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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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혹한 한국 현대사의 횡포 속에 서승, 서준식 두형을 감옥에 두고 일본에서 고통받았던 서경식이 스스로

1990년대 이후로는 점점 불만없는 일상을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법하다. 하니 다행이다.

젊은날 겪어야 했던 야만적인 독제로 인한 상처와 아픔이 정직한 성찰로 남아 그에게 힘이 된다.

부디 그가,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2.

어렸을때 페스트로 가족을 모두 잃은 21살의 카라바조가 도착한 로마 1592년

가장 빈번하게 펼처진 오락은 공개처형이었다. 부모들은 그 광경을 보여주러 아이들을 데리고 나섰다. 때로는 이단자가 남색에 빠진자와 마찬가지로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카라바조는 산탄젤로 다리와 도시의 성문 위에서 참수당해 썩어가는 머리를 수도 없이 보았음이 틀림없다.

데즈먼드 수어드의 당시 로마에 대한 설명이다.

기근이 없을 때조차 길 위에는 수많은 걸인과 고아들이 굶주린 배를 안고 앉아 뒹굴었다. 수많은 매춘부들이 퍼트린 성병도 유행했으며 도로에는 사람들의 배설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프레모 레비와 함께 카라바조를 보러 로마에 왔다고 서경식은 말한다.

원래 전설 속 메두사는 여성이지만 여기에 그려진 대상은 소년이다. 카라바조의 자화상이라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목을 내려친 순간 자기의 표정을 어떻게 자신의 눈을 통해 보고 그려낼 수 있었을까? 하물며 눈을 맞추면 돌이 되어버린다는 그런 대상을 무엇보다 이렇게 무섭고도 처참한 자화상을 그리고자 했던 자는 대체 어떤 자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카라바조의 메두사

목이잘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경악하는 표정의 메두사 얼굴이 자화상이라니.

 

카라바조는 전 생애에 걸쳐 약 열두점에 이르는 목이 잘린 사람을 모티브로 한 그림을 그렸다. 참수에 매혹된 화가라고 해도 좋겠다. 나폴리에서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비드]에 등장하는 골리앗은 자화상이다...... 카라바조는 스스로에게 절망하면서 한편으로 그런 자신을 철저히 응시하고 있다. 이러한 자화상을 그릴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극히 '근대적인 자아'라는 의미가 아닐까. 나는 이점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얼마나 혹독하며 무참한가......

고통스런 영혼이 보이는것 같은 그림들, 에 서경식은 공명한다.

 

두형을 파렴치한 조국의 감옥에 두고 서양미술순례를 했던 서경식

짓눌린 현실에 틈을 내 숨을 쉬려고 떠난 여행이지만 고통으로부터 달아나지 못한 고행의 순례처럼 보였다.

그를통해 처음 오토 딕스의 그림을 보았어. 그 선명한 정직함에 놀랐지.

 

 

2.

카라바조로 시작한 이탈리아 인문기행이 반파시스트 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흔척을 쫒어 막바지에 이른다.

아드리아노 올리베히눈. 이탈리아의 사업가이자 반파시스트 활동가

나는 이런 이력이 부럽다. 반파시스트 활동을 하는 사업가라니.

반파시스트는 고사하고 반인권적인 대한항공 조씨 일가가 떠오를뿐. 천박한 것들.

 

우리나라에는 번역되지 않은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사형수의 편지를 소개해준다.

스무살의 기계공이었던 아르마도 암프리노는 "산악지대에서 길고도 고생스러운 생활 끝에 이렇게 죽어야 하다니......이제 곧 성체를 나누어 줄 형무소의 담당 신부님의 입회 아래 차분하게 죽음을 맞이할 겁니다. 나중에 신부님 계신 곳에 가면 내가 묻힌 장소를 가르쳐주실 겁니다."라고 남겼다.

예순한 살의 재봉사 주세페 안셀미는 세상에 남게 될 가족에게 이렇게 썼다. "오늘밤, 처형된다고 들었다...... 잘 들어라. 나는 죄가 없어. 단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자들이 꾸민 덫에 희생된 것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 너희들은 지금보다 더욱 가슴을 펴고 떳떳이 살아야만 하는거야."

가구를 만드는 마흔한 살의 장인 피에트로 베니데티는 아이들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공부와 노동을 사랑하거라. 정직한 삶이야말로 그 어떠 것보다 훌륭하며 인생의 훈장과도 같은 것이란다......인간에 대한 사랑을 삶의 신조로 삼고서 너희들과 같은 사람들의 소망과 고통에 항상 마음을 쓰거라. 자유를 사랑하고 이 보물을 위해서는 부단한 희생을, 때로는 목숨까지도 바쳐야만 한다는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노예의 삶이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 어머니 조국을 사랑하거라. 하지만 진정한 조국은 세계라는 점, 세상 어디에도 너희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이 바로 너희들의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정치범의 사형수에게 편지를 쓰도록 해주고 그것을 남겨 나중에 책으로 묶을 수 있다니.

박정희의 사형수들은 그럴 틈이 없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노예들 까지.

나는 변함없이 비관적이지만 그 비관의 성질이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예전에는 나 자신이 음습하고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있고 출구는 어디에도 없다고 느꼈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나 오랜 역사를 거치고 이토록 수많은 잔혹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관한다.

환갑을 넘은나이, 이제 불만없는 일상을 살고 있다는 서경식은 여전히 고통과 상처에 예민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인간의 삶을 성찰하는것에 게으르지 않다.

그에게 성찰은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천천히 걸어가는 나이든 현자의 지혜를 보는 느낌이다.

 

서양미술순례와 고통의 원근법을 다시한번 보고 싶어졌다.

나도 이제 마흔일곱이고 불만없는 일상을 살고 있으니까.

 

밝고 친절하지만 신랄한 사회비평가였고 누이나 선생님처럼 나를 대해줬던 리타, 귀족 공산주의자 베를링구에르가 체현했던 유로코뮤니즘을 향한 기대, 남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성격을 바보같은 농담으로 숨시고자 했던 젊은 시절의 나...... 모두 멀리 사라져버렸다. 인생은 이다지도 속절없이 지나가버린다.

부디 그의 노년이 편안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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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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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케플러가 여기서 "소리의 화음"이라 한것은 행성마다 그 움직이는 속도에 대응되는 음이 있다고 행각해서이다. 그는 행성들에 당시 유행하던 라틴 음계인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를 대응시켰다. 행성 구들이 이루는 조화 속에서 지구의 음정은 파와 미였다. 케플러는 지구는 끊임없이 파와 미를 웅얼거리니 라틴어로 '파민' 즉 '굶주림'을 연상케 한다면서 이 서글픈 단어 하나로 지구를 제대로 묘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기는 하다. 


보잘것 없는 시골학교의 수학 선생이며 평민 출신이던 케플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한 행성들의 운동의 법칙을 발견하여 정리한후 스스로 '비록 적게나마 지극히 높으신 신의 환희를 맛보게 됐다.'고 썼다.

지구에 대한 묘사로 굶주림을 떠올리는 천체물리학자다. 이 책은 이런 재미가 있다.

비록 케플러의 법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의 평생에 걸친 수고로 그는 벌견의 환희를 맛보핬고 우리는 우주의 이정표를 얻었다. 

칼세이건이 케플러에게 바치는 문장 

우주의 이정표를 만든 거인, 너무 일찍 태어난 비운의 천체 물리학자, 마녀사냥이 횡횡하던 시대 

미신과 폭력, 약탈과 고문살해의 시대를 살다간 케플러가 죽고 12년후 뉴턴이 태어났다. 


1666년 스물세살의 뉴턴이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생이 됐을때 흑사병이 돌았다. 그래서 뉴턴은 자신이 태어난 외딴 고향마을 울즈소프에 내려가서 어떤 의무에도 얽매이지 않고 1년의 세우러을 편히 보낼수 있었다. 뉴턴은 그 1년동안에 미분과 적분을 발명했고 빛의 기본 성질을 알아냈으며 만유인력 법칙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거참. 천재는 이런 사람인가봐. 


죽기 바로 전 뉴턴은 이렇게 썼다. "세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는 어린아이 같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하게 닦인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 주우며 놀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히 미지로 내 앞에 그래도 펼쳐져 있다. 

거참. 천재라니.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로마 카톨릭의 철하자 조르디노 부루노는 1600년에 말뚝에 묶여 화형에 처해진 비운의 인물이다. 브루노는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세상들이 존재하며 그 중에는 생명이 사는 곳도 많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과 또 다른 몇가지의 죄목이 추가되어 그는 화형을 당했다. 

단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던 시대가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대한민국은 아직도 사상을 처벌한다. 우주를 읽으며 인간을 읽는다. 


인류사상사에서 위대한 혁명이 기원전 600년과 400년 사이에 일어났다. 혁명의 열쇠는 손이었다. 이오니아의 뛰어난 사상가들 중에는 항해사, 농부, 직조공의 자식들이 있었다. 그들은 손을 써서 물건을 고치고 만드는 일에 익숙했다. 다른 나라의 사제들이나 서기들이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사치 속에 자라서 손을 더럽히기를 싫어했지만, 이오니아 인들은 그 근원부터 그들과 달았다. 그들은 미신을 배척하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들을 해냈다.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히포크라테스, 엠페도클레스, 그리고 데모크리토스 


데모크리토스에게 있어 삶은 세상을 즐기고 온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는 '축제 없는 인생은 여관이 없는 긴 여정과 같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주를 탐구하는 뛰어난 인문학자인 칼 세이건에게 놀란다. 



2. 

대뇌 피질이 사람을 동물적 인간에서 해방시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비나 도마뱀의 유전적 행동양식에 더이상 묶여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대신 자신이 뇌 속에 집어넣은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각자는 한사람의 성숙한 인격체로서 누구를 아끼며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하지, 파충류 수준의 두뇌가 명령하는 대로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자기 자시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우주를 관찰하고 인간을 탐구하여, 나를 성찰한다. 


지구에서 살아오는 동안 인류는 못된 진화적 습성을 많이 길러 왔다. 호전성, 그릇된 관습,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이방인에 대한이유없는 적개심같이 오랫동안 유전돼 온 못된 요소들은 인류의 생존 자체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측은히 여길 줄 아는 좋은 천성도 갖고 있다. 

우주에서 보면 국경이 보이지 않는 푸른 점,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르 죽이고 파괴하는 것에 골몰하고 있다는것. 

수천년동안,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니까. 


과연 누가 우리 지구의 편이란 말인가?


우리는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우리의 이웃이 지구의 어디에서 살든 그들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저멀리 지구가 아직 새내기 별이었을 때부터, 우주의 바다로 항해하는 시대까지. 

세이건의 인문학 



3.

앤 드루얀에게 바친다. 

광막한 공간과 영겁의 시간 속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책을 열면 첫장에 아내에게 바치는 유명한 헌사가 있다.

우주적 성찰을 하는자의 낭만적 사랑고백이다. 부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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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자유 - 로쟈의 책읽기 2000-2010
이현우(로쟈) 지음 / 현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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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 여행 이후 이현우 선생의 책을 찾아서 보고 있다. 

이 정도로 책에 집중해서 책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행복할 것 같아. 


우리가 너나없이 자유로운 인간이고 싶어 한다면, '책을 읽을 자유'는 자유의 최소한이다......'닫힌 사고'와 '빈곤한 생각'만큼 우리를 옥죄는 감옥도 없을 테니까.

맞다. 그러나 보통 닫힌 사고나 빈곤한 생각을 하는 당사자들은 본인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지 잘 모르더라고. 

언제든 혹시 내가 빈곤한 생각의 감옥에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책을 읽을 권리'가 보편화된 것은 역사적으로 보자면 극히 최근의 일이지만 그것은 이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에 속한다. 


내가 어떤 책의 저자라는 사실이 대견하고 기쁘다. 똑같이 여건이 반복되더라도 나는 더 좋은 책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2010년 두번째 책을 내는 저자가 스스로 설레이고 행복했나봐. 좋아보인다. 


돌이켜보면 가장 두려웠을 때는 책에 짓눌려 있을 때가 아니라 책을 읽을 수 없을 때였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않고, 읽어도 머릿속에 글자로 남지 않을 때였다. 책장을 갉아먹고 사는 책벌레에게 책이 맛 없어질 때보다 더 끔찍한 순간은 없지 않겠는가. 

맞아. 나도 이런 상태일때가 있었다. 앞으로도 있겠지. 

책을 읽을 수 없는 상태일때 나는 스스로 비정상적인 상태라고 느낀다. 



2. 

지식인인란 무엇인가? 지식인에 관한 '고전적인' 정의는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1966년의 일본 강연에서 내린 것이다. 그에 따르면 지식이이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웃었다. 자신과 무관한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라. 


이 책이 재밌는 이유는 책 자체에 대한 설명, 주로 출판사에서 책소개를 하며 알려주는 정보들을 나열하지 않는다는 것.

이현우라는 사람이 책을 통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맥락으로 읽는지가 자유롭게 서술되어 좋다. 

책에 대한 수다라고 할 수 있는데, 너무 가볍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도 않다. 

아카데믹으로 잔뜩 힘주지 않으니 좋고, 진지하지만 내세우지 않으니 좋다. 

소개하는 책을 꼭 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도 좋다. 


가령 우리말을 학대하는 듯한 직역투의 문장에서 원문과 외국어에 대한 '사대주의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면 과장일까? 

아니다. 번역하는 원문의 외국어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한글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던 번역이 종종 있었다. 

우리말을 학대하는 듯하다는 표현은 정말 적절해. 

우리말을 누더기 처럼 만들어 버린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학대한다는 표현을 읽고보니 이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말에는 영혼이 있는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불행하게도 인간의 부도덕한 행동에서 빚어지는 악보다도 더 관리가 불가능한 것은 합리적 행동이 산출하는 악이다. 바우만이 드는 대표적인 예가 근대 관료제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 이아닌 '규칙에의 복종'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관료의 도덕성은 명령에 대한 복종과 빈틈없는 업무 수행으로만 판단된다. 사실 20세가의 역사는 그러한 '합리성'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 역사적 교훈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바우만은 아우슈비츠와 굴락, 히로시마의 교훈을 우리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한 사례들이 진정으로 충격적인 것은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도 가스실의 경비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고, 다른 사람들의 머리위로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책임'이 없지만 사람들은 죽어나가는 것이 바로 유동적 근대의 공포인 것이다. 

정말 그래. 가스실의 경비를 서며 나는 단지 명령대로 합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보다 나쁠 수 있겠는가. 끔찍한 일이다. 


다양한 장르의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읽고 소개해 주지만 관통하는 몇가지는 인간다운 삶과 독서의 즐거움이다.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호기심이 많다고 할 수 있겠지. ^^


중용적 태도에 대한 공자의 말을 이현우선생이 알려준다. 

"남들과 다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나 기적을 행하려 하는 것, 그럼으로써 후세가 자기에 대해 말할 거리가 있게 하려는 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삼가는 것이다!"

그러게. 뭘 그렇게 잘난 척하고 사는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성찰로 나는 읽었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그의 다음 편력도 기대하고 있다.

역시 나는 블로그로 읽는 것 보다는 책으로 읽는 것이 좋으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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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독서 - 욕망에 솔직해지는 고전읽기
이현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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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무 간략해도 안되고 너무 자세해도 곤란합니다. 너무 가벼워도 안되오 너무 무거워도 안됩니다. 너무 식상해도 안되고 너무 생경해도 안되지요. 그러면서 재미도 있어야 하고, 우아하면 더 좋습니다. 

고전읽어주는 사람, 이현우의 아주 사적인 독서 책머리에, 이책을 엮으며 고민한 나름의 기준을 밝힌다. 공감했다. 

재미있어야 하고 우아하면 더 좋은 



2. 

마담 보바리를 언제 읽었더라. 

보바리 부인이라는 제목으로 중학교 때던가 고등학교 때던가. 

플로베르의 문장이 세련되었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어찌나 지루하든지. 너무 뻔하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대 

<마담 보바리>는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문제적인 것인지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바리를 읽을 수 있다니. 

게다가 플로베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같은 해야 태어났다는 걸 일러준다. 

갑자기 친밀해지는 느낌. 뭐랄까, 친구의 친구를 만나는 느낌 말이다. 이런 재미가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책읽는 욕망을 채워준다. 

책과 작가에 대한 이해가 넓고 시시코콜하다. 

이런 문학적 지식을 이렇게 재밌게 일러주는 사람을 처음 봤어. 


이현우선생은 독특한 지위다. 

아카데믹으로 제한하여 고루하지 않고, 권위적이지 않고 

그의 뛰어난 점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지 대중들에게 알 기회를 준다는 것 아닐까. 


프랑스는 권태를 발명한 나라입니다. 나라마다 특산물이 조금씩 다른데, 이를태면 영국은 우울을 발명합니다. 

음....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며 일었다. 


권태는 중산층 부르주아의 정서이비다. 그보다 상류층이거나 빈곤층이라면 권태롭지 않아요. 빈곤층은 먹고살기 바쁘니까 권태로울 여유가 없고, 상류층은 정치 활동이나 사교활동이 많아서 일상생활을 관조해볼 여유가 없습니다. 중산층은 대게 먹고살 만은 하지만 아주 풍족하지는 않은 상인 집안입니다. 권태라는 건 이렇듯 특정한 사회적, 시대적 조선 아래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중학교때 먹고살기 바쁜 가난한 노동계급의 여자아이가 이 책을 보며 한심하고 지루하다고 느꼈던 건가봐. ^^



3. 

책을 읽는 것은 왜 즐거울까?

리얼리즘 문학은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서 사회의 구조적인 속성을 인식하게 해 줍니다. 간단히 말하면 리얼리즘 소설은 어떠한 사회학적 보고서보다도 탁월하게 사회를 해부해 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작가적 의도나 세계관이 아니라 리얼리즘이라는 방법론입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런말이 나옵니다. "만역 정말 신이 있다면, 내가 신이 아니고 어떻게 견디겠는가?" 정말 대단한 작품이 있고 작가가 있다는 걸 '알아버린다면' 내가 그렇게 안되고 어떻게 버티 수 있겠습니까?

책을 읽지 않고 버틸수가 없으니, 읽는다. 

그런데 책을 쓰고 싶어지면 어쩌나. 이현우 선생은 문학을 쓰고 싶어 어쩌려나. 


소설은 근대화 함께 신작된다. 주홍글씨에도 근대의 전형적인 인물들이 고민을 한다. 

헤스터는 자기가 겪고 있는 징벌 혹은 고초가 자기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 일반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리 행복한 여성일지라도 여성으로서의 삶이란 과연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과연 행복한 여성, 불행한 여성이 까로 있는건지 의문을 품게 되죠. 

주홍글자를 읽어주며 호손과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비교해 보여주는 해석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그의 반려자 역할을 충실하게 잘 하다가 어떻게 해서 클리퍼드를 중오까지 하게 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득력있게 짚어주어야 하죠. 그런 작가적 역량이 포르노 소설과 이 작품의 차이를 만듭니다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걸로 치자면 이 작품 외에도 많습니다. 인물의 행동이 적절하게 동기화되어 있는가가 관건입니다. 

채털리부인의 연인을 읽으며 이현우가 말하는 동기화. 인과관계. 

인물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는 결단과 우연으로 점철될때 심지어 그 결과가 아무 연관없이 뻔할때 삼류가 되고 

막장 드라마가 된다. 


소설은 멜러즈의 편지로 끝을 맺는데, 두사람이 서로 교환하는 편지에서는 코니와 멜러즈가 계급차이를 극복하고 대등한 관계로 대화하게 됩니다. 

채털리부인의 사랑에서 계급차이가 극복되는 것의 동기화가 잘 돼어 있었던가? 

사랑으로 계급차이를 극복한다는 동화는 믿기 어려운 걸. 

오래전에 읽어서 잘 생각이 안난다. 



4. 

사탄은 저쪽에서 보면 반란자의 형상이지만, 이쪽에서 긍정하게 되면 기존의 질서에 굴복하거나 예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양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햄릿을 읽으며 중세와 근대의 경계, 개성의 발견, 자아에 대한 인식, 인문학적 소양이 넓고 성찰이 깊어 

이현우의 사적인 독서를 읽는 것이 재밌다. 

전혀 다른 작품을 보는 것 같아. 

고리타분한 인상의 뻔한것 같은 고전을 전혀 다른 생생한 작품으로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과 여전히 심장뛰는 욕망과 여전히 설레이는 재미를 보여준다. 특별한 독서다. 


셰익스피어는 저자, 작가 개념이 갖추어지기 이전의 작가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저자'가 된것은 그의 사푸에 일어난 일이고, 세계문학 거장 반열에 오른 것도 다양한 평가와 해석의 역사를 거친 이후입니다. 

나는 셰익스피어가 당대에 이미 국민작가가 된 줄 알았지. ^^

인도와도 안바꾼다는 영국인들의 황당한 자랑질을 먼저 들었으니 그럴밖에. 

이런 재미는 요즘 유행하는 팩트체크의 재미다. 

읽으면서 아아, 그렇구나. 눈이 밝아지고 세상이 넓어진다. 


한국인 성인 10명중 4명이 1년에 책 한권도 안 읽는다고 하죠. 경이로운 수치입니다. 경제 규모가 세계 15위권이내 인데, 이렇게 책을 안 읽을 수는 없어요. 책을 안 읽는게 성공비결이라고 해도 상당히 놀랍고, 혹은 이런 핸디캡을 무릅쓰고도 성공했다고 해도 놀랍습니다. 

ㅎㅎㅎㅎㅎ  빵 터졌다. 

책 읽지 않는 한국인의 통계를 보며 경이롭다는 표현을 쓰고, 그래도 성공하는것이 놀랍다는 저런 이현우 특유의 표현 

사실을 그대로 말하며 쿨하게 비꼬는 


마음이 어지러운 젊은이에 관한 멋진 희곡이다. 그런데 이 젊은이의 지독한 우유부단함 때문에 한시간 남짓이면 충분할 연극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나 4시간을 넘겨 버렸다. 거의 관갱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수준이었다. 연극이 절반 정도 지났을때 나는 이렇게 소리칠 뻔했다. 빨리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인다. 

ㅋㅋㅋㅋㅋ 재밌어. 

햄릿이 공연되던 당시에 이런 평가가 있었다네. 극렬히 동의한다. 

빨리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인다. 


"왜 복수가 지연되는가?" 이게 이 자품을 이해하기 위해 풀어야 할 수수께끼 입니다. 

정말 그래. 어찌나 지루하고 햄릿이 한심하든지. 

나중에는 죽이든지 말든지,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어애 하는지 의심스러워 진다니까. 

나만 그렇지 않았던 거다. 이렇게 명쾌하게 해석해준다. 


쉬운말, 일상적인 언어로 교과서 안의 고전이 오늘도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카데믹의 대학 밖으로 나와 대중에게 알려주는 

재미있고 우아한 특별한 독서다. 

평범한 사람도 책읽기의 특별한 재미를 누릴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이현우 선생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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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 / 서정시학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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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동주는 좋아하는 시인이라기 보다는, 뭐랄까 한국어를 모국어로 가진 사람들의 영혼을 밝혀주는 촛불이랄까. 

1988년 처음 발행된 후 개정판이 나오고 2004년 재개정되어 나온, 잘 씌어진 평전이다. 

윤동주에 대한 애정 뿐아니라, 일제시대 북간도 명동과 용정의 뜨거운 분위기가 생생하고 

무엇보다 사료와 함께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구술이 꼼꼼해서 더욱 신뢰가 간다.


해방전후사, 한국 근현대사를 전혀 안읽은 것은 아닌대, 만주로 이주했던 한인들의 역사를 처음 보았다.  

저렇게 치열하고 열심히, 끓어오르는 솥단지처럼 뜨겁게, 삶을 살아내고 있었구나. 

만주의 발견이랄까.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다. 


윤동주와 그의 이종사촌이자 절친 송몽규의 어린시절과 젊은날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그렇다고 과하게 찬양 일색도 아니며 

시대상황을 밝히고 가계의 기풍을 소개하며 객관적으로 동주와 몽규의 마음을 읽는다. 

오래간만에 좋은 평전을 읽었다. 

어떤 소설보다 극적이고 아름답다. 

윤동주의 삶을 해석하기 위해 자료를 검토하고 그의 자취를 더듬어 우리에게 알려준 송우혜에게 고맙다. 

윤동주의 삶에 걸맞는 평전이다. 



2. 

일제시대를 살다 읽찍 죽은 청년, 시를 읽으며 틀림없이 마음결이 고왔을 청년이다, 했는데 

명동과 용정의 당시 분위기를 보니 

국가없는 식민지의 아들로 살며 고통과 분노 그리고 성찰이 있었을 것이다. 

유복할 뿐 아니라 대대로 지역에서 존경받는 집안의 아들이다. 

이 시대의 용정은 굉장히 진취적이고, 여성들도 지혜롭다는 느낌이 있어. 

아래위 예를 강조하던 무능한 지배계급의 몰락으로 그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은 인민들이니 

굳이 남녀차별이나 출신에 따른 차별까지 지키고 당하며 살아지겠냐고. 


어쩌면, 생긴것도 준수하니. 윤동주는. 시처럼. 


'부끄럼'이란 것은 인간이 지닌 일상적인 정서의 하나라기 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실존 그 자체에 관한 성찰의 한 양식이라는 것을, 그렇다! '부끄럼'이란 것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이 그들의 불완전함을 슬퍼하는 참회의 방식에 다름아니다. 그러하기에 인간이 정직하게 부끄럼에 마주서자면 그의 전 존재, 그의 전 중량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면으로 마주서본 경험이 없는 한 이토록 가슴을 치는 절창은 솟아날 수 없는 것이다. 

윤동주의 시를 보며 궁금해지던 부끄러움 


수치 앞에서 정직했고 성실했다. 그가 그럴수 있었다는 건 아마도 그가 청결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으니라. 그것은 신의 축복이다. 

송우혜의 말이 맞다. 

수치앞에 정직하고 성실한 것은, 두렵고 무서운 일 아닌가.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은 어렵다. 이것을 20대의 청년이 했다는 것이, 그것을 시로 썼다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맑은 영혼이 있을 수 있는가 말이다. 



3. 

함께 구속되어 동일한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비슷한 시기 감옥에서 죽은 몽규와의 동주일 삶을 

이제야 읽으며 가슴을 친다.  


일제가 징역 2년에 처한 송몽규에 대한 판결문을 보면 민족독립의식의 앙양에 힘썼다는 거다. 

실상 골방에서 친구들 몇명하고 의견을 나눈거다. 

행위가 없다. 폭탄을 터트린 것도 아니고, 그 준비도 아니고, 데모를 조직한 것도 아니고 

시절이 엄혹하니, 부디 때를 기다리자고 한 것 밖에 없다. 

이게 치안유지법 위반이고 징역 2년을 선고 받는다. 

사상이 범죄가 되는 황당하지만 살벌한 법이다. 


일본에서는 패전과 함께 맥아더가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후 1945년 10월 4일 폐지된 치안유지법이 

대한민국에서는 국가보안법으로 아직도 살아 여전히 인민의 사상을 검증하고 벌한다. 

우리는 몽규, 동주보다 자유로운 땅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이 마땅히 부끄러운가. 


동주는 젊은 나이에 일본 감옥에서 죽고 

해방후 그의 벗으로 윤동주의 시를 알리기 위해 노력한 강처중은 좌익이라고 체포되어 사형선고 받았다가 

6.25 전쟁이 터져 월북했다. 

그리고 우리는 강처중의 존재를 잊는다. 


동주와 함께 몽규와 강처중을 호명하여 정당하게 소개한 송우혜에게 다시한번 고맙다. 

참담한 근현대사를 딛고, 우리는 무엇이 마땅히 부끄러운가. 



뱀발 

일본 교토 여행 준비하며 하필이면 미시마 유키오와 함께 읽어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번 검토되었다는 미시마의 탐미보다 

식민지 감옥에서 죽어 이름조차 잊을 뻔한 동주의 부끄러움과 참회가 어찌나 맑고 아름답던지

이런식의 민족적 정서가 깔린 비교 의미없다 생각하는대  

동주에게 미안하고 슬퍼서 눈물이 나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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