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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가운데 좋은 작품도 드물지 않습니다. “좋은 작품” 속에는 아마추어가 평가할 수 없는 “문학적으로 높은 성과를 지닌” 것도 있겠고,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독법” 안에서의 것도 있겠습니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문학적으로 어떻다, 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성공했다고 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높은 박스오피스를 향유하고 있지만, 사회적인 시각으로 보면 경계해야 할 작품을 말합니다. 당연히 많은 독자들이 상찬하고 있는 책 가운데 골랐습니다. 그리하여 열 개의 높은 인기를 향유하고 있는 작품을 고른 아래 글을 다 읽으시고 팬심에 그어진 스크래치 때문에 마음 상해하실 분도 틀림없이 한두 분이 아닐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자 했을 때부터 정말로 쓰고 있는 지금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건 아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이 돌을 던질까, 뭐 걱정까지는 아니어도 쉽게 쓰게 되지 않더군요.
말이 깁니다. 비난은 나중에 받는 것으로 하고 일단 시작하고 보겠습니다.
1. 존 윌리엄스, <스토너>
진짜 착한 소설이다. 무엇보다, 잘 읽힌다. 유려한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이끄는 대로 거부감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미주리 주 깡촌 시골에서 대를 이어 농장을 경영했으면 하고 바라는 부모가 없는 돈을 대 농과대학에 보냈더니 뜻밖에 영문학과 글쓰기에 놀랄 만한 잠재력이 있음을 발견하고, 숱한 고생 끝에 젊은 나이에 테뉴어가 되는 인물, 스토너의 인생. 이 한 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숱한 사람들, 특히 여성이 희생된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친구들이 죽어가는 동안 연구활동에 매진하고, 별로 사랑하지 않는 세인트루이스 은행장의 딸과 혼인하고, 젊은 여성과 연애도 하고 이별도 한다. 스토너의 성공 뒤엔 특히 여성의 희생이 줄을 잇는다. 그런데, 독자들에겐 이런 과정이 마치 스토너가 희생자인 것처럼 읽힌다.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스토너만큼 비겁한 데다가 파렴치까지 한 인간도 별로 없다. 존 윌리엄스의 장애인과 여성을 보는 시각에 큰 문제가 있다. 페미니즘 시각으로 보면 이렇게 주장하는 것도 타당하다. "이게 책이냐!" 최루 가스 가득한 뽕짝.
2.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이 책은 읽고나서 독후감도 쓰지 않았다. 겉으로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하고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숙고해볼 것을 주장하고 있으나, 하퍼 리의 시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흑인 톰 로빈슨을 누명 쓴 범죄자라고 하는 건 뭐 전형적인 착한 미국 소설 스타일로 볼 수 있는데, 어쨌거나 착한 역의 부 래들리(2 미터쯤 되는 키에 숨어 살고 다람쥐와 고양이의 날고기를 먹고 프랑켄슈타인보다 더 흉측하게 생긴)에 대한 선입견도 서양의 동화(또는 크리스마스 영화 <나 홀로 집에 2>의 옆집 할아버지)에서 흔히 나오니 그렇다고 치자. 문제는 악역을 맡은 유얼 집안 사람들을 향한 시각이다. 그들은 흉한 외모에 거친 성정, 어디로 보나 친밀한 구석이 없는 완벽한 시골 도시의 하층계급이다. 난폭한 성정의 가난한 하층 계급을 가해자로 지정한 이 작품을 쓸 당시의 하퍼 리가 35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진 루이즈가 여덟 살 소녀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35세의 하퍼 리가 본 시각이 아니라 조숙하되 아직 철없는 루이즈의 시선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작가 하퍼가 나하고 같은 리李, 또는 이씨 성을 갖고 있어서 웬만하면 이 작품은 목록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지만, 선을 위해서라면 진실의 은폐도 가능하다는, 이게 60년대 초반까지 일반적인 중산층 미국인의 계급 인식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보통의 시민이라면, 인간 말종은 더러운 하층 인민들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 책의 광고문구처럼 성경만큼 많이 팔리는 작품의 필자라면 작지 않은 문제다.
3.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일본계 영국인. 잠자고 있다가 스웨덴 한림원에서 온 전화를 받고 자기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니까 몰래카메라 찍는 줄 알았다는 소감을 남긴다. 나도 소식 듣고, 이시구로? ‘이 씨 구라’ 아냐? 했다. 내가 읽은 이시구로는 이 두 작품이 전부다. 그런데 둘 다 매우 수상하다. 전체주의를 경험하고, 그것에 의하여 좋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러웠다. <부유하는…>의 주인공인 화가 오노는 군국주의에 적극 가담한 전범으로, 일본이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지 간에 이젠 상황을 좀 더 낫게 만들 기회가 왔다고, 복구 중인 도쿄 시내를 바라보며 감격해 한다. 잘못에 관한 유감표명은 시집 못 간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장인 짜리한테 말로 한 번 하는 것이 전부다. <남아 있는 나날>에서는 달링턴 가문에서 35년간 집사 생활을 한 스티븐스를 등장시켜 충실하고도 무비판적 복종의 미덕을 자랑한다. 하지만 달링턴은 나치의 수장 히틀러와도 연결이 되는 친독파이며 파시스트로 영국 내 파시즘을 신봉하는 세력의 우두머리다. 일본과 영국에서 가장 높은 정도의 전체주의 의식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변호하고, 은폐하고자 하는 이시구로를 어떻게 수상한 정치적 작가로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인간의 책을 몇 권 더 읽어볼 작정이긴 하다.
4. 올가 토카르추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이 양반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하지만 이시구로처럼 나로 하여금 경멸하게 만든 작가는 아니고, 다른 작품들은 다 좋은데 이 책 딱 한 권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도 독자 마음에 다 들 수는 없겠지. 폴란드와 체코의 접경지역, 산악지방 작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주인공은 대규모 교량 건설 일을 한 경험이 있는 퇴직 건설 엔지니어 야니나 두셰이코. 여성이다. 폴란드 전국체전에서 투해머 종목 은메달 출신이니 건장하고 아직도 힘이 장사일 듯. 이이가 개 두 마리와 함께 오직 세 가구만 있는 폴란드판 설국의 산골에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식처럼 키우던 개 두 마리가 총에 맞아 살해당하고 만다. 시간이 더 흘러도 상실감은 마음의 상처로 남았는데 주민 왕발이 죽어 염을 하는 가운데 자기 개를 죽인 인물들이 누구인지 확인하게 된다. 이리하여 두셰이코 여사는 개 두 마리의 복수를 위해, 작은 산골 도시의 유명인사, 심술궂기도 하고 나쁜 버릇이 있기도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기독교도들의 아버지도 있고,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서장,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모피공장 사장 등도 있다. 이에 두셰이코 여사의 사이코패스적 행동을 시작해 관련된 모든 사람을 죽이고, 시신을 훼손하기도 한다.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점을 문제 삼는 것은 토카르추크의 수려한 문장과 호소력 가득한 필력이 독자로 하여금 개 두 마리 때문에 유력자 네 명을 죽이는 사이코패스 주인공을 지지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잘 쓴 소설은 자주 이런 것이 문제다. 뭐가 중한지 독자를 현혹하는 것.
5. 코맥 매카시, <모두 다 예쁜 말들>
이 작품을 넣을까 말까, 오래 생각했다.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취향이라서. 내가 평소 말하는 게 왈왈거리고 제스츄어가 커서 이 책 같은 자극적인 폭력이 출몰하는 작품을 좋아할 거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러나 아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지극히 조마조마한 스릴러나 폭력물, 하드 코어 포르노 같은 건 아예 못 본다. 이런 거 말고도 즐길 거리는 얼마든지 많으니. 처음 읽은 매카시는 <카운슬러>였다. 아무것도 몰랐는데, 매카시의 명성은 알고 있었다. ‘카운슬러’라니 얼마나 따뜻한 제목인가. 그래 읽었다가, 아휴, 거 참. 딱 한 권으로 작가를 포기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두번째 고른 작품이 <모두 다 예쁜 말들>이었다. ‘말’이 말horse인 줄은 알았다. 당시 바로 전에 읽은 게 애니 프루의 단편집이라서 비슷한 서부극인줄 알았다. 역시 코피났다. 불과 열여섯 살의 청소년이 미국 남부의 황량한 메사지역을 배회하는 장면까지는 좋았다가, 멕시코 국경을 넘어서면서 잘못 만난 동료 지미 때문에 휩싸이게 되는 감금과 폭력이 시작되자, 아주 넌더리가 났다. 매카시는 열여섯 살의 주인공 존을 큰 재난을 만나게 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보통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고, 터미네이터, 아니면 적어도 람보 비슷한 초인적 인내를 지닌 인간이나 견뎌낼까 말까 할 고통을 부여한다. 미국 소설답게 존이 고통의 의식을 훌륭하게 통과하는 건 물론이다. 뭐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미쳤나. 아무리 젊어도 안 할 수 있으면 안 해야 좋은 게 고생이다.
6. E.M. 포스터, <인도로 가는 길>
글 좋은 작가를 한 줄로 “나래비”를 세운다면 앞쪽에서 얼마 가지 않아 포스터가 서 있을 것이다. 피렌체에 대한 선망을 심어준 <전망 좋은 방>을 제일 먼저 읽었다가 폭 빠졌다. 그러나 이후 포스터의 책을 읽을 때마다, 작품 전체로 보면 마음에 드는데, 책마다 유독 몇 군데서 신경을 긁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고백하거니와, 난 여전히 식민주의, 반식민주의의 사고방식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도 사람과 같아서 탐욕에 끝이 없다. 언제 식민주의 비슷한 것이 다시 태어날 지 모른다. 러시아-우즈베키스탄 전쟁을 보라. 이것 때문에 <전망...> 이후에 읽은 것들에 아주 조금의 불만이 있는 수준이었다가, <인도로 가는 길>에서는 폭발하고 만다. 완벽하게 영국식 식민주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여러 번 얘기했듯이 우리나라가 분단은 됐을지언정 그중 다행인 것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식민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인도를 비롯한 승전국 식민주의자들은 쉼없이 이야기한다. 물론 덜 떨어진 일본의 민족주의자들도 이들과 똑 같은 말을 한다. 식민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너희들끼리였다면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적어도 한 세기는 더 걸렸을 거라고. 이 의견을 정확한 단어와 문장으로 설명해 놓은 작품이 <인도로 가는 길>이다.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어소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 그렇다. 알다시피 영국은 바로 옆나라 아일랜드를 제외하고 어떤 과거 식민지에도 사과나 유감을 표명해본 적이 없다. 근대화를 이루어주었다는 망상 때문에. 이 책에서도 포스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한다. “인도가 영국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즉시로 멸망하게 될 거”라고. 포스터가 생각하는 인도인 역시 “인도의 해방을 위한 단 한 번의 기회는 유럽에서 큰 전쟁이 다시 일어나는 일 말고는 없다”고 주장한다. 영국인들이 주장하는 인도는 이랬다.
7. 막심 고리키, <어머니>.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세 작품을 문학의 한 장르인 소설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가장 연장자인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의 주인공 베라 파블로브나는 거의 무학에 가까울 만큼 공부와 관련이 없는 여성인데 천부적으로 여성 차별 반대, 공동 생산, 공동 소비, 이익 분배 같은 기초 사회주의사상이 몸에 익었고, 신기하게도 19세기 중반에 친분을 맺는 사람들 역시 하나같이 혁명가나 사회주의자들이다. 오스트롭스키의 주인공 파벨은 단연 불굴의 투쟁 정신으로 무장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혁명에 투신하며, 고리키의 주인공 모자 역시 아무 머뭇거림이 없이 시위와 집회에 앞장선다. 이 세 명의 작가들이 만들어 낸 영웅들의 공통점은, 아무 의심이 없다는 것. 즉,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공동생산, 공동소비, 이익의 균등한 분배의 결과가 유토피아라는 진리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마르크스의 가장 중대한 오류는 사람의 본질을 너무 선하게 봤다는 점인데, 이 세 작가들의 오점은 마르크스를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예수의 유일한 공통점은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거 딱 하나다. 사회주의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또다시 권력투쟁이었다. 이 책들이 곤란한 건, 감동적인 작품이라는 점.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들어가는 스토리라인. 인간을 참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굳은 신념과 행동이라고 생각하게 유도하는 절묘한 문장. 그러나 이 책들은 소설이 아니다. 의식화 교재일 뿐이다.
8.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소설이냐, 르포냐. 르포의 성격이 강한 소설이라고 해야 맞겠다. 오래 전에 읽은 <1984>는 기억이 나지 않고, 어려서부터 숱하게 만화로, 요약본으로 접한 짧은 소설 <동물농장>도 별로 시원찮게 읽었는데 <카탈로니아 찬가>에 이르러 거의 손절했다. 청소년 시절에 읽은 <동물농장> 덕에 오웰은 골통 보수 인물인 줄 알고 살아온 세월이 오래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으면서 이이가 스페인 내전에 무정부주의 당의 일원으로 참가했다는 것을 알았다. 원래는 좌파였다. 그럼 <동물농장>은 공산주의에 관한 시니컬한 우화가 아니라, 권력투쟁에 성공한 볼셰비키를 향해 비아냥거린 거였었구나, 오랜 세월 우리나라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국민들에게 사시를 유도했구나, 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나는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보이는 오웰의 두 가지 사고방식을 혐오한다. 첫째는 그의 총구. 즉 펜이 프랑코의 팔랑헤 당이 아니라 등 뒤의 동지 가운데 한 분파인 볼셰비키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전 중에 그는 끊임없이 볼셰비키에 의한 무정부파에 대한 탄압과 불공평한 지원을 시비하고 있다. 작가로서의 오웰에게는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스페인의 파시즘을 격파하기 위한 총탄’으로서의 펜이 훨씬 더 중요했다. 적전분열의 대표적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번째는 “인간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살육과 인간의 고통”을 동반하는 전쟁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점이다. 품위가 먼저인가, 생존이 먼저인가? 품위 유지를 위하여 불특정 대다수의 죽음과 부상과 고통과 재물의 손괴를 수반하는 전쟁을 찬성한다고? 세상에 추악하지 않은 전쟁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는 내 믿음과 완전히 상충하는 작가다.
9. 필립 로스, <유령 퇴장>
작가와 함께 늙어가는 주인공 네이선 주커먼 역시 늙었다. 암으로 전립선을 제거하여 큼지막한 기저귀를 하지 않으면 외출은 생각도 하지 못하는 전직 교수. 전립선을 제거하지 않았을 때까지는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들을 한 학기에 한 명씩 자빠뜨리던 수작질의 명수. 그러나 대중에게 인기가 높은 소설을 끊임없이 생산해낸 베스트셀러 작가. 이런 주커먼이 전립선을 제거한 환자를 위한 새로운 시술법이 소개되었다는 걸 알고 뉴욕으로 와서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작품. 소설은 숱하고 숱한 우연으로 점철되고, 필립 로스 또는 변태 노인 네이선 주커먼은 시간이 날 때마다 징징거린다. 자기가 죽은 다음에 자신의 생애나 작업물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확 얘기해버리고 말겠다. 소설 자체로 봐도 이미 필립 로스는 이야기거리가 다 떨어졌거나 스토리를 끌고 갈 동력이 바닥난 듯하다. 그리하여 짧은 소설 한 편 속에, 적어도 세계적인 성가를 누리고 있는 소위 거장의 작품 속에서, 늙은 작가에게 심하게 말해 유감이지만, <유령 퇴장>만큼 숱한 우연과 공교로움이 도사리고 있는 “장편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다. 이 책에서 말하는 유령은 늙어 꼬부라진 필립 로스인 동시에 작가와 함께 늙어간 늙은 변태 네이선 주커먼 혹은 이들이 죽은 다음의 상태를 일컫는다. 독후감에 썼다시피, 만일 로스가 양심이 있으면 이런 책은 돈 받고 파는 대신, 자신의 책을 읽은 독자에게 다만 몇 푼이라도 보상하면서 나눠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아니면 자기 죽은 다음엔 어떻게 하지 말아 달라는 얘기를 하덜 말든지 말이지.
10. 윌리엄 트레버, <펠리시아의 여정>
나만큼 윌리엄 트레버를 좋아하는 독자도 많지 않을 것이다. 시중에 팔고 있는 그의 모든 번역 단행본은 다 내돈내산이다. 트레버의 작품을 명작, 걸작으로 부르기는 쉽지 않지만 어떻게 하나같이 이렇게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지. 오, 그의 문장같이 면도날처럼 심장에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또 있을까. 그러나 주의하시라. 잘 쓴 문장은 가끔 무섭다. 나는 책방의 독자서평에서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이 책의 평점으로 별 다섯 개 만점을 주었다. 어쩔 수 없었다. 작품의 제일 마지막에 눈에 번쩍 뜨일 만한 반전의 코다coda를 이루고 있으니. 독자는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다 읽고 나서도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하고 잔인한 범죄자인 사이코패스를 동정하거나 두둔할 수 있다. 매혹적인 약속은 애인을 속이고, 장엄한 웅변은 대중을 집단화 하며, 기막힌 문장은 간혹 독자를 현혹한다. 트레버의 <펠리시아의 여정>이 그러하다. 이 책을 읽은 독후감만큼 쓰기 곤란한 적도 없었다. 대중이 볼 수 있는 독후감에 마지막 절정을 내보일 수 없어서. 이제 이 책이 나오고 읽을 사람은 다 읽었다고 치고 말하자면, 윌리엄 트레버, 이 늙은이가 여전히 아름다운 문장으로 독자를 현혹하고 있었다. 조금쯤 수상하지만 그래도 친절이라고 양해해줄 수 있는 수상함을 지닌 후덕한 중년 남성. 그의 불우한 과거와 삶의 방식이 독자의 감성을 촉촉하게 만들면서 독자는 그의 정체가 악질 사이코패스인 것을 뻔히 아는데도 여전히 그를 동정하게 한다. 문학의 힘, 문장의 힘이 이래서 무섭다. 나는 여전히 트레버의 열렬한 팬이지만 그가 웅변가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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