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하지 않은 빛.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앤서니 도어, 민음사, 2015-07-10 .


  단문. 현재형 문장. 표현의 유려함. 인상적인 구성. 먹먹한 여운.

  이 소설에서 느끼는 특징이다. 2015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작가는 10년에 걸친 기간 동안 이 소설을 완성해 나간다. 10년이라는 시간, 오랜 시간일수록 많은 자료를 들여다보며 더 길게 이야기를 늘일 수 있을 듯도 싶은데 작가는 어쩌면 이토록 정갈하게 이야기를 풀어 놓았는지.

  처음 이 소설을 읽고 나선 먹먹하고 아린 마음이 지속되었는데 그렇게 1년 여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른 만큼 마음이 안정되는가 했더니 표지만 봐도 아린다. 마리 로르와 베르너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여러 장르에서 자주 접한 2차 세계 대전의 고통을 겪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전쟁속에서 스러져간 인물들의 이야기는 늘 마음을 당기게 된다. 특히 이 두 주인공이 소녀와 소년이며 좀체 만나기 어려운 맑은 영혼이기에 그럴 것이다. 


실제로는 말이죠. 수학 상으로는 어떤 빛도 눈에 보이지 않는답니다. p230


  어떤 빛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절망 속에서도 마리로르와 베르너는 ‘빛’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 불친절하고 참혹한 시대에서도 그들 자신의 ‘빛’을 잃지 않고 성장한다. 그녀가 단지 볼 수 없기에 나치가 찾아 헤매는 보석에 초연한 것은 아닌 것처럼 베르너 역시 전쟁의 상흔 속에 자신을 파괴하지 않으려 애쓴다.


뇌는 완전한 암흑 속에 갇혀 있습니다. 당연한 사실이랍니다. 어린이 여러분. 그 목소리는 말한다. 뇌는 두개골 속 깨끗한 액체 속에 떠 있지, 빛 속에 있는 게 절대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뇌가 정신 속에 지어 올리는 세계는 빛으로 가득합니다. 뇌는 색과 움직임으로 넘실거립니다. 그런데 어린이 여러분, 뇌는 단 한 점의 빛도 없이 살아가면서 무슨 수로 우리에게 빛으로 가득한 세계를 지어 주는 것일까요? p80~81


  어릴 때부터 시력을 잃고 박물관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둘이서 살아가던 마리로르는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 생말로로 피신한다. 박물관 관장의 명으로 전설의 133캐럿짜리 블루 다이아몬드 ‘불꽃의 바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 개의 모조품을 더한 총 네 개의 다이아몬드 중 아버지가 진품을 가진 것인지는 모르나 이로 인해 보석을 노리는 나치의 추적을 받는다. 상황을 보기 위해 파리로 갔던 아버지마저 실종된 상황에서 마리로르는 라디오를 송신하며 전쟁을 견뎌낸다.『해저 2만 리』를 읽어주면서,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절박하게 전하면서 기다린다.

  베르너는 독일 탄광촌 고아원에서 여동생과 함께 지내며 쓰레기장에서 주운 고장난 라디오를 조립하며 프랑스의 과학 방송을 청취한다. 이것은 베르너를 통신 기계에 대한 관심과 재능으로 이끈다. 그리고 이 능력으로 인해 나치의 눈에 띄어 청년 정치교육원으로, 전쟁의 현장으로 투입된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군의 마지막 방어 기지인 생말로로, 연합군의 폭격이 무참하게 진행되는 그곳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필연처럼 베르너가 듣게 되는 마리로르의 메시지. 독일 소년과 프랑스 소녀의 짧은 만남. 그러나 그 만남을 위해 두 아이의 인연의 끈은 오래 전부터 촘촘하게 이어져 있었다.


제파르 박사가 말한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끄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야. 예를 들어 진주, 그리고 왼편으로 감긴 조개류, 그러니까 왼쪽에 입이 달린 조개 같은 것들이 그래. 최고의 과학자들도 이따금씩 자기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거든. 그렇게 자그마한 것이 그토록 아름답다는 것에 혹해서 그런 거야.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니까. 오직 강한 사람만이 그런 것에 끌리는 감정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 있어.” p87~88


  마리로르에게도 베르너에게도 삶의 순간 순간마다 ‘혹’하는 때가 있었을지 모른다. 비단 보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로르의 라디오를 송신하며 메시지를 전하는 레지스탕스 활동같은 것, 베르너가 나치에 순응하며 전쟁속 군인으로서의 행한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그대로 살아가는, 그런 ‘혹’. 그런 충동. 그러한 무수한 ‘혹’의 순간들에 등을 돌린 그들은 강한 사람이었다.  


내가 시력을 잃었을 때 말이에요, 베르너, 사람들이 나더러 용감하다고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떠났을 때도 사람들은 내가 용감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용감해서가 아니에요. 내겐 달리 방법이 없었는걸요. 난 자고 일어나면 그저 내 인생을 사는 거예요.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p371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자고 일어나 제 인생을 묵묵히 살아나갔다. 또한 눈만 뜨면, 제가 혹한 탐욕을 찾아 남의 인생마저도 제 인생처럼 휘두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역사는 늘 이들이 반복되어 흘러갔다. 인간의 삶에 욕망이 무조건 나쁜 것도, 그래서 나쁜 결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욕망엔 종류가 다양하니까. 당연 욕망을 욕망하는 종류와 방법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소설 속에 이야기의 줄기로 나오는 쥘 베른의 소설과 더불어 과학적 접근의 ‘빛’에 대한 이야기가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타인에게 까지 피해를 입히는 종류의 욕망에 집착할 때 찬란한 다이아몬드 ‘불꽃의 바다’의 저주처럼 영원히, 멈추지 않는 악운을 맞게 될 것이다. 그 찬란한 빛 속에 감겨 버린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때, 그 인생은 나의 인생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러니 눈을 뜨란 외침이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다. 삶의 곳곳엔 언제나 선택의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잊지 말아야 할 그것들.


눈을 떠요. 그리고 영원히 감기기 전에 그 눈으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요.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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