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권인 줄 모르겠는데, 위에 사진 찍은 거 말고, 딱 한 컷 분량의 책도 다 버렸다. 책 쌓아 놓는 거, 이거 욕심이다. 책 때문에 방에서 뭘 어쩌지 못하겠다. 그래서 버렸다. 아쉬울 거 같지? 속이 다 시원하다. 최근 5년 동안 읽은 책, 읽지는 않더라도 생각이 나 특정 부분을 찾아본 책, 서재에 인용한 적 있는 책 기타 등등, 이런 거 다 빼버리니까 90퍼센트는 그저 그냥 가지고 있는 책이더라. 그걸 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거 참 신기하지. 정말 책을 버리려고 하면 아내가 그러지 말란다. 버리는 거 말고 다른 방법도 있을 거라고. 있지, 알지. 근데 귀찮다. 이번에 버린 책 중에는 끝내주는 작품도 제법 있을 걸? 그래도 뭐, 내가 버리겠다는데. 

  다음 번에 날 잡아서 버릴 책 목록 중에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2666>도 끼어 있다. 오늘 다 해치우려 했는데 몇 번 힘쓰니까 혈중 알코올 농도가 떨어져 영 힘이 없더라고. 달라고 하지 마시라. 택배 포장하고, 우체국 가서 보내고, 시간 잡아먹고, 모두 귀찮은 일이다. 

  이제 내게 남아 있는 황석영은 <장길산>하고 <오래된 정원> 두 개, 바르가스 요사는 <천국은 다른 곳에>, 볼라뇨는 <야만스러운 탐정들> 뿐이다. 이런 식으로 정리하니까 대강 책꽂이가 균형이 맞혀진다. 이럴 줄 진작 알았다. 그러면서 여태 하지 못했던 게 바보스럽다. 다 욕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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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9-07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다락방을 버리셨군요 🤣

건수하 2026-09-07 22:40   좋아요 1 | URL
😹

잠자냥 2026-09-07 1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기 가서 주워오라고 코치하고 싶은 책이 좀 보입니다그려….🥹

Falstaff 2026-09-07 19:42   좋아요 1 | URL
혈중 알코올 농도 보충하고 저 사진 만큼 더 버렸는데요, 담에 사진 업로드 하겠습니다. 거긴 더 많을 듯하군요. 현재 발행 중인 세계문학 시리즈를 포함시키기 시작했거든요. ㅋㅋㅋ

독서괭 2026-09-07 1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그 동네 주민들 중에 분리수거 하러 나갔다가 득템하신 분들 좀 계시겠는걸요!

Falstaff 2026-09-07 19:44   좋아요 2 | URL
알라딘에나 좀 이상하게 책 읽는 우리 머글들이 모여 있는 것이지 그냥 사는 사람들은 책, 아무리 좋은 거 가져다 줘도 안 읽거나 피하는 게 일상입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6-09-07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아있는 책은 그렇다면, 폴스타프 님께 소장욕 불러일으키는 책이란 뜻인가요?

Falstaff 2026-09-07 20:14   좋아요 1 | URL
아직 멀었습니다. 아주 싹 버리고 말 겁니다. ㅎㅎ

다락방 2026-09-07 1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 밀레니엄 시리즈 갖고 계셨던게 의욉니다!!

Falstaff 2026-09-07 19:45   좋아요 3 | URL
다른 건 몰라도 밀레니엄 시리즈가 재미 하나는 정말 끝장이잖습니까!!

다락방 2026-09-07 20:03   좋아요 2 | URL
재미로는 압권이죠!!

stella.K 2026-09-07 20: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몇권 겹치는 책도 있네요. 저도 작년부터 다시 안 볼 책 몇권씩 추려서 집앞 공터에 버리고 있습니다. 지난 달인가, 지지난 달 잠깐 외출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책탑 한쪽이 무너져 내렸더라고요. 내 이 놈의 책을! 더워 죽겠는데 이걸 다시 세워 놀 생각을 하니까 어찌나 한심한지. ㅠ 그 김에 다시 안 볼 책을 추려 집앞 공터에 내놓긴 했지만.
옛날 같으면 반반한 책은 중고샵에 내놨겠지만 그것도 귀찮더라구요. 티끌모아 태산인데 먼지 밖에 더 되겠나 싶고. 그래서 책에 정 안 줄려고 새책은 가급적 안 사려고 하는데 저의 온라인 독서 모임에서 자꾸 새책 가지고 하려고 해서 죽겠습니다. 그래도 가끔 새책 집에 도착하면 기분이 설레긴 하는데 그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예전엔 책을 싸게 사는 맛에 중고책 샀지만 지금은 읽고 버리기 좋게 정말 헌책 삽니다. 근데 좋아하는 작가는 헌책으론 못 살 것 같아요.
암튼 잘하셨습니다. 동지 만난 것 같아 저의 마음도 후련하네요. 저도 조만간 또 버릴 생각입니다. ㅋㅋ
잘 지내시죠?^^

Falstaff 2026-09-07 20:36   좋아요 2 | URL
아이구, 이게 얼마 만입니까. 별고 없으셨지비요? ㅋㅋㅋ
책 안 사는 게 장땡입니다. 도서관 가니까 무진장 책도 많고, 그래도 없어서 사달라고 하면 재까닥은 아니지만 하여간 사주고, 조용히 읽으라고 열람실도 있고, 때에 따라 냉난방도 빵빵하게 해주니 이게 무릉 아니고 어디겠습니까?
그걸 그저 책을 이고지고 세상에나,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을까 싶다니까요. ㅎㅎㅎ
늘 건강하세요!

stella.K 2026-09-07 21:03   좋아요 2 | URL
에고, 수정하는 사이 답글 다셨네요. 이 시간 혼술하고 계시지 않을까 싶어 느긋하게 고치고 있었는데. ㅋㅋ
저는 진짜 도서관은 버스 타고 나가야 하고, 이용하려면 집앞 주민센터 이용해야 하는데 가면 좋긴한데 안 가게 되더라고요. 간지 두 시간쯤이면 와서 집안 일을 해야하는지라.ㅠ
암튼 격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폴님도 건강하십시오. 종종 들리겠습니다.^^

곰돌이 2026-09-07 2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들어가 있는 검은 책…… 아, 원통하도다……

Falstaff 2026-09-07 20:47   좋아요 2 | URL
파묵은 빨강 내 이름하고 눈, 두 작품만 남길 거라서 말입죠. ㅎㅎㅎ

망고 2026-09-07 2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다놓고 아직 안 읽은 책들도 있어요🥺 얼른 읽어야지 폴스타프님의 버리는 책탑 보며 저는 쌓인 책 읽어야겠다는 의지가 불끈!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6-09-08 03:48   좋아요 0 | URL
옙. 좋은 책 있으면 얼른 읽고 치우는 게 대빵입니다!

페넬로페 2026-09-07 2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아파트 동 1층 경비실 앞에 책꽂이가 있어요. 다 읽었지만 버리기 아까운 책 서로 바꿔보자는 취지일 겁니다. 거기다 제가 좋은 책 많이 갖다놨는데 몇 년째 그대로입니다.
최근에 아버지의 해방일지 갖다 놨는데도 아무도 안 가져가더라고요.
그저 책은 나만의 기쁨이자 정체성이라고 생각했고
이제는 책에 대한 집착도 없어졌어요.
어차피 다 읽은 책은 잘 안 보게 되더라고요.
잘 하셨어요, 시원하게요👍👍👍

Falstaff 2026-09-08 03:49   좋아요 1 | URL
그죠, 비슷한 종의 머글들이 알라딘에 무척 밀도 높게 모여 있는 거더라고요. 세상에 책 읽고, 좋아하는 사람들 거의 없어요.

건수하 2026-09-07 22: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복거일 주워오고 싶네요 ㅎㅎ 후련하시겠어요!

Falstaff 2026-09-08 03:50   좋아요 1 | URL
건수하 님이 복거일을? 70세가 넘은 복거일은 자기 책 속에서도 골통 보수적인 시각을 조금도 감추지 않던데, 참으실 수 있겠어요? ㅋㅋㅋ

건수하 2026-09-08 06:19   좋아요 0 | URL
ㅋㅋ 그래도 궁금히더라고요

meesum 2026-09-07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아아아아… (부러워하고 배워야 하는데 내 것도 아닌 것이 그냥 아까운 마음…)

Falstaff 2026-09-08 03:51   좋아요 0 | URL
어찌 아깝지 않겠습니까. 그저 독하게 마음 먹고 저지르는 것이지요.

coolcat329 2026-09-08 0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리신 책 중에 저도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있네요. 😢 시원 섭섭하시겠어요.
밀레니엄 시리즈 저도 가지고 있는데 정말 너무 재밌죠! 누군가가 가져가서 또 재밌게 읽어주면 좋겠네요. 떠나는 책들 보니 살짝 슬프기도 합니다.

Falstaff 2026-09-08 07:32   좋아요 1 | URL
책 사면 즉시 읽어버리는 게 제일 좋더라고요. 제가 쿨캣님 마음 압니다. ㅋㅋㅋ
밀레니엄 시리즈는 아예 시작을 하지 말아야지, 한 번 읽었다하면 끝을 봐야 하는 아주 나쁜 책입니다. 잠도 못자게 하는 책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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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세계문학 시리즈입니다. 문학과지성사의 자존심으로 엮은 전집. 작가가 아무리 이름이 높더라도 그 작가의 결실 가운데 딱 한 작품만 골랐으니 작품의 품질이야 저절로 좋을 수밖에 없을 터. 한 작가 당 딱 한 작품. 20세기 중반까지는 이런 출판 기획도 드물지 않았지만 신자본주의의 절정기인 지금 시대에 고집을 꺾지 않기는 틀림없이 쉽지는 않을 듯합니다. 따라서 시리즈 2백 권 모두 엄정한 편집부의 고심 끝에 결정해 최고의 작품들을 선정한 결과물이겠지만 그래도 독자가 읽기에 정말 좋았더라, 하고 감탄할 수 있는 열 편을 고르려 합니다.

  제가 이 시리즈에서 나온 시를 제외한 모든 장르는 거의 다 읽은 거 같습니다. 이 가운데 번역 시하고는 아예 인연이 없어서 대산세계문학총서의 자랑인 다양한 고전 시 빼고, 나머지 목록 가운데 이 시리즈 출판물로 가장 감명 깊게, 재미있게, 또는 의미 있게 읽은 책을 리스트 업 했습니다. 그랬더니 열아홉. 더하기 1차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 아쉬운 책과 다른 세계문학 시리즈를 통해 읽어 제외할 수밖에 없었던 책도 또 열아홉. 이 가운데 딱 열 편을 소개합니다.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2백번 작품, 울리츠카야의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은 지금 희망도서 신청 중이라 읽지 못했습니다만 이것도 혹시 기념할 만한 책 목록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 책은 다음으로 하자는 뜻입니다.



  작품 소개는 시리즈 번호 순으로 하겠습니다.



1. 호세 호아킨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 <페리키요 사르니엔토>


  라틴 아메리카의 세르반테스라고 상찬하는 모양인데 그것과는 별개로 매우 독특한 시각으로 쓴 진짜 고전 가운데 한 편이 바로 <페르키오 사르니엔토>이다. 페르키오 사르니엔토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옴쟁이 앵무새 새끼.’ 1810년대에 쓴 오래 묵은 작품이라고 곰팡내 날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인종과 계급 차별의 찬란한 반어법도 있고 뭐 그런데 다른 말 길게 할 거 없이 무척 재미있지만, 두 권 1천 페이지가 넘도록 비슷한 필체를 읽는 난관은 감안하셔야 할 것.



2.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 <오블로모프>


  이이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재미진 작가인 줄 알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문학과지성사 덕분이다. 소위 LDT, 레르몬토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내가 주장하는 러시아 3인방의 위명에 눌려 자꾸 순서가 뒤로 밀렸다가 정작 읽어보니 이게 웬일? 오블로모프의 게으름은 틀림없이 ‘천재성이 없는’ 조아키노 로시니의 도플갱어일 듯하다. 나도 나머지 삶을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을매나 좋을꼬? 이 책 역시 두 권의 빵빵한 분량, 감안하고 선택하시라.



3.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이 책, 내 최애 리스트 가운데 한 권인데 독자에 따라 호오가 있을 듯. 10년 전, 2016년에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선정했을 만큼 대단한 임팩트를 준 작품이건만 역시 소설은 독자의 결정이 최종 심판이다. 16세기 초반에 만든 돌다리. 다리를 만들 당시 보스니아 지역에서 튀르키예 소년병으로 편입한 시절부터 20세기 초까지의 파란만장했던 다리와 주변 사람들이 겪어온 신난고난. 사람들이 당했던 착취와 죽음, 오해와 반목, 그러나 그 속에서도 언제나 건강했던 사람들의 초상.



4. 모옌, <홍까오량 가족> 또는 <붉은 수수밭>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작품의 전형. 예전에 있었던 창피하고 불행하고 참혹했던 과거에 관한 솔직한 기록. 1920년대부터 40년대 초반까지 강태공의 제나라 지역에서 있었던 항일, 국공, 토비의 난과 이 속에 끼어 죽을똥 살똥했던 인민들의 적나라한 모습. 그리고 남녀상열지사! 이 책 읽고나서 공리 나오는 영화가 이 책의 1`부에 그쳤다는 걸 알게 됐지 뭐야. 모옌 읽으려면 단연 이 책부터 들추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는 의견이 저절로 생길 것.



5. 엘리자베스 개스켈, <남과 북>


  요즘 문학동네 세계문학에서 <북과 남>이란 제목으로 새 번역이 나왔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첫 정. 이 책으로 하여금 나는 단박에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팬을 자처하게 됐다. 19세기 초반의 목사 부인께서 어떻게 이리 노동자들의 운동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진보적 시각을 갖추게 되었는지 말 그대로 깜놀, 했다는 거 아닌가. 스토리 하나 가지고 굳세게 작품을 밀고 나가는 힘을 보여주고, 결혼이 삶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도 은근히 눈치를 주는, 솔직히 이 정도면 명작 아냐?



6. 페터 바이스, <저항의 미학>


  아오, 이거 리스트에 올렸다가 욕만 한 태배기 먹는 거 아닌가 싶다. 세 권에 무지막지 건조한 문장으로 꽉 채워진 어마무시한 분량의 책. 문장 부호라고는 쉼표와 마침표 말고 다른 건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지옥의 순례길. 그러나 인내하시라. 생각도 못한 미학 강의와,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어찌하여 히틀러의 독일이 군비증강을 허용했는지 설명하는 명 강의를 들을 수 있을 터이니. 그러나 이 책의 백미는 예술품을 감상하는 미학적 시선이라 바이스, 이 엄하게 생긴 독일 양반한테 혹, 넘어가버렸다는 거 아닌가.



7. 리온 포이히트방거,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


  말로만 듣던 포이히트방어. 난 “~방거”가 아니라 “~방어”라고 배워서. 그건 그거고, 이 책은 작가 포이히트방거에 대한 나의 경외심을 심어주어 이후 <톨레도의 유대여인>과 <유대인 쥐스>를 사서 읽게 했으며 앞으로도, 장담하노니, 어떤 책이 나와도 끝내 찾아 읽을 것이라고 단단히 각오했다. 이미 세상의 태양이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대서양 북쪽의 섬나라와 이웃한 프랑스로 넘어갔음에도 세상 무능한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고야. 그의 타협하지 않는 삐딱한 세계관과 왕족을 희화화하면서도 능력을 인정받는 시절. 하여튼 이 책은 대산셰계문학총서 가운데 틀림없이 추천작이다.



8. 마거릿 드레블, <찬란한 길>


  조선의 혜경궁 홍씨를 모델로 쓴 소설 <붉은 왕세자빈>의 작가 드레블의 삼부작 가운데 첫 번째 작품. 이 책이 다른 출판사의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왔으면 모두 출판했을 거 같다. 1979년 12월 31일의 신년 파티가 작품의 시작이니 위에 소개한 작품과 비교하면 제일 현대물이다. 1979년? 마거릿 대처가 집권하고 다음 해인 1980년에는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등극해 천박한 신자본주의의 전성기를 마련하는 기념비적인 송구영신의 장이 1979년 12월 31일이겠지. 이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신개념의 고전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읽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후속작품의 번역본이 나오지 않아 아쉽다.



9. 윌리엄 매이크피스 새커리, <신사 베리 린든의 회고록>


  정말 우습게 알았던 새커리. 오래 전에 <허영의 시장>을 별로 인상깊게 읽지 않아 조금 실망하던 차에 제임스 미치너가 <소설>에서 반드시 평가절하해야 할 영국 작가 네 명 가운데 한 명으로 꼽는 바람에 우습게 알았던 작가. 그러다가 이 책 읽고 쌍코피 철철. 아오, 새커리가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가였구나! 대오각성해서 이 책 좀 읽어보라고 세계만방에 고했거늘 아직도 즐겨 찾아 읽는 독자가 별로 없는 것이 안타깝다. 신사 베리 린든은 말 그대로 신사 그 자체. 라고 주장하는 엽색 사기꾼. 이의 천방지축 설레발을 찾아 읽는 일이 이리 즐거울 수 있을 거란 걸 미쳐 몰랐던 인종이 나 말고도 무척 많을 걸?



10. 패트릭 화이트, <전차를 모든 기수들>


  호주에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패트릭 화이트. 나도 아무 기대 없이 그냥 대산세계문학총서 라는 타이틀 딱 하나 보고 사서 읽었는데, 세상에 이게 웬 일? 한 방에 껌뻑 넘어가서 이이의 단종된 단편집 <불타버린 사람들>을 헌책방에서 사서 읽었고, 지금 새로 번역해 나온 두 권짜리 장편 <폭풍 한 가운데>를 희망도서 신청해서 기다리는 중이다. 말이 필요 없다. 아직 화이트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것이 아쉽고, 그리하여 고조선 때인가, 당나라 때인가 을유문화사가 찍은 두 권짜리 <인간의 나무> 헌책도 사 읽어보려 했다가 활자가 너무 작아 이미 찌든 시력이 받쳐주지 못해 그냥 보관 중이다. 조여청사모성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열 권을 다 마쳤다. 그러면 뒷 번호에 배치한 작품들은 어쩌냐! 맞다 그래서 열 권에 딱 두 권만 더 보태자. 괜찮지?



11. 레일라 슬리마니, <타인들의 나라>


  2018년에 공쿠르상을 받은 <달콤한 노래>라는 별 볼 일 없는 작품 때문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가 대박을 친 작품. 작가 슬리마니 가계를 모델로 쓴 삼부작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라는데, 이 책 읽어보면 2부와 3부가 왜 아직도 번역 출판되지 않았는지 한숨을 멈추지 못하리라. 알자스-로렌 지역이라 하면 예전 교과서에 나온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무대인데, 여기 출신 어린 아가씨 마틸드가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에서 징병당해 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병사 아민과 결혼해 모로코에 가서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 당연히 이슬람 문화 속에서 갖은 고초를 겪게 되는데 이게 무척 재미있다는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슬리마니를 다시 봤을 정도이니 한 번 읽어 보고 싶으시지?




12. 쥴퓌 리바넬리, <세레나데>


  이 책을 얘기하지 않고 대산세계문학 200을 마치기는 정말 아쉽다. 인종, 종교, 피부색, 젠더, 핸디캡, 지위, 국적에 관한 모든 차별을 반대하는(것처럼 읽히는) 정서 안에서, 유대인 여성을 사랑하는 아리안족 노 교수의 끝내 잊지 못하는 사랑 때문에 독자는 눈물이 앞을 가릴 것이다. 부르주아 출신의 좌파이고 진보적 성향의 작가는 이 막시밀리언 바그너 교수와 나디아의 사랑 이야기에 보태 진정한 문학에 관한 논의도 보태고 있으니, 아마도 이 책을 읽은 독자는 나처럼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명저 <미메시스>를 찾아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 냉혹한 한파가 몰아치는 보스포루스 해변에서 미친 듯이 한 여인을 위한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노 신사. 그 잔영이 쉽게 가시지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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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7-10 19: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허걱
올려주신 책 중 읽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천천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Falstaff 2026-07-10 20:28   좋아요 2 | URL
대산총서가 사실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잖아요. 근데 좋은 책들이 곳곳에 숨어 있더라고요. 새 털같이 많은 나날입니다. 천천히 읽으셔요. ㅎㅎ

곰돌이 2026-07-10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물 같은 페이퍼! 일찍이 폴스타프님께서 올려주신 글을 보고 <드리나 강의 다리>와 <세레나데>를 담아두었는데, 저도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또 오세요...ㅎㅎ

Falstaff 2026-07-11 04:14   좋아요 1 | URL
아이쿠, 틀림없이 과찬입니다.
천천히 읽으셔요. 세상에 책이 없습니까, 시간하고 돈이 없지. ㅋㅋㅋ

다락방 2026-07-11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드리나강의 다리를 읽은 저는 뿌듯합니다. 게다가 남과북 은 가지고 있어요. 전 남과북 을 영화로 먼저 봤습니다. 이 페이퍼 너무 좋네요. 붉은 수수밭도 영화로 봤는데 책으로 읽어봐아겠어요. 이런 페이퍼 베리베리 땡큐입니다!! >.<

Falstaff 2026-07-11 17:49   좋아요 0 | URL
ㅎㅎ 고맙습니다. 다락방 님도 문학 책 다시 보시는 거 같아서 반갑더라고요!

coolcat329 2026-07-11 0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흑...가지고 있는 책(역시 폴스타프님의 추천으로 구입)은 몇 권있으나 역시 읽은 책은 한 권도 없네요! 그렇지만 저도 대산세계문학은 정말 볼때마다 기분좋고 든든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적립금 모이면 몇 권 더 구입해야겠습니다. 이런 페이퍼 너무너무 좋아합니당!

Falstaff 2026-07-11 17:50   좋아요 1 | URL
살살 읽어보셔요. 책 값을 제대로 하는 시리즈 아닙니까. ㅎㅎㅎ

얄리얄리 2026-07-13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산세계문학총서에서 몇 권 못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그 몇 권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최고라면 [드리나 강의 다리]였습니다! 음 그리고.. 제일 웃겼던(?) 건 [가르강튀아]였네요..

Falstaff 2026-07-14 05:08   좋아요 0 | URL
<드리나 강의 다리> 좋아하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옙. <가르강튀아> 저도 무척 웃었습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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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상반기엔 몸이 한 번 훅 간 것 같더군요. 그래서 술을 좀 줄였습니다. 술을 줄였더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간이 너무 남아 돌아요. 덕분에 책을 더 읽게 되더군요. 

  틀림없이 권여선의 책은 오늘 다 읽을 것이니까, 올해 상반기 까지 모두 142권, 4만8천7백 페이지를 읽게 됩니다. 읽다보니 연초에 마음먹은 대로 두꺼운 책을 제법 많이 읽었습니다. 

  부러워하지 마세요. 생업이 있잖습니까. 위 표는 생업이 끝나 이제 가진 거라고는 여유밖에 없는 사람의 취미생활 내력일 뿐입니다. 오늘은 또 반 년을 지운 기념으로 술 한 잔 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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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6-30 0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기다렸어요.

Falstaff 2026-06-30 06:40   좋아요 1 | URL
에쿠... 이걸 기다리시는 분도 계셔요? ㅋㅋㅋ

페넬로페 2026-06-30 0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에겐 책이 있다네~~
눈과 허리 보호하시면서 책 읽으세요.
후반기도 기대하겠습니다.

Falstaff 2026-06-30 16:05   좋아요 1 | URL
아휴, 말씀 맞습니다. 요즘엔 눈도 눈이지만 허리가 이게 장난이 아니러다고요. 뭐 다들 이렇게 사는 거죠. ㅎㅎ

다락방 2026-06-30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어마어마하네요, 폴스타프 님!!

Falstaff 2026-06-30 16:05   좋아요 0 | URL
백수가 할 줄 아는 게 하나밖에 없어서 말입죠. ^^;;

꼬마요정 2026-06-30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져요!! ㅎㅎ

Falstaff 2026-06-30 16:05   좋아요 1 | URL
에휴, 안 멋있습니다. ㅎㅎ

닷슈 2026-06-30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야 대단합니다 저는 연간 100권 정도가 다입니다

Falstaff 2026-06-30 16:06   좋아요 1 | URL
아주 정상적으로 사시는 겁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백 권도 대단해요!!

자목련 2026-06-30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한 목록입니다!
술 한 잔, 그 곁에는 또 어떤 책이 있을까요?

Falstaff 2026-06-30 16:08   좋아요 1 | URL
음.. 지금 네미롭스키, 전욱진, 킨케이드, 그리고 제니퍼 이건이 있군요. ㅎㅎㅎ 오늘 얼른 집에 와서 돼지고기 고추장 찌개 끓이라는 마눌 연통이 와서 맛있게 쐬주 한 병 깠습니다. 얼큰하네요. 제가 마시는 쐬주는 25도짜리랍니다. ㅎㅎㅎ

blueyonder 2026-06-30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책을 어떻게 하루에 한 권씩 읽으시지요? 저는 시간이 많아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책, 거기에 가끔씩 술, 멋지시네요!

Falstaff 2026-06-30 16:09   좋아요 1 | URL
하는 일 없는 연금생활자는 가능하더라고요. 이런 거 결코 자랑 아니더라고요. ㅎㅎ

hnine 2026-06-3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었던 책 다시 읽어보고 싶을 때는 없으신가요?

Falstaff 2026-06-30 16:13   좋아요 0 | URL
지난 반기에도 소포클레스 전집하고 황동규는 다시 읽은 책인데요.... 마음 속에 남은 책을 다시 읽는 것도 시간이 많이 남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지, 아직 못 읽은 책이 그렇게 많은데 왜 이미 읽은 책을 읽겠습니까. 그간 못 읽은 책 읽는 게 훨씬 좋을 듯해서 말입죠.

딸기홀릭 2026-06-30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부럽습니다

Falstaff 2026-06-30 16:13   좋아요 0 | URL
ㅋㅋㅋ 부러울 것도 없고, 부러워도 하지 마세요. ^^

coolcat329 2026-06-30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일하실 때 독서량도 저 같은 사람에겐 완전 넘사벽이었어요. 살 빼신 것만 봐도 정말 한다면 하는 분! 대단하세요. 👍

Falstaff 2026-06-30 21:23   좋아요 1 | URL
고마우신 쿨캣님, 옛 일을 다 기억하시네요.
그냥 어떻게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뭐 별 거 없었습니다만... 운동화 몇 켤레만 가지고 살 빼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ㅋㅋㅋ 꼭 이렇게, 아직도 잘난 척을 해야 직성이 풀리니 이걸 어쩝니까. ㅋㅋㅋ

독서괭 2026-06-30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목록입니다!! 은퇴했다고 누가 다 이렇게 부지런히 살 수 있나요. 전 맨날 빈둥댈 것 같은데 ㅎㅎ

잠자냥 2026-06-30 23:44   좋아요 0 | URL
응 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6-06-30 23:4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머얏!!

잠자냥 2026-06-30 23:53   좋아요 1 | URL
빈둥괭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6-07-01 03:49   좋아요 1 | URL
안 그러실 겁니다. ㅎㅎㅎ

얄리얄리 2026-07-01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럽습니다. ㅎㅎ
저는 생계전선에서 물러나더라도 이렇게 읽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구만요. 그래도 상상만으로도 하루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6-07-01 18:21   좋아요 0 | URL
충분히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일 안 하니까 새 세상이 열리는 것 같더라고요!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6-07-01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백작님 같은 삶이 워너비입니다...일 안 하고 책보고 독후감만 쓰고 싶음...멀었네요 흑흑

Falstaff 2026-07-01 21:12   좋아요 1 | URL
ㅎㅎ 은퇴하면 정말 좋아요. 그래도 집안 일은 좀 해야 합니다. 황태미역국, 돼지고기 고추장찌개, 간장 제육볶음, 들깨 머윗대 볶음 같은 것도 하고, 청소기도 돌리고 ㅋㅋㅋ 나머지는 걍 책 읽고, 술 마시고, 졸리면 아무때나 자고... 신선이 따로 없답니다.
 
믿음의 기원 1 - 믿음의 기원
박해성 지음 / 지만지드라마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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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편을 한 권에 담으면 덧나? 뾰루지 생겨? 알레르기 있어? 지-드라마 일본현대희곡집은 한 권에 다섯 편 실어주던데.
잘 생각하셈. 희곡 독자가 별로/거의 없는 세월에 이렇게 꼬장 부리다가 희곡 출판이 다 거덜 날 수도 있지 않겠음둥? 나도 읽으려다 말았다는 건 안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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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노트에 약 140편의 오페라 작품에 나오는 사랑의 듀엣에 관한 메모가 있습니다. 이번 세기 초에 쓴 거니까 벌써 20년도 넘은 잡글들이군요. 오늘은 일요일 아침을 맞아, 제가 좋아하는 사랑의 이중창 가운데 다섯 곡을 골라 소개해볼까 합니다.



5. 푸치니, <나비 부인>



푸치니한테는 진짜 오페라스러운 무엇인가가 있다. 가슴이 저릿저릿, 등뼈부터 소름이 쪼옥 끼치는 감칠맛. 사르비아 꽃을 따 쪽쪽 빨아먹을 때의 그러한 미각을 푸치니에게서 느낄 수 있지 아니한가.


일본 소녀 쵸쵸상. 15세 아가씨니까 소녀라고 불러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거다.

그녀가 미국인 핑커톤한테 시집가는 날. 쵸쵸상은 자기가 가진 거의 모두를 포기하고 기꺼이 미세스 핑커톤이 되기로 한다. 근데 가문에 본조라고 하는 이름의 아저씨가 있다. 일본은 잡신의 나라. 그만큼 미신이 창궐하는 동네도 드물다. 때때로 본조를 불교의 승려로 연출하는 오페라도 있는 듯한데, 그거 정말 무식한 짓이다. 하여간 본조 아저씨가 보니, 조카딸 쵸쵸가 자기가 믿는 잡신을 버리고 기독교 나라의 서양놈한테 시집을 가니, 이건 분명히 배교 행위라, 결혼식장에서 쵸쵸상~ 쵸쵸상~ 조카딸을 불러 호통을 치며 깽판을 부린다.

핑서방이 그 경황을 당한다. 이것들, 깝데기 노란 야만스런 놈들이 시방 무슨 짓거리들이야.

999년 동안 임대를 한 집에서, 백인의 아내로 맞아준다면 엎드려 칭송은 못할 망정 깽판을 쳐? 에라 이 무식한 것들아, 당장 내 집에서 꺼지지 못하겠느냐! 입에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뛴다.

집 주인이 가라는데 어떻게 해. 가야지.

근데, 쫓겨나는 사람들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턱이 없다. 본조 뿐만 아니라 친척들 모두가 한 마디씩 한다.

쵸쵸상, 우릴 버린 년, 네년의 뱀같은 영혼은 끝내 정처없이 떠돌고 말리라!

악담을 하는데, 아.... 오페라에서 악담과 저주는 언제나 틀리는 적이 없다는 거. 이거 이제는 다들 아시는 바, 비극을 예언했구나.


그리하여 쵸쵸상 친구들과 친척들이 몽땅 무대에서 쫓겨나가자 핑서방과 쵸쵸상만 무대에 남아, 정말 달착지근하게 노래하는 이중창.

으아.... 난 <나비 부인> 가운데 이 장면이 제일 좋다.

좋아? 물론 좋기만 한 건 아니지.

이제 바야흐로 시작하는 첫날 밤의 행사.

둘은 더할 수 없이 감미로운 세속의 사랑노래를 하며 신방으로 드는데, 아이구... 짠한 것.

열 다섯 살의 어린 동양 애가, 털복숭이 건장한 서양인한테, 아이구.... 을매나 아팠을꼬... 내 가슴이 다 미어진다.


3번은 발췌반 말고 전곡반으로...






4. 베르디, <오텔로>


사랑.... 어렵다.

그게 두 명이 하는 게임인데다가, 남자는 여자를 죽어도 모르고, 여자 역시 남자는 까무라쳐도 알지를 못한다. 게다가 속 마음이란 것이 곱창 뒤집어 헹구듯 홀딱 까놓고 보여줄 수 없는 거라서 복장 터지는 일이 한 두개가 아니다. 여기 까지는 보통의 선남선녀들이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앞으로 겪을 당연지사이자 사랑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숙명인데, 둘 중 하나가 또한 치유할 수 없는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젠 정말 뒤집어지는 일만 남았다.


한 쪽이 심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쌍.... 물론 그 컴플렉스를 극복해서 잘 살고 있는 많은 커플을 제외한 나머지 지극히 일부의 경우엔....

이해는 신뢰를 낳고, 신뢰를 바탕으로 사랑을 낳고, 사랑은 갈등을 낳고, 갈등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불신을 낳고, 불신은 질투를 낳고, 질투는 눈물을 낳고, 눈물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파멸을 낳으니, (무슨 성경 구절 같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 사랑의 잘못된 진화는 질투와 눈물과 파멸?


그걸 셰익스피어는 <오셀로>에서 진짜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사랑의 편지가 잘못 배달된 단 한 번의 사소한 실수가 자신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그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의식의 혼돈을.

오셀로와 데스데모나는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지독한 중독 증세를 보여준다. 사랑 자체가 사실은 중독과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 그 중독 증세로 인해 오해의 골은 깊어가고, 사랑 또한 유클리트 물리학이 적용되는지라, 뉴톤의 제 3법칙에 따라 오해가 깊어질수록 반작용으로 사랑 또한 깊어지니 이 아니 아이러니일소냐.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목졸라 죽일 수밖에 없는 건, 일찌기 최무룡과 김지미의 말대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불멸의 잠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니,죽음 만큼 확실하게 헤어지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오셀로>에서 배우는 교훈은?

1. 편지 심부름은 똘똘한 놈한테 시키자.

2. 손수건 함부로 버리거나 내돌리지 말자.

3. 남자 앞에서 다른 남자 얘기할 때 눈치 보자.

4. 여자 앞에서 다른 여자 얘기는 죽어도 하지 말자.

5. 열 받을수록 한 번 더 솔직히 얘기해보자.... 뭐 이런 건가?


어쨌거나, 베르디의 <오텔로> 가운데 1막 마지막 장면을 올리면 좋은데, 그건 그동안 너무 많이 붙인 거라 식상해서, 오늘은 로시니의 <오텔로> 마지막 씬, 바야흐로 데스데모나 혼자 자는 방에 오텔로가 몰래 들어와, 와따 그 년, 죽이려고 보니까 뒤집어지게 이쁘기도 하네... 아리아 한 방 때린 다음, 데스데모나가 잠에서 깨 죽을 때 까지의 이중창, 그야말로 목숨 건 사랑의 장면을 올리려다가 그냥 베르디로 가자. 내 맘이니까.


1번 토스카니니, 2번 카라얀 판은 평생 듣는 인생반. 3번은 젊은 시절 황금의 델 모나코가 어땠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만든 판.





3. 모차르트, <돈 지오반니>



<돈 지오반니>의 사랑스런 이중창이다. 너무 사랑스러워 후세 폴란드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쇼팽도 이 주제를 사용하여 초기에 관현악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쇼팽의 경우엔, 작곡가 신출내기로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만들었다는 뒷소문이 횡행하기도 하지만.
바로 돈 지오반니와 촌년 체를리나의 이중창 "내 손을 잡아요."

입술과 혓바닥에 참기름을 좌악 바른 돈 지오반니. 결혼식 예비 잔치에서 눈에 확 들어온 신부 체를리나를 어떻게 해서든지 자빠뜨려 보려고 꿀꺼덕, 침을 삼킨다. 그는 저 멀리 보이는 휘황찬란한 성을 가리키며, 저게 내 집이여. 나하고 살지 그래? 그렇게만 된다면 넌 저 멋있는 성의 안주인이 되는 거야. 평생 호강하면서 사는 건 두 번 얘기하면 잔소리지.
무지랭이 체를리나가 보기에도 이거 잘 하면 팔자가 확 필 찬스다. 근데 신랑으로 예비된 마제토 보기가 조금 거시기하고, 귀족 놈들이 자기 같은 농민 계급의 아가씨를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겨 딱 한 번 맛을 보신 다음에 나 몰라라 하고 뻥 차버려, 시집도 안 간 아가씨 배가 남산 처럼 부풀어 오른 것을 여러번 본 바라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참에 팔자를 한 번 고쳐봐? 더군다나 이렇게 잘 생기고 매너도 죽여주는 귀족 아저씨가 결혼을 하자니 이거 참....
갈팡질팡. 그러나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지오반니 나리의 달콤한 속삭임이라니. 으이그....





2. 핸델, <롱고바르디의 왕비 로델린다>


예전 롬바르디아 왕국에는 참으로 한심한 남자, 베르타리도가 왕을 먹고 있었다. 아무리 한심하더라도 역시 오페라의 주인공답게 재주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여자 고르는 솜씨. 베르타리도는 롬바르디아 전 국토를 뒤져 자기 영토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현명하며 가장 정숙한 여자를 뽑더니, 다른 나라의 왕자들하고는 달리 온갖 정성을 바쳐 소위 연애를 했다. 왕자가 연애를 해? 당시엔 필요없는 절차였다. 하지만 여자 고르는 재주 딱 하나밖에 없는 베르타리도는 자기 전공과목을 십분 살려 석삼년 동안 그 처녀, 로델린다한테 공을 들였다.

왜냐하면, 로델린다가 당대가 요구했던 여인의 덕목들을 정말로 잘 지킬 수 있는여자인지 관찰하기도 하고, 한 눈에 반했지만 그녀가 갖고 있는 심성이 자기한테 찰떡처럼 들어맞아 소위 성격차이로 인한 불화가 생기지 않을 것인지를 꼼꼼하게 따진 다음, 이 여자 로델린다야말로 일국의 국모로서도 손색이 없고, 한 남자의 지어미로도 까탈을 잡을 수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 기간이었던 거다. 그러니 전공이 여자 고르기였다는 건 베르타리도가 사실은 무척 소심한 사람이었다는 걸 증명하기도 하는 것.


베르타리도는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마누라 고르기를 무사히 마친 다음, 안타깝게도 더 이상 자기 전공과목이 세상을 무사히 살다가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데는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그냥 태평세월이겠거니, 맨날 하는 일이라곤 예쁜 마누라 궁둥이만 슬슬 쓰다듬는 것 뿐이었으니 나라 꼬라지가 잘 될 턱이 없었다. 설사 태평성대라 할지라도 백성들을 언제나 긴장하게 하지 않으면 어디선가 황룡이 쇠하는 기운이 뻗친다는 철칙을 무시한 군주의 죄를 물을 수밖에 없으리.


근데 반역을 일으킨 그리모알도 백작 역시 한심하긴 마찬가지. 처음부터 그는 제대로 된 반역도 되지 못할 인물이었다. 그리모알도가 왜 반역을 일으켰느냐 하면, 억눌리고 핍박받고 무거운 세금을 짊어진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능하지만 그렇다고 나라에 망조가 들 만큼은 망가지지 않은 롬바르디아의 재건을 위해 힘줄을 돋워 자신 한 몸을 바치기 위해서도 아니고, 이웃나라가 호시타탐 롬바르디아를 넘보고 있어 이대로 있다가는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 총각 때부터 늘상 군침을 흘리던 로델린다의 속고쟁이를 어떻게 한 번 벗겨볼 수 있을까 하는 정념 하나 때문이었다. 원래 꿩 대신 닭이라고 로델린다가 왕한테 시집을 가버리자 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외모 하나는 빠지지 않는 에두이제로 만족하고 맘잡아 살아보려 했던 그리모알도. 이제 꼭지가 돌아 베르타리도건 에두이제건 간에 모두 제거해버리고 그저 애 하나 딸린 로델린다 만을 꿈꾸며 반역을 일으켜버렸던 거다.

반역이 어떻게 됐느냐고?

반역의 마지막 삼각지 전투에서 최정예인 친위대를 전멸시켰는데 시체들 틈에 찬란한 갑옷을 입은 베르타리도 왕도 누워 있었다 전한다. “전한다”는 무슨 뜻인가. 베르타리도를 죽여 그 시체를 가져온 병사에게 후한 상급을 내리겠다는 모사 그리발도의 명령을 좇다보니 이미 죽은 베르타리도 시체 주변의 반역군들이 너도 나도 베르타리도의 시신을 차지하기 위해 난도질을 쳐, 왕의 갑옷은 확실하지만 갑옷을 입었던 것이 과연 베르타리도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는 거였다.

하여간 왕의 갑옷이 시체더미에서 발견되었으니 국상은 치뤄야 하는 법. 로델린다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갑옷과 살점 몇 개를 수습해 왕릉도 아니고, 예전에 롬바르디아를 침략했다가 죽은 훈족의 왕 무덤 옆에다가 조그만 봉분을 세우고 망해버린 왕조 앞에서 스스로 혓바닥을 콱 깨물어 죽어버리려 했다가… 참았다.

이 상황에서 오페라는 시작한다.

근데 사실은 베르타리도가 죽지 않았다. 충성스런 신하가 왕의 옷을 입고 대신 죽어준 것. 그리하여 궁궐 근처 자기 묘지 부근에 등장한 베르타리도는 마침 산소를 찾은 마누라 로델린다와 상봉을 하는데, 왕이란 것이 그저 아내가 정절을 지켰는지 그것에만 관심이 있다. 나라야 말아 먹었건 말건.


알란 커티스 아니었으면 핸델의 오페라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을 듯.





1. 베를리오즈, <트로이 사람들>


세상에나... 이런 슬픔이 있을까.
이별을 앞에 두고, 거역할 수 없는 이별의 명령을 받고도 인간의 눈엔 사랑의 화염이 활활 타올랐으니, 애초부터 이들의 사랑은 하염없는 비탄의 불씨에서 비롯했다. 디돈과 에네.

혹은 길고 긴 절망의 항해에 지친 에네. 디돈을 처음부터 한 시절의 놀이로 생각하고 벌인 엽색?
아, 이런 속된 생각은 말자. 만일 그러했다면 수십 세대가 흐른 다음 어느 작곡가가 있어서 이렇도록 아름다운 이중창을 만들 수 있었겠는가.
디돈. 기울어져가는 조국의 운명을 트로이에서 온 불멸의 영웅 에네에게 기대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어느덧 사랑으로 번지고, 에네, 새로운 땅으로의 항해 가운데 그녀를 만나 디돈의 탄식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사랑이 될 줄이야.
아직 그들은 고통을 짐작만 할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 될 것인지 모른 채.
이들의 사랑은, 이미 중년의 연배가 되어버렸으나 아직도 가슴 속에선 사춘기 시절의 애뜻함이 온전하여 이미 이 아름다운 밤의 희열 속에서조차 슬픔이 뚝뚝 묻어 떨어지니, 이별의 순간이 온들 어찌 둘의 사랑마저 식겠는가.
그러나 식지 않은 사랑이 오히려 더 쓰라린 법. 아름다움 속에는 슬픔이 들어있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이들의 이중창은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리하여 더욱 하염없이 아름다울 뿐이다.


콜린 데이비스 음반 강추. 굳이 비교하자면... 비교는 뭐하러 하나? 그냥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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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6-14 0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절하고 로맨틱한 이중창! 폴스타프님과 잘 어울려요. ㅎㅎ 앵콜 무대(?)도 기대할게요! 브라비!

Falstaff 2026-06-14 06:17   좋아요 1 | URL
ㅎㅎㅎ 듣기 괜찮았습니까? 아휴, 좀 그러셨어야 하는데요. ^^;;

페넬로페 2026-06-14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 뿐만 아니라 오페라까지
이리 잘 아시다니요👍👍👍
1,2,4번은 잘 모르는 곡이예요
한 곡씩 들어보겠습니다.
저도 앵콜 무대 기대하고 있어요!

Falstaff 2026-06-14 15:12   좋아요 1 | URL
에휴, 뭘요. 문학도, 음악도 둘 다 (이런 말이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후루꾸라는 말입죠. 그저 평생 아마추어, 기껏해야 딜레탕트 인생인 걸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