 이야기가 또 한해 마감되어 간다. 한편으론 작가는 소설가로서 그들의 삶을 이야기로 담아내었지만 한 사람으로서, 자식으로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이유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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