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드
힐러리 맨틀 지음, 이경아 옮김 / 민음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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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 놀음. 도서관 개가실 거닐기.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자세로 800번 서가 사이를 훑는다. 간혹 걸음을 멈추고 책등을 바라보며 쓱, 한 번 미소 짓기. 저 책 정말 재미있는데 어째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거 같군. 예상외로 이런 책 많아. 언제 날 잡아 몇 권 소개해봐야겠네. 어슬렁어슬렁. 이러다가 갑자기 눈에 띄는 이름 하나. 이런 게 한 번 눈에 들어오면 그것 그냥 둔 채 다른 서가로 옮아가기 쉽지 않다. 이번에도 그랬다. 발정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8세의 바람기를 채우기 위하여 단행한 종교개혁을 그린 <울프 홀>과 앤 불린 최후의 날까지 토머스 크롬웰의 활약을 중심으로 한 <시체들을 끌어내라>로 부커 상을 두 번이나 받은 힐러리 맨틀의 다른 작품 <플러드>. 그래서 읽었다.

  플러드. 로버트 플러드. Robertus de Fluctibus (1574~1637). 피 묻은 늑대 또는 붉은 늑대가 문장인 웨일스 혈통의 귀족 자재. 의사이자, 학자인 동시에 연금술사, 신비주의자, 점성가, 수학자, 우주론자로 당대의 현자 요하네스 케플러와 학문적으로 맞짱을 뜬 적도 있는 장미십자회 회원. 그러나 플러드를 만나기 위하여 힐러리 맨틀은 독자를 16세기 또는 17세기로 초대하지 않는다. 작품의 무대는 1956년, 삼면이 황무지로 둘러싸인 잉글랜드의 가상의 마을 페더호턴. 북쪽으로 유일하게 맨체스터, 위건, 리버풀 행 도로와 철도가 놓인 이곳에 백여 년 전에 면직물 방직공장이 세 곳 들어선 이후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아일랜드 사람들이 모여 들어 이룬 마을. 따라서 마을엔 아일랜드 이민자를 위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당과 수녀원 그리고 수녀원 부속 학교도 들어섰다. 인구의 다수가 로마 가톨릭 쪽이다. 소수의 잉글랜드인들은 영국 국교 교회가 아닌 개신교 감리교 교회에 다닌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당의 늙은 주임 신부 앵윈. 처음엔 잠이 오지 않아 위스키 한두 잔씩 홀짝거리던 것이 이제는 위스키를 장복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한 시절엔 순종, 청빈, 순결의 의무를 수행하며 신앙을 향한 열정을 불살랐지만, 나이 들고, 이 빠지고, 무릎 쑤시는 시절을 맞아 세월의 잽을 한두 대씩 얻어 터지더니 제일 먼저 열정이 식어버리고 이어서 과연 신이 존재하기는 할까? 악마적인 의심에 시달렸으며, 급기야 이제는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이 저주받은 외진 황무지 성당의 주임 신부의 직을 유지하는 것은 그렇다고 신부의 직을 물리칠 수는 없으니까. 이제까지는 교단이 앵윈 신부를 필요로 했다면, 지금부터는 앵윈 신부가 교단이 필요해 좀 더 깔고 앉아 있겠다는 데 그게 뭐? 이날 이때까지 신부 짓을 했으니 얼마 남지 않은 세월동안 나를 좀 먹여 살려도 크게 문제되지 않잖아? 이런 심사였겠지. 그렇다고 앵윈 신부가 가톨릭까지 저버린 건 아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데 신앙은 그대로? 그럼 그게 뭐? 뭐긴 뭔가, 미신이지. 미신만 남은 거.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지금부터 발언은 진심으로 가톨릭 또는 개신교를 믿는 분은 마음이 상하실 수 있을 터이지만, 솔직하게 쓸 생각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승인한 313년의 밀라노 칙령 이후에, 기독교가 전 로마 지역에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질투의 하느님을 위하여 그간 수십 세기 동안 그리스의 뒤를 이어 로만 정신을 유지해온 저 올림푸스 신들의 신전을 박살내는 거였다. 두번째가 당시 황제나 귀족들보다 정치성향이 뛰어난 기독교 수장들의 권력투쟁이었고. 내 의견 아니다. 전부 <로마제국 흥망사>에 나온다. 불만 있으면 나 말고 에드워드 기번에게 항의하시라. 물론 당신 죽은 다음에 천국 가는 길에 일부러 연옥에 들러 그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그렇다는 거다. 아,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 나는 아무리 성서를 뒤져봐도 연옥이라는 단어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단테는 어디서 연옥을 주워 와서 오랜 세월 그렇게 재미를 봤을까? 그럴 리가 있느냐고? 성서 다시 한번 읽어 보시라. 연옥이란 말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에이, 나는 읽어봤다니까. 또 읽기는 싫고.

  하여간 그건 그거고, 정작 이 책을 읽고 내 뇌를 잠식했던 건, 기독교, 특히 로마 가톨릭에 무수하게 등장하는 성인과 성녀들. 그 사람들은 뭐야? 이 책에서 나오는 성인, 성녀 몇 명만 보자. 그냥 눈에 띄는 몇 명만.

  성 던스탄. 대장간에서 일을 하고 있다가 악마가 찾아와 유혹을 하려 들자 벌겋게 달아오른 집게로 악마의 코를 콱 낚아챘다.

  성녀 아폴로니아. 로마인들이 아폴로니아의 이를 뽑는 고문을 견뎌 후에 치과 의사들의 수호성인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

  성 그레고리우스. 교황관을 쓰고 있다니 대교황이란 칭호를 받은 그레고리우스 1세를 말하는 거 같은데, 교사들의 수호성인이다. 어디서 주워듣기를(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비록 후대의 숱한 사제들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신부들한테 처음으로 순결을 요구했다지?

  성 아우구스티누스. 화살이 꽂힌 심장을 들고 있다는데 그러면 혹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니라 미남으로도 이름이 높은 성 세바스티아누스 아닌가? 젊은 시절엔 생 양아치 짓만 하고 다니면서 부모 속 깨나 썩이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맞다면 알제리의 히포 레기우스에서 성직자 생활을 해 많은 아일랜드 인들은 하마Hippo 아우구스티누스인 줄 알걸?

  작은 사자를 데리고 있다는 성 히에로니무스. 돌로 자기 앙가슴을 두드리면서 학자, 서적상, 순례자의 성인이 된 교부 가운데 1인. 이글거리는 눈으로 은둔자의 무릎을 다 드러낸 채 사막에서 도를 닦는 이로, 앵윈 신부가 제일 좋아하는 성인이란다.

  그리고 벌집을 든 암브로시우스. 별명이 성 벌집인.

  자신의 잘린 가슴을 접시에 담아 들고 있는 성녀 아가타는 종 만드는 사람의 수호성인.

  역시 자신의 가죽을 벗기는 데 사용한 칼을 움켜쥐고 있는 성 바로톨로메오와 휴대용 풍금을 들고 있는 성녀 체칠리아. 장미 화환 아래에서 앞을 노려보고 있는 작은 꽃小花 테레사.

  그리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저 불초한 무식쟁이의 의견임을 감안하시고 내가 생각하는 걸 들어보시라. 이건 기독교가 자기 손으로 없앤 그리스 로마의 여러 신多神을 벤치마킹해 스스로 만든 거 아닌가 싶다. 중세 시대의 일반 대중에게 성서와 성서에 나오는 한정된 진리만 가지고는 암만해도 마땅하지 않아 직접적인 삶의 의지가 되는 성인, 성녀들을 자체 제작 또는 과장해 상징, 우상 기타 등등을 만들어주었던 거 아닌가, 한다는 말씀. 치과의사, 종 만드는 사람의 수호성인은 웃기고, 교사, 나그네, 대장장이의 수호성인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몇 번 마주친 거 같지 않으신가? 그래서 줄리언 반스가 말했다니까.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하여는 역사를 오해할 필요가 있다.”고. 한 술 더 떠, 종교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더 풍부한 스토리를 만들 필요가 있는 법이다. 스토리를 만드는 건 소설. 즉 바티칸에서 소설을 썼다는 얘기지, 저 먼 시절에. 기독교라고 뭐 다를 거 같았어?


  이 성당을 점검하기 위하여 통통한 체격에 딱딱한 성격으로 테 없는 안경을 쓴 현대적인 고위 성직자인 주교가 찾아온다. 그는 1950년대가 아닌 다가올 다음 십년은 통합과 화합의 십년이라 규정하고, 통화합을 위해 보편 교회의 정신에 입각해 라틴어 말고 현대 현지어로 미사를 집전하라고 지시한다. 이런 세상에, 이렇게 끔찍한 일이. 어찌 미사를 라틴어가 아닌 언어로 진행할 수 있을까? 미사가 별 거야? 하느님한테 올리는 제사. 그러면 하느님의 언어인 라틴어로 해야 하느님이 더 쉽게 알아들으실 거 아니냐는 거다. 이렇게 망측한 일이.

  그런데 주교는 여기서 한 숟가락을 더 보태,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당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성상을, 코가 깨진 성모 마리아 상은 코를 정상으로 회복시킨다는 전제로, 소화 테레사와 함께 둘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철거하라고 지시한다. 무슨 수호성인. 무슨 수호성인. 이게 미신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취지다. 죽은 후 지옥의 유황불에 던져질 내가 보기엔, 그러면 성체를 모시는 일도? 밀떡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붉은 포도주 한 잔 들어올리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의 잔이니, 너희는 이 의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

  주교의 말을 듣고 삐딱한 우리의 앵윈 신부. 신부가 자기 말을 제대로 들을 거 같지 않으니까 주교가 덧붙인다. 이제 늙어버린 자네한테 조수가 필요할 거 같군. 즉 자기 고자질꾼을 부제로 보내겠다는 거다. 아, 이런 제기랄.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을. 그러나 늦었다.

  며칠 후, 복종의 의무가 있는 앵윈 신부는 주교의 명령을 따르기 위하여 성당 마당 귀퉁이를 넓게 파고 그 속에 성상들을 파묻는다. 그리고 그날 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캄캄한 밤에, 늦은 시간에 사제관을 방문하려면 부엌으로 향하는 옆문을 두드려야 함에도 무례하게 현관을 쾅쾅 두드리는 작자가 나타났으니, 그의 목 둘레에 빳빳하고 흰 로만 칼라를 달고 있다. 누가 봐도 주교가 보낸 새끼 신부, 즉 부제가 드디어 도착한 거였다. 온몸에서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검은 옷의 신부, 그의 이름이 플러드, 알파벳으로 FLUDD이어서, 온몸에서 줄줄 흐르는flood 빗물하고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나? 이이가 17세기의 신비론자이자 연금술사, 점성가, 오컬트 주의자인 그 플러드 맞아?

  흠. 그건 알려드릴 수 없지. 한 가지 힌트만 드리자면, 이 플러드는 직접 미사를 집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악마는 아니라는 말씀? 아, 몰라, 몰라. 그러면 미사를 집전한다니까 사기꾼? 아 모른다니까! 말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보태자면, 저 먼 시절 그레고리우스 1세의 말을 확실하게 거역한 종자라서 순결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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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2-14 0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예니 에르펜베크,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화요일. 아리엘 도르프만, <체 게바라의 빙산>
목요일. 최은미, 《목련정전目連正傳》
금요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

stella.K 2025-02-14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옥은 가톨릭에서 나온 거 아닌가요? 연옥에 가 있는 가족에게 살아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위해 연보하면 천국으로 간다고 믿게해서 엄청난 부를 가톨릭이 쌓게되고 그에 환멸을 느낀 루터나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맞나 모르겠는데 암튼 이책 흥미롭긴 하네요.
스펙터이터란 사람이 쓴 말이 인상적이긴 하네요.
울프 홀을 쓴 작가로군요.
 
목련 전차 창비시선 264
손택수 지음 / 창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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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정초, 스물여덟 살이 채 안 된 청년 손택수가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과하여 시인의 말석에 자리를 깔더니, 5년이 지난 2003년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을 낸다. 그리고 3년 후, 같은 창비시선 시리즈로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한 것이 오늘 독후감을 쓰는 《목련 전차》이며, 또 4년이 지나 이번엔 실천문학사의 실천시집을 통해 찍은 《나무의 수사학》은 5년 전에 읽고 독후감을 올린 적 있다. 이렇게 나는 손택수의 3번, 2번 시집을 읽는다. 《나무의 수사학》의 시인은 이미 정원에 열매가 열리는 실팍한 모과나무가 있는 아파트에 살면서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목련 전차》의 시인으로서는 그것도 꿈 같은 상상일 수도 있었을 터. 이 시집에서 손택수는 어린 시절 태를 묻은 고향 담양의 할머니 집을 바라보고 있고, 머리가 컸어도 기껏해야 생활의 궁상에 전 초짜 시인이자, 아직 신혼의 기색을 털지 못한 젊은 남편이다.

  손택수는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70년 개띠. 소년 시절에 먹고 살기 위해 부모의 손을 잡고 부산으로 이주해 향수병을 단단히 앓았단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어린 시절 당시에는 드물게 산부인과를 퇴원하자마자 외갓집에 보내져 경기도 소도시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후,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얼마나 내가 떠난 그곳과 외조부모의 품을 그리워했는지. 부산의 손택수도 딱 그랬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무의 수사학》 122페이지에 실린 <내 시의 저작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에서 그는 자기 시가


  구름 5%, 먼지 3.5%, 나무 20%, 논 10%

  강 10%, 새 5%, 바람 8%, 나비 2.55%

  돌 15%, 노을 1.99%, 낮잠 11%, 달 2%

  (여기에 끼지 못한 당나귀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함)

  (아차, 지렁이도 있음)


  이라고 딱 못을 박았다. 그러니 자기 시(들)의 94%는 당나귀와 지렁이의 소유권을 포함하지 않고도 몽땅 유년시절의 기억 또는 그것을 향한 노스텔지어라는 의미이겠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목련 전차》에 실린 시에서도 내 마음에 차는 시들은 유년시절 시골 생활을 추억하는 시들을 모아 놓은 1부에 집중되어 있다. 예컨데 이런 시.



  강이 날아오른다



  강이 휘어진다 乙, 乙, 乙 강이 휘어지는 아픔으로 등 굽은 아낙 하나 아기를 업고 밭을 맨다


  호밋날 끝에 돌 부딪는 소리, 강이 들을 껴안는다 한 굽이 두 굽이 살이 패는 아픔으로 저문 들을 품는다


  乙, 乙, 乙 물새떼가 강을 들어올린다 천마리 만마리 천리 만리 소쿠라지는 울음소리 ―


  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    (전문. P.10)



  강이 날아올라?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천적들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밝은 낮 동안 강물 위에 동동 떠 있던 물새떼가 석양을 맞아 천 마리, 만 마리 한 번에 날아오르는 모습을 乙, 乙, 乙 이라고 묘사했을 것이다. 乙 새 ‘을’자가 강 위에 뜬 새의 모습과 이렇게 어울릴 수가. 거 참.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근데, 내가 시를 아는 게 쥐뿔도 없다고 가정을 하고, 그래서 용감하게 한 마디 덧붙이자면, 그저 내 의견일 뿐인데, 위의 시에서 마지막 연, “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는 빼버리는 게 더 낫지 않았겠어? 거 새들끼리 소쿠라지게 울어가며 잘 어울리는 걸 뭐하러 시인이라는 사람종이 그 속에 뛰어들어 그림을 망가뜨리냐는 것이지. 뭐 아니면 말고. 이 시의 저작권은 당연히 강, 새, 노을, 그리고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틀림없이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 지렁이가 가져야겠다.

  <강이 날아오른다>가 시집에서 제일 먼저 실은 시이고, 이어서 <집장구>가 등장한다. 집장구? 그게 뭐냐고? 예전 나 어린 시절에 국한해 말씀드립자면, 봄 가을, 이렇게 일년에 두 번씩 문창호지를 다시 발랐다. 먼저 묵은 창호지를 창살에서 다 떼어내고, 그래도 창살에 붙은 창호지까지 물에 듬뿍 불려 박박, 그러나 창살에 흠이 안 갈 정도로만 박박 긁어낸 다음에, 새 창호지에 풀을 발라, 창살 말고 창호지 전체에 풀을 발라 붙이고, 풀을 붙이던 풀비로 쓱쓱 문질러 닦아 말리면, 창호지와 풀이 마르면서 이게 여간 팽팽해지는 게 아니라서 손가락으로 통통 튀긴다든지 하면 통통통, 마치 장구 칠 때 나는 소리가 난다 하여, 그걸 집장구라 칭하고 있는 거다. 그리하여 노래하기를:



  집장구



  일년에 한 번은 집이

  장구소리를 냈다

  뜯어낸 문에

  풀비로 쓱싹쓱싹

  새 창호지를 바른 날이었다

  한입 가득 머금은 물을

  푸― 푸― 골고루 뿌려준 뒤

  그늘에서 말리면

  빳빳하게 당겨지던 창호문

  너덜너덜 해어진 안팎의 경계가

  탱탱해져서,

  수저 부딪는 소리도

  새소리 닭울음소리도 한결 울림이 좋았다


  대나무 그림자가 장구채처럼 문에 어리던 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코 고는 소리에도 정든 가락이 실려 있었다    (전문. P.11)



  시인의 고향인 담양에는 대나무가 많다. 그게 달 그림자에 비쳐 창호 바른 날 방문에 어렸던 것이 마치 장구채 같았고, 그래서 누군가의, 외할아버지나 외삼촌 또는 외할머니의 코고는 소리마저 울림 좋은 장구 소리처럼 들렸다는 뜻일 터인데, 이 시 또한 무식해서 용감한 의견을 덧붙이자면, 둘째 연을 통째로 없애버렸으면 어땠을까? 아니면 연 구분 없이 윗연에 이어서 쓰던지. 괜히 한 마디 보태 거스러미가 생긴 것 같은데, 시인을 꼭 그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인의 의견이 맞겠지. 손택수가 우리나라에서 시인한테 주는 거의 모든 시 관련 상은 다 쓸어 담은 당대의 시인이다. 예전엔 궁상맞은 청년 시인이었을지언정 지금은 우리나라 유수의 출판사인 실천문학사 대표이사를 지내고 있으니 나 같은 아마추어 나부랭이가 뭐라 의견을 보탤 처지가 아닌 건 안다. 그래도, 내 입도 뚫린 입이니, 뭐 이 정도야 어엿비 봐 주겠지.

  그리고 이 시집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시가 등장한다. <방심>.



  放心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전문. p.14~15)



  시 읽기를 마치자마자 딱 그림이 접수된다. 착한 시다. 시골집이라도 있는 집이다. 대청마루에 배를 내놓고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한낮, 앞뒤로 열어놓은 마루문을 통해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관통해 말 그대로 쎤~한 함포고복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을 때, 누운 내 얼굴 바투 위로 하얗고 하얀 배를 가진 제비 한 마리가 대청마루를 관통해 날아가는 그림. 그게 시인이 “放心방심”이라 하는 순간이었다. 찰나의 숨막히는 간질거림. 그리고 눈썹 한 올 같은 긴장감.

  담양에서 부산으로 간 소년 손택수는 부산에서 웬수 같은 사춘기를 맞는다. 그리하여 이제 슬슬 관능에도 눈을 뜨게 되는데, 이 시절의 순정한 성적 개안을 시인은 참 그럴 듯하게 그려낸다. 아니나 다를까, 손택수의 다른 시집을 검색해보니 예상 외로 청소년 시집도 여러 권 낸 이력이 있다. 그렇군. 그래서 사춘기 소년을 읽는 내 마음도 그리 실감이 났군. 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청소년 시라는 거. 이거 아무나 쓰면 망쳐버리기 일쑤인 것은, 내가 여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여성의 경우는 모르겠고, 험하게 사춘기를 지낸 사내 시절을 겪은 수컷들은 다 아시리라. 이만큼 고급진 수컷의 사춘기 그림을 그리기가 쉽지 않은 것을. 이 시 읽으며 독후감을 마감하자.



 



  챙, 하면 떠오르는 빗소리

  빗소리와 빗소리가

  부딪치는 양철지붕 끝

  처마에 챙을 단 집이 있었다

  집 안을 가리고 남은 여분이 살짝

  대문 밖으로 뻗어나와 만든 품,

  하굣길에 소낙비를 만나선

  급한 마음에 우당탕탕 그 속을 비집고 든 적이 있는데

  책가방 머리에 쓰고 뛰어든 그 속엔 마침

  여고생이 된 옆집 누나가 새치름

  비를 긋고 있었던가, 젖은 누나의

  교복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김과

  마악 잔털이 돋기 시작한 내 겨드랑에서 빠져나온 김이

  우리들 허락도 없이 마구 휘감겨들던 챙

  더운 살냄새와 살냄새가 뭉클뭉클 살을 비벼대던 챙

  처마 끝을 따라 뭉긋이 흘러내린 깊어진 마음의 기울기

  챙, 하면 아찔하게 후들거리는 빗줄기

  은빛 스틱이 치는 양철북 소리   (전문.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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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2-13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참, 그런 내용이구먼유. ㅋㅋ 지나놓고 보면 그리운 시절이 있지요. 저도 어린 시절 1년에 두 번 외갓댁 가는 게 그렇게 좋았는데. 불편한데도 거길 다녀와야 만사가 형통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 시절이 그립네요. ^^

Falstaff 2025-02-13 18:37   좋아요 1 | URL
넹. ㅎㅎㅎ 시간 나면 쫑쫑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아구아 비바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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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라면 그녀의 나이 스물둘에 쓴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가장 먼저 읽었다. 주인공 주아나의 친절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한 여름의 대낮. 탁-탁, 탁, 탁.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 뎅-그렁. 건조한 공기를 뚫고 들려오는 시계 우는 소리. 타자로 시를 쓰는 아버지를 흉내내, 시를 써서 아버지에게 보여주지만 딸은 그리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남편과 아이를 두고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 엘자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어쩌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몇 안 남은 선량한 선생의 조언. 행복해지면 뭘 얻을 수 있을까? 행복해지면 어떻게 되나? 그 다음엔 뭐가 오지? 무엇을 위해 행복해져야 하나? 같이 뒤를 잇는 의문문들.

  작가의 성장과정을 아는 것은 독자에게 이런 의미에서 필요하다. 어머니의 존재 없음이 딸에게 미치는 영향. 또는 딸을 미칠 수 있게 하는 영향. 글을 쓴다는 일이 일종의 미쳐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지만. 유대인 가족의 일원으로 우크라이나에 살 당시, 리스펙토르가 세상에 나오던 시기인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 벌어진 우크라이나 지역의 반유대주의 폭동과 학대를 일컫는 포그롬 시절, 클라리시의 어머니 마니아가 폭도들에 의하여 강간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을 클라리시가 직접 목격을 했는지, 아니면 가족 내 깊은 트라우마로 작용해 가족공동체로 절망적이고 궁극적으로 밀실 공포증 적인 상태 속에서 살게 되었는 지, 두 경우 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여간 이 일로 리스펙토르 가족은 클라리시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브라질로 이민하게 된다. 어머니는 딸이 아홉 살 때 숨을 거둔다.

  그리하여 데뷔작, 놀라운 충격일 수밖에 없는 데뷔작인 <야생의 심장 가까이>는 물론이고 <별의 시간>에서도 죽음과 삶의 흔적에 관한 작가 자신의 내적 갈등을 묘사하는 데 9할, 적어도 8할 이상의 지면을 투여한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글은 수많은 비의, 은유, 미로로 점철되어 있어서, 독자는 작가의 언어를 따라가며 각기 저마다의 오해 또는 오역을 가미할 수밖에 없다. 작가를 오해하지 않고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책, 문장들의 집합. 그것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이다.

  여태 읽은 세 권의 책 가운데 이것, <아구아 비바>가 제일 그랬다.


  “거기엔 몹시도 심원한 행복이 있다. 할렐루야가 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나는 이별의 고통이 담긴 처절한 인간의 울부짖음과 합쳐진 악마의 환호를, 할렐루야를 외친다. 나는 아직 이성을 잃지 않았지만―이성의 광기라고 할 수 있는 수학을 배웠으므로―그러나 지금 나는 혈장을 원한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런 불경의 할렐루야로. 할렐루야는 주를 찬양하는 할렐루야가 아니라 인간의 울부짖음과 합쳐진 악마의 환호를 말한다. 무엇이 리스펙토르를 기존의 율법에 대하여 극한 도전을 하게 만들었을까? 여기에서도 작가의 바이오그래피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쉰일곱 번째 생일을 불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난소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러나 그녀의 후반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고통은 마흔네 살 때 집에서 난 화재로 인한 화상의 상처였다. 인류가 포유 짐승이던 시절부터 수만 년 동안 가까이 할 이유가 없었던 뜨거운 열기로 인한 피해, 화상에 대해 인류는 그걸 대비하고 스스로 치유할 기질을 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화상은 인류의 모든 외상 가운데 가장 고통스럽고, 돌이킬 수 없는 흉터를 남기며, 치유하기 위하여 제일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리스펙토르는 화재 당시 입은 화상을 거의 치료했지만, 지독한 화상의 후유증, 몸과 특히 마음 속에 도사린 끔찍한 고통의 기억 속에서 쉼없이 흔들리는 영혼으로 <아구아 비바>를 쓰고 있었다.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다. 리스펙토르 자신이 직접 그렇다고 말할 작가가 아니라서. 아니면 어떤 식으로도 인간의 울부짖음과 악마의 환호, 그리하여 타인의 피, 혈장을 원하는 상태를 할렐루야, 찬양할 수는 없을 테니까.

  독자는 처음부터 이렇게 큰 펀치 한 방을 맞고 시작한다.

  제목 <아구아 비바 Agua Viva>. 1971년에 쓰고 73년에 발표한 작품. “살아있는 물”이라는 뜻을 가진. 제목을 감안하고 위에 인용한 시작부분을 연상하면 이제 앞으로 뭔가 흐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지난 세기가 시작할 때부터 독자는 글 속에서 뭔가 흐르는 양식을, 쥐뿔도 아는 건 없어도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고 주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족속들이다. 그래서 기대한다. 이제 뭔가 흘러주기를. 게다가 제목 자체가 물이라고 하니까. 하지만 흐름은 시작하자마자 브라질의 열기 속으로 증발해버렸거나 모래땅 속으로 스며들어버렸다.


  바로 다음에 거론하는 주제는 ‘지금-순간’. 즉 현재. 미시적 현재라서 시작하자마자 벌써 과거가 되어버린, 숱하게 많은 작가, 작가 지망생들이 써먹어 식상하기 그지없는 현재의 포착을 말하지만 당연히 실패하고 만다. 현재를 붙잡는 일은 순간의 본질적인 특성 상 금지되어 있지만 유일하게 허공에서 빛나는 순간의 보석을 순간의 떨림 속에서 느낌으로 승화하는 물질, 도파민이 틀림없을 것 같은 물질을 황홀경 속에 반짝이는 기쁨의 순간은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사랑의 행위. 몸의 기이한 영광, 형태가 없는 동시에 너무도 객관적이어서 마치 몸 밖에서 생겨나는 듯한 기쁨, 기쁨, 기쁨의 시간, 순간의 본질.

  아, 이런 식으로 흐르나보다. 독자는 한 번 더 오해한다. 특별한 교육을 받은 평론가는 뭔가 흐르는 것을 감지할 지도 모르지. 그러나 작가는 이 기쁨의 순간에 ‘찬미하는 주께서 계신 하늘’이 아닌 ‘허공’에 대고 새처럼 노래한다. 이 사랑마저, 고통스러운 열정 없이는 할렐루야가 사랑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등장한다. ‘당신.’

  이렇게 해서 드디어 소설은 2인칭 소설이 될 수 있을까? 글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나는 아니라는 쪽으로 손을 든다. 더할 수 없이 개인적인 소설. 오직 자신의 뇌 속에서 벌어지고, 파생되고, 기어 나오는 추상명사들의 열병, 열병에 이어지는 분열행진. 때에 따라 낱말이나 구절의 폭탄을 과시하는 무장행렬.

  명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추상명사들로 ‘나’는 ‘나’ 자신과 당신, 정말 당신일 수도 있고,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일 수도 있는 당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무언가를 만들 것인데, 그건 죽음에 이르는 나의 자유이다. 죽음까지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건 자유이고, 자유에 이르게 만드는 건 추상명사들인데 추상명사 속에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고통’이 들어있다고 추리한다. 독자는 단정하지 못한다. 다만 추리할 뿐. 작가 자신 스스로 단정하는 건 추상명사 말고 없기 때문에.

  그리하여 독자는 결코 두껍지 않은 책을 읽는데 지쳐버리기 시작한다. 만일 리스펙토르 특유의 강건체와 화려체 문장이 아니라면 이런 추상명사의 군집, 다른 곳에서도 아니고 엄정한 ‘산문’ 형식의 예술형태 속에서 추상명사가 득실거리는 현상에 대하여 “내 상태는 물이 흐르고 있는 정원.”이라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지만 나는 리스펙토르 표 문장이 아니라면 쉽지 않았을 듯하다. 이렇게 많은 상황, 상태, 변용 등을 나열하다가, 그래서 독자가 책을 읽으며 미궁에 빠져들기 바로 직전에, 다행스럽게 책의 분량이 많지 않아서, 어느덧 결말 부근에 도달하면, 놀랍게도 여태 쏟아놓은 추상명사들, 아무렇게나 난삽하게 널려 있는 줄 알았던 추상명사들을 어느 새 넓은 빗자루로 쓸어 모아 적어도 한 군데 소복하게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복至福 자체는 종교적이지도 세속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도 아무런 입장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내 말은, 어떤 사람이 머리로 하는 생각과 이 ‘생각-느낌’은 서로 극도의 불통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아무런 궤변이나 역설 없이 말하건대, 그 불통 지점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훌륭한 소통을 제공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자신과 소통한 것이다.”


  이렇게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지복에 관하여 독자들과 소통하고자 했던 거였다. 시도가 성공을 했건 실패했건 판단하는 것은 당연히 독자의 몫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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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2-11 0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보니 완전히 꿈보다 해몽이구먼. 인생이 다 그렇지 뭐.

공쟝쟝 2025-02-11 08:35   좋아요 1 | URL
와!!!! 퐐님 특유의 해몽..! 재밌게 읽었어요, 저는 작가의 이력은 이 글 읽기 전에 전혀 몰랐고 책상위에 산문집을 올려두고 종종 읽는데요, 클라리시는 사랑이 많고 꽤 명랑하고 산뜻한 산문을 쓰는 작가였어요. 그래서 아구아 비바 읽을 때랑 뭔가 다른느낌이라 신기하기도…!

Falstaff 2025-02-11 15:30   좋아요 1 | URL
재밌게 읽어주어 고맙습니다! 이이의 작품은 정말 읽기 쉽지 않아요. 그렇다고 막 쓰면 쥐뿔도 없으면서 잘난 척하는 거 같고요. ㅋㅋㅋ 산문집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공쟝쟝 2025-02-11 17:10   좋아요 1 | URL
퐐님 글은 (물론 그냥도 장광설이 좋지만) 책 다 읽고 난 뒤에 보면 더 읽기 좋은 것 같아요. 아. 이런 맥락이 있을 수도 있었겠구나.
제가 느꼈던 아구아 비바는 매우 추상적이면서도 엄청 신체적인 글이었고, 뭔가 읽으면서 대단한 걸 읽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했어요!!!
작가의 삶 자체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 보면... (제가 게으르기도 하지만) 책 자체를 책 자체로 좀 느끼보고 싶었던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요 글 보고 나서는 다른 느낌으로 다시 읽어볼 수도 있을거 같고요? 아무튼 크라리시 리스펙토르 만세!

수이 2025-02-11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구아 비바는 별 다섯 개인데!!!

Falstaff 2025-02-12 06:50   좋아요 1 | URL
작품한테 송구하지만 독자가 따라가지도 못하면서 별5를 찍을 수 없었답니다. ㅜㅜ
 
할리우드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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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부코스키는 여러 작품을 읽은 걸로 알고 지냈는데, 지금 세어보니 딸랑 세 권 밖에 안 된다. <우체국>, <팩토텀>, <호밀빵 햄 샌드위치>. 근데 참 신기한 작가다. 1920년에 독일에서, 까마득한 조상은 폴란드 출신으로 짐작하는 독일계 미국인의 아들로 출생해, 전후 독일의 무지막지한 인플레이션을 피해 부모 손잡고 대서양을 건너 볼티모어에서 잠깐 지내다가, 열 살 이후 젊은 시절을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낸 시인, 소설가, 에세이스트, 시나리오 작가.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왔지만 종종 짧지 않은 실업자 생활을 하던 아버지 하인리히(또는 헨리) 부코스키 선생은 당대 가난한 가장들이 흔히 그랬듯 괜히 자존심만 점점 세져서 아들 찰리가 조금만 잘못해도 가볍지 않은 구타를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이에 대한 반발도 조금 섞여, 십대 초반의 찰스 부코스키는 막역한 친구이자 알코올 외과의사의 아들 빌의 지도편달 아래 훗날 알코올 의존증 환자로 진입할 될성부른 떡잎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립대학은 아니더라도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에 들어갔다가 2년만에 때려치우고 시와 소설 쓰는 일에 접어들었다. 근데 그것도 이 방면으로 이름을 내야 먹고 사는 것이라서, 이때부터 부코스키는 사회 저 바닥 일을 하며 근근이 호구지책에 급급했다. 이런 것들이 내가 읽은 그의 장편소설에 그대로 다 나온다. 먹고 사는 데 급급했던 건, 당연히 ’먹고’ ‘사는’ 의식주 말고도 상당한 돈을 알코올을 구입하는 용처로 사용했다는 것이고, 한참 젊은 청춘이 알코올을 섭취했으면 술집과 골목에서 왕왕 주먹싸움도 벌였을 것은 명약관화. (나도 어린 시절부터 술을 마셨지만 천성이 귀여워 싸움하고는 거리가 멀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찰스 부코스키는 큰 키에도 불구하고 손이 작아 펀치에 취약한 반면 맷집 하나는 아예 타고 난 체질이라 점점 싸움질에 익숙해지자 동네 양아치 가운데에서 추앙을 받는 수준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이렇게 막 사는 와중에도 부코스키는 가끔 술에서 각성한 상태가 되기만 하면 구식 타자기에 종이를 끼워 거의 열 손가락을 사용해 쉼 없이 타자를 쳐가며 시도 쓰고, 잡문도 쓰고, 단편소설도 쓰고, 아주 가끔 장편소설 습작도 했단다. 주로 시와 단편소설 및 잡문 위주이기는 했다. 첫번째 장편소설 <우체국>은 그의 나이 51세였을 때이니. 이렇게 주로 지하신문이나 하층 시민이 주로 읽는 잡지에 글을 기고하며 그냥저냥 십여 년간 우체국에서 잡일을 하는 직원으로 사는 부코스키를 주목한 남자가 있었으니, 독립출판사 블랙 스패로우 프레스의 존 마틴. 그는 부코스키에게 만일 전업작가를 한다면 평생 한 달에 1백 달러의 월급을 지급하겠다고 제의했고, 이를 수락해 그렇지 않아도 곧 잘릴 것 같던 우체국에다 당당하게 사표를 던지고 뛰쳐나와 단 한달 만에 첫 장편소설 <우체국>을 출간하며 단박에 스타덤에 오른다. <우체국>은 내게도 처음 읽어본 찰스 부코스키였는데, 부코스키보다 2년 아래인 잭 케루악의 펑키 기질보다 훨씬 막가는 인물을 설정한 난리법석으로 읽었으며, 처음엔 그렇게 무지막지한 작가의 무지막지한 작품으로만 생각했다가, 점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거 참 이상한 매력이 있는 작가라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는, 그나마 마음 하나는 따뜻한 동네 형 이야기 같아지면서 부코스키의 작품을 찾아 읽는 수준까지 바뀌어 버렸던 거다.

  이렇게 세상을 갈팡질팡, 난리법석으로 살아버린 젊은 시절의 찰스 부코스키. 작품 속 찰스 부코스키의 페르소나로 등장하는 행크 치나스키. 여기까지가 내가 전에 읽은 부코스키의 소년시절, 청년시절, 40대 우체국 시절이다.


  이제 65세가 된 노인 찰스 부코스키 또는 행크 치나스키. 그는 그동안 장편소설 네 편, 시집 열일곱 권, 단편소설집 몇 권, 에세이 몇 권 등 다양한 책을 출판하면서 주로 서민계층의 두터운 팬을 확보한 나름대로 유명 시인, 작가로 이름을 냈다. 중증 알코올 의존증에서 약간 빗겨나간 그는 딱 그만큼 경마에 취미를 붙였고, 나름대로 경마의 원칙을 세워 소소하게 돈을 벌어오는 수준이 되었는데, 이런 지경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돈을 꼬나 박았을까, 생각해보면, 유명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예순다섯 살이 되었음에도 간신히 거지꼴을 면한 수준이었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다. 다 찌그러져가는 폴크스바겐 고물차를 몰고 다니며, 아직 자기 집 없이 월세를 전전하는 노령우대자. 이런 그에게 할리우드 영화감독 종 팽쇼가 연락을 해 시나리오 작업을 함께 해보지 않겠느냐고 의향을 묻는다. 그래서 젊은 아내 세라와 함께 팽쇼의 집에 갔더니 긴 검은 머리의 여자애가 하나 있다가 자기 이름이 포피Popppy라고, 다 합해 알파벳 p가 넷 있는 이름이라 하는데 세상에나, 별명이 브라질 공주인 포피가 치나스키가 쓸 시나리오의 후원자 중 한 명으로 선수금 1만 달러를 제시했던 거다. 하지만 행크 치나스키는 오로지 시와 단편에만 관심이 있어서 팽쇼 집에 있는 고급 와인만 실컷 마시고 정작 시나리오 작업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베니스에 전체 영화 촬영소를 소유하고 있는 데니 서버라는 젊은 제작자가 행크에게 시사실을 대여해주겠다고 해서 다시 가봤고, 그곳에서 감독 종 팽쇼와 함께 그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프랑스 배우 프랑수아 라신이 마음에 들어 기꺼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수아 라신. 백발인 동시에 금발. 불그죽죽하게 변해가는 분홍색 얼굴이 못된 장난을 치려 하는 남학생 같은 표정이어서 보자마자 좋아하게 되는 인상이라 넙죽 허락을 했는 지도 몰랐다. 근데 사실 프랑수아 라신은 멘탈에 조금 문제가 있다. 도박에 지대한 관심이 있어 도박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심사숙고, 경향과 스타일을 파악하기 위해 하루 종일 시뮬레이션 게임에 몰두한다. 후에 종 팽쇼와 함께 숙소에서 쫓겨나는 신세로 몰려 아프리칸 미국인들만 사는 게토 지역으로 이사해서도 닭 여섯 마리를 키우기 위하여 끝까지 게토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캐릭터이다. 선량한 인간이되 나사가 몇 개 빠진 인물로 생각하면 여지없다. 자신이 시뮬레이션 한 결과를 실험하기 위해 카지노에 갔다가 거금 6만 달러를 몽땅 잃는 참변을 당하기는 하지만.

  하여간 이러저러한 이유로 치나스키는 시나리오를 써 주기로 하고 선수금 1만 달러를 받는다. 이와 거의 동시에 실제로 작가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이 미국보다 독일에서 먼저 큰 인기를 끌었던 바, 독일에 있는 대리인 카를 포스너로부터 책 세 권을 번역 출판해 선인세 3만5천 달러를 받았으니, 거의 한 방에 무려 4만5천 달러가 생겨, 졸지에 늙은 부자의 대열에 서게 됐다. 이리하여 치나스키는 세금 혜택을 목적으로 자기 소유의 집을 장만하려 집을 보러 다니고, 차도 새로 검정색 BMW 520i 한 대를 구입하기에 이른다. 고목나무에 꽃 핀 거다.

  행크는 자기 젊은 시절에 겪었던 모든 불행과 알코올 의존증과 난잡한 섹스와 싸움질을 총망라하여 시나리오 작업을 했고, 정말로 우여곡절 끝에, 감독 종 팽쇼가 전기톱으로 자기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까지 해야 했던 미친 과정을 거쳐 드디어 영화화하는 데 성공했고, 실제로는 미키 루크가 치나스키 역을, 페이 더너웨이가 완다 역을 맡은 <술고래 Barfly>, 소설 속에서는 <짐 빔의 춤>은 프랑스 칸 영화제에 출품까지 해 남우주연상 후보까지 올랐으나 당연히 미끄러지고 만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기 짝이 없는 환상의 장소 할리우드. 그러나 이 속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늑대 상태가 엄연히 존재하며, 쥐뿔도 든 것 없으면서도 낯바닥 하나 잘 생긴 거 가지고 세상만사 사는 데 걱정 한 번 해본 적 없는 스타들의 오만방자도 당연히 있으니, 오히려 우리 시정잡배들이 모여 사는 사바세계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다. 그곳에서 한 계절 시나리오 작업과 영화 제작의 한 자리를 꿰고 있었던 행크 치나스키, 또는 찰스 부코스키가 이 과정을 끝내자마자 뒤 돌아서, 그럼 영화 한 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걸 소설로 한 번 써볼까? 싶어 이젠 구식 타자기가 아니라 자기 전담 세무사가 권한 전동 타자기에 백지를 걸고 열 손가락을 이용해 타자를 누르기 시작하는 작품.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이니 당연히 재미있다. 그러나 전작, 외롭고 가난하고 길도 보이지 않은 부랑자 신세의 젊은 영혼의 방황에 비하면 좀 덜 재미있다. 역시 행크 치나스키는 동네 형일 때 제일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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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5-02-10 0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호밀빵샌드위치 한권읽었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생각이 안나서 리뷰 찾아보니 2019년에 읽었고, 주로 소년시절의 자전적이야기로군요. 제목이 왜 호밀빵샌드위치인지 끝까지 모르겠다고도했는데 혹시 아시나요? 제가 제목에 좀 집착을하는지라^^

Falstaff 2025-02-10 08:32   좋아요 0 | URL
호밀빵은 2017년, 8년 전에 읽어서...
당시에 아, 이래서 제목을 이렇게 지었겠구나, 생각했던건 틀림없는데 이제 잊고 말았군요. 저도 제목 보고 홀든 콜필드를 제일 먼저 떠올렸던 건 확실하고요. ^^;
 
타임 셸터 - 2023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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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는 정말 오랜만에 읽는 불가리아 소설가이다. 불가리아는 14세기 말에 튀르키예에 점령당해 무려 5세기 가까이 식민지배를 당한 것이 치명적 이유일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아는 불가리아 작가는 원래 직업인 극작가, 소설가, 시인으로의 작품보다는 1977년에 출간한 자서전 <구원받은 혀>로 널리 읽힌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리아스 카네티 정도 밖에 없다. 불가리아는 우리나라가 개항을 한 1876년에 탈 식민지 무장봉기의 횃불을 올려 79년에 튀르키예의 예속에서 벗어났으나 20세기가 벌써 자리잡은 1908년에야 독립국가로 공인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문학적 발전을 시작할 수 있었던 불가리아.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그 땅은 다시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또 곧바로 볼셰비키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넓게 자리를 잡았다. 당시의 문학은 어느 정도 정치에 복무를 해야 했으니, 1920년대 불가리아의 정권을 잡은 파시스트의 백색 또는 적색 테러를 피하기 위해 몸조심을 하던 문인들은 각기 자기 살 길을 찾아야 했을 터. 이렇게 살다가 1944년에 본격적인 불가리아 사회주의 국가가 형성되고 문학판은 뒤늦게 반 나치 저항문학이 주류를 이루었으며(원래 문학의 특기 가운데 하나가 뒷북 치는 거다), 곧바로 냉전과 무시무시한 검열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우리 귀와 눈 가는 곳에 불가리아 작가들이 들어올 바늘 틈이라도 있었으랴. 불행하게 비슷한 발칸 지역에 자리잡은 크지 않은 나라들이 다 비슷한 신세이긴 했다.

  그러다 1968년이 오고, 얌볼 지역에서 68년생이되 빠른 68년생이라 원숭이띠가 아닌 양띠 남자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가 출생한다. 출생 연도부터 남다르다. 전 유럽 지역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적 사조가 젊은이들의 피를 가열하여 세상 만방에 폭력을 수반한 집회와 시위를 생산한 독특한 시절을 굳이 선택해 세상으로 비집고 나온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는, 당연히 태어날 때는 몰랐겠지만, 소피아대학에서 불가리아어 문학과(국문과)를 졸업하고 불가리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을 시절, 즉 고스포디노프의 인생 가운데 가장 젊은 시절에 그의 조국인 불가리아를 위시해 동유럽에는 벨벳처럼 부드러운 혁명, 벨벳 혁명의 폭풍이 불어 닥쳤으며, 그는 혁명의 훈풍을 가슴 깊이 호흡하면서 그간 시인, 소설가, 극작가들의 심장을 구속했던 사슬이 풀리는 것을 직접 목격했으니,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던 첫 세대로 불리어도 그리 어색하지 않는, 행운의 열쇠를 입에 물고 태어났던 거다. 몇백 년 만의 첫 세대.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는 처음에 두 권의 시집을 출간해, 두 권 모두 불가리아 국가 문학상을 받는 기염을 토한다. 이어 첫 소설작품인 <자연소설>은 신인작가로 매우 예외적이라 할 수준이었는지 무려 21개 나라에서 번역 출간하는 놀라운 히트를 쳤다. 단편소설집과 그래픽노블로도 이름을 냈지만 그건 그냥 건너뛰고, 두번째 소설 <슬픔의 물리학>도 불가리아 국가 문학상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특히 독일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아 고스포디노프가 유럽 변방인 불가리아에서 드디어 유럽의 중심무대, 영국, 프랑스, 독일, 스칸디나비아 각지로 이름을 떨치는 계기를 마련한다. 실제로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것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상인 스트레가-유럽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최종 숏리스트까지 올랐다가 장렬하게 미역국을 마신다. 2020년에 초판 출간한 세번째 장편 <타임 셸터> 역시 출간 당시부터 유럽 경향 각지의 이름이 있는 작가라면 거의 예외 없이 상찬을 쏟아부어 2021년에 드디어 스트레가-유럽 상을 받았고, 불가리아-영어 전문 미국인 역자 안젤라 로델이 번역해 2023년에 부커-인터내셔널 상까지 휩쓸어, 우리나라에 단 한 권 번역해 나온 고스포디노프의 부커-인터내셔널 판, 그러니까 불가리아어-영어-한국어 삼중역 판을 읽기에 이르렀다.

  하여간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가 대단하긴 대단하지? 책만 썼다하면 국제적 히트 상품이니 이거 원.


  지구가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을까? 놀라지 마시라. 17세기 중반 아일랜드 어셔 주교는 그게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토요일 오후 6시경이라고 딱 못을 박았단다. 17세기면 1600년대. 유럽은 중세에서 갓 벗어났음에도, 여전히 이렇게 정신 못 차리는 사제들이 쌔고 쌨었다. 팍스 바티카나. 이에 비해 버지니아 울프는 1910년 12월을 기점으로 인간의 기질이 바뀌었다고 했는데, 얼핏 보기에 다른 어떤 날과도 다르지 않은, 우중충하고, 춥고, 신선한 눈 냄새를 띤 날일 뿐이지만 무언가의 봉인이 해제되었고, 이를 극소수의 사람만이 감지해냈다고 한다. 반면에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는 1939년 9월 1일 이른 아침에 인간의 시간에 종말이 닥쳤다고 주장한다. 수십만 명의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에 밀집해 있다가 드디어 첫번째 포성이 울린 시간이다.

  물론 1939년 이전, 1914년 6월 28일의 사라예보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세르비아계 학생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에 맞아 절명하면서 1차 세계대전의 포성을 울리게 만든 사건도 있었으며, 전쟁 중에는 영미 폭격기에 의한 드레스덴 폭격 말고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상공에서 터진 두 발의 원자폭탄에 의한 집단 학살도 있었지만 유럽 작가의 시각에는 그깟 동양인 대량 학살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전쟁 후에는 소비에트에 의한 철권 독재, 그리고 냉전으로 이어졌다. 철의 장막 안에서는 동구 공산권에서도 자유해방 운동을 탱크와 장갑차의 캐터필러가 압살했으며, 바로 직후인 1968년에는 마르쿠제의 수업을 받은 청년들이 반전과 마리화나와 자유주의와 신 사회주의, 그리고 히피 운동을 세상 만방에 골고루 살포했다. 1980년대 들어서 비틀스와 엘비스가 저물어가는 사이 북구의 아바ABBA 중에 선택을 강요당할 때 속으로는 노랑머리가 좋지만 겉으로는 갈색머리가 더 낫다고 해야 가오가 죽지 않는 시절이 있었고, 바웬사는 자유노조 운동을 시작했으며, 결국 연대기가 끝나기도 전에 각 소비에트 국가에서는 우상과 동상이 길거리에 자빠져 우상의 얼굴에 뭇 사람들의 발자국이 찍히는 참담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세계 최초로 미국 공군에 의한 한 밤중의 폭격이 전세계에 생중계되고, 파괴와 폭음과 살점이 튀는 참상이 아니라 전쟁은 그저 화면 속에서 초록색으로 잠깐 명멸하는 깜박임에 불과한 현상으로 바뀌었다. 당연히 불가리아, 여전히 그저 그런 나라 가운데 하나밖에 되지 않음에도, 유럽연합의 일원이며, 무엇보다 순정한 백인의 의식에서 중동 아시아인들의 파괴와 학살까지 염두에 둘 생각은 없었다. 작가의 1990년대는 무엇보다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특히 아일랜드의 국부가 갑자기 증가하여 아일랜드의 신화시절부터 통틀어 가장 부유한 국가로 자리잡기 시작한 기념비적인 시절이었을 뿐. 그렇다고 세계의 패권이 여전히 유럽에 남았다고 오해할 정도는 아닌 작가는, 내가 여태까지 이렇게 다분히 3세계 인종의 입장에서 말한 것과 달리,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유럽에 국한해 20세기를 10년 단위로 정리했을 뿐이었다고 항변할 수 있으며, 그 항변이 옳다.


  주요 등장인물은 화자 ‘나’와 가우스틴. 문제는 가우스틴이다.

  자신의 이름을 투명 망토처럼 사용하는 가우스틴. 홈리스를 보면 그들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습관이 있는데, 자기도 머지않아 그들과 같은 대열에 합류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다. 자신이 “시간의 부랑자”였으니까. 그는 부자다. 자신이 처한 형이상학적 역경이 물리적 고난으로 번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창창한 액수의 현금을 지니고 있을 정도. 여러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일은 노인정신의학과 의사라는 직책이다. 노인들, 특히 치매나 알츠하이머에 걸려 점차 시간을 상실해가는 노인들의 이야기에서 일종의 대피소shelter를 찾는 듯하다. 그의 클리닉은 스위스 취리히 산골에 있다.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지만 세상의 돈 많은 노인들이 말년을 맞아 자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 속에서 죽음을 맞기 위하여 병실을 채운다.

  가우스틴을 처음 만난 곳은 9월초 바닷가에서 열린 오랜 전통의 문학 학회였다. 모두 글을 쓰고, 독신이며 책을 내지 못한 20~25세의 청년들. 당시 ‘나’의 아버지는 세상 등진 지 오래였으며, 한달 전 어머니는 세번째 미국으로 불법이민을 감행해 떠났다. ‘나’는 가끔 지난 세기말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복고취향이 있어, 가우스틴이 1937산 토마시안 더블 엑스트라 담배를 세 갑 가지고 있는데 사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즉시 구입했다. 가우스틴은 1928년에 제작한 독일제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여 주어 한 모금을 깊게 빨았는데, 정말 독한 맛이었다. 이렇게 친해졌다. 그는 발칸 산맥 기슭 작은 마을의 버려진 빈 집에 살고 있다고 했으며, 전화가 없어서 우편으로만 연락이 가능하다 했다. 20대 시절에.

  그러나 독자들이여, 믿지 마시라. 초장에 나온다. 하지만 ‘나’가 분명하게 선언함에도 그게 진실인지는 책을 거진 다 읽을 때나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눈 여겨 읽게 되지 않으니, 무엇인가 하면, 작가이자 화자 ‘나’는 처음에 자신의 머리 속에서 가우스틴을 만들어냈고, 이후 육신을 갖춰 내 앞에 나타난 존재로, ‘나’와의 공통점은 과거에 대해 집착하는 성향이란다. 하여간, 세월이 흐르고 흘러, 30년 이상이 흘러 애초에 아우구스티누스와 가리발디의 이름을 합해 가우스틴이라 이름지은 그는 취리히 산골에 노인정신의학 병원을 짓고, 1층에 1940년대 실room (지하를 공습 시 대피소로 사용할 수 있어서), 1960년대 실은 2층, 다락방은 80년대와 90년대를 위한 예비실로 건설을 하여 현재부터 순차적으로 과거를 잊기 시작하는 치매와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노인들을 치료하고 있다. 이렇게 본문을 시작한다.

  각자 지난 시절의 십년간. 어느 시절이 가장 좋았을까? ‘나’는 로테에게 묻는다. “로테, 당신이라면 어느 시기를 선택할 거 같아요? 60년대, 70년대, 아니면 80년대?” 로테는 잠시 말이 없다가 최선의 답을 말한다. “저는 모든 시기의 열두 살 아이이고 싶어요.” ‘나’의 대답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도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선택하지 않겠다. 지금 시절이 제일 좋다. 이렇게 계속 늙어가다 그리 늦지 않게 삶을 접는 게 소원이다. 지금, 현재가 가장 행복하니까.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소설가적 상상력은 이제 단계를 넘는다. 유럽 연합은 각 국민들의 최선의 삶을 위하여 10년 단위의 특정 세월 속에서 국민들이 가장 행복한 시기를 살게 만들려고 모색한다. 그러다가 모든 국민들, 유럽연합국도 아니며 영세중립국인 스위스조차 예외없이 국민투표를 거쳐 국민들이 스스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을 선택하게 만드는데, 이건 절대로 투표에 의하여 결정할 수 없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우민정치로서의 민주주의 자체. 그러나 유럽국가들은 했다. 소설이니까 했겠지만 하여간 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가장 원하는 시절로 모든 것이 돌아가면, 유럽은 유토피아가 되는 것일 까?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닐 수도 있고. 어느 경우든지 하여간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상상력은 거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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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2-07 0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찰스 부코스키, <할리우드>
화요일.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쿠아 비바>
목요일. 손택수, 《목련 전차》
금요일. 힐러리 맨틀, <플러드>

coolcat329 2025-02-07 0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렵다는 글이 몇 개 보이는데 폴스타프님은 워낙 배경지식이 풍부하시니 안 어려우셨겠죠?
루마니아의 현대사를 알고 읽어야 좋겠지요?
이 작가 느낌에 노벨문학상까지 받을 수 있을 거 같아요. ㅎㅎ

Falstaff 2025-02-07 07:44   좋아요 2 | URL
배경지식이랄 건 없고요, 직접 겪어본 시절이 있는지라 이해가 좀 쉬웠지않나 싶네요. 다른 작품도 얼른 번역해 나왔으면 좋겠는데 불가리아 언어를 번역해 줄 역자가 있나? 궁금하기도 합니다. ^^

바람돌이 2025-02-07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관심가는 책이었는데 이 글을 읽으니 더 보고싶어지네요.
사실 전 안돌아가고 싶은데 사람들마다 진짜 다를텐데 이 문제를 어덯게 풀어나갓을지 긷됩니다.

Falstaff 2025-02-07 19:12   좋아요 1 | URL
너무 명백한 스포라서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일러드리지는 못하겠네요. ㅎㅎㅎ
저는 재미나게 읽었는데 독자평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라 잠시 멈칫, 하기도 합니다.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2025-02-09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9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0 0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25-02-09 2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이 제일 좋습니다^^

Falstaff 2025-02-10 06:18   좋아요 1 | URL
ㅋㅋㅋ 뜻이 같으니 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