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한경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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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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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세의 크리스토프 하인이 1997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그의 바이오그래피와 비교하면, 다분히 자전적 성장소설로 봐야 할 터이다. 13세. 폭풍 같은 사춘기를 시작하는 시기. 사실 모든 것이 처음이다. 이전 시기와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체득하고, 감각하기 시작하는 시절. 그건 동서도 없고, 남북도 없으며, 체제의 다름도 관계없다. 세상의 모든 열세 살에게 닥쳐오는 폭풍의 시절.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이 그러하듯, 공산주의 체제에서 교구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아버지를 둔 작중 주인공 다니엘의 세상살이는 처음부터 쉽지 않게 만들어졌다. 종교가 아편인 세상에서 목사의 아들이라니.

  커트 보니것은 인디언이 한 명도 살지 않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인디애나폴리스 대학 졸업식 연설문 원고에서, 1840년대의 카를 마르크스가 말한 “종교는 아편”, 여기서 아편이라 함은 당시에 가난한 인민들이 구할 수 있었던 가장 저렴하고, 가장 효과적인 진통제,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21세기였다면 “종교는 타이레놀”이라 했을 거라나? 졸업식 직전 아파트 계단에서 굴러 그의 소원대로 고향인 트리팔마도어 행성으로 떠나는 바람에 의사 아들이 대독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여간 당시, 그때가 1950년대 중반이었는데, 책에 의하면 아버지의 직업과 외조부모의 신분이 구 동독에서는 공부 잘하는 두 아들이 인문계 고등학교 과정인 김나지움에 입학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학업능력은 요구 수준을 능가하지만 과업을 성취해갈 사회주의적 인성이 제대로 교육되지 않았다는 이유. 그걸로 동독 체제 안에서 교구 목사님의 맏아들과 둘째 아들은 연달아 김나지움 진학을 거부당했다. 그게 나라냐고? 나라지. 세월이 문제였을 뿐. 공부만 잘해 서울법대를 졸업했어도 파르티잔이나 월북 빨갱이를 아빠로 두었다는 거 하나 때문에 사법, 행정, 외무 고시는커녕 공기업도 아니고 사기업에 취직도 못하던 시기가 우리나라에도 몇 십 년이나 있었는 걸 뭐.

  다양하게 지역사회 인사들, 당연히 아이들이 다니는 중학교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도 포함해서, 나름대로 발언 좀 한다는 이들과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잘한 충동과 비아냥을 멈추지 않았던 아버지, 교구 목사님도, 그렇다고 자기 두 아들의 진학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 맏아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먼저 둘째 아들 다니엘을 자기가 운전하는 낡은 차에 태워 라이프치히든가 하여간 가까운 도시의 기차역까지 데려가서, 함께 기차를 타고 서베를린에 있는 친척 방문이라 구라를 풀어 검문 경찰을 속여 서베를린에 도착한 다음, 미리 서신으로 연락을 해 둔 서베를린의 김나지움에 입학시켜버린다. 이미 서베를린에는 동독 출신 학생들을 위한 클래스가 있을 만큼 동쪽 출신 학생들이 몰려와 있는 상태였다. 다음날 아이와 함께 시내에 나가서 초콜릿으로 겉을 감싼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아이가 배웅하는 기차역에서 올 때와 반대 방향으로 집에 도착하면 된다. 책 속에서는 엄마도 함께 따라 나섰다.

  작품은 이제 한 시간만 있으면 주인공 다니엘이 아빠 차를 타야 하는 순간에, 다니엘이 막달레나 고모에게 작별인사 하러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제일 마지막 장면을 제일 앞에 놓고 시작하는 거다. 게다가 다니엘의 외할아버지는 작년까지만 해도 홀츠베델에 있는 농장의 감독관으로 있었지만, 과거에 귀족 집안에 속한 농장의 충실한 마름이었다는 출신성분과 계속되는 당국자의 공산당 입당 권유를 끝까지 물리쳐 올해 감독관 자리에서 해고당하고 이젠 다니엘 집으로 와 함께 살고 있으니, 하여간 여러가지로 형 다비트와 다니엘을 도와주지 않은 건 맞다.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도 다니엘과 같은 또는 아주 조금만 다른 이유로 서베를린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라이프치히와 베를린에서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이 작품을 쓰고 몇 년 지나면 잘 쓴 체제비판 소설 <호른의 죽음>을 발표한다. 그렇다고 이이가 1990년 10월 3일, 독일재통일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이런 청소년기의 학습 좌절 경험과 서베를린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인은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크리스타 볼프와 더불어 독일의 재통일에 반대한 몇 안 되는 지식인 그룹 가운데 한 명이었다. “솔직히”라는 부사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써야 하는 상황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하인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인종이다. 즉, 1940년대부터 근 반세기 동안 유효했던 “공산주의의 반대말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마오쩌둥과 김일성이 이런 빗나간 공산주의 체제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들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1인을 제외한 모든 인민이 프롤레타리아인데, 딱 한 명이 나머지 모든 프롤레타리아에 대하여 독재를 펼치는 체제를 의미했을 뿐이다. 한 번 더 솔직히, 스탈린과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 뭐가 다른데? 이디 아민이 사람을 죽여 그 고기를 날 것으로 먹은 거 말고.

  호른과 볼프는 경제체제로의 공산주의와 정치체제로의 민주주의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1990년의 독일 재통일이 이런 가능성 자체를 없애는 행위라고 봤던 것이겠지. 기형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한 동독 안에서 호른과 볼프는 공산주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독 체제를 비판하는 데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체제를 지양하는 방편으로. 사는 게 다 그렇다니까.


  작품 속에서는 적극적인 체제 비판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면이 겨우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다니엘에게 숱한 사람들이 “비밀”을 요구한다는 것. 동베를린도 아니고,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도 아닌 시골 구석의 작은 마을에서조차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관해 속닥이는 것도 “비밀”을 약속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할 지. 체제가 전체주의적이었다는 뜻이다. 경찰국가였다는 말과도 같고. 내 부모가 조금이라도 정치적 발언이다 싶으면 새끼들 알아듣지 못하게 유창한 일본어로 대화를 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행여 그냥 우리말로 했다가 얼핏 보니 옆에 나 및/또는 형이 있는 걸 알아차리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내 부모. 밖에서 절대 이런 말 하지도 말고, 어디서 들었다는 말도 말아라. 큰일난다.

  아주 사소한 대화도, 행위도 마찬가지. 비록 정말로 아버지의 누이는 아니지만 고모라고 부르는 막달레나 고모의 집에서 1차세계대전 이전에 만든 소년용 놀이인 “바다에서의 전쟁”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도 비밀, 형 다비트가 2년 전에 서베를린의 김나지움에 가서 지금 열공중이라는 것도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만 비밀. 공화국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가끔 교구 목사인 아버지를 찾아와 깊이 악수하는 걸 본 것도 당연히 비밀, 러시아호lake에서 필레의 벗은 허벅지 사이 음모에서 물방울이 똑똑 듣는 모습을 훔쳐본 것도 당연히 비밀, 이건 정말로 비밀 중에서도 특급비밀. 심지어 순서대로 다비트, 다니엘, 도얼레, 미하엘, 마르쿠스를 두었음에도 엄마 배 속에 또 아들 하나가 들어 있어 몇 달째 엄마가 아빠한테 말 한 마디 안 하는 것도 비밀. 당연히 주인공 소년 다니엘은 이 비밀들을 다 지켰다가는 입에서 쉰내 날까 싶어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떠들고 다니지만, 이게 다니엘을 탓할 일인가? 애초에 언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세상에 비밀이라는 것 없었으니, 다니엘, 무죄다.


  그래서 이 책을 <호른의 죽음> 비슷하게 1950년대의 동독에 대한 체제 비판적인 작품으로 보지 않는 편이 좋다. 열세 살 먹은 소년 다니엘이 사춘기를 맞아 정서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모습을 그린 성장소설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열세 살이라는 애매한 나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교실에서는 훌렁 벗은 여성의 사진이 돌아다니고 정말로 성 경험이 있는 친구는 아직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알 건 다 알고 있는 꼬맹이들. 불과 1, 2년만 더 지나면 알 거 다 아는 걸 지나 해볼 거 다 해본 본격적인 반항기 시절을 맞을 예비 까칠이들. 정말 동성애를 하는 남자들도 있다는 얘기를 직접 듣기 시작하고, 두어살 더 많은 아이들이 호숫가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라이브로 감상하면서 처음으로 사정을 경험하는 다니엘. 이때 얼마나 힘차게 사정을 했는지 일부가 필레의 자전거 안장까지 튀어 몇 달 지나 필레가 임신을 했단 얘길 듣고 혹시 자기 정액을 깔고 앉아 임신한 거 아닌가? 그럼 필레의 배 속에 내 아이가 들었을 수도 있겠네? 노심초사하기까지 하는 불쌍한 다니엘. 뭐 그러면서 크는 거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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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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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출간한 때가 2008년. 필립 로스가 75세. 어쩜 이렇게 한결 같은 수 있을까? 이제 손바닥을 붓 삼아 바람벽에 똥칠을 해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건만. 전립선암 수술을 해 비아그라를 몇 큰 술 퍼먹어도 신체 반응이 전혀 없을 시기. 그러면 그럴수록 반동작용으로 뇌 속에서 더욱 찬란한 성적 판타지를 펼치는, 인류 가운데 몇 안 되는 작가. 대개의 경우에 수컷이 생식능력하고 멀어지면 저절로 그쪽 방면에 관심도 없어지는 법이거늘, 이 양반은 어째 그런댜? 하여간 이름난 거물이 좋긴 좋다. 아무리 주접을 떨어도 이이더러 더러운 변태, 중증 성도착 영감탱이라 멸시하는 인간은 별로 보지 못했다.

  지금 욕하는 거냐고? 아니다. 변태가 됐건, 더럽게 늙었건 간에 소설 하나는 재미있게 참 잘 쓴다. 상당한 좌파에 진보, 그리고 유대의식이 핏줄 속에 진하게 남은 자유주의자의 작품이 이제 새삼스레 림보에까지 영역을 넓히는 것이 문제긴 한데, 그러면 안 된다면 법 조항 또한 없으니.

  나는 이이의 작품을 읽으면, 처음엔 그것 때문에 거 참 시원하게 말 잘한다면서 팬이 되었지만, 이젠 어째 쓰는 책, 읽는 작품마다 균일하게 과장된 묘사와 과격한 주장, 쓸데없는 엄살, 별로 필요할 거 같지 않은데 굳이 가져다 쓰는 노골적 성행위 또는 유사성행위가 점점 싫어졌다. 아닌 척하면서 은근한 여성 비하/차별까지. 자기 주장을 과하게 표현하는 습관이 있는 대표적 작가. 로스의 팬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나한테 필립 로스를 한 다스 가져다주어도 커트 보니것 한 명하고 바꾸지 않겠다.


  주인공이자 화자 ‘나’의 이름은 마커스 매스너. 마커스? ‘마르쿠스’의 영어식 발음이다. 3대째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매스너 코셔 정육점 집 외아들. 삼촌 두 명도 푸줏간을 하고 있으니 적어도 푸주한, 백정 집안의 명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건 실례지만, 시대적 배경이 1950년이니 그 시절 시각에 입각하면 그랬다는 말이다. 코셔 정육점이란 건, 짐승 즉 소, 돼지, 양, 닭, 염소, 거위, 개… 아, 개는 아닌가? 각주가 없어 잘 모르겠지만 개는 아닌 거 같다. 이런 것들을 도살할 때, 딱 한 번의 칼질로 단번에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렇게 도살했다는 걸 랍비로부터 공인을 받은 정결한 고기만 파는 곳을 말한다. 고객의 대다수는 유대인이다. 아무래도 도살 공정이 좀 더 길고, 랍비를 불러오려면 결코 저렴하지 않은 시급을 랍비에게 주어야 하니까. 그래도 큰 전쟁 두 번을 치루면서 매스너 코셔 정육점은 괜찮은 실적을 내며 뉴어크 시내에서 안정적인 상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사정이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자 세상의 시스템도 갑자기 바뀌어 뉴어크 역시 자본주의 적 팽창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대형 슈퍼마켓이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들어와 코셔 정육이 아닌 일반 도살된 소, 돼지, 양, 닭, 염소, 거위, 개… 아, 개는 아닌가? 이런 고기들을 저렴하게 팔기 시작하자마자, 창세기 시절부터 한 푼의 절약에 관한 한 세상 어느 민족과 비교해 “조금도” 뒤져본 적 없는 유대인 후손들이, 불경기를 과대광고하면서 정결하지 않은 비-코셔 고기를 사먹기 시작했고(에잇, 내가 차라리 죽은 다음에 지옥불에 빠지고 말지!), 뉴어크 시내가 조금씩 슬림화 되면서 뉴어크에 살던 기존에 자리잡은 유대인들이 새로운 주거지역으로 이주하는 동시에 새롭게 유입되어야 마땅한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 안전해지니까 굳이 이민 올 이유가 없어서, 뉴어크 유대인들의 절대 인구 또한 팍 줄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그런데 1950년 9월. 저 한반도, 코리안 페닌술라에서는 북한군이 밀려와 남한의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 지역까지 밀어 부치던 상황. 미군이 급하게 달려가 막아보려 했으나 예상 외로 잘 무장되어 있고, 훌륭하게 훈련되어 있는 북한군을 도저히 당하지 못해 판판이 깨지다가 일흔이 넘은 노장 맥아더가 이끄는 함대가 인천상륙작전을 벌인 시기였다. 이것이 이 정육점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면, 이집 아들이 주인공이자 화자 ‘나’이자 현재 모르핀을 강력단위로 맞고 마약으로 인한 환각이 뇌에 작용하여 평소에는 전혀 떠오르지도 않았던 세밀한 기억, 숱하게 나누었던 대화까지 몽땅 기억하고 있는데, 이 ‘나’, 마커스, 애칭 마키 매스너가, 이 코셔 정육점의 외동아들로, 만일 대학에 들어가 ROTC 교육을 네 학기 이상 받지 못하면, 장교보다 훨씬 죽을 확률이 높은 사병 신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박박 기다가 아주 높은 기대치로 중동부 전선에서 귀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억하시라. 당시 미국 청년의 병역은 징병제였다. 2년 정도? 그건 잘 모르겠다.

  이렇게 작품의 모두에 한반도의 내전이 제법 상세하게 나오는 것이 어째 좀 이상했다.

  하지만 코셔 정육점의 매스너 부부의 외아들 마커스 매스너는 온 뉴어크 시내가 알아주는 고교 야구선수, 책벌레, 착한 아들, 집안의 기둥, 기둥 즉 대주大柱는 당연히 매스너 씨가 맡아야 하니, 그냥 대들보 동량棟梁 정도라고 하자. 고등학교 3년 동안 여학생들과 키스, 입술만 살짝, 눈깜짝할 새만 가져다 댔다가 떼는 그런 키스만 두 번 해봤고, 의미있는 부위의 피부도 한 번 만져보지 못한 진국 또는 어리버리 공부벌레였다. 키도 크고 잘생기기까지 했는데도. 키 크고 잘 생기면 꽃도 나비나 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법이거늘. 이게 다 자애한 아버님의 지도편달 덕분이었다.


  착하고 공부 잘하는 마키는 자신이 다닐 대학으로 뉴어크 시내에 있는 아주 작은 대학 로버트 트리트로 정했다. 집에서 다닐 수 있어서 비싼 기숙사비나 하숙비가 들지 않고, 틈틈이 정육점 일을 해 아르바이트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으며, 아버지 입장에서도 꾸준히 아들의 성장을 돌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랴. 이 집구석에서, 사방팔방 온 친척을 다 망라해서 마커스가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하는 자손이었다. 이건 진로에 대해 올바른 조언을 해 줄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커스는 자신이 품고 있는 진로,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 연설, 장교 입대, (직접적 전투를 하지 않는)수송부를 거쳐 작전실에서 한국 전쟁 참전, 제대 후 다시 로스쿨 입학, 잘 나가는 변호사의 길을,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하는 대학에 입학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그런 대학의, 스펙도 별로 없는 교수들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진지하고 힘을 다하여 올바르고 훌륭한 배움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마커스는 1년만 다니고 오하이오 주에 있는 조용한 학교 와인스버그 대학으로 전학한다.

  왜 그런 결정을 했느냐 하면, 평소 자애롭기 그지없던 아버지가, 마커스의 대학 입학이 결정되자마자 아들과의 사이에 파괴적인 갈등을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갈등의 기본은 아버지, 특별히 유대인 아버지다운 아들 인생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한다. 자기 자신이 살아온 것을 보더라도 이 험한 세상에 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아들. 세상 도처에 널리고 널려 있는 위험으로부터 아들, 그것도 외동아들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겠느냐는 걱정. 이걸 동양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한 “기 나라 사람의 걱정” 기우杞憂라고 했는데, 도가 지나쳤다. 자신이 항상 시퍼렇게 날이 선 크고 작은 칼을 다루어야 하고, 형제들이 아들을 몽땅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과 벌지 전투에서 잃는 바람에 이 쓸데없는 걱정이 더욱 심화되었을 지도 몰랐다. 하여간 로스의 글만 본다면 누군가 시급히 아버지를 뉴어크 병원 신경정신과에 데려가 입원치료를 시켜야 할 수준이었건만, 1950년대 초에 칼잡이한테 누가 쉽게 권할 수 있었으리오. 아버지는 앞뒤 문짝에 새로운 열쇠를 두 개 달아 이제 정한 시간이 넘어 마커스가 집에 돌아오려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현관문을 두드려 부모를 깨워야 했으니, 다 큰 아들이 이게 뭐야. 유대인 답게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고, 아직도 제대로 된 키스도 한 번 못해봤고, 오직 하는 일이란, 도서관이 없는 삼류 대학을 다니는 죄로 시립 도서관에서 문을 닫을 때까지 숙제도 하고, 책도 읽느라 집에 좀 늦게 들어올 뿐인데 말이지. 이게 아버지여, 웬수여?


  그래서 마커스 매스너는 오하이오주에 있는 와인스버그 대학으로 전학을 선택했다. 뉴어크에서 8백km 떨어진 곳. 공항도 없고, 기차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곳. 아버지가 와볼 생각을 애초에 하지 못할 곳을 고른 것이다. 와인스버그 오하이오. 어디서 들은 책 제목이지? 지금 도서 신청하고 기다리는 셔우드 앤더슨의 “잘 쓴” 책 제목이다.

  마커스가 굳이 와인스버그를 선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천만에. 하필 뉴어크에 아버지 옆 상점의 여주인 스펙터 부인의 조카가 이 와인스버그에 다녔는데, 유대인이면서 유대인 클럽 회장은 당연하지만 클럽연합회 회장까지 맡고 있는 서니 코틀러였다. 무지 잘 생겼으며 축구단 주장이기도 하니 말 다했지 뭐. 서니 코틀러가 학생과에 힘을 써, 마커스는 우연히 그렇게 되었는 줄 알았는데, 마커스가 배정받은 기숙사 방에 들어가보니까, 이층 침대 두 개, 합해서 넷 가운데 세 침상의 주인이 전부 영문과 3학년에 다니며, 연극반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대인들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학교에서도 가장 문제아로 손꼽히는 플러셔는 나중에 알게 되지만 심지어 당시엔 용인되지 않았던 게이이기도 했다. 유대인 게이? 아오.

  이렇게 아버지로부터 당해야 하는 곤란함은, 오하이오 와인스버그에 도착한 첫날 기숙사 룸메이트 대마왕 플러셔로부터 당할 피곤한 난관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게 여겨질 정도가 되어버리고 만 것. 근데 전에 다니던 로버트 트리트 학교보다 덩치가 수십 배 큰 학교이니 로버트 트리트에 다닐 때보다 수십 배 더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가 생기지 않겠어? 딱 두개만 골라보자면, 기대하시라, 금발의 아름다운 편입생 올리비아와의 첫 몸 섞음, 그리고 졸업 전까지 40회 참석해야 하는 채플. 마커스는 유대인이지만 종교적으로 아무 관심이 없는 무신론자. 이 채플을 위하여 일주일에 90분을 소비해야 하는 일이 정말 싫어, 나중에 친구 하나를 만들어 그 아이에게 한 번에 1달러 50센트를 주기로 하고 마커스 대신 채플을 듣는 걸로 하는데, 이 두가지가 그리 쉽지 않았던 모양이지? 마커스의 인생까지 결딴 낸 걸 보니까?

  내가 로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지, 재미있는 작가다. 이 독후감을 읽는 분은 나 때문에 로스에 저항감을 가질 필요는 1도 없다. 모쪼록 즐기시기 바란다. 그랬으면 좋겠다.



북적북적 앱엔 셋 반이군.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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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5-10-15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전 1년 전에 냥냥하게 별 다섯 줬네요. 죽은 할배 리스펙트

Falstaff 2025-10-15 16:00   좋아요 1 | URL
이거 올릴 때부터 열반인 님 댓글 기대했어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5-10-15 19:54   좋아요 1 | URL
같은 책 읽는 거 겹칠 때마다 황송하고 영광입니다요!

Falstaff 2025-10-15 20:02   좋아요 1 | URL
ㅋㅋㅋ 열반 썜도 참... 별 말씀을!
 
알 수 없는 발신자 - 프루스트 미출간 단편선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윤진 옮김, 뤼크 프레스 해제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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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달엔 프루스트 소설집 《질투의 끝》을 읽었다. 도서관 홈페이지의 관심도서에 몇 년 동안 쌓아두기 만했다가 이웃분의 말씀 끝에 나와, 아이쿠 싶어서 얼른, 재미있게 읽었다. 이번엔 혹시 프루스트의 책 가운데 내가 모르는 것이 또 있을까 싶어 서가를 뒤지다가 2022년에 문학동네에서 낸 《알 수 없는 발신자》를 찾았다. 부제가 “프루스트 미출간 단편선”이다.

  아시는 분은 아신다. 내가 이 “미출간 작품”을 별로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걸. 프루스트가 죽은 지 벌써 백 년이 넘었다. 이 책 나올 때가 딱 백 년이 되는 해였던 걸 보면 문학동네가 딱 시기를 맞춰 프루스트 마케팅을 한 걸로 보이며, 같은 해 2월에도 현암사에서 같은 레퍼토리(실린 작품들)로 “미출간 작품집” 《밤이 오기 전에》를 내기도 했다. 이 번역서의 원본 또한 2019년에 나왔는데, 여러 번 주장했던 내 생각은, 만일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품질이 좋았다면, 좋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면, 죽고나서 97년이 지나서야 책으로 찍었을까? 하는 거.


  이 책 속에는 겨우 두 페이지 분량밖에 되지 않는 미완성 작품도 들어 있다. 독자는 이걸 과연 작품으로 봐야 할까? 혹시 작품 쓰기 전에 메모 비슷하게, 아니면 좀 혹독하게 말해서 끄적인 낙서 정도로 치부해도, 기껏 책을 낸 출판사나 역자는 기분 나쁠지 몰라도, 안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그것도 이미 너무 올드한(확실히 외래어 남용이란 지탄을 받아 마땅한 표현이다) 것들을. 뭐가 그리 올드하냐고? 예컨대 이런 문장들?

  “저는 당신의 몸을 원합니다. 그럴 수 없음에 절망과 광란에 빠져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에 종이를 구기고 나무껍질에 이름을 새기고 바람에 대고 혹은 바다를 향해 이름을 부르듯이, 그렇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제 입으로 당신의 입꼬리가 올라가게 만들 수 있다면 내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똑같이 저를 달아오르게 만듭니다. 지금 내가 바로 그 욕망으로 제정신이 아님을 이 편지를 받은 부인께선 알 수 있을 겁니다.” (p.56)

  이 편지를 쓴 사람이 책의 표제작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발신자” 크리스티안이다. 발신자가 그리 몸을 원하는 문제의 부인은 프랑수아즈인데, 이 편지를 죽어가는 그가 마지막 소원을 담아 쓴 편지인 걸 알고, 소원을 들어주려 자기 고해 신부까지 불러 사정을 설명해봤건만 신부는 딱 잘라 안 된다고 하고, 크리스티안까지 마지막 숨이 넘어간다는 스토리. 뤼크 프레스라는 이름의 프루스트 연구자는 이 작품이 189X년에 쓴 것으로 추정하지만 발신자가 누군인지 모르는 이 편지만 읽어보면, 19세기라도 세기말이 아니라 세기 초중반에 썼다고 해도 그리 참신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니 내가 비록 문외한이더라도 올드하다고 입을 놀릴 수 있었겠지.


  물론 프루스트다운 길고 유려한 문장이야 말 해 뭐하겠고, 이런 긴 글을 유려하게 번역하는 윤진의 우리말 실력이야 내가 진작 알고 있는 터, 여기에 관해서는 도무지 까탈을 잡을 수 없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거다. 그리하여 아마추어가 함부로 평을 하자면, 해제를 쓴 뤼크 프레스처럼 프루스트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닌 일반 독자가, 프루스트한테 환장을 하지 않았으면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는 것.

  이 책에서 중요한 건 프루스트의 미발표작, 메모 또는 끄적인 낙서를 읽는 것보다, 오히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뤼크 프레스의 해제를 읽는 것일 수 있다. 이 책이 “옮긴이의 말”까지 모두 합쳐 209쪽인데, 프레스 교수가 쓴 서문이 34쪽에서 끝난다. 그러고 마는 것도 아니라서, 각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를 시작하기 전에 각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에 관한 프레스의 해설이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한다.

  또 있다. 각 페이지 아랫동네에 자잘한 글씨로 쓰인 각주. 멀미 날만큼, 하늘의 별만큼 달려 있어서 표제작 <알 수 없는 발신자>에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150개의 각주를 달았다. 처음엔 각주 표시가 있으면 습관적으로 본문 아래 각주를 한 번씩 찾다 보다가 딱 두 페이지 넘긴 다음부터는 각주 표시가 아무리 다닥다닥 붙어도 문학동네, 아니, 각주동네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본문만 읽고 지나가게 된다. 아니라고? 당신은 정말로 단편 분량도 되지 않는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를 읽을 때마다 각주동네 구경까지 꼬박꼬박 하셨다고? 그럼 당신은 프루스트한테 환장한 거 맞다. 그것도 1급 환장.


  그래도 내 마음에 딱 드는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도 있다. <베토벤 8번 교향곡 이후>.

  나는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베토벤 교향곡 가운데 4, 6, 8번이 홀수 번호보다 더 좋아졌다. 이 가운데서도 8번이 참 좋다. 뭐라? 8번이 <영웅>, <운명>, 위대한 7번, 그리고 <합창>보다 더 좋다고? 그렇다. 그거야 내 마음이지 당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잖여? 그잖여?

  8번 중에서도 3악장 미뉴에트. 아오, 나이 좀 먹으니까 엄숙무비한 것보다 발랄하고 상큼하고, 앙큼한 게 얼마나 좋아? 나는 이제 대규모 편성 교향곡, 브루크너,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말러 같은 건 못 듣겠더라고, 변비 생길 거 같아서. 8번 3악장, 미뉴에트 한 번 들어 보실 텨?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브레멘 독일 실내 관현악단의 연주이다.


 

  이걸 프루스트는 이렇게 듣고(감상하고) 얘기한다.

  “우리 마음 속에서 애정으로 변하는 그 미소를 우리는 무한히 돌려받는다. 그 나라에서 우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속도의 현기증을 느끼고, 기운이 소진될 때까지 싸워도 피로하지 않으며, 아무 위험 없이 미끄러지고 솟아오르고 날아오른다. 그곳에서는 매 순간 힘이 의지에 부응하고 관능이 욕망에 부응한다. 매 순간 모든 사물이 우리의 공상으로 달려와 가득 채워도 싫증나지 않는다.” (p.119)

  딱 하나, 위 인용에서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신 “나” 단수로 썼으면 좋겠다. 내가 애정으로 변하는 미소를 돌려받는지 마르셀 프루스트가 아니라 귀신이라도 그걸 어떻게 알아? 특히 음악, 미술, 시, 소설 같은 예술에 있어서야 사람마다 다 다른 거니까 함부로 “우리”라는 말 쓰면 안 될 걸? 비록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우리”를 편애한다는 건 알아도 말이지.

  하여간, <베토벤 8번 교향곡 이후>라는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가 내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나는 이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 모음집 《알 수 없는 발신인》을 당신한테 읽어보라고 권할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는다. 나는 프루스트에 결코 환장한 인간이 아니거든. 오히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활자까지 다 읽기는 했어도, 하마터면 질식사할 뻔했거든. 위대하다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재미있고, 의미심장하고, 깊게 공감하며 읽은 분이라면 이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 모음집도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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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과 다른 사람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4
세스 노터봄 지음, 지명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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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터봄은 7, 8년 전에 <의식>을 읽고는, 이 책 <필립과 다른 사람들 : 이하 “필립”이라 표기>도 읽은 줄 알았다. 그래서 이 책을 볼 때마다, 읽은 책, 이렇게 판단하고 그냥 넘어갔다. 안 읽은 줄 알았다면 벌써 해치웠을 터인데.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개가실 서가에서 책을 뽑아 훌훌 넘기다 보니 생판 처음 만나는 스토리다. 아이쿠, 이 책 안 읽었구나. 얼른 빌려서 다음날 하루만에 다 읽었다. 2백쪽 정도 분량의 짧은 작품이다.

  미리 말해두거니와, 읽는 재미를 기대하면 읽기 힘들 걸?


  <필립>을 읽기 전에 세스 노터봄의 바이오를 조금 알아두는 편이 좋겠다. 1933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난 노터봄. 호적상 이름은 코르넬리스 요한네스 야고부스 마리아 노터봄. 이런 건 안 중요하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 이제부터 진짜. 노터봄이 점점 자라 열 살이 되던 1943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일 당시, 철없는 아빠께서 노터봄을 돌본 젊은 유모와 눈이 맞아 새삼스레,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찾았는 줄 알고 헤이그 시내에 방을 얻어 집을 나가버린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십계명을 어긴 아빠를 심판하고자 바로 다음 해에 영국 공군의 폭격기를 헤이그 하늘 위로 보내 무자비한 폭격을 퍼붓게 하고, 이 와중에 노터봄의 아빠는 시신도 확인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된다.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았던 엄마도 1948년에 가톨릭 신자와 재혼해 버렸다. 의붓아버지는 뭐 서로 보기 어색해서 그랬겠지만 노터봄을 가톨릭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집어넣었고, 입학할 당시엔 그러지 않았지만 곧 밀어닥친 사춘기를 맞아 제대로 된 전투적 일탈 청소년의 전범이 된다. 사춘기가 되면 몸과 일탈 충동만 거세지는 게 아니라 자아도 그만큼 커지는데, 노터봄은 이때부터, 남자 작가들 거의 다 대개 이때 부터이기는 하지만, 독서, 작문, 시작 등을 모색했다고.

  만날 기숙학교에서 탈출하고 그랬으니 당연히 퇴학을 당했겠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학을 할 수밖에 없었던 노터봄은 어찌어찌 위트레흐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병역 면제를 받고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에서 잠시 일을 하다가, 때려치운 후 2년 동안 유럽 각지를 아마도 당시 말로 “무전여행” 요새 말로 배낭여행을 한 후, 이때까지의 기억과 경험을 모아 처음으로 책을 내니 그게 바로 <필립>이다. 그리하여 <필립>의 시간적 배경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 필립 엠마누엘 반데를레이의 (노터봄의 아빠가 유모하고 손잡고 집을 나간) ①열 살 시절 잠깐, ②열여섯 부터 열여덟 살까지 잠깐, ③열여덟 살부터 조금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작품의 앞부분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인물은 사회 부적응적이면서 상당한 돈과 지적 수준을 갖고 있는 삼촌 안토닌 알렉산더. 네덜란드 중부의 소도시 호이에서 “몰골스럽고 섬뜩할 만큼 덩치가 큼지막한 집”에서 혼자 사는 독신남이다. 필립이 안토닌 삼촌을 처음 만났을 때가 열 살. 당시 삼촌은 칠순 정도라고 기억한다. 삼촌이 필립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 삼촌 집에 오면서 선물도 없이 맨손으로 왔느냐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필립은 얼른 집밖으로 나가 옆집 정원에서 철쭉꽃을 꺾어와 선물한다. 그제야 만족한 삼존은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다. 필립은 그것이 자신의 십년 생애 난생처음이자 유일무이한 진짜 파티로 기억하게 된다.

  삼촌과 필립은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로스드레흐트로 가, 다시 걸어 플라스 호수로 갔다. 시간이 흘러 달빛이 호수 표면의 윤슬에 부서질 때 삼촌을 보니, 낮게 울고 있었다. 필립이 왜 혼자 사느냐고 물었다. 삼촌은 “나는 나 스스로 결혼한 셈”이라며 “원래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오비디우스의 변신 개념으로) 나로 변신해버린 추억하고” 결혼한 셈이란다. 중요한 메타포. 후에 필립은 “나로 변신한 추억”으로의 한 여성, 중국인 얼굴을 한 여성을 찾기 위하여 전 유럽을 떠돌게 된다.

  다시 버스를 두 번 타고 집에 돌아온 삼촌은 야심한 밤에 쳄발로를 연주해준다. 바흐의 파르티타. 아리아, 사라방드, 미뉴에트, (아마도)지크, 구랑트, 알라망드 등등. 필립이 태어났을 때, 바흐의 아들 가운데 엠마누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필립의 가운데 이름에 ‘엠마누엘’을 넣으라고 강권한 사람이 안토닌 알렉산더 삼촌이었다고. 연주를 끝내고 가상의 J.S. 바흐와 인사를 나누게 하고서야 삼촌은 필립을 재운다. 방에 들어온 필립은 구석에서 축음기를 발견하고, 축음기 통에 들어 있는 바그너의 <로엔그린> 판을 올려 구동하니, 옛 시절 축음기라 음량 조절 장치가 없어서 그랬는지, 테너가 노래하는 ‘성배 이야기’가 크게 쏟아져 나왔다. 늙은 삼촌이 들이닥쳐 화를 내는 바람에 필립이 서둘러 금속 바늘을 제거하는 동안 바늘로 음반을 거칠게 긁어 깊게 홈이 파이고 말았다.


  6년 후의 두번째. 열여섯 살 필립은 삼촌을 만나기 전에 옆집 마당에서 철쭉꽃 한 다발을 꺾어와 선물했다. 흡족한 삼촌은 똑 같은 과정으로 호수에서 파티를 하고, 집에 돌아와 쳄발로 연주를 해준다. 바흐 파르티타. 연주가 끝나고 이번에는 바흐를 비롯해서 안토니오 비발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제미니아니, 본포르티, 코렐리 등등을 소개하고 인사하라고 권한다. 물론 실물이 없는 허상. 6년 전에 묵었던 방에서 다시 찾아낸 축음기. 필립은 또 <로엔그린>을 올리고, 또다시 서둘러 들어온 삼촌은 이번에는 화를 내는 대신에 이야기를 시작한다. <로엔그린>을 못 틀게 하는 이유. 그런 줄 알았지만 삼촌은 책꽂이에 있는 사진틀 속 인도네시아 혼혈 소년 폴 스웨일로 이야기만 하고 만다.

  삼촌이 끝내 해주지 않은 이야기. 왜 <로엔그린>을 틀지 못하게 하는지, 그 속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일일 것이다. 그러려면 바그너의 <로엔그린> 스토리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 참. 너무 긴 이야기라서 소개하려 마음먹었다가 머리통만 벅벅 긁고 있는 중이다. 우짤까?


  북쪽 유럽에 있는 그랄이라는 동네는 로엔그린의 아빠이자 성스러운 바보인 파르지팔이 이끄는 기사들이 성배를 수호하는 곳인데, 로엔그린이 나이가 들어 부랄이 굵어지자 파르지팔이 막둥이 장가들라고 백조가 모는 배를 태워 지금은 네덜란드 땅인 브라반트로 보낸다. 여기에 엘자라는 죽은 영주의 딸이 곤경에 처해 있었다. 로엔그린은 선한 엘자의 대변인으로 엘자의 악당 삼촌이며 왕위를 노리는 프리드리히 폰 델라문트와 맞짱 대결을 펼쳐 이기고, 엘자의 남편이자 공국의 후계자 자리에 오를 예정이다. 로엔그린은 엘자에게 결혼 조건으로 자기가 누군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 말라고 하고, 엘자도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뭐 신들의 장난이지. 지켜지지 못할 약속을 강제하는 것이 신이 제일 자주 하는 짓궂은 장난 아냐?

  삼촌의 아내, 그러니까 엘자의 숙모이며 마녀이기도 한 오르트루트가 결혼 전날 엘자를 심하게 꼬드겨 이름도 모르는 남자를 어떻게 남편이라고 하느냐고, 이름을 물어보라고 딴지를 건다. 순진한 엘자는 숙모한테 꿈벅 넘어가 오후에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밤 신방에 들어, 고쟁이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로엔그린의 이름을 물어보기에 여념이 없다. 흑흑, 말씀을 안 해주시는군요. 소첩을 사랑하지 않으시니까 그런 겁니다.

  로엔그린도 눈물을 머금고 만조백관을 그 새벽시간에 출두시켜 모든 이가 보는 광장에서 엘자에게 자기 신분, 이름, 고향을 말한 뒤, 일찍이 자기 이름을 물어보면 모든 계약이 무효임을 상기하여, 다시 백조가 모는 보트에 올라 브라반트를 떠난다. 사랑하는 엘자를 만나, 첫날밤도 치루지 못하고 떠나고 마는 로엔그린. 왜 삼촌은 이 음악을 듣지 못하게 했을까?


  이거, 책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로엔그린> 스토리를 알고 <필립>을 읽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듯하여 소개했다. 고맙지?

  2년 동안 삼촌과 살다가 18세, 법적 성인이 된 필립이 중국인 얼굴을 한 아가씨를 찾아 전 유럽을 떠돌아, 결국 만나기는 만나는데, 그 다음에 로엔그린처럼 어찌 될까봐서? 글쎄. 그럴 수도 있고. 해석은 당신이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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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5-10-13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저도 읽은 책을 만나서 혼자 기뻐하고 있습니다.
제목의 ‘다른 사람들’ 이란 other people 이란 뜻이겠지요? different from Philip 이렇게 볼수도 있을것 같아서요.

Falstaff 2025-10-14 04:23   좋아요 0 | URL
한가위 잘 쇠셨겠지요? ㅎㅎㅎ 아무래도 other people이 맞는 거 같습니다.
 
성가신 사랑 나쁜 사랑 3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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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 전에 읽은 페란테의 “나폴리 사부작” 가운데 1책 <나의 눈부신 친구>는 미국 뉴욕타임스 선정 “21세기 백대 소설” 중에서 제일 윗자리를 차지한 작품이다. 내가 나폴리 사부작을 읽은 감상은, 걸작이나 명작이란 찬사를 가져다 바치지는 못할지언정 참 재미있는 소설, 이라고 당시 독후감에 썼는데, 이후 아쉽게 생각하는 건, 시간이 별로 많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작품에 대한 기억이 별로 뚜렷하지 않다는 점, 한 방에 휘리릭 사라졌다는 거였다. 이탈리아에서 시칠리아와 사르데나 같은 섬 지역 말고 아직도 벤데타 문화가 사라지지 않은 지역. 내 아들 내외가 신혼여행을 나폴리로 간다 해서, 거기 가면 당연히 소매치기 조심하고, 행여나 코 흘리는 아이들 귀엽다고 건드리지 말고, 예쁜 아가씨 훔쳐보지 말라고 훈수를 둔 곳이다. <성가신 사랑>에서도 나온다. 집 앞 벤치에 앉은 다 늙은 할배가 주인공 화자에게 아이들을 가리키며, 저 아이들 한테 손을 대기만 하면 그건 죽은 목숨이라오.

  하여간 페란테의 사부작은 다 읽었고, 근데 사부작, 하면 내 마음 속 사부작은, 가시는 길 뿌려준 진달래꽃잎을 사부작, 사부작 밟고 가는 님 발자국 소리밖에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폴리 사부작을 읽은 기념으로 페란테라는 이름은 내 기억에 콱 박혀 있었던 바, 그의 새로운 삼부작, 이번엔 제목을 “나쁜 사랑 삼부작”으로 한 삼부작이 나왔다는 걸 알았지만, 나폴리 이야기를 무척 재미나게 읽고나서 기억이 금세 휘발되고 만 것이 생각나, 나중에 읽지 뭐, 하고 내버려둔 것이 어영부영 6년이 넘었다.


  “나쁜 사랑 삼부작” 가운데 1권 <성가신 사랑>. 첫 작품부터 기대 이하이다. 뭐, “나쁜 사랑”에 관한 소설 세 편을 썼는데 그 가운데 제일 나쁜 사랑일 수 있으니 읽은 소감도 제일 나쁜 독후감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 책은 주인공 화자 ‘나’ 델리아의 시각으로 쓰였으나 독후감은 3인칭으로 쓰겠다.

  델리아는 43~44세의 만화가로 로마에 산다. 나폴리에서 시골 화가와 재봉사 사이의 세 딸 가운데 맏이로 이제 나폴리에는 부모가 각각 다른 집에서 살고 아이들은 모두 객지에 터를 잡았다. 자매는 일년에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고, 그나마 가족 일원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하여 아주 가끔 서로 전화를 한 번씩 하는 걸로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한다. 모두 다시 나폴리로 돌아가 사는 건 꿈에도 바라지 않는다. 말투에서도 어느새 나폴리 사투리는 거의 사라졌다. 할 수 없이 나폴리에 가야 할 경우에도 갑작스런 상황이 아니라면 또박또박 로마 또는 각자 살고 있는 곳의 이탈리아어로 말한다. 그만큼 나폴리에 정이 뚝 떨어졌다는 뜻이다. 심지어 두 동생의 이름은 나오지도 않는다. 남은 아니지만 남보다 못해 웬수가 되지 않으려 마지막 발돋움을 하느라 종종거리는 모습.


  막이 올라가면 델리아의 생일인 5월 23일 밤에 어머니가, 예전에 가족들이 여름에 농가 한 채를 빌어 해수욕을 가곤 하던 스파카벤토 해변 인근에서, 평소에 입던 누더기 같이 다 헤진 브래지어 대신에, 섬세한 레이스 처리를 한, 나폴리의 부잣집 사모님들이 즐겨 찾는 ‘보시’ 고급 속옷가게 제품을 착용하고, 다른 옷은 스타킹 하나 걸친 것이 없는 시신 상태로 발견되었다.

  엄마는 죽기 전 몇 달 동안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델리아의 아파트를 찾아와 며칠씩 묵어 갔다. 하도 오래 떨어져 살던 모녀 사이라 지내다 보면 조금 불편한 것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데, 델리아가 엄마 때문에 힘든 기색을 보이면 바로 나폴리로 돌아갔다. 그러니 얼마 동안 머물겠다는 언질을 주었던 적은 없었다.

  어머니가 죽어, 아무리 유럽이라도 여러가지 방면으로 발전이 늦은 지역이라 온갖 관청에 뒷돈을 주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서류처리를 한 다음에 장례식을 할 수 있었는데, 장례식에 아버지가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반쯤 가슴을 노출한 집시 여인을 그린 그림을 건장한 흑인청년 네 명이 들고 성당의 복도를 걷게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좀 이상하지?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신경정신과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오래 전, 아버지는 아내와 세 딸을 집에서 쫓아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유부남이기도 한 훤칠하고 잘 생긴 카세르타 씨와 정분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를 두드려 팬 다음, 처남, 델리아의 외삼촌 필리포와 함께 카세르타의 집에 가서 카세르타 역시 자근자근 밟아주고 돌아와, 아내를 쫓아냈는데, 가톨릭 사회에서 서류작업을 끝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이혼을 기어이 해버린 건지, 법적 가족분할은 하지 않고, 즉 혼인 상태는 유지한 채 서로 보지 않겠다는 졸혼을 한 건지 확실히 밝히지 않았지만 이렇게 갈라졌고, 이때 세 딸 모두 어머니를 선택했다.


  책을 넘기면 “어머니에게”라는 헌사가 나오고 한 장 더 넘기면 이런 경구가 씌어 있다.

  “유년 시절은 과거시제로 영원히 머물러 있는 거짓말의 공장이다.”


  이 책에서 사실인 것은,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다정한 성격이라는 것 말고는 없다. 아버지가 하필이면 불행하게도 편집증적인 증세가 심해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한 상태였다는 거. 아버지가 어머니를 의심할 때 처음부터 아내를 두드려 팼겠느냐만, 일단 손찌검을 시작하게 된 후에, 그 심각함이 날로 더해졌겠지. 많은 이탈리아 남자가 가지고 있던 주취폭행 성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작중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온전히 편집증, 신경정신과적 증상이다. 작중 시점이 휴대폰도 나오지 않았을 때이며,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드려 팬 시기는 작중 시점부터 30년 이상을 더 과거로 밀어내야 하니까 1960년대쯤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아무리 이탈리아가 G7 가입국이라도 의처증이라는 이름의 편집증 증상으로 병원을 찾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편집증은 누구나 갖고 있는 질환이기는 하지만 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의 중증은 당연히 병원에 가야 하고, 심하면 입원도 해야 할 질병이다. 이런 상태를 환자라고 생각해야지, 나쁜 인간으로 여기면 곤란하다. 남자건 여자건 마찬가지다. 편집증 증세가 있는 여성에게 시달림을 받는 남성도 많다. 폭력 같은 가시적 증거로 나타나지 않아서 모르고 있을 뿐이지.

  델리아가 나폴리의 한 골목에서 살 때, 델리아도 틀림없이 어머니가 카세르타와 함께 있는 것을 봤다고 믿는다. 이때 델리아가 네 살. 이 기억이 틀림없을까?

  확실한 건,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드려 팼고, 코피를 터뜨렸으며 옆구리를 발로 찼다는 거. 아버지와 필리포 삼촌이 카세르타를 찾아가 곤죽이 되도록 엎어치고 메쳤다는 거. 이제는 늙어서 많았던 검은 머리카락이 거의 빠져 뾰족한 머리통을 하고 있는 늙은 아버지가 이야기해주듯, 카세르타가 집으로 어머니 선물로 장미꽃다발, 나폴리식 맛난 쿠키 같은 걸 자주 선물했다는 거. 그때마다 편집증이 유별난 아버지는 발광을 했다는 거. 카세르타도 미친놈이지 남의 아내한테 장미꽃다발 선물을 왜 하니?

  그렇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필리포 삼촌과 카세르타 씨의 시절까지는 하여간 자기들이 저질렀거나 기질로 가지고 있는, 당시엔 ‘성격’이라고 불리던 의처증 또는 편집증 때문에 인생을 조졌다고 치고, 그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 조진 것인지, 어머니의 자살을 계기로 로마에서 고향 나폴리로 돌아온 화자 ‘나’, 만화가 델리아 선생은, 어머니의 빈 옷장과 고급 남자 셔츠 한 장, 그리고 어머니가 입던 누더기 속옷을, (조금 후 알게 되겠지만 어머니가 델리아의 생일선물로 주려고 가져간) 옷가방을 교환하자고 제의하는 카세르타 등등을 감안하여 과거를 추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보탤 다른 기재는 자신의 기억. 만 네 살짜리 어린 아이의 기억. 과거시제로 영원히 머물러 있는 거짓말의 공장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 책의 결말 가운데 70~80퍼센트는 가정hyposesis이다.

  ‘가정’보다 더 허구적인 건 없다. 이 작품 속 작가의 기억은 그래서 완전히 거짓말이다. 하다못해 폭력의 장면도 그러하다.

  “아버지에게 엉덩이를 발로 차이는 바람에 어머니는 침실 장롱까지 날아갔다. 어머니는 일어서서 벽에 걸린 그림을 모조리 찢어버렸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머리채를 붙잡고 장롱 거울에 머리를 박아 거울을 깨뜨렸다.” (p.228)

  네 살 유아의 기억. 자라면서 TV를 많이 봤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머리채를 거머쥐고 거울을 박아 깨뜨렸으면, TV/영화처럼 깨진 거울이 중력에 의하여 한 번에 와장창 쏟아졌을 터이고, 깨진 거울면은 생각 외로 날카로워 TV/영화와 달리 아버지의 손등과 팔뚝, 어머니의 뒤통수와 불운했다면 목의 혈관까지 다 절개해버렸을 터이다. 어머니의 머리는 인체에서 가장 두꺼운 두개골에 의하여 보호되고 있었겠지만 혈관이 유별나게 조밀한 머리피부도 다양한 열상으로 말도 못할 만큼의 피가 터졌을 것인데, 무엇보다도 기억에 사무칠 엄청난 피칠갑에 대한 묘사는 없다. 유리가 깨져 사람이 다친 현장을 본 경험이 있는 독자는 이 장면도 진실이 아니라 네 살 먹은 유아의 상상이 만든 그림이라고 여겨 마땅하다.

  몇 가지 되지 않는 증거로 엘레나 페란테는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폭력적인 남성들을 창조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이것도 페미니즘이라면 뭐 할 말은 없지만, 이야기를 어떻게 이런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는지, 혹시 페란테의 유년시절에 델리아가 자신이 당했다고 상상하는/믿는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역자 김지우가 쓴 해설을 보면 결론이라서 내가 여기서 대놓고 말할 수 없지만 델리아가 결말부에서 “기억속에 묻혀 있던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다.”(p.290)고 했다. 나는 이 “충격적인 진실” 역시 정확한 사실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저 작품의 결말에 어울릴 만한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픽션” 장면 하나를 만들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고. 그래서 작가도 “유년시절은 거짓말의 공장”이라고 제일 앞에서 말했던 것이라고. 독자는 가끔 자신이 지금 픽션을 읽고 있다는 것을 잊는다.

  나쁜 사랑 삼부작? 나는 이걸로 삼부작은 그만 읽기로 했다. 나이 들어서 그런가, 이젠 독한 게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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