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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에덴 1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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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은 11년 전에 중편 <야성의 부름> 꼴랑 하나 읽고 그런 작품을 쓰는 작가인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니 더 읽어볼 마음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특히 미국 소설을 읽으면 드물지 않게 이이의 작품을 짧게 인용하는 장면들이 있어 언젠가 한 번 읽기는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2022년 가을에 <마틴 에덴>이 출간되고, 출판계를 선도하는 녹색광선이 책값 인상의 기치도 드높이 들고 있는지라 분량도 많지 않은 책을 두 권으로 분책한 다음에 표지만 딱딱하게 양장으로 분식하고는 한 권에 정가를 2만2천원을 책정하는 바람에, 내 돈 주고는 안 사겠다, 해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했었다. 그러나 나보다 조금 먼저 신청한 이용자가 있어 책이 입고되자마자 읽지 못했다. 그후 예약, 예약, 상호대차 신청 등 온갖 이용자의 손을 거치더니 세상에나, 한 빌런이 이 책 1권만 빌려놓고 1년이 넘도록 반납을 하지 않아 사람의 헛심만 빼놓았다가 이제야 겨우 손에 들어 읽게 되었으니, 그동안 책방 독자 리뷰란에 열화와 같은 성원의 글을 읽어 마음 속에 작품에 대한 기대만 커지고, 커지고 또 커지고 있었던 거디었던 거디었다.
미국에서 가장 범죄율이 높은 도시 다섯 군데를 고를 때마다 거기 한 자리를 꿰차지 않으면 성질내는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사는 도시, 범죄자들의 마음의 고향 오클랜드. 만을 가운데 두고 대륙쪽 도시가 오클랜드, 태평양쪽 도시가 샌프란시스코. 원래 가까운 도시끼리 서로 못 잡아먹어 눈을 부릅뜨는 법이지만 아직 1차 세계대전이 터지지도 않은 20세기 초의 캘리포니아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마피아라고 불릴 본격적인 갱단 말고 동네 젊은 건달 패거리들은 지역에 따라 몇 집단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져 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거리에서 전혀 이상한 짓도 하지 않은 부잣집 도련님이 패거리한테 둘러 싸여 있었다. 워낙 곱게 자라 굳은 살 한 군데 박인데 없는 샌님이 설마 험악한 양아치하고 눈이라도 마주쳤겠느냐고. 그냥 몇 양아치들이 되도 않는 시비를 걸고 있었던 것이겠지. 지나가다가 이 장면이 눈에 들어온 정의의 건달, 젊은 뱃사람이자 한 양아치 무리의 대표 고수 마틴 에덴. 마트가 보기에 그냥 가난한 양아치들이 귀한 집안 아들 하나를 심심해서 두드려 패려 하는 것 같다. 심심해서. 흠. 그러면 안 되지. 마틴이, 어이, 형제, 그러지 말고 그냥 가, 응? 귀찮은 듯이 손등을 휘휘 내저었는데, 네가 마틴 에덴이냐? 마틴이면 마틴이지, 우리 나와바리에 와서 눈에 힘주면 안 되지. 뭐 이런 식으로 사건이 전개되어 1대 몇으로 와다다닥 주먹싸움이 벌어져, 물론 마틴도 몇 대 얻어 터지기는 했지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몇 놈은 똥을 지렸고, 넋을 잃은 것들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으며, 팔 다리 부러진 것들은 추풍령 낙엽만큼이더라고. 하이고, 덕분에 목숨까지는 아니고, 어디 한 군데 다친 곳 없이, 주머니와 지갑도 털리지 않고, 입고 있는 최고급 정장과 외투, 구두도 뺏기지 않은 귀한 집 자제는 너무도 고마워 자기 이름이 아서 모스인 걸 밝히고, 은인을 며칠 후 자기 집에 와서 만찬을 즐기자고 초대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마틴 에덴>의 첫 장면은 으리으리한 모스 저택을 방문하는 씬. 아서가 앞장서고 양아치와 뱃사람 특유의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뒤를 따르는 스무살의 마틴 에덴. 교육을 잘 받은 아서는 집에 가서 아버지, 형, 누나, 그리고 엄마한테 침을 튀며 마틴 에덴이 자신을 구해줄 당시가 얼마나 급박한 상태였으며, 양아치들을 제압한 마틴의 무공이 얼마나 절륜했는지 흉내까지 내가면서 설명을 해두었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부르주아 가문의 아들을 구해주었으니 부모, 누나, 형 입장에서 아무리 하찮은 출신의 양아치라도 밥 한끼 근사하게 먹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야 한다고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어릴 때부터 받은 좋은 교육 덕택에 몸에 밴 예절이니까.
이렇게 해서 저 밑바닥, 완전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도 하빠리 인생만 전전하던 마틴 에덴은 대도시 오클랜드에서도 크게 방귀 깨나 뀌는 법률가 모스 집안을 난생 처음 구경하는 기회를 얻는데, 세상에나, 계급 차이라니. 계급 간의 차이는 사람 사이의 차이보다 훨씬 멀어서, 의자에 앉는 방식, 말하는 문법, 발성하는 목소리의 크기, 대화를 이어가는 순서 기타 등등이 전부 다르다는 걸 마틴은 처음으로 알게 된다. 아, 저들과 나는 아예 다른 인간들이로구나. 그래, 그래. 이제 스무살. 뭘 알겠니.
몇 마디를 하다가 이제는 회합의 메인 테이블, 식당에 들어 턱 앉은 자리가 자신보다 서너살이 많은 루스, 가느다란 가지에 핀 옅은 황금색 꽃이며 정령이고, 거룩한 존재이며 여신처럼 지상의 것이 아닌 숭고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이었다. 무지렁이 마틴이 그래도 천성적으로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있어서 루스에게도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해, 루스를 위해 자신의 나머지 삶을 살 만한, 자신을 내던질 만한, 싸울만한, 죽음을 무릅쓸만한 어떤 것이 있다고 단정했다.
이때 마틴을 본 루스의 속마음도 분량이 만만치 않다. 그걸 다 쓸 수는 없고, 손목 위로 남자의 몸을 만져본 적 없고, 자기 손목 말고는 남자의 손이 거친 적 없는 스물세 살 숫처녀 루스는 상처투성이 손과 빳빳한 칼라에 익숙하지 못해 빨갛게 스친 목, 거친 생활로 얼룩지고 더렵혀진 젊은이의 거친 힘이 눈에 보이면서, 파바박, 찌르르, 전류가 시각을 통해 목구멍의 갈증을 유발하고 신경줄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아랫배까지 내려가 간질간질한 조그만 요동을 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장 두 손으로 마틴의 목을 잡고 그의 정열을 자신이 받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는 했지만 잘 배운 구중궁궐의 규수가 어찌 함부로 손을 내밀 수 있었으랴.
여기까지 읽으면 노동자, 노동자 계급 가운데서도 (당시 시각, 출연진 가운데 모스 가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듯) 더러운 동성애를 밥 먹듯 저지르고 기항지마다 현지처를 두는 천하디 천한 선원 출신의 무식한 남자와, 법률가 가문의 톱 클래스 부르주아 여성 사이의 로맨스를 다룬 희비극이겠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그랬다. <야성의 부름>을 쓴 잭 런던이 그런 이야기 말고 또 뭘 쓰겠나 싶기도 했다. 이런 생각은 나처럼 무식한 것들이나 한다는 걸 모르는 채.
마틴과 루스가 서로 사랑을 시작하면서, 작가의 방점은 이들의 사랑에 있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문학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계제를 만들었다는 데 찍힌다. 루스가 책을 빌려주기 시작해 본격적으로 IQ가 한 300 수준인 것처럼 보이는 마틴한테 문학과 철학, 자연과학 가운데서 특히 진화에 관한 독특한 관념을 세울 기회를 마련해준다. 모스 저택을 나서면서 마틴은 루스가 빌려준 책에서 시작해 공립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온갖 어려운 책을 섭렵해가며 자신의 주관을 정립해 나간다.
다음에 수백 페이지를 할애해 전개되는 이러저러한 과정, 며칠씩 밥을 굶으며 글을 쓰는 마틴 에덴. 자전거와 정장을 팔고, 임대해 쓰는 타자기를 회수당하는데도 야박한 매부들은 상종도 하지 않는 고독한 천재작가. 오직 같은 노동자계급의 하숙치는 문맹 아줌마 마리아와 빨래방 전문가 조 같은 이들만 조금씩 돌보는 가운데, 후에 나타나는 천재 폐결핵 환자 시인의 등장과 죽음. 그리고 루스와의 약혼과 파혼 같은 건 다 생략하자.
드디어 마틴 에덴은 한 시절 찬란한 별이 된다. 천재 작가. 혜성처럼 등장한 상식을 깨는 소설가, 단편작가, 에세이스트, 철학자. 세상은 마틴 에덴에 열광한다.
그런데 독자의 눈에는 서걱거린다. 이건 처음부터 로맨스 소설이 아니었다. 루스와의 연애와 약혼, 파혼은 마틴 에덴의 천재를 돋보이게 하려는 중요한 포장길에 지나지 않았던 거다. 작품의 가장 큰 주제는 한 가난하고 무식한 천재가 눈을 떠 지독하게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초기의 일천한 과정도 조속하게 마쳐, 극악의 상태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걸작 몇 작품을 생산하고, 결국에는 성공하는 과정이다. 불쌍한 루스는 아차, 더 말하면 스포일러다.
나는 이 책, 특히 2권을 읽으면서 에인 랜드가 쓴 <파운틴 헤드>의 눈부신 주인공 하워드 로크를 떠올렸다. 물론 마틴 에덴은 스무살부터 스물두셋까지인 반면에 하워드 로크는 20대에서 시작해 40대까지 올라가기는 한다. 그러나 미국사람들한테 나이가 무슨 소용. 오히려 철학적 사고만 놓고 보면 마틴이 하워드보다 몇 길이나 위인 것을.
이 둘의 공통점은 개인주의자라는 것. 다른 점은 마틴의 경우, 변하지 않는 신념은 세상은 강한 자들이 이끌어야 하고, 나아가 강한 자들만 살아 남는다는 약육강식 법칙의 신봉자라는 점. 육체적으로 강건하고 정신적으로 천재적인 마틴 에덴이니까 이런 생각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나 같은 독자는 속이 별로 좋지 않다. 어쨌거나 전지전능한 마틴 에덴은 그리하여 신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여성작가 에인 랜드가 창조한 개인주의자 하워드 로크가 남성작가 잭 런던이 창조한 마틴 에덴보다 57배쯤 더 좋다. 그러니 당신도 시간 있으면 <마틴 에덴> 말고 <파운틴 헤드>를 읽으시라.
이 작품은 연애소설이 아니다. 한 천재의 궤적을 통해 문학 또는 예술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유도하는 미끼 소설이다. 별로 잘 쓰지도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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