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의 탄생 - 사회민주주의자 웹 부부의 삶과 생각 대우휴먼사이언스 19
박홍규 지음 / 아카넷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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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서비스 정신


복지국가의 탄생 - 사회민주주의자 웹 부부의 삶과 생각, 박홍규, 2018.


  한국사회에서는 보수(부르지만 극우에 가까운)라는 집단은 선거철이 되면 어김없이 복지관련 공약을 남발하면서도 뒤로는 복지예산을 깎으려 안달하고 정부의 복지 정책을 포퓰리즘이라 비난한다. 더 나아가 복지정책이 나오기만 하면 어김없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빨갱이 좌파 정책이라 부르며 정책에 반대하기 바쁘다. 그러면서, 늘 정부가 혜택을 주지 않는다고 손을 흔든다. 전세계적으로 복지국가를 지향세는 확산되어 가는 상황에서 복지정책이 수립될 때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좌파는 안돼’ 외치는 이들이 정녕 그 뜻을 알고 외치는 건가 궁금해진다.


사회주의라는 말에도 여러 뜻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재산권, 즉 사적 소유의 권리를 사회적 차원에서 제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 극단적인 제한, 즉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로 하자는 것이 공산주의인 반면, 모든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아니라 중요한 사회적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되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기본적으로 사유화를 인정하는 것이 사회민주주의다. 반면 모든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인정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중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를 우리나라 헌법이 금지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 반대로 인정하고 있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인정된다. 가령 우리나라에도 국유산업이 상당수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 헌법은 도리어 순수한 의미의 자본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책은 복지국가의 이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실천한 사상가이자 실천가인 영국의 웹부부의 사상과 실천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재벌 딸인 비어트리스 웹과 가난한 공무원 시드니 웹의 결혼이 이루어진 과정, 그들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협회 조직 활동 과정이 담겨 있다. 특히 저자는 웹 부부가 제시하는 복지국가 이념을 살펴보고자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전개된 웹 부부 수준의 노동조합운동을 포함한 사회개혁운동이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임금투쟁 같은 이익투쟁만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지금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전반적 사회개혁운동과 함께 전개되는 노동조합운동이다. 민주화, 교육개혁, 도시개혁, 공해반대, 생태보존, 반전평화 등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연대하면서 사회변화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만을 좁게 외골수로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파기보다 다른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과 함께 폭넓고 유연하게 사회변화의 동반자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복지국가의 핵심은 가난의 책임을 개인이 아닌 국가로 보는 것이다. 웹 부부 역시 「소수파 보고서」에 이러한 생각을 기본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빈곤선의 개념을 제시하는 ‘내셔널 미니멈(national minimum)’의 창시자였다.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최저임금제, 1일 8시간의 노동으로 최저 휴식보장, 최저위생보장, 아동의 대학까지의 교육과 장학금을 지급하는 최저아동보장이 핵심으로 이는 현대의 최저생활보장의 개념과 같다.  저자는 웹 부부의 정신을 공공의 정신이라고 얘기한다.  


자본주의 정신 대신 공공의 정신이 필요하고, 사적인 부의 축적이라는 동기 대신 공공서비스라는 동기가 필요하며, 그것에 의해 비로소 사회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했다. 사회의 합리적 재조직화, 공공복지의 제도화, 각자의 공공정책에 대한 보편적 참여, 즉 사회환경의 전반적 변화는 인간의 정신, 성격, 동기에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


  웹 부부의 사상은 현재에도 세계가 지향하는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한 세기 전의 두 부부가 제시하고 발전시켜간 사상이 현대에도 유효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논의가 타당하고 탄탄했다는 얘기일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최저생활보장에 대해 반발이 심한 것을 보면 지금도 한 세기 전의 영국 사회를 이끌었던 이들의 생각과 차이가 없는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말일 게다.

  웹 부부 각각 뛰어난 사상가이고 실천가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생각과 이론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다. 사상의 한계점과 개인의 한계점이 있다. 저자는 다른 학자, 동료들의 웹 부부에 대한 견해를 덧붙이고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지적한다. 분명한 건, 웹 부부의 복지국가에 대한 생각이 오늘날 복지국가의 기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웹 부부는 1912년 한반도를 1주일간 방문하여 당시 한반도 최고급 호텔에 머물면서 글을 썼는데 한반도 사람들을 세계 최하의 문화 수준을 가진 미개인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2020년 한국은 영화산업의 심장부인 미국 오스카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주요 부분을 휩쓸었고 BTS가 전세계가 음악 시장을 휩쓰는 등 문화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이런 때 웹 부부가 한국을 방문했다면 평가는 달랐을 텐데. 

  한국에서 보수는 웹 부부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을 것 같은데 백여년전 두 부부의 한국에 대한 평가 때문이 아니라 두 부부가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가 ‘닥치고 싫은’ 맹목적인 집단과 그래야만 잘 살 수 있는 집단들일 것이다. 그런 집단에게 시드니의 견해를 자알, 보라고 내밀어 본다.


시드니는 집단주의적 경향이 모든 국민에 의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 목표는 모든 국민이 현 정부에 대해 일체감을 갖도록 지향되어야 하며, 그 조직은 정부의 행동이 특정 계급의 권력이나 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복지를 균등하고 일관적으로 실현하여 계속적인 사회발전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집단주의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을 방해하는 지주와 자본가에게 집단주의적 이념을 침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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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메리 파이퍼 지음, 안진희 옮김 / 위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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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렷하지 않은 사계절처럼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메리 파이퍼, 위고, 2019.


  1972년 첫 내담자를 만나 30여 년 동안 심리치료사로 일한 메리 파이퍼가 젊은 심리치료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에세이다. 좀더 이론서에 가까울까 했지만 이제 심리치료사의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 심리치료사로서의 기본 자세에 관한 경험과 생각을 적은 글이다. 편지형식으로 보내는 이 글은 무척 따뜻하고 정감있는 어조다. 또한 정갈하게 느껴진다.

  심리치료사는 상담과정에서 수많은 유형의 사람을 만난다. 약물과 알콜 중독자, 학대당하는 여성, 분노 가득한 십대, 많은 사람을 돌보는 사람, 이러저러한 상황에 놓인 가족, ‘무관심한 배우자, 성질 못된 십대 자녀, 만사를 자기 뜻대로 하려는 상사에 대해 하소연’ 하는 사람들… 저자에 의하면 ‘우리들 모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인간성으로부터 도망치려 하기’ 때문이다. 다만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에게 심리치료사는 어떠한 태도를 보일 것인가.

  각각이 처한 상황에 맞는 방법을 행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말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방법은 오랜 경험을 통해 심리치료를 체현한 심리치료사가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맞게 구현해 내는 것이다. 저자가 말한 좋은 심리치료사의 자세로서 인상적인 것은 ‘애매모호함’에 대한 것이다.


좋은 심리치료사들은 애매모호함을 잘 참습니다. 한 인간이 처한 상황은 다채롭고, 다면적이고, 특별합니다. 하나의 방식이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건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방법이 아니면 절대 안 돼’라고 생각하는 완고한 심리치료사들은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흑백논리에 이런 자부심은 회색빛 세계에 살고 있는 내담자들을 미칠 지경으로 만듭니다.


  심리치료사들은 지치고 아프고 우울한, 최대한 많은 부정적인 언어를 끌어모은 상태의 내담자들을 만난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어떡하든 그 심연을 이끌어 내고 싶어 안달복달하게 될 터,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의 결과를 빨리 보고파 하는 마음일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타인의 심연에 이르기가 쉬울까. 애매모호함을 잘 참는다는 말이 정말로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싶다. 바삐 흘러가는 세상에서 점점 뚜렷해지지 않는 사계절처럼 모호한 경계를 지나고 나면 좀더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그 지점을 지나고 나서야 계절은 있었다는 것을.

  이처럼 수많은 이들의 애매모호함을 견뎌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끌어내고 생각의 방향을 전환시키려 애쓴 좋은 심리치료사를 보면 나도 그 상담실 문을 열고 싶어진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일방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전환시키고 문제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신뢰를 형성하며 상호작용하는 관계라고 말한다. 일방적으로 지식과 기술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에게서 심리치료사 또한 배우게 된다는 것을 저자는 말한다.


좋은 심리치료사들은 예전의 상식을 유지하는 일과 새로운 생각을 고취하는 일 사이에 놓인 평균대 위를 균형을 잘 잡고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이해가 심오한지 혹은 우리의 조언이 적절한지 우리는 절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자연과학이 아닙니다. 그보다, 심리치료에는 체계적인 지식과 직관, 친절이 필요합니다. 심리치료에서 정말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진짜 사람과 진짜 사람이 서로 연결되는 일입니다. 


  내가 이제 막 심리치료사의 길을 들어섰다면 이 책을 읽으며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심리치료사가 되고픈 열망에 들뜰 것 같다. 가슴 두근거리며 설렘과 신념을 다지는 그런 마음이 들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해도, 아니 심리치료사가 아니더라도 어떤 물음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 생각하고 헤쳐 나갈 자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다만, 보헤미안 속담 하나가 눈에 띄었는데, 긍정적인 해석이 되지 않는다. 아, 저절로 행해지는 삐딱해지는 마음. ‘신’이시여, 어찌 그런…. 나는 저런 기쁨은 사양한다, 절대로. 아,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기엔 나는 심리치료사로서의 자질은 안되갔구나!


테드 쿠서의 『로컬 원더』는 오래된 보헤미안 속담을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신은 가난한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싶을 때, 먼저 그에게 당나귀를 잃게 한 다음 다시 찾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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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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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하리라


다가오는 말들-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어크로스, 2019.


  일상의 말들이 귀에 꽂힌 채 그저 흘러가지 않을 때가 있다. 어떤 단어나 문장들에 더 민감해 질 때는 안타깝게도 아름다운 말일 때가 아니다. 언제부턴가 일상을 뒤흔드는 말들은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되었다. 물론 이런 말의 속성은 사람을 뒤흔들기 위함이다. 다만 그 말들의 범위와 빈도가 너무 넘쳐난다는 것. 상식은 찾아볼 수 없는 떼쓰기 떼거지 언어가 난립하며 모든 일상을 파묻는다. 


아름답거나 아릿하거나, 날카롭거나 뭉근하거나. 타인의 말은 나를 찌르고 흔든다. 사고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몸에 자리 잡고 나가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숙성되고 연결되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면서 남의 말을 듣는 훈련이 조금은 된 것 같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내가 편견이 많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같은 말들의 반복, 반복. “아름답지 않고 아릿하지 않고 날카롭지 않고 뭉근하지도 않은,” 저열하고 저급한 말들. 언제부턴가 그런 말들 속에 살아간다. 나는 이런 말들 속에서 한편의 글들을 완성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내가 쓰는 언어는 아름다움을 상실하고 감성을 잃어가는 것 같다. 이미 오래전부터, 오래 전부터. 나를 무장시키는 단어들로 나를 채우게 된다. 이런 언어 상실의 시대, 그래도 내가 숨쉴 수 있는 것 또한 언어란 사실. 그리하여 실검에 오르는 말이 숨통을 틔우는, 언젠가부터 내게 다가오는 말이 되고 있다.

 《다가오는 말들》의 저자 은유는 일상에서 읽고 들은 말로 채운 글이다. 그 말은 저자가 집중하는 말이고 글쓰기 교실의 학인들의 이야기들이다. 저자가 ‘쓴’ 글이지만 그러나 저자가 ‘들은’ 말이다. 저자는 “서로가 경쟁자가 아닌 경청자가 될 때, 삶의 결을 섬세하게 살피는 관찰자가 될 때 우린 누구나 괜찮은 사람이 된다”고 말하며 듣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편견, 무지, 둔감함은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건 아니었다. 결핍보다 과잉이 늘 문제다. 타인의 말은 내 판단을 내려놓아야 온전히 들리기 때문이다. 타인의 입장에 서는 일이 잘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지만 적어도 노력하는 동안 성급한 추측과 단정, 존재의 생략과 차별에 대한 예민성을 기를 수 있었다. 우리에게 삶을 담아낼 어휘는 항상 모자라고,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크다.


  늘 타인의 말을 잘 듣겠다 하지만 쉬이 들어지지 않는 말이 있다.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말들이 정말로 ‘거지같아서’, 그 말이 가진 ‘악랄함 때문에’ 들으면 내가, 그 말의 강도로 말해야만 할 것 같아서 움츠러들게 된다. 나 또한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차마 들을 수 없는 말, 들어서는 안되는 말 앞에서 나는 기꺼이 경청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겠고 그들에게는 ‘괜찮은 사람’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은유의 글은 삶의 눅진함이 솔솔히 피어나는 진솔하고 정겨운 글이며 따뜻한 시선이 담긴 위로가 되는 글이다. 부딪혀온 나쁜 말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나서 반성한다. 경청, 조금 더 여유롭게 ‘어거지’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조급하지 않고 나를 갉아대지 않으며 더 길고 오래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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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줄다리기 - 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 톺아보기
신지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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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이 짜장이 되도록

언어의 줄다리기-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 톺아보기, 신지영, 2018.


  말은 인격을 나타낸다는 말이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에도 지극히 저급한 인격을 나타내는 이들이 있다. 그래도 전혀 괘념치 않아하는 ‘집단’이 있다. 그들이 표출하는 집단적 품격과 인격은 무지가 아니라 ‘이기’에서 나온다. 무지라면 좀더 알려주면 되지만 저 표독하고 끝없는 이기의 언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버리고 만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을 믿기에 쓰레기처럼 쏟아져 나오는 그들의 말이 세상을 울릴 때마다 환멸이 쌓여간다. 이런 감정을 의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꽤 익숙하게 사용해온 언어일지라도 특정 집단에 의해 지속적으로 사용될 때면 그 단어가 가진 뜻과 뉘앙스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게 어느 때부턴가 새롭게 생각하게끔 되는 단어들이 늘어간다. 지양되어야 할 언어가 확산되는 것은 특정한 집단의 ‘이기’적 생각을 담은 개인미디어의 확산도 영향이 클 것이다. 언어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려는 그 지독하고 지난한 노력들. 그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무용한 일이겠지만―던져주고 싶다.

  이 책 『언어의 줄다리기』는 흔히 사용하는 단어를 선정하여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기에 매우 쉽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단어를 선정하고 있기에 오히려 그 점이 아쉽다. 가령 미망인이나 ‘여류’ ‘여교사’ ‘미혼-기혼’ 등에 담긴 이데올로기는 너무나 익숙하게 지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새롭게 등장한 언어나 은어가 담고 있는 표현을 다루었다면 현재의 시점에서 작용하고 있는, 작용하려 하는 이데올로기를 더 잘 알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저자는 언어 사용에 민감할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언어감수성을 높일 것을 권고한다. 언어가 사고체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제일 먼저 선택한 것은 ‘각하’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뜻에서부터 언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를 설명한다. 정확하게 따진다면 잘못된 표현이지만 대통령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어 왔고 권력은 그것을 선호했고 별칭을 법적으로 강요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이 단어는 지양해야 할 단어로 꼽고 있다. 아니 명백히 틀린 단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각하가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사람의 신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신분제를 전제하는 이 표현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부인하는, 반민주공화국적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부르기를 강요당함으로써 언어사용에 사고체계에 남아 있는 이 단어는 은연 중 여전히 신분제를 옹호하는 단어가 아니고 무언가. 특정한 집단이 특정한 인물에게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해진다.

  우리나라 언어의 장점으로 꼽히는 높임말 사용에 대해서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그토록 나이에 민감한 이유, 그것은 호칭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 히딩크 감독이 경기진행시 호칭에 존대를 없앤 일을 우선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일은 누군가를 부르는 일부터 시작한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호칭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 항상 필요했고 그것이 ‘나이’를 알고 나서 이루어졌다.


호칭의 문제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민감하고 심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실은 모두 언어 사용과 관련이 있다. 한국어 사용자들은 대화 상대자와 호칭과 서열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대면하여 말을 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한국어 작동방식이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체계를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선조들은 위아래 열넷 정도는 모두 벗으로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동일한 해에 태어난 경우만을 오로지 친구로 편하게 말을 하고 선후배의 엄격한 위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잔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타깝다.

  저자는 크게 여덟 개의 단어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얘기하고 있는데 그중 많은 부분은 차별요소를 가진 단어다. 특히 성차별적 언어다. 미망인, 여교사, 여검사 등등의 단어. 매우 익숙한. 이 외에 ‘자장면’ 투쟁사와 더불어 ‘자장면‘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짚는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짜장면‘을 발음하지 못하고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자장면‘의 세월 동안 자장면의 매출 또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사람들은 왜 그토록 ’짜장‘을 허하기를 요구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재미있다.


언어 규범은 언어 사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데 언어 사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기본적으로 언어 사용자들의 사용에 기반해야 한다. ‘관’으로 대표되는 몇몇 사람들이 만든 규정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규범은 관이 만들고 ‘민’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민이 만들고 관이 정리하는 것이다. 즉 관이 해야 할 일은 규정을 만들어 민의 사용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민의 언어 사용을 관찰하여 민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 현실을 규범화하는 것이다.

  

  한편으론 ‘짜장면’은 되는데 왜 다른 표현은 안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비민주적이고 차별적인 언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맞다. 자연도태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제재방법 또한 필요한 일이다. 넘쳐나는 혐오표현을 바로잡는 일은 왜 안되는지, 언어가 가진 힘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이 책을 읽어가며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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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 한나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그래픽노블로 만나다
켄 크림슈타인 지음, 최지원 옮김, 김선욱 감수 / 더숲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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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과 싸이코패스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켄 크림슈타인, 더숲, 2019.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생애를 주요한 세 번의 탈출로 정리한다. 한나 아렌트는 베를린에서 파리 그리고 뉴욕으로 국경을 넘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다. 나치의 억압을 피하기 위한 치열한 생존이었다. 1906년생 한나 아렌트는 유대계 독일인으로 어머니로부터 ‘유대인이라고 공격 받으면 유대인이라는 사실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고 배웠으며 14살 무렵 칸트를 모두 섭렵한 아이였다. 칸트의 저서만이 아니라 칸트가 읽은 책까지 모두 읽고 고대 그리스어를 공부하고서는 그리스 비극 연극단을 결성하는 매우 열정적인 아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똑똑한. 이런 한나 아렌트가 일찌감치 다른 대학생들, 훗날 유명한 사상가들로 알려진 이들에 비해서 두각을 나타냈음은 당연하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쓴『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으로 유명하다. 세상 모두가 나치는 악마라고 생각하고 있던 때에 그들은 누구와도 다를 리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얘기함으로써 동료 학자들로부터 질타와 외면을 받았다.


아이히만을 사악한 괴물이라고 한다면 어떤 면에서 그의 범죄를 용서해주는 거야. 그리고 우리 모두 잠재적인 죄를 짓게 되지. 철저하게 사유하지 못한 죄.

슬픈 진실은 선과 악에서 마음을 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제일 사악한 일을 저지른다는 거야.

  

  결이 다를지 모르지만 최근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준 고유정 사건의 프로파일러들이 고유정은 ‘싸이코패스’가 아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에 관해 프로파일러를 비난하는 글들이 넘쳤다. 고유정은 싸이코패스가 되어야만 고유정의 행위가 설명되는 것처럼 댓글들은 성토했다. 드러나는 단편적인 것만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어떻게 보면 ‘싸이코패스’라는 말 한마디는 모든 사건의 이유를 쉽고 간단하게 치부해버리는 말처럼 느껴진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이 사건의 이유가 단지 ‘싸이코패스’라고 한다면 이해가, 되는 건가. 그렇게 되면 법적 처벌의 강도가 달라지는 건가. 이런 물음이 떠오르지만 어쩌면 그래서, 프로파일러를 비난하는 이들의 심리가 어쩌면 나치 전범자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와 같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한나 아렌트의 이 통찰은 인간과 인간의 행동에 대해 더욱 경악과 경각심을 갖게 함은 분명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전에는『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악이 어떻게 발생하느냐’를 다루었다. 이 모든 한나 아렌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있다. 한나 아렌트는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첫 번째 인물인 스승 마르틴 하이데거를 만난다. 하이데거는 한나 아렌트에게 사상적 영향을 미친 사람이자 연인이었다. 평생의 연인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하이데거는 유부남이고 한나 아렌트는 두 번의 결혼을 한다. 첫 번째 남편 권터 슈테른, 두 번째 남편은 독일 시인이자 철학자 하인리히 블뤼허다. 한나 아렌트는 권터 슈테른의 사촌 발터 벤야민과 사상적으로 교류가 깊었는데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만큼이나 발터 벤야민에 매혹된다. 아케이드를 보면 자동적으로 벤야민이 떠오르는데 벤야민의 자살은 생각할 때마다 매우 안타깝다.

  지성인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싶은 한나 아렌트는 생애 수많은 학자와 사상가, 예술가, 정치가들과 교류했다. 그 시대가 그러하였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상가들이 세상의 폭압 속에서 인간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들은 참으로 애틋하고 벅차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책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사상의 나눔, 그 사유와 철학자들의 대화를 들여다보면 (어쩌면 이 책이 그것을 지나치게 극화한 측면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심오하다는 생각, 어렵다는 생각 외에도 조금은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무슨 말장난인가 싶기도… 삶은 던져짐이라… 학창시절 하이데거의 생애에 관해서는 배우지 않고 그저 시험에 나올 정도의 하이데거의 이론에 대해서만 배우기에 하이데거의 삶을 보고서 놀랐다. 이 책을 통해서도 하이데거의 사상적 깊이, 사람 자체에 대한 끌림을 얻지는 못했다. 하이데거의 책을 통해서는 느낄 수 있을까. 엉뚱하게도 한나 아렌트가 왜 하이데거에게 끌렸는지 이해하지 못함은 외적인 부분에서가 아니라 한나 아렌트의 생애 한나 아렌트가 발전시켜온 사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건 꼭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사상가들의 사상과 행동의 일치는 항상 같지 않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제시하는 대표적인 사상적 이념을 쉽게 이해하게 해준다. 사유의 중요성,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존재적 고민을 왜 이토록 어려운 길로 헤매며 이해해야 싶은 생각들을 할 때가 많은데 그 핵심을 잘 포착할 수 있다. 만화형태의 이 책은 무겁고 딱딱하지 않은 문체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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