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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2 - 영웅의 시대 ㅣ 그리스 신화 2
로버트 그레이브스 지음, 안우현 옮김, 김진성 감수.해제 / 알렙 / 2023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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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2부작의 두번째 책.
이제 올림푸스 산에서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만 먹고 마시는 신들은 스토리의 뒤편, 아니면 배경에서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인간들의 싸움만 뒤에서 조정하는 단계이다. 즉 그리스 시대의 역사를 신의 개입이라는 측면으로 설화화 혹은 전설화한 스토리들.
이 책의 목차는 따라서 <오이디푸스의 방랑>, <아! 헤라클레스>, <황금 양털과 메데이아> 그리고 <트로이아 전쟁>으로 이루었다. 이 네 가지 주제는, 서양 문학을 읽으면서 숱하게, 말로만 숱하게가 아니라 정말로 숱하게 들었고, 들을 때마다 검색해봤고, 다시 들으면 또다시 검색해서 이제는 미주는 당연하고 각주 단 것도 쳐다보지 않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러니 어땠을까? 읽는 내내, 본문만 647쪽인데, 지겨워 미치거나,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그리하여 도서관 열람실에서 《그리스 신화 2 ― 영웅의 시대》를 다 읽고 책 덮은 시간이 오전 11시 10분. 다른 때 같았으면 새 책 시작했을 텐데, 그냥 퇴근해버렸다.
― (흠. 낮술 중)
좋다. 술 다 깼…나? 이렇게 말하면 좀 병맛이겠지만, 나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퀼로스,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를 읽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신화 또는 영웅담을 대충은 꿰고 있었다. 이번에 영웅 이야기를 읽으면서 영웅담의 다양한 버전을 새롭게 아는 기회가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 한들 그게 뭐가 대수랴,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신화, 전설, 설화인데 뭐. 내가 낳고 자란 고향이 크레테, 소아시아, 발칸, 그리고 그리스 일대라면 혹시 모르겠다.
애초에 그리스 영웅담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이 있는데,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테세우스 등 불굴의 영웅들의 이야기가 거의 비슷하다는 거. 이중 대표적인 것이 기둥에 묶인 채로 바다괴물을 위한 희생으로 바쳐진 여인, 당연히 무지하게 예쁜 여인을 구하는 내용. 나는 헤라클레스의 경우엔 찌질한 에우뤼스테우스의 열 가지, 사실은 열두 가지 명령을 수행하는 일에만 집중을 했는지 잘 알지 못했는데, 헤라클레스 역시 포세이돈이 보낸 바다괴물 앞에 보석 장신구만 걸친 채 완전한 알몸으로 트로이아 해안가 바위에 묶여 있는 헤시오네를 구출한 일을 이번에 알았다. 이건 일찍이 페르세우스가 나무 기둥에 묶여 바다괴물이 일용한 양식으로 사용할 예정인 안드로메다를 구출한 일의 판박이 아니냐는 말이지.
그레이브스는 이것을 시리아와 소아시아에서 흔히 전해오는 이야기를 차용한 것이라 설명한다. 그곳에서는 마르두크라는 영웅이 있어 여신 이슈타르가 뿜어 놓은 바다 괴물 티아마트를 물리치는 모습인데, 마르두크는 여신을 바위에 사슬로 묶어 제압한다고. 괴물 티아마트는 마르두크를 꿀꺽 삼켰으나, 사흘 뒤에 마르두크가 괴물의 이를 뚫고 돌아온단다. 헤라클레스도 괴물이 덥석 물어 꿀꺽 삼켰지만 배 속에 내려가 몽둥이와 창으로 난도질을 해 괴물을 죽인 다음에 다시 식도를 타고 올라와 입을 열고 나와 헤시오네를 구했다. 페르세우스가 안드로메다를 구출할 때는 그런 번거로운 작업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레이브스는 이러저러한 증거 또는 단서를 나열하면서 주인공들의 기본 주민등록지가 다를 뿐이지 사실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테세우스를 같은 영웅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취지로 설명한다.
근데 이 책을 읽으면서 기중 허걱, 하고 놀란 일은 파리스가 헬레네하고 눈이 맞아 야밤에 배를 타고 스파르테에서 도망친 일이 “오직 환영”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단언한 일이다.
으아, 이거 진실이야? 일찍이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파리스 앞에서 파리스야, 파리스야,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황금사과를 주는 일이 아예 없었다고? 그럼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세 개의 사과, 아담의 목에 걸린 사과, 뉴턴의 사과는 진짜이고, 트로이아 전쟁의 시초라고 일컫는 사과는 구라일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작품 <헬레네>가 진실이었던 거야?
(그거 아시나? 파리스가 누가 예쁜지 판정하기 위해서 여신 셋을 홀딱 벗겼다지 뭐야! 그땐 털의 모양과 색깔도 미의 기준이다네?)
사실 헬레네한테는 남편 메넬라오스가 유일한 남자가 아니었다. 처음에 어쨌든 처녀 딱지를 뗀 건 아테나이의 바람둥이 영웅 테세우스였고, 두번째가 정식으로 결혼한 메넬라오스였으며, 세번째가 파리스이었는데, “테세우스의 헬레네는 아마도 피와 살이 있는 실제 인간이지만, 트로이아의 헬레네는 정말 ‘오직 환영’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라고 주장한다. (p.479)
그러면 어떻게 된 거지? 독자는 상상하기 시작한다. 일단 파리스가 왕 메넬라오스가 없는 스파르테에 온 건 맞을 듯. 파리스는 출장 와서 일을 다 보고 귀국.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이제 보스포루스 해협을 장악하며 흑해 주변의 비옥한 땅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무역을 틀어쥐고 있는 트로이아와의 전쟁을 위해 치사해도 참 더럽게 치사한 방법을 궁리해내니, 불세출의 미인 헬레네를 이집트로 몰래 보내 놓고 트로이아 프리아모스 국왕의 둘째 아들 파리스가 일국의 왕비를 유괴했다는 누명을 씌워 대규모 침공을 하기에 이른다. 트로이아의 농산물 무역 장악은 이 책에 나오는 정보이다. 그럴 듯하다. 그리스의 많고 많은 도시국가 가운데 딱 한 도시국가의 왕비를 납치했다고 전 그리스가 몽땅 들고 일어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터. 합당한 전리품을 약속해야 전쟁을 하는 것이지 내 마누라도 아니고 옆집 여편네가 바람나서 집 나간 걸 가지고 우리집 남자가 피 터지게 싸우기는 좀 그렇잖아.
근데 왜 하필이면 헬레네를 이집트로 보냈느냐고? 에우리피데스는 제우스의 1등 꼬붕 헤르메스가 바람을 불어 한 방에 훅, 이집트로 날아가서 신전의 신녀로 근무하게 했다지만, 이집트는 나일강의 은혜에 힘입어 당시부터 약 2천년동안 유럽, 특히 그리스와 로마의 가장 중요한 곡식 생산지였으니 그나마 귀한 신분의 여성이 생활하기에 맞춤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랬다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이 그렇다는 얘기다. 에우리피데스는 현명한 이집트 왕이 죽고 대를 이은 젊은 왕이 헬레네한테 끊임없이 껄떡대다가 전쟁이 끝나 헬레네를 데리러 온 남편 메넬라오스한테 코피 터지는 이야기로 만들었다.
필로스라고도 불리는 네오프톨레모스는 전쟁 중에 아킬레스 건에 파리스가 쏜 화살을 맞아 죽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인데, 처음부터 참전한 건 아니고 전쟁이 길어지니까, 개전 당시엔 어린이였다가 이제 대가리가 커져 청년이 되어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기 발로 전장에 온 천생 싸움꾼이었다. 여신의 아들 아킬레우스는 신족 DNA가 진해서 그랬는지 생긴 것도 미남에다, 몸이 빠른 천하장사, 아폴론의 화살에 버금가는 궁술, 마음만 먹으면 2초 안에 완벽하게 발기해 숱한 여성으로부터 수많은 자식을 뽑아낸 오입쟁이이기도 했지만, 네오프톨레모스는 그의 정식 아들로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바가 커서 정말로 전장에 도착한 걸 보고 화를 냈다고 한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아킬레우스처럼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마징가Z 같았으나, 아뿔싸, 신의 종족이 아니라서 사납고 인정머리 없고, 그래서 잔인했단다.
에우리피데스의 <안드로마케>와 <트로이아의 여인들>을 보면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가 안드로마케와 헥토르 사이의 어린 아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나온다. 그는 아이의 다리를 잡고 휘휘 휘두르다가 마치 투원반을 던지는 것처럼 2층 베란다에서 1층 돌바닥을 향해 전력을 다해 아이를 팽개쳐 터뜨려 죽여버린다. 물론 점잖은 에우리피데스는 그냥 2층에서 1층을 던졌다라고만 썼다. 후세의 학자 로버트 그레이브스가 좀 더 솔직하게 휘휘 휘두르다가 1층으로 던졌다고 했다. 네오프톨레모스가 영웅 헥토르의 아들을 학살했을 때 아마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듯하다. 인권 의식도 없고, 식인 풍습도 사라지지 않았던 그리스 시대였지만 어린 아이를 패대기쳐 죽였다는 것이, 혈기방장한 젊은이의 일시적인 일탈로 보기엔 너무 심하다. 이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자기 손으로 잔인하게 죽인 아이의 엄마 안드로마케를 첩실로 삼아 데리고 살면서 아들 둘을 낳기도 했다. 왜 출산 경험도, 나이도 많은 안드로마케와 살았을까? 젊은 여자 노예도 많았을 텐데.
전쟁이 끝나고 오랜 세월이 흘러 겨우 이타카로 돌아온 오뒷세우스. 그도 마냥 행복한 건 아니었다. 키르케하고 좋은 시간을 보낸 것도 모자라 칼립소와는 7년 세월 깨를 볶았으니 그냥 그대로 살지 이타카로 돌아올 건 뭐람. 전적으로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주장에 의하면, 다분히 <황금가지>를 쓴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에 영향을 받은 거 같은데, 이타카는 가모장적 질서에 의하여 페넬로페가 실질지배하고 있는데 말이지. 칼립소와 7년 동안 함께 산 건 고대 부족시대 날씨를 관장하는 제사장 비슷한 의미로 왕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큰 1년’인 8년에 육박한 시간. 이제 1년이 더 지나면 제사장으로서 수명이 끝나 목이 잘리든지, 발목이 수레에 묶인 채 죽을 때까지 땅에 끌려 다니든지 하여간 죽을 수도 있어서 도망한 거 같은데 (내 생각이다, 인용하지 마시라. 창피당할 수 있다.)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이타카에 도착해보니 청혼자에 둘러싸인 아내 페넬로페가 열라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고 있었던 거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라는 견해도 많다고 한다. 10년이 넘는 전쟁기간 동안 트로이아에서 온 첩자가 그리스 전역을 다니며 전쟁 나간 남자들이 하라는 싸움은 하지 않고 트로이아 여자들하고 살림차려 아이 만들면서 잘 놀고 있다는 유언비어를(사실 거짓말도 아니었지만) 퍼뜨리는 바람에 열 받은 그리스 여자들도 맞바람 피우는 것이 유행했으며, 대표적으로 클뤼타임네스트라와 바로 이 페넬로페를 들고 있다.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남편 아가멤논이 맏딸을 희생시킨 것에 잔뜩 독이 올라 있어서 웬수지간인 시 사촌동생 아이기스토스와 불장난을 했지만, 페넬로페는 오십 명에 달하는 청혼자들을 줄 세워 그 사람들 모두와 즐겼는데, 당연히 누구 씨인 줄도 모르는 아이도 만들었으니 그게 목신 판이란다. 이런 판본도 있다고. 거 참, 깬다.
그리스 신화라고 해서 재미있을 거 같지? 이 책은 1955년에 출간해 당시에는 꽤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고. 지금 읽어봐도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독특한 상황 해석이라고 판단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그렇다고 나처럼 아무 생각없이, 그리스 신화를 알기 쉽게 설명했을 거라고,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를 쓴 그레이브스이니만큼 어느 신화 서적보다 재미있을 것이라고 덜커덕 읽었다가는 코피 나기 십상이다.
이 작품은 영국인이 인류학적 시각으로 쓴 그리스 신화 해설서이다. 그레이브스의 문학적 문장은 찾아보기 힘들고, 두 권 1,448 페이지가 똑 같은 구조, ① 신화의 내용, 다른 버전이 있으면 그것들도 모두 포함, ② 신화의 출전 ③ 그레이브스의 해설로 되어 있어서 제일 마지막 챕터인 <트로이아 전쟁> 쯤 오면 이 책을 읽으면서 고양된 인내심이 휘리릭 날아가는 바람에 나처럼 오전에 책을 덮어버리고 돼지고기 구워 쐬주 잔을 치켜 올릴 지 모를 일이니 조심하시라.
아오, 내가 나를 생각해도 대단해. 이걸, 두 권을 다 읽었어. 미친 거 아냐? 이러다 미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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