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정보라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독후감 쓰기 전에 뭔가 좀 먹어야겠다. 당 떨어졌나 왜 후들거려? 하긴 뭐 스타니스와프 렘의 지극히 철학적 농담집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을 읽고 독후감을 쓰려니 잔뜩 기가 죽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 책을 번역한 정보라. 나는 정보라한테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다. 같은 스타니스와프지만 렘 말고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예비치를 번역해 읽을 수 있게 해준 역자가 정보라라서. 정작 그의 작품은 하나도 읽어보지 않아 부커-인터내셔널 상 최종심사에 오른 소설이 엽기토끼인지, 저주토끼인지 막 헷갈리는 수준이긴 한데, 하여간 워크룸프레스의 제안들 시리즈 35번으로 나온 정보라 역 <탐욕>을, 정보라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못 읽었을 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비트키예비치 한 줄도 읽지도 못하고 죽을 뻔하지 않았느냐는 말이지. 정말 진지하고 인상깊게 잘 읽었다. 그럼에도 독자서평에 별 다섯이 아니라 하나 빼고 넷을 준 이유는 오직 하나, 내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읽었으면서 가비얍게 만점으로 올리는 작은 일도 양심상 께름칙했기 때문이다. 근데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예비치와 다른 스타니스와프, 렘의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을 읽고 나서도 마찬가지 기분이다. 마음 같으면 당연히 별 다섯 만점을 클릭하고 싶건만 도무지 내가 작품을 얼마나 이해하고 즐겼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양심상 하나 빼야 마땅하다. 하여간 폴란드 사람들 스타니스와프들은 너무해. 아무래도 안 되겠다.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먹고 오자. 이왕이면 달걀 하나 동동 띄워서.

  정말로 라면 끓여먹고 왔다. 밥 두 큰 숟가락, 수프 3분의 1 봉지, 굴소스 반 티스푼, 콩나물 넣고 팔팔 끓이다가 마늘, 파, 달걀 하나 톡 깨 잠깐 더 끓인 다음에 고추가루 반 스푼과 참기름 살짝 두르고, 마지막 순간까지 쐬주를 한 병 까? 말아? 고민했다. 쐬주는 독후감 쓴 다음에 하자.


  이 책은 1971년에 출간한 《절대 진공》과 1973년 작품 《상상된 위대함》을 번역해 한 권에 묶은 착한 책이다. 출판사 현대문학이 이런 일을 많이 해서 좋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 같은 구상은 현대문학만 할 수 있을 듯. 아무쪼록 출판사 ‘현대문학’, 흑자 많이 내서 계속 번창하기 바란다.

  저 위에서 나는 이 책을 “철학적 농담집”이라고 했다. 농담은 농담이되 이게 철학적이면, 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철학이니 다분히 철학philosophy이면서 동시에 금속공학metallurgy 적이기도 하다. 농담은 농담이지만 잘 교육받은 소수의 전문가들만 책을 읽으며 작가가 의도한 곳에서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농담’할 때의 농弄은 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상당히 고단수 적인 우스개, 흔히 이야기하기를,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들으라는 유머코드이겠다. 그래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나를 위시한 숱한 독자는 지금 작가가 농담 코드로 이야기하고 있는 건 눈치 채겠는데 이게 왜 웃어야 하는 지 모르거나, 농담을 하고 있는 지 자체도 모르거나, 심지어 농담을 하고 있지도 않은데 지레짐작으로 독자 혼자 낄낄거릴 수 있지 않을까? 이 책 읽으면서 간혹 웃기도 했건만 정작 책을 다 읽은 후의 느낌이 그래서 개운하지 않다. 안 웃긴 장면에서 웃었을까봐. 웃긴 장면에서 안 웃는 건 뭐 그럴 수 있어도, 안 웃긴 장면에서 웃으면 되게 쪽팔리거나 무안하잖아? 이거 참. 그렇다고 다시 읽어 보기도 뭐하고 말이지. 사실 앞에서 라면 먹으면서 쐬주 안 마셨다고 고백할 필요가 없었다. 이럴 때 낮술에 취해 그만 써야겠다고 토껴버리는 것도 괜찮은 일이거든.

  《절대 진공》은 서평을 모은 책이고 《상상된 위대함》은 렘이 써준 서문 모음집이다. 문제는 서평이건 서문이건, 애초 존재하지 않은 책에 대한 서평이고 존재하지 않은 책의 서문이라는 것.

  바르샤바의 치텔니크 출판사에서 출간한 <절대 진공>의 서평에서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은 “존재하지 않는 책의 서문을 쓴다는 발상은 렘이 처음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그런 시도를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개념은 더 오래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심지어 라블레조차 이것을 처음 활용한 작가가 아니었다.”(p.9)고 주장한다.

  하필이면 지극히 취약한 보르헤스를 예로 들어서 첫 페이지부터 꼬리를 말고 시작했다. 라블레도? “고매한 술꾼과 고귀한 매독환자 여러분”한테 기념비적인 <가르강튀아>를 헌정한 작가 말이지? 나 스스로 거의 일주일에 네다섯 개의 찌질한 독후감을 남발하고 있으며, 소위 “서평가”라는 직업을 평론가로 문단에 데뷔하지 못한 인기 딜레탕트 정도로 치부하는 교만을 떨어왔으니 《절대 진공》 속의 서평 역시 이런 비루한 범주 안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읽어보니, 이거 원. 뭐 아는 게 있어야 장단을 맞추지! 뭐라고? 맞다. 조금 엄살이 섞이긴 했다.


  말이 서평이다. 렘이 쓴 서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가상 작품의 내용이다. 즉 스타니스와프 렘은 서평을 빙자해 가히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주제를 논했다는 뜻. 그러니까 독자는 하나의 서평이 아니라 장편소설 한 편을 위한 드로잉 북을 본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나는 여태 딱 세 권의 렘을 읽었을 뿐이다. 장편 둘, 단편집 하나. <솔라리스>와 <우주 순양함 무적호>는 외계 생명체와 생명체로 진화한 기계 이야기이고 단편집 《사이버리아드》는 주인공 자체가 로봇, 로봇은 로봇이지만 거의 신적인 능력을 갖는 최고 수준의 AI 기계이다. 이 세 권을 읽으면서 스타니스와프 렘이라는 작가가 애초에 외계에서 온 생명체가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사고방식 자체가 유기체의 결합 보다는 기계와 컴퓨터의 발전, 발전을 거듭해 기계 자체적으로 진화하는 단계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드라이한 존재. 사실 이런 논리는 렘의 독자적인 발상은 아니다. 1952년에 동성애자라는 범죄가 밝혀져 화학적 거세를 당한 후 54년에 시안화칼륨을 들이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천재 컴퓨터 과학자이자 수학자이자 암호해독가였던 앨런 튜링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계 개념을 발표한 것부터 시작한다고 봐야 한다. 9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지만 튜링 생전에 렘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튜링의 개념에 렘의 아이디어가 합쳐지고, 물론 가정이지만 튜링이 자살에 성공하지 못해 계속 스스로 생각하는 기계를 연구했다면 지금쯤 AI의 수준은 상상을 초월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인류는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벌써 멸망을 했거나, AI 로봇의 봉사 덕분에 노동하지 않는 유토피아 근처까지 왔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행하게 살고 있거나 기타 등등이겠지.

  나는 렘의 중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무無, 없음인 것을 안다. 《사이버리아드》에서 N으로 시작하는 건 무엇이든 만드는 기계를 발명하고 절친을 불렀더니 절친이 기계한테 무Nothing을 만들어보라고 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 깊었다. 이 없음, 무를 다른 말로 하면 바로 “절대 진공”이다. 이 절대 진공의 단위를 분모로 하면, 절대 진공의 반대이자 다른 측면인 무한대가 된다. 전 우주적으로 무한대는 대체 얼마가량일까? 렘은 10의 600제곱 정도란다. 즉 1 뒤에 0이 600개 정도 붙는 수. 그 정도면 전 우주를 덮을 수 있다고. 인간 존재는 이 확률을 뚫고 세상에 등장한다. 처음 1/10은 쉽게 예를 들면 엄마와 아빠가 만날 확률. 또는 나의 절반이 될 난자가 배란되는 날 아빠와 사랑을 나눌 확률 정도로 보면, 이 다음 1/10은 엄마 아빠가 성인이 되어 나를 낳기 전까지 살 수 있을 확률. 뭐 이런 식으로 죽 나가면 10의 600제곱 경우 가운데 하나 정도라고.

  존경하는 다임러 벤츠 선생이 메탄올로 움직이는 털털이 반마력짜리 엔진을 단 마차가 점점 늘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숨막히는 연기와 배기가스 때문에 이 이동수단을 어디다 세워 두느냐가 대도시의 가장 골치 아픈 일이 되고, 불꽃놀이와 발차기 원리 덕분에 사람들이 곧 달에서 산책하기 시작하고, 동시에 그들이 달에서 걷는 모습을 지구에 있는 수억 명의 사람들이 집에서 볼 수 있는 일이 가능하고, 인공 천체를 만들어 우주공간에서 벌판이나 도시의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게 가능하다고(p.236~7 요약) 백년 전, 우주 나이도 아니고 지구 시간으로도 눈 깜짝 할 새보다 짧은 세월인 백년 전에 누구 하나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기계는 진화한다. 그런데도 아직 덜 진화한 상태이다. 진짜는 일찍이 앨런 튜링이(스타니스와프 렘 이전에) 말한 바대로 기계 스스로 알아서 진화하는 단계로 진입해야 그제서야 시작이다.


  그러면 기계도 아름다움을 느낄까? 0과 1의 세계로 그런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복잡하니까 간단하게 컴퓨터 인격체계를 페르소노이드라고 하자. 인간은 인간의 눈과 귀, 요즘엔 코와 입을 통하여 색채, 음악적인 소리, 사물의 아름다움, 맛, 향기를 감지하는데, 페르소노이드는 자신의 환경을 둘러보면서 경험적 특성들을 ‘스스로’ 추가하는데, 예컨대 우리가 눈으로 바라본 풍경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순수하게 수학적으로 해석하는, “그들의 경험의 주관적인 속성”이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p.251 요약). 사람도 많이 다르지 않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기준은 시대를 달리해 변하는 것이니까.

  앞 문단에서는 기계와 기계의 두뇌를 이루는 AI의 발전을 발했다면, 이번 챕터 (아서 도브, 『논 세르비암』)에서는 기계의 정서 발전을 다루고 있다. 즉 인식 체계가 사람과는 완전히 달라 아름다움을 느끼기는 하지만 사람의 감각과 같지 않다는 말. 나는 수학적 아름다움을 ‘건식형 아름다움’이라 하고 싶은데, 뭐 그러거나 말거나.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기계가 진화를 하려면 유기체처럼 생식 과정을 거쳐야 한다. 종을 불문하고 유기체에게 최고의 관심 대상인 생식은 그러나 금속과 수학의 세계인 기계 또는 로봇에서는 말 그대로 변형된 생산을 의미한다. 스타니스와프는 페르소노이드의 전제가 인격적 구조이기 때문에 인간 심리와의 유사성을 만들기 위하여 정보적 기층부에 “모순”을 도입해야 하며 이것으로 인해 세대를 거치는 동안 “통합하면서 동시에 분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쉽게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이 행위로 호문클루스에 관한 가장 오래된 신화가 실현된다고(p.261 요약) 한다. 정자 또는 염색체를 담은 생명 인자 속 작은 인간을 뜻하는 호문클루스를 이야기하는 바람에 통합하면서 동시에 “분열”하는 의미가 더욱 헷갈렸는 지도 모르겠다.

  재미도 있고, 가끔 심각하기도 하고, 스타니스와프 렘 특유의 유머도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책. 과학 픽션을 쓴 렘이라 해서 인문학적 깊이를 간과하지 마시라. 그의 지적 함의 역시 깊고 깊어서 이 책을 즐기기 위해서는 수학과 물리적 기초 지식은 물론이고 상당한 인문학적 소양도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 괜히 읽고 자만심 상했다. 웃자고 하는 말이다. 그래도 이런 책 역시 읽어봐야 한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 줄 알기 위하여. 10의 600제곱 가운데 오직 하나 있는 미물. 그게 당신이고 나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5-06-24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캬~라면 끊일 줄 아시네요. 폴님께서 리뷰를 쓰시기 전에 뭔가를 하신다는 건 엄청난 책을 리뷰하시겠다는 건데 이거 저 같은 이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왠지 자신은 없지만 언젠가 한 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Falstaff 2025-06-24 22:34   좋아요 0 | URL
라면이야 레시피가 하도 많아서 말씀입죠, 저도 한 번 레시피 만들어봤습죠. ㅋㅋㅋ
기회가 닿으면 읽어보셔요! 먼저 <솔라리스>나 <사이버리아드>로 기름칠을 좀 하시는 게 좋을 듯하기도 하고요. 근데 제가 뭘 제대로 아는 게 없어서리....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슈베이크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기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이 책을 고른 건 딱 하나. 야로슬라프 하셰크의 미완성 블랙 코미디 <훌륭한 병사 슈베이크>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었다. 브레히트의 슈베이크 역시 하셰크의 슈베이크를 무대만 바꾼 작품이다. 하셰크는 1차세계대전 당시 프라하에서 개장사를 하며 부족하지 않게 생계를 이어가던 파렴치, 우리말로 하면 뻔뻔한, 그리고 귀여운 악당 슈베이크를 등장시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쟁을 가차 없이 희화해버렸다. 말이 “훌륭한 병사”이지 멀쩡한 다리에 깁스를 하고 휠체어에 탄 채 징병검사장에 갔지만 결국 최전선에 배치된 슈베이크는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않는다. 이때 벌써 마흔이 넘은 나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면 브레히트의 슈베이크는 못해도 일흔 살 정도의 노인 아닐까, 이렇게 궁리하며 책을 열었다. 오, 슈베이크는 나이도 먹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막간극에서 원래보다 과장된 몸집으로 등장하는 히틀러가 득세를 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폭망을 하건만 슈베이크는 여전히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모습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장면마다 장면마다 하셰크가 그린 슈베이크와 브레히트의 슈베이크를 비교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셰크의 슈베이크는 전쟁에 관한 블랙 코미디 모델로 서양 문학에서 종종 인용하고 있을 정도의 유명세를 누리고 있으니 뭐 이상한 건 아닐 터이지.

  막이 열리면 본막 이전 서막. 빵빵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히틀러, 비행부 장관이자 국가 원수 괴링, 계몽선전부 장관 괴벨스, 친위대장 힘러.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체코 등 독일이 강점한 나라의 국민이 자신을 사랑해주기 바라마지 않는다. 아랫것들은 당연히 총통을 하느님처럼 숭배한다고 아부한다. 서막은 이렇게 시대를 잠깐 보여주는 형식.


  이어서 본막.

  무대는 술집 ‘술잔.’ 술집 옥호 한 번 끝내준다. 술잔. 하셰크의 <…슈베이크>에서도 첫 무대가 술집이다. 공통점은 술집에 스파이 한 명이 앉아 있는 것. 하셰크의 경우엔 체코 국민인 경찰 프락치가 꼬투리를 잡을 것이 없자 요제프 황제 초상화에 파리가 똥을 싸 까만 점이 촘촘하게 박힌 것을 까탈 삼아 술집 주인을 불경죄, 슈베이크를 반역죄로 몰아 체포한다.

  브레히트 판에서는 독일 친위대원이 술집 ‘술잔’에 앉아 있다. 술집 주인은 코페카라는 이름의 여성. 과부로 보인다. 청년 프로하스카가 짝사랑하고 있다. 후에 청년과 결혼에 성공 잘 먹고 잘 산다. 슈베이크와 친구 발룬이 술을 마시고 있다. 발룬. 풍선? 뭐 비슷하게 뚱뚱하다. 먹을 걸 얼마나 밝히는지 앉으나 서나 고기 타령이다. 친위대원하고 말을 트자마자 독일군은 잘 먹는다면서요? 묻고 독일군이 먹는, 그러니까 나치의 급식 수준으로 체코군에게도 보급을 해준다면 자기도 지원할 수 있을 거라 말했다가 취소할 정도. 극이 코미디라는 걸 한시도 잊지 마시라. 술이 거나해지니 친위대원이 발룬을 껴안으며 의용군 모집소로 데려가려 한다. 이를 본 술집주인 코페카. 노래 한 곡을 불러 의용군의 불을 끈다. 좀 길다. 가사 전부를 소개할 수 없어 요점만 써보자.


  나치 병사의 아낙네는 옛 수도 프라하에서 무슨 선물을 받았나?

  프라하에서 뾰족구두를 받았네. 잘 있다는 편지와 함께 뾰족구두를 프라하에서 보내왔네.

  (이하 축약)

  바르샤바에서 리넨 블라우스를 받았네. 이국적인 블라우스를 바익셀 강가에서 보내왔네.

  오슬로에서 모피 깃을 받았네. 그녀 마음에 들기를 바라며 해협 건너 오슬로에서 보내왔네.

  로테르담에서 모자를 받았네. 그녀에게 잘 어울려! 네덜란드산을 로테르담에서 보내왔지.

  브뤼셀에서는 진귀한 레이스를 받았네. 아 그런 걸 받다니! 벨기에에서 보내왔지.

  파리에서는 실크 드레스를 받았네. 이웃이 샘내는 실크 드레스를 파리에서 보내왔네.

  트리폴리스에서 목걸이를 받았네. 부적이 달린 목걸이를 트리폴리스에서 보내왔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과부가 쓰는 베일을 보내왔네. 장례식에 쓸 미망인의 베일을 러시아에서 보내왔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전을 은유 또는 희망하는 노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잔의 주인 코페카는 끌려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친위대원이 이미 술이 취해 떡이 되었기 때문에.

  이 희곡은 실제로 공연을 한 것으로, 브레히트의 많은 희곡은 이런 노래 장면이 있고, 노래의 대부분을 크루트 바일이 작곡을 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음악은 바일Weil이 맡았다고 한다. 공연은 잘 하지 않는 거 같다. 나도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슈베이크> 노츠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이후 작품 속에 이렇게 노래 가사가 많이 등장하지만 소개하지 않겠다.


  노래가 끝나도 발룬의 먹는 타령은 그칠 줄 모른다. 다시 한번 마음 좋은 ‘술잔’의 주인 코페카. 자기를 짝사랑하는 청년 프로하스카가 푸줏간집 아들이라서 프로하스카한테 고기 두 근을 몰래 가져다 달란다. 고기 두 근을 몰래? 그렇다. 어떤 책이든가, 나치 치하 프랑스에서 햄 한 덩이를 품에 숨기고 가다가 적발되어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는 장면을 읽은 거 같다. 당시엔 그랬다. 이게 말은 쉬워도 목숨을 걸라는 얘기인데 프로하스카의 마음이 어떻겠어? 그래도 사랑하는 코페카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청년을 과감하게 가져다 주겠다고 약속한다.


  후에 슈베이크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끌려가고, 블랙 코미디의 주인공답게 기지 넘치는 재담 끝에 귀에 점 있는 순종 스피츠 한 마리를 구해야 하는 처지를 맞는다. 이것도 사실 코믹 장면이다. 순종 스피츠는 코와 눈, 그리고 발바닥을 제외하고 전부 흰 털로 몸을 가려야 하는 개. 슈베이크의 직업이 개장사라고 말했지? 우리나라 개장사처럼 유기견 잡아 도살해서 고기를 근으로 달아 파는 개장사가 아니고 남이 애지중지 키우는 개를 훔쳐 다른 사람한테 입양해 돈 벌어먹고 사는 사기꾼이자 절도범이다. 그래서 날 잡아 블타바 강변을 거닐고 있는 두 하녀 카티와 아나, 그리고 그들이 끌고 다니는 개 한 마리를 발견한다. 딱 눈 여겨보던 바로 그 개다. 슈베이크와 발룬은 카티와 아나하고 즐거이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개를 훔쳐, 게슈타포 대장에게 넘겨준다.

  전쟁은 점점 막바지 국면으로 치닫고 프라하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굶주림에 지친다. 이중에서 제일 곤경에 처한 인물은 역시 발룬. 이를 지켜보던 슈베이크가 말없이 길을 나서 결국 프로하스카도 가져오지 못한 고기를 크게 한 덩이 들고 술집 ‘술잔’으로 들어온다. 이게 웬일? 침착하고 노련한 코페카. 이거 무슨 고기야? 알고 물어보는 거다.

  개. 게슈타포 대장 마누라 거.

  베르톨트 브레히트. 험한 작품 여럿 썼어도 프라하 시민한테 개고기를 먹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대신 고기 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슈베이크를 본 사람이 있으니 친위대 대장 블링거. 그는 현행범으로 잡혀 총살을 당하는 대신 체코 의용군으로 들어가 스탈린그라드 전투 현장으로 간다.

  정말 가느냐고? 슈베이크는 간다. 엄동설한에 모자도 술집 ‘술잔’에 두고 왔는데 그는 망설이지 않고 간다. 탈영병을 만나도 그들과 관계없이 전선으로 간다.

  이 대목에서 브레히트가 아닌 하셰크의 생애를 떠올렸다. 마흔 살도 되기 전에 알코올 의존증으로 생을 접은 하셰크. 젊은 시절 그는 1차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군으로 징집당해 동부전선에 투입되었으나 동료 체코 청년들과 탈영해서 러시아군으로 편입한다. 브레히트의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슈베이크>를 초연한 것이 1955년. 미국과 서유럽에서 브레히트는 슈베이크가 소련군에 들어가기 위하여 전선으로 향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는 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면 귀여운 악당이자 사기꾼인 슈베이크가 가는 도중에 연극상 히틀러를 만나면서도 그렇게 동쪽으로 갈 이유는 없을 테니까.

  독후감을 재미없게 썼다. 하셰크의 원작과 브레히트의 희곡 모두 무척 재미나고 익살스럽고 해학이 넘치는 골계미가 돋보인다.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옮길 수도 없고, 비슷하게 쓸 재간도 없어서 그렇게 됐다. 하셰크의 슈베이크이건 브레히트의 슈베이크이건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4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드디어 앨리 스미스의 “계절 4부작”을 다 읽었다. 3년 반 걸렸다. 이젠 제일 먼저 읽은 <가을>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곤혹스러웠던 느낌만 남았을 뿐. 다행히 이후 <겨울>, <봄>, <여름>은 훨씬 재미있고 수월하게 읽었다. 계절 4부작에 들어와서 앨리 스미스는 브렉시트, 난민 수용과 구치custody, 환경 등 정치 문제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초기 작품에서 읽었던 발랄한 엽기는 이제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좀 아쉽다.

  <여름>이 제일 재미있었다. 별점을 준다면 넷 반이 적당할 듯. 차마 다섯까지 올리지 못하겠지만 넷은 많이 아쉽다.


  본문을 시작하고 바로 다음 페이지에 이렇게 쓴다.

  “불과 몇 달이 지났을 뿐이다. 이 나라에서 평생 또는 생의 대부분을 산 사람들이 체포되거나 추방 협박을 받아 추방되기 시작한 그때로부터.

  그리고 결과가 바란 대로 나지 않자 정부가 의회를 폐쇄해 버린 그때부터.

  많은 이들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거짓말을 한 사람들에게 투표하여 권좌에 앉혀놓은 그때로부터.

  어떤 대륙은 불타고 어떤 대륙은 녹아내린 그때로부터.

  전 세계의 권력 쥔 자들이 종교, 민족, 섹슈얼리티, 지적능력, 정치적 입장 등의 잣대로 사람들을 가르기 시작한 그때로부터.”

  다음 장chapter로 가면 구체적인 시점이 나온다. 브렉시트 시행 1주. 나는 헷갈린다. 1주週 7일? 1주周 365일? 헷갈림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좋다, 중요한 건 아니니까.

  생의 대부분을 산 사람들을 체포, 추방하기 시작하고, 의회를 폐쇄하고, 오스트레일리아는 불타고, 북극의 빙하는 녹아내리지만 많은 사람들은 라디오, 텔레비전,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말했다. ‘그래서So what?’ 앨리 스미스는 통탄한다.

  “역사가 확증해 주었듯 우리가 무관심할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정치적 무관심의 배양이 어떤 결과를 낳는 지에 대해 각종 사실을 나열해가며 이야기하고 출처와 그래프와 사례와 통계를 사용하여 예증하는 데 평생을 바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부인하고 싶다면 누구나 단숨에 일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힘센 한 마디로… ‘그래서?’” (p.15)

  백기완이 노랫말을 쓴 <임을 위한 행진곡>의 한 소절,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가 퍼뜩 생각났다. 무서운 말이다. 투쟁을 위해 내가 앞장선다. 대열에 서지 않은 자, 너희들은 모두 죽은 자, 시체들이라는 웅변.

  앨리 스미스가 말하는 무관심의 배양과 ‘산 자여 따르라’의 공통점은 자신과 다른 의견은 전혀 받아들일 기미가 없는 것. 오직 자기 뜻만이 유일한 진실이고 가야 할 길이라는 주장이다. 합의 불가능의 최고선임을 선언하는 모양새인데, 의도는 알겠다. 일단 넘어가자.


  “이 나라에서 평생 또는 생의 대부분을 산 사람들이 체포되거나 추방 협박을 받아 추방되기 시작한 그때” 라고 했는데, 이게 오늘 이야기해야 할 제일 큰 주제이다. 이들이 누구일까?

  1.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유입한 난민

  2.  노턴과 북동부 지역에서 브라이턴으로 집단 이송된 수많은 노숙인

  3.  중국인들이 뱀이든가 천산갑을 잡아먹어 발생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들

  이래서 <여름>의 큰 주제는 수용 또는 격리이다. 잉글랜드 현대사에서 격리가 브렉시트 또는 COVID-19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 때도 2차 세계대전 때도 있었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얽히고설켜 서로 안면을 트고 좋은 관계를 지니게 되는 건 <봄>의 경우와 마찬가지고 같은 플롯인데, 이 작품 속에서 이들 가운데 한 명이 잉글랜드에서 낳고 소년시절까지 자란 후 독일로 돌아가 조금 지내다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백 살이 넘은 대니얼 씨. 이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이 지원 입대하려 했으나 해군 당국으로부터 깨끗하게 거절당하고 대신 이곳 저곳의 수용소를 거쳐 마지막으로 서남부 섬에 집단 수용된다. 이때 잉글랜드 병사는 이들에게 적대감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시내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고 오다가 무겁다고 병사가 소총을 건네고 자기는 맨몸으로 잠깐 걷기도 했을 지경이었으니. 길지 않은 수용기간을 끝낸 1943년에 대니얼은 다시 해군에 입대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한다.

  전쟁 전부터 영국에서 살던 모든 독일인이 다 대니얼처럼 영국을 조국으로 알고 산 건 아니다. 간혹 정말 스파이도 있었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켄 폴릿이 쓴 액션 스릴러 소설 <바늘구멍>이 대표적이다. 대니얼과 그의 아버지는 가장 널럴한 등급인 3등급으로 분류되어 그나마 편한 수용소로 간 듯.

  근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수용소는 주로 휴양소에 있는 대규모 위락시설을 변조하여 만들어, 물론 당사자들이야 불편하겠지만 그나마 쾌적한 장소와 편리한 위생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201X~202X년의 난민 수용소나 노숙인 숙소 같은 곳은 <겨울>, <봄>에서도 봤듯이 다양하게 골 아프다. 작품 속에서 수용시설을 주관하는 민간 기업은 꾸준하게 AS4S. <겨울>에서는 저작권 감독 회사로 <여름>에선 민간 전력회사의 외양을 갖추었다.

  여기에 새로이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COVID-19 격리수용이다. 초기 단계에 영국 정부는 거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해서야 감염자 자가 격리를 주문했는데, 전세계와 마찬가지로 마스크나 검진 장비 부족으로 주로 노인들이 집단적으로 사망했나 보다. 사람들은 열이 조금 나고 몸살 기운이 있으면 자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 지도 모르고 스스로 알아서 끙끙 앓다가, 지독히 개인적인 유럽인들인지라 혼자 죽어도 아무도 모른 채 며칠이고 지나갔으니, 그것 참. 하여간 이런 의미에서 자가 격리도 수용의 일환으로 보고 이 목록에 오른 것.


  브라이튼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 그란로 가족이 살았다. 엄마 아빠가 대판 싸우고 아빠가 자진해서 집에서 나가버렸다. 빈집을 구하러 왔다갔다 하다 보니 처자식이 사는 집의 바로 옆집이 매물로 나와 있어서 그 집에 들어갔다. 이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안 한 거 같은데, 아내에게 열쇠 하나를 복사해 주었다. 이거 별거 맞아? 하여간 이렇게 3년 살다가 아빠 제프리는 웨일스 출신의 공부하는 여성 애슐리와 함께 살기 시작했고, 애슐리와 이쪽 집 사람들, 전처와 딸 사샤와 지독한 사춘기의 절정에 달한 아들 로버트와 소 닭 보듯 하며 살다가 갑자기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자세하게 얘기하지 않겠지만 애슐리의 학문적 내공도 대단한 거 같다.

  사샤도 똑똑하긴 한데 사샤가 속으로 무척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맨날 다투기만 하는 동생 로버트는 가히 영재 수준이다. 이런 아이들이 영국의 공립학교에서는 주로 왕따를 당하는 법. (실제 생활이 아니라) 사이버 공간에서 독한 린치를 당하고 견디지 못해 전학을 했건만, 다니던 학교 아이들이 이쪽 학교 애들한테 토스를 해주는 바람에 똑 같이 왕따를 당해 학교에 취미를 딱 작파해버린 상태이다. 사샤가 밤 늦게까지 에세이 숙제를 마치고 다음 날 아침 학교에 들어서려는 순간, 로버트가 문자를 보낸다.

  “지금 십 스트리트로 꼭 좀 와줄 것. 3분쯤 도움 필요함.”

  명색이 누나에, 정확하게 인용한 것이 아니라 실감나지 않을 터인데, 부탁하는 것이 어쩐지 좀 애절해보여 친구한테 대리 출석 부탁하고 달려갔다. 로버트가 아무 표정 없이 앉아 있더니 누나 손을 잡고 자기 품으로 가져간다. 그러더니 그거 있지? 유리로 만든 타이머 용 모래시계. 그걸 순간접착제로 누나 손가락 몇 개에 찰싹 붙여놓고 도망간 거다. 유리, 얇은 유리. 남매 사이가 좋다. 좋아도 너무 좋다. 침착한 누나. 이 와중에도 농담한다. 마침 옆으로 온 커플 샬럿과 아서에게 (손가락을 쓸 수 없어서) 전화기를 건네주고 문자 좀 보내달라고 부탁하는데:

  “이례적인 유대(bonding)의 경험을 하게 해줘서 고맙구나.”

  이 선한 커플은 사샤를 병원에 데려가 사샤의 손가락에서 모래시계 유리를 떼 내고 피부를 꿰맨 다음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커플은 엄마, 사샤, 로버트와 함께 저 북쪽 노퍽, 일찍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머물렀던 곳까지 여행을 떠난다. <봄>에서도 본 거 같은 장면이지?


  하나만 더. 앨리 스미스는 환경론자이다. 그의 주장은 그린로 가족의 엄마 그레이스의 신념으로 확고해지는데, 엄마는 화석연료를 태워 움직이는 운송수단을 거부한다. 그러면 자전거와 전기자동차 말고 없다. 당연히 선한 커플이 운전하는 차 역시 전기차. 그래서 노퍽까지 함께 갈 수 있었던 것. 이 노퍽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 경험이 있는 대니얼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있어 보러 간 길이다. 엄마 그레이스는 이정도 수준이고, 똑똑한 딸 사샤도 우상이 그레타 툰베리. 음. 모든 에너지를 전기로! 이게 답이다. 그러나 전기는 무엇으로 만들어야 빈곤층 등 사회적 약자들도 전기의 혜택을 계속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이제 이것 좀 궁리해 보자.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25-06-20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앨리 스미스의 계절 시리즈도 다 읽으시고...
전 뭐 뽈님의 별5개만 선별해서 읽으면 되니까...ㅎㅎ 별5 독후감 뜨는날이 책 사는 날입니다..ㅎㅎ

Falstaff 2025-06-21 07:15   좋아요 0 | URL
대단하긴요 뭐. ㅋㅋㅋ 백수가 있는 건 시간하고 돈밖에 없어서요. ^^;;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문학동네 시인선 183
김상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김상미는 말한다.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 연애시를 쓴다고. 마감일이 다가오면 어쩔 수 없다는데, 오호, 이름이 난 시인은 그렇구나. 여기에 연애시를 쓰는 팁을 하나 가르쳐준다.


  “먼저 짝짓기에 관계되는 모든 낱말을 머리에서 끄집어 쭉 쓴 뒤, 이것들을 연결해 시를 만든다. 이렇게 쓴 긴 시들은 리듬이 끊기면 안 되기 때문에 단번에 쓴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연애의 바벨탑이라고 하면 너무 유치해서 짝짓기로 표현했다. 그러면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이나 동물도 다 속하게 된다.”  (세계일보 기사 발췌)


  브레인스토밍? 예상 외다. 연애시가 이런 과정을 통해 생산된다고? 프로세스가 있어서 공정을 따라 가며 완성되는 것을 우리는 생산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연애시, 적어도 김상미가 쓰는 연애시는 생산물이라 말할 수 있다. 맞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는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 생산한 시 한 편을 읽어볼까? 안 된다. 전문을 인용하기에 시가 길다. 이이의 시가 대체적으로 길어 전문을 옮기는 건 짧은 독후감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병 속의 편지>에서 조금만 인용해보자.


  벌거벗은 마하*야, 젊디젊은 마하야, 인생은 짧다, 한번 보면 모두가 반하는 네 몸, 그 몸으로 계속 사랑을 나누어라, 인생이란 이 끝없는 사막에서 맛보는 오아시스 같은 섹스, 그 사랑을 붙들고 놓지 마라, 네 몸 위에 누웠다 간 썩은 정신이나 영혼 따위는 신경도 쓰지 말고, 네 팽팽한 젖가슴과 네 탄탄한 허벅지에 와 꽂히는 황홀한 시선들을 즐겨라.  (부분. p.50 *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그림 제목)


  이것이 시의 한 문장이다. 두번째 문장은 위 인용보다 세 배쯤 되는데, 세계일보 기사처럼 “짝짓기애 관련된 단어”는 두번째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에 몽땅 실려 있다. 관련 단어를 연결하는데 그냥 연결하면 당연히 시가 아니니까 여기에 사람 사는 걸 보탠다. 예컨대:


  “사람은 사랑하는 만큼 보이고, 결코 모를 것 같던 사람의 마음도 사랑의 행위 중엔 훤히 다 드러나 보이기 마련, 그러니 너에게 공손히 허리 굽혀 장미를 꺾는 이들, 그들이 네 인생도 꺾어버릴까 두려워 마라,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 열정의 시작도 그 끝도 사실은 모두 잔혹한 짝짓기에서 이루어지는 것, (후략)”   (같은 시. p.50)


  읽을 때는 그럴 듯할 지 모르겠지만 정말 시에 쓴 대로 결코 모를 것 같던 사람의 마음을 섹스 중에는 훤히 다 알 수 있을까? 그럼 섹스가 일종의 관심법? 철원에 도읍한 저 태봉국의 황제 궁예가 주특기로 삼던 것 말이지? 에이, 아서라.


  1957년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상미는 졸업하고 사상공단의 공장과 작은 사무실의 경리를 거쳐 서울에서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한 동생과 서울에서 합류한다. 서울에서 작은 회사(들)에 다니는 내내 시를 쓰다가 1990년에 작가세계를 통해 서른일곱 살에 시인으로 데뷔했다. 이후 이 시집까지 모두 다섯 권을 냈으니, 인생의 별의 별 맛은 다 봤다고 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은 셈이다.

  이 닭띠 시인은 육십대가 되니 시 쓰는 일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이이의 다른 시집은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시들이 거의 길다. 무대도 거창하다.



  파리에서


  파리에서 닷새를 보냈다 너무나 와보고 싶었던 도시

  말도로르의 노래처럼 취해서, 엄청나게 취해서

  밤새도록 드럼통 세 개 분량의 피를 빤 빈대처럼* 취해서

  격한 파리의 숨결, 파리의 공기, 파리의 장소들에 취해서

  오랫동안 사랑했던 이들이 아낌없이 살고, 사랑하다, 죽어 묻힌

  몽파르나스 묘지와 페르 라세즈 묘지에 취해서

  보들레르의 악의 꽃, 초록빛 압생트에 취해서

  뜨겁게 뜨겁게 취해서

  빅토르 위고의 불멸의 꼽추, 카지모도가 에스메랄다를 위해 울리는

  노트르담대성당의 저녁 종소리가 너무나 애절해서

  내 곁을 툭 치거나 총총히 사라지는 여인들의 뒷모습이

  너무나 보바리 부인을 닮아서 (후략. p.60)   * 로트레아몽, <말도로르의 노래>


  파리 관광, 시인이니까 좋게 말해 문학 답사 가서 지은 노래 한 수에 브레인스토밍해서 끄집어낸 숱한 인물들 로트레아몽,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플로베르를 넘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코르타사르가 묻힌 몽파르나스 무덤과 몰리에르, 발자크, 비제 등이 묻힌 페르 라 세즈 묘지까지 총출동시킨다. 앞부분에서만 그렇다는 말이다. 저렇게 연 구분도 없이 꼬박 두 페이지 반, 모두 마흔네 행에 이르는 시에 별의 별 문인, 시인, 소설가, 극작가, 셰익스피어, 제임스 조이스, 스콧 핏제럴드 등 영어로 글을 쓰던 사람들까지, 김상미가 파리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일단 나열하고, 이 사람들을 적당하게 연결해서 한 방에 쓴 시로 보인다. 김상미가 말한 것처럼. 긴 시들의 경우에 리듬이 끊기면 안 되기 때문에 한 번에 일필휘지로 쓴다고 시인이 직접 말했듯이 이 시도 그랬을 것이다. 며칠 전에 읽은 시인이자 소설가 임솔아는 시 한 편 쓰는 데 적어도 쉰 번, 50번 이상의 퇴고를 한다고 하는데 아마 두 시인이 다른 과인 모양이다. 아쉽게도 나는 퇴고 열나 하는 쪽이 더 좋다. 좋아도 많이 더 좋다.


  “리듬이 끊기면 안 되기 때문에 단번에” 쓰는 시들의 경우, 아마도 제일 중요한 건 아니더라도 매우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시를 읽을 때의 리듬감, 즉 운율일 듯하다. 김상미의 거의 모든 시가 길다. 다 긴 시라서 그의 주장대로 리듬이 끊기지 않게 쓰였고, 그래서 운율은 척척 맞아 들어간다. 마치 가사문학을 읽는 것 같기도 할 정도로. 오해하지 마시라, 가사문학 역시 우리나라의 훌륭한 시 장르라고 나는 주장하니까. 사람들이 이 책에서 많이 인용하는 시 가운데 하나가 <포커 치는 개들>이다. 이 시 역시 길어서 전문을 인용할 수 없어서 앞부분만 조금 따오겠다.


  “남자다운 척, 남자다운 척, 남자다운 척 있는 대로 폼 잡다 어른이 된 남자와 여자다운 척, 여자다운 척, 여자다운 척 있는 대로 내숭 떨다 어른이 된 여자가, 결혼한 지 십오 년 만에 큰 집을 장만했다며 우리를 초대했다. 근사한 정원인 척하는 잔디밭과 몇 그루 꽃나무를 지나 실내로 들어서니, 우아하고 세련된 척하는 가구들과 전문가 뺨치는 오디오 시설에 영상 기기들까지 척, 척, 척 설치해놓고, 자랑스레 우리를 반기며 아주 행복한 척, 에로틱한 척 은밀한 침실까지 슬쩍 보여주었다.” (부분. p.23)


  읽으면 읽을수록 입에 착착 감기면서 리듬을 타는 건 맞는데, 아우, 너무 말이 많다. 여자건 남자건 하여튼 나이 들면 말이 많아져서… 다른 분은 모르겠고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 나? 말 많아질까봐 독하게 마음먹고 입 다물고 살려 노력하고 있다.

  시인 김상미에게는 미안한 말씀이오나, 시는 간결한 것이 좋다. 물론 김상미라고 긴 시만 있는 건 아니다. 짧은 시도 있다.



  미스터리



  모든 꽃은

  피어날 땐 신을 닮고

  지려 할 땐 인간을 닮는다


  그 때문에

  꽃이 필 땐 황홀하고

  꽃이 질 땐 눈물이 난다  (전문. p.15)



  필 때는 신god, 질 때는 인간. 그래서 필 때는 엑스터시, 질 때는 눈물. 일단 신이 황홀이란 건 알겠다. 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새롭게 가톨릭의 임금자리에 오른 레오 14세에게 하나 물어보고 싶다. 신이 사람을 만든 다음에 왜 그렇게 사람을 한시도 쉬지 않고 들들 볶았는지. 잘 익은 사과를 뻔히 보면서도 따먹지 말라고 그런 거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인간은 또 들들 볶여가면서도 신을 그렇게 황홀하다고 찬송을 했고, 지금도 하고, 앞으로는 할지 안 할지 모르는지.

  좋다, 그건 나중 일이고, 꽃 질 때는 인간이라서 눈물이 나? 대구counterpoint로 생각하면 황홀의 반대 개념으로 고통? 말 되네. 황홀, 엑스터시 그리고 오르가슴 역시 일종의 통감, 고통의 다른 감각이니까. 아니면 뭐 비슷한 개념으로 사는 일 자체가 눈물이 난다는 건가? 게다가 꽃이 지는 상황이니까. 뭐 읽는 사람마다 다르겠지. 시잖아, 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내 일찍이 옥타비아 버틀러 <킨>의 유명세를 알았건만 이제야 이 책을 읽은 것은, 책방 광고문에 과학소설, SF라는 문구가 자꾸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SF 장르를 무조건 경원하는 건 아니다, 라고 믿는다. 읽기는 읽는데 즐기지 않는 독자의 수준으로 말하자면 브래드버리, 스트루가츠키 형제, 스타니스와프 렘 등 지구 대표선수들의 작품은 즐겁게 읽었고, 지금도 열심히 읽으려고 (나름대로) 애쓴다. 근데 <킨>은 독자들이 워낙 열광을 해서 그랬는지 영 손에 잡히지는 않더라는 것. 그리하여 도서관의 관심도서 목록에만 올려진 채 몇 년을 기다리다 이제야 읽기 시작했다. 5백 페이지를 훌쩍 넘어가는 장편소설임에도 손에 잡자마자 후딱 읽히는 흡인력이 있었으니, 이야기가 그만큼 재미있고, 책의 편집 역시 눈이 피곤하지 않게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1947년에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구두닦이 아버지와 백인가정 가정부 사이에서 무한정 수줍음을 타는 외동딸로 태어났다. 초년에 빈곤했지만 말년에 작가로 팔자가 피는 사람들의 소년시절 공통점을 그대로 빼다 박아서, 옥타비아 역시 어려서부터 시립 도서관을 열심히 들락거리며 책읽기에 몰두했는데, 이때부터 SF 작품에 집중했던 모양이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교 마지막 2년과 이후 2년을 보태 4년 학력으로 셈해주는 패서디나 시립 단과대학을 마쳐 준학사 학위를 얻었다. 옥타비아가 열두 살 때부터 과부생활을 유지하던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비서로 일했으면 하는 희망사항이 있어서, 아마도 속기를 공부했었던 것 같다. 작품 속 주인공 다나도 패서디나에서 살았고 훗날 비서가 되기 위하여 타자와 속기를 배운 적이 있어서 나중에 잘 써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여간 옥타비아 버틀러도, 작품 속 다나도 여러가지 잡일을 하면서 창작에 힘을 써 드디어 문단 말석에 이름을 올린다. 다만 <킨>의 다나는 어려서 부모가 일찍 죽어 자식이 없는 외삼촌의 집에 살면서 학교를 졸업하고 나중에 백인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거의 인연을 끝내는 게 차이가 난다.


  주인공 에드나, 애칭으로 다나가 1976년 6월 9일, 스물여섯 번째 생일에 사건이 일어났다.

  다나는 주로 인력소개소를 통해 부품가게나 창고 같은 곳에서 재고 조사 등의 주로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며 적은 돈을 벌어 호구지책으로 삼으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일을 하다 우연히 백인 남자 케빈과 알고 지내다가, 서로 문학에 뜻이 있음을 알고 점점 친해지기 시작, 급기야 가족 또는 친척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급속결혼의 메카 라스베가스에 가서 혼인신고서에 인감도장을 찍었다. 케빈의 가족이라고는 누나 한 명 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누나는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자학하는 흑인 소녀와 뗄 수 없는 짝궁으로 지냈으나 키 작고 나이 많고 쪼잔한 매형의 영향 때문인지 동생이 흑인 여성과 혼인한다는 얘기를 듣고 정 그렇다면 의절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어릴 때부터 부모처럼 의지하고 살던 외삼촌이, 몇 채의 작은 아파트를 소유한 나름대로 좀 사는 남자였는데, 반대할 수는 없지만 정말 백인 남자와 결혼하면 자기 재산을 몽땅 침례 교회에 기부하고 죽겠다고 했다. 이런 편견과 어려움을 뚫고 결혼에 이르렀으니 둘이 정말 사랑했던 것 맞겠지? 맞다. 적어도 이 소설의 에필로그가 끝날 때까지는.

  둘은 각자의 아파트에서 살았었지만 이제 혼인을 했으니 살림을 합쳐야 할 판. 그래서 작가 지망생 답게 산처럼 쌓여 있던 책을 어느정도 정리한 다음에 케빈의 아파트로 다나가 들어간 것이 1976년 6월 8일. 이제 번듯하게 합법적 부부로서 한 지붕 살림을 시작한 다음 날, 다나가 싸가지고 온 책을 책꽂이에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오더니 휘리릭, 책도, 책꽂이도, 집도, 심지어 케빈도 단방에 사라져버리고 다나 혼자 숲 가장자리 녹지로 순간이동을 해버린 거였다.

  다나가 정신을 차리고 두리번거리다 보니, 아이 하나가 강 한가운데 빠져 열심히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아이가 물에 빠지면 어떻게 보이는 줄 아시나? 마치 수영을 할 줄 아는듯 전력을 다해 팔다리를 허우적거린다. 이러는 바람에 사람 많은 수영장에서도 아이가 물에 빠져 버둥거려도 숱한 어른들은 그걸 보면서 어린 아이가 헤엄을 치고 있다고 생각해 그냥 내버려두다가 죽게 만드는 거다. 다나가 보기에 아이는 벌써 이런 단계를 넘어서 거의 움직임을 멈춘 상태. 수영을 할 줄 아는 다나는 얼른 강으로 뛰어들어가 엎어진 아이의 고개를 물 밖으로 향하게 하고 강둑으로 끌고 나온다. 강둑에서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정색 긴 드레스를 입은 빨간 머리의 예쁘게 생긴 아이 엄마가 온몸을 떨며 어쩔 줄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터. 아이를 내오니 이미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채 숨도 쉬지 않고 맥박도 이미 멈춘 상태였다. 다나는 1970년대에 학교에서 배운 구급법인 인공호흡을 하기 위해 빨간 머리 아이의 입에 자기 입을 대고 숨을 훅, 불어넣었다. 와중에 이 모습을 본 작은 체구의 아이 엄마는 남부 말투로 다나한테 뭐라 욕을 하는 거 같았는데, 다나는 대꾸할 새도 없이 연신 인공호흡을 계속할 뿐이었다. 지성이면 감천? 빨간 머리 아이가 드디어 숨을 훅 내쉬고, 울컥울컥 물을 토하더니 흐릿하게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아이 엄마는 뭔가에 놀란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이 때 다나는 관자놀이에 찬 금속의 감촉이 닿는 것을 느꼈다. 이게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 큰 키에 마른 체격의 남자가 자기 머리통에 은빛 나는 길고 무서운 총을 겨누고 있었던 거였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나타나 총을 들이대는 순간, 다나는 곧 자신이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본능적 상태에 이르러 몸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풍풍 분비되고, 그러자마자 다나는 이 장신의 남자와 빨간 머리 아이와 엄마의 눈 앞에서 갑자기 훅, 사라져 버리고 다시 1976년, 케빈의 아파트, 책장과 책 앞으로 다시 순간이동을 했던 거였다.


  이런 플롯이다. 같은 구성이니 스토리를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만 하자.

  이후 다나는 1976년 6월 9일 저녁에 두번째 순간이동을 하는데, 빨간 머리 아이는 빨간 머리 소년으로 성장한 상태였고, 이 때는 서기 1815년이었으며, 화딱지가 나서 마구간에 불을 싸지른 전력이 있는 소년이 이번엔 손에 불붙은 나무 막대로 방 창문 커튼에 불을 붙여 조만간 타 죽으려는 순간이었다. 즉 소년이 죽을 위험에 처하면 다나가 1976년에서 19세기 초로 순간이동 뿐만 아니라 시간이동까지 하는 것인데 이건 예쁘게 생긴 빨간 머리 소년의 의지에 의해서도, 다나의 의지에 의해서도 생기는 것이 아니라 차원을 넘어서는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 빨간 머리 소년 이름이 예쁘장하게 생긴 것하고는 다르게 ‘루퍼스.’ 이름이 매우 불량하다. 큰 악마 루시퍼와 하여간 비슷하다. 그래서 위험에 빠지면 사정 불문하고 20세기 후반에 사는 다나를 확 끌어당기는 건가? 뭐 그럴 수도 있고. 아이가 사는 곳이 메릴랜드의 와일린 농장이란다. 아빠는 톰 와일린. 자신은 루퍼스. 흑인 소녀이지만 노예가 아닌 자유민 앨리스의 친구. 당연히 19세기 초의 백인 남자 답게 지금이야 친구지만 사춘기 넘어서 부랄 굵어지면 그때도 친구겠어 어디?

  다나의 머리를 확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다. 헤이거 와일린 브레이크. 1831년에 태어나 1880년에 졸한 다나의 오랜 할머니. 이 할머니가 작성하기 시작해 나무 상자에 대를 이어 써내려간 일종의 족보에 의하면 루퍼스 와일린과 앨리스 그린우드가 결혼해 헤이거 와일린이 출생했다는 내용. 그러면 빨간 머리 소년 루퍼스가 다나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사고뭉치 꼬마가 살아남아 다나의 집안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을 만하면 다나를 부르고, 또 죽을 만하면 다나를 부르는 거다. 다나와 한 번은 백인 남편 케빈도 이 차원을 넘어 여행을 해 케빈은 무려 5년 동안 있기도 하건만, 실제 1976년의 시간은 며칠 밖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대가 19세기 초반의 미국. 게다가 노예제도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던 메릴랜드가 무대이니 당연히 백인에 의한 흑인 노예에 대한 온갖 악랄한 학대가 등장한다. 하지만 독자는 차원여행은 이미 클리셰의 범주 안에 들어갔고, 노예제 고발도 익숙하다. 이제는 오히려 아프리칸 미국인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아시아 인에 대한 공격과 차별을 거론하는 시대가 됐으니 만시지탄이기도 하고. 그래서 누군가 내게 이 책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① 재미있다, ② 분량과 관계없이 훅훅 읽힌다, 그러나 ③ 플롯이 이미 낡았고 새로운 읽을 거리가 없어서, ④ 굳이 읽고 싶다면 이 책보다는 콜슨 화이트헤드가 쓴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권하겠다,고 말하겠다.


  조금 더 추가하자면, 1976년에서 1810년대로 떠나면서 이들이 소통하는 언어 사이에 사투리와 백인과 노예의 사용 언어 차이 말고는 별 어려움이 없는 것이 어색하다. 근 170년 가까운 격차. 우리나라면 순조 임금 시절인데 당시 사람이 쓰던 언어를 지금 사람이 듣자마자 이해할 수 있다? 믿지 못하겠다.

  하나 더 말하자면, 다나의 백인 남편 케빈은 1810년대 미국에서 무려 5년 이상을 살다가 탈출한다. 근데 19세기에 루퍼스 와일린은 댕기열로 추정되는 열병에 시달리기도 하는데, 케빈이 일종의 토착병에 제대로 된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을까? 지금은 사라진 온갖 전염병이 창궐하고, 위생 관념이 거의 없었던 거친 시절에 복닥이느라 얼굴에 외과적 상처는 얻었을지라도 질병 한 번 경험하지 않은 것은 가히 기적적이다. 뭐 그렇다는 거다. 심각하게 시비하는 건 아니고 이런 것도 좀 신경썼으면 어땠을까 싶은 정도.

  대신 다나와 케빈은 현대과학이라는 초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서로 퉁치면 된다. 실제로 책 속에 다나의 일반상식적 의학 지식은 당시 의사보다 훨씬 우월한 의료지식으로 무장한 상태이다. 이것 말고도 다양하게 150년 전 사람보다 탁월한 조건을 가지고 있을 터, 이 지식의 적절한 사용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 조금, 많이는 아니고 조금 아쉽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