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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전차 ㅣ 창비시선 264
손택수 지음 / 창비 / 200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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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정초, 스물여덟 살이 채 안 된 청년 손택수가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과하여 시인의 말석에 자리를 깔더니, 5년이 지난 2003년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을 낸다. 그리고 3년 후, 같은 창비시선 시리즈로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한 것이 오늘 독후감을 쓰는 《목련 전차》이며, 또 4년이 지나 이번엔 실천문학사의 실천시집을 통해 찍은 《나무의 수사학》은 5년 전에 읽고 독후감을 올린 적 있다. 이렇게 나는 손택수의 3번, 2번 시집을 읽는다. 《나무의 수사학》의 시인은 이미 정원에 열매가 열리는 실팍한 모과나무가 있는 아파트에 살면서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목련 전차》의 시인으로서는 그것도 꿈 같은 상상일 수도 있었을 터. 이 시집에서 손택수는 어린 시절 태를 묻은 고향 담양의 할머니 집을 바라보고 있고, 머리가 컸어도 기껏해야 생활의 궁상에 전 초짜 시인이자, 아직 신혼의 기색을 털지 못한 젊은 남편이다.
손택수는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70년 개띠. 소년 시절에 먹고 살기 위해 부모의 손을 잡고 부산으로 이주해 향수병을 단단히 앓았단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어린 시절 당시에는 드물게 산부인과를 퇴원하자마자 외갓집에 보내져 경기도 소도시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후,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얼마나 내가 떠난 그곳과 외조부모의 품을 그리워했는지. 부산의 손택수도 딱 그랬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무의 수사학》 122페이지에 실린 <내 시의 저작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에서 그는 자기 시가
구름 5%, 먼지 3.5%, 나무 20%, 논 10%
강 10%, 새 5%, 바람 8%, 나비 2.55%
돌 15%, 노을 1.99%, 낮잠 11%, 달 2%
(여기에 끼지 못한 당나귀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함)
(아차, 지렁이도 있음)
이라고 딱 못을 박았다. 그러니 자기 시(들)의 94%는 당나귀와 지렁이의 소유권을 포함하지 않고도 몽땅 유년시절의 기억 또는 그것을 향한 노스텔지어라는 의미이겠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목련 전차》에 실린 시에서도 내 마음에 차는 시들은 유년시절 시골 생활을 추억하는 시들을 모아 놓은 1부에 집중되어 있다. 예컨데 이런 시.
강이 날아오른다
강이 휘어진다 乙, 乙, 乙 강이 휘어지는 아픔으로 등 굽은 아낙 하나 아기를 업고 밭을 맨다
호밋날 끝에 돌 부딪는 소리, 강이 들을 껴안는다 한 굽이 두 굽이 살이 패는 아픔으로 저문 들을 품는다
乙, 乙, 乙 물새떼가 강을 들어올린다 천마리 만마리 천리 만리 소쿠라지는 울음소리 ―
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 (전문. P.10)
강이 날아올라?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천적들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밝은 낮 동안 강물 위에 동동 떠 있던 물새떼가 석양을 맞아 천 마리, 만 마리 한 번에 날아오르는 모습을 乙, 乙, 乙 이라고 묘사했을 것이다. 乙 새 ‘을’자가 강 위에 뜬 새의 모습과 이렇게 어울릴 수가. 거 참.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근데, 내가 시를 아는 게 쥐뿔도 없다고 가정을 하고, 그래서 용감하게 한 마디 덧붙이자면, 그저 내 의견일 뿐인데, 위의 시에서 마지막 연, “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는 빼버리는 게 더 낫지 않았겠어? 거 새들끼리 소쿠라지게 울어가며 잘 어울리는 걸 뭐하러 시인이라는 사람종이 그 속에 뛰어들어 그림을 망가뜨리냐는 것이지. 뭐 아니면 말고. 이 시의 저작권은 당연히 강, 새, 노을, 그리고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틀림없이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 지렁이가 가져야겠다.
<강이 날아오른다>가 시집에서 제일 먼저 실은 시이고, 이어서 <집장구>가 등장한다. 집장구? 그게 뭐냐고? 예전 나 어린 시절에 국한해 말씀드립자면, 봄 가을, 이렇게 일년에 두 번씩 문창호지를 다시 발랐다. 먼저 묵은 창호지를 창살에서 다 떼어내고, 그래도 창살에 붙은 창호지까지 물에 듬뿍 불려 박박, 그러나 창살에 흠이 안 갈 정도로만 박박 긁어낸 다음에, 새 창호지에 풀을 발라, 창살 말고 창호지 전체에 풀을 발라 붙이고, 풀을 붙이던 풀비로 쓱쓱 문질러 닦아 말리면, 창호지와 풀이 마르면서 이게 여간 팽팽해지는 게 아니라서 손가락으로 통통 튀긴다든지 하면 통통통, 마치 장구 칠 때 나는 소리가 난다 하여, 그걸 집장구라 칭하고 있는 거다. 그리하여 노래하기를:
집장구
일년에 한 번은 집이
장구소리를 냈다
뜯어낸 문에
풀비로 쓱싹쓱싹
새 창호지를 바른 날이었다
한입 가득 머금은 물을
푸― 푸― 골고루 뿌려준 뒤
그늘에서 말리면
빳빳하게 당겨지던 창호문
너덜너덜 해어진 안팎의 경계가
탱탱해져서,
수저 부딪는 소리도
새소리 닭울음소리도 한결 울림이 좋았다
대나무 그림자가 장구채처럼 문에 어리던 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코 고는 소리에도 정든 가락이 실려 있었다 (전문. P.11)
시인의 고향인 담양에는 대나무가 많다. 그게 달 그림자에 비쳐 창호 바른 날 방문에 어렸던 것이 마치 장구채 같았고, 그래서 누군가의, 외할아버지나 외삼촌 또는 외할머니의 코고는 소리마저 울림 좋은 장구 소리처럼 들렸다는 뜻일 터인데, 이 시 또한 무식해서 용감한 의견을 덧붙이자면, 둘째 연을 통째로 없애버렸으면 어땠을까? 아니면 연 구분 없이 윗연에 이어서 쓰던지. 괜히 한 마디 보태 거스러미가 생긴 것 같은데, 시인을 꼭 그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인의 의견이 맞겠지. 손택수가 우리나라에서 시인한테 주는 거의 모든 시 관련 상은 다 쓸어 담은 당대의 시인이다. 예전엔 궁상맞은 청년 시인이었을지언정 지금은 우리나라 유수의 출판사인 실천문학사 대표이사를 지내고 있으니 나 같은 아마추어 나부랭이가 뭐라 의견을 보탤 처지가 아닌 건 안다. 그래도, 내 입도 뚫린 입이니, 뭐 이 정도야 어엿비 봐 주겠지.
그리고 이 시집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시가 등장한다. <방심>.
放心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전문. p.14~15)
시 읽기를 마치자마자 딱 그림이 접수된다. 착한 시다. 시골집이라도 있는 집이다. 대청마루에 배를 내놓고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한낮, 앞뒤로 열어놓은 마루문을 통해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관통해 말 그대로 쎤~한 함포고복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을 때, 누운 내 얼굴 바투 위로 하얗고 하얀 배를 가진 제비 한 마리가 대청마루를 관통해 날아가는 그림. 그게 시인이 “放心방심”이라 하는 순간이었다. 찰나의 숨막히는 간질거림. 그리고 눈썹 한 올 같은 긴장감.
담양에서 부산으로 간 소년 손택수는 부산에서 웬수 같은 사춘기를 맞는다. 그리하여 이제 슬슬 관능에도 눈을 뜨게 되는데, 이 시절의 순정한 성적 개안을 시인은 참 그럴 듯하게 그려낸다. 아니나 다를까, 손택수의 다른 시집을 검색해보니 예상 외로 청소년 시집도 여러 권 낸 이력이 있다. 그렇군. 그래서 사춘기 소년을 읽는 내 마음도 그리 실감이 났군. 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청소년 시라는 거. 이거 아무나 쓰면 망쳐버리기 일쑤인 것은, 내가 여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여성의 경우는 모르겠고, 험하게 사춘기를 지낸 사내 시절을 겪은 수컷들은 다 아시리라. 이만큼 고급진 수컷의 사춘기 그림을 그리기가 쉽지 않은 것을. 이 시 읽으며 독후감을 마감하자.
챙
챙, 하면 떠오르는 빗소리
빗소리와 빗소리가
부딪치는 양철지붕 끝
처마에 챙을 단 집이 있었다
집 안을 가리고 남은 여분이 살짝
대문 밖으로 뻗어나와 만든 품,
하굣길에 소낙비를 만나선
급한 마음에 우당탕탕 그 속을 비집고 든 적이 있는데
책가방 머리에 쓰고 뛰어든 그 속엔 마침
여고생이 된 옆집 누나가 새치름
비를 긋고 있었던가, 젖은 누나의
교복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김과
마악 잔털이 돋기 시작한 내 겨드랑에서 빠져나온 김이
우리들 허락도 없이 마구 휘감겨들던 챙
더운 살냄새와 살냄새가 뭉클뭉클 살을 비벼대던 챙
처마 끝을 따라 뭉긋이 흘러내린 깊어진 마음의 기울기
챙, 하면 아찔하게 후들거리는 빗줄기
은빛 스틱이 치는 양철북 소리 (전문.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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