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국 지구를 맡게됐다. (앗, 이런 캡틴플래닛같은 발언? ㅋ)

지구는 학교를 휴학하고 2002년 처음 아동부 교사를 맡았을 때 담임을 맡았던 아이라 나에게는 좀 각별한데 우여곡절 끝에 올 해, 중3이 된 지구를 다시 맡게 됐다. 작년 지구를 맡으셨던 S선생님이 의외로 너무 힘들어서, 나 역시 살짝 걱정이 되긴 하지만, 어쩐지 지구에게 나만이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을 것 같다는 마음에 선뜻 그러겠다 했다. 사실 바랐던 일이기도 하고.

2

예배에 있어서의 올해의 키워드는 마이크를 내려놓다,가 아닌가 싶다. 아동부에서 잡았던 마이크, 찬양단으로 잡았던 마이크 다 내려놓고 뒤에서 파워포인트를 만들고, 넘기고, 묵묵히 한 아이의 선생님이 되는 것. (우리 교회는 작아서 내가 맡은 아이가 한명 뿐이다) 부족하기 그지없는 자가 마이크를 들었다는 게 그간 나의 가장 큰 부담이었나보다. 전혀 줄지 않은 사역량에도 (-_-) 마음이 편안한 걸 보니. 부디 내년 한해, 사람들 앞에서 들었던 마이크를 나에게로, 하나님께로 기울일 수 있길. 그러기 위해서는 또 몇가지 결심들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3

작년에 이은 송년회. M언니가 빠진 걸 제외하면 멤버는 그대로이나, 우리는 좀 더 서로에게 할 말이 많아진 것 같다. 그래서 참 다행스럽기도 하고. 지난 번에도 잠깐 얘기했지만, 나는 그나마 올 한해 스스로 기특하게 여기는 게 있다면, 고맙다는 말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건데, 오늘도 서로 카드를 쓰는 과정에서,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 함께해줘서 고맙다고, 계속해서 내 삶 속에 존재해줬으면 좋겠다고. 표현은 모두에게 달랐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말이었던 것 같다. 아, 이 말이 이렇게 진심으로 툭툭툭 튀어나올 줄이야. 내년에는 좀 더 적은 사람들을 깊게 만나고 싶다. 난 진심으로, 내가 그랬으면 좋겠다. 누구 말처럼, 만인의 연인(만인도 나도 인정할 수는 없지만 -_-)이 아닌, 소수의 사람들과 더욱 깊고 친밀한 누군가이길.

4

내일(30일)이면, 진짜 '내일모레'가 서른인 날이다. 고백하자면, 좀 난감하다. 정말. 하하하. 그렇다, 오늘의 우리는 사실 총체적 난국 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 하하. 좀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발악을 하던 우리의 내년 한 해가 어떨지, 참 궁금하다. 과연 우리는, 오늘 이야기한 내년의 가정을 현실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한가지 사실은, 내년에도 그렇게 여전히 서로의 삶에 존재해줄 것이라는 것.

5

올해의 문장으로 나는 김수영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며를 꼽았다. 이 시 앞에 서면 나는 또 난감해진다. (난감하다,라는 표현이 이렇게 유용한 삶이라니 -_-) 올해는 나 자신이 참 작은 존재라는 걸 끊임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한 한 해였다고, 사소한 일에만 분개하며, 정작 큰 일 앞에서는 속수무책해지는 나 자신의 작음 앞에, 나는 어찌해야할 바를 잘 몰랐고, 또 여전히 잘 모르겠고 그렇다.


* 지금 듣고있는 게 오, 사랑! 이라 제목이 이모양이다. 하하. (제목달기 너무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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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12-29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이름이 지구예요? ^^

웽스북스 2008-12-29 12:06   좋아요 0 | URL
넹넹 김지구 ㅋㅋ
돌림자가 '구'라서 부모님이 고심좀 한 이름 ㅋㅋ

무스탕 2008-12-29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와타리 사키라는 일본 작가가 그린 '나의 지구를 지켜줘' 라는 만화책 보셨어요?
끝내주는 책이에요!! ^^b

웽스북스 2008-12-29 12:10   좋아요 0 | URL
오홋! 그렇군요~ ㅎㅎ 어쩐지 우리 지구를 위해서 봐야할 것 같은데 말이죠. ㅋㅋ

깐따삐야 2008-12-29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하핫! 드디어 웬디 요정이 지구를 맡기로 했군요.
2 묵묵히 한 아이의 선생님이 되는 것. 좋아요.^^
3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근데 결혼하면 인간관계의 폭이 더욱 좁아진다는. ㅠ
4 헉! 내년의 가정을 내년에 가정을 일군다는 말로 보았다는. 연애하셔용.
5 그걸 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다행인 것 같아요. 사소한 것이나 큰 것이나 그저 무대뽀로 나오는 뻔뻔함이 더 큰일이죠. 나이 먹을수록 그러지 말아야 할텐데 말여요.

웽스북스 2008-12-31 00:59   좋아요 0 | URL
1. 헤헷 웬디 요정이 지구를 지켜야 되는데, 나는 웬디 사람이어서 큰일이에요.
2. 깐따삐야님도 내년에는 선생님 모드로 돌아가겠지요?
3. 어욱 그렇구나 ㅜㅜ
4. 으하하하. 내년에 가정을 일구려면 얼른 만나야할텐데.
5. 그러게말이에요. 그래도 조금씩 자신을 키워나갈 수 있어야할텐데 으흑.

순오기 2008-12-29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지구~~ 넌 복있는 녀석이 분명해!!

웽스북스 2008-12-31 00:59   좋아요 0 | URL
앗 감사드려요 순오기님 (__)

L.SHIN 2008-12-30 0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지구를 맡게 되었다' 에서 화들짝 놀란 지구 담당 외계인...-_-
(결국 다른 댓글 보고서야 '중3 된 지구'가 무슨 뜻인지 알은..으하하하핫..;;)

4. 제 주변에도 웬디님처럼 '내일모레가 서른이야~'를 입에 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죠. 생일날 계란 30개를 삶아주겠다고.
웬디님도 같이..?

웽스북스 2008-12-31 01:00   좋아요 0 | URL
아아아아 너무해요 너무해요
전 삶은 계란은 두개 이상 못먹어요. ㅋㅋ

지구 담당 엘신님, 우리 지구좀 맡아주세요. 흐흐흐.

L.SHIN 2008-12-31 07:26   좋아요 0 | URL
케챱도..같이 줄게요.
그럼, 목이 메이지는 않을 것...으하하핫..;; ( -_-)

니나 2008-12-30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십대도 이십대와 똑같을 까봐 난감하다 (김훈 난감 따라하기)

웽스북스 2008-12-31 01:00   좋아요 0 | URL
아주 우리 그냥 난감해 꽂힌거지.
계속 난감함에 꽂혀 있을까봐 난감하다.
(난감 넌사과)

니나 2009-01-02 22:05   좋아요 0 | URL
감사드려~ 주께 감사드려~ (이 찬양부를때마다 난감ㅋ,)

웽스북스 2009-01-03 01:45   좋아요 0 | URL
이 찬양 부를 때 니가 감이면,
나는 주님께 널 사드리면 되는 거지? ㅋㅋ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대신에 왕궁의 음탕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십사야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하고 있느냐고 놀린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위에는 서있지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원 때문에 십원때문에 일원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원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만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만큼 적으냐
정말 얼만큼 적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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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2-29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수영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입니다.^^

웽스북스 2008-12-29 12:11   좋아요 0 | URL
어이쿠 람혼님도 공감하시는군요
하지만, 람혼님보다는 제가 더.... 비겁한 삶을 사는 것 같은데... ㄷㄷ
 



1

왜였을까

2년 전에 한 번 그만뒀던 피아노가
또 다시 치고 싶어졌던 이유는

딩동댕동 딩굴댕굴
오늘 찬양연습 마치고
약 세시간 정도 반주 연습을 하면서
비록 C코드밖에 못치는 검은건반 공포증이지만
그래도 어찌나 기쁘고 즐겁던지

혼자서 막,
찬양팀 그만둔 김에 2010년에는
반주자로 복귀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하고, 혼자 좋아하고. 하하.


2

그러니까,
아직 공개되지 않아 밝히지는 못했지만
오늘은 마지막 찬양연습이었던 셈
마지막 아동부 파워포인트 작업
그리고 내일은 마지막 아동부 딩동 진행

싫다고 그만둬놓고는 아쉬운 심정은 뭐래니

그리고, 며칠 후면
이십대의 마지막날도 맞이하게 되는구나
이런. 반갑지 않은.

삶에 즐비해 있는 이런 수많은 '마지막들'
그리고 그와 함께 맞닿아 있는 '처음' '시작'이라는 말


3

호두까기 인형은, 굳이 따로 후기를 남길 건 없구,
예쁜 무대, 예쁜 옷, 예쁜 몸짓들, 익숙한 음악,이런 것들에
연말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 있어 들썩들썩하던 가운데,

나는 연말에 사람들이 호두까기 인형을 보는 건
새해 다이어트 다짐을 굳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 그 하늘하늘한 바람에 날리는 나뭇가지같은 몸들이
그만 너무 부러워져버렸다고요


4

재밌는 건,
인터미션 때 로비에 나와서 막 뛰어다니며
발레 동작을 따라하던 아이들

그러고보니 뮤지컬을 보면서는
들썩들썩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발레는 그저 마냥 부러울 뿐,
감히 따라할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면서,
이렇게 꿈꿀 수 있는 범위가 하나씩 줄어들어가는 거구나,라는,
절대 호두까기 인형 감상스럽지 않은 감상으로 마무리

(호두까기 인형 보고 이런 감상 남기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다)


5

이렇게 긴 휴가가 끝나가는구나 ^_^
이번엔 정말 잘 쉬고, 잘 놀았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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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8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8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08-12-28 0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중요한 것은 늘, '마지막'과 '처음'은 맞닿아 있다는 것. ^^

웽스북스 2008-12-28 14:57   좋아요 0 | URL
그쵸. ^_^

올해도 어느덧 마지막이 다가오는데,
엘신님은 올 한해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무지 바쁘셨던 것 같은데에...

메르헨 2008-12-28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찬양팀...이셨군요.
그냥 첫번째 글을 보면서 이 단어만 눈에 들어오네요.
찬양팀...
추억이 떠올라서 말이지요.
제가 지금 서른둘인데...이제 집사님 수준이라..하핫...^^

웽스북스 2008-12-28 14:58   좋아요 0 | URL
흐흐 메르헨님 서른둘이면 아직 어리신거 아닌가요? 아닌가? ㅋㅋ
(음 제가 이런말을 하는 건 좀 그런 건가요?)

메르헨님도 찬양팀에 얽힌 추억이 있군요. 저는 오늘 불면증에 벌개진 눈으로 다 잘 마치고 내려왔습니다. 하하.

2008-12-28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8-12-28 14:59   좋아요 0 | URL
흐흐흐 네네 알고 있었어요. 콘서트장에서도 현장판매를 했었는데
가사집이어서 거의 모든 곡의 가사를 이미 다 알고 있는 저한테는
크게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일단 버려뒀어요.

신곡은 앨범으로 사야죠. ㅎㅎㅎ (은근 짤없는 인간? ㅎㅎ)

Mephistopheles 2008-12-2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남에서 했던 호두까기 공연이 제법 화려했었는데 말입니다.(오케스트라 협연까지..강마에는 안나왔어요)

웽스북스 2008-12-28 14:59   좋아요 0 | URL
흐흐흐 강마에는 안나왔어도 이지아를 닮은 마님이 계시오니. ㅋㅋㅋ

예술의 전당에서 하던 것도 무대가 정말 예쁘더라고요. 사람들이 왜 보는 줄 알겠어요. 아, 그런데, 군무가 잘 안맞더라고요. ㄷㄷㄷ

Mephistopheles 2008-12-28 15:03   좋아요 0 | URL
ㄱㄹ은 나랏돈으로 월급이 나오니 배가 불러 연습을 게을리했나 보군요...^^

웽스북스 2008-12-29 12:11   좋아요 0 | URL
흐흐흐 그런가봐요. 사실 군무 부분은 좀 실망했었더라는.

무스탕 2008-12-29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출근길이 얼마나 무겁던가요? ^ㅠ^

웽스북스 2008-12-29 12:12   좋아요 0 | URL
어우, 정말 싫더라고요 ㅜㅜ
 



인생은 언제나 예측 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아르미안의 네딸들이라는 만화에 지겹도록 나오는 말이지. 하하. 여담이지만, 나는 이 말을 인턴 교육할 때 퀴즈로 내서 어느 만화에 나온 건지 맞히는 인턴에게 특혜를 준 적도 있었다. 뭐 별 대단치 않은 특혜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번에 맞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신기. ㅋㅋ

이 말을 내 삶에 적용해 본다면, 내 인생은 언제나 오류, 그리하여 생은 그 재미를 갖는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평일의 미술관 로망은 무슨. 오늘이 평일일 거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오류였다. 하하. 미술관은 정말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애시당초 계획한 2군데 (덕수궁 미술관과 시립 미술관) 투어 역시 한군데로 좁힐 수 밖에 없었다. 2시간 반이면 두군데를 보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한 것 역시 오류였다. 하하. 한군데를 그나마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5cm 굽을 신고 미술관을 종횡무진 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역시 오류였다. 마지막에는 진이 빠지더라. 오렌지 주스를 사먹고 100원이 모자라 작품정보청취기기(제목은 이게 아니지만, 3000원-보유현금 2900원)를 빌리지 못한 것도 그렇고, 그래서 한바퀴 다 돌고 나 아쉬움이 좀 남아 물어보니 카드가 됐던 것도 그렇고 -_- 정작 들고 들어가니, 도슨트는 아니지만 그만큼 박식하신 분이 그 기계보다 더 재밌게 설명해 주어서 그 기기가 거의 쓸모없게 된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럼에도, 혼자 가니, 참 좋더라. 역시 미술관은 혼자 가야되나봐. 처음으로 혼자 가봤던 전시회는 리움에서 했던 앤디워홀 전이었는데, 사실 그건 굳이 혼자 가서 찬찬히 볼 필요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시간을 조절하며, 다른 사람에게 맞추지 않고 여유롭게 보니 그 사실만으로도 참 좋더라. 다시 보고 싶은 것들 있으면 다시 보러 내려오면 되고, 혼자 종횡무진하면서 미술관을 돌아다녔던 것 같다. 여러 작품이 기억에 남지만 마티스나 샤갈, 피카소의 그림들보다도 더 내 마음에 들었던 작품들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글렌브라운이라는 작가의 <건축과 도덕>이라는 작품.



설명은 뭔가 기법적인 부분에 많이 치중했던데, 나는 그보다는 이 황폐한 느낌과 '건축과 도덕'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의 묘한 조화가 마음에 들었다. 뭔가 찬란하게 꽃피우려 하지만, 결국은 이토록 황폐하게 시들어가는 그 무엇이 어쩐지 현대인의 모습을 잘 표현해준 듯한 느낌, 아니나다를까 2004년 작이다.





피에르 보냐르의 작품 <미모사가 피어 있는 아틀리에>는 도무지 그 색감을 사진으로 살려낸 걸 찾을 수가 없다. 쏟아질 것 같이 화사하게 빛나는 노란 빛을 제대로 표현해 낸 사진을 넷상으로도 도록으로도 볼 수 없다는 것은, 역시나, 다녀오길 잘 했다 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특히나 피에르 보냐르의 작품은 유독 작품 곳곳에 드러난 터치감과 함께여야만 가능한 건가. 왼편 맨 아래에 있는 건 죽은 아내의 얼굴이란다. 루시드폴의 '당신 얼굴'을 BGM으로 깔아줘야 하는 순간이 온 거다.

그리고 호앙미로의 작품에도 눈길이 간다. 그의 블루 연작 중 두번째



'조화'라는 섹션에 있던 이 그림은 쉼과 평화, 조화의 의미로 많이 쓰이는 푸른 계열을 사용해 조화로움을 표현한 듯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 것 같은 어딘가 모를 불안감에 자꾸만 마음이 간다.

이번 전시는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자들>이라는 작품에 나타난 주제를 10가지로 구분하고 거기에 다시 '화가들의 천국'이라는 대주제를 부여해 해당하는 주제별로 그림을 분류한 기획 전시이다. 지금까지의 시대별, 혹은 작가별 전시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초반에 아르카디아의 목자드을 프로젝터로 쏜 실커튼을 뚫고 들어가면서 전시가 시작된다는 설정도 나름 흥미로웠고. 물론 조금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음, 이런 말만들기에 사실 끼워넣기가 없으면 안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냥 패스 ^_^

여전히 나는 미술에는 문외한이지만, 미술관에 한두번씩 다녀올 때마다 즐겁게 관람하는 나만의 방법을 터득해오게 되는 것 같다. 오늘까지의 버전은 다음과 같다.

1. 가급적 평일에 가세요. 저녁시간에라도 좋으니, 평일에 가세요. 주말에 두번만 치여보면 아마 다시는 주말에 가고 싶지 않으 거에요.
2. 가급적 혼자 가세요. 아니면 일정 시간을 정해놓고 보다가 다시 만나자고 해도 좋을듯. 서로 속도를 맞추며 걷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3. 해설오디오는 나중에 빌리세요. 이거 은근히 감상을 제한하더라고요. 뭔가 궁금증이 막 일긴 하지만, 오늘 써보니 사실 크게 해소해주는 것 같지도 않고, 꼭 필요하다면 한바퀴 돌고, 다시 그 그림 앞에서 보면서 듣는 게 더 좋을 것 같더라고요. 사실 오늘 써본 바로는, 해설 오디오보다는 소도록을 미리 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도 수록 수가 더 많으니.
4. 메모지를 챙겨가세요. 메모를 하면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마음에 드는 그림과 작가 이름을 적어오니, 집에 와서 좀 더 볼 수 있어 좋더라고요. 나만의 리스트를 만드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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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7 0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7 0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8-12-27 0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류와 시행착오의 반복...이건 뭐 시치프스 신화에 나오는 굴러 내려오는 돌과도 비슷...
가끔 원도우즈 블루스크린 같은 충격적인 일도 발생하기도 하고..^^ 그리고 전시회에 갈때는 가오잡는 복장보다는 누가 뭐래도 편한 복장이 쵝오!라는 사실...

웽스북스 2008-12-27 12:34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그렇더라고요.
아 어제는 전시회 티켓팅하면서 사람 많을 때부터
아아 삶이란 정말 오류야 오류의 연속이야 이랬었죠
그런데, 또 그래서 재밌는 것 같기도 하고요

으으 담번에는 플랫슈즈나 운동화를 신고 갈 거에요
정말 그럴 거에요. 으흑.

가시장미 2008-12-27 0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도 글도 멋져요. ^^ 저도 이번 클쑤마스에 미술관 가려고 생각했었는데, 감기 때문에 하루 종일 잤어요. ㅠ_ㅠ 연말에는 다시 백수가 된 신랑과 손 잡고 가봐야겠어요. ㅋㅋ 네 가지 중에서 2번 빼고 참고 할께요.

혼자서는 싫어 싫어효~!! _-_)~ 잉! 신랑이랑 같이 갈테야! ㅋㅋ

웽스북스 2008-12-27 12:36   좋아요 0 | URL
헤헤 셋이 같이 다녀오시겠네요. 가시장미님은 임신중이시니까, 좀 더 정적이고 고요한 느낌의 한국근대미술 전시에 다녀오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거기는 입장료도 공짜더라고요. 그렇게 좋은 전시를 하면서 공짜라니. ㄷㄷㄷ 덕수궁에서 신랑이랑 데이트도 하고, 그럼 좋잖아요. 좀 추우려나? 흐흐. 저도 3월 전에 꼭 다녀오려고요.

hnine 2008-12-27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페이퍼는 추천을 막 두번 드리고 싶어요.
퐁피두 특별전 티켓을 선물 받고도 못가보고 있는 1인입니다 흑 흑.
아이만 할머니, 할아버지 따라서 지난 화요일 다녀왔는데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하시길래 이상타 했었지요.
미술관엔 혼자 가는 것이 낫다는 말씀에 동감. 어디가나 도슨트 따라 다니며 듣는 것이 제일 생생하게 작품 설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더라구요.
<건축과 도덕>이라는 작품, 스크롤 다운 하면서 보던 중 꽃 아래로 내려가면서 의례 화병이 나올 것을 예상하다가 사람의 상체가 나오자 깜짝 놀람. 이것은 아마 현장 아니라 컴퓨터 모니터 상에서 볼때 느낄 수 있는 것이겠지요.
아래 <미모사가 피어 있는 아틀리에>는, 보자 마자 창 밖의 풍경이 업 사이드 다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 참 이상하지요. 위의 하늘이 바다처럼 보이는 거예요. 아이쿠, 재미있어~ 이러면서 댓글 달고 있습니다.

웽스북스 2008-12-27 12:38   좋아요 0 | URL
나인님 조급할 필요 있나요. 3월까지인데 한 번 다녀오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건축과 도덕은 처음 봤을 때 좀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그건 사실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의 차이가 그렇게까지는 크지 않은데 미모사가 피어 있는 아틀리에는, 마음에 드셨으면 직접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보냐르의 작품들이 대부분, 사진으로는 그 색감과 느낌이 잘 표현이 안되는 것 같더라고요. 즐겁게 다녀오시고 나인님도 얘기 꼭 남겨주세요 ^_^

니나 2008-12-2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은, 결핍 + 삶은, 오류 / 이거 2009년 화두가 될까봐 좀 두렵지만 함께해줘 웬디 ㅎㅎ

웽스북스 2008-12-27 12:39   좋아요 0 | URL
그치그치, 두렵지
아, 나 2009년 삶의 화두가 '내가 되는 꿈'이야
그러기 위해서 저 두가지는 필요충분조건 아닌가 싶다

2008-12-27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08-12-29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전시도 추천드려요. ^^

 



제값을 '온전히' 치르고 티켓을 사는 일은 거의 없는 내가, 루시드폴 때문에 처음으로 콘서트 티켓을 지른 사건. 그것도 이미 두달 전에. 그러니, 얼마나 오매불망 기다렸던 날이었던가.

예전에 이승환 콘서트에서도, 윤도현밴드의 콘서트에서도, (물론 다 공짜로 티켓이 생겨서 갔던 것들이지만) 나는 적응하지 못했다. 나는 확실히 가만히 앉아서 노래와 대면하는 식의 음악 감상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루시드폴 콘서트의 정적은, 그래, 돌이켜보건대, 좀 많이 고요하긴 했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재밌던 건 고요한 정적이 흐르다가 노래가 끝난 후에, 기침을 참던 사람들이 콜록 콜록 대던 순간. 기침조차 허용되기 어려운, 오로지 기타 소리와 그의 노래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메우던 공연이었다.

공연은 내가 좋아하는 '새'로 시작해 '오 사랑'으로 끝났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이라는 말이 불필요하다는 건 안다. 도무지 좋아하지 않는 곡은 별로 없으니. 그래도, 저 두 곡도, 정말 너무 좋아하는 곡들이니까.) 한 곡 한 곡 나올 때마다 반가운 마음이 억제가 안되지만, 억제 해야한다, 그저 난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반가움을 표할 수 있을 뿐. 새가 끝나고 나의 하류를 지나,가 나오고, 풍경은 언제나가 나오니, 아이고, 좋구나.

한마디도 안하고, 쉬지 않고, 그저 민망할 때마다 레몬 꿀차를 마셔가며 부끄러운 듯 노래를 이어나가는 모습이 참 루시드폴 답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성격의 사람이니 이런 노래를 쓰겠지. 그래도 2부에서는 제법 농담을 하는데, 어라, 이건 유머 코드가! 맞는 것이지. 하하. 이번에 준비한 건 새 노래인데요, 아, 새 노래는 맨 첫곡으로 했죠. (첫곡 = 새) 니나는 아무래도 똑똑한 사람들이 이런 개그를 사랑하는 것 같다는, 성급하고 자기 중심적인, 하지만 굉장히 설득력 있는(!!! ㅋ)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맞는 말 같다 (^-^v)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강아지를 대상으로 쓴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가 유일하게 '사랑해, 사랑해'를 말한 노래라고 한다. 소속사 사장이 그 노래를 보더니, '야 니가 대상이 개가 되니까 이런 가사를 용기내어 쓰는구나' 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하하.

암튼, 이런 순간에는 자신과 마주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가사들은 올 한해 내 모습들을 하나 하나 끄집어내고, 나의 이십대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끄집어내고, 그렇게 끄집어져 나온 내가 다시 노래와 어우러지고, 그 노래가 다시 나를 위로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건 마지막 곡인데요'는 오늘의 가장 아쉽고 당황스러웠던 대사. 그래도 마지막 곡이 '오 사랑'이어서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계속, 너무해 너무해, 사람이었네도 안하고, 국경의 밤도 안하고, 그건 사랑이었지도 안하고,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도 안하고, 그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도 안하고, 사람들은 즐겁다도 안했는걸. 이라 말하며 아쉬워했다. 사실 끝나면 어쩌지 끝나면 어쩌지, 아직 이것도 안나왔는데, 이것도 안나왔는데, 설마, 설마, 하던 순간들이었다. 다행히 앵콜 두곡은 국경의 밤과 사람들은 즐겁다였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물론 10집 가수가 10집에 수록된 모든 노래를 콘서트에서 다 부를 수 없듯, 그 역시 주어진 시간 내에 최선이라 여겨지는 곡들로 선곡을 했겠지만, 그럴 바엔, 게스트를 부르지 말던가. 라는 야속함까지. ㅜㅜ 우리는 우스개로, 루시드폴 너무 박하다고, 루시드박 아니냐고, 아님 박시드폴 아니냐고, 계속 아쉬움을 표했지만, 어쩌면 아쉬움을 택한 그의 전략이 훌륭했는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집에 와서도 계속 이렇게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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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12-27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 아아아 아아아 아아아

웽스북스 2008-12-27 12:39   좋아요 0 | URL
아프님 메롱 하고 싶다. 하하하.

니나 2008-12-27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되는꿈... ㅠㅠ.... 어제 루시드폴 씨디 틀어놓고 잤어....

웽스북스 2008-12-27 12:40   좋아요 0 | URL
사실 산이 되는 꿈 다음에 나왔으니 내가 되는 꿈은 나가 아닌 냇물일거야 그치 그런데 나는 그게 자꾸만 내가, 나 자신이 되는 꿈, 이라고 들리더라고.

마노아 2008-12-2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루시드 폴 공연 갔을 때 참 좋았는데 너무 조용해서 살짝 졸았던 기억이..;;;
저도 그때 공짜 공연이었거든요. 원래 공짜표로 가면 공연을 잘 못 즐기고 오는 법칙이 있대요. ㅎㅎㅎ
이번에도 브라질 노래 불렀나요? 처음 들어보는 그 낯선 언어의 노래가 참 신선했어요. 가사 어케 외웠을까 경이롭기까지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