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에이션 루트 - 2024 제17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마쓰나가 K 산조 지음, 김은모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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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쓰나가 K 산조, 일본 사람이 자기 이름 가운데 알파벳으로 K를 삽입한 건 무슨 이유가 있을까? 그냥 궁금할 뿐 알고 싶은 건 아니다. 아, 일본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마쓰나가’는 필명으로 자기 친척의 성씨를 따온 것이고, K는 작가의 중간 이름이면서 친척들이 이 K 이니셜 이름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냥 넣은 모양이다. 산조는 할아버지, 즉 직계 성이란다. 그러니까 이름만 가지고 이 작가의 생물학적 성을 확인할 수 없다. 일본 위키피디아를 읽으면 더욱 헛갈린다. “데뷔 당시 그녀는 회사 직원이었지만”이라는 정보와 “2025년 4월 1일 그녀는 고향의 홍보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라는 말이 있어서 굳세게 여성인 줄 알았는데, “그의 필명 마츠나가는 운운” “그는 순수문학을 자유롭고 운운”해서 궁금증을 유발했다가, 위키피디아가 아니라 구글 사진을 찾아보면 턱 밑에 거뭇한 수염 자국이 있어서 변기 솔 비슷하게 생긴 턱수염을 짧게 기르고 다니는 남성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하여간 1980년에 이바라키현 미토시에서 출생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관세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2021년에 부조리 희극 소설을 써 군조 신문학상 우수상을 받아 데뷔해, 2024년에 <베리 산행> 즉 <베리에이션 루트>로 아쿠타가와 상을 받아 상장과 부상으로 회중시계와 현금 백만엔을 받아 작심을 해서 2025년 봄에 비장한 마음으로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하여간 위키피디아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현재 마쓰나가 K 산조는 “독자들이 순수문학의 ‘재미’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순수문학을 홍보하는 운동으로 ’오모로이 순수문학 운동’을 옹호했다”고 한다. 문장의 서술어가 “옹호했다” 과거 시제니까 지금은 마음이 바뀌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별 관심은 없지만.

  일본도 고민은 고민이겠다. 독자들이 순수문학의 재미를 알게 만들기 위해서 별의 별 운동, 활동을 해야 할 정도라면. 내가 지금 괜찮은 일본의 현대소설작가를 찾는 일이 무척 힘들 수도 있겠고.


  작품의 주인공은 일인칭 화자 ‘나.’ 이름은 ‘하타.’ 작품은 일인칭 시점으로 쓰였으나 독후감은 편의를 위하여 삼인칭으로 쓰겠다.

  하타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단 작은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일을 배웠다. 이후 곧 대형 리모델링회사에 입사해서 10년 근무하는 동안 남보다 특별할 건 없지만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을 정도라고 자평했다. 오히려 실적으로 보면 자기 또래 직원 가운데 우수한 편이었을 텐데, 3년 전에 회사가 조금 어려워지자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에 올랐다. 부서 과장이 점심시간에 하타에게 밥을 사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회사에서 사람을 고르는 것에는 업무실적보다 상하 직원들과 좋은 관계를 이루어 갈 수 있는 사회성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아프게 깨닫는 계기가 된다. 하필 정리해고를 당한 시기가 갓 결혼해 아내가 임신 말기에 접어들었을 때라 회사의 조치가 더욱 서운했겠지.

  하타는 아내에게 잘렸다고 얘기도 못하고, 미국에서 사는 사촌형에게 넉두리를 해, 마치 여전히 직장에 나가는 것처럼 정식 월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비슷하게 몇 달 지원을 받으면서 대기업에 네 번 입사지원서류를 보내 네 번 연속으로 미역국을 먹은 다음, 지금 회사 ‘닛타 테크 건축도장’ 영업과에 입사했다.

  직원이 50명 정도 있는 닛타 테크 건축도장은 옥상 방수공사, 외벽 도장 등 건물 외장 보수 전문회사라고 보면 된다. 작은 규모의 고객으로부터는 직접 주문을 받아 원청 일을 하고, 큰 규모의 고객한테는 주문을 딴 회사로부터 하청을 받아 일을 했다. 하타가 일하는 영업1과는 큰 공사의 수주와 관계되는 업무를 취급하고, 영업2과는 회사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해오던 작은 고객을 위한 업무를 맡았는데, 아무래도 큰 규모의 공사와 자금이 왔다갔다 하는 1과 직원들이 2과 직원들을 좀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회사 안에서는 우리가 직장에 다니면서 흔하게 부딪힐 수 있는 자잘한 파벌 같은 것이 있다. 초대 사장 시절부터 일을 해온 후자키 상무 쪽. 전임 사장과는 다르게 혁신적으로 사업을 재편해 보다 확실한 기업을 만들려는 조금 허황한 욕망이 가득한 초대 사장의 조카이자 2대 사장. 그가 영입한 간부들 진영. 대강 아시겠지? 이런 건 대기업보다 이 회사처럼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 더 심한 법이다. 즉 보수파의 지도자 정도였던 후자키 상무가 회사를 퇴직하기 1년 정도 전에, 정년퇴직한 후에 촉탁 직원으로 근무하는 등산경력 20년 이상의 마쓰우라 씨가 꽃피는 봄을 맞아 사내 인트라넷에 “’등’골 빠지는 일상에 ‘산’행으로 힐링을”이라는 하이쿠 비슷한 2행시 메시지를 올려 “봄철 롯코산 등산”을 제안해 등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에 10년 다닌 회사에서 사회성 여부로 정리해고를 당한 경험이 있는 하타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생겨 회사의 거의 모든 모임에 빠지지 않으려고 작정을 한다. 작 후반에 회사가 어려움에 빠지자 다시 실직을 당할까봐 회사의 모든 파벌에 한다리를 걸치는 일도 서슴지 않을 예정이니 어찌 등산모임에 참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리하여 참가하기로 신청하고, 첫 모임 장소에 가보니 자기 혼자 초심자 티를 팍팍 내고 말았다. 입고 온 복장부터 그러했다. 마쓰우라 씨 이하 하타를 뺀 모든 참가자는 보기에도 벌써 비까번쩍한 아웃도어 옷과 등산화와 장비 등 모든 구색을 갖추어 괜히 주눅이 들게 만들었다. 이후로 일반적으로 산행 도중과 산행 후, 정상 또는 능선에서 본 고베 인근 풍경과 몸의 적당한 피로와 개운함, 몇몇이 모여 들이켠 하산주, 같은 소소한 즐거움이 나열된다.

  그러다 정식 산악회가 회사 동아리로 자리잡고, 산악회 고문인 후자키 상무의 퇴임 기념 산행에서 처음으로 모임에 모습을 보인 전문적인 산꾼이자, 베리에이션 등산을 고수하는 영업2과의 40대 중반 메가 씨가 나타나 작가가 원했던 베리 산행, 정식 등산 코스가 아닌 개척 루트로 산을 탐험하는 일을 독자에게 소개하기에 이른다.

  메가 씨는 특별한 자격증도 없이 공사과에서 다년간 방수 관련 일을 해 회사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녔음에도, 일 말고는 도무지 직원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직원간 삼겹살에 쇠주 한 잔은 물론이고 부서 회식에도 참석한 일이 한 번도 없을 정도이다. 직원 단합대회 형식의 행사에도 얼굴 한 번 비친 적 없으니 말 다했을 정도. 올드 스타일로 회사 살림을 꾸려 나가던 후자키 상무의 퇴임 기념 산행이라 그간의 정을 봐서 함께 가기로 한 모양인데, 메가는 여기서도 별 말이 없다. 이후 상무는 일정에 맞춰 회사를 떠나고, 회사는 젊은 사장의 뜻에 맞추어 점점 불안한 환경으로 꼬나 박히거나 그런 것처럼 보인다. 

  닛타 테크 건축도장의 직원들 사이에서 정리해고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 회사 분위기가 극도로 뒤숭숭해졌을 때, 하타는 메가 씨에게 함께 베리 산행을 하게 해줄 수 없느냐고 부탁해서 깨끗하게 거절당한다. 하지만 며칠 후에 메가 씨가 직접 하타에게 산행을 권유해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베리에이션 산행을 하면서, 죽을 고생을 해가며 오히려 메가와 회사에 대한 반감만 키우게 되는데, 물론 이대로 끝나지는 않는다. 굳이 베리 산행과 사람 사는 문제가 적절하게 믹스되면서 작품을 마무리하겠지?

  그렇다. 그렇게 된다. 어차피 사람들이 모르고 살지만 인생은 베리에이션 산행, 개척 루트를 통해 마지막까지 가는 거니까. 큰 재미는 없지만 자잘하게 사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소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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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벨로 2 ㅣ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43
솔 벨로 지음, 김현우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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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편의 중단편이 실린 현대문학이 발간한 세계문학단편선 시리즈 43번째 책. 솔 벨로를 위하여 현대문학은 두 권의 단편집을 마련했다. 단편집 두 권 발행은 프랜스시 스콧 피츠제럴드하고 밸로, 딱 두 명의 미국인뿐이다. 벨로가 그만큼 미국 현대문학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작가라는 뜻일 수도 있다.

  벨로는 작품 속에서 철학적인 주제를 선택해 독자들의 골을 뽀개는 수도 있고, <비의 왕 핸더슨>처럼 인류학 전공자답게 자기 전공을 십분 살린 경우도 있지만, 역시 나를 비롯해 많은 독자들을 그의 팬이 되게 만드는 건 유대계 미국인들이 미국 영토 안에서 자기들 커뮤니티가 생존해나가는 것, 유대 공동체의 특성과 이의 해체 과정을 그린 것이 많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최근에 류드밀라 울리츠카야가 쓴 750쪽짜리 장편소설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을 읽었고, 일 주일이 채 되지 않은 터울로 《솔 벨로 1》과 또다시 《솔 벨로 2》를 연달아 읽다보니 이젠 유대인 이야기가 지긋지긋해지더란 것. 또 있다. 패트릭 화이트의 두 권짜리 장편소설 <폭풍 한가운데>에도 멸절 수용소 이야기가 나온다. 아오, 진짜, 언제까지 이 거대 비극을 읽어야 하는지. 이 소설집 《솔 벨로 2》가 틀림없이 《솔 벨로 1》보다 읽기 좋았고, 재미있었으며 더욱 공감할 수 있었음에도, 머리 속에서는 자꾸 이스라엘의 테헤란 폭격과 이로 인한 하메네이 폭사로 시작한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 그리고 팔레스타인 학살의 가장 무거운 국제 범죄를 진 나라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당연히 전 세계에 분포해 사는 유대인들 대부분은 선한 사람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유대인이 선하다는 건, 1930년대 중반부터 40년대 중반까지의 독일인 대부분도 선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선한 대부분의 유대인과 독일인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학살과 전쟁을 시작하고 전개할 수 있는 소수의 특별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있는 독일인과 유대인들. 그들 때문에 연달아 두 권이나 솔 벨로의 작품집을 읽는 동안, (소수의, 특정한,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유대인들이 범하고 있는 범죄를 별개로 하고 책을 읽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말이 나온 김에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그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난하는 의미에서 모스크바를 떠나 독일 땅에 체류하고 있다. 울리츠카야는 매해 일정 기간동안 머무르고 있다는 이스라엘의 폭격기가 테헤란을 폭격해 민간인까지 사망하게 만든 전쟁에는 어떤 의견을 피력했는지, 아직 듣지 못했다. 아모스 오즈는 이미 죽어 말을 할 수 없겠지만, 오즈와 함께 팔레스타인에서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의 공생을 주장하던 다비드 그로스만은 2025년에 라 레푸블리카와의 인터뷰에서 유대인에 의한 가자기구 집단학살에 관한 비판 소식까지 들었다. 즉 아직까지 나는 유대인이 저지른 대 이란 전쟁에 대한 유대인의 유감표현이나 비판이나 종전요구를 듣지 못한 상태에서 연달아 유대인 작가들의 자기들 사는 이야기, 그것도 보스턴과 뉴욕 중산층과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들의 사는 모습에 공감하면서 읽어주기가 쉽지 않았다는 말이다.

  특히 이번 단편집 《솔 벨로 2》는 좋은 작품으로 꾸민 괜찮은 책이라는 것을 시비할 이유가 1도 없으나, 행간에 스민 유대인들의 삶과 지난 날의 피학살 같은 피해의식에 이제는 그리 깊게 공감하지도 못하겠고, 공감하고 싶지도 않다는 거다.

  다시 한 번 분명히 한다. 대부분의 유대인이 선한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들의 선함은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일과 전혀 관계가 없다. 특정의 특별하고, 권력을 잡은, 유대인이 결정하고 시작했으며 여전히 진행중인데다가, 오히려 더 전쟁을 확대하고 싶어하는 전쟁범죄. 그들은 독일의 나치 집단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미국 내 유대인 공동체 이야기가 도무지 귀에 차지 않았다. 과거에 경험한 대규모 피학살을, 그걸 전세계적, 전 역사적인 면죄부로 써먹는 족속. 그게 유대인인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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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톈우의 수기 ㅣ 묘보설림 12
솽쉐타오 지음, 박희선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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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솽쇄타오. 한자어를 우리말로 발음하면 쌍설도雙雪濤 선생. 1983년 랴오링성의 성도 심양에서 태어나 지린대학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지만 판검사, 변호사가 되지 않고, 중국개발은행에 취직해 근무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다가 2010년에 아파트 계약금이 부족해 ‘중국어 세계 영화 소설상’에 <날개 달린 귀신翅鬼(시귀)>를 급하게 써서 응모했다가 장원을 먹는 바람에 엉겁결에 등단한 작가. 이때의 조강지처는 얼마 가지 못해 이혼하고 지금은 작가인 둘째 아내 장위란張悅然과 산다. 아마 베이징에서 살 거 같다. 이이의 작품 상당수가 TV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었으니 돈 좀 벌지 않았겠나. 아니면 말고.

  한 번 터진 상복은 연달아 터져서 2012년에는 장편소설 <녹아 사라지는 도시>를 써서 타이페이 문학상 연금부문을 수상하는 세 명의 제안자로 선정되어 20만 타이완 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여기서 잠깐. 세 명의 선정자들은 1년 동안 작품을 써서 세 작품 가운데 하나가 최종 문학상 수상자가 되어 다시 40만 타이완 달러를 추가 상금을 받는 제도이다. 책방이나 출판사 광고를 읽어보면 마치 솽쉐타오가 당선자인 것처럼 읽히게 작가 소개를 써 놓았는데 굳이 순위를 정하자면 영광의 공동 은메달 수상자라는 말씀. 하여간 졸지에 적지 않은 상금을 챙긴 솽쉐타오는 마음을 다져 먹고 일찌감치 전업작가로 나선 존경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선례를 밟아 잘 다니던 중국개발은행에 사직서를 써 던지고 본격적인 전업작가의 길로 접어든다. 근데 이게 소위 신의 한 수. 이후 쓰는 족족 베스트셀러요, 곧바로 TV 드라마로 만들거나 영화로 해보자는 제안을 받기 시작했으니 입꼬리가 귀에 걸리게 생긴 것.

  하여간 이때 20만 타이완 달러를 받게 해준 작품 <녹아 사라지는 도시>를 책으로 출간했을 때의 제목이 바로 <형사 톈우의 수기>이다.


  왜 위 문단에서 “존경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썼느냐 하면, 쇤네가 무라카미의 작품을 거의 읽지 않는다는 걸 감안하면 굉장히 어색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솽쉐타오가 무라카미 상さん을 흠모해 마지않았다고 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도 무라카미가 쓴 <1Q84>에 헌정하는 마음으로 쓴 거 같다. 두 개의 달이 뜨는 평행 우주는 아니어도,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공간과, 중화인민공화국 S시와 타이완의 타이페이 시라는 장소의 공간이 평행하게 놓여 있으며, 결국 이 세 공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주인공 리톈우가 <1Q84>에서 두 세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주인공 푸른 콩靑豆, 아오마메와 비슷한 처지이다. 즉 디테일에서는 다르지만 전체 플롯을 감안하면 <1Q84> 없이 <형사 톈우의 수기>가 나오기는 쉽지 않았을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리톈우는 노동자 부모를 둔 서른 살 먹은 청년. 부모는 3층 높이는 될 정도의 큰 기계를 조립하는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근검절약하고 정부시책에 맞추어 아들 톈우 하나만 낳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아끼면서 살다가, 아버지가 슬슬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게 되면서 술만 마셨다 하면 아내와 아들을 두드려 패고, 집안의 돈이라면 그게 몇 푼이건 간에 무조건 들고 나가 술로 바꾸어 인생을 탕진하기 시작했다. 어린 톈우는 다른 건 몰라도 성실 하나는 확실하게 타고 나, 천재급은 아니지만 학업에 노오오오오력을 해서 반에서는 줄곧 1등, 학교 전체에서도 3등 안에 드는 우등생으로 자라,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S시에서 제일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해 2학년까지 마쳤다. 3학년 들어 학급에 (오래 전에는 ‘학습지진아’라고 했는데) 부진아 여학생 안거(安歌)가 들어와 톈우의 옆자리에 앉으면서 일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한다. 이걸 다 설명하자면 끝도 없어서, 하여간 둘은 의지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기로 약속, 아니, 맹세를 하는데, 바로 다음날 안거가 실종되면서 톈우는 평생 안거를 찾는 데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안거를 가장 효과적으로 찾기 위하여 톈우가 선택한 건 경찰. 안거 때문에 거의 바닥까지 곤두박질 친 톈우는 실종사건 이후 곧바로 성적이 수직 상승해서 오히려 눈높이를 낮추어 경찰학교에 지원해 수석합격한 것으로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하여간 경찰학교 수료과목 거의 전부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뛰어난 형사가 된다. 경찰학교를 수석합격에 최우등 졸업한 유능한 형사. 그래. 중국 형사들이 나오는 소설에선 항상 비슷하더라고. 수석 입학을 하던, 수석 졸업을 하던 간에 무조건 신출귀몰한 포도청 순사가 되는 거 말이지.

  그런데 이 비범한 형사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베테랑 형사가 있었으니 이름을 장부판張不凡이라고 했다. 장부판은 톈우처럼 청렴하지는 않지만 S시의 거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숨은 실력자이면서, 사법과 정의의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근본은 사법질서의 수호자이니까 쉽게 부패 형사 정도로 매도하면 섭섭한 인물. 사실이 그렇다. 이름부터 그렇지 않은가? 不凡. 평범하지 않음. 이이는 톈우에게 세 가지를 훈시한다.

  첫째. 모든 사고는 전부 서둘러서 생기는 것. 둘째, 총알은 내가 장전한 만큼 있는 것이지 몇 개가 있어야 한다는 건 헛소리. 셋째, 경찰학교 학생 냄새를 빨리 빼 버려야 몇 년이라도 더 살 수 있음. 그리고 기타 한 가지를 추가하기를, 좋은 경찰한테는 총알이 필요 없음. 그렇다고 아예 장전하지 말라는 건 아님. 멋있지? 소설에서 베테랑 형사들은 늘 그렇다.

  그런데 사법과 범죄에 다 달통한 장부판에게는 당연히 적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땅 넓이만큼 다양한 악당들이 모인 중국에서도 최고 수준의 흉악범을 덮치려 잠복해 있는 장부판과 그의 조수 톈우. 이때 누군가 차창을 똑똑 두드린다. 범죄자. 창을 내리자 하는 말이, 추운데 들어가서 기다리시지요? 오히려, 그리고 드디어 이들이 범죄자에 의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이른 순간이다.


  갑자기 눈을 뜨니 타이페이 거리. 허리에는 그의 권총이 채여 있다. 톈우는 권총을 자신이 체면을 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긴다. 물론 잠깐 그렇다는 뜻이다. 리톈우 앞에 나타난 18세에서 19세로 보이는 여자 아이. 샤오주小久라고 부르면 된단다. 그런데 톈우가 보기에 샤오주의 뺨 위에서 어렴풋이 진실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서 의문. “진실하지 못한 부분”이라는 표현이 문제인데, 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 때문에 독자는 샤오주 자체를 허위, 범죄자, 거짓말장이 같이 보게 된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샤오주는 조금도 허위와 거짓이 없는 소녀이다. 딱 하나. 정신과 적인 병도 아니고, 피부병도 아닌데, 자신이 흐려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정말로 조금 흐려져 있는 상태이다. 이 흐려지는 상태는 앞으로 더욱 심해져 불과 며칠 사이에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다. 마치 <1Q84>에서 아오마메가 고가도로 비상구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가면서 차원을 통과하는 것처럼, 자신의 신체가 서서히 흐려지다가 사라질 예정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톈우가 특정 호텔의 409호에 묵고 있는데, 샤오주는 바로 옆방인 411호에 짐을 푼 상태. 그러니까 일종의 운명이랄까 인도자, 책 속에서는 ‘사장’이라고 일컫는 인물, 기독교의 하느님과 비견해 조금도 꿀리지 않을 막강한 능력의 소유자가 미리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고, 나중에 짐작하게 된다. 하여간 톈우와 샤오주는 서로가 서로를 도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로 약속을 하는데, 샤오주는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자기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 사진첩에 남기는 일을 도와달라고 하고, 톈우는 사장한테 받은 지시, 타이페이에서 101 빌딩보다 더 높이 솟은 교회를 찾는 걸 도와달라고 한다.

  세상에나. 101 빌딩이 타이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건 다들 아실 터. 꼭대기에서 번지 점프를 하면 그렇게 재미있다고 하덜 안 혀? 근데 그 빌딩보다 더 높이 솟은 교회가 있다고?


  하여간 나는 이렇게 세 가지의 우주를 설명해 놓았다. 이것들이 어떻게 긴밀하게 얽혀 있는지 찾는 일은 직접 해보시라. 시간 죽이는데 맞춤인 소설책. 더 이상은 크게 바라지만 않으면 충분하게 만족할 만하겠다. 아, 한 가지 더. 시간 죽이기 좋다는 말 듣고, 야한 장면 바라지 마시라.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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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유령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최용준 감수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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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의 제일 뒤에 “블라네스 1984”라고 작품을 쓴 장소와 연도가 쓰여 있다. 그런데 책은 2016년에 나왔다. 볼라뇨는 2003년에 바르셀로나에서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니 죽은 다음 14년 만이고 작품을 완성하고 부터는 무려 32년 만이다. 즉 사후 출간한 초기 작품이라는 뜻. 나는 이런 작품은 믿지 않는다. 볼라뇨가 <SF의 유령>을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마음에 들었거나, 돈을 받고 독자에게 팔 수 있는 상품이라고 봤다면 죽기 전에 벌써 책방에 깔려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면 작가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더 수정해야 할 미완성 작품으로 여기다가 눈을 감았겠지. 끝내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미완성인 채 남겨둔 작품. 몇 번 이야기한 거 같은데, 나는 대가들의 사후 출판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근데 왜 읽었느냐고? 볼라뇨니까. 도서관에 책 있으니까 읽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볼라뇨의 시집 말고 소설책은 다 읽고 싶다. 품질을 떠나서 몽땅. 팬이라면 그럴 수 있는 거잖아?


  작품의 주인공은 칠레인은 칠레인인데, (볼라뇨처럼)아옌데 대통령을 참살하고 피노체트가 정권을 잡자마자 칠레를 떠서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두 명의 청년 한 슈레아와 레모. 한은 SF 소설을 습작하고 있고, 레모는 아방가르드 시를 쓰려 한다. 이들은 멕시코시티 외곽의 엘리베이터 없는 녹회색 8층 건물의 8층에 살며, 최고층 주민의 특권으로 당연히 옥상도 거의 소유한 것처럼 보인다. 나중에 레모의 친구들이 함빡 놀러 와 옥상에서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짝을 이루어 화장실에 들어가 할 거 다 하고, 밤그늘이 제법 어두운 구석에 가서 서로를 실컷 더듬는 등 난장판을 벌이기도 한다.

  레모는 176cm의 키에 청바지, 파란색 티셔츠 차림으로 아메리카에서 가장 긴 거리의 갓돌 위에서 햇살을 맞으며 서있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그는 함께 칠레에서 도착한 룸 메이트 한에게 말한다.

  “나는 신문 문예란의 시평을 담당하는 스타 기자가 될 거야.”

  반면에 한은 죽자사자 SF 소설에 관심을 두고, 전세계, 특히 미국에 몰려 있는 SF 소설 작가들에게 끊임없이 팬레터를 보낸다. 한은 삼시 세끼 때문에 하루에 한 번 정도 식료품점에 가는 것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집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레모에게 시 창작교실에 다녀볼 것을 권유한다. 그리하여 출석하기 시작한 곳이 등단 시인 헤레미아스 모레노의 시 창작교실. 이곳에서 만난 멕시코 사내 호세 아르코. 기름에 찌든 청바지에 검은 가죽 부츠 차림의 낯선 사내. 그러나 헤레미아스가 비록 겉으로나마 예의를 차리는 될성부른 떡잎이었으며, 작품이 진행되면 레모와 함께 아방가르드 시 동인을 만들려 하는데, 이때 독자의 머리에 딱, 떠오르는 또다른 볼라뇨의 소설, 심지어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 그 책에 나오는 내장사실주의, 1920년대 멕시코 아방가르드 시 창작 소 그룹.

  이것을 눈치채는 순간 <SF의 유령>은 재미없어진다. 놀랍게도 한 순간에 그렇게 되더라.

  이제 스물한 살이 된 레모와 한은 멕시코 젊은이들과 어울려 시를 궁리하고, SF 소설을 쓰면서 앞에서 말했듯이 한쪽으로는 여자와 섹스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등장하는 여자들도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유사하다. 특히 나이든 노파 ‘에스트레이타’마저. 에스트레이타는 생활고에 허덕이는 늙은이면서도 젊은 아가씨 테레사, 앙헬리카 토렌테와 어울려 카페에 앉아 있다가 레모를 따라 나치의 군복 색깔과 똑 같은 녹회색 건물까지 동행해, 술 마시고 그냥 떨어져 자 버리기도 한다. 이 늙은이(와 비슷한 여성 인물)도 다른 볼라뇨에서 여러 번 본 적 있다.

  그래서, 아니겠지만, 볼라뇨에게 <SF의 유령>은 훗날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쓰기 위한 스케치였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비단 <… 탐정들> 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작품에서 몇 차례 등장한 사람들이 모인 듯한 기분. 볼라뇨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독일인 아르침볼드가 나오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니까, 말 다했지. 하여간 대가의 사후 출판 작품은 조심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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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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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드 창. 단 두 권의 중단편집으로 세계만방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중국계 미국인 과학자이자 소설가. 《숨》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출간하고 17년만인 2019년에 낸 두 번째 소설집으로 모두 아홉 편의 중단편소설을 실었다. 책 두 권의 터울이 무려 17년. 그래서 두 권의 작품 속 분위기는 무척 다르다. 만일 누가 내게 어떤 책이 더 마음에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숨》이 더 흥미롭고 사색적이었다고 단박에 대답할 거 같다.

  그러나 아쉽게도 책을 읽으며 단 한 줄의 메모도 하지 않아, 3일이 흐른 지금 독후감을 쓰려 하니 막막하다. 아홉 편 모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개별적으로 특정 작품마다 어떤 식으로 인상 깊었다고 짚어서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읽은 즉시 써야 하거늘 하필이면 그날 오후에 두부부침에 소주와 맥주를, 다음 날엔 생선구이에 소주를, 그 다음 날에는 또 불고기에 소주와 맥주를 퍼 마셔, 오늘 아침에야 겨우 랩탑을 꺼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아무래도 알코올 의존증이 점점 심해지는 거 같아서 걱정이다. 나도 술 끊고 싶다고!


  아홉 편의 중단편 가운데 호오好惡… 호오? 좋고 나쁨? 그런 거 없다. 전부 다 좋다. 그래서 호오가 아니고 좋아하는 정도가 제일 컸던 작품을 고르라고 한다면, 내 주제에 결정해서 말하기 힘든 조건이지만, 표제작인 <숨>과 마지막 순서에 실린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을 두고 한 두어 시간 책상 위에 손가락만 톡톡 두드리고 앉아 있을 거 같다.

  하지만 책을 열자마자 처음으로 읽을 수 있는 단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부터 쇼크는 시작한다. 이 짧은 단편의 분위기는 여지없이 <아라비안 나이트>. 다음 날 새벽이 밝아오자마자 언월도의 칼날에 목이 댕거덩 날아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생글생글 웃으며 칼리프한테 옛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는 셰헤라자드의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가 아니라, 푸와드 이븐 압바스라는 이름의 바그다드 상인이 연금술사 바샤라트를 만나 경험한 일을 아뢰는 내용인데, 그게 놀랍게도 시간여행, 타임머신, “백 투더 퓨처” 이야기다. 우리는 그동안 H.G. 웰스가 19세기 말에 <타임머신>을 발표한 이후 숱하게 다양한 버전의 시간 여행 이야기를 읽고, 보고, 관람해왔지만, 아마도 주된 이야기는 주인공의 불운한 현재를 바꿀 수 있는 과거의 행적을 수정한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작가 복거일이 쓴 <역사 속의 나그네> 역시 마찬가지. 주인공 이언오는 26세기에서 5백년 전인 21세기로 날아온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하는데, 기계의 오류인지 또다시 5백년 전인 16세기 말 조선에 불시착하니, 임진왜란이 터지기 10년 전. 처음 16세기에 도착한 이언오는 자신의 행동과 소지품 때문에 시간에 흔적을 남겨 시간줄기가 변형, 기존의 역사가 바뀌게 될 수 있음을 충분히 이해해서 그냥 곱게 죽기를 원하는 걸로 시작한다. 즉 시간 여행으로 과거 원인이 바뀌면 미래의 결과 역시 바뀐다는 것이 그동안의 타임머신 작품들의 공통점이었는데, 테드 창은 이런 개념에 반대한다.

  테드 창, 강봉남姜峯楠 씨는 보다 나은 현재 또는 행복을 위하여 과거를 수정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충분히 동의를 하지만, 백 번 과거를 바꾸어 보아도 결코 현재는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20년 전으로 돌아가 한 변곡점에 충격을 주어 시간 줄기를 흔들어봤자, 20년이라는 세월이 시간여행자가 원하는 대로 시간줄기가 흐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건, 변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이 그렇게 비극적인 건 아니라는 점이다. 누가 알아? 더 비극적 처지로도 빠져버릴 수 있었는지.

  그런데, 이런 면에서 읽으면, 과거가 어땠는지 인생은 미리 정해진 경로를 따라 갈 뿐이라는 운명론과 만날 수밖에 없다.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어서 인간은 그냥 그대로 걷게 디자인되어 있는 걸까? 그것 참. 나는 모르겠다. 이젠 별로 관심도 없다. 슬슬 도가 트기 시작하는 거 같다.


  두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인 <숨>이, 이 책에 실린 것들 가운데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SF 아닌가 싶다.

  “공기 혹은 아르곤이라고 불리는 기체가 생명의 원천이라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작품은 이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르곤? 원자번호 18번. 내가 배울 당시에는 원소 주기율표의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불활성 기체”라고 배웠는데 요즘엔 “비활성 기체”라 하는 모양이다. 발음 상 조금 문제가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농담이다). 어쨌든 다른 원소와 거의 반응하지 않는 기체라서 높은 순도를 유지해야 하는 산업 기계에 많이 사용한다. 불활성 기체 가운데 공기 중에 가장 흔하다. 즉 가격이 저렴해 그나마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비활성 기체.

  문제는 이런 아르곤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설정. 이쯤 되면, 즉 물이나 산소가 아니라 불활성 기체가 생명의 원천이라는 가정이라면, 이 생명체가 탄소를 기반으로 하는 유기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어야 했다. 그러면 뭘까? 뭐긴 뭐야, 무기 생명체, 즉 인조인간 로보트? 또는 지능을 가진 외계 생명체. 아니면 스타니스와프 렘 식으로 기계가 스스로 진화해 발생한 기계 생명체. 어느 것이라도 무방하다. 이 생명체 역시 허파 호흡을 한다. 그러나 호흡의 방식은 유기 생명체와 다르다.

  “우리는 매일 공기를 가득 채운 두 개의 허파를 소비한다. 매일 가슴에서 빈 허파들을 꺼내 공기를 가득 채운 허파들로 교환하는 식으로 말이다.”

  마치 잠수부가 등에 짊어지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 산소통을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게 가슴 속에 두 개가 있어서 매일 아르곤 가스가 만땅 채워진 허파로 교체해주어야 한다니 독자는 초장부터 “우리”가 기계 등의 무기 생명체라는 것을 알아챘어야 마땅하거늘. 강봉남 씨도 독자를 헷갈리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를 계속 “사람”이라 칭하는 바람에, 뭐 변명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숨>의 핵심은 기계 인간의 생존 방식이 유기생명체인 진짜 인간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점. 그러니까 태드 창은 아르곤을 생명의 원천으로 하고, 몸체를 이루는 로드rod 사이에 어떤 윤활 물질도 필요하지 않은 기계를 통해 사람들의 생존과 소멸에 관해 사색한 결과물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이자 화자 ‘나’인 무기 생명체, 스스로 진화한 기계 생명체, 또는 로봇일 수도 있는 해부학자 ‘나’는 발견한다.

  “내가 매일 새로운 허파 한 쌍으로부터 끌어내는 공기의 양은 내 팔다리 관절과 내 주위의 대기에 내가 더하는 공기의 양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중략)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는 이 우주의 압력 평형화에 기여하고 있다. 생각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치명적인 평형상태의 도래를 촉진하고 있는 것이다.” (p.78)

  운동/열 에너지를 말하고 있는 듯한데 자신의 운동과 생각을 포함한 에너지의 소비와 허파를 통한 보충이 서로 평형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간다는 의미. 근데 평형이란 건 뭘까? 정지. 그리하여 평형상태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이걸 발견한 ‘나’는 어떻게 했을까?

  “다른 상황에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거리로 뛰쳐나갔겠지만…” (p.78)

  생각나는 옛 사람 한 명 생각난다. 퍼뜩 진리를 깨닫자 욕탕에서 벌떡 일어나 알몸으로 거리를 내달리며 이렇게 외쳤던 사람.

  “유레카!”


  테드 창은 SF 소설 작가로 이름을 높였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테드 창, 강봉남 씨를 SF 작가로 국한시킬 수 있을까, 국한시켜야 할까를 생각해보았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몰라도 이 책 《숨》은 비록 SF의 외피를 입었어도 삶과 인생과 인간에 대한 진지한 에세이를 읽는 듯했기 때문이다.

  독후감 초장에 얘기한 마지막 수록 작품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 대표적이다. 프리즘. 백색광을 투과하면서 빛이 분산해 여러가지 색으로 변하게 하는 삼각기둥처럼 생긴 거. 여기서 방점은 빛이 굴절하며 얼마나 굴절하는지에 따라 다양하게 분산한다는 것인데, 테드 창은 이걸 ‘평행공간으로의 이주로 가게 할 수 있는 매개물 또는 장치’로 해석했다.

  이 작품이 내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세상의 70억명 모두 개별적으로 다양한 평행우주 또는 평행공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걸 곧이곧대로 그냥 평행우주/평행공간이라 생각하는 것도 재미겠지만, 삶과 인간에 대해 생각할 거리로 여겨도 의미있는 생각할 거리가 될 수 있다.

  이런 생각 거리가 이 책 《숨》에 가득하다. 편마다 숙고와 사색의 흔적이 들어 있으니 이 작가가 두 번째 책을 17년 만에 낸 것도 일견 이해할 수 있을 터. 이이는 SF 작가라기 보다 과학 철학자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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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10-05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봉남 씨라 하니 ㅋㅋㅋ 되게 친근하게 순박하게 느껴지네요. 저도 테드 창 소설은 경이롭다, 수준이더라고요. 복거일 소설 한번 읽어볼까요?

Falstaff 2026-10-05 17:58   좋아요 0 | URL
앙드레 김 선생이 팍 떠오르지 않으셨어요? ㅎㅎㅎ 저도 재미있는 이름이라서 그냥 넘기기엔 아깝더라고요. (악취미이긴 한데 재밌잖아요.)

꼬마요정 2026-10-05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다 좋았어요!! 강 씨였군요. 중국 발음으로 강이 창이군요. 저는 테드 창 하면 어느 순간부터 영화 <극한직업> 창식이 오정세가 생각나요. ㅎㅎㅎ

Falstaff 2026-10-05 17:58   좋아요 2 | URL
넵. 저도 테드 창, 하면 무조건 오정세였습니다. ㅋㅋㅋㅋ

얄리얄리 2026-10-06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SF를 좋아하는 편인데,
아주아주 개인적인 생각으로 저한테는 ‘SF다운 책‘ top3에 들어갑니다.

Falstaff 2026-10-06 17:52   좋아요 0 | URL
아, 그러시군요. 충분히 공감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