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2
페터 플람 지음, 이창남 옮김 / 민음사 / 2025년 2월
평점 :
.
페터 플람은 구글 검색해도 별로 알아낼 것이 없다. 1891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유대인. 본명은 에리히 모스 Erich Mosse. 작가보다는 의사가 더 어울리는 직업이다. 1926년에 데뷔작인 <나?>를 발간한 이후 두 편의 작품을 더 쓰면서 전문의 과정을 마친다. 1933년 역시 유대인인 마리안느와 파리로, 34년에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정신과 의사로 정착했다. 책 앞날개를 보면 이이의 환자로 윌리엄 포크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유진 오닐의 늙은 사위)찰리 채플린 등이 있었단다. 그렇다고 나머지 생을 의사로만 산 건 아니고, 열심히 작품생활을 한 것도 아니지만 작가로도 산 것 같은데, 존경하는 우리나라의 장용학 선생은 나이 들어 작품을 쓰지 못하게 되자, 자신은 작가가 아니라고, 글도 쓰지 못하는데 무슨 작가라고 부르느냐고, 창피하다고 했던 데 반하여, 플람은 1959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있었던 펜클럽 회의에도 참석한 모양이다. 뭐 고향 방문단의 의미였겠지.
근데 <나?>는 꽤 괜찮다. 본문이 169페이지에 끝나는 짧은 작품이지만 지금 읽어도 포스트모던하다. 도대체 전간기, 특히 1920년대 북동부 유럽, 폴란드와 독일 유대인 작가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상당히 스타일리시한 작품들이 많다. 폴란드의 유대인 3인방은 누구인지 아시지? 비트키예비치, 슐츠, 곰브로비치. 페터 플람이 이 3인방 수준이라고, 나도 양심이 있으니까 그렇게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이이의 작품도 근처까지는 간다.
작품의 첫 문단.
“내가 아닙니다, 재판장님. 죽은 이가 나의 입으로 말합니다. 여기 서 있는 건 내가 아니고, 들어 올려지는 팔은 나의 팔이 아니고, 하얗게 세어 버린 건 나의 머리카락이 아니며, 내가 저지른 일이,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이 문단을 논리 혹은 상식적으로 해석하기 위하여는, 화자가 유령이거나, 정신착란이거나, 아니면 어제 읽은 필립 로스의 작품 <샤일록 작전>처럼 ‘내 속의 또다른 나’ 혹은 ‘페르소나’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① 유령은 아니다. ② 정신착란?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③ 내 속의 또다른 나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페터 플람이 정신의학 전공의 시절이었으니 ② 아니면 ③이다.
여기서 장면 전환. 1차세계대전 당시의 대표적 격전지인 베르됭. 그곳을 눈 앞에 둔 두오몽의 무수한 시신들. ‘나’는 그곳에 있다. 뼈와 두개골과 재와 ‘나’의 이름, ‘나’의 이름은 아니지만 ‘나’의 이름이기도 한. ‘나’의 운명이 아니지만 ‘나’의 운명이기도 한.
‘나’의 이름은 빌헬름 베투흐Bettuch이다. 이게 웃기지만 진짜 이름. Bettuch.침대보라는 뜻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름 때문에 무지하게 놀림을 받았다. 그래도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이 이름으로 평생을 견뎠다. 조용히 감내해왔다. 그러나 빌헬름 베투흐라는 이름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1918년 11월 11일. 베를린과 뮌헨에서 혁명이 일어나 전쟁이 4년만에 끝났다고 바쉬 대위가 말했다. 이제 더 이상 폭탄도, 죽음도, 진창도, 강제도, 법도, 무기도, 강박도 없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와해되고, 해체되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나’ 빌헬름 베투흐는 앞으로 뛰었다. 적군이었던 무리의 진영 쪽을 향하여. 그들도 더 이상 충을 쏘지 않을 것이라 믿고. 그렇게 도착한 지점, 한 시절 피아의 접선이었던 곳에 설치한 철조망. 그가 걸려있다. 전쟁이 끝나기 단 하루 전에 부상병을 구하기 위하여 전진했다가 적군이 쏜 총알을 맞고 철조망에 선 채로 걸린 시신. 단 하루 사이에 납탄 하나가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아 버렸다. 베투흐였던 ‘나’는 그의 시신에서 회색수첩을 꺼내 내 주머니에 넣는다. 이제는 내 것이다. 그의 여권이. 그의 이름과 그의 운명이. 이것으로 빌헬름 베투흐는 사라지고 한스 슈테른은 계속 삶을 살아간다.
이제 ‘나’는 기차 일등칸에 탄 많이 배운 부유한 남자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는 프랑크푸르트가 아니라 베를린행 기차에 타서, 베를린 역에서 내리고, 벨레뷔 거리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그가 말한다. 당신이 돌아왔네요. 그레테가 뭐라고 할까요? 나중에 알려지지만 이이는 친구 보비다. 그가 말한다. 당신이 보낸 마지막 편지가 매우 기묘했어요. 죽음의 예감이랄까, 그런 소문이 났지요. 그러나 이렇게 다시 나타났으니 다 된 겁니다. 아무런 문제없습니다. 아주 좋아요. 보비가 차를 태워 집 앞에 내려준다.
‘나’는 올려다본다. 창문에 기댄 그녀. 빛나는 황금 갈색, 티치아노의 머리카락을 한 창백한 얼굴. 달콤함, 두려움, 고통, 동경, 사랑이 가득한 모습.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이 여인이, 아마도 그레테라고 불리는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와 내게 입맞춤을 한다. 나는 뜨겁고 둔중하고 몸을 꿰뚫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여인의 품에서 떨어져 나오자마자 검은 털이 덥수룩한 몸체와 하얗게 빛나는 이빨의 개가 ‘나’의 살을 물고 흔든다. ‘나’의 피가 흘러 양말 아래로 흐른다. 여자는 나를 ‘한스’라고 부르면서 바지를 걷고 물린 상처를 동여매준다. 여기가 ‘나’의 집이고, 이 여자가 ‘나’의 아내? 모든 것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 ‘나’는 누구이고 ‘나’의 이름은 무엇일까?
왼쪽 가슴 위, 왼쪽 주머니 속의 가죽지갑. 그 안에 든 여권. 안개가 유령 같은 어스름처럼 둘러싸인 무방비한 시체의 도난당한 여권. 이것을 가진 순간, ‘나’는 침대보라는 친구들의 놀림과, 댄스홀 금발 아가씨 리젤의 키득거림에서 벗어난다. 이제 그런 곳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다른 사람이다. 간단하게 옷만 바꾸어 입었을 뿐인데. 그 시체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행운을 탈취했다. 초록빛 눈을 가진 개한테만 말고. 이 개만 ‘나’를 미워하고 다리에서 살점을 뜯어내 피를 흘리게 하고 ‘나’를 노려보고 거칠게 격앙한다. ‘나’는 그래서 이 개를 귀하게 다뤄야 하며, 쓰다듬어야 한다. 네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음에도 개의 이름 네로를 안다. 어디서 이름을 알았을까? 네로. 이름을 부르자 내게 덤벼들어 두 발을 ‘나’의 어깨에 딛고 물기 많은 혀로 얼굴을 핥으며 낑낑대는 울부짖음 비슷한 소리를 낸다. ‘나’의 행동이 옳았다.
심지어 ‘나’, 이제 한스 슈테른이 된 ‘나’는 집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1층에 있는 병원을 개업한다. ‘나’는 외과의이다. 다친 곳을 소독하고, 꿰매고, 약을 바르고, 뼈를 잇고 깁스를 한다. 어떻게 이런 처치를 할 수 있을까? ‘나’는 한스 슈테른이기 때문이다.
상처는 치료할 수 있어도 ‘나’의 속 상처는 그렇지 못하다. 전쟁 4년. 그동안 휴가를 받아 집에 온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작품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모른다. 그레테는 알 것이다. 하여간 ‘나’ 한스 슈테른이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그레테는 아들을 낳았고, 당연히 ‘나’의 아들이라 주장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어도 점점 혹시 이 아이가 내 아들이 아닐 지 모른다고, 드물게 생각하게 되고, 이것보다 조금 더 잦게 ‘나’가 없는 동안 수시로 휴가를 나온 법무관이자 지금은 베를린 검찰청의 검사로 있는 스벤 보르게스와 그레테가 연인 사이일 수도 있겠다는 기분이 든다. ‘나’ 속의 프랑크푸르트 출신 프롤레타리아 청년 빌헬름 베투흐는 이런 질투가 한 번씩 휘몰아칠 때 참지 못해 황금 갈색의 티치아노 머리카락을 한 아름다운 그레테에게 손찌검을 하고, 곧바로 뉘우치며 사과한다.
당연히 행운은 오래가지 않는다. 누구의 아들도 아닌 ‘나’. 빌헬름 베투흐가 한스 슈테른이 되면서 ‘나’는 한 가지를 잃었다. 배꼽. 앞 세대의 누구와도 연결하지 못한 유일한 개체. 그래서 ‘나’의 프랑크푸르트 가족 중 한 명인 누이동생 에마 베투흐는 ‘나’를 결코 알아보지 못한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의사에게 보이기 위하여 무턱대고 베를린에 와서 돈을 벌어보고자 하는 에마. ‘나’는 에마로 인해, 에마와 더불어 비극으로 달음박질치기 시작하며,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정말로 ‘나’를 낳은 어머니조차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죽는다. 배꼽이 없으니까. 누구와도 이어지지 못했으니까.
당연히 이게 다는 아니다. 짧은 작품이니 궁금하면 직접 읽어 보시는 편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