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사랑 이야기 거장의 클래식 2
찬쉐 지음, 심지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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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쉐의 신간이 한 번에 두 권 나왔다. 소식을 듣자마자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 이 가운데 <격정세계>는 도서관에서 따로 구입 계획이 있다고 반려됐다.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신세기 사랑 이야기>만 ‘첫빠따’로 읽었다. 작가의 덧붙이는 말도 없고, 역자 해설도 없이 본문만 506쪽. 작품은 전위적이다. 무수히 상징적이고 메타포가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리며, 전체적으로 초현실주의적이다. 장황한 출판사 책소개에는 욕망, 온천여관, 성접대부, 추파 등을 앞부분에 나열하여 여차하면 <신세기 사랑 이야기>를, 신세기라고 했으니, 21세기 현대인의 허리하학적 연애 이야기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그런 거 믿고 책 읽기 시작하면 코피 터진다. 심지어 야한 장면이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예 기대하지 말고 그냥 찬쉐가 풀어가는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될 듯하다.


  독후감 쓰기가 난감하다. 등장인물은, 주인공인 건 분명한데 딱 집어서 주인공이라 하기에는 좀 어색한 마흔여덟 살의 유부남 웨이보를 둘러싼 여자들, 그리고 이 여자들의 남자들이 중심이다. 그러나 한 줄기를 이루는 스토리가 있는 건 아니다. 나는 <마지막 연인>을 읽을 때처럼 습관적으로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가 곧바로 집어치웠다. 처음엔 서른다섯 살 먹은 과부이자 계량기 공장 창고관리인으로 일하는 뉴추이란과 마흔여덟 살로 비누공장 다니는 평사원이지만 지식인인 웨이보의 만남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1년 전쯤 성sex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천여관에 입장한 웨이보가 서비스를 받기 위해 입장하면서 추이란과 옷깃을 스쳤고, 퇴장하면서 불쑥 추이란 생각이 나 여관의 데스크를 통해 정보를 알아내 연인사이를 시작한 커플이다. 48세의 웨이보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아들 둘을 독립시켰고, 아내 샤오위안은 중학교 교원으로 교양 있고 말도 부드럽게 돌려 하는 교양인이다. 지금은 가르치지 않고 교직원으로 학교 업무로 중국 각지에 출장다니는 일이 잦다. 이들은 서로 무심한 단계에 접어든지 이미 오래라 각자만의 비밀이 따로 있어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성인군자 사이의 교류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내 샤오위안은 밤열차 객실에서 만난 저 시골 현에서 병원 개업하고 있는 양의洋醫 닥터 류와 각별한 관계를 맺는데, 오해하지 마시라, 플라토닉이다, 플라토닉.

  웨이보는 이제 뉴추이란과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다. 그래 오늘 당장 추이란의 집에서 대낮에 만나 뼈와 살을 태우려 했거늘, 그리하여 추이란은 아침부터 목욕재계하고 색조화장까지 싹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드디어 웨이보가 오긴 왔는데, 집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바로 가봐야 해, 이 말 하러 왔어. 이러고 꽁무니를 빼버렸다. 웨이보와 한낮의 엑스터시를 만들기 위해 연차까지 낸 추이란은 혀가 쑥 빠졌다. 그러나 자신은 절대 남자한테 질척대는 여자가 아니라고 믿는 추이란. 웨이보가 괜찮은 남자이긴 하지만 남자가 밥 먹여 주는 건 절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추이란은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아, 추이란은 온천여관에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온 것이지 매춘을 하기 위한 건 아니다.

  매춘을 위해 이 집에 들락거리면서 추이란과 알고 지내는 두 여성은 룽쓰샹과 진주. 이들은 방직공장에 다니다가 공기중에 한없이 많은 입자로 나풀거리는 먼지를 더 들이마시면 북망산이 두어 걸음일 거 같아 공장을 그만두고 온천여관의 윤락녀가 된다. 이미 삼십대 중반쯤 되는 많은 나이로 업소에 자리를 잡기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같은 공장을 다니다가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뛰쳐나가 업소에 터를 잡은 선구자적 윤락녀 아쓰와 몇몇 남자의 후원으로 자리를 잡는다.

  아쓰는 웨이보에게 미스 쓰絲라 불리며 한때 연애도 했으나 관계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등장인물은 이 정도면 됐다. 이들은 전부 어떻게라도 서로 인연이 있고, 없더라도 두어 사람만 거치면 서로 알 수 있는 사이다. 이들이 만들어가는 스토리? 글쎄 그걸 좇아가려면 책 읽기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니까. 찬쉐는 달랑 <마지막 연인>과 <황니가>를 읽었을 뿐이지만, 적지 않은 독자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던 <마지막 연인>보다 <신세기 사랑 이야기>를 해독解讀하는데 더 어려움이 있었고, 책을 덮은 다음에 분명히 나름대로 읽어냈고 이해도 어느 수준까지는 했다고 생각하는데도 그게 어떤 것인지 설명하자니 앞뒤로 갑갑하다. 확실한 건, 이 작품이 책소개 전면에 나온 것처럼 불륜, 윤락, 자유분방, 특히 허리하학적 자유분방과 별로, 거의 관련이 없다는 것. 찬쉐가 쓴 작품이라 애초에 그런 걸 기대하지 않았으니 나는 당연하다 생각하는데, 혹시나 해서 미리 깔아두는 말 또는 정보다.

  좋다. 작품을 읽은 감상으로서 독후감 대신, 책을 읽으며 든 의문을 한 번 이야기해보자.

  제목이 ‘신세기’라고 했고 출간연도도 2013년이다. 찬쉐는 밀레니엄 이후의 21세기 식 사랑에 관해 쓴 작품인가? 그것 참 모호하다. 이 독후감을 시작할 때 “상징적”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메타포” “전체적으로 초현실주의”라고 했으니 모호한 것이 당연하겠지만 사실 사랑이면 사랑이지 21세기 식 사랑이란 것이 특별하게 존재할 만큼 드라마틱한 의식의 변화는 있었던 것 같지 않고, 작품 속에서도 이 시대의 특별한 사랑 방정식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주요 등장인물의 나이도 미스 쓰, 즉 아쓰만 제외하고는 30대 중반 이후의 여성과 40대 후반 이후의 남성이다. 더 이상 “조신한 여성”으로 불리기 원하지 않는 것도 이번 세기 들어 등장한 신여성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등장인물과 작가 찬쉐는 지난 날, 저 멀리 고향이나 시골, 그러니까 “존재의 시원”의 장소나 기억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와 나의 생각이 시원始原하는 곳. 그곳에서 근원적 나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주위에서 영향을 주었던 인물. 이런 것들이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이 돈과 시간과 땀을 대가로 찾아 가서 만나고, 이야기하고 다시 돌아오면서 뒤돌아보면 이미 사라진 사촌 오빠네 집, 몇 십 년 전에 묻힌 넷째 숙부가 되고, 이렇게 한 번 초현실적으로 방문한 옛 고향 동네 사촌오빠 집과 이미 죽은 넷째 숙부는 작품 속에서 계속 출몰한다. 이건 뉴추이란의 경우이고, 자아의 시원을 발견하지 못한 웨이보는 결국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가 하천에서 모래 채취작업에 투입된다. 감옥에 들어가니 참으로 다양하게 시원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천지다. 이들은 갖은 방법을 통해, 예를 들어 총을 들고 교도소로 쳐들어왔다가 그 길로 수감되고, 이후에도 별의 별 방법을 써서 교도소에서 출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곳이 그들에겐 가장 편한 시원의 장소이니까. 웨이보도 마찬가지다. 교도소에 들어간 이후 웨이보는 그것으로 자취를 감춘다.


  시원의 장소는 뒤 돌아보면 벌써 사라지고 만 사촌 오빠네 집일 수도 있고 원하는 사람이 발길을 돌리면 나타나는 자유항의 거대한 슬롯머신 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일 유념해 보아야 할 곳은, 가장 선한 등장인물인 닥터 류의 시원의 장소, 사람이 생기기 전에 미리 준비해 있던 ‘사람을 위한 약초’가 많은 차오산의 동굴. 서양 의술을 전공한 양의이지만 중국 전래 한방의 약초 치료에도 일가견이 있는 닥터 류는, 훗날 웨이보의 아내 샤오위안이 지리 교사로 부임하는 이상향 또는 거의 이상향인 소도시 차오현을 유토피아로 만든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인데, 그의 시원의 장소인 차오산의 동굴이 작품의 뒤로 가면 아편 밀매를 하는 건달이자 아쓰의 애인이 특별 통행증을 갖고 횡행하는, 더러운 오수가 흐르는 미로 같은 지하도와 혹시 관련이 있을까? 닥터 류의 차오산 동굴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약초로 차 있는 반면, 아편 판매자의 하수구를 통해서는 사람을 환희와 중독으로 이끄는 아편이 이동하는 장소이다. ‘동굴’하면 나는 자동적으로 장용학이 쓴 <원형의 전설>에서 마담 빠타플라이 이지야李芝夜의 이복 오라버니 이장李章이 친아버지와 죽음의 담판을 벌이는 고향집 뒷산의 사적 감옥, 동시에 근친상간의 원죄의 동굴을 연상한다. 찬쉐의 동굴 또는 하수도는 분명 실존이나 원죄의 동굴은 아니고, 치유 혹은 아편(이게 무엇을 위한 메타포인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의 동굴과 이동 통로일 터인데 그게 도대체 뭘까? 이럴 때 흔한 역자해설이라도 있으면 커닝이라도 할 텐데 그것도 없고, 거 참, 아쉽게 됐다.

  결코 만만하지 않으며, 얼핏 보면 처음엔 그런 거 같지만 육체적 사랑의 이야기도 아니다. 육체적 사랑을 기대하시면 차라리 <격정세계>를 읽으시라. 근데 신기한 것이 작품이 한 1백 페이지를 넘어가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그야말로 오리무중을 헤매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도 하지, 계속 따라 읽게 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대개 이럴 때 책 읽기에 지극한 권태가 생겨 급기야 때려 치우게 되지만 찬쉐가 특별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지금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는지 감을 못 잡아도 기꺼이 따라 읽게 된다는 거. 심지어 지루하지도 않다는 거. 비록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고비만 넘어가면 된다. 확실하게 그림을 그리지는 못해도 기화한 드라이아이스 흰 연기로 일종의 형태를 만들 듯 비록 애매하지만 독자들 나름대로 한 형상을 더듬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상징, 메타포, 초현실주의를 기껏해야 더듬었을 뿐인데 이 정도로 마치 다 이해한 것처럼 <신세기 사랑 이야기>가 대박이다, 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별점으로 5별을 주지 못하는 이유로 이 정도 변명이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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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4-19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김숨, <잃어버린 사람>
화요일. 존 웹스터, <하얀 악마>
목요일. 조지 손더스, <12월 10일>
금요일. 존 스타인벡, <달콤한 목요일>

그레이스 2024-04-19 0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 토론했는데, 발자크와 찬쉐의 엄청난 간극과 온도차때문에 어질!합니다. ㅋ

Falstaff 2024-04-19 18:43   좋아요 0 | URL
<골짜기의 백합> 재미있잖아요. ㅎㅎㅎ
찬쉐하고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곧바로 이어 읽으면 나름대로 묘미가 있을 거 같기도 합니다. ^^
 
곰들이 시칠리아를 습격한 유명한 사건
디노 부차티 지음, 이현경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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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피디아는 디노 부차티를 소설가, 단편소설작가, 화가, 시인, 밀라노의 신문 기자로 적었다. 작곡가 루치아노 카일리를 위하여 네 편의 오페라 리브레토를 썼고 희곡도 한 편 썼으며 동화책 <곰들이…>도 출간했다. 아오, 도서관에서 책 대출하면서 위키피디아로 작가 검색도 해보지 않고 상호대차 신청하는 불민한 독자가 세상에 나 하나 아니지? 위키피디아에 분명히 쓰여 있다. He wrote a children's book <La famosa invasione degli orsi in Sicilia>. 이게 동화책이랴, 동화책. 이래봬도 내가 동화책도 읽는다. 다만 삽화가 많이 들어가는 옛날 이야기 식의 초등 저학년 수준까지 내려가지는 못하고, 초등 중상 학년의 동화 정도는 즐겁게 읽는다. 

  뭐 솔직히 말해, 아무리 동화책이라도 디노 부차티가 썼다는 이유 하나로 도서관에서 대여한다는 조건이면 언젠가는 빌려 읽겠지만. 그 정도로 <타타르인의 사막>을 기가 막히게 읽었다. 아직 읽지 않은 분 계시면 <타타르인의 사막>, 꼭 읽어 보시라 권한다. 해설까지 딱 3백쪽, 분량도 적당하니 부담 갖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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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18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타타르인의 사막> 영업글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4-18 16:26   좋아요 0 | URL
빠진 한 가지는
아, 티가 났구나....

새파랑 2024-04-18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타타르인의 사막 너무 좋았습니다 ㅜㅜ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

Falstaff 2024-04-18 16:27   좋아요 1 | URL
˝나만의 명작˝인 줄 알았더니 많은 분들이 좋아하셔서 오히려 고마웠던 작품입니다. ^^
 
타니오스의 바위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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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르칸트>에 큰 기대를 걸었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읽기도 전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책. 이번에는 페르시아와 부하라, 사마르칸트에 이르는 광야 대신, 해변을 끼고 곧바로 산맥이 병풍처럼 들어선 레바논의 산악지대, 작가 아민 말루프의 고향이기도 한 크파리야브다를 배경으로 했다. 저 산맥 사이로 아슴푸레 바다가 보이는 산골 동네 크파리야부다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유명한 바위가 많았다. 군함바위, 곰머리 바위, 매복 바위, 장벽 바위, 흡혈귀의 젖가슴 바위라고도 불리는 쌍둥이 바위, 염탐 바위 등. 이 가운데 왕좌 형상을 한 위용이 넘치는 바위가 있었는데, 많은 이들의 엉덩이에 닳고 닳아서 움푹 파이고, 높고 반듯한 등받이와 양쪽에 팔걸이까지 갖추고 있는 바위가 있었으니 사람들은 이를 “타니오스의 바위”라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짓궂은 개구쟁이라 하더라도 전설처럼 전해오는 미신 때문에 가까이 가는 아이들이 없었다. 저 오랜 옛날 ‘타니오스 키크’라는 사람이 이 바위에 가서 앉은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하게 됐다는 거였다. ‘타니오스’는 사람의 이름이고, ‘키크’는 별명이 분명하다. 예전엔 자주 먹기 힘들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흔하게 식탁에 오르는 키크는, 주성분인 응고시킨 우유와 밀을 걸쭉하게 끓인 시큼한 맛의 스프로 크파리야브다 마을의 오랜 전통 음식이다.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바위에 자기 이름을 올릴 정도의 인물한테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크파리야브다가 비록 천주교를 믿는 지역이기는 하지만 오랜 세월 이슬람 문화권에 속했음에도 남자에게 여성이 만드는 음식의 별명은 지독하게 수치스러울 수 있음에야.

  크파리야브다가 고향인 화자는 바위의 내력 또는 전설을 알기 위하여 고향을 방문한다. 이 지방 역사에 열정적인 전직 교사이며 동시대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있는 96세의 게브라이엘 어르신을 방문해 노인 역시 구전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타니오스의 이야기를 얻어듣는다. 화자는 노인의 이야기에다 지역의 도서관에서 찾은 엘리아스 수도사의 <산악지대 연대기>라는 제목의 오래된 책을 어렵사리 구하고, 같은 시기 산악 지역에서 사흘라인 영국 학교를 만들어 운영하던 제러미 스톨튼 교장의 일지, 편지 등 기타 기록물을 학교 자료실에서 얻어, 이 세가지를 조합하여 그동안 변경지역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던 타니오스 이야기를 되살려낸다.


  19세기 초, 그러니까 1820년대의 레바논 산악지역 크파리야브다 마을은 영주 샤이크가 3백여 가구를 다스리고 있었다. 사실 마을의 모든 땅은 샤이크의 소유이며 거주민들은 그를 주인으로 모시는 소작인 정도였겠지만 봉건적 사고방식에 따라 샤이크는 자기 영지 내에서 벌어진 사건, 주민들 간의 갈등 같은 것을 해결하는 판사 역할도 겸했다. 작품에서 ‘가신’이라고 일컫는 주민들은 샤이크를 존경하고 복종할 의무가 있었으며, 샤이크는 어떤 상황이든지 주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으니, 여지없는 봉건적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샤이크 위로는 산간지역을 통치하는 ‘아미르’가 있으며, 그 위로 트리폴리, 다마스, 사이다, 아크레 지방의 총독인 파샤가 있다. 더 위로는 샤이크조차도 얼굴 한 번 볼 수 없었던 군주, 오스만 제국 이스탄불의 술탄이 오랜 세월 레바논 지역까지 통치했다.

  나라 밖을 보면, 19세기 들어와 오리엔트 지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유럽의 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뚫어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시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렸다.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없었으니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과 관계를 맺고 있는 영국을 견제하고 싶어하는 프랑스와 손을 잡고 오스만 제국의 통치권에 속했던 리비아를 실질 통치하기 위하여 공을 들인다. 영국 입장에서는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레바논 지역에서 이집트 세력을 축출하기 위하여 전쟁도 불사하려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병력보다 먼저 침투하는 것이 교회와 학교. 영국은 왕국에 충성하는 목사 부부를 카파리야브다의 상위 지역인 사흘라인에 보내 천주교 영향권에 개신교와 영국에 우호적인 엘리트 요원을 확보하려 한다.

  작품의 주요 무대인 크파리야브다의 샤이크도 다른 샤이크와 마찬가지로 자기 말에 거역하는 주민한테 귀싸대기를 아끼지 않기도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주민들에게 손해가 가지 않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 예를 들면 산악지역 전체를 관장하는 아미르가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려 하면 적당한 뇌물을 써서 세금을 깎든지, 일단 지불 기한을 최대로 늦추고 어영부영 납부하지 않는 방향으로 만드는 것이 특기였다. 당시엔 전쟁이 흔해서 징병을 해도, 크파리야브다의 샤이크는 절대로 주민들을 개별 입대시키지 않고 명예로운 자진 입대 형식을 취해 영지 주민들이 단체로 하나의 단위, 소대면 소대, 중대면 중대를 이루어 출전함으로써, 부상병이나 전사자를 전장에 그냥 버리고 온 적도 없고, 가족의 행방을 몰라 애태우는 일도 없었다. 이런 샤이크를 주민들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어떤 사람도 완벽할 수 없어서 하나의 안타까운 결점이 있었으니 여자를 유난히 밝히는 몹쓸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샤이크에 관해 소문이 나기를, 여자란 여자는 모두 탐을 내며(진실), 밤마다 영지의 여자를 농락한다고(과장) 했다. 마을의 영주이니 외부에서 손님도 자주 오고, 그때마다 중동지역 특유의 손님맞이로 음식 깨나 해야 했기 때문에 영주는 마을의 여자들을 성으로 불러와 어떤 어떤 요리를 하라고 할 수 있었고, 이때 마음에 드는 여자가 눈에 띄면 낮이고 밤이고 처소로 불러들였다.

  타니오스의 어머니 라미아는 아름다움을 십자가처럼 지니고 다녔다. 무리 속에 숨에도 후광이 빛나는 듯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 2층 객석에 한 남자가 떴을 뿐인데 아예 그 남자가 선 일대 전체가 환하게 빛나는 듯한 것도 봤다. 그리 잘생기지도 않았음에도. 하여튼 타니오스의 어머니 라미아가 그런 족속이었다. 라미아? 스펠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도 ‘마리아’하고 비슷하다. 크파리야브다는 천주교를 믿는 마을이다. 라미아는 샤이크의 집사, 그것도 충성스러운 집사 게리오스의 아내로 성의 한 귀퉁이에서 살고 있다. 게리오스는 집사 말고도 비서, 시종, 서기, 회계사, 친구를 겸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샤이크의 말이나 지시를 어겨본 적이 없다. 그런 라미아가 드디어 샤이크의 눈에 들어온 거다. 샤이크가 라미아에게 키크를 만들라고 지시했고, 어떻게 하다 라미아가 샤이크의 방에 든 것까지는 확실한데, 이후 라미아가 임신을 해서 아홉 달이 지나 타니오스를 낳은 것도 분명하지만 그게 정말 샤이크가 키크를 만들어달라고 했다가 만든 아이인지, 아니면 남편 게리오스의 아들인지는 책이 끝날 때까지 똑부러지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제 타니오스가 “타니오스 키크”라고 불리는 이유는 아시겠지? 타니오스는 평생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자신이 정체성에 관해 얼마나 큰 스트레스에 시달렸을까? 짠하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위에서 오스만 제국과 영국, 이집트와 프랑스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반면에 리비아, 이 가운데 작품의 무대로 국한하면, 크파리야브다 마을과 샤이크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편에 서는 한편, 상위의 아미르는 새로운 실력자인 이집트를 지지한다. 그리하여 당연히 크파리야브다를 박해하기 시작했고, 전에 샤이크의 집사를 하다가 재산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후 양잠업으로 돈을 벌어 귀향한 루코즈와 연합해 샤이크를 압박한다. 어머니가 키크를 만들러 간 김에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타니오스가 점점 자라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루코즈와 좋은 관계를 맺어 그를 지지하게 되었는데, 이때 루코즈의 외동딸 아스마와 서로 사랑하게 된다. 처음엔 루코즈도 타니오스를 사위감으로 생각했지만, 얘기가 길어지니 결론만 말해서 나중엔 안면몰수하고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기로 결심한다. 이때 아버지 게리오스가 혼인문제를 가운데서 틀어버린 천주교 총대주교를 나중에 ‘매복바위’라고 불릴 바위 뒤에 숨어 지나가던 총대주교를 총으로 쏴 죽여버린다.

  타니오스와 아버지 게리오스는 이 일로 레바논을 탈출해서 키프로스로 몸을 숨기는데, 총대주교가 암살당한 건 역사적 사실이라고 작가의 덧붙이는 말에 쓰여 있다. 게리오스라고 하는 샤이크의 집사가 쐈는지, 아니면 열강 싸움에 레바논 지역간 다툼의 와중에 죽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총대주교가 암살당한 것만 사실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순전히 상상으로 지어낸 것만은 아닌 픽션”이라 한다.

  이렇게 <타니오스의 바위>는 열강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레바논의 근대사를 깔고 청춘의 사랑이야기를 보태면서 당시의 사회를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위에 소개한 스토리는 작품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재미있고 유익한 작품이다.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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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4-16 0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마르칸트>를 이렇게 쓰지, 염병한다고…….
 
트리스탄 대산세계문학총서 186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 지음, 차윤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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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앞 이야기, 그러니까 오페라가 시작하기 전에 트리스탄이 출생하게 된 것부터 이졸데를 만나 마르케 왕의 비로 배에 태워 오게 된 사연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페라 대본을 따라가면 이졸데 삼촌의 머리뼈에 박힌 칼의 조각도 나오고, 전투 중에 큰 부상을 입은 트리스탄을 이졸데가 치료해주었다는 것도 나오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 줄도 몰랐다. 또 고전소설을 읽으면 트리스탄이 용을 죽이기도 했다는데 그건 또 무슨 말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이제 책을 다 읽어 눈이 훤하게 뜨인다. 그래? 트리스탄이 용도 죽였다고? 그거 참 별일이네….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 역시 여러 판본이 있는 모양이다. 역자 해설에는 1160년대에 토마스 폰 브리타니아가 고대 프랑스어로 앵글로 노르만 버전 <트리스탄>을 썼고 이것을 오늘 읽은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가 큰 줄거리는 그대로 사용하되 작품의 중요한 전환을 이루는 장면에 중세 기독교 극성기엔 금기였던 사기결혼, 마법의 약물, 혼외정사, 불륜 같은, 이것들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하기 힘든 내용을 과감하게 삽입해 다시 썼다고 한다. 여기에 마이스터 고트프리트는 후원자일 것 같지만 아닐 수도 있는 디트리히 백작에게 헌정하는 형식으로 글을 써서, 피헌정자에게 설명하는 형식을 취해 사랑과 (사랑의 동의어이기도 한)고통, 질투, 시기, 음모 같은 현상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글씨체를 달리 해,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물론 이 작품이 나오고 8백년 이상이 지나 마이스터 고트프리트가 주장하는 내용의 7할은 공자왈, 맹자왈, 깨진 기와를 덮은 이끼 수준이라 읽기에 진력이 나기도 한다. 하여간 그렇다.


  작가이면서 화자이기도 한 고트프리트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를 “세상 누구보다도 순수한 사랑의 열망을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연인들의 이야기”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물론 작품이 나온 13세기 초가 마법의 시대라서 지금처럼 앞 뒤 따져가며 작품을 감상하는 건 무리겠지만, 세상에 사랑의 묘약이 어디 있니? 두 남녀가 눈이 맞아 결혼하러 가는 길에 사고 치고 적당히 둘러댈 말이 없으니 사랑의 묘약을 마셔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죄 없다, 발뺌하는 것이지. 그럼에도 이 이야기에 사랑으로 인한 고뇌, 마음의 환희로 인한 상사병의 고통이 없었더라면 높은 평가와 오랜 사랑을 받지 못했을 거란 의견에는 동의한다. 사랑? 당시에 휴대전화가 있나, 우표만 붙이면 날아가 소식을 전해주는 편지가 있나? 그저 연락이 두절되면 다시 이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통이 바로 기다림이란 건 다들 아시리라 믿는다. 그건 나중의 일이고 먼저 파르메니에의 영주 리발린에 대하여 알아보자.

  파르메니에는 브리타니아 지방에 있다. 여기서 주목. ‘브리타니아’라니까 고대 잉글랜드라고 생각하시지? 프랑스 북서부 해안지역에 브르타뉴도 있다. 책에서도 브리타니아가 지금의 잉글랜드 섬을 말하는 브리타니아인지, 프랑스 브르타뉴인지 확실하게 언급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지만, 영국 남서부 끝에 위치한 콘월과 파르메니에를 왕복하는 수단이 배이며, 후에 독일 땅에서 있을 예정인 전쟁에 배를 타지 않고 참전하는 걸로 보아 프랑스 지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거 같다. 이 파르메니에의 영주 리발린으로 말하자면 혈통은 왕처럼 고귀하고 나라는 제후령 못지 않았으며, 세상 사람들의 즐거움이자 기사도의 모범이라, 통치자와 기사의 덕목에 있어 일족의 자랑이자 나라의 희망으로 칭송받았다.

  당연히 파르메니에와 리발린도 우환이 하나 있으니, 모르간을 영주로 하는 호전적인 이웃 영지가 틈이 날 때마다 경계를 넘어 노략질을 일삼고 변경지역에 공물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동안 두 영주가 기사들을 이끌고 싸움을 했지만 승부를 가리지 않고 두 진영 다 막심한 피해를 입을 뿐이었다. 이제 두 진영의 국력을 모두 쏟아 일대 회전을 벌였으나 역시 둘 다 쌍코피만 줄줄 흐른 채 서로 얻는 것이 없어 불만이지만 화친까지는 아니고 적어도 일정 기간 휴전에 돌입하기로 서약했다.

  젊은 영주 리발린은 피가 끓어 도무지 영지 안에 틀어박힐 체질이 아니어서 나라와 백성의 “신의를 간직한” 충실한 총대장 로알 리 포이테난트에게 영지의 경영을 부탁하고 예법과 기사도를 배우기 위하여 마르케 궁전으로 배를 타고 출발한다. 콘월과 잉글랜드를 다스리고 있는 젊은 왕 마르케는 아서 왕의 탄생지이기도 한 틴타욜에 머물고 있어 그곳에 도착해 왕의 극진한 대접을 받는 리발린. 5월이 오자 왕은 봄을 맞아 4주에 달하는 큰 축제를 열어 잉글랜드의 모든 기사가 매혹적인 숙녀들을 대동하고 콘월에 집결한다. 여기서 리발린은 왕의 동생, ‘하얀 꽃’ ‘백합’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블란셰플루어를 소개받고 눈길을 교환하더니 즉각 자신이 블란셰플루어를, 그이가 자신 리발린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방문객이며 기사인 리발린이 왕의 여동생에게 함부로 접근할 수도 없고, 접근할 기회도 없어, 진정한 사랑이 그토록 아픈 고통인 줄 몰랐다.

  축제가 끝나자 마르케 왕의 가장 강력한 적이 콘월 땅을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선에서 들려왔다. 마르케는 즉각 전군을 소집했고, 리발린 역시, 당연하게 자발적으로 참전을 희망해 은빛 갑옷을 받쳐 입고 높은 말 위에서 장창을 꼬나 쥐고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적들에 둘러싸여 고군분투하다가 드디어 적장을 단 칼에 베는 데는 성공했으나 자신 역시 옆구리를 창에 찔리는 중상을 입어 실려오는 처지.

  상처가 곪아 악취가 진동하고 정신이 혼미해 북망산을 헤매기를 몇 주. 여기에 고통 속에서 침묵을 지키며 우울하게 지내는 것이 일상이 된 또 다른 청춘 하나가 있었으니 블란셰플루어. 이 젊은 여성은 비단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거지 차림을 한 후, 자기를 여의사라 거짓 증명하고 리발린의 죽음의 침상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뭐 치료를 할 줄 알아야지. 치료를 하기는 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는:

  “연인을 팔에 안고 자기 입술을 그의 입술에 대고 입술이 그 안에서 사랑의 욕망과 힘이 불타오를 때까지 짧은 시간 동안 수없이 키스를 했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녀의 입술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술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고 엄청난 힘을 불어넣어서, 그는 그 멋진 여인을 반쯤 죽어가는 자신의 몸으로 바짝 끌어당겨 밀착시켰다. 두 사람의 욕망이 채워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사랑스러운 여인은 그의 아이를 배었다.”

  크. 죽어가는 와중에도 했네, 했어. 작품의 시기가 13세기 초. 1210년경. 이 당시에 귀족계급에서 혼전임신은 전혀 용인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처녀가 아닌 여성이 결혼하는 것도 당사자의 명예에 심각한 스크래치가 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마이스터 고트프리트는 과감하게 혼전관계에 이은 혼전임신을 나름대로의 러브씬과 함께 선보이고 있다. 비록 오래 걸리지 않았던 섹스지만 이걸로 리발린은 기사회생하여 차츰 건강을 회복한다. 그게 건강에 좋다니까, 글쎄.

  원래 주인공한테는 오래 쉴 시간이 없는 법이라 이제 상처도 회복하고 좀 즐길 만하니까 조국 페르메니에에서 전갈이 오기를 모르간이 다시 쳐들어왔단다. 허겁지겁 다시 갑옷과 무기를 챙겨 귀국 배에 오르려니 블란셰플루어가 득달같이 달려와, 여보 리발린 경, 나는 어쩌라고 혼자 튀십니까? 그깟 명예고 뭐고 간에 문제가 아니라 이 몸에 있을 게 없으니 이걸 어떻게 한대요? 우리의 리발린은 두 번 이야기할 거 없이 블란셰플루어를 옆구리에 끼고 야밤에 배에 올라 출항시켜버린다.

  중세 기사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자주 출생과 동시에 큰 비극을 당한다.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지크프리트는 엄마 지클린데가 임신하고 하루, 아니, 몇 시간 지나 아빠 지크문트가 훈딩의 칼에 맞아 죽는다. 그것도 모자라 지클린데도 지크프리트를 낳다가 산고로 죽어버려 악당 난장이 미메가 데려다 키운다. 이 작품에서도 전례를 따라 리발린은 모르간과 치열하게 싸우다 전장에서 죽음을 당해 방패 위에 시신을 올려 실어오고, 블란셰플루어는 지클린데처럼 아들을 낳은 직후에 숨이 넘어간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우리의 주인공 트리스탄. 그래도 다행스럽게 리발린에게는 충성스러운 대장군 루알 리 포이테난트가 있어서, 장군은 트리스탄을 자신의 두 친아들보다 훨씬 더 공을 들여 세상의 모든 언어, 음악과 악기, 노래, 무공, 말타기를 익히게 해 당대 최고의 기사로 만드는 데 성공해, 이 아이가 자라 스무살이 넘어 드디어 외삼촌 마르케 왕을 찾아가 우리가 아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설을 만들어가게 한다.

  이졸데 관련해서는 이야기를 아껴두겠다. 혹시 당신도 읽을 지 모르니까.


  처음에 말했듯이 나는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하지만 당신까지 이 작품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지는 못하겠다. 나는 내내 궁금했던 것을 시원하게 풀 수 있는 기회였던 반면 당신한테는 서양 옛이야기 한 편일 수도 있으니. 그런데 13세기 초 소설에서 이 정도면 엽기 포르노 취급을 당해 종교재판 대상 아니었을까? 걱정 마시라. 마이스터 고트프리트는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놓고 생을 마감했다.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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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15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다 죽어가면서도 ㅋㅋㅋㅋ그걸하다니 ㅋㅋㅋㅋ 아놔 ㅋㅋㅋ 그리고 그 한방에 애까지!! 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의사쌤 치료법 아주 신통방통하구먼요.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4-15 15:34   좋아요 0 | URL
글쎄 그게 몸에 무척 좋은 거라니까요!
 
서자 거장의 클래식 1
바이셴융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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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어로는 ‘얼자孼子’라고 쓰고 우리말 제목을 ‘서자’라 했다. 역자 김택규는 초고에 한자어 발음대로 “얼자”로 썼을 수도 있지만 결국 “서자”로 쓰고 대신 한자어 ‘孼子’를 첨부하기로 합의했던 거 같다. 제목 짓는 건 거의 언제나 출판사 마음이다. 서자庶子는 사전적 의미로 양반과 양민 사이의 자식과 후손. 서얼庶孼은 서자와 그 자손을 말한다. 그럼 얼자孼子는? 서자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 작품 같은 경우의 얼자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식”이란 의미에 해당한다. 임금에게 인정받지 못해 늘 외로운 신하가 고신孤臣, “어버이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서자(또는 서자 취급을 받는 신세의 자식)이 얼자孼子. 이걸 합해 아 씨, 나만 미워해, 하는 족속들을 일컬어 고신얼자孤臣孼子라고 한다.

  작품의 주인공이자 화자 ‘나’이기도 한 리칭李靑은 석달 열흘 전 몹시도 맑은 오후에 중국 본토에서 연대장을 역임했던 퇴역군인 아버지가 권총을 흔들어대면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났다. 입학하기 쉽지 않은 위더育德 고등학교 야간부 3학년 3반에 다니던 나는 “1970년 5월 3일 밤 11시경 화학실험실에서 실험실 관리원 자오우성趙武勝과 외설행위 중 학교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5일 어린이날에 퇴학당했다. 아버지는 쓰촨성 출신으로 입대하여 일본군과의 창사長沙대첩에 참전해 눈부신 전과를 올려 2등 보정寶鼎훈장을 받은 전력이 있다. 그러나 1949년에 아버지 부대는 후베이성의 다볘산에서 팔로군과 교전할 당시 거의 전멸을 했는데, 이때 포로로 잡혔다. 우여곡절 끝에 타이완으로 탈주하는 데 성공했지만 군대는 포로가 된 전력 때문에 아버지의 군적을 말소시켜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추천으로 펑산鳳山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자신이 못다한 꿈을 이어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자신의 훈장을 ‘나’의 가슴에 달면서 훈장의 소유권까지 모두 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이랬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남자와의 외설행위로 퇴학을 당했으니, 고등학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관학교는 아예 꿈도 못 꾸게 되어 꼭지가 돌지 않았겠는가. 하여간 그이의 입장만 감안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어머니는 타오위안挑園 시골 오리농장집 양녀로 있었다. 양부가 심각한 알코올 의존이라 학대를 당하고는 했는데 하루는, 그래봤자 일상다반사이긴 하지만 양부가 던진 낫에 이마를 맞아 양미간에서 피가 철철 흘러 그 길로 도망쳐 1군단 근처의 다방 종업원으로 있었다. 시골 출신 답지 않게 고운 외모 때문에 어머니를 두고 장교 둘이 심각하게 싸워 타이베이로 와서 지금은 옆집에 사는 황아저씨 댁의 임시 가정부로 있다가 아버지와 인연이 된 것. 이때 아버지가 45세, 어머니는 19세. 날씬하고 가는 허리에 풍성하고 검은 머리털, 앳되 보이는 자그마한 여자로 골목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어머니는 아들만 둘 낳았다. ‘나’와 동생. ‘나’는 남방 쓰촨 출신의 아버지를 닮아 피부가 거무스름하고, 동생은 출신이 불분명한 어머니를 닮아 하얀 얼굴에 곱상한 외모. 젊은 어머니는 당연히 아버지 닮은 나를 검둥이, 자신을 닮은 동생을 흰둥이라 부르며 동생을 편애했다. 편애 수준을 넘어 ‘나’를 거의 미워했다. 그렇게 살다가 ‘나’가 여덟 살이던 해 어머니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고, 들리는 말에 따르면 샤오둥바오小東寶 이동 공연단의 트럼펫 주자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고 했고, 사실이 그랬다. 이때 ‘나’의 기억으로 처음 아버지가 권총을 뽑아들고 두 연놈을 쏴 죽여버리겠다고 골목을 활보했었다.

  동생은 어머니가 사라진 이후에 ‘나’를 의지하며 사이 좋게 지냈다. 작년 열다섯 번째 생일에 ‘나’가 야마하 버터플라이 하모니카를 선물해주었는데 얼마나 잘 불던지 아무래도 음악에 재능이 대단했던 거 같다. 그런데 백일 전에 아버지한테 집에서 쫓겨났을 때 우연히 하모니카가 ‘나’의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어서 이제 ‘나’가 기억하는 유일한 동생의 물건이 됐다. 동생이 말하기를 지금 어머니 황리샤黃麗霞가 남공항의 귀난거리 빈민가 막바지의 집에서 살고 있다고 해, 작품의 중간 이후에 직접 가볼 생각이다. 가 봤자 좋은 꼴은 못 보겠지만, 몇 달 전에 급성 폐렴으로 어려서 죽은 흰둥이 둘째 아들만큼이야 하려고.

  자, 주인공 ‘나’ 리칭, 애칭 아칭阿靑으로 불리는 ‘나’의 팔자를 보자면 그야말로 얼자孼子라 할 만하겠지? 그러나 ‘나’ 뿐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성 동성연애자, 게이들이 다 얼자, 사회에서 미움만 열심히 받으며 사는 얼자 신세이다. 책에서 말하는 얼자는 모든 남성 동성애자들.


  타이베이에는 이들이 모이는 해방구가 있다. 바이센융은 이곳을 “왕국”이라 부르지만 마땅하지 않다. 왕국엔 당연히 왕이 있어야 하거늘, 이들한테 사부와 어른은 있을지언정 왕, 귀족은 없다. 그래서 왕국이라기보다 해방구 또는 코뮌이라 칭해 마땅하리라. 노소와 빈부와 학력과 출신의 차별이 없고 모두 사랑으로 동등한 구역을 어찌 왕국이라 하는지. 하여간 그이들의 왕국에는 낮이 없다. 밤새도록 번창하다 날이 새면 자취를 감추는 비합법적 나라. 길이 2백~3백미터, 너비 백미터 남짓한. 타이베이시 관첸거리 신공원 안의 직사각형 연못 주변 은밀하고 불법이며 손바닥 만한 나라. 오랫동안 외부인에게 얘기하기 힘든 놀랍고도 비통한 역사를 간직한 곳. 오직 사랑과 욕망과 갈증을 달래기 위해 집결하는 사랑꾼들의 장소. 이들의 면모를 보자.

  궈郭 노인. 왕국의 역사를 간직한 원로 가운데 원로. 장춘로에서 ‘청춘예원’이란 사진관을 운영하며 왕국의 젊은이들의 사진을 수집해 두꺼운 앨범을 만들고 “청춘의 새들”이라 제호를 단 인물. ‘나’ 아칭 역시 사진을 찍었으며 87번에 해당하고, ‘참매’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나’는 집에서 쫓겨난 후 석달 동안 난양거리 신난양극장의 지린내 나는 공중화장실에서 눈빛과 손짓과 발걸음으로 갖가지 신비한 암호를 타전하며 3개월 동안 남창생활을 하다가 어느 비 오는 가을, 왕국의 연못 한 가운데 있는 정자에 몸을 구부리고 덜덜 떨면서 자고 있다가 궈노인에 의하여 구출되어 왕국의 국민으로 받아들여졌다. ‘나’ 이외의 숱한 청춘들이 노인이 내미는 구원을 얻어 어쨌거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양사부라고 불리는 양진하이楊金海. 똥배와 검정바지 속 튼실한 엉덩이 두 짝으로 풍선 세 개를 달고 다니는 왕국의 개국원로. 과거에는 동족을 위해 중산북로에 ‘류타오퉁’이란 술집을 경영했지만 건달들의 방해로 접은 경력이 있다. 특히 젊은 동족을 위해 무한정의 무뚝뚝한 친절을 베푸는 인물.

  라오구이老龜. 예순이 넘은 늙은 호색한. 하도 추접해 공원 사람들이 상대도 잘 안 해준다. 목덜미 가득 마른 버짐이 피었으며 당연히 시간이 갈수록 점점 찌그러든다.

  저우周 사장. 중허향中和鄕에서 염직공장을 경영하는 인물로 ‘나’의 친구인 샤오위小王의 수양아비, 즉 뒷바라지해주며 사랑을 얻는 중늙은이. 일년 넘게 중허향에서 같이 살자고 요구했지만, 일본 화교인 생부를 따라 도쿄로 떠날 일념에 차있는 샤오위는 이이의 요구를 야물딱지게 거절하고 있다.

  샤오위는 다른 수양아비도 만들어 관리하고 있는데 작품을 시작할 때는 역시 일본 화교로 타이완에 건강 보조식품 공장을 지으려 온 세이조 제약의 린사마, 중반 이후에는 일본과 홍콩을 잇는 화물선 선장 룽龍선장으로 하여간 일본과 연줄이 닿는 사람들한테 지극한 관심을 쏟는다. 친부 역시 사업차 타이완으로 왔다가 엄마를 만나 샤오위를 만들더니 일본으로 내빼고 소식을 끊은 인간이다.

  우민吳敏. 마흔 전후의 무역회사 대표로 주로 플라스틱 장난감을 수출하는 장선생과 오래 동거하다가 별 이유 없이 쫓겨나 크게 상심하는 바람에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다. ‘나’ 아칭과 샤오위가 발견해 병원으로 데려갔으나 보증금이 없다고 수혈을 거부당했다. 그래서 두 명의 친구가 5백cc 씩 1리터의 피를 수혈해주어 생명을 건지고, 상상을 초월하는 입원비, 시술비는 동족은 아니지만 자살한 게이 아들을 둔 장군 출신 귀인 푸 어르신이 지불했다.

  푸 어르신은 왕국의 모든 동족한테 우러름을 받는 존재. 일흔이 넘은 나이로 여전히 고아원에서 선천적으로 양 팔이 없는 상태로 태어난 장애아를 돌보며 여러가지로 왕국의 종족을 위해 가지고 있는 인맥과 돈을 아낌없이 베푸는 살아있는 보살이다. 대륙에서 함께 전투에 나섰던 전우의 아들로 크게 사고를 치고 십년간 미국으로 몸을 피했다가 돌아온 왕쿠이룽과 특별한 애증관계에 있다.

  성盛회장. 나이 많고 명성 높은 원로. 지금은 조금 노망이 들고 류머티즘 증상이 심해 젊은 파트너를 찾는 것이 그저 함께 즐거운 얘기나 하며 저녁을 먹고 술도 한 잔 마시기 위해서이다. 에버그린 필름의 회장이며 뛰어난 로맨스 영화를 여러 편 제작해 큰 돈을 벌었다. 과거엔 상하이에서 직접 배우로 출연하는 등 한 시절의 스타로 군림했던 적도 있다. 가끔 동족을 위로하기 위하여 큰 파티를 열어준다.

  쥐mouse. 천생 좀도둑. 절대 좀도둑질을 끊지 못하며 훔친 물건들을 보물처럼 아낀다. 극도로 포악한 형 집에서 사나운 형수와 사는 지질이. SM 사이코한테 걸려 작품 시작부터 팔뚝에 담배빵을 당하지만 ‘나’ 아칭과 샤오위, 그리고 우민과 함께 청춘 4인의 친구로 지낸다. 이런 쥐를 장쑤 저장 요리의 대가 루盧 주방장이 열라 쫓아다니는데, 주방장 말씀이 갈비뼈가 도드라져 깨물어 먹는 특별한 맛이 있다나?

  그리고 숲 속에 숨어 감히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이웃들도 있다. 양갓집 출신 대학생들이 많고 이외에도 휴가 나온 사병들, 신뻬이에서 온 젊은 깡패들, 어린 점원들, 유명한 의사, 군 법무관, 한 때 잘 나갔던 은막의 스타들 등등. 하여간 얼굴 알려지면 신상에 크게 해로울 인간들이 이 범주에 많이 속한다.


  등장인물과 이들이 행위하는 장소, 심지어 극장의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화장실, 좁은 숲덤불 등등, 사회에서 소외받는 장면 같은 것은 이미 여러 작가들이 상세하게 묘사한 바 있어서 특별한 건 없다. 그저 다시 퀴어 소설 한 편을 읽는 느낌. 그러나 바이센융은, 스스로가 장군의 아들이며 게이이고 연인을 따라 오랜 세월 미국에서 보낸 경험이 있어 등장인물 몇 명에게 자신을 투사하기는 했지만, 결코 이런 얼자들을 아들로 둔 남자, 아버지의 입장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대개 퀴어 문학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게이 아들에게는 넘어서야 하지만 난공불락인 성벽, 암담한 골방의 벽으로 기능한다. 바이센융의 시각은 그렇지 않다. ‘나’ 리칭의 아버지, 오랜 시간동안 공부 잘하고 신체 건강한 맏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희망을 걸었다가 사실을 알고 권총을 휘두르며 집에서 쫓아내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 아파할 것인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의 생에 대한 걱정 때문에 몇 개의 산을 무너뜨릴 지, 딱 이렇게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 방법으로 독자에게 말하고 있다.

  역자 해설을 읽어보면 작가가 미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 노구를 이끌고 공항까지 나온 아버지가 눈물을 철철 흘렸다고 한다. 작가는 자신이 동성애자인지 한 번도 아버지한테 말하지 않았지만 늘 아들을 귀하게 여긴 아버지가 몰랐을 리가 없다면서.

  사는 게 다 그렇다. 어렵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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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4-12 07: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별점은.... 어디 4.5 없나? 4는 박하고, 5는 후하고. 좋은 게 좋은 거다.
다음 주 삽질:
월요일.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 <트리스탄>
화요일. 아민 말루프, <타니오스의 바위>
목요일. 디노 부차티, <곰들이 시칠리아를 습격한 유명한 사건>
금요일. 찬쉐, <신세기 사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