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는 교회에, 그리고 크리스마스 아침에도 교회에 가야하기 때문에 어제 퇴근길, 곧바로 안양으로 향했다. 저녁엔 급조한 장기자랑을, 아침엔 예배실 아래에서 주방봉사를 하고 집으로 가 뜨끈뜨끈하게 한잠 자고 일어나니, 걱정이 몰려오는 것이다.
보일러는 괜찮을까? 이렇게 추운데 얼어버렸으면 어쩌나? 월요일엔 손님이 오기로했는데 그럼 빨래를 얼른 해서 일요일에 걷어야 되는 거 아닐까? 집도 엉망인데 좀 청소도 해놔야되는 거 아닌가? 뭐 이런저런 걱정을 하다가 결국 저녁에 다시 원효로집으로 향했다. 내일 다시 안양으로 예배드리러 가야하는데, 어지간히 불안불안하기도 했고, 집에 가서 새로 산 커피 한 잔도 내려마시고 싶었고, 뭐 이래저래하는 이유로 만류하는 엄마아빠를 뿌리치고, 저녁을 먹고 집으로 오니..
역시나 집은 14도, 얼른 보일러를 켜고, 빨래를 돌리고, 널고, 돌리고, 널고, 커피를 내리고, 시크릿 가든을 보는데, 아무래도 집이 따뜻해지질 않는 거다. 너무 추워 등에 핫팩을 붙였다. 그래도 추워 배에도 핫팩을 붙였다. 그래도 추워 엉덩이에도 핫팩을 붙이고, 그래도 추워서 양쪽 발에도 핫팩을 붙이고 수면 양말을 신었다. 나는야 핫팩인간.... 그런데, 시크릿 가든이 끝나도록 집이 따뜻해지질 않는 거다. 지난 번 제주도에 갔다오느라 집을 몇 일간 비웠을 때 집이 얼마나 천천히 따뜻해지는지를 경험해서 좀 참았는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한거라...보일러를 켠지 세시간이 넘도록 공기야 그렇다 쳐도 바닥까지 이렇게 얼음장일 수는 없는 거다. 그렇다고 보일러에 이상 신호가 있는 건 아니니, 일단 샤워를 하면서 온수를 쓰면 좀 녹지 않을까 싶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래도 집은 덜덜. 불안이 엄습하기 시작한다. 홍대의 차가수는 얼른 택시타고 자기집으로 넘어오라고 난리가 났다.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불안해서 집과 보일러를 다시 떠나 있을 수가 없는 거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도 분명 나는데... 이상해서 일단 네이버를 찾기 시작...
보일러 동파, 라고 검색을 해보니 일단 동파가 되면 전원 자체가 안들어오는 것 같은데, 나는 전원도 들어오고 온수도 나오니 동파는 아닌 것 같다. 그럼 뭐지? 경동 보일러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벨브를 열었다 닫으래서 그것도 해봤는데 뭔가 묵묵부답.... 혹시나 해서 관을 하나하나 만져보니 어? 맨 바깥쪽 관이 얼음장같이 차갑다. 뭔가 이녀석이 원인인 것 같아 위치를 확인해보니 난방공급관이란다. 아. 어쩌지?
아저씨를 기다리려니 내일까지 춥게 살 엄두도 안나고 하여 네이버 지식인을 보니 드라이기로 녹이라고 한다. 드라이기를 관에 대고 작동시키는데 이건 뭐 간에 기별도 안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게다가 괜히 잘못했다가 보일러가 이상해져서 불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 전기제품을 사용하는 게 어쩐지 불안하다. 빈대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우는게 아니라, 보일러 고치려다가 전세집 태워먹지 싶어 그만둔다. 지난 번에 수리 오신 아저씨한테 전화를 걸어서 내일 와달라고 사정을 해야하나.... 보일러 수리비는 얼마람 ㅜㅜ 이런 어려운 시기에, 하며 우울해하다가, 그래도 뭔가 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고민을 하다가 스팀타월을 만들었다. 스팀타월을 관에 가져다 대면 녹지 않을까 싶어서....
손을 델 정도로 뜨거운 수건을 보일러 관에 갖다 댔다. 내 손으로 녹이는 기분으로 정성스럽게. 사랑과 정성을 보일러에게! 응? 그런데 뭔가 반응이 온다 빠직 빠직 하더니, 관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거다. 뭔가 따뜻한 물이 도는 것 같고... 그래도 불안해 다시 한 번 수건을 뜨거운 물에 적셔 갖다 대였다. 푸드득 푸드득 하더니, 금세 관이 뜨거워졌다. 와. 나 보일러 고친 거야? 나 새벽 두시반에 보일러 고치는 여자사람 ㅜㅜ 뭔가 감격스럽다. 나는 정말 기계도 못만지고 이런 거 무서워하는데, 역시 대안이 없으면 사람이 강해지나보다.
지금은? 이 글을 쓰려고 앉아있는 바닥이 뜨끈뜨끈하다. 조금만 지나면 공기도 따뜻해지겠지. 이제 맘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 내일 다시 안양으로 갈 생각하면 까마득하긴 하지만, 오늘 오기 잘한듯 싶다. 나의 천재적 직감...ㅋㅋ 천재적 실력...아무래도 좀 천재인듯? 하며 괜히 우쭐해졌는데, 이 밤에 자랑할 데가 없어서 글을 쓰고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