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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원이든 오천만원이든



백온유,   [반의반의 반

2025 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백온유외, 문학동네, 2025-04-02.


  아버지가 그랬다. 폰지갑에 있던 5만원이 없어졌노라고. 어디에서 없어진 건지는 알지만, 아니 그렇기에 누군가를 의심하지만 자신이 폰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기에 따지지 않을 거라고. 오천만원도 아니고 오만원에서 시작된 아버지의 이 의심은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염려를 강하게 하기보다 아버지의 과거 행동까지를 소환하며 뭔가 점점 거리를 두게 되고 골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건 정말 소설같은 이야기다. 백온유의 반의반의 반속 영실처럼 오천만원이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버지가 그 말을 한 곳은 병원이었고 나는 심각하게 나타났던 섬망을 떠올리며 정말 치매가 진행되는 건 아닌가, 의심했다. 점점 아프고 병들어가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연민이 변질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건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백온유의 반의반의 반에서 소설에서 잃어버린 오천만원의 행방은 영실이 잃어버렸다고 할 수 없다. 잃어버렸다면 영실은 그 돈을 찾아야 하는데 찾지 않는다. 딸인 윤미와 손녀인 현진은 오천만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두 모녀는 오천만원을 요양보호사 수경이 가져갔다고 의심한다. 정작 수경은 영실이 자신에게 준 것이라 하고 영실은 수경을 감싸며 더 의지한다. 요양보호사가 영실을 돌보고 있는 것처럼 영실은 인지능력에 어려움을 겪는 치매 환자다.

  오천만원은 각자에게 과거를 떠올리고 미래를 그리게 한다. ‘윤미현진이 떠올리는 과거 속에서 영실은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른 나이에 현진을 낳고 젊은 시절 이혼하며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살아온 윤미는 결정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조차 영실의 외면으로 딸인 현진과 오래도록 헤어져 있어야 했다. 이때, ‘영실윤미에게 한 말은 현진이는 내가 돌볼 테니 죗값을 잘 치르고 와라˝였다. 그렇기에 점점 윤미는 마음이 자꾸만 차가워지고 오한처럼 다가오는 원망이라는 감정을 느끼며 어머니의 모성에 의문을 가진다. 계속 어머니에게는 허전함을 느끼게 될 것이지만 이런 어머니의 인색한 사랑을 서운해하는 것조차 부질없을 정도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러면 현진은 어떤가. ”어릴 때부터 현진은 자신의 외할머니가 남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왔고 할머니를 조금도 닮지 않은 엄마를 바라보며 줄곧 아쉬움을 느꼈다“. ”오십대 중후반까지도 할머니에게는 영화배우 같은 아우라가 있었고 외로움과 고독의 냄새를 풍기며 자식들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어느 정도 위안을 가지기도 했다. 강인한 할머니, 하지만.

 

현진은 할머니가 고관절 수술을 받은 후로 어느 정도는 자신과 엄마에게 위악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발음이 어눌해질 때, 괄약근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때, 다리에 힘이 없어서 손녀의 작은 등에 억지로라도 업혀야 할 때, 그럴 때마다 정신이 온전한 건 너무 괴로우니까. 자기 자신이 초라해질수록 말을 함부로 하고 노망을 가장한다고 이해했다. 할머니는 천부적으로 연극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태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어디까지가 위악이고 어디까지가 노망인지 알 수 없어졌다.

 

  애정과 사랑이라는 게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상호 주고받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 DNA에 박힌 것처럼 맹목적이고 당연한 일이라거나 사람의 도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따위로 복잡미묘한 마음을, 현실적인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손녀 현진이 바라보는 영실의 모습이 인상깊게 남는다. ”위악이란 말이. 내가 느낀 지점이기도 하다. 분명히 아픈 노인은 위악을 부릴 줄 안다. 아픔을 과장할 줄도 안다. 그리고 영실처럼 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본다. 그것이 현실적인 치료를 하게 하고, 아픈 몸을 의탁할 자식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일 테니까.

  또한 윤미처럼 내가 돌봐야 하는 환자가 된 아버지를 보며 점점 많이 힘들고 지친 아픈 환자’, ‘늙은 아버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아버지로서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하셨느냐, 내게를 따져가게 되는 것을 본다. ‘도리에 매몰되어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빠져 있다가 점점 내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늘어간다. 미래를 그리기보다 과거의 일들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잦다. 돌봄이란 끝나지 않을 일이다. 멋지고 다정한 아버지가 아니었던 과거를 계속 떠올리며 반의반의 반으로 줄어드는 마음을 만들어내는 게, 아픈 부모를 돌보는 많은 이들이 겪게 되는 일일까. ‘영실이 잃어버렸다는 오천만원이, 아버지가 잃어버렸다는 오만원이 실제하는 힘을 작용하긴 할까. 이 불편한 감정적 소모가 반의반의 반이라도 줄어들 수 있는 방법은 찾을 수 있을까. 삶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다는데, 소설에 대해 삶을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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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치기



  최근 재활용센터에서 절단된 다리가 발견되었다. 이 뉴스 이후 그 다리는 요양병원 입원 환자가 다리가 심하게 부패하여 절단한 것이라는 뉴스가 이어졌다. 어느 요양병원 환자의 입에서는 구더기가 나왔다는 뉴스가 전해진지 며칠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사건을 보면서, 다시금 요양병원에 대한 노인들의 두려움과 기피가 크겠구나 생각했다.

  요양병원을 가는 것은 이제 끝이 아니겠느냐는 인식, 심각한 몸 상태에도 요양병원을 꺼리는 아버지에게 요양병원을 가라고 더 이상은 말하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는 절대 알란이 되지 못할 것이므로 더더욱.

  창문 넘어 도망치는 대신 자식들에게 소리부터 지를 아버지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점차 변화하는 상황에서 요양병원을 믿고픈 마음이 가득한데, 현실에서 나타나는 요양병원 사건을 접하고 보면 이로 인해 안타깝게 욕을 먹는 병원도 존재하겠지만 안타깝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창비, 2022-09-02. /

 그 개와 혁명 -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예소연 외,  다산책방, 2025-02-18.

 

 

  절대 혁명할 수 없는 아버지로 인해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그 개와 혁명 속 아버지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아니, 사실 창문 넘어 도망치신 100세 노인이 더! 아버지도 100세가 되면 달라지려나.

  죽음이 유쾌할 수는 없겠으나 삶을 보다 긍정적인 마무리로 그리고 세상에 대한 포용과 이해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데, 그리하여 엄숙하거나 혹은 형식적인 장례식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그런 것을 생각해봤는데 안될 일이다. 좀더 편안하게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한편으로 그것은 내가 삶에 가지는 태도와도 관련되어 있음을 느낀다. 아버지가 삶에 대하여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속 아버지와 그 개와 혁명 속 아버지는 닮아 있다. 그래서 두 소설이 너무 닮은 느낌이었다. 두 소설 속에 나타난 혁명. 전위적인 분위기, 무엇보다 두 아버지들의 성격이나 행동들이 너무나 같다. 그러나 소설을 소설로 보지 못하고 아버지의 생애에 더 초점을 두고 보니 내게 이 두 소설은 낯설게, 그리고 멀게만 느껴지던지.

  새삼스레 아버지의 생애가 어떠했다고 해도 마지막 즈음 아버지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해방하고 죄고 있던 것을 좀더 놓기를 바랐건만. 그렇게 되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좀더 가지지 못한 것에 분노하고 보다 더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없을 거라는 불안에 휩싸인 모습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

  너무 오래 생각해보지 않은 부모님의 노후. 죽음을 향해 가는 나이에 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돌봄이란 것이 사회화로 대체되고 있지만 온전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될 일이 없다. 돌봄은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힘겨운 일이 되고 있다. 아니, 죽음이 그런 건가.

  소설 속 부녀 관계가 낯설어서인지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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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들의 별점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유시민, 김세라, 은빛, 2026-03-25.

 


 

  희한한 광경을 봤다. 그것도 이 있는 곳에서, ‘독서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이 광경에 놀라 흔한 말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기가 막혀 탄성도 튀어나왔다. 참 애달프다 싶기도 하고 짜친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특정 시기부터 집중적으로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의 연장선이겠거니 해도…… 유럽 도시 기행 3편이 출간되기 전이었으니 집중될 곳이 여기였나?

  내게 이 책은 강순희의 삶이었다. 특별히 인혁당 사건 희생자의 아내 강순희도 아니었고 그냥 강순희였다. 그건 강순희 삶의 일부였을 뿐이다.

  발단은 이 책은 강순희의 이야기이니 강순희에 대해 더 검색하다 출판사 소개글도 읽고 스크롤을 더 내리던 과정에서 본 텅 빈 별점 때문이다. 알라딘 서재 리뷰는 별점을 작성토록 하고 있는데 별점을 매기는 게 탐탁지 않아 서재에 글을 쓰던 초창기에는 거의 페이퍼로 작성했다. 어느 순간 리뷰로 몽땅 올리고 있지만 여전히 내 서재는 페이퍼 수가 더 많다. 타인의 글에 별점을 매기는 건 쉽지 않다. 좋았어도 별로였어도 편하지 않다. 내 별점이야 내 기준에 따라 부여하는 건데도 신경쓰인다. 어차피 내 감상을 적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공개된 공간에 작성하는 마당에 내 기준의 일관성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보면 소심하게 대충, 어떨 땐 신중하게 대충 별 수를 클릭하고 별점이라는 게 없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부여할 별점에 대해 항상 조심스럽다는 말이 더 맞다. 아무튼, 별점!이 어떤 상품을 평가하는데 가시적이긴 하다만, ‘테러라는 말처럼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순수한 상품의 가치를 난도질하는 데도 직빵이긴 하다.

  그래서 별점. 뜬금없이 책의 별점과 리뷰, 나아가 좋아요를 이렇게 들여다보기도 처음이다. 한편으론 그건 또 타인의 이 책에 대한 의견이고 감상이니까. 그런데, 별점이 너무 낮은 리뷰가 연속적이라 어떤 부분들이 별로였는지,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를 보았는데, 이런!

어떻게 서로 다른 리뷰어들의 서재 구성이나 리뷰의 수, 리뷰를 작성한 시기, 리뷰의 글자체와 글자 줄간격, 내용들이 거의 같을 수가 있지? 별점에 색깔이 있는 이들의 리뷰를 보면 각각 개성있는 서재 구성과 글자체가 보였다. , 그럴 수도 있다 싶다만. 그럴 수 있지.

  좋아요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클릭해봤다. 좋아요를 누르면 이 글을 좋아요 한 사람들목록이 뜬다. 딱히 서재의 글이 없기도 하지만 좋아요 누른 사람들의 서재 구성과 글자체나 글의 내용이 왜 다 비슷한 걸까.

  재밌는 건 리뷰에는 구매자도 뜬다는 거다. 구매하지 않은 이들의 별점은 왜 또 그렇게 하나같이 낮게 나타나는지. 물론 책을 사는 곳이야 오프라인도 있고 다른 서점도 있으니 꼭 구매자로 표시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나처럼 도서관에서 주로 빌려 읽는 경우도 많을 테다. 이 책의 경우 출간되고 나서도 몇 달 내내 계속 지역의 전 도서관 대출현황을 보았을 때, 작은 도서관에서도 쉽게 대출이 되지 않을 만큼 인기도서였던 걸 생각하면 책을 빌려 읽기도 쉽지 않았을 거다. 읽고 싶은 책도 무수히 많은데, 시간들여 공들여 굳이 맘에 안 드는 이의 책을 읽는 심리는 뭘까. 아니, 적극적으로 그 책이나 작가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고 감상을 공유하려는 그 마음의 기저는 뭘까.

  물론, 안다. 왜 그러는지

  그냥 너무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고 그게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오늘부터 또 계속 여기저기 일어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굳이 이 곳을 찾아와 다시 들여다보았다는 거다. 어제 이후 날짜로 업데이트 된건 없는 건가 싶어서, 여전히 그게 잊혀지지 않아서, 이걸 굳이 글로 남긴다. 나도, .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이 글을 좋아요 한 사람들수십 명 이름이 일렬로 뜨는데 하나같이 마치 유령들이 줄지어 선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이름 옆에 프로필 이미지가 하나같이 텅 빈 채 있어서다. 마치 유령들이, 귀신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영혼없이 흔들리고 있는것 같아서, 갈 곳 모르고 자꾸 엉뚱한 길로 가는 것 같아서, 이 잔상이 너무 깊게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 서재의 많은 이들이 서재명에 따라 프로필 이미지를 정체성처럼 나타내며, 수많은 책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책 이야기 하는데, 책을 토대로 삶을 이야기는 책이 있는 공간에서 무엇 꺼낄 것이 있다고 나를 감추고 영혼없는 모습으로 적의만 가득한 걸까.

, 그러고보니 나도 프로필 이미지가 없다. 그건 귀차니즘 때문이기도 하고 뭘 넣어 알라딘 서재의 가 될까 확정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새삼 유령처럼 보인 이미지를 떠올리고 보니 프로필 이미지를 채워넣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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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데이[탱크]


탱크, 김희재, 한겨레출판, 2023-07-25.

 


  탱크가 핫하기에.

  이 소설은 2023년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덕분에 아니 때문에, 이 책을 정리할 시간을 갖는다. 이 책에서 느꼈던 그 이미지에는 스타벅스가 일으킨 탱크 데이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탱크 텀블러를 확장하면 소설 속 탱크가 되려나.

 

  소설 속 탱크는 전투용 차가 아니라 컨테이너. 5평 정도되는 텅 빈 기도실이다. 흔히 이러한 기도가 먹히는 곳이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이듯 탱크 또한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마을 야산에 놓인 밀폐된 공간이다. 그냥 놓인 빈 공간이 아니라, ‘자율적 기도 시스템으로 홍보되고 커뮤니티에서 예약제로 운영되고 돈도 받는 곳이다. 마케팅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상업시설 같다. 최초의 탱크 설립자 루벤에게 사사 받아 탱크의 시대를 창립한 이는 황영경이라는데, 루벤의 이름은 종교 색채가 강하고, 이런 설립자 운운은 사이비냄새를 열렬하게 풍기기도 한다.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빈 컨테이너를 기도 공간이라며 운영하는데 왜 사람들은 종교 공간이나 시설이 아닌 이 탱크를 찾는가. , 비종교인도 있을 테니……. 그것도 그렇지만 탱크에서 기도하면 원하는 미래가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미 그러한 형태로 이 공간은 홍보되었다. 근데, 바로 이런 이유가 사이비의 전형 아니던가.

  물론 소설에선 탱크를 이렇게 말한다. “뿌리 없는, 종교도 아니고 작정하고 사람을 홀리는 사이비도 아니고 딱히 자기계발도 아닌, 그야말로 뭣도 아닌 것이라고. 하지만 설립자 루벤은 주술처럼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그 공간을 믿는 순간부터 이미 변화는 시작됩니다. 텅 빈 공간에서 기도를 하는 순간,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고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죠.

 

  어쩌면 너무 뻔한 말. 그리하여 사람을 현혹하는 말. 이미 저러한 공간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을 현혹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탱크 데이라는 날을 만들어 낸 것처럼. 이미 조롱이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홀린 듯이 모여드는 이들은 그것을 알기 때문 아닐까. 마음껏 욕설과 조롱을 펼칠 공간이 있다는 것, 허락이듯 구원이듯 그것을 허용하는 공간이 주어졌으니, 주저없이! 뭔가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신성한’ ‘영험한곳으로 홍보되는 탱크를 찾는 사람들의 면면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보지 않아도 알 듯하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그 삶에서 어려움외로움불편함슬픔등등을 겪은 이들이 찾을 것이라는 걸. 이들이 하는 기도의 내용은 욕망의 성취 혹은 결핍의 채움, 그리고 고통의 치유. 공간이 주는 상징에 의미의지를 더해 사람들은 제 결핍과 욕망을 내어놓는다. 어쩌면 자기성찰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쏟아내고 버리고 싶은 공간으로서 사람들이 탱크를 선택했다. 어떤 이는 실제 종교시설을 찾을 것이고, 어떤 이는 심리상담사를 찾거나 병원을 찾을 것이고, 어떤 이는 점집을 찾을 것이고, 어떤 이는 친구나 가족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을 것이다.

  ‘탱크 데이에 이 책이 떠오른 걸 보면, 제목 때문만이 아니라 여전히 사이비 종교와 같은 맹목적인 믿음의 문제로 탱크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탱크를 찾은 이들 중 왜 둡둡은 닉네임으로 나오는지, 둡둡은 죽는지, 성정체성은 어떤 경우라도 해결되지 못할 문제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있지만, 믿음과 신념에 관한 문제 이 부분이 강한 건 여전하다. 그럴 것이라 예상한 듯 작가는 한국에 탱크의 시대를 만든 황영경이 손부경에게 하는 말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게 아니라 탱크를 믿는다고.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잘못된 숭배가 시작될 수 있다고 말이야. 너는 언젠가 사람들이 탱크를 신으로 모시게 될 거라고 했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탱크 안에 가만히 앉아 억만장자가 되게 해달라고 비는 신자들만 남을 수도 있다고 했어. 그때 난 네가 나를 믿지 않는 것만큼이나 기도하는 이들을 믿지 못한다는 걸 알았어.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너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 그런데 부경아, 그거 아니. 그렇게 사람을 믿지 않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라는 거. 너는 삶을 방어하듯 살지. 늘 최악의 것을 먼저 상상하고 그래야 최악의 것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고 믿지.

 

  무엇이든 결국 선택한 자의 몫이라 이야기한다. ‘탱크또한 그러한 것이라면, 컨테이너 탱크는 계속 이어질까. 적어도 탱크를 찾는 이들이 저마다의 사연들로 희망을 꿈꾸기도 하며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가기 위한 믿음을 품는 곳이라고 한다면 탱크 데이 스타벅스는 어떤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나. 적어도 문화를 파는 공간이라는 스타벅스에 맞게 어떤 문화든 파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도 있겠다. 저렴하고 몰염치한 문화도 수용되는 곳. 그것을 부추기는 곳이 한국형 스타벅스라는 것. 권력을 향한 풍자도 아니고 5.18이나 민주적 가치나 활동, 참혹한 참사에 대한 조롱을 당연시하는 마케팅. 그러한 행태가 우리나라 대기업에서 이루어졌다는 것도 결재라인을 거치는 동안 전혀 걸러지지도 않았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도대체 그 공간은 어떤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기에 가능한 것인지. 이런 일들은 왜 이렇게 반복되는지, 이러한 행태를 해도 수치심도 느끼지 못하고 제미를 느끼고 나아가 돈까지 번다니, 그치지 않을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소설 속 탱크가 우후죽순 늘어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탱크 데이에 몰려드는 무리들이 있는 것처럼, 그러한 행태가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 이들의 지속된 신념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인지 탱크에 가두어 그들의 내면의 소리가 무엇을 뱉어내는지 듣고 싶, 아니 듣고 싶지는 않다. 뻔한 말같지 않은 말이 난립할 테니까.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는 그저 긍정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조금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더라도 그 믿음이 무엇인가를 따져봐야 한다고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한 고개를 힘겹게 넘었다 싶어 숨을 돌릴라 치면 무섭게 되돌아가는 어떤 힘이 있는 듯, 계속 제자리를 맴돌게 하는 나라다.

  여러 사건들로 단련된 민주시민들이 탱크를 뒤집고 단도리를 하는데도 조금만 숨을 돌리면 되돌아가고 무수한 탱크 데이가 생겨나 회의가 들라치면, 이처럼 불매운동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누군가와 삶을 나눈다는 것은, 누군가와 어떤 시간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소설 속 문장을 방어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수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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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정원바우어새


소설 보다 : 2025, 강보라, 성해나, 윤단, 문학과지성사, 2025-03-14.

 

 

  감사의 정원’. 실시간 검색어를 보자마자 떠오른 건 바우어의 정원. 바우어의 정원은 따스하고 나른한 봄날의 정원을 떠오르게 했다. 모네가 그린 그림같은 프로방스의 어느 정원의 풍경을 떠올렸는데, 책을 읽고 각인된 건 새틴 바우어새였다.


  정원에서 연상된 기억으로 감사의 정원기사를 클릭했다가 다시 한번 이 새대가리를 떠올리는 아이러니. 새틴 바우어새(Satin Bowerbird)라는 이름은 (쓸데없이 정장을 갖춘) 젠틀한 새를 연상시킨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섬에서 서식하고 우리나라말로는 정자새라고 한다는데 이 새의 특징이 정원(Bower, 亭子)’을 만들기 때문이다.

  암컷새에게 구애하기 위해 수컷새가 타고난 외관을 가지고 있다거나 탁월한 기술을 발휘한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새틴 바우어새가 가진 기술은 집짓기로 한국 결혼 시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기술이다. 바우어새가 짓는 집은 새들이 일반적으로 짓는 둥지와 달리 크고 화려하고 정교하다. 집을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파란색 물건들로 정원을 꾸민다. 파란색 물건은 꽃이며 열매며 깃털이며 다른 종의 사체 등 자연에서 얻은 것 외에 인간이 만든 파란 플라스틱 종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바우어새의 종은 다양하여 파란 물건이 아니라 녹색이나 빨간색 등을 사용한다거나 집을 꾸미는 방식과 형태 또한 다양하다). 가히 탁월한 건축가요 인테리어 능력자라 할 수 있다.


[EBS 다큐프라임:천국의 새 2- 너에게 정원을 바친다]

 

  바우어새는 거대한 집을 짓고 갖가지 파란 것들로 장식하고 나면 온갖 기교를 부려 암컷에게 구애한다. 그러나, 짝짓기가 끝나면 암컷을 쪼며 괴롭히고 결국 내쫓는데 쫓겨난 암컷이 혼자 새끼를 기르든 말든 관심이 없다. 이미 짝짓기를 끝낸 후부터 새로운 암컷을 찾을 결심을 하고 제가 그토록 구애하며 매달린 암컷을 내쫓은 거니까. 이 바우어새는 그렇단다.


새틴 바우어가 파랗고 쓸모없는 물건들로 공들여 정원을 장식하듯, 사람들 앞에서 고통의 파편을 훈장처럼 늘어놓던 내담자들. 그들은 오직 그 순간에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삶에서 상처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사람들처럼.

 

[KBS동물티비 : 애니멀포유 animal4u_새틴바우어새의 비밀의 정원]


  그렇다. 나는 파랗고 쓸모없는 물건들로 공들여 정원을 상식하듯, 사람들 앞에서 고통의 파편을 훈장처럼 늘어놓은기괴한 바우어의 정원이 된 광화문 광장을 본다. 마치 수컷 새틴 바우어새가 지어놓은 바우어를 보는 기분이랄까. 무엇을 위한 구애인지 누구를 위한 구애인지 구애 자체에 매몰되어 버린, 어떤 종. 감사의 정원엔 6.25 참전국들의 공을 기리기 위한 석재 조형물이 늘어서 있다. ‘감사의 빛이라는데 기사에 나타난 대로 받들어 총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조형물. ‘감사의 빛인지 감사의 빚인지 감사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 이 조형물과 정원은 새틴 바우어새가 매몰되어 지은 바우어 같지 않은가!


마지막에 좀 이상한 말을 했어요. 제가 겪은 건 유산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출산이라고. 자기가 유학한 프랑스에서는 다들 그렇게 표현한다고요. 제가 어리둥절해하니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하고 마는데, 오디션 끝나고 그 몸짓이 계속 떠오르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왜 뒤늦게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지…… 왜 자꾸 뭔가를 헐값에 팔아넘긴 기분이 드는 건지……

 

  받들어 총. 우리가 기억해야 할 6.25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 마땅히 해야 할 감사가 왜곡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지, 왜 자꾸……. 암컷 바우어에게 수컷 바우어가 지은 그 공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의 공간이자 범죄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 여전하다. 어떤 이들의 결집은 억지스러운 말과 타인을 향한 비난과 험한 말을 쏟아붓는 것, 총칼을 받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지원하고 널리 퍼뜨린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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