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언제나 예측 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아르미안의 네딸들이라는 만화에 지겹도록 나오는 말이지. 하하. 여담이지만, 나는 이 말을 인턴 교육할 때 퀴즈로 내서 어느 만화에 나온 건지 맞히는 인턴에게 특혜를 준 적도 있었다. 뭐 별 대단치 않은 특혜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번에 맞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신기. ㅋㅋ
이 말을 내 삶에 적용해 본다면, 내 인생은 언제나 오류, 그리하여 생은 그 재미를 갖는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평일의 미술관 로망은 무슨. 오늘이 평일일 거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오류였다. 하하. 미술관은 정말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애시당초 계획한 2군데 (덕수궁 미술관과 시립 미술관) 투어 역시 한군데로 좁힐 수 밖에 없었다. 2시간 반이면 두군데를 보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한 것 역시 오류였다. 하하. 한군데를 그나마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5cm 굽을 신고 미술관을 종횡무진 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역시 오류였다. 마지막에는 진이 빠지더라. 오렌지 주스를 사먹고 100원이 모자라 작품정보청취기기(제목은 이게 아니지만, 3000원-보유현금 2900원)를 빌리지 못한 것도 그렇고, 그래서 한바퀴 다 돌고 나 아쉬움이 좀 남아 물어보니 카드가 됐던 것도 그렇고 -_- 정작 들고 들어가니, 도슨트는 아니지만 그만큼 박식하신 분이 그 기계보다 더 재밌게 설명해 주어서 그 기기가 거의 쓸모없게 된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럼에도, 혼자 가니, 참 좋더라. 역시 미술관은 혼자 가야되나봐. 처음으로 혼자 가봤던 전시회는 리움에서 했던 앤디워홀 전이었는데, 사실 그건 굳이 혼자 가서 찬찬히 볼 필요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시간을 조절하며, 다른 사람에게 맞추지 않고 여유롭게 보니 그 사실만으로도 참 좋더라. 다시 보고 싶은 것들 있으면 다시 보러 내려오면 되고, 혼자 종횡무진하면서 미술관을 돌아다녔던 것 같다. 여러 작품이 기억에 남지만 마티스나 샤갈, 피카소의 그림들보다도 더 내 마음에 들었던 작품들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글렌브라운이라는 작가의 <건축과 도덕>이라는 작품.

설명은 뭔가 기법적인 부분에 많이 치중했던데, 나는 그보다는 이 황폐한 느낌과 '건축과 도덕'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의 묘한 조화가 마음에 들었다. 뭔가 찬란하게 꽃피우려 하지만, 결국은 이토록 황폐하게 시들어가는 그 무엇이 어쩐지 현대인의 모습을 잘 표현해준 듯한 느낌, 아니나다를까 2004년 작이다.

피에르 보냐르의 작품 <미모사가 피어 있는 아틀리에>는 도무지 그 색감을 사진으로 살려낸 걸 찾을 수가 없다. 쏟아질 것 같이 화사하게 빛나는 노란 빛을 제대로 표현해 낸 사진을 넷상으로도 도록으로도 볼 수 없다는 것은, 역시나, 다녀오길 잘 했다 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특히나 피에르 보냐르의 작품은 유독 작품 곳곳에 드러난 터치감과 함께여야만 가능한 건가. 왼편 맨 아래에 있는 건 죽은 아내의 얼굴이란다. 루시드폴의 '당신 얼굴'을 BGM으로 깔아줘야 하는 순간이 온 거다.
그리고 호앙미로의 작품에도 눈길이 간다. 그의 블루 연작 중 두번째

'조화'라는 섹션에 있던 이 그림은 쉼과 평화, 조화의 의미로 많이 쓰이는 푸른 계열을 사용해 조화로움을 표현한 듯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 것 같은 어딘가 모를 불안감에 자꾸만 마음이 간다.
이번 전시는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자들>이라는 작품에 나타난 주제를 10가지로 구분하고 거기에 다시 '화가들의 천국'이라는 대주제를 부여해 해당하는 주제별로 그림을 분류한 기획 전시이다. 지금까지의 시대별, 혹은 작가별 전시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초반에 아르카디아의 목자드을 프로젝터로 쏜 실커튼을 뚫고 들어가면서 전시가 시작된다는 설정도 나름 흥미로웠고. 물론 조금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음, 이런 말만들기에 사실 끼워넣기가 없으면 안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냥 패스 ^_^
여전히 나는 미술에는 문외한이지만, 미술관에 한두번씩 다녀올 때마다 즐겁게 관람하는 나만의 방법을 터득해오게 되는 것 같다. 오늘까지의 버전은 다음과 같다.
1. 가급적 평일에 가세요. 저녁시간에라도 좋으니, 평일에 가세요. 주말에 두번만 치여보면 아마 다시는 주말에 가고 싶지 않으 거에요.
2. 가급적 혼자 가세요. 아니면 일정 시간을 정해놓고 보다가 다시 만나자고 해도 좋을듯. 서로 속도를 맞추며 걷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3. 해설오디오는 나중에 빌리세요. 이거 은근히 감상을 제한하더라고요. 뭔가 궁금증이 막 일긴 하지만, 오늘 써보니 사실 크게 해소해주는 것 같지도 않고, 꼭 필요하다면 한바퀴 돌고, 다시 그 그림 앞에서 보면서 듣는 게 더 좋을 것 같더라고요. 사실 오늘 써본 바로는, 해설 오디오보다는 소도록을 미리 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도 수록 수가 더 많으니.
4. 메모지를 챙겨가세요. 메모를 하면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마음에 드는 그림과 작가 이름을 적어오니, 집에 와서 좀 더 볼 수 있어 좋더라고요. 나만의 리스트를 만드는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