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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관한 살인적 농담
설재인 지음 / 나무옆의자 / 2025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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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월영시장》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래서 여차하면 팬이 되어볼까 싶어 이이가 쓴 장편소설을 더 읽어보자 해서 고른 책이 <그 변기의 역학>과 <예술에 관한 살인적 농담>. 이 중에서 <예술에 관한 살인적 농담>을 먼저 읽었다. 살인적 농담에 정말로 살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
서울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특목고 수학교사를 몇 년 하다가 대책없이 사표를 던진 후 글도 쓰고, 복싱도 하면서, 김포공항 근처 서울 서쪽의 맨 끄트머리에 낮은 청년지원 어쩌구저쩌구 아파트를 얻어 살며, 말을 최대로 줄인 채 음침하게 사람들을 염탐하며 사는 작가. 남들 눈에는 멋있어 보일 수 있다. 인생의 괜찮은 정규 코스라고 할 수 있는 명문대 졸업, 특목고 수학교사 때려 치우고 복싱을 하는 소설가. 그런데 딱 거기까지. <예술에 관한 살인적 농담>을 읽어보면, 문제는 소설을 쓰고, 복싱에 매진할 수 있기 위한 필요조건을 설재인은 갖고 있지 못했다. 아니지, 작가가 되려면 필요한 자질은 가지고 있어 보이니까 필요조건은 만족시켰지만, 충분조건을 못 갖췄다고 말해야겠다.
저 경상남도 끄트머리, 오지 중에서도 오지, 가난하면 산과 물이라도 좋아야 할 터이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뭐 하나 그럴듯한 경치도 없어서 그저 허덕허덕 대는 깡촌 X면 당롱리. 여기 출신 여성 한 분이 혼인을 해서 딸 아람이를 낳았는데, 얼마 살지 못하고 갈라섰다. 요즘 이혼이야 선택 사항이니까 그게 특별한 건 아니지만, 아람이의 아빠는 물론이고 엄마도 도무지 아람이를 기를 마음이 없어서, 일단 양육비를 쓰고 싶으니 양육은 엄마가 하는 걸로 하고, 엄마는 어린 아람이를 당롱리에 사는 자기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한테 휙 던져두고 자기 살 길 찾아 사라졌다.
가만 보면 엄마가 외할머니를 닮았던 것. 외할머니도 외손주한테 정이 1도 없어서 거의 방치하는 수준으로 밥만 먹여주었는데, 아람이가 그나마 똑똑해서 자기가 알아서 한글 깨치고, 책도 읽고,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까지 했다. 외할머니 속에 고등학교는 아예 들어 있지도 않았는데, 당시 마을의 젊은, 그래봤자 환갑을 넘은 이장이, 나는 흉내도 내지 못할 극한의 경상도 사투리로, 아주머니, 요즘에 고등학교 안 보내면 크~은 일 나요, 협박을 하는 바람에 면에도 없어서 군에 있는 고등학교를 보내주어 다녔던 거다. 아람이는 고등학교 다니면서 연극부에 들어 남의 인생을 원 없이 살아내는 배우가 하고 싶었고, 그리하여 연극, 영화 쪽으로 우리나라에서 캡을 먹는 A대학에 수시 합격했으나 당연히 외할머니가 아무리 알부자라 하더라도 등록금을 내줄 턱이 없어서, 날을 잡아 할머니 장롱 속 현금 서랍을 통째로 훔쳐 그 길로 인서울도 아니고 경기도 모처로 날아가 연극, 영화로는 우리나라 탑 급이지만, 나머지는 거의 바닥인 A대학 입학금과 동시에 등록금까지 내고, 시골 출신이며, 예술고등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며, 예체능 준비학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건 물론이며, 사방팔방으로 자기를 돌봐줄 부모 친척 한 명 없는 천애고아 바로 근처 수준이라는 열등감을 견뎌가며 친구가 딱 한 명뿐인 채로 하여간 졸업을 했지만, 수천번에 이르는 연극, 영화 배우 오디션에 바나나 껍데기만 밟아 결국 20대 꽃 청춘 시절을 C쇼핑 회사의 서비스 센터, 즉 콜 상담원을 하면서 먹고 사는 신세였다. 지금은 그렇게 어영부영 서른 살이 됐고.
이 아람이가 대학 다닐 때, 원로 극작가이자 우파 정권에 부역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간이 학과장을 하고 있었는데, 돈 많고, 자식 농사 잘 지은 학과장님께서 강의 도중 직접, 예술가가 되기 위한 충분 조건에 대한 말씀을 하시었으니 그걸 요약하자면:
대대로 예술가란 든든한 후원자를 뒤에 두고 있어야만 생존하여 걸작을 만들 수 있는 법이다. 물론 날 때부터 대단한 천재를 가진 인물이 각 장르마다 한 명쯤 있었지만, 그들 마저 왕족, 귀족, 아니면 부르주아의 단단한 지원이 없으면 곤란했을 터인데, 하물며 그냥 조금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이야 어떠했겠느냐. 걸작은 천재들뿐 만 아니라 이런 보통 재능의 손에서도 나왔다. 보통 재능이 걸작을 만들기 위하여는 무지막지한 시간을 필요로 했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오직 예술 창작에 투자하기 위하여는 적어도 연 오백파운드의 수입이 없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예술가도 먹고 싸는 일은 보통 사람들과 같으니까. 그리하여 21세기의 예술가들도 돈. 돈이 없으면 예술이고 걸작이고 아예 처음부터 가능하지 아니하다.
이 책을 쓴 설재인도 이 학과장님 말씀에 조금 공감을 했던 모양이다. 2019년에 데뷔하여 2026년 8월 말까지 모두 서른네 권의 단행본을 출간했다. 아마 설재인은 이노무 “든든한 후원자”를 두지 못한 거 같다. 그러니까 1년에 4.8권, 근 다섯 권의 책을 내는 엄청난 다작을 감행하고 있겠지.
이렇게 심하게 창작 노동을 감행하고 있는 걸 보면, 사는 이유를 몰라 그냥 대책없이 사직서 던진 어딘지 모르지만 특목고 수학교사 자리를 괜히 때려치웠다는 후회도 아주 가끔을 할 듯하다.
그건 그거고 작품의 주인공이자 C쇼핑의 콜서비스 직원인 아람이는 오늘 개 진상 고객과 전화면담 한 건을 치뤘다. 반려견 사료에 하자를 제기한 고객.
“아 그러세요 고객님, 그럼 언제부터 ‘퍼피러브’ 사료를 반려견께 급여하시기 시작하셨어요?”
“받고 나서부터요.”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오늘이 6월 30일이니 이미 일 년이 넘게 지났는데요, 개봉한 지 오래된 사료는 반려견들께서 선호하지 않을 위험성이…”
“아니, 그런 거 생각하고 팔아야지 왜 내 탓을 해, 이년이, 장난해?”
아무리 콜 서비스가 험한 일이라도 아람이 기분이 더럽겠지? 더구나 오늘이 자기 생일날인데. 저런. 그래도 이제 연차가 쌓여 이런 사소한 진상들 정도는 가뿐한 수준. 팀장의 꼬나보는 눈치도 깔끔하게 외면한 채 당연히 칼퇴근하는 아람이는 곧바로 중고등학생들의 입시 컨설팅을 하는 소을이를 만나러 술집으로 향한다. 휴대전화를 통해 듣는 소을이는 벌써 한 잔 하고 있는 중이다. 얼음 바스켓에 칠링한 사케 한 병 순삭. 약속한 일식집에 가서 보니, 깔린 메뉴가, 육사시미, 나가사키 짬뽕, 게살 고로케, 휘황찬란한 샐러드. 아오, 이 정도면 콜서비스 노동자가 즐길 만한 식탁이 아니다. 아휴, 몰라. 오늘은 생일이라고 돈 잘 버는 소을이가 쏜다니까.
소을이는 A대학 연극영화과 동기동창. 처음엔 배우를 하기 위해 연기 전공으로 갔다가 나중에 극작으로 방향을 바꾼 친구인데, 졸업 후에 먹고 살 것이 없어지자, 아람이는 콜서비스, 물론 많고 많은 오디션에 떨어지고, 아무리 우리나라 탑급 영연과라고 해도, 대다수가 자기처럼 지원하는 오디션마다 떨어질 줄 모른 채 거의가 여전히 부모한테 빌붙어 사는 형편이지만, 빌붙은 부모 없는 아람이가 억지로 구한 직장이 쇼핑센터 콜 서비스였던 반면에, 역시 소녀시절부터 가난에 절어 살아왔다고 주장하는 소을이는, 연극 영화예술에 목을 매는 철부지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자기 자신이 걸어온 연극 영화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가시덤불 속인지 컨설팅하여 예술인, 즉 딴따라의 길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국영수 공부에 매진해 특목고나 스카이에 갈 수 있도록 설득하는 일에 투신, 말 그대로 떼돈을 벌었고, 지금도 방 세 개짜리 오피스텔에 사신다. 그러니 유일한 친구 아람이 생일이라고 이정도 밥이야 한 끼 못 사겠는가.
이날 둘은 완전히 꽐라가 될 때까지 술을 퍼부었다. 아람이 정신을 차려보니까 역시나 소을이 오피스텔이었는데, 뭐 자주 있는 일이니 그건 아무렇지도 않건만, 진짜 문제는 어제 취중에 받았던 단톡방 메시지였고, 거기다 이람이가 다시 보낸 답글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진다. 원룸 건물에서 다섯 방을 소유한 시골 할아버지가 자택에서 백골이 된 채 발견되었는데, 다섯 방 가운데 한 명의 남자 세입자가 결혼을 앞두고 이사를 하기 위하여 보증금을 돌려달라 했지만 아무 소식이 없어 본인이 직접 그 시골로 운전까지 해 가서 알아낸 것으로, 이 죽은 방주인은 통장에 딱 2,390원만 들어있고, 자식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살아, 그까짓 시골 집 때문에 귀국할 마음이 1도 없어서, 재산은 전부 국가 귀속 예정이다. 국가 귀속에 이은 전세금 반환까지 가려면 그 세월이 얼마랴. 잔뜩 초조해진 세입자가 단톡을 연 건데, 문제는 그 남자를 제외한 네 세입자는 전부 월세. 아람이 경우엔 보증금 백에 월세 삼십.
더 큰 문제는 나머지 네 명의 월세 세입자는 속으로, 그럼 삼개월 동안 월세를 안 내면 대강 보증금을 깔 수 있고, 이후에 정산이 끝날 때까지 월세 없이 공짜로 살 수 있겠네? 하는 거였는데, 그걸 누가 제일 먼저 이야기했느냐 하면, 완전히 꽐라가 되어 다음날 아침 정신이 들어서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우리의 아람이었는데, 그는 단톡에 이렇게 썼던 것이다.
‘저눈 저운데요 월세 안내두되닉가’
‘평샹 살검데’
‘이사안ㄱㅏ’
‘지상층ㄱ기리알아ㅅ 해여 번지하층은 ㅁ멀라’
아람이가 총대를 메고 나는 좋다, 월세 안 내도 되니까, 평생 살 건데, 이사 안 가고, (아람이는 반지하에 사니까) 지상층에 사는 사람들이 알아서 하라고 말하자마자, 단톡 개설자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월세 세입자도 싹 안면몰수 한 거다. 이러니 새신랑 후보가 미치겠어, 안 미치겠어?
그는 그 길로 반지하에 내려가 아람이 사는 방문 앞에 휘발유를 확 뿌리고 불을 싸질러버렸고, 기적 비슷하게 불길은 전 원룸 건물로 번지는 것 같다가 딱 반지하 아람이네 집만 까맣게 태워버렸고, 새신랑은 결국 예식장 대신 경찰서 유치장에 유치되었으며, 이 소식이 전국 SNS를 통해 아람이의 실명과 주소와 전화번호를 뺀 나머지 모든 SNS계정이 백일하에 드러나 거국적으로 망신을 당해야 해서, (사실 여기까지만 과연 설재인이야, 아무나 ‘재인’이란 이름을 함부로 달고 다니는 게 아닌가비여, 코미디는 재인이가 해야 제 맛이지, 이렇게 감탄하도록 재미나게 읽힌다.) 입시 컨설팅 중에 고1짜리 특목고 학생을 꼬드겨 중퇴하게 만들고, 예술대학 대신 밑바닥 세계여행 유튜버로 만들었으며, 심지어 방 세 개짜리 오피스텔에서 동거까지 하는 바로 그 소을이네 집에서 두 달 동안 안면몰수한 채 머물게 되면서 사건은, 진짜 살인사건, 둔기로 해골바가지를 깨뜨려 피를 철철 흘리면서 죽는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
안타깝게도 후원자가 없어서 일년에 다섯 권의 책을 내야 했던 설재인의 비교적 최신작. 가지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참 알뜰하게 챙겨 책 한 권을 만들어, 《월영시장》으로 잔뜩 기대에 부풀게 한 내 마음도 뒤꿈치로 팍팍 잘도 조져 놓은 책. 좋다. 한 권만 더 읽어보겠다. 그게 마지막 설재인이 되지 않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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