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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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2018.


이성적 진리의 반대는 무지와 오류이지만, 사실적 진리의 반대는 고의적 거짓말이다. 사실적 진리는 이성적 진리보다 훨씬 더 깨지기 쉽다. 사실이란 우연적인 것이고, 또 사실들이 참되거나 거짓이어야 할 아무런 필연성이 없으므로, 사실적 진리를 부정하거나 또는 고의적인 거짓말로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 된다. 사실적 진리가 어떤 사람의 기본적인 확신을 방해할 때는 엄청난 적대감을 맞닥뜨리게 된다. (…) 그녀는 조직적 거짓말, 이미지 메이킹, 기만 그리고 자기기만에는 한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으로는, 압도적인 권력에 직면했을 때 진리를 말하는 자는 무기력해 보이는데도, 체계적인 정치적 거짓이 붕괴하기 시작하는 지점은 결국 다가온다. 정치적 거짓말은 사실적 진리를 파괴할 수 있지만 그것을 결코 대체하지는 못한다.


  정치인들이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코로나 19 상황에 관한 시사프로에 나온 의사의 발언이다. 이 말을 들으며 정치인이 있어서 좋았다보다 미치겠다, 차라리 없어져라 생각했던 날들이 더 많았음을 생각했다. 현재 상황이 어떤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대안을 마련하여야 할 정치인의 늘 한길로만 가는 발언-비상식적이고 무책임한 정치적 거짓말-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말이 아닌 것은 걸러야 하지만 ‘어떤 말’들은 마구잡이로 키우는 언론으로 인해 속시끄럽고 귀따가운 일은 여전하다.

  사실적 진리를 요즘 말로 팩트라고 얘기하면 될까. 이것을 하는 명백한 직업군이 존재함에도 ‘시민’이 사실적 진리를 찾아내고 그에 대한 해석까지 하는 일은 오래되었다. 명백하게 의도적인 사실적 오류가 난무할수록 시민은 스스로가 언론인이 되고 정치인이 되어 간다. 이것이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의 회복’, ‘정치 영역의 회복’일 것이다.


아렌트는 자신에게 항상 근본적이었던 것과 우리에게 근본적이어야 할 것─시민이 그들의 목소리가 공적으로 들려질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의 정치적 삶을 날카롭게 벼리는 진정한 참여자가 되도록 하는 열망─을 표현했다. 그녀는 공적 자유가 살아 있는 현실이 되는 곳에서 혁명정신의 발견과 개념화를 시도했다.


  이 책이 출간된 당시에는 ‘난민’ 쪽으로 좀더 초점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난민 증가 상황에서 아렌트가 지적하는 ‘난민’ 문제에 대한 시각이 난민문제로 격한 갈등이 부딪치는 사회에서 시사점을 주었다. 한나 아렌트의 저작과 그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아렌트 사상의 본질은 정치와 연관되어 있다. 정치적 행위의 결과. 


아렌트의 권력 개념(과 정치이해)에서 굉장히 놀라운 점은, 그것을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방식, 즉 한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over 지배하는 통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권력은 수평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복수의 개인이 함께 행위하고 서로를 정치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여길 때 나타나고 성장하는 것이다.


  정치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물음은 정치가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에서 그 답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치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권력개념이 아니라는 아렌트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하고 간과할 수 없는 개념이다. 정치가 ‘정치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 정치인 중에는 사실적 진리를 왜곡하고 충분히 조작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것이 정치행위로서 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꽤 오래 주창하고 실행해 오기도 했다.

 다만 왜 이렇게 사실적 진리를 왜곡하고 정치적 막말을 선동하는 정치집단에게 내 삶의 대리를 맡기는가, 의문이다. 내 삶이 정치에 의해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모르지 않으면서 오래도록 정치는 엘리트‘님’이 하는 것으로 ‘그거나 저거나 다 똑같다’라는 식으로 생각해왔다면 아직도 정치는 빨갱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아렌트가 필요하다. 악의 평범성도 전체주의의 기원도 위에서 내려와 강제로 주입한 ‘의식’, 신화처럼 굳어 있는 세뇌당한 습성이 만들어낸 사유의 문제이니까.


오늘날 우리가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아렌트가 우리 앞에 아직도 버티고 서 있는 위험들을 예민하게 잘 이해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 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우리의 정치적 운명을 책임지라고 촉구한다. 아렌트는 우리가 공동으로 행위할 능력이 있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능력이 있으며, 자유를 지상의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분투할 능력이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병이 있으면 진단을 하고 치료를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선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올림픽 때문에 이탈리아는 확진자 수가 증가하기 때문에 코로나 검사를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선거가 가까워옴에도 한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코로나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코로나 19가 뚫리게 만든’ 한국 정부는 무능하고 탄핵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때때로 ‘이런 말’을 쏟아내는 정치인과 특정 집단의 말이 소위 ‘먹힌다’는 사실이 아찔하고 영원한 난제로 다가온다.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의 생명을 건졌다는 31번 환자의 말까지는 한계일까. 악의 평범성에 반하는 사례인지 해당하는 사례인지 건지… 이러저러한 생각 속에 되묻게 된다. 아렌트의 말처럼 우리는 공동으로 행위할 능력이 있을까. 자유를 지상의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분투할 능력이 있을까. 한나 아렌트 때문에-덕분에가 더 어울리지만-, 시민의 혁명정신과 정치 회복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한나 아렌트를 통해 그것을 읽어야 함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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