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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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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출간한 때가 2008년. 필립 로스가 75세. 어쩜 이렇게 한결 같은 수 있을까? 이제 손바닥을 붓 삼아 바람벽에 똥칠을 해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건만. 전립선암 수술을 해 비아그라를 몇 큰 술 퍼먹어도 신체 반응이 전혀 없을 시기. 그러면 그럴수록 반동작용으로 뇌 속에서 더욱 찬란한 성적 판타지를 펼치는, 인류 가운데 몇 안 되는 작가. 대개의 경우에 수컷이 생식능력하고 멀어지면 저절로 그쪽 방면에 관심도 없어지는 법이거늘, 이 양반은 어째 그런댜? 하여간 이름난 거물이 좋긴 좋다. 아무리 주접을 떨어도 이이더러 더러운 변태, 중증 성도착 영감탱이라 멸시하는 인간은 별로 보지 못했다.
지금 욕하는 거냐고? 아니다. 변태가 됐건, 더럽게 늙었건 간에 소설 하나는 재미있게 참 잘 쓴다. 상당한 좌파에 진보, 그리고 유대의식이 핏줄 속에 진하게 남은 자유주의자의 작품이 이제 새삼스레 림보에까지 영역을 넓히는 것이 문제긴 한데, 그러면 안 된다면 법 조항 또한 없으니.
나는 이이의 작품을 읽으면, 처음엔 그것 때문에 거 참 시원하게 말 잘한다면서 팬이 되었지만, 이젠 어째 쓰는 책, 읽는 작품마다 균일하게 과장된 묘사와 과격한 주장, 쓸데없는 엄살, 별로 필요할 거 같지 않은데 굳이 가져다 쓰는 노골적 성행위 또는 유사성행위가 점점 싫어졌다. 아닌 척하면서 은근한 여성 비하/차별까지. 자기 주장을 과하게 표현하는 습관이 있는 대표적 작가. 로스의 팬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나한테 필립 로스를 한 다스 가져다주어도 커트 보니것 한 명하고 바꾸지 않겠다.
주인공이자 화자 ‘나’의 이름은 마커스 매스너. 마커스? ‘마르쿠스’의 영어식 발음이다. 3대째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매스너 코셔 정육점 집 외아들. 삼촌 두 명도 푸줏간을 하고 있으니 적어도 푸주한, 백정 집안의 명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건 실례지만, 시대적 배경이 1950년이니 그 시절 시각에 입각하면 그랬다는 말이다. 코셔 정육점이란 건, 짐승 즉 소, 돼지, 양, 닭, 염소, 거위, 개… 아, 개는 아닌가? 각주가 없어 잘 모르겠지만 개는 아닌 거 같다. 이런 것들을 도살할 때, 딱 한 번의 칼질로 단번에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렇게 도살했다는 걸 랍비로부터 공인을 받은 정결한 고기만 파는 곳을 말한다. 고객의 대다수는 유대인이다. 아무래도 도살 공정이 좀 더 길고, 랍비를 불러오려면 결코 저렴하지 않은 시급을 랍비에게 주어야 하니까. 그래도 큰 전쟁 두 번을 치루면서 매스너 코셔 정육점은 괜찮은 실적을 내며 뉴어크 시내에서 안정적인 상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사정이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자 세상의 시스템도 갑자기 바뀌어 뉴어크 역시 자본주의 적 팽창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대형 슈퍼마켓이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들어와 코셔 정육이 아닌 일반 도살된 소, 돼지, 양, 닭, 염소, 거위, 개… 아, 개는 아닌가? 이런 고기들을 저렴하게 팔기 시작하자마자, 창세기 시절부터 한 푼의 절약에 관한 한 세상 어느 민족과 비교해 “조금도” 뒤져본 적 없는 유대인 후손들이, 불경기를 과대광고하면서 정결하지 않은 비-코셔 고기를 사먹기 시작했고(에잇, 내가 차라리 죽은 다음에 지옥불에 빠지고 말지!), 뉴어크 시내가 조금씩 슬림화 되면서 뉴어크에 살던 기존에 자리잡은 유대인들이 새로운 주거지역으로 이주하는 동시에 새롭게 유입되어야 마땅한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 안전해지니까 굳이 이민 올 이유가 없어서, 뉴어크 유대인들의 절대 인구 또한 팍 줄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그런데 1950년 9월. 저 한반도, 코리안 페닌술라에서는 북한군이 밀려와 남한의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 지역까지 밀어 부치던 상황. 미군이 급하게 달려가 막아보려 했으나 예상 외로 잘 무장되어 있고, 훌륭하게 훈련되어 있는 북한군을 도저히 당하지 못해 판판이 깨지다가 일흔이 넘은 노장 맥아더가 이끄는 함대가 인천상륙작전을 벌인 시기였다. 이것이 이 정육점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면, 이집 아들이 주인공이자 화자 ‘나’이자 현재 모르핀을 강력단위로 맞고 마약으로 인한 환각이 뇌에 작용하여 평소에는 전혀 떠오르지도 않았던 세밀한 기억, 숱하게 나누었던 대화까지 몽땅 기억하고 있는데, 이 ‘나’, 마커스, 애칭 마키 매스너가, 이 코셔 정육점의 외동아들로, 만일 대학에 들어가 ROTC 교육을 네 학기 이상 받지 못하면, 장교보다 훨씬 죽을 확률이 높은 사병 신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박박 기다가 아주 높은 기대치로 중동부 전선에서 귀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억하시라. 당시 미국 청년의 병역은 징병제였다. 2년 정도? 그건 잘 모르겠다.
이렇게 작품의 모두에 한반도의 내전이 제법 상세하게 나오는 것이 어째 좀 이상했다.
하지만 코셔 정육점의 매스너 부부의 외아들 마커스 매스너는 온 뉴어크 시내가 알아주는 고교 야구선수, 책벌레, 착한 아들, 집안의 기둥, 기둥 즉 대주大柱는 당연히 매스너 씨가 맡아야 하니, 그냥 대들보 동량棟梁 정도라고 하자. 고등학교 3년 동안 여학생들과 키스, 입술만 살짝, 눈깜짝할 새만 가져다 댔다가 떼는 그런 키스만 두 번 해봤고, 의미있는 부위의 피부도 한 번 만져보지 못한 진국 또는 어리버리 공부벌레였다. 키도 크고 잘생기기까지 했는데도. 키 크고 잘 생기면 꽃도 나비나 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법이거늘. 이게 다 자애한 아버님의 지도편달 덕분이었다.
착하고 공부 잘하는 마키는 자신이 다닐 대학으로 뉴어크 시내에 있는 아주 작은 대학 로버트 트리트로 정했다. 집에서 다닐 수 있어서 비싼 기숙사비나 하숙비가 들지 않고, 틈틈이 정육점 일을 해 아르바이트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으며, 아버지 입장에서도 꾸준히 아들의 성장을 돌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랴. 이 집구석에서, 사방팔방 온 친척을 다 망라해서 마커스가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하는 자손이었다. 이건 진로에 대해 올바른 조언을 해 줄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커스는 자신이 품고 있는 진로,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 연설, 장교 입대, (직접적 전투를 하지 않는)수송부를 거쳐 작전실에서 한국 전쟁 참전, 제대 후 다시 로스쿨 입학, 잘 나가는 변호사의 길을,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하는 대학에 입학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그런 대학의, 스펙도 별로 없는 교수들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진지하고 힘을 다하여 올바르고 훌륭한 배움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마커스는 1년만 다니고 오하이오 주에 있는 조용한 학교 와인스버그 대학으로 전학한다.
왜 그런 결정을 했느냐 하면, 평소 자애롭기 그지없던 아버지가, 마커스의 대학 입학이 결정되자마자 아들과의 사이에 파괴적인 갈등을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갈등의 기본은 아버지, 특별히 유대인 아버지다운 아들 인생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한다. 자기 자신이 살아온 것을 보더라도 이 험한 세상에 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아들. 세상 도처에 널리고 널려 있는 위험으로부터 아들, 그것도 외동아들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겠느냐는 걱정. 이걸 동양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한 “기 나라 사람의 걱정” 기우杞憂라고 했는데, 도가 지나쳤다. 자신이 항상 시퍼렇게 날이 선 크고 작은 칼을 다루어야 하고, 형제들이 아들을 몽땅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과 벌지 전투에서 잃는 바람에 이 쓸데없는 걱정이 더욱 심화되었을 지도 몰랐다. 하여간 로스의 글만 본다면 누군가 시급히 아버지를 뉴어크 병원 신경정신과에 데려가 입원치료를 시켜야 할 수준이었건만, 1950년대 초에 칼잡이한테 누가 쉽게 권할 수 있었으리오. 아버지는 앞뒤 문짝에 새로운 열쇠를 두 개 달아 이제 정한 시간이 넘어 마커스가 집에 돌아오려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현관문을 두드려 부모를 깨워야 했으니, 다 큰 아들이 이게 뭐야. 유대인 답게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고, 아직도 제대로 된 키스도 한 번 못해봤고, 오직 하는 일이란, 도서관이 없는 삼류 대학을 다니는 죄로 시립 도서관에서 문을 닫을 때까지 숙제도 하고, 책도 읽느라 집에 좀 늦게 들어올 뿐인데 말이지. 이게 아버지여, 웬수여?
그래서 마커스 매스너는 오하이오주에 있는 와인스버그 대학으로 전학을 선택했다. 뉴어크에서 8백km 떨어진 곳. 공항도 없고, 기차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곳. 아버지가 와볼 생각을 애초에 하지 못할 곳을 고른 것이다. 와인스버그 오하이오. 어디서 들은 책 제목이지? 지금 도서 신청하고 기다리는 셔우드 앤더슨의 “잘 쓴” 책 제목이다.
마커스가 굳이 와인스버그를 선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천만에. 하필 뉴어크에 아버지 옆 상점의 여주인 스펙터 부인의 조카가 이 와인스버그에 다녔는데, 유대인이면서 유대인 클럽 회장은 당연하지만 클럽연합회 회장까지 맡고 있는 서니 코틀러였다. 무지 잘 생겼으며 축구단 주장이기도 하니 말 다했지 뭐. 서니 코틀러가 학생과에 힘을 써, 마커스는 우연히 그렇게 되었는 줄 알았는데, 마커스가 배정받은 기숙사 방에 들어가보니까, 이층 침대 두 개, 합해서 넷 가운데 세 침상의 주인이 전부 영문과 3학년에 다니며, 연극반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대인들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학교에서도 가장 문제아로 손꼽히는 플러셔는 나중에 알게 되지만 심지어 당시엔 용인되지 않았던 게이이기도 했다. 유대인 게이? 아오.
이렇게 아버지로부터 당해야 하는 곤란함은, 오하이오 와인스버그에 도착한 첫날 기숙사 룸메이트 대마왕 플러셔로부터 당할 피곤한 난관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게 여겨질 정도가 되어버리고 만 것. 근데 전에 다니던 로버트 트리트 학교보다 덩치가 수십 배 큰 학교이니 로버트 트리트에 다닐 때보다 수십 배 더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가 생기지 않겠어? 딱 두개만 골라보자면, 기대하시라, 금발의 아름다운 편입생 올리비아와의 첫 몸 섞음, 그리고 졸업 전까지 40회 참석해야 하는 채플. 마커스는 유대인이지만 종교적으로 아무 관심이 없는 무신론자. 이 채플을 위하여 일주일에 90분을 소비해야 하는 일이 정말 싫어, 나중에 친구 하나를 만들어 그 아이에게 한 번에 1달러 50센트를 주기로 하고 마커스 대신 채플을 듣는 걸로 하는데, 이 두가지가 그리 쉽지 않았던 모양이지? 마커스의 인생까지 결딴 낸 걸 보니까?
내가 로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지, 재미있는 작가다. 이 독후감을 읽는 분은 나 때문에 로스에 저항감을 가질 필요는 1도 없다. 모쪼록 즐기시기 바란다. 그랬으면 좋겠다.
북적북적 앱엔 셋 반이군.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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