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Omer Z. 리반엘리 지음, 고영범 옮김 / 가쎄(GASSE)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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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읽은 줄퓌 리바넬리 <세레나데>가 워낙 좋아서 그런가, 이후 이이의 작품을 읽은 다음엔 그만큼의 재미와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불안>을 읽은 지금은, 혹시 <세레나데>를 읽을 당시 오늘 아침에 읽은 <불안>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리바넬리 특유의 감정 과잉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감지는커녕 과장에 홀랑 빠져 내가 흔히 이야기하고는 하던 빼어난 문장에 의한 마취 혹은 최면에 취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의혹까지 생기고 말았다.

  아, 지금 <불안>이 재미가 없다거나, 감동을 주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충분히 재미있고, 알지 못했던 잔인한 인종청소를 당한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동적이기도 하다. 다만 이걸 묘사하는 리바넬리의 문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아오, 이 이야기는 애초부터 독후감 말미에 쓰려고 마음먹고 있던 건데 제일 먼저 말해버리고 말았다. 조금 있다가 20년이 훌쩍 넘는 단골 횟집에서 쐬주 마시자는 약속이 있다. 암만해도 그래서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다. 배도 좀 고프고. 배 고프면 제대로 잘 판단이 안 되잖아?


  화자 ‘나’의 이름이 이브라힘.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저널리즘에 종사한다. 쉬운 얘기로 신문기자다. 전엔 ‘기자’하면 어깨에 후까시 팍 들어간 줄 알아서, 기자가 되기 위한 시험 ‘기시’를 사시, 행시, 외시와 더불어 4대 고시라 칭하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신세계백화점 옥상에서 돌 던지면 세 명 가운데 한 명이 맞는다. 시인, 화가, 그리고 기자. 그래서 기자더러 기자라고 부르면 기분 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저널리스트라고 해야 씩 웃으며 콧김을 뿜고.

  만일 살인 사건이 나면 튀르키예 신문엔 살해된 시신 사진을 그냥 싣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출간하자마자 데스크에서 기자들 집합시켜놓고 각종 험한 시체들 사진 가운데 실을 만한 사건을 추리는 중에 이브라힘의 눈에 오래 잊고 있던 저 먼 시절의 초등학교 동창의 죽은 모습이 들어왔다. 후세인. 수십년간 철권 통치를 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아니라 튀르키예 동쪽 시리아 국경 근처의 오래된 타운 마르딘에서 의사로 일하던 친구. 그가 죽었다.

  미국 플로리다주 잭슨빌에서 두 친형 살림과 압둘라가 운영하는 피자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이 다 끝난 한밤중에 청소와 정리를 하느라 남아 있다가 인종차별주의자이고 백인우월주의자이며 반무슬림집단인 깡패들에게 칼로 수십곳을 찔려 치명상을 입고, 앰뷸런스로 응급실로 옮겼지만 처치 중에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는 외신과 사진. 후세인의 마지막을 지키던 사람은 응급의료전공의 인도인 의사였다. 환자가 죽기 전에 무어라 의사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마지막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녹음을 한 것이 남아, 훗날 이브라힘 기자가 들을 수 있었으니, 이랬다.

  “한때는, 난 사람이었다.”

  튀르키예는 두터운 햄이 좌우로 누운 것처럼 생겼다. 왼쪽에는 스스로 유럽인이라고 여기거나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1천5백만 명이 밀집해 사는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자유스럽고 분방하게 살고, 오른쪽으로 가면 갈수록 조지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과 국경을 맞대면서 아직도 20세기 이전의 지독한 이슬람 관습에 따라, 사막 비슷한 환경에서 그래도 꿋꿋하게 살고 있다. 이브라힘이 살던 마르딘으로 말하자면 일찍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향유했던 유서 깊은 곳이지만, 최근 불과 몇 십 년 만에 사랑과 자비와 친절의 종교인 무슬림이 급격하게 원리주의화 되면서 인근 국가에서 벌어진 이슬람대 이슬람, 과격 이슬람 ISIL에 의한 오랜 종교 에지디 신자들에 대한 탄압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사막과 산악을 넘어 밀려온 곳이다. 이브라힘은 이곳 마르딘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닌 후에, 더 좋은 교육을 위하여 부모가 이스탄불로 보내 그곳에서 학업을 마치고 기자로 활동하고 있던 것. 이브라힘의 부모는 세상을 떴고, 결혼은 파국을 맞아 전 재산 탈고 모자란 건 영끌해서 산 집을 전처에게 주고 이혼서류에 인감도장을 찍었으며, 신문사 스탭들간의 지옥 같은 경쟁 속에서 완전히 피폐해졌다, 라고 여기는, 이른바 위기 상황에 처한 상태.


  반면에 후세인은 끝까지 마르딘에서 버텼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작은 키와 곱상한 피부에서 눈치챌 수 있다시피 힘도 없어서 친구들과 팔씨름 한 번 해본 적 없었다. 대신 모두 배워야 하는 꾸란에 관해서는 가장 뛰어났다. 공부 머리가 좋았다는 말이다. 집안에서도 부모 말씀에 복종하고, 하나 있는 누이동생한테 자상하며 온갖 집안일을 마다하지 않는 좋은 아들이었고, 때마침 (이브라힘이 이스탄불에서 공부하는 동안) 인근에 대학이 생겨 의과대학을 졸업해 지역 의사로 있었다.

  전형적인 선한 무슬림인 후세인은 이슬람국가를 천명하는 극단적 이슬람 ISIL이 이라크와 시리아 등지에서 내전을 일으켜 숱한 사람들이 난민촌에서 텐트 생활을 하기 시작하자, 두 손을 걷어 부치고 캠프에 들어가 이들 가운데 환자와 어린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난민 가운데서도 ISIL에 의하여 가장 난폭한 폭행을 당한 사람들이, 이슬람과 기독교는 물론이고 유대교보다 더 오래된 종교인 에지디 신자들이었다. ISIL 집단은 에지디 신자 가운데 15세 이상의 남자와 생리를 멈춘 나이든 여성이 눈에 띄면 그 자리에서 참수, 목을 잘라 버렸고, 생리를 하는 모든 여성은 강간을 한 후 노예로 삼았으며, 아직 초경 전의 어린 여자 아이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동족 남자들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목이 댕거덩 잘려 모래땅 위로 떨어지고, 가까운 어디론가 지하실 비슷한 곳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집단으로 윤간을 당한 후, 담배 한 갑 가격으로 노예로 팔려간 어린 여자들은, 어쩌면 당연하게 정신을 놓아 버리는 일이 잦았다. 가끔은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적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기도 했을 수밖에. 더 가끔, 아주 간혹, ISIL로 위장한 에지디 신자가 한정된 돈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에지디 여성을 사서 국경 근처까지 데려가 튀르키예까지 사막과 산을 넘어 도망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후세인이 마르딘의 캠프에서 만난 여자들은 거의 모두 이런 경로를 따라왔던 것이고, 난민 속에는 적의 아이를 출산한 멜렉나즈라는 여자도 끼어 있었다.

  매력적인 눈을 가진 미인이지만 후세인이 멜렉나즈의 외모에만 끌린 것은 아닐 듯하다. 이 여자 품에 안긴 갓난 여자 아이 네르기스는 눈동자를 하얀 막이 덮고 있어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으로 출생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멜렉나즈를 사랑하게 된 후세인. 끝까지 읽어보면 알게 되지만 후세인이 멜렉나즈를 동정한 것을 사랑으로 착각한 것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선의가 진정한 사랑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확인한 멜렉나즈는 후세인의 청혼을 받아들여 함께 후세인의 집으로 가지만, 에지디의 율법으로도, 이슬람의 율법으로도 둘의 결합은 허용되지 않았다.

  여기에 어느새 마르딘에도 과격 이슬람 ISIL의 분자가 생겨 어느 날 후세인에게 총을 난사해, 어깨와 왼쪽 팔에 총상을 입어 입원하게 된다. 이를 들은 미국의 두 형은 즉각 후세인을 설득하여 일단 미국으로 와서 재난을 피하고, 정식 서류를 갖춰 멜렉나즈와 아이도 데려가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9.11 이후 미국인들은 이슬람의 모든 종파를 과격 이슬람과 동일시하게 됐고, 무슬림 자체를 증오하는 집단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두 명의 큰 덩치 백인이 후세인을 칼로 난도질해 죽여버렸던 것.


  작품의 중요한 내용이 ISIL이 에지디 교인들에게 가한 학살과 학대 등이다. 이런 지독한 고통을 당한 에지디 여성의 아픔을, 줄퓌 리바넬리는, 이스탄불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저널리스트로 생활하는 소부르주아 또는 상위 중산층의 괴로움, 직장에서의 무한 경쟁, 이혼으로 인한 자산의 탕진, 거대도시에서의 각박한 삶 등에 지친 이브라힘의 고뇌와 퉁치려 한다. 이게 날 극도로 언짢게 했다. 비교를 해도 비슷하게 해야지, 참수와 강간과 노예 상태의 에지디 사람들과 소부르주아의 일상적 고통을 수평비교 하려 하다니, 에잇!

  그러나 문장의 힘은 무섭다. 아무 생각 없이 명문장을 자랑하는 리바넬리의 글을 좇다가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 어느 문장이 그런데 이리 난리냐고? 이렇게 묻지 마시라. 나도 인용하려고 메모를 하긴 했건만 약속시간 다 됐다. 당신 같으면 독후감이 중혀, 민어 백숙에 쐬주 각 2병이 중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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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바지
카를 슈테른하임 지음, 김기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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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테른하임. 이름만 딱 봐도 유대인 집안이다. 유대인 은행가 카를 율리우스 슈테른하임 씨하고 눈이 맞은 루터교 신자 집안의 어머니 로사 마리가 카를을 낳고 2년 후에 혼인신고를 했다.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한 모양이다. 어머니 쪽이 루터교에, 가난한 노동자 계급이라서. 어쨌거나 아들 카를은 부잣집 자제 답게 뮌헨대학, 괴팅겐대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각 철학, 심리학, 법학을 공부했지만,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서 흔한 학사 학위도 못 따고 졸업도 하지 못했다. 22세 때인 1900년에 바이마르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일을 시작해 첫번째 결혼을 했고, 6년 후에는 엄청난 지참금을 가지고 온 테아 뢰벤슈타인과 두번째 결혼을 해 인생이 본격적으로 피기 시작했다. 한 방에 자기만의 방과 연수 5백 파운드의 백배 이상을 확보한 슈테른하임은 ‘울프의 공식’에 의거해 자기 마음대로 작가들과 어울려가며 자신도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것 보라니까? 자기만의 방과 연수 5백 파운드를 갖지 못하면, 쉽지는 않겠지만 그걸 제공해 줄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라고 내가 몇 번이나 강조했잖아. 인생은 한 방이여.

  흥미로운 건, 이들의 딸 도로테아가 적어도 1/4이 유대인, 뢰벤슈타인도 유대인 가문이라면 최대 3/4이 유대인일 터인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전사의 일원으로 활약하다 독일군에 체포되어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고. 거기서 죽었는지 살아 남았는지는 위키피디아도 모르는 모양이다. 카를 슈테른하임은 1차 세계대전은 여유자금이 넘쳐 흐를 당시가 되어 스위스로 피신해 징집을 피했지만, 2차 세계대전은 그러하지 못해 벨기에에서 숨어 살다가 다행히 나치에 잡히지 않고 1942년에 죽어 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슈테른하임의 장기는 독일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 시절을 일컫는 “빌헬미네 시대에 신흥 독일 중산층의 도덕적 감성을 풍자”하는 거였다고 위키피디아 첫 칸에 나온다. 오늘 독후감을 쓰는 <속바지>도 확실하게 그렇다. 이이는 1912년 이후에 비극을 전혀 쓰지 않았다는데, 책 뒤편 “지은이에 대하여”에 재미있는 내력이 있어서 소개한다.


  “1912년 슈테른하임의 <동 쥐앙(Don Juan)>이 베를린의 독일 극장에서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연출로 무대에 올려졌을 때의 일이다. 필립왕 역을 맡은 배우가 신하에게 “이 바보 같은 건 누가 썼지?”하고 묻는 장면에서 누군가 객석에서 ‘슈테른하임요!’하자 극장 안은 온통 웃음바다로 변했고 ‘브라보!’를 외치는 소리가 끊일 줄 몰랐다고 한다. 슈테른하임은 이 스캔들에 깊은 상처를 받았는지 다시는 비극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의 작품에서는 낭만적 요소와 신비적 요소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극단적인 야유와 빈정거림으로 가득 차 있는 희극이었다. 희극은 시민 사회를 향한 슈테른하임의 조소를 효과적으로 퍼붓게 해 부르주아의 약점을 폭로하는 수단이 된다.” (p.189)


  위에 따온 글은 슈테른하임의 <속바지>를 이해하는데 꽤 큰 도움을 준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은유나 상징, 문학적 호소 같은 건 얄짤없이 그냥 고속도로로 직진해, 하고 싶은 말을 극단적으로 야유하고 빈정거린다는 거. 그걸 통해 현대 독일 중산층의 찌질함을 폭로하고 있다는 거다.

  작품의 남자 주인공이 테오발트 마스케. 여자 주인공은 루이제 마스케. 부부다. 이 ‘마스케’ 선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여 소위 ‘마스케 삼부작’이라고도 하는가 본데, 굳이 외울 필요 없다. 시험에 안 나온다. 테오발트가 바로 현대 독일의 중산층이다. 연수 700탈러를 버는 중∙하급 공무원.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과 속바지가 무슨 관련이 있어서 제목을 그렇게 지었느냐고?

  속바지. 때는 1909년 이전의 베를린. 당시 유럽에는 팬티가 없었다. 삼각팬티는 1954년에 일본의 ‘사쿠라이’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손자를 위하여 디자인해 입혔던 것을 특허출원,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이전에는 전 세계에서 다 헐렁한 형태의 ‘고쟁이’ 비슷한 걸 입었는데 이걸 총칭해 “속바지”라 부른다. 20세기 초반에는 합성 고무가 없어서 고무는 저 아프리카의 콩고 같은 오지 중의 오지에서 수입해와 상당히 비싼 재료라, 그걸 가공해 팬티 끈, 그러니까 속바지 끈으로 사용하는 사치를 부릴 수 없었다. 대신 천으로 끈을 만들어 죄어 묶어 썼겠지.

  속바지도 그나마 조금이라도 있는 집구석에서나 입었다. 서민 계급은 요즘 말로 노팬티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래 여름날 모시 바지를 입은 할배들은 축 늘어진 부랄이 흔들흔들 또는 달랑거리는 걸 맨눈으로도 볼 수 있었다고,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 들었다. 여자들은? 보일 것이 없잖아? 당연히 안 보이지. 흔하게 보이면 그땐 흉도 아닌 거니까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람.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사람이 좀 털털했던 모양이지? 하루는 황제께서 행차를 하시는데, 황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 베를린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구경을 하는 중에 하필이면 마스케 부인, 루이제 한테 한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지나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뿔싸, 하늘도 무심하시지, 딱 이 시간을 맞추어 루이제의 속바지 끈이 스르르 풀려버렸고, 그래서 당연히 루이제의 속바지도 중력의 법칙에 의해 다리를 따라 또 스스륵 미끄러져 발목에 척, 걸쳐버린 걸, 글쎄, 빌헬름 2세가 봤는지 못 봤는지, 보긴 봤는데 황제 체면이 있어서 못 본 척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는 거다.

  봤겠어? 못 봤겠어? 나는 못 봤다는 데 만원 건다.

  근데 남편 테오발트는 그게 아니다. 서방이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여 자만심이 상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의처증이 도져 그런 것도 아니다. 만일 황제가 자기 마누라의 속바지가 흘러내린 꼴을 보았다면, 저런 칠칠치 못한 여편네를 둔 남자가 공직을 맡았다는 걸 용서하지 않아, 아마도 근일 내에 해고당하지 않을까 싶은 거다. 테오발트는 자기 마누라 루이제가 무지 예쁘게 생겼다는 것도 모르고 사는 진짜 찌질이. 그리하여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야단치고, 두드려 패기 시작한다. 연수 700탈러 타령을 하면서.


  이제 동네방네 이웃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게 됐단 말이야. 마스케 부인 속바지가 벗겨졌다고! 그것도 국왕폐하 면전에서 말이야. 나 같은 말단 공무원이. 나도 죄가 있지. 이런 여편네를 둔 죄 말이야. 이런 칠칠치 못한 쌍것. (그대로 머리를 휘어잡아 테이블에 대고 내리친다.)

  700탈러를! 그걸로 우린 방 몇 칸을 지탱할 수 있고 잘 먹고 옷 사 입고 겨울에는 난방을 할 수 있단 말이다. 희극 구경 갈 수 있게 표를 살 수 있고, 의사나 약사에게 가지 않아도 되게 건강이 우릴 보살펴주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즉, 황제가 루이제의 속바지를 봤다면 자기가 해고당해 700탈러를 벌지 못할 거여서 열을 받은 거다. 진짜 웃긴 건, 이 부부가 결혼한 지 1년이 넘었는데, 겨우 일년 밖에 안 되긴 했지만, 아직 아이도 없고, 루이제의 배도 비어 있다는 거다. 왜냐하면, 700탈러 수입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건 너무 힘이 드니 벌이가 조금 나아질 때까지 임신을 하지 말자고 남편 테오발트가 일방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근데 1909년 이전에 어떻게 피임을 해? 완전한 방법이 있지. 아무렴. 이보다 더 완전할 수 없는 피임법. 그냥 손만 잡고 자는 거. 하기는 뭐.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런 찌질이니까 아내 루이제가 남다른 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루이제의 속바지가 치마 아래로 흐른 장면을 여러 사람이 보기는 봤다. 여기서 끝나면 연극이 안 되잖아? 그래서 시작할 때부터 마스케 집의 남는 방 두 개를 임대한다고 창문에 써 붙여 놓았던 것. 여태까지 한 사람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더니, 속바지가 흘러내린 바로 당일, 두 명의 남자가 방을 빌겠다고 들이닥쳤다. 한 명은 부르주아인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자기는 학자 겸 작가라고, 자기 일터에서 떨어진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쓰고 싶어 여기까지 와서 방을 빌리려 한다는 스카론 선생. 다른 한 명은 옆에 있는 이발소도 아니고 서너 블록 떨어진 이발소의 수석 이발사인 만델슈탐. 둘 다 속내는 루이제를 어떻게 한 번 자빠뜨려볼까 싶어 덤벼든 거다.

  웃기게도 남편 테오발트는 이들로부터 받을 임대료, 특히 예상보다 높은 월세를 제시한 스카론 씨 때문에 다른 건 하나도 신경쓰지 않고 입꼬리가 귀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두 남자는 결혼은 했지만 (결혼 전엔 모르겠고) 결혼한 다음에는 한 번도 즐기지 못해서 생각보다 쉬운 먹잇감이기도한 루이제를 유혹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공하느냐고? 그건 안 알려드리고, 남자들의 대시를 상담해주던 옆집 아가씨 게르트루드 도이터 양이 루이제와 어울리다가 독자 또는 관객이 생각해보지도 못했을 남자, 테오발트 씨를 자빠뜨리는 데 성공한다.

  재미있다. 루이제는 암만해도 이발사 만델슈탐보다는 작가 스카론에게 더 관심이 가겠지? 스카론은 며칠 만에 계약과 관계없이 1년치 월세를 몽땅 지불하고 집에서 나가버리고, 다른 남자가 스카론 만큼은 아니지만 좋은 가격으로 그 방에 다시 들어오니, 테오발트 마스케 선생은 돌 한 번 던져 새 세 마리를 잡았겠네? 그리하여 이제 제법 돈을 만진 테오발트. 루이제에게 은근히 다가와서 하는 말이:

  “이제 우리도 아이 한 번 만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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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3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14 0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난처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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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디스 워튼은, 흠, 유명세에 비해 나하고 그리 좋은 궁합이 아니다. 아무래도 세대차이, 젠더 차이, 그리고 계급차이 때문에 그런 거 같다. 워튼 스타일의 문장도 내 취향이 아니다. 작가와 독자인 내가 좀 차이가 있어도 문장만 합이 맞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텐데, 워튼과 나 사이엔 그게 제일 치명적이다. 말로만 재잘거리지 말고 예를 들어보자.

  게이트 옴과 데니스 페이턴은 두 달 전에 약혼한 사이다. 케이트는 이 약혼 때문에 한때 행복감에 흠뻑 빠져 있던 적도 있단다. 케이트가 직접 얘기한 건 아니고 이디스 워튼이 전지적 작가라서 그렇게 썼다. 근데 두 달이 흐르는 동안 뭔가가 바뀌긴 했겠지? 어떤 상태냐 하면:


  “(약혼) 이전에는 가볍게 날아다니는 날개들이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반면 지금은 그 날개들이 그녀 위에 멈춰 있는 것 같았고, 그녀는 자신이 그 날개들의 은신처라고 믿을 수 있었다.” (p.10)


  틀림없이 케이트 아가씨의 심정 변화를 표현한 문장일 텐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가볍게 날아다니는 날개들이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건 ‘공기’ 대신 ‘공간’을 넣으면 대강 무슨 의미인지 짐작이 가지만, “날개들이 그녀 위에 멈춰 있는 것”은 또 뭐야? 어떤 상태를 이렇게 말했을까? 그리고 케이트 아가씨가 이 날개들의 은신처라고? 어디 숨겨 놓았나 보지? 드레스에는 주머니가 없지 않나? 당시 귀한 댁 아가씨가 채신없이 주머니 달린 작업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초장부터, 이게 두번째 페이지인데, 나 한테 초를 치는 문장이 나와 버리니, 같은 말을 굳이 한 번 더하자면, 초장부터 김이 팍 새 버렸다. 같은 아가씨라도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술술 읽혔잖아? … 설마,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누군지 모르시는 건 아니지? 알퐁스 도데.

  이런 문장이 한 번도 아니고 연속적으로 펑펑 터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읽기를 멈춘다. 그리고 다시 읽는다. 이게 어떤 심리를 표현한 것일까? 나? 만날 독후감 올린다고 책도 쉽게 읽는 인간은 아니다. 이해 가지 않는 문장이 나오면 갑작스레 공황 비슷한 심정이 되어 읽고, 읽고, 또 읽고, 다시 읽고, 또다시 읽고, 한 일곱 번 읽은 다음에,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땐 그냥 넘어간다. 물론 속으로 욕은 한 바가지 하지. 점잖은 분들 앞에서 어떤 욕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서도. 이렇게 나 한테 만날 욕을 쳐 자시는데 어찌 나하고 합이 맞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 틀림없이 세대 차이, 성별 차이, 그리고 계급 차이와 성격 차이까지 온갖 차이가 날 작가-독자 사이다. 이디스 워튼, 일찍이 미국의 국가대표 소설가 네 명 안에 자기 이름을 올린 작가이지만, 그래서 눈에 이이의 책이 띄어도 선뜻 집어 들게 되지 않는다. 근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 책 <피난처>는 새삼스레 희망도서 신청을 해서 도서관에서 ‘첫빠따’로 읽었다는 거 아니냐.


  당연히 신부댁 옴 집안과 신랑댁 페이턴 집안은 미국 뉴욕 또는 뉴욕 인근의 부르주아 집안이다. 뉴욕이라 해도 지금의 뉴욕을 생각하지 마시라. 옴씨 댁 앞은 넓은 초원이 펼쳐 있고 큰 키의 나무들이 길을 따라 줄지어 있는 19세기의 도시 인근. 옴씨 댁에 데니스 페이턴씨가 온다.

  데니스 페이턴. 이 책은 김욱동 번역인데, 2025년 초판이라서 그런지 어째 잘 읽히지 않는다. 1부에서 중요한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인 데니스의 어머니를 이렇게 묘사한다.

  먼저 12페이지.

  “데니스의 어머니, 즉 페이턴 씨의 두 번째 아내보다 더 감상에 치우쳐 너그러운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16페이지.

  케이트가 묻기를 “어머니는 어떠셔요?”

  데니스가 대답한다. “내 친어머니는 아니잖아.”

  앞에서 데니스의 형제 아서가 죽는 바람에 아서의 재산 모두를 데니스가 상속받는다. 그래서 데니스의 어머니가 두번째 아내라니까 아서가 형, 데니스가 동생. 이리 결론을 내리고 읽었던 것이 탈. 어, 지금 엄마가 데니스의 엄마가 아니라고? 계속 읽어보면 그렇다. 두번째 아내가 데니스를 낳고 죽었는지 이혼해 버렸고, 2보다 큰 정수 n번째 아내가 낳은 아들, 그러니까 데니스의 이복 동생이 아서. 아서는 좀 방랑기가 있고, 방랑기가 있는 사람이 바람기도 있는 법이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한 아가씨를 만나 야매인지 진짜인지 결혼을 해 아이도 하나 만들었다. 다만 가문의 족보에는 올리지 않았을 뿐. 근데 아서가 깊은 병이 들어 아내가 정성껏 치료를 했건만 결국 숟가락 놨다. 페이턴 가문은 아서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아, 아서의 재산을 가문 밖으로 유출하지 못하게 했다. 아서의 아내는 소송을 했지만, 다 이 통속이 저 통속인 19세기 미국 부르주아 사회에서 어떻게 일개 가난한 여성이 부르주아 집안과 겨루어 소송을 이겨? 당연히 패소했고, 아내는 남편의 돈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사생아로 키우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해, 엣다 드런 세상, 안 살고 만다, 아이를 안고 연못에 빠져 죽었다. 이날 아침 데니스가 보안관한테 시신 확인을 해주고 케이트를 찾아온 길이었다. 당시 동부에 살던 제멋대로 도련님들 가운데 아서 같은 경우가 제법 있었단다. 이런 도련님을 꼬드겨 어떻게 해서든지 결혼신고를 완료한 다음에 가문으로부터 상당한 보상을 받고 이혼해주는 전문직 여성이랄까? 그런 직업여성도 꽤 있었다고. 그런데 아서와 혼인해 아이까지 낳은 이 여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데니스가 이 모자를 불쌍히 여겨 소송에 이겼어도 금일봉을 전달하고자 했건만 절대 받지 않았다니까.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던 커플.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는 법이다. 데니스가 한참 떠들다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색을 하더니 자기는 동생 아서가 정식 결혼을 한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니 계속 얼굴을 굳히고 있어서, 케이트도 얼굴색을 바꾸어 버렸다.

  그럼 내 약혼자가 거짓 증언을 해서, 여인과 아이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았다는 말이지? 명예롭지 못한 일을 뻔뻔하게 저지른 남자와 결혼해 살면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이런 결혼 자체가 명예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케이트는 데니스에게, 지금 청첩장을 쓰고 있는 중이지만 아직 부치지 않았으니, 우리의 결혼을 조금 늦추자고 제안한다. 이 제안이 어떤 의미인 줄 아는 데니스. 반대할만한 타당한 핑계가 없다.

  오후 시간. 옴씨 댁 응접실에 다른 방문객이 도착한다. 데니스의 어머니 페이턴 부인. 아서를 낳은 엄마인지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데니스의 친엄마는 확실하게 아닌 어머니. 페이턴 부인은 자신이 여태 살아온 세월과 경험이 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지혜로 케이트를 설득한다. 딴 생각하지 말고 그냥 결혼해 버리라고. 인생사 뭐 별거 있는 줄 알아요? 그냥 좋으면 좋게, 편하게 살다 가는 게 장땡이랍니다, 아가씨. 왜 그래요, 옴씨 댁 모양 빠지게?

  에이, 설마 이렇게 말했으려고. 말이 그렇다는 거다. 케이트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만 죽 늘어놓고 돌아선 페이턴 여사.

  케이트는 이 일을 오래,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엣다 모르겠다, 그냥 결혼하고 만다.


  이어서 1부의 두 배 정도 되는 분량의 2부. 케이트는 결혼을 했고, 잘 생기고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은 아들 딕을 낳았으며, 딕이 여섯 살 때, 에그머니, 과부가 되어버렸다. 이후엔 연애도 하지 않고 오직 아들 딕 하나를 후원하며 살아온 나이든 과부.

  딕이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아 이게 골치다. 즉, 뛰어난 한 방이 없는 사람. 예고 다닐 때는 음악을 전공했고, 하버드에 입학해서 미술. 그러더니 파리의 보자르로 유학 가서는 또 건축으로 전공을 바꾸고 각 단계별로 적어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 딕 말고 케이트 페이턴이 부르주아 사회에서 이름을 낸 일은, 사교계의 별이라서가 아니라, 사교계엔 발걸음도 하지 않으면서 오직 딕, 딕, 파리 보자르까지 쫓아가서 한 집에 산 건 아니고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살며 딕의 불편함을 보살펴 주었다는 거. 미국 사회에서는 충분히 흉 떨릴 일이다. 다 큰 애새끼를 여전히 치마폭에 감싼다고. 그러나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현명한 케이트가 그런 우를 범하지는 않았으니까.

  다시 뉴욕 근방 집으로 돌아온 케이트와 딕. 딕은 뉴욕에서 건축 사무실을 냈고, 클레먼스 버니 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케이트가 보기에는 딕의 실력에 비해 자잘한 일만 의뢰받는 것 같은 기분. 솔직히 두각을 나타냈지만 세계의 총아들이 다 모인 뉴욕에서는 그저 오종종한 수준이란 것을, 부모는 여간해서 눈치채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딕이 자기의 이름을 크게 낼 수 있는 큰 공모전이 열리고, 딕도 이를 자신한테 주어진 최고의 기회라고 인식한다. 여기에서 당선만 하면, 물론 자신도 있었지만, 이름도 나고, 돈도 벌고, 버니 양과 결혼할 수도 있을 터, 이제 날밤을 새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딱 한 사람, 딕의 친구 ‘대로우’만 아니라면.

  아이쿠. 더 이상은 스토리를 얘기하기 힘들다. 다만 오랜 과거에 딕의 아버지 데니스가 겪은 곡절을 딕이 대를 이어서 겪어야 한다는 힌트만 줄 뿐. 그러면, 전에 시어머니 페이턴 여사가 했던 말을, 케이트 페이턴 여사가 아들 딕의 연인인 클래먼스 버니 양한테 똑같이 할 수 있을까? 이것도 궁금한 일이 되겠지?

  이쯤에서 끝내자. 뉴욕 건축가들의 만화경은 에인 랜드가 쓴 <파운틴 헤드>가 훨씬, 훨씬 더 재미있다는 말만 보탠다. 조금만 더 힌트를 주자면, 이 소설도 점점 <파운틴 헤드>와 비슷한 쪽으로 달려간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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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5-11-12 1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날개가 행복감을 말하는거 아닐까요 약혼 전에는 행복감인 날개가 그냥 여기저기 가볍게 날아다니는 정도라면 지금은 행복감이 딱 그녀 위에 머물러서 결론적으로 안정적으로 행복하다....이런뜻 아닐까요? 어렵고 딱 와닿진 않는 문장이긴 한거 같아요🤣

Falstaff 2025-11-12 16:47   좋아요 1 | URL
그게 다 독자 마음 먹기에 달린.... ㅎㅎ... 거 아닌가 싶어요. 딱 그 자리에 다른 추상명사를 가져다두어도 어색하지 않는 거. 아휴, 저는 천생 이과 쪽이 모양입니다. ㅋㅋ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 1
치고지에 오비오마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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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 극에 달하던 8월 중순에 <어부들>을 그래도 괜찮은 심정으로 읽어서, 치고지에 오비오마를 한 작품 정도 더 읽어보기로 했었다. 오비오마가 데뷔작으로 쓴 <어부들>로 부커상 최종심까지 올라갔으니 좋은 떡잎을 가졌다고 보고, 몇 년 후에 다시 부커상 최종심까지 기껏 기어 올라갔다가 한 번 더 미역국 벌컥벌컥 마신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도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게 더 솔직한 심정이었겠지. 그리하여 가을 바람 살랑살랑 불어, 내내 입고 다니던 반바지 벗어 빨아 옷장 속에 처박은 9월, 3일에 걸쳐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 두 권을 읽었다.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 가련한 것들, 약자들의 합동 울음. 할 수 있는 것이 우는 거밖에 없어서 집단으로 엉엉 우는 거. 이걸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라고 제목으로 정했다. 일단 제목부터 조금 궁상스러우니 어떤 방식으로 궁상스러울지 이것도 궁금하다.


  나는 치누아 아체베가 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서 처음 ‘치’라는 것을 보았다. 이 치가 나이지리아의 독자 토속 믿음/종교에만 있는지, 사하라 이남의 서쪽 아프리카 전역에 걸친 토속 믿음/종교에 다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야 지야시의 빼어난 소설 <밤불의 딸>에서 7대 3백년에 걸쳐 내려오는 가나 여인의 정체성 같은 것도 일종의 ‘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도 같아서 해 본 생각이다.

  아체베의 치는 벌써 읽은 지 오래여서 ‘치’라는 것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수준이라 더 할 말 없다. 오비오마의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를 읽어보니 이 ‘치’라는 것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깃든 일종의 영spirit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생각보다 자기가 깃든 사람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즉, 몸의 주인이 특정 행위를 한다고 결정을 했는데, 이걸 치가 보기에 합당하지 않아 더 좋은/나은 방식의 행위를 하자고 제안을 해도, 주인이 결정을 바꾸지 않기로 했다면 치도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주인의 의지의 하위 단계에 있는 정도이다. 그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하고, 합당하고, 제일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는 선택의 가능성을 보는 일, 이 비슷한 걸 ‘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다시피 인간은 최악 비슷하게 좋지 못한 결과를 낼 뿐인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사는 법이다. 왜 그럴까? ‘치’의 말 또는 권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뭐 이 정도로 넘어가자.

  하나의 치는 한 사람에게만 속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망자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모든 경험을 가지고 그를 떠나 잠깐 신계에 들어갔다가, 최고의 신 추쿠의 결정으로 다른 사람의 영 속으로 들어간다. 일종의 윤회를 하는 셈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도 화자이자 주인공 치논소 솔로몬 올리사의 치는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숱한 사람의 영 속에 있었던 치라서, 모든 경험을 통해 이 지역과 토속 종교의 범위 안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일종의 전지적 관찰자 시점의 역할을 치가 하고 있다. 이 치가 큰 수역인 이모강江변 아버지들의 땅에 있는 우무아히아 부근의 이보족 영들의 세계인 에그부누의 법정에서 길고 길게 진술하는 내용이 이 책의 전문이다. 따라서 진술문이라고 볼 수 있으니 역자 강동혁은 모두 존대어를 사용했다.


  치논소 솔로몬 올리사. 보통 ‘치논소’라 하고, 친한 사람끼리는 ‘논소’라 불리는 주인공은 고아다. 논소의 어머니는 여동생 은카루를 낳다가 죽었고, 아버지는 8개월 전에 세상을 떴다. 아직도 어린 은카루는 밤을 틈타 나이든 남자와 함께 도망해 도시에 가서 살며 그저 아주 가끔 카드 같은 것만 한 장 보내온다. 논소는 완전히 혼자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몸도 크고, 힘도 좋아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고, 어린이들의 나쁜 습관도 있어서 몸이 약한 자미케 같은 아이들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사춘기를 지나면서 내성적인 성격으로 굳어져, MASSOB 비아프라 주권국가 실현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엘로추쿠’라는 친구 딱 한 명이 있을 뿐이다.

  논소는 농부다. 닭도 친다. 나름대로 수십 마리의 닭을 정성스레 돌본다. 그래서 책의 표지를 새의 깃털로 장식해 놓은 거다. 지금도 닭을 친다는 건 아니고, 논소의 치가 에그부누의 법정에서 진술하기 7년 전에 그랬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논소가 7년간 살아온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일이다.

  7년 전, 논소는 농장의 비품을 보충하기 위하여 밴을 타고 근처 읍내수준인 에누구에 갔다. 그곳 닭시장에서 비품 몇 품목과, 자기 인생을 바꾸어 놓은 새끼 거위와 거의 비슷하게 희고 눈부신 깃털의 수탉을 포함해 닭 여덟 마리도 사 짐칸에 싣고 다니는 닭장에 넣었다. 자기 인생을 바꾸어 놓은 새끼 거위? 궁금하지? 작가가 보기에 그렇다는 뜻이고 처음에야 조금 의미가 있지 뭐 그냥 그러니까 넘어가자. 하여간 시장에서 볼일을 다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벌써 어두컴컴해졌다. 엉망진창인 도로를 조심해서 운전해 이모강의 지류인 아마투강변 상점에서 바나나 한 다발과 파파야와 귤 한 봉지를 더 사고 다시 출발해 슬슬 오던 길에 아마투강 다리 난간에 누가 올라 있는 걸 봤다.

  논소는 즉각 차에서 내려 여자에게 접근했다. 더 가까이 가면 정말로 다리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을 거 같아 몇 발짝 앞에 서서, 그러지 마세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외쳤다. 논소는 이 순간, 여자의 얼굴에서 깊은 고난의 흔적을 발견했던 거다. 이제 마음이 급하게 된 논소. 그는 자기 차로 급하게 돌아가 닭 두 마리를 꺼내 들고 다시 다리에 접근했다.

  어떻게 되나 보세요. 당신이 이 다리에서 뛰어내리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는 두 손을 번쩍 들어 닭 두 마리를 강으로 힘껏 던졌고, 닭이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결국 아마투강의 급류에 휩쓸려 몇 번 빙글빙글 돌더니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끝나고 마는 거예요.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여자, ‘은달리’는 마음이 바뀌어 논소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자기 도요타를 몰고 사라졌다.

  논소가 이때 강 속으로 집어 던진 닭 가운데 한 마리가 바로 “양털처럼 흰 수탉”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까웠겠지? 그래서 즉각 밴을 타고 다리로 가서 강변을 뒤져보았지만 찾은 건 벌써 파리가 꼬이기 시작한 털 빠진 죽은 닭뿐이었다.


  이렇게 사랑의 씨앗이 눈을 튼다. 넉달 후에 겨우 다리 위 여자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일상의 행복의 가능성을 발견할 즈음, 유일한 친구 엘로추쿠를 따라 우정상 MASSOB 행진에 참여해 걷다가 운명의 여자와 상봉하고,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자기 목숨을 그리 열성적으로 구해주었으니 어찌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았으랴, 둘은 금방 사랑에 빠져, 사랑을 만들고, 소위 사랑을 나누게 된다. 즉 할 거 다 했다는 거지 뭐.

  나이지리아. 나이든 사람은 결혼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한 시대. 둘이 정식으로 만나기 한두 달 전에 논소는 삼촌한테 결혼을 하라는 말을 이미 들었다. 그래서 결혼 이야기를 꺼냈건만, 사랑하는 은달리는 좀체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논소가 자신을 부모와 친척에게 보이기 싫을 만큼 누추해서 그런 것 아니냐 항의했고, 그래서 은달리는 자기 가족과의 만남을 주선한다.

  이보족이라고 같은 이보족이 아니다. 비아프라 전쟁 당시 동지의 자식들이라고 하지만 평등, 같지 않다. 세상이 그렇게 공평해? 천만의 말씀. 은달리는 족장의 딸. 우무아히아는 물론이고 수도 아부자까지 이름을 떨치는 부르주아 계급. 이런 집안의 딸이 닭 수십 마리를 치는 농부와 결혼을 해? 할 수도 있겠지. 근데 그걸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때 논소의 나이가 20대 초중반, 한 스물넷 됐을까 싶은데, 하긴 그 나이에 안 될 것도 없긴 하다. 은달리도 또래니까 역시 안 될 일 없는 시기. 이미 한 새끼와 연애를 했고, 그 남자가 자기를 버리고 영국으로 도망친 바람에 실연의 깊은 고통을 겪은 상태라 이번에 맺은 인연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보상심리도 있었을 터. 논소와의 결혼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볼 모양이었다.

  은달리가 논소에게 말하기를, 가난? 그건 문제가 안 된단다. 자기 집이 워낙 부자라서 그깟 땅 수만 평을 사주면 한 방에 대농장의 주인이 될 수 있으니. 별 거 없는 집안? 처가가 막강해서 반쪽 친척만 가지고도 비까번쩍하다. 그럼 뭐가 중헌디? 논소가 중졸이라는 거. 이건 대책이 없는 거라고. 은달리는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하고 있고, 대학원 과정은 유럽에서 마칠 예정인데, 중졸 남편은 집안에서도, 친척한테도, 부르주아 커뮤니티 안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그럼에도 은달리는 스스로 그 빌어먹을 커뮤니티에서 뛰쳐나와 결혼을 하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들은 논소는 절망한다. 절망하고 또 절망해서 은달리를 만나면 하릴없이 다양하고 격하고 슬픈 섹스만 나눌 뿐.


  이때 논소의 눈앞에 나타난 은인 비슷한 잃어버린 친구. 잊고 살았던 친구 자미케. 작은 키에 퉁퉁한 몸집의 자미케는 작가 오비오마처럼 키프로스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단다. 키프로스는 유럽과 터키 중간 정도이고, 좋은 일자리가 넘치고 넘쳐서, 일을 하며 대학에 충분히 다닐 수 있다. 공부만 따라가면 유럽의 대학으로 전학을 가던지, 대학원 과정을 유럽에서 할 수도 있다. 자미케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 논소는 은달리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별 문제없이 은달리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땅과 집과, 닭을 모두 팔아 돈을 마련한 논소는 자미케를 통해 1년치 대학 등록금을 납부하고, 기숙사 비용도 지불하고, 키프로스에서의 생활을 위하여 키프로스 은행 계좌를 열고 4천 파운드를 예금했다.

  그리고 이를 은달리에게 말한다. 떠나겠다고. 돌아오자마자 결혼하는 거라고. 은달리는 적극적으로 말리지만 결국 떠나보낼 것임을 알고, 처음으로 논소에게 질내 사정을 허용한다. 독자는 팍, 알아차리지. 은달리가 논소의 아이를 낳겠구나. 아이를 만드는 걸 보니까 논소는 키프로스인지 터키인지에 가서 고생만 오지게 하고 오겠구나. 그리고 이런 불길한 생각은 언제나 들어 맞는다.

  당연히 2부에서 이어지는 본격적인 논소의 불행은 친절한 자미케에서 시작한다. 천부적인 사기꾼. 자미케 때문에 누구는 거지가 되어 나이지리아에 돌아오지도 못한 채 오늘도 키프로스의 황야를 걷고 있다. 누구는 살기 위해 범죄를 저질러 터키 감옥에 갇혀 있고, 누구는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걸 논소는 모른다. 하지만 논소의 ‘치’는 안다. 저 멀고 먼 어린 시절, 몸이 약한 뚱보 자미케를 심심풀이로 괴롭히고 때린 논소로 하여금 세상을 저주할 이유를 얻은 자미케라는 것을.

  이렇게 1부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고, 사실 이게 중요한데, 좀 야하게 진행해서 만족한 상태로 2부를 읽게 만들지만, 아이고, 키프로스에서의 고생담이 너무 징글징글맞아 곱게 늙은 나는 학을 질렸다는 얘기 아냐? 물론 그건 내 경우일 뿐, 극점으로 치닫는 묘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무릎을 칠 수도 있으리. 다 복골복이다. 책을 읽고 자신과 맞고 안 맞고는.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가 무엇인지 더 얘기하고 싶지만 독후감이 너무 길어졌다. 1권 134~135페이지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도서관 가서 책 찾아 읽으실 분은 직접 확인하시는 것이 좋겠다. 이 책은 품절도 아니고 절판이다. 읽으려면 헌책방이나 도서관을 선택하시라.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다. 명색이 제목을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라고 했으면 약자, 빈자, 무식자를 위한, 무식자에 의한 작품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작품 내내 약자처럼 보이는 논소는 사실 나이지리아 전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땅과 농장과 집을 가진 중산층이다. 여주인공 은달리에 비해 약자로 보일 뿐이다. 그리하여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의 핵심은 계급간 갈등의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으로 가야 할 것인데, 화자인 논소의 ‘치’는 논소의 신분을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제 주인이 걸출한 사람들의 가문에 속한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릴 것입니다. (중략) 그는 무슨 과일처럼 나무에서 떨어진 사람들과 같은 등급이 아닙니다! (후략)” (2권 p.126)

  이거 뭥미? 논소 자신이 걸출한 인물이다, 걸출한 사람들을 배출한 가문은 따로 있으며, 보통 사람하고는 애초에 다른 등급의 인간이라는 얘기지? 뭐 이런 후진 치가 있나 그래. 사람들의 집단에서 다른 집단보다 더 ‘훌륭하고 높은’ 등급 또는 계급, 혹은 핏줄이 존재한다는 뜻이지? 어이가 없네.

  말로만 마이너리티 어쩌고 저쩌고 동동 뜨더니, 속은 여전히 봉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네. 누가? 누구기는 누구야, 작가 치고지에 오비오마자. 아니더라도 이 발언의 모든 책임은 작가가 져야 마땅하지.

  근데,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게 유도했는지도 몰라. 그러니 직접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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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김엄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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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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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아홉 편을 실은 소설집. 읽는데 딱 일주일 걸렸다. 지난 주 화요일에 빌려 이번 주 월요일에 다 읽었으니. 아, 오해하지 마시라. 재미있게 잘 읽었다. 내가 언짢아 하는 요즘 작가들의 비슷비슷한 작품들과 다르게 요사스럽게 매혹적이고, 맹랑하고, 발칙하기도 하고, 우울해도 귀엽게 우울하다.

  이 책이 2015년에 나왔으니 김엄지가 스물일곱 살. 서울에서 태어나 조선대학 문창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운영하는 『문학과 사회』의 신인문학상을 통해 2010년에 등단했으니 첫 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부터 책등에 전통의 빨간 허리띠를 두른, 또는 빨간 빤쓰를 입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기분 좋았겠는 걸?


  작품집의 맨 앞에 실린 작품이 <돼지우리>. 이 첫 작품. 김엄지 개인사로는 2010년 문학과사상 신인문학상 수상작이며, 데뷔작을 제일 앞에 배치했는데, 정말 기발했다. <돼지우리>에 나오는 돼지우리는 삼겹살과 소주를 파는 돼지고기 집이다. 출연진은 화자 ‘나’와 ‘나’의 친구이며 주인공인 우라라. 그리고 돼지우리 주점의 사장과 사장의 아내이자 주방과 홀 서빙 아줌마. 이렇게 네 명이다. 시작부터 ‘나’와 우라라는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있는 중.

  우라라. 대학 시절에 공부도 잘 했고, 생긴 것도 빠지지 않았다. 근데 조금 골통. 말하는 폼새부터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입에 달고 다니는 단어가 “떡”. 라라의 말을 그대로 쓰자면 어릴 때, “떡을 먹다가 뒈질 뻔했어. 숨구멍으로 넘어갔거든.” 그때부터 “인절미 콩가루만 봐도 토할 거 같”다.

  이후 라라는 떡의 질감과 향, 목 넘김이 인류가, 좁게 말해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것으로 상정했다. 뭐 누구든지 이런 거 하나씩 가지고 있을 듯. 주로 어릴 때 먹은 음식에 관해서라면, 내 경우엔 잘 익은 토마토를 앞니로 베어 물었다가 앞니가 쑥 빠진 경험이 있다. 그리 흔들리지 않은 젖니였는데 뭐에 걸렸는지 아프지도 않지만 잇몸에서 쑤욱, 빠지는 이상망측한 감촉. 그래서 이후 건강, 특히 발기 유지에 그리 좋다는 채소이기도 한 토마토를 한 십년 가까이 먹지 않았다. 귀하게 자란 외동아들 누구는 역시 어릴 때 굴, 그 흐물흐물한 단백질 덩어리를 먹고 체해 밤새 물찌를 싸대는 바람에 나이 먹어 아가씨하고 키스도 못했다는 거다. 아가씨의 혀가 자기 입 속으로 쑤욱 들어오는데 혓바닥의 뭉글뭉글한 감촉이 저기 저 멀리 있던, 어렸을 때 목을 넘어가던 생굴하고 비슷한 거 같아서.

  하여간 우라라는 어릴 때 하마터면 뒈질 뻔한 인절미를 먹었을 때는 안 그랬지만, 가랑이 솜털이 검게 바뀌는 사춘기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욕설을 섞은 말을 구사하기 시작했고, 라라가 “떡 됐다.”라고 말했다면 그건 “개 같다.”나 “좆 같다.”와 같이 치명적인 표현이라고.

  정말이다. <돼지우리>의 두번째 문단에 김엄지는 이렇게 말했다.

  “떡이나 개, 가끔은 좆. 라라는 본인의 면접 결과를 늘 그런 식으로 대답했다.” (p.9)

  본인의 면접 결과? 흠. 그러면 ‘나’와 라라는 대학 졸업반이거나 졸업생, 즉 취준생이겠구나. 근데 좀 더 읽어보면 조금 이상하다. 생기기도 잘 생겼고, 욕만 하지 않으면 말도 기막히게 하는데, 거기다 지방대학이지만 공부도 잘해서 당연히 학점도 좋고, 서울에서 굳이 먼데까지 유학을 왔으니 집안도 좀 넉넉한 거 같은데 왜 면접을 볼 때마다 미끄러지느냐는 말이지. 지방 소재 대기업이나 공기업이라면 라라 정도의 ‘지방인재’는 서류 넣자마자 볼 것 없이 그냥 쑥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건만.

  아무리 ‘나’와 독자가 뜻을 모아 팀을 만들어 앞뒤로 관찰해 보아도, 라라는 애초에 금융기관을 포함한 대기업, 중소기업, 공기업, 기타 등등에 취업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라라의 주장대로 예의상 면접을 봐준 것에 불과할 뿐.


  면접을 보는 족족 탈락하기만 하는 라라. 아마도 면접장에 가기만 하면 일부러 찐따 짓을 해서 남들에게 나도 회사에 취직하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한 행위였지 않았을까 싶다. 라라는 그들의 속에 들어가 정형화된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이겠지. 아마 생활인의 80퍼센트는 라라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살지도 모른다. 다만 억지로라도 그 짓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을 수 없고, 장가도 들지 못할 거 같고, 장가를 들지 못하니 어여쁜 마누라와 금쪽 같은 새끼들도 생산해 키울 수 없으니 그저 그렇게, 남들 다 하듯 취직하고, 이후 작품의 출연진들과 마찬가지로 상사 새끼들한테 후진 소리 들어가며 월급 타서 그 돈으로 삶을 이어갈 뿐이지.

  내가 아무 일을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자기만의 방”과 5백 파운드의 연수입이 보장되기만 하면 염병을 한다고 취직을 하고, 드러운 상사 새끼들한테 후진 소리 들으며 직장생활하고, 소주 맥주에 닭 뜯어가면서 드러운 상사 새끼 흉보고, 택시 타고 집에 오면서 택시 안에 토하겠느냐고? 라라도 백 년 전의 여성들처럼 자기만의 방과 연수 5백 파운드가 보장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라라는 참 특이하다. 먹는 걸 무진장 좋아한다. 먹으면서 오르가슴을 느낀다. 저 오래 전 원조 포르노처럼 최고의 성감대가 “목구멍 깊숙이” 있어서 그걸 자극해야 오르가슴에 도달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자극을 위하여 온갖 음식물을 씹고, 넘기는 건 아니다.

  “적극적으로 오르가슴을 느끼고 싶다면 지금 막 조리한 따끈한 육류를 택해야 하며, 급히 먹되 잘 씹을 것. 입과 이빨을 최대한 사용할 것. 입 주변 근육이 조이고 이가 잇몸에 콱콱 박히는 듯한 느낌이 올 즈음부터 목 넘김에 최대한 집중할 것. 입안에 가득한 고기를 한 번에 삼킬 것. 이때 목구멍과 씹힌 고기의 접촉을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는 먹는 자의 테크닉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p.11)

  아하, 입안 가득한 고기가 죽상 상태가 될 정도로 씹혔을 때 그걸 한 방에 목구멍으로 넘기고, 이때 목구멍 전체의 조직과 음식물의 마찰이 오르가슴을 만들어내는구나! 어째 삽입섹스의 프로세스와 그렇게 많이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당시 스물두세 살의 라라는 벌써 음식, 특히 고기를 먹으면서 다른 건 몰라도 오르가슴 하나에 대해서는 확실히 도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어디 함부로 취직이나 할 수 있겠어?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개울 치고 가재 잡는 일도 생기는 법이라서, 놀라지 마시라, 라라는 드디어 취직을 했다. 바로 ‘돼지우리’에. 벌써 고용계약서에 서명까지 했다. 한 번 보시라.


  채용 계약서


  1. 한 달 급여 1백만원. 우라라의 신체 변화에 따라 보너스를 지급한다.

  2.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출근한다.

  3. 일주일에 한 번은 삼겹살 외 사장이 추천하는 부위를 먹는다.

  4. 우라라는 돼지가 될 때까지 돼지고기를 먹는다.

  5. 일방적 계약 해지시, 월급과 고깃값의 8배를 보상한다.


  화자 ‘나’와 우라라는 계약서에 라라가 먹는 돼지고기는 무료로 제공한다는 조항이 빠졌음을 발견한다. 당연히 이 조항을 추가하기로 사장과 약속한다.

  사장하고 약속했다고? 그렇다. 이 계약서를 볼 때까지 고깃집 “돼지우리”에 사장이 무대에 나오지 않는다. 드디어 등장한 사장. 돼지 비슷하게 생겼다. ‘나’는 여태 몰랐는데 라라는 알고 있었다. 서빙 아줌마가 사장의 아내인 것을. 서빙 아줌마는 정말 돼지 같이 생겼다. 나중에 보면 꼬랑지도 달렸다. 그냥 꼬리 말고 꼭 “꼬랑지”라고 써야 제 맛인 돼지 꼬리가.

  사장이 보기에 라라야말로 훌륭한 돼지가 될 최고의 자질을 가지고 있단다.

  작품에 관해서는 이쯤에서 그만 두고,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내내 유쾌했으며, 엽기적 그로테스크한 매력적인 작품이라고도 생각했는데, 내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영화가 한 편 있었으니, 장피에르 죄네가 감독하고 도미니크 피뇽이 주연한 1991년의 명작 <델리카트슨>. <돼지우리>와 <델리카트슨> 두 편을 읽고 본 사람은 내 의견에 그리 반대하지 않을 듯한데, 물론 내용은 다르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 김엄지. 괜찮군. 앞으로 주목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근데 왜 도서관에 김엄지 책이 별로 없지? 거 별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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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5-11-10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델리카트슨!! 진짜 명작이죠.. 장 피에르 주네 감독 영화 구하기도 어려웠는데 어째저째 열심히 찾아 봤던 기억이 있어요! 책은 도서관에 한 번 찾아봐야겠어요~

Falstaff 2025-11-11 04:19   좋아요 1 | URL
넵. 서너번 본 거 같습니다. 이 영화 좋다 하시는 분 거의 못 봤는데 반갑습니다! ㅎㅎ

자목련 2025-11-11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엄지 소설 좋아하는데 Falstaff 님도 읽으셔서 괜히 으쓱합니다 ㅎㅎ

2025-11-11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