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 추천 글만 쓰면 재미 읎잖여? 그잖여? 그리하여 오늘은 날 잡아 내가 읽은 불후의 명작 가운데 가장 지루했던 책 열 권을 추렸다. 안다, 알아. 낫살 먹어서 이런 짓 하면 안 되는 거. 그래도 지루했다고 솔직히 말하는 것을 통해, 서재 친구들께서 책의 이름값만 믿고 덥석 비싼 돈 주고 사 읽는 우를 범하시지 않게 하는 게 조금 낫겠다 싶다. 혹시 아나. 여태 그놈의 ‘이름값’ 때문에 자기 심정으로 좋지도 않았던 책을 울며 겨자 먹기로 괜찮은 책이었다고 구라치고 사셨던 분이 계실지. 그런 분이 정말 계시면 이 비슷한 글을 한 번 올려주시면 좋겠다. 이런 일이 안으로는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일이다. 흠. 조금 거창하게 말해서.
책의 소개는 가장 지루했던 순서가 아니라 초간 발행 순이다.
1. 성서.
먼저 분명하게 밝혀두자. 이 글로 하여금 기독교를 모욕하거나 흠집이 나기를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신을 믿지 않되, 믿는 자들을 존중한다. 신약이 아니고 구약만 읽었는데, 이 책은 기독교 신자들에게만 효용이 있을 듯. 무지하게 많은 인류가 이 책을 찬양하고, 구텐베르크가 최초로 기계식 인쇄기를 만들어 찍은 책이 성서이듯, 무수한 사람이 이 책에 씌어 있는 바를 행하고 오해하기 위하여 다른 무수한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고, 칼로 베어 죽여 무릎까지 이교도의 피가 넘쳐흐르게 했던 책. 비신자가 읽으면, 한 얘기 또 하고, 또 한 얘기 한 번 더 하고 아주 질식해 죽을 거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끔찍한 책. 종이도 무지하게 얇은 고급 용지를 써서 아무리 넘겨도, 넘겨도 책장은 넘어가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모여 있다는 시편도, 진심을 다해 천주/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속세의 범인들에게는 전혀 소용없다는 걸 사제/목사, 골수 신자/신도들은 알까?
2. 단테 알레기에리, <신곡>
위의 성서를 감안하면 <신곡>이 뒤를 이은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터. 지금도 까마득하다. 어떻게 내가 이 책을 <지옥>, <연옥>을 거쳐서 <천국>까지 다 읽었는지. (왜 천국이 제일 마지막에 나올까? 안 알려줌.) 더구나 이게 시란다, 시. 그래 외국어의 라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시아 변방에 사는 인간이라서 그런지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그렇다고? 아닐 걸?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얼마나 재미나게 읽었는데. 그렇다. 내가 <신곡>을 좋아하기에는 너무 속된 인간이라서 그런 거. 단테가 오르페우스, 아이네이스에 이어 세 번째로 하계에 다녀온 살아 있는 인간, 맞지? 아니다. 오르페우스와 아이네이스는 그냥 하계, 그 중에서도 연옥에 있다. 단테의 노래에 의하면.
3. 프리드리히 휠덜린, <휘페리온>
읽어보시라. 진수를 맛보실 수 있을 터. 고전의 향기. 그 고린내를. 때는 바야흐로 질풍노도 시대. 폭풍이 불어와 사나운 파도가 치는 모습을 저 까마득한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는 젊은이의 노래. 근데 물론 내 경우에 그랬다는 거지만, 책을 덮는 순간, 여태까지 내가 뭘 읽었는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환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읽을 때는 햐, 격렬한 수사에 흠뻑 빠져 허우적거릴지언정 다 읽고 나서는 책갈피에 뭘 발라놓아 이런 책에서 고전의 향기, 명작의 향기가 난다고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안다, 알아. 내가 서양 고전 문학을 제대로 감상할 소양이 부족하다는 건.
4, 노발리스, <푸른 꽃>
노발리스의 까마득한 후배 작가 가운데 피넬로피(율리우스의 정숙한 아내 ‘페넬로페’의 영어식 발음이란다.) 피츠제랄드라는 영국 사람이 있어 얼마나 <푸른 꽃>에 감격을 먹었는지 같은 제목으로 노발리스의 젊은 시절, <푸른 꽃>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소설로 만든 적이 있다. 햐, 근데 푸른 꽃 두 송이가 어찌 그렇게 한결같이, 지겹냐? 이게 18세기 최고의 낭만주의 작품이라고들 한다는데, 아이고, 그 때 유럽에서 태어나지 못해 다행이다. 이건 뭐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부잣집 도령의 어리광이고 응석이며, 함부로 싸 놓은 물찌다. 윽. ‘물찌’가 아래 한글에서 틀린 단어로 표시되네? 그럼 쉬운 현대어로 말해볼까? 함부로 싸 놓은 설사라고?
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10년 전, 내가 벼락같이 독서를 해보기로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당시에 그 나이가 되도록 <파우스트>를 읽어보지 않았다는 걸, 문득, 정말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두 번 생각할 거 없이 즉각 <파우스트>를 사서 읽고, 단박에 후회했다. 아오, 대체 이게 뭐라고. 중학교 시절부터 교사들에게 무수하게 들은 세계 최고의 문학작품. 실제 연극으로 공연하기 드럽게 힘든 천상의 작품, 구노와 보이토의 <파우스트>, <메피스토펠레>를 통해 청각 깊숙하게 간직하고 있던 드라마틱한 아름다움까지 몽땅 앗아가 버리는 기적을 창조했다. 아씨, 어려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기겁을 해서 다신 괴테 안 읽겠다고 한 결심을 깬 죄가 가비얍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까지 읽었으니 나도 여간 단단히 미치지 않은 게야.
6. 로베르트 무질, <특성 없는 남자>
19세기를 건너뛴다고? 19세기 작품도 있는데 Top 10에 까지 들지는 못한다는 거지. 이 책이 출판사 ‘북인더갭’이라는 곳에서 안병률 사장이 직접 번역을 했는데, 안 사장께서 가장 잘 한 업적이 길고 긴 작품을 앞에서 딱 두 권만 번역하고 말았다는 것. 평론가에 따라 이 책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비교하여 조금도 꿇리지 않는다고 했고, 나도 프루스트의 그 책을 완독해봤는데, 그건 좀 무리다. 아, 지금도 이 책 생각해보면 도무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잃어버린....>은 적어도 생각나는 장면이 있기나 하지, 이건 정말이다. 하나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겠다. 세상에 이런 일이.
7. 헤르만 브로흐, <몽유병자들>
나는 여간해 철학책을 읽지 않는다. 백대가리 화이트헤드의 <관념의 모험>에 도전했다가 첫 문단에 질려, 철학이란 같은 말을 어떻게 하면 어렵게, 자신이 아는 게 많은 것처럼 전달할까를 궁리하는 항문, 아니, 학문이라고 정의한 이후로. 근데 <몽유병자들>은 처음부터 철학을 깔고 시작한다. 플라톤, 염병할 스토아학파 기타 등등. 이거 읽는 내내 브로흐, 이 우라질 작자가 처음부터 철학책을 쓰지 왜 소설책을 써서 독자로 하여금 잘 돌아가지도 않는 뇌에 기름칠하게 만드느냐고 갖은 욕을 해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잡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면 완전 맥이 헝클어지는데, 저절로 당시 내 20년 단골횟집의 우럭 물회하고 소주 생각이 나더라. 하여간 이 책에 관해서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이걸 읽기는 읽었다는 거 하나.
8.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라틴 아메리카 작가치고 보르헤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하여간 이것도 짐작인데, 볼라뇨가 자기 작품 속에 등장시키는 무수한 숫자의 전위문학 지망생들 전부 보르헤스를 흉내 내는 젊은이들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나, 할 정도다. 단편이라고 해도 짧은 작품 몇 개만 들어 있는 <픽션들>을 읽고 나는, 영어로 이야기해서, I gave up. 다신 보르헤스는 읽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내가 당시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감을 잡지도 못하겠더라고. 이건 천재 보르헤스가 만든 ‘기호학이라는 학문’이지 소설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근데 보르헤스의 경우에, 하도 이이를 찬양하는 사람들도 많고, 우리말로 번역한 책들이 얇아, 즉 고통을 당할 시간이 짧으니 한 권 정도는 더 읽어볼 수도 있겠다.
9. 이탈로 칼비노, <우주 만화>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 ‘크프우프크’라는 가상의 생명체가 바다 속에서 처음으로 육지로 나와 뉴욕의 마천루 꼭대기를 거쳐 몇 만 광년 넘어 저 먼 먼 은하계 너머까지 진출했다가 다시 극단의 마이크로 세계, DNA로 변신하는, 만화? 만화 같은 소리. 골 깨지는 소리다. 물론 다양한 엽기로 내는 책마다 독자들을 기겁하게 만들기도 하고 즐겁게 해주기도 하고, 무슨 말인지 오리무중의 경지에 빠지게 하는 이탈로 칼비노이지만, 그래도 양심이 있지 이 정도의 혼돈의 바다로 빠뜨려버리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이 책을 읽으려면, 교양과목 수준의 물리, 화학, 생물, 천문, 지질학을 섭렵하고, 연후에 묵언수행 적어도 보름 정도 한 다음, 책 꺼내기 바로 직전에 목욕재개를 빼놓으면 못 읽겠더라. 역시 나는 뜻과 내용은 별개로 하고 활자를 다 읽었다는데 의의를 두었다.
10. 잉에보르크 바흐만, <말리나>
귄터 그라스와 더불어 독일 47그룹의 대표선수. 책에 적어도 내용은 있다. 나는 애 둘 딸린 홀아비를 사랑하는데, 엉뚱하게도 말리나라는 이름의 남자와 동거중이다. 참, 나는 여성이다. 아직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더구나 4백 쪽을 넘어가는 분량이다. 다 읽어도 오리무중. 그래, 뭐 의사불통과 전후 불안에 대해 썼다는 건 짐작이 가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에 대하여 썼다는 것만 안다고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잖나. 아니다, 읽은 건 읽은 거지 또 아닌 건 뭐야. 하여간 아, 몰라, 난 이 책도 읽었다.
한 번 더 강조. ① 나는 종교를 모독하거나 우습게 아는 인간이기는커녕 종교와 종교인을 존중하며, ② 문학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다못해 문학 수업 한 번 받은 바 없는 완벽한 아마추어 독자이며, 이 글은 이런 수준의 인간이 순전한 자기 의견을 피력하면서 자주독립과 인류공영을 빙자한 내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