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기도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5
샬럿 우드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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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레일리아(이하 “호주”) 뉴사우스웨일주 쿠마에서 출생한 1965년생 작가. 호주 소재 대학에서 박사까지 공부했고 작년까지 위키피디아 노출 기준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여기저기에서 숱하게 상을 받거나 최종후보까지 올랐는데 지금 독후감을 쓰는 <상실의 기도 Stone Yard Devotion>도 2024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가 그냥 내려왔다. 부커상이 떠그르르한 건 맞는 모양이다. 최종심에만 올라도 전세계적으로 번역 출판하는 걸 보니.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23번에 빛나는 치고지에 오비오마의 <어부들>도 2015년 최종심에 올랐다가 벌컥벌컥 미역국을 먹은 작품이었으니. 하여튼 작가 샬럿 우드는 지금 시드니에 살고 있고 호주예술위원회에서 문학분과 의장을 역임하는 등 호주 문학예술계에서는 실세인 모양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은 <상실의 기도> 한 권 밖에 없지만서도.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상실의 기도>는 일인칭 소설. 책을 덮을 때까지 화자 ‘나’의 이름은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참 독하다. 한 번 정도는 나와도 좋을 거 같은데 말이지.

  ‘나’의 최근 직장은 멸종위기종 센터. ‘나’는 결국 법적으로 갈라서기로 확정한 전남편 알렉스와 무자식이 상팔자인 결혼생활을 누렸는지, 아이가 있긴 했는데 이미 다 커서 더 이상 아이들이 ‘나’의 인생 속으로 비집고 들어올 이유가 없어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수십년 동안 살다가 헤어졌다. 헤어진 김에 알렉스는 영국 런던으로 떠나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고, 그나마 원수처럼 헤어지지 않은 모양이라 히스로 국제공항에 내려서 ‘나’한테 잘 도착했으며 새 동료들이 마중 나왔다고 문자로 보낼 정도의, 사랑을 친분 또는 가까운 우정으로 대신해 이어가고 있다. ‘나’도 떠났다. 호주의 평원으로.

  호주의 평원. 탁 떠오르는 에세 시리즈의 작품이 있다. 에세 시리즈 최초의 남성작가 작품, 제럴드 머네인이 쓴 <평원>. 민음사에서 낸 머네인의 소설집 《소중한 저주》와 피터 케리의 <집으로부터 멀리>. ‘나’가 그동안 잊었던 호주, 자기가 태를 묻은 고향 인근의 지명들. 차콜라, 오리알라, 브레드보, 번얀, 제랭글, 보번다라 그리고 캘턴 평원, 로키 평원, 드라이 평원. 끝도 없는 황량한 벌판과 띄엄띄엄 흩어진 목초지와 소, 양, 말, 그리고 가축에서 야생화한 생명체들. 예컨대 들개, 들고양이 등등. ‘나’는 이 지명들 속의 한 군데로 보이는 장소에 외따로 떨어진 수도원에 들어간다. 닷새 일정으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지만 이미 신앙을 버렸음에도.


  영국 이민 2세인 ‘나’가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지역의 외곽. 이곳을 떠나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겨울날 오후 세시에, 도착했다. 열 시간이 넘게 운전해 피곤하고 온몸이 쑤신다. 그때는 안 그랬던 것 같았지만 지금 보니 1970년대 요양지나 친환경공동체 같은 느낌이 든다. 35년만에 처음으로 부모 묘지를 찾는 ‘나’. 좋은 기억만 남기고 먼저 세상을 뜬 부모의 무덤가에는 어느 자선단체가 꽂아둔 플라스틱 조화가 이제 낡아 초라하게 보인다.

  북어포와 청주를 올려놓고 재배한 다음 새삼스레 ‘나’를 둘러싼 공간이 너무 막막하게 느껴진 장례식장 장면을 잠시 떠올리다 애초의 목적지인 수도원으로 향한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세금 없이 신자들의 헌금을 수금해 호사를 누리는 바티칸으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해 늘 허덕이는 호주 벌판의 가난한 비구니들의 수도원. 아참, 수녀를 비구니와 함부로 섞어 썼다가 가톨릭 환자들 눈에 띄면 두드려 맞아 돌아가실 수도 있는데 이거 어떻게 하지? 그렇다고 바꾸고 싶지는 않고. 하여간 어떤 수도원인지 짐작이 가시리라. 이제 돈이 들어올 곳이 없어서 옛 수도원 시절에 다른 용도로 쓰던 작은 나무 오두막들을 게스트하우스 비슷하게 개조해서 신자들에게 피정 숙소로 제공하고 약간의, 성의껏 돈을 받아 가계에 보탬을 하는.

  ‘나’가 이곳으로 피정 아닌 일종의 도피처로 삼은 건 이유가 있어서이다. 방문객이 완전한 고독을 원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예배를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거절할 수도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 원한다면 작은 싸구려 플라스틱 바구니와 폐쇄용기 두 개를 식당에 가져가 음식을 받아 오두막에서 혼자 먹을 수 있고 ‘나’는 정말 몇 번 그렇게 한다. 다만 다른 방문객에게도 완전한 고독을 허락하기 때문에 그들의 고독을 방해할 수 있는 소음을 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말이 완전한 고독이지, 정말로 완전한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도 수녀들과 함께하는 저녁 기도에 참석한다. 겁나게 추운 작은 석조 예배실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봉헌성당’이라 부른다. 참석한 수녀는 여덟 명. 휠체어를 타고 온 수녀와 보행기에 의존하는 수녀 포함해 적어도 절반은 상당히 나이가 들었다. 다른 여성 방문객이 두 명 있고, 다음날엔 멋진 바리톤 음색을 가진 남성 방문객도 한 명 있다. 주로 수녀들에 의한 기도문 낭송이 들린다. 일종의 읊조림. 레치타티보 같기도 하고, 틀림없이 가톨릭 장례식 때 단체로 중얼대는 위령기도 즉 연도 같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저 중세 시절의 그레고리안 성가 비슷하겠지. 이게 ‘나’의 관심을 끈다. 딱히 뭐라 할 수 없지만 들을수록 끌리기도 하고, 그러다 끝내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팔자라면 팔자다.

  방문객을 위한 기도서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눈에 뜨인 작은 팜플렛에 기도문이 적혀 있다. ‘나’는 꽤 큰 호기심으로 기도문을 읽는다. 이 악마와, 저 하느님의 적들을 비난하고 멸하자는 내용이다. 내용을 알고나서 들으니 읊조림의 섬세한 리듬이 더 이상 매혹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수녀들의 읊조림일 뿐이다. 섬세한 리듬 이상이 아니며 온전히 육신과 무의식에 관한 것 이상이 아닌. 저녁기도가 끝나고 ‘나’는 제일 나중에 성당에서 나온다. 어둠. 충격적일 정도로 평화스럽다. 저녁은 오두막 찬장에 넣어둔 땅콩 두 종지와 와인 석 잔으로 때운다. 이렇게 첫날이 지나간다.


  다음날은 선잠 끝에 다섯시 반에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휴대폰 신호가 거의 잡히지 않는 저 먼 평원지대의 수도원. 알렉스 한테 짧고 확실한 이메일이 도착했지만 답장할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일곱시 반에 아침기도가 있다. 무엇을 할까? 잠? 결정하기? 알렉스와 내일에 관해서? 울기? 숨기? 독자인 나는 여기까지 와서야 아직 알렉스와의 정식 이혼이 완전히 결정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런 형광들 같으니라고. 울기도 싫고 숨기도 싫어 ‘나’는 아침기도에 참석하기로 한다.

  이어서 아홉 시에 성체성사. 이 사람들, 즉 수녀들은 도대체 언제 일을 끝내는 걸까? 두 시간마다 하는 일을 멈추고 성당으로 달려와 기도하고, 찬송하고, 기도문 중얼거리고, 하루에 한 번 “내가 너희를 위해 흘리는 피의 잔”과 “몸”을 먹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아야 하니 언제 일을 마치는 걸까? 그러다가 깨닫는다. 일을 중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그들의 일이라는 것을. 일의 행함 그 자체. 그러자 기이한 평온에 빠진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고요함이 오히려 급진적, 불법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간 ‘나’의 삶이 어째서였을까?

  중간기도. 두 시간마다 한 번이라 했으니 한 열한 시 정도일까? 여전히 같은 곡조의 성가를 노래하고, 비슷한 음색, 비슷한 중얼거림. ‘나’는 피로를 느낀다. 엄습한다. 깨어있기 힘들다. 중세 느낌의 소리가 이곳 높고 건조한 모나로 평원, 세상 어느 곳과도 동떨어진 장소를 채운다. 여기 있는 일이 마치 어린 시절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너무 길고, 허공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일이 너무 많다. 내게 요구하는 것도 없고 기대하는 것도 전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스러워진다.

  이렇게 드디어 5일차. ‘나’는 가방을 꾸리고, 차에 싣고, 떠나, 다시 열 몇 시간을 운전해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제 숙소를 방문객 오두막에서 수녀들이 사는 울타리 두른 길고 낮은 다른 건물로 옮기고 수녀들과 함께 지내기로 결정한다. 이미 책은 2부로 들어섰다.


  이렇게 무신앙의 나이든 ‘나’는 수도원에서 보살로 살기로 마음먹어, 자리를 잡고 세상을 털어버리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새로운 사건들을 만나고 새롭게 자각하는 기회를 얻는다.

  호주 북쪽은 날이 갈수록 더워지고 건조해져서 그곳에 살던 쥐들이 엄청난 기세로 남쪽 호주로 밀려 내려온다. 차를 몰고 가다가 마치 갈색의 바다처럼 아스팔트를 길게 메우고 있는 작은 털뭉치들. 이것들이 수도원 수녀들의 모든 장소를 메운다. 수녀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쥐를 잡으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결코 없앨 수 없는 정도로 몰려온다.

  다른 하나는 이 수도원 출신의 제니 수녀가 태국에서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위한 사업에 전력하다 그곳을 찾은 신부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신부는 곧바로 자살해버리고 제니는 행불자 처리되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강력한 태풍이 불어 나무가 쓰러지자 나무 뿌리에 걸린 백골로 발견된다. DNA 검사 결과 제니 수녀인 것을 알게 되어 COVID-19의 어려운 환경에서 호주의 수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백골의 제니. 유해를 인도하고 수도원에 도착한 평복 수녀 헬렌 패리. 패리 수녀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 ‘나’와 친구들에게 심하게 따돌림을 받고, 얻어 맞은 후에 학교를 그만둔 과거가 있다. 백골의 제니 수녀와 수도원의 보나벤처 수녀. 그리고 헬렌 패리와 ‘나’ 사이의 과거 해소를 위한 용서 문제. 용서라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용서한 다음엔 용서받은 행위 이전 시절처럼 스스럼없을 수 있을까? 정말? 나는 안 되던데. 읽어보시라. 특히 당신이 가톨릭 신자라면 후회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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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2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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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에 오키나와 나키진에서 태어난 소설가, 단편 작가, 수필가, 활동가. 활동가? 오키나와는 그냥 우리가 일본의 영토라고 알고 있는 섬이지만, 원래는 ‘류큐국’이란 이름의 독립국이었는데 1879년에 메이지 정부가 강제로 오키나와 현에 편입시켜버린 지역이다. 따라서 오키나와 섬 사람들은 자기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은 식민지 조선에서 청년을 징병해 전쟁에 투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키나와 도민들도 대거 제국군으로 징발해 13세에서 15세까지 여학생들은 ‘히메유리 간호병’으로 남학생들은 ‘철혈근황대원’이라 하고, 유일하게 세계대전 중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연합군 상륙전쟁에 투입했다. 군부는 간호병에게, 만일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다면 너희들은 미국 병사들에게 집단으로 능욕을 당한 후 사지가 찢겨 죽을 것이니 포로가 되기 전에 자결을 하는 편이 오히려 편하게 죽는 방법이라 가르쳤다. 정말로 히메유리 간호병들이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자, 이들은 히스테리에 빠져 한 자리에서 수십명씩 자살을 감행해 죽어가기도 했다. 철혈황근대원으로 징집된 소년병들은 정규 전투병력이 아닌 자폭소년단 비슷한 역할을 한 것으로 작품 속에 묘사되었다. 아마 군수품 운반이나 식량 확보, 식수 보급 등 주로 전투외 작업에 투입하지 않았나 싶다. 이외에도 오키나와 사람들은 근대사, 현대사를 거치면서 일본 본토인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계급으로 인식 받았으며 주로 하층민이 하는 일에 종사하는 등 불만이 깊다. 패전 후에는 오키나와 섬에 대규모 미군 기지가 설치되어 갈등이 더욱 깊어졌는데, 마지막 작품 <오키나와 북 리뷰>에도 나오듯이 류큐국의 재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치를 주장하는 그룹과, 픽션인지 팩션인지 헛갈리기는 한데 ‘황태자를 오키나와의 사위로’ 만들자는 구호를 통해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그룹으로 의견이 갈렸던 것 같다.

  책을 읽기 전에 이 정도만 미리 알고 시작하면 읽기가 훨씬 편할 듯하다. 조금 더 알고 싶다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뒤편에 실은 “부록”을 먼저 읽으면 더욱 좋겠다.


  단편 세 편이 실린 소설집. 차례로 <물방울>, <바람 소리> 그리고 <오키나와 북 리뷰>. 세 편 전부 색다른 플롯으로 썼다. 내가 읽기로는 표제작인 <물방울>이 단연 좋았다.

  주인공 도쿠쇼는 오키나와의 나와 지역 시골에서 출신의 청소년으로 2차 세계대전 시기를 통과했고, 미군이 오키나와를 침공할 당시에는 벌써 철혈황근대원으로 징집되어 전투원이 아니라 전령병 임무를 맡았다. 하긴 전령병이라고 해도 명령과 상황보고를 위해 전장을 뛰어다녀야 하는 지역에 오키나와 사람으로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막강한 화력의 미군 함포사격이 펑펑 터지는 골짜기를 뛰어다녀야 했으니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건 아니었다. 철혈황근대. 말이 좋다. 황제의 용맹한 근위대라는 뜻. 그럼 천황은 무슨 천황. 일본 왕이 당시 근위대를 옆에 두고 오키나와 전투를 진두지휘라도 했나? 카미카제처럼 그냥 이름만 멋있게 지어주고 폭탄 하나 들고 가서 적군과 함께 폭사하라는 뜻이다.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 왕? 그저 얼굴마담으로만 있었다. 실제 모든 전쟁은 왕이 아니라 군부 엘리트의 오판으로 진행해서 무참하게 깨져버린 희대의 코미디로 끝났다.

  하여간 도쿠쇼의 부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병사보다 이미 죽은 병사가 월등하게 많아졌고, 생존자 가운데서도 이젠 부상자가 혼자 자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병사가 더 많아졌다. 이 가운데 내지 즉 본토에서 온 마흔 정도 되는 노병도 있었으며, 비슷한 나이의 섬 아저씨도 있었고, 젊디젊은 도쿠쇼 또래의 동네 친구 이시미네도 있었다. 미군은 섬에 상륙하기 전에 진지를 만들고자 하는 곳과 부근의 적군을 싹쓸이하기 위하여 당연히 완벽한 초토화 작전을 벌였고, 함포사격의 범위는 점점 넓어져, 일본군이 이미 전투의지를 상실한 채 숨어 있는 골짜기까지 아예 잿더미로 만들었다. 부상을 당해 심한 갈증으로 물을 달라는 병사들을 위하여 물을 가지러 냇가로 간 도쿠쇼와 이시미네 한테도 폭탄에 눈이 달린 게 아니어서 큼직한 폭탄이 떨어져, 도쿠쇼는 괜찮았는데 이시미네의 배에서는 돼지를 잡아 배를 가르면 튀어나오던 것과 비슷한 뭉글뭉글한 느낌의 무엇이 쏟아졌다. 도큐쇼는 급하게 자기 각반을 벗어 임시로 이시미네의 배에 둘러주고 그를 데리고 피신처로 돌아왔지만 기다리고 있는 건, 더욱 깊은 골짜기의 굴로 피신하라는 명령뿐.

  짧게 하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어서 도쿠쇼는 이시미네를 지금 있는 동굴에 두고 자기만 다음 집결지로 향해야 했다. 근데 이게 나머지 평생의 큰 짐이 될 줄 그때는 몰랐지. 이때 자기한테 다음 피난지를 알려준 히메유리 여성 간호병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후에 집단 자살에 동참하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그냥 일반 소설하고 비슷하다. 도쿠쇼는 이후 술이 늘어갔고, 삼선이라는 오키나와 전통 악기를 사 만날 음주가무에 날 새는 줄 모르는 파락호 생활을 하다가 세 살 많은 우시라는 왈가닥 살림꾼을 만나 결혼하고, 하늘이 도왔는지 무자식 상팔자의 행운을 누리며 늙어왔다.

  그런데, 작품을 시작하자마자 이게 문제였다. 이제 시작이냐고? 그럼 여태까지는 뭐냐고? 에라, 그냥 간다. 작품을 시작하면 제일 먼저 도쿠쇼의 다리가 탱탱 붓는다. 동과처럼 부었다고 하는데, 동과, 박 종류. 그냥 길게 둥그런 큰 박을 생각하시면 된다. 동과처럼 크고 탱탱하게 부은 다리는 색깔까지 동과처럼 초록 비슷하게 변하고, 엄지발가락 끝에서는 물이 똑, 똑 떨어지기 시작한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고 점점 악화되어 이젠 움직일 수도 없다. 의사들도 원인을 모른다. 발가락 끝에서 떨어지는 액체를 채취해 가져가 조사를 해봤더니 그냥 물이란다.

  며칠 후, 자정이 되면, 새벽 다섯 시, 해가 뜨는 시간까지, 놀랍게도 수십년 전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이 험한 모습을 한 채 방에 들어와 도쿠쇼의 발가락을 쪽쪽 빨아먹는다. 발가락을 먹는 게 아니고 떨어지는 물방울을 마시고 있는 것. 알고 보니 그게 치유의 액체였던 모양이다. 사촌동생이자 천하의 파락호인 세이유라고 있었는데, 이이가 우연히 발가락 물을 찍어 먹었다. 그랬더니 몸이 좋아지고 십여년 간 내내 6시 반을 유지하던 그것도 불쑥 11시 5분 정도는 되는 거다. 머리에 발라보니 5분도 되지 않아 솜털이 진한 흑발로 변한다. 이 정도면 왜 이미 깊은 상처를 입어 죽은 병사들이 밤마다 몰려드는 지 아시겠지? 세이유는 물을 모아 비싼 값에 팔아 수백만 엔을 모으고, 병사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도쿠쇼의 방에 몰려와 인당 2분 정도 도쿠쇼의 발가락과 발바닥을 물고 빤다.

  이 과정에서 병상의 도쿠쇼는 앞에서 설명한 전투 장면을 연상하고, 그때 동굴에 두고 혼자 죽게 했던 이시메네에게 진정한 사과를 할 기회가 있어서, 그렇게 했다. 그럼 어떻게 됐을까? 이제 병사들도 거의 정상적으로 치유된 모습으로 변했고, 드디어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날로 도쿠쇼 역시 벌떡 일어나 “차카게 살자!”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날마다 술타령과 음주가무에 전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고, 신비의 물을 사 마시고 젊음을 되찾았던 사람들은 한 순간에 원 위치, 떼로 몰려가 파락호 세이유를 두드려 패버린다.


  내가 옮기기를 번잡하게 옮겨서 그렇지, 단편일지라도 이렇게 우화적인 플롯으로 쓴 작품은 실로 오랜만에 읽는다. 심지어 마지막에 실은 <오키나와 북 리뷰>는 독자의 서평을 싣는 잡지의 리뷰를 선별해 옮긴 플롯인데, 진짜 책을 읽은 서평이 아니라 가상의 책에 대한 서평이다. 어디서 본 거 같지? 스타니스와프 렘의 《절대진공 & 상상된 위대함》에서 벌써 경험해본 플롯이다. 그러나 메도루마의 가상 서평은 오키나와의 극단적 두 주장의 충돌과 진행을 묘사하기 위하여 각 분량이 짧아서 더욱 쉽게 읽힌다. 뭐 그렇다고 큰 재미가 있다는 말은 아니고. 오히려 두번째로 실린 <바람소리>가 더 내 취향이었다.

  굳이 시간을 내 읽어보실 만하다. 직접 돈 주고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라는 말까지는 아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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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5-11-24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게 엄마가 사둔게 있네요!!!!!!

Falstaff 2025-11-24 15:37   좋아요 1 | URL
이크, 그러면 얼른 읽어보셔요. 열반 쌛도 나쁘지 않게 읽으실 듯.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5-11-24 21: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게다가 엄마가 이번에 지와 사랑을 다시 좋게 읽으셨다고 해서 제가 골드문트란 고전 뽀개기 전문가 할아버지가 계신데요 하고 소개해드렸습니다 ㅋㅋㅋ
 
나폴레옹 놀이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박종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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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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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지난 달이다. 크리스토프 하인의 <처음부터>를 생각 밖으로 재미있게 읽어 곧바로 도서관 관심도서 목록에 넣었다가 읽은 책. 아뿔싸. 근데 서간체 소설이다. 나는 서간체 소설 싫어한다. 재미있게 읽은 책이 없다. 저 멀리 몽테스키외의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부터 새무얼 리차드슨의 <파멜라> 그리고 추밀고문관 괴테가 쓴 불후의 명작이라 일컫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까지 뭐 재미있게 읽은 책이 책/작품이 없다. <나폴레옹 놀이>도 마찬가지. 처음엔 그것 참 서간체라도 괜찮네, 싶었는데, 이 책이 2008년에 나온 것이라 요즘 책과 비교하면 글씨가 빽빽하게 박혀 있고, 서간체라서 A가 B한테만 늘어놓는 독백이라 흔한 대사 한 마디 없는 상태로 본문이 263쪽까지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일지언정, 이게 백페이지를 넘어 화자의 과거 소년 시절부터 변호사로 번창하기까지 과정이 끝나고, 자신이 저지른 나폴레옹 놀이에 관한 변설이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니까, 아무리 말빨 좋은 크리스토프 하인의 문장이라도 이건 뭐 숨이 턱턱 막히는 건 물론이고, 도대체 이 양반이 지금 무슨 주장을 하는 지, 앞뒤 따져볼 엄두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안다, 알아. 20세기 문명에 관한 독특한 문명/문화 비평이란 건. 그것도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다. 삶은 놀이, 독일어로 Spiel, 영어로 하면 game을 그냥 ‘게임’이라 번역하지 않고 내나 ‘놀이’라 해서 우리나라 독자들이 게임, 이라고 할 때보다 조금 가벼운 느낌의 우스개 장난 비슷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임과 편지를 쓰는 변호사 ‘나’도 삶은 게임이라고 여긴다. 삶이 게임? 돈 또는 돈과 비슷한 무엇을 걸고 하는 게임. 또는 놀이.

  돈을 걸고 하는 게임이면 도박? 인생은 도박. 인생이 도박이라고?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먹으며 섰다 도박을 하는 꼬마 여자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이외수의 단편 제목이 뭐였더라? <고수>? 아마 그 작품에서 나오는 말일 거다. 인생이 도박이라고? 인생을 도박만큼 진지하게 열중해서 살면 실패할 인생이라곤 없을 거라고. 딱 이렇게 말한 게 아니라 이 비슷한 취지로 쓰여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거 읽을 때가 대학 다닐 때였나 그랬는데, 그럴듯하네 싶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 책에서 주인공은, 오직 돈을 따기 위하여 놀이, 즉 게임을 하면 그건 하수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나폴레옹.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하여간 바다 건너 영국 빼고 유럽 대부분을 포식한 나폴레옹은 쳐들어가면 깨질 것이 분명한 데도 불구하고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했다고 단정한다. 지겠지만 이길 수도 있다. 다만 확률이 무지하게 적을 뿐. 수하 장군들조차 적극 만류했던 러시아 침공. 거의 최초로 파리를 향해 대포를 쏴 권력을 차지한 나폴레옹 자신도 알았으면서도 러시아로 진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인생 자체가 놀이, 게임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었던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건데, 그래도 그렇지, 아군 적군 합해서 무려 40만 명을 귀신으로 만들었던 전쟁광을 세상 사람들은 너무 과하게 칭송해왔던 건 아냐?


  주인공이자 살인죄 피의자로 법률적인 심리 절차를 밟고 있으며, 당연히 유치장에 구속 중인 ‘나’가 자신의 변호인 피아르테스에게 보내는 편지 두 통이 작품의 전부이다. 첫번째 편지 한 통이 무려 245페이지에서 끝난다. 그러니 얼마나 지긋지긋하겠어? 에필로그로 볼 수 있는 두번째 편지는 20페이지 분량에 미치지 못하니까 껌이고.

  하여간 ‘나’가 기억하는 첫번째 놀이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프리더 뵈를레 사탕공장’에서 시작했다. 공장엔 사장인 아버지를 빼고 18명의 종업원이 있었고, 이 가운데 16명이 여자였다. ‘나’는 외동아들. 엄마는 아빠가 벌어오는 돈으로 슈테틴 사교계에서 깃발을 날리는 귀부인으로만 지내고 싶어해 ‘나’를 하녀, 유모에게 맡겨 놓아 ‘나’는 자동적으로 응석받이로 자랐다. 아버지는 ‘나’를 아들이라기보다 공장의 후계자로 대하고자 하는 눈치여서 ‘나’는 1주일에 한 번씩 매주 수요일마다 공장을 방문했다가, 생산 현장도 순시하는 척했다.

 생산직원 여자들은 ‘나’를 사장의 외아들이라 ‘아기씨’라고 불렀는데, 11살, 12살이 돼도 마찬가지였다. 말이 12살이지 우리나이로 하면 열셋, 열넷 정도. 중학교에 입학해 배꼽 12cm 아래엔 벌써 솜털이 빠지고 짙고 검은 털이 돋을 때다. 시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직원들 대부분은 전쟁 과부이거나, 남편이 참전했다가 지금 다시 독일로 터덜터덜 걸어서 퇴각 중이거나, 벌써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노동 수용소에서 노역 중이거나, 다 자랐지만 남자가 없어서 결혼을 하지 못한 노처녀였는데, 1년 안에 슈테틴을 점령할 소련군에게 아마도 대다수가 강제 능욕을 당할 운명이었을 걸?

  ‘나’가 생산실에 들어가 짐짓 어떻게 일을 하고 있나 ‘참관’하는 시늉을 하면 제일 먼저 소피아 여사가 아기씨, 하고 ‘나’를 불러 무릎 위에 앉힌다. 말만 아기씨고 정말 기회만 있으면 진짜 아기의 씨를 뿌릴 수도 있을 법한 총각 놈을 무릎에 앉히면, ‘나’는 처음엔 무릎 끝에 엉덩이만 댄 것처럼 앉아 있다가 조금씩 뒤로, 뒤로, 즉 소피아의 몸 쪽으로 밀착해, 여자의 숨결과 냄새와 말랑말랑한 살의 감촉을 만끽하는 거였다. ‘나’가 1932년 8월생이고 1945년 3월 이전의 일이니까 만 12세, 거의 다 큰 ‘사내새끼’인 걸 여공들은 몰랐을까? 천만의 말씀. 그렇게 소피아의 무릎에서 비비적거리고 있으면, 조금 지나 옆에서 컨베이어를 타고 흘러오는 초코릿을 포장하던 테레제가, 아기씨 이제 이리 오세요, 하고 인터셉트를 한다. 이어서 마리아. 마리아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유일한 직원이어서 유난히 말랑말랑해 ‘나’의 입장에서 제일 죽여줬고, 4번타자인 게르티는 절대 몸을 기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 결혼하지 않아 다 큰 애하고 몸을 비비적거리기 싫었던 모양이다. 브리기테, 힐데, 요제피네, 요한나… 일과가 끝나면 지하실에 있던 목욕실에 함께 가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 욕탕으로 들어가던 그녀들. ‘나’도 욕탕 안까지 들어가거나 커튼 사이로 훔쳐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나? 이것이 ‘나’가 기억하는 첫번째 놀이, 장난, 게임, Spiel이었다.


  여기까지는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으로 여길 수 있겠지.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이제 다른 나라의 땅이 된 슈테틴을 떠나 1945년 튀빙겐의 티펜오르트에 도착한 후에는 달라진다. 7월, 한 시절 사교계의 잘 나가는 마담이었던 어머니는 이곳에서 심근경색으로 한 많은 세상 하직하고, 목재공장 지배인으로 취직했던 아버지마저 생계형 범죄로 해고당한 후, 전에 튀링겐 우표 판매소를 하던 남자의 과부댁을 꼬드겨 결혼에 성공한 이후 이제는 장난이 아니다. 계모에겐 아들이 하나 딸려 있었는데 ‘나’보다 두 살이 적지만 덩치도 크고 완력도 만만하지 않아 상대를 겨룰 만했다. 근데 얘가 머리도 좀 있어서 (나중에 명문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할 정도로) ‘나’를 골탕 먹이고 곧바로 계모한테 달려가 위기 탈출에 성공했다. 언제나 그랬다. 그리하여 열을 잔뜩 받은 ‘나’는 아버지의 넥타이 세 개를 가위로 조각조각 내 나무에 걸어 놓고 시침을 뚝 뗀다. 누가 봐도 ‘후레자식’이라 칭하는 계모의 아들이 잘라놓고 죄를 ‘나’에게 덮어 씌우는 것처럼 연기 또는 놀이에 성공한 ‘나’. 후레자식은 밥 먹다 아버지한테 오지게 귀싸대기를 얻어 맞고, 이어서 계모한테도 야물딱지게 귀싸대기를 파박, 얻어 터지고 이후 집에서 찍소리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이어서 동쪽 독일에서는 대학 입학 허가가 나지 않아 서쪽 베를린에 가서 대학에 입학해 법을 전공해 법학박사와 변호사 자격을 따는 일. 서쪽으로 넘어온 아버지와 계모가 사는 촌동네에 가서 변호사 개업을 하는 일, 다시 베를린으로 와서 크게 성공을 하는 일. 이건 모두 생략. 딱 여기까지가 재미있다.


  변호사인 ‘나’는 백만 마르크를 초과하는 부를 이루었다. 변호사 직을 유지한 채 정치에 뛰어들어 이젠 거국적인 놀이를 펼쳐 언제나는 아니지만 줄곧 이기는 편이었다. 더 올라갈 곳이 없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그리하여 남은 것이라고는 숙명적으로 질 것임을 감지하면서도 러시아를 침공하는 나폴레옹처럼 이기지 못할 놀이에 도전하는 것. ‘나’는 수년동안 놀이의 상대를 물색해, 드디어 찾아냈고, 그를 지하철 동베를린 지역에서 죽여버린다. 이래서 책을 열면 변호사 ‘나’가 변호사 피아르테스에게 자신의 살인이 결코 범죄가 아니라 일종의 정당방위라는 걸 설명하기 시작한다. “정당방위란 외부의 위협과 내면의 위기로 유발된 대안이 없는 상황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즉 놀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의 살인도 정당방위라는 거.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건 차마 못하겠다. 그게 결론이라서. 서간체 소설을 좋아하기만 하면 대박일 텐데, 하여간 나는 앞에서 말한 딱 거기까지만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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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1-2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뽈스타프님두 싫어하는 장르가 있군요! ㅎㅎ 것두 서간체 소설...ㅎㅎ
저두 별루이긴하지만 유르스나르의 알렉시는 정말 인상깊게 봤습니다..ㅎㅎ
크리스토프 하인의 <처음부터>를 찾아봐애 겠군요! 그게 더 제 취향일 듯합니다. ^^

Falstaff 2025-11-21 15:2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알렉시>는 서간체라기보다 2인칭 소설로 보심이 어떠신지요.
 
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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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야 욘 포세를 읽는다. 1959년 노르웨이 Haugesund(스칸디나비아 발음 자신 없어 알파벳으로 표기함)에서 경건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포세는 10대 시절에 <보트하우스>의 주인공 화자 ‘나’처럼 록 기타리스트의 꿈을 키웠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이후 연주 대신 작곡과 작사에 몰두하는 십대 시절을 보냈다. 베르겐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해 1990년대초부터 전업작가의 길을 걸은 소설가, 극작가. 2023년에 노벨상을 받아 한 방에 세계적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나도 이전까지 포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 자칭 히피로 지내면서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 경건주의 가정의 일원. 어린 시절 사고로 인한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성격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책 딱 한 권 읽었을 뿐이지만, 그랬을 거 같다. 2023년에 하도 선풍적 인기를 끌던 작가라서 열풍이 좀 죽은 다음에 읽기로 마음먹게 했던 작가. 이제 김 좀 빠진 거 같아 읽었다.

  책 판권을 보니 초판이 2020년. 그러니까 이이가 노벨상을 받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소개가 됐던 작가였다. 아뿔싸. 스칸디나비아 반도 출신의 작가들은 대개 폭력, 엽기 살인, 범죄, 스릴러, 기업간의 암투 같은 소설만 쓴다는 선입견에 푹 젖어 있어서, 아마도 포세의 이름을 책등에서 발견했다 해도 아예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지냈을 거 같다. 그러나.

  욘 포세는 202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같은 노르웨이 작가 프로데 그뤼텐은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를 써서 2023년 브라게 문학상을 받았다. 공통점은 빙하가 녹은 골짜기로 바닷물이 들어와 생긴 깊고 좁은 해역을 일컫는 피오르 해안을 무대로 한, 사람과 죽음의 이야기라는 것. 분위기는 놀랍도록 흡사하다. 주인공들의 연령대와 직업, 가족 구성과 친구들이 완전히 다르더라도 피오르 해변을 둘러싸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착 가라앉은 저기압 같은 과하게 차분한 분위기. 자연이 이래서 상당히 오랜 동안 스칸디나비아 반도 주민들의 자살률이 세상에서 제일 높았었나 싶었다. 우리나라가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이기는 하지만.


  <보트하우스>는 시작부터 지독한 반복으로 점철됐다.

  “나는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불안감이 엄습하여 나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이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은 바로 지난 여름이었다. 나는 적어도 10년은 보지 못했던 크누텐과 다시 마주쳤다. 크누텐과 나, 우리는 늘 함께였다. 내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p.8)

  이 불안감은 신체적 이상으로도 표시가 되는데, 왼팔과 손가락이 쑤시는 증상이다. 화자 ‘나’는 이 불안감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특별하게 하는 일 없이 시민무도회 같은 곳에서 기타리스트로 나이든 지역 중학교 교사 토르셸이 아코디언 연주에 반주를 맞춰주면서 몇 푼씩 벌기도 했다. 그것 말고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오고, 어머니 대신 장 보고, ‘나’의 방인 다락방에서 몇 장 되지 않는 음반을 듣고, 책도 읽으며, 가끔 배를 타고 피오르에 가서 낚시를 했다. 물론 요리는 어머니가 했다. 어머니? 그렇다. 서른 살이 훌쩍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산다. 어머니의 영토는 1층의 침실과 거실과 주방과 식당 등이고 ‘나’는 2층에서 별 일 없으면 나가지 않는다. 책에는 한 마디도 없지만, 이렇게 사는 건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게 아니라 “늙은 어머니에게 얹혀 사는 것”이며, 이런 형태를 캥거루 증후군이기도 하고, 히키코모리라고도 하는 형태와 매우 유사하다. 수입의 대부분은 어머니가 매달 받는 연금으로 충당하니 더욱 그러하다. 어머니는 연금을 받고, 장 보고, 음식을 만들고, 전기료, 전화요금 등 고정비용을 지불하고, 집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나’의 옷을 세탁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대부분의 시간은 투덜거”린다고 불만이다. 한 마디로 ‘나’는 마이너리티다. 아예 집 밖에서 독자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 피오르 지역에서 나가본 적도 없다. 여행도 싫어한다는데 정말 싫어하는 건지, 여행할 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둘 다일 수도 있다. 연애? 한 번의 사정을 위하여 원나잇 같은 걸 해본 적은 있겠지만 심각한 사랑하고는 인연이 없다.


  지난 여름에 적어도 10년 만에 만난 친구 크누텐과는 늘 함께 했던 친구 사이다. 열 살을 넘기자마자 죽이 맞아 록 밴드를 결성하기로 마음먹고 정말로 실행에 옮기려고 애쓴 ‘나’와 크누텐. 청소년회관의 젊은 관리인 한테 마이크 스탠드로 사용할 수 있는 낡은 전시대를 선물 받아 그것을 둘 공간을 찾던 중 피오르 가에 방치된 보트하우스가 생각나 그곳으로 무거운 전시대를 가지고 갔던 것도 ‘나’와 크누텐이었다. 보트하우스에서 오래되어 삭아버린 면 그물을 조각내 포대 안에 쑤셔 넣어 소파를 만들어 아지트로 삼기도 했던 곳. 그러나 여간해 찾아오지 않던 성질 고약한 거구의 늙은 스베이넨 씨, 동네 과수원과 보트하우스의 주인으로 자기 과수원에서 사과나 배를 서리하다 잡히기만 하면 거의 반죽음을 만들어 놓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스베이넨 씨가 갑자기 보트하우스의 문을 열어 그가 다시 돌아갈 때까지 먼지 가득한 어두운 구석에서 숨을 참으며 숨어 있던 기억까지 공유한 친구.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피오르를 떠났다. 대학을 졸업해 음악교사가 되었으며, 한갓진 피오르 지역의 기준으로 치면 대단한 미모를 지닌 아내와 결혼해 두 딸을 두었다. ‘나’는 그가 피오르를 떠난 이후 지난 여름에 처음 다시 만날 때까지 십년 동안 보지 못했다. 어릴 때 나를 떠난 친구. 소리쳐 불렀지만 그냥 몸을 돌려 가버렸고, 돌아왔을 때는 음악교사였으며, 더 이상 연주는 하지 않았고, 아름다운 여자의 남편이자 예쁜 두 딸의 아버지였다. 그를 만난 이후에 ‘나’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일상적 일을 하지 못하기 시작했으며 왼팔과 손가락에 쑤시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불안감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어, 지금 쓰고 있는 거였다.

  지난 여름 이후 ‘나’는 스스로 다락방에 갇혀 있다. 전에는 장도 보고, 도서관에 가서 책도 빌려 오고, 배 타고 피오르에 나가 낚시도 하고, 가끔 청소년센터에서 열리는 무도회에서 토르셸 이중주단의 일원으로 연주해주고 적지만 돈을 얻기도 했지만 이제는 다락방에서 불안감을 다스리기 위하여 이 글만 쓰고 있다. 전에 어머니는 ‘나’더러 “너도 직장을 알아봐야지, 기타를 퉁기며 다락방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잖니.”라고 말했으나, 지금은 “너는 글 쓰는 걸 당장 멈추어야해. 그래야 나가서 장도 봐 오고, 어디라도 다녀야지 이렇게 어떻게 살겠니.”라고 말한다.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동안 투덜거린다.


  지난 여름에 책을 빌리려 가는 중에 십년 만에 크누텐 가족을 만났다. 반가웠을 거 같지? 크누텐의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았다. 음악교사를 하는 크누텐은 이제 아내와 두 딸이 있다. 교사라는 직업이 휴가가 길다. 그러나 알려진 좋은 휴가지에 가서 오래 지낼 만큼의 보수는 받지 못한다. 그것보다는 일단 숙박비와 체류 고정비의 상당액을 어머니에게 덮어 씌울 수 있는 고향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하지만 다 좋지는 않다. 십년 이상 전혀 연락이 없다가 단박에 기억 속의 친척, 친구, 이웃을 만나야 한다. 십년 전의 관계는 휘발되었거나 여전히 남아 있어도, 그렇다고 기억을 끄집어 내기도 쉽지 않다. 관계라는 것이 언제나 좋았던 건 아니니까. 그누텐은 고향 사람들을 만나는 게 반갑지 않다. 어린 시절 정말로 록 밴드를 만들어 주말마다 이곳저곳의 청소년센터 강당을 빌려 공연을 하고, 맥주를 마시고 담배도 피우다가 여자 애들도 만나던 때, ‘나’와 함께 어울린 또래 여자들도 마찬가지.

  크누텐의 아내가 남편의 생각과는 달리 ‘나’를 집에 초대한다. 이날 저녁 때가 되자 ‘나’는 배를 타고 피오르에 나가 낚시를 하러 가면서 크누텐의 집 근처 쪽으로 둘러 간다. 아마도 크누텐의 아내가 창에서 ‘나’를 본 거 같다. 크누텐의 아내는 노란 우의를 입고, 옆집의 플라스틱 재질로 만든 배를 빌려 ‘나’의 배 옆으로 온다. ‘나’는 커다란 대구 한 마리를 잡았지만 대구가 얼마나 힘이 좋은지 배 선창에서 튀어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조금 후, 이번엔 크누텐의 아내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대구를 낚아챘고, 어쩔 줄 모른다. ‘나’는 그녀를 도와 대구를 잡고, 숨통을 끊은 다음 몸에서 피를 뺀다. 안 그러면 대구가 상할 수 있어서. 이제 돌아가려 할 때, 크누텐의 아내가 피오르 안에 솟은 작은 섬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보자고 제안한다. 그걸 받아들여 ‘나’와 그녀 단 둘이 아무도 없는 외딴 섬에 오르고, 이 광경을 저 멀리 해안가에서 크누텐이 지켜보고 있다. 저 섬엔 아무도 살지 않는데, 둘이 저곳에 무엇을 하러 들어가는 걸까? 크누텐은 속이 뒤집어진다. 부부는 좋은 관계가 아니었고, 크누텐은 조금의 의처증 비슷한 편집 증상이 있었으며, 아내의 초청을 받아 집에 들른 ‘나’와 아내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의심했다.

  그해 여름에 크누텐을 십년 만에 만난 후에 불안감에 휩쓸려 신체적으로도 왼팔과 손가락이 쑤실 정도인 ‘나’. 불안감을 다스리기 위하여 글을 쓰게 되었지만, 다락방에 갇혀 집 밖으로 여간해 나갈 수 없게 되는 일. 길고 긴 낮과 길고 긴 밤이 지속되는 땅. 얼음처럼 차갑고 깊지만 좁은 바다를 둘러싼 지역. 여름이라도 싸늘한 바람과 인적이 드문 외진 동네. 그런 이야기.

  나는 잘 읽었다. 읽은 다음에 스마트폰의 책읽기 앱 북적북적에 별 네 개 반을 평점으로 매겼다. 그러나 조심하시라. 취향 차이가 독자마다 심할 책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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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1-20 2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헉! 욘 포세~~~
인용한 문장만 봐도 멜랑콜리아의 문장들이 연상되네요...ㅋㅋㅋ
어후야~~~ㅎㅎ

그나저나 뽈스타프님은 욘 포세를 계속 읽으시겠습니다! 별4개면...
별5개도 분명히 취향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오래된 빛>은 완전히 대실망이었거든요~~ㅎㅎ

Falstaff 2025-11-21 05:0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오래된 빛>에 실망하셨으면 포세도 힘드실 거 같은데요.
휴대폰 앱에는 별 넷반이라니까요. 다섯은 아무래도 과하다 싶어 넷에서 멈춘 겁니다.
<멜랑콜리아>에 비하면 문장이 아주 순한, 순하디 순한 맛입니다!

yamoo 2025-11-21 10:19   좋아요 0 | URL
포세는 절대 안 읽을 거에요...절대!!

Falstaff 2025-11-21 15:27   좋아요 0 | URL
저도 ˝앞으로는 안 읽을 것이다,˝라고 하도 여러번 말했다가 부도를 낸 바람에... 디킨스, 워튼 같은 사람이요, 야무 님 다짐도 반 만 믿겠습니다. ㅎㅎ
 
흥분이란 무엇인가 대산세계문학총서 144
장웨이 지음, 임명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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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생은 잔나비띠라서 그런지 재주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중국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라, 중국인도 마찬가지인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까운 산둥성 퉁커우시에서 출생한 장웨이도 그랬던 거 같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 인민은 끊임없는 도취적 이상국가로의 전진사업에 희생되었다. 대약진운동, 반우파운동,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정점을 이룬 문화혁명. 장웨이도 유소년 시절에 이 과정을 거쳤다. 옌롄커, 위화 등 이 또래 많은 작가들이 이 시절, 그리고 이후의 천민자본주의의 해일 속 생존담을 작품화 했다. 그러나 이 책 《흥분이란 무엇인가》는 다르다. 아예 도시생활 징면을 볼 수 없다. 저 다싱안링 산맥과 하얼빈 일대를 무대로 잔잔하게 사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츠쯔젠을 읽고 중국 소설에 이런 작가도 있었구나, 하고 놀랐던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장웨이라는 좋은 작가를 알게 되어 마음이 흡족했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쓴 단편소설 스무 편을 실은 소설집. 평소 제일 신뢰하던 대산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책이라 관심이 있었지만 제목 《흥분이란 무엇인가》 때문인지 선뜻 손을 대지 않게 되던 책. 아주 오래 머뭇거렸건만 왜 이 책이 내가 은퇴한 이후에 내 돈을 내고 구입한 첫번째 책이 되었는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뒷방으로 물러난 이후에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으로 산 유일한 책이 《흥분이란 무엇인가》이다. 사 놓고 몇 년 만에 읽었다. 마음이 기껍다. 내 마음에 차는 책을 골랐고, 국민연금을 받기도 전에 사서, 책장 속에서 적당히 묵혔다가, 느즈막하게 꺼내 읽어도 좋을 만한 책이라서. 옌롄커나 위화 과가 아니다. 츠쯔젠과 더 비슷하다. 츠쯔젠이 다싱안링 산맥과 하얼빈에 집중했다면, 장웨이는 역시 자기 태가 묻힌 산둥성 룽커우 지역을 흐르는 강 루칭허(蘆靑河)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이 책의 많은 작품이 루칭허 하류와, 강이 바다에 이르는 연안 해역, 그리고 해변지역을 무대로 한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서로 어울려 사는 모습.


  무엇보다 지방색이 풍부하다. 오랜만에 도시적 냉정과 투쟁성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작품들을 읽으니 마음도 편안해진다. 당연히 사람 사는 일이라 이들 사이에도 시기도 있고, 질투도 있고, 자잘한 싸움도 있으나, 내가 그동안 읽은 중국 50~60년대 작가들의 주요 활극처럼 독하지 않다. 자연의 폭력 말고 사람 간의 폭력도 없고, 따라서 살상이나 능욕 같은 자극적인 장면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말로 사람 사는 일 같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좀 지난 스타일”처럼 읽힐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전쟁 이전의 순수문학처럼. 그동안 얼마나 강박한 세월을 지내왔는지, 아무리 오래 전 스타일이라 할지언정 이런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 가지고도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지는지. 이 정도 이야기했으니 책과 책에 실린 작품들의 성격을 짐작하실 수 있을 터.

  장웨이는 산둥성 룽커우 시의 가난한 집, 아니면 한 시절 소지주라고 불리는 가정에서 태어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고무공장 현장직원으로 일하며 습작을 시작했다. 작품을 보면 아마 (조)부모가 소지주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어릴 때부터 책을 볼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나이가 좀 차니, 반우파운동 같은 것에 치여 부모는 물론이고 자신도 동네 또래들에게 욕을 듣고, 구타도 당하고 했던 것 같다. 그의 학력은 후에 사농(四農)연합중학과정을 마치는 것으로 끝난다. 이후, 농農 자가 들어가는 중학을 졸업한 이력으로 포도원과 조림지 또는 다른 농업과 어업 관련 일을 했는데, 이때의 경험을 1980년 이후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 중요한 문학적 경험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 사는 게 다 그렇다. 다 좋을 수 없는 것처럼 몽땅 나쁠 수도 없다.

  1980년에는 옌타이 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산둥성 자료관에 근무해 처음으로 ‘펜대’ 잡는 직업을 얻는다. 이 전에도 습작과 단편을 창작하여 교내지 같은 곳에 발표했으나, 1981년에 이 책에도 실린 <대추나무 지킴이> 같은 작품 등으로 산동문학창작상을 받으면서 조금씩 이름을 알린다. 이어 82년에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전업작가로 나서며 본격적인 프로 작가의 길을 걸어온 소설가.

  대표작으로 10권에 달하는 장편소설 <그대는 고원에>를 들지만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되지는 않았다. 분량 때문에 접근성이 만만하지 않아 쉽게 번역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어신을 찾아서>가 있다. 동네 도서관에 내가 희망도서 신청해 한 권 비치되어 있다. 이 단편집 《흥분이란 무엇인가》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장웨이라고 해서 루칭허 하류의 강변과 해변을 무대로 한 지방 사람들의 순박하고 자연적인 삶만 노래하지는 않았겠지. 다만 이 책은 그런 작품들만 모은 소설집이다. 《흥분이란 무엇인가》. 기회가 닿으면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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