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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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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니것은 확실히 미국 천재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내 취향에 보니것에 필적할 만한 미국 작가는 토머스 핀천 뿐이다. 근거를 대보라고? 왜 이러셔? 기껏해야 아마추어 독자 나부랭이가 두 미국 작가를 좋아한다는데 근거는 무슨 근거.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보니것은 이 책도 “텔레파시 능력자이자 건달들의 친구인 앨빈 데이비스에게” 바친다고 딱 써놓았다. 앨빈 데이비스? 누군지 궁금해 못 견뎌서 얼른 위키피디아 검색해봤다. 그랬더니 1960년생 미국 프로야구 선수가 뜬다. 이이는 아닌 거 같은데…. 누굴까? 가상의 인물일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작가니까, 그럴 줄도 모른다. 이런 헌사를 능가하는 단 하나는? 프랑수아 라블레 <가르강튀아>. “고매한 술꾼과 고귀한 매독환자 여러분께 이 책을 바칩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는 사람 이야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보니것은 말한다.
“꿀벌 이야기에서 꿀이 빠질 수 없는 것처럼 사람 이야기에선 돈이 빠질 수 없는 노릇이다.”
나도 형광등이다. 이 문장을 읽고도 책의 주인공 로즈워터 씨, 이이가 당대 미국의 10대 백만장자 가운데 한 명이라는 걸 눈치도 채지 못했다니 말이지. 그저 보니것의 작품 주인공이 항용 그러하듯이 ①전쟁에 반대하고, ②미국적 자본주의를 경멸하며, ③외상후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릴 수 있겠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추측을 했을 뿐이니. 뭐 ①~③까지의 내용도 틀리는 건 아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 엘리엇 로즈워터 대위는 SS부대가 점령하고 있다고 알려진 바이에른의 클라리넷 공장에 접근했다. 시가전이라 기관단총을 사용하면 좁은 공간에서 아군에게 피해를 줄 수 있어서 대검을 장착한 라이플을 든 채, 먼저 창문에다 수류탄을 몇 방 던진 다음, 꽈과광, 모두 터진 걸 확인하고 포연이 꽉 찬 건물 속으로 돌진했다. 수류탄 파편에 맞아 죽거나 심하게 다친 독일군이 널부러져 있었고, 시신에 발이 걸려 잠깐 쓰러졌다가 일어났는데 바로 코앞에 가스마스크와 철모를 쓴 독일인이 서 있었다. 엘리엇은 용감한 군인, 그것도 장교답게 당황하지 않고 무릎으로 사타구니를 걷어차고 대검으로 목을 푹 쑤셨다가 뺀 다음 개머리판으로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바로 이때 미군 하사관이 즉각 “사격중지, 사격중지! 빌어먹을, 이들은 군인이 아니라 소방관들이다!”라고 외쳤다. 정말로 늙은 남자 두 명과 기껏해야 열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는데, 엘리엇이 대검으로 목을 찔러 죽인 건 열네 살 꼬마였던 거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했던 엘리엇은 10분이 지나자 달려오는 트럭 앞에 침착하게 걸어가 반듯하게 누웠고, 트럭의 바퀴가 대위의 몸에 살짝 닿은 순간 기겁한 부하들이 그를 일으켜 세워, 야전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이것도 일종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 PTSD. 엘리엇의 남은 평생 동안 보통사람들이 그를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건 주인공 엘리엇 로즈워터의 경우이고, 이제 돈에 관해 말해보자.
1964년 6월 1일 현재 가치로 미화 89,472,033.61달러. 약 60년 전이니까 미국 국채 수익률 5%로 계산하면 현재가치로 미화1,671,264,748.13달러. 오늘 환율 1,391원/달러로 환산해서 2조3,247억2,926만5천원. 앗, 생각보다 얼마 안 되네? 이게 당시 미국 10대 백만장자 가운데 한 명인 인디애나주 상원의원 리스터 에임스 로즈워터 씨가 자기 재산의 9할을 쏟아부어 만든 로즈워터 자선문화재단의 기금총액이다. 당시엔 돈 값이 지금보다 훨씬 귀했으니 요새 2조원하고 수평 비교해도 조금 억울하기는 하겠지. 하여간 저 돈으로 1964년에는 1년에 350만 달러의 연간수입을 올렸다 하니 일요일도 포함해서 하루에 1만 달러의 돈이 저절로 생기는 규모였다. 생각보다 수익률이 좋지 않네 그려.
상원의원이 뭐가 아쉬워 자선문화재단을 만들었느냐 하면, 자기 돈 9할을 퍼 놓고, 재단의 이사장 자리에 자기 외아들, 그러니까 엘리엇 예비역 대위를 올려 놓으면 사실상 자기 전 재산을 아들한테,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물려줄 수 있는 거였다. 기금을 출연한 해가 1947년이었는데, 이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각종 무공 훈장과 상이병사에게 주는 퍼플 무슨 훈장까지 수집해 돌아와 다 마치지 못한 명문대 졸업장까지 딴 시기였는데, 상원의원 리스터 로즈워터 씨가 그러했듯이 뭐하러 골치 아프게 사업을 시키느냐 싶어서 재단을 만듦과 동시에, 재단의 설립 강령을 법무법인 “매컬리스터, 롭젠트, 리드, 맥기”사의 대표 변호사 메컬리스터와 상의 끝에 재단의 이사장 직은 영국 왕관과 같은 방법으로 세습하는 것으로 탁 못을 박아 놓았다. 강령에 의하면 이사장의 형제들은 21세가 되면 재단 임원이 될 수 있으며, 정신이상 판정이 나지 않는 한 평생 임원 자리를 깔고 앉아, 죽을 때까지 풍족한 보수를 받으며, 일하지 않고, 손가락에 물방울 하나 묻히지 않은 채 평생 즐기면서 죽을 수 있었다. 대단한 돈 이야기지?
그런데 돈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코넬 대학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제 막 “매켈리스터, 롭젠트, 리드, 맥기” 법무법인에 입사해 수석변호사 매컬리스터의 새끼 변호사가 된 레바논계 러그 상인의 아들 노먼 무샤리가 등장한다. 5피트 3인치로 사무실에서 가장 작은 키지만 엄청나게 큰 궁둥이를 가지고 있었고, 만일 바지와 팬티를 벗으면 허여멀건 궁둥이가 정말 볼만하다고 보니것은 주장했다. 이 머리 좋은 신삥 변호사가 상원의원과 문화재단의 고문 변호사인 메켈리스터의 새끼 변호사로 재단에 관한 비밀 문서를 열람하다가 눈에 꽂히는 것이 있었으니:
“정신이상 판정이 나지 않는 한…”
즉, 재단의 초대 이사장이자 현 이사장인 엘리엇 로즈워터 씨가 기금을 낸 상원의원의 외아들이며, 다른 친척이 없는 관계로 만일 엘리엇이 누가 봐도, 여기서 ‘누가’라는 뜻은 법정에서 법적인 시각으로 판정의 의무를 지닌 인간의 시각을 말하는 것으로, 엘리엇이 미친놈이기만 하면, 책에서는 6촌이라고 했지만 사실 증조부의 형의 자손이니까 8촌 형제 하나가 저 로드아일랜드의 부촌 피스콴투잇에서 가장 가난한 보험판매원으로 살고 있어서 연 350만 달러가 보험판매원의 손에 떨어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짱구를 굴린다.
로스쿨의 존경하는 레너드 리치 교수가 가르침을 주시기를, “훌륭한 조종사가 항상 착륙할 장소를 눈여겨 보듯, 변호사는 뭉칫돈이 손바꿈 하려는 상황을 찾아야” 한다고. 이때 빈 틈이 생겨 변호사 역시 한 방에 팔자가 피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는 거였다. 이 말을 신주단지처럼 여겨 늘 마음에 고였던 악덕변호사 노먼 무샤리는 전쟁 당시 사건으로 PTSD를 진하게 겪어, 귀국 후에도 뉴욕 대신 인디애나 주의 인디언이 한 명도 살지 않는 거대도시 인디애나폴리스도 아니고, 저 멀고 먼 고향, 알고보면 고향도 아니지만 고조, 증조 할아버지가 거대 부자의 기틀을 마련한 로즈워터 군郡에 머물며 의용소방대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미 노먼 무샤리는 엘리엇의 기밀 서류 전부를 보았고, 아마도 복사본 정도는 가지고 있을 듯. 프랑스인 아내 실비아에게 보낸 편지 53통은 원본으로 가지고 있으니 나름대로 승산이 큰 싸움이 될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쯤에서 독후감을 끝내려 하는데, 사실 내가 이 책에 주목한 것은 스토리가 아니라 주인공 엘리엇 로즈워터의 연설 몇 가지다. 그는 공상과학 소설 말고는 어떤 예술도 좋아하지 않는다. 사백년 전에 네덜란드의 한 화가가 그린 그림을 수십만 달러를 주고 사서, 응접실에 걸어놓고 보다가, 공공 박물관을 기증하는 행위? 그게 뭐? 돈이 어디서 난 건데? 결국 로즈워터 군에 사는 가난한 군민들의 노동으로 만든 돈을 한 줌도 되지 않는 부자들이 독식한 거 아니냐는 말이지. 다분히 공산주의적 사고일 수 있으나 엘리엇은 살다보면 “우연히” 공산주의와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우연히” 절대 믿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와 정확하게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게 사람 사는 일이란다.
예술을 싫어하는 엘리엇은 그러나 열 살 남짓 할 때 아버지와 여행을 하다가 들른 허름한 남자 화장실 벽에 쓰인 이행시는 마흔이 넘어서도 기억하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행시, 짧으니까 전문을 소개한다. 제목은 없다.
우리는 당신의 재떨이에 오줌을 싸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우리의 소변기에 담배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문학적으로도 자질이 있는 인간인 것도 같은데 하여간 그의 신념은 공상과학 소설가는 글을 잘 쓰는 어느 작가보다도 중요한 변화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시인이나 매한가지라고 하면서 “단 한 번의 생애에서 참새 방귀만큼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일들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잘난 글쟁이들은 죄다 무시해버립시다. 우리의 주제는 은하, 영겁, 앞으로 태어날 무수한 영혼이니까요.” (p.29) 라고 주장한다.
이것 말고도 지금 읽어도 참신한 구절이 무수하게 등장하지만 역시 백미는 제일 마지막 결론부에 아주 죽여주는 위치에서, 아주아주 죽여주는 “말씀”을 슬쩍 내밀지만, 아이고, 여지없이 이게 최고의 클라이맥스라서 차마 여기에 옮기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통촉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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