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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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문처럼 시작되는 어느 가담자의 수기는 슬프다. 

소비에트 문명, 나는 소비에트 문명의 흔적을, 소비에트의 익숙한 얼굴을 서둘러 기록한다. 

모든 인간을 호모소비에트쿠스로 만들기 위한 거대한 실험이 필연적인 실패로 끝난후 알렉시예비치는 쓴다. 


우리 세대는 자유를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세월이 얼마 흐르지 않은 지금 우린 자유라는 무거운 짐 때문에 등이 굽고 말았다. 왜냐하면 아무도 우리에게 자유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운 것이라고는 자유를 얻기 위해 죽는 방법 밖에 없었다. 

우리도 자유를 배운적이 없다. 자유를 위해 죽는 방법도 배운 적이 없다. 늘 복종을 배웠고, 대학만 가면 된다고 했지. 


자유란 알고보니 러시아에서 줄곧 모욕당해왔던 속물근성이 회생한 것이었다. 자유란 '위대한 소비전하'의 등장이었고 '어둠의 왕'의 출현이었다. 

소비에트 붕괴후 사람들은 자유롭고 행복해지길 기대했는데, 

지금은 가난한 것도 부끄럽고 취미로 운동하나 안 하는 것도 부끄러운 시대요. 한마디로 쫓아가기가 벅차지. 

구조정으로 정리해고되고 상점에는 물건이 넘치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느 것을 알고 당혹스러워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말해주었소. 돈이 있으면 인간이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법칙을 

호모 소비에티쿠스, 그게 자본주의예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가지 이념이 있었던 세상과 자본주의만 있는 세상은 모두 비참하구나. 


사회주의는 강제노동수용소, 밀고, 철의 장막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에요. 그 안에는 자기 주머니만 채우는 데 여념이 없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정의롭고 밝은 세상, 즉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약자를 불쌍히 여기고, 함께 고통을 이겨나가는 그런 세상이 있던 말이에요...... 삶은 돈과 어음으로 쌓아올린 피라미드일 뿐이고, 자유가 곤 돈이고 돈이 곧 자유라는 말들을 하지요. 그리고 우리의 삶은 10원짜리 한개의 값어치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는 공산주의자였고 앞으로도 공산주의자로 남을 겁니다. 


그러면 제가 공산주의를 믿었냐고요? 거짓말 안하고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는 정의로운 삶의 방식을 구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었어요. 이미 말씀그렸지만, 지금도 그러게 믿고 있어요. 


한 곳에서 어떤 물건을 산뒤 다른 곳에서 3코페이카 더 비싸게 파는 사람이 영웅이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다고요. 지금 사람들은 그런 생각들로 세뇌하고 있잖아요. 

이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정말 정확하게 표현한다. 

소비에트 붕괴이후 태어나서 수십년을 맑시즘을 학습하고, 변증법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대신에 정글의 법칙이 들어왔어. '너부다 약한 자를 물어뜯고 너보다 강한 자에게는 무릎을 꿇어라.'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그 법칙이......


평범한 춤조차 우리는 저급하다고 생각했어. 춤을 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재판도 열렸고, 춤을 추고 여자친구에게 꽃을 선물한 콤소몰들에게 벌을 줬어, 심지어 난 춤 관련 재판위원회 위원장도 했다니까. 난 내가 가졌던 그 마르크스적 신념 때문에 결국 지금까지도 춤을 못 춰. 나중에는 후회를 했지. 아름다운 여성과 한번도 춤을 추질 못했다니까. 미련 곰탱이!

고상하고 우아한 사람들이다.  

내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을 읽고 번개를 맞은 느낌일때 1990년대 초, 소비에트는 이미 망한 후였다. 

그것이 내게 충격은 아니었지만, 내내 궁금했다. 

이 빛나는 사상을 태어나면서부터 배우고, 숨쉬어온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며, 어떻게 살까. 

유물론과 계급론으로 무장하고 역사발전의 법칙, 그이상을 신념화한 사람들이 정말 있었을까. 

모두들 독재자가 지긋지긋하고 가난이 지긋지긋해서, 불평등한 체제 따위는 쉽게 받아들여 졌을까. 

그 궁금증이 풀렸다. 

고통이었구나. 호모 소비에티쿠스, 이제 멸종을 강요한단 사람들. 


'모스크바는 말그대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쿠즈네초프 교수가 트로츠키에게 한 말에 대해)

'그 정도로는 배가 고픈 것이라고 할 수 없소. 티투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함락했을때 유대인 어머니들은 자기 자식을 먹었다오. 내가 당신들의 어머니들로 하여금 자기 자식들을 먹게 하거든, 그때 내게와서 배고프다 하시오.' 트로츠키, 1919

망할 인텔리겐챠같으니라고. 트로츠키. 도대체 뭘 하고 있는거니.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들을 먹게 되는 때에 너에게 간다면 배고프다고 말하러가는게 아니란다. 

네 목을 치러 가는 것이지. 


소비에트연방시절 수용소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얘기가 가장 슬프다. 

이제 막 태어난 꼬마 아이들부터 3살까지는 엄마와 살고, 4살에는 기숙사에서 산다. 5살이되면 고아원으로 보낸다. 

엄마와 떨어진 4살아이를 어쩌면 좋으냐.  

소비에트, 어떻게 이런 짓을 한거야.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2. 

세르게이 표도르비치 아흐로메예프. 소련 대통령 군사고문이었던 최고위층 

크렘인에 있을때도 그는 어색해 했습니다. '고고한 학'. '뼛속까지 군인' 이었던 그는 크렘림의 삶에 길들여지지 않았어요. "사욕없는 진정한 동지애는 군대에만 있다."라고 말했었죠...... 그는 17년 동안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흐로메예프가 크렘림으로 거처를 옮긴 후, 몇매나 많아진 월급을 거절했어요. 그때까지 받아왔던 월급이면 충분하다면서요. 이쯤되면 누가 돈키호테인가요?...... 500루블 ㅇ상의 외국 선물의 경우 의무적으로 국가에 제출해야한다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법령이 발표되었을때, 아흐로메예프 원수는 제일 처음 그 명령을 수행한 사람이자, 그 명령을 수행했던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소련이 무너지자, 아흐로메예프는 사무실에서 목메어 자살한다. 

1923년 태어나 소비에트와 함께 평생을 살아온 그는 소비에트가 아닌 나라에서 살수 없었던 것이다. 

평생을 이념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그 이념이 사라지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배운적이 없으니까. 

돈, 속물적인 삶을 경멸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돈을 벌기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사회에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탱크와 로켓에 의해 정복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제일 강하다고 자부했던 것, 바로 우리 영혼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무너진 겁니다. 체제가 썩었고 당이 부패했던 겁니다. 어쩌면 이것도 아흐로메예프가 삶을 포기한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도 있겠군요. 


그는 사관생도에서 시작해 군의 최고봉까지 올랐습니다. 소비에트 정권은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최고 칭호인 소련군 원수, 영웅별 훈장, 레닌상...... 부유한 상속자가 아닌 어느 지방 벽촌,평범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에게 말입니다. 소련은 그와 같은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가난하고 작은 사람들에게요. 그래서 그들은 소련을 사랑했습니다. 



3. 

유대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요. '강한 바람이 불때 가장 높이 떠오르는 건 쓰레기다.'

맞네. 사회가 불안하고 변화가 많을때, 가장 높이 떠오르는 것. 

강한 바람이 불어도 떠오르지 않고 묵묵히 바닥을 지키는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살아갈지, 
나는 실패한 소비에트의 꿈이 아직도 가치있다고 생각하므로 
나는 자본주의 사회 고통속에서 살며 사회주의를 꿈꾸는데, 아직도, 

나는 한번도 본적없는 호모소비에티쿠스 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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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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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인간 사이의 연결을 침해당한 결과이다. 생존자가 단지 수동적인 목격자가 아니라, 폭력적인 살인이나 잔학 행위의 적극적인 참여자였다면 특히 더 위험하다. 전투 외상은 폭력적인 살인을 보다 높은 가치나 의미로 더 이상 합리화시킬 수 없을때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는 목표가 이미 불가능해 졌을때, 시신의 수를 세는 등 죽이는 그 자체가 성공의 기준이 되고 말았을때, 군인들은 뿌리깊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들이 지속적인 심리적 손상 앞에 취약해진 이유는 단지 죽음에 노출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들이 부당하고 의미 없는 파괴행위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참전한 미국 병사들의 얘기다. 

내가 아무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니. 끔찍하다. 


대한민국의 베트남 참전 용사들은 여전히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던 경험을 명예로운 일로 편집한다. 

공산주의와 전쟁의 일선에 섰다는 거지. 태극기 집회를 하고, 남북 화해의 움직임을 반대하면서 

여전히 동원되어 반공을 외치며 이용당한다. 잔인한 일이야. 


한 베트남 참전 군인은 상실된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왜 신은 선한 사람이 죽어 가도록 내버려 두는지 이해할수 없었다......나는 한명의 성직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부님,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신은 작은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 둡니까? 이게 무엇입니까. 이 전쟁, 이 빌어먹을 것이, 내 주변에 죽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 성직자는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나는 전장에 있어 본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나는 말했다. '나는 전쟁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신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

왜 태어나서 왜 죽는걸까. 신이 뭘 알겠어. 살아본 적이 없는걸.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거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기를 소망하기도 한다. 


강렬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어려움 때문에, 생존자들은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과, 그 어떤 공격도 허용하지 못하는 양 극단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따라서 이 남자는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꼈고, 다른 이들을 보호하려 했으며, 그 누구도 해를 입는다는 것을참지 못했다. 반면에 가족을 향해서는 폭발적으로 분노를 표출하였으며 과민하였다. 이러한 불일치는 그의 고뇌의 원천 중 하나였다. 

가정폭력의 가해자들, 이런 사람들 많이 봤어. 기본적으로 비열하다고 생각해. 

자기를 망가뜨린 국가폭력에는 복종하면서 힘없는 가족들 위에 군림하여 가해자가 되다니. 

더 큰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라 해서 힘없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괴롭혀도 되는 것은 아니야. 

자기가 피해자였다면 더더욱 그 고통을 알아, 다른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성찰하고 노력해야, 인간이거든. 

가정폭력의 가해자가, 더 큰 폭력의 피해자라 해서 용서하기는 싫다고. 


강간범의 목적은 피해자를 공포에 떨게 하고, 지배하고, 모욕하며,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데 있다. 그러므로 강간은 그 특성상 심리적인 외상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적인 계획이다. 


외상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은 세계가 의미 있다는 느낌을 회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사람이 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면, 공동체는 반드시 해악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인정과 배상이라는 이 두가지 반응은 세계에는 질서가 있고 정의가 있다는 생존자의 느낌을 재건하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나 참전병사를 위로하는 기념비는 있지만 강간 생존자들을 위한 사회적 기념비는 없다. 

피해가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인정되지 않음으로 배상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그녀의 몫이다. 


피해자가 탈출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다면, 두번의 학대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해자가 포로일때, 도망칠 수 없을 때, 그리고 가해자의 통제 아래 있을 때, 외상은 반복된다. 이러한 상황은 감옥, 강제수용소, 강제노동수용소 안에 부명히 존재한다. 또한 컬트 종교 집단, 성매매 집결지화 같은 조직화된 성적 착취 기관, 가정 안에도 존재한다. 

두려운 일이야. 


한 남성의 가정은 그의 성역이고, 그 가정이 여성이나 아이들에게는 감옥일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한 근친상간 생존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시커면 정액으로 가득차 있다. 만약 내가 입을 열면 그것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뱀이 번식하는 하수구의 진흙탕이 바로 나이다."

숨이 막혔다. 오래된 그녀의 고통이 막막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2. 

모르던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는 느낌보다는 잘 알던것의 의미를 교통정리 했다는 느낌이다. 

트라우마가 어떤 병이고, 어떻게 병으로 이름붙이게 되었고, 왜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지 

전쟁으로 인한 고통이 가정안에서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 

주디스 루이스 허먼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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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민중사
문익환 지음 / 정한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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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의 구약성서 해설, 히브리 민중 해방의 역사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이 가나안 농민해방군과 힘을 모아 해방을 이루는 이야기 

해방군들이 건설한 국가의 왕도 농민들의 고통위에 부정과 부패를 쌓고 타락하니

다시한번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해방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이야기, 를 읽다보니 


문익환은 스스로 선지자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의 땅이 해방되지만 남과북으로 나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어 죽이고 

분단된지 40년이 되는 1990년 5월 그는 노예들의 신, 분노와 전쟁의 신 야훼를 부르며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달라고 탄원한다. 


'히브리'가 천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은 고대 근동의 많은 기록에서 증명됩니다. 

천민의 역사란 해방의 역사, 투쟁의 역사일 수 밖에 없다. 

노예로 만족하여 계속 그렇게 살길 바라는 자라면 어떤 비천을 기록하여 남기려 하겠는가. 

천민의 탄원을 듣는 신이 정의롭다면 계속 노예로 살라고 말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의 등껍질을 벗기고 호의호식하는 압제자들에게 분노하고, 

싸워 이기는 정의를 약속하니 노예들의 신이고 정의의 신이다. 야훼는 그런 신이다. 


문익환은 스스로 선지자가 되어 야훼에게 통일조국을 탄원한다. 

21세기 한반도에서 압제에 시달리는 노동자농민이 주체가 된 해방전쟁을 위해

스스로 선지자가 되는 삶이란 엄중하다. 

실천하는 선지자의 모습을 삶으로 확인시켜준 목사의 성찰이라, 그 영혼의 소리에 울림이 깊다. 


어쩌면 스스로 히브리인줄 모르고 사는 우리에게 

몇년전 교육부장관이 개돼지와 같다고 알려주었고, 한진일가를 비롯해 재벌들의 갑질 쇼를 보면

아, 저들은 우리를 존중해야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구나, 그들은 분명 아는것 같다. 

우리가 히브리라는 것을. 


선지자 문익환의 히브리 해방노래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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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만의 수사반장
고상만 지음 / 삼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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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하고 가장 집요한 폭력을 계획적으로 국가가 저지른다. 

읽기가 쉽지 않다.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 분노와 억울함이 너무 많다. 

작정하고 덤비는 국가의 폭력을 한 개인이 어떻게 당해낼 건가. 


1972년 춘천경찰서 김상범, 이준상, 진현천, 강원도경 수사과 황춘근등이 사건을 날조하고 조작한다. 

그들에게 고문당한 정원섭은 그들이 써주는 각본대로 자백해서 하루아침에 살인범이되어 15년 3개월을 감옥에서 살았다. 

영화가 아니다. 

살인사건 발생후 김현옥 내무부장관이 10일안에 사건을 해결하라고 지침을 내렸기때문이다. 


1982년 문영수는 묵고있던 여인숙에서 옆방 사람과 이야기도중 싸움에 휘말려 연행되었다가 경찰에 폭행당해 죽는다. 

그를 폭행해 죽인 최순경은 공문서에 문영수를 노숙자라고 쓰고 다음날 병원 해부학 실습실로 보내버린다. 


1986년 신호수는 서울서부경찰서 대공과소속 경찰들이 9개월전부터 준배해서 조작한 '장흥공작'의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차모 경찰의 고문으로 죽는다. 

경찰은 그가 대미산 동굴에서 목메어 자살했다고 발표한다. 

미친것들이다. 


잔인한 독재는 사람의 영혼을 파괴한다. 

그런데 그런 독재는 박정희 한사람이 한것이 아니다. 

김현옥 내무부장관의 열흘안에 살인사건을 해결하라는 지시, 이런 황당한 지시에 호응하여 

춘천경찰서의 김상범, 이준상, 진현천 강원도경의 황춘근 이자들이 아무나 잡아와서 고문해서 자백을 받고 

살인범을 만들었다. 

이게 사람이 할수 있는 짓이냐. 


문현수사건에서의 최순경과 그의 동료들, 신호수 사건에서 차모 경찰 이런 작자들이 전국에 다 있었다는 얘기다. 

사실상 경찰이 전부 그랬다고 나는 이해된다. 

저런 미친것들을 보면서 경찰로 밥먹고 살았으면 그자도 정상은 아니다. 

1972년, 1982년, 1986년 모두 군사독재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다른가. 

 

책을 보면 2000년에도, 2005년에도 경찰과 검찰, 법원은 여전이 사건을 조작하고 엉뚱한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손에 들고 책을 읽기 쉽지 않지만, 한번 들면 놓기도 쉽지 않다. 


저자 고상만은 더디게라도 정의는 온다 하지만, 하. 

억울한 옥살이 15년이라는 말은 정의가 와도 아주 늦게 온다는 말이고, 늦게 오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사건을 조작해 누명을 씌우고, 사람을 억울하게 죽이고, 밝혀져도 사과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국가는 손해배상하지 않는다.

그 과정이 낱낱이 서술되어 있다.  

뭐가 정의냐. 

밝혀져도 여전히 가해자들은 처벌되지 않는다. 15년 후에도, 뭐가 정의냐. 


며칠전 전서총련 간부였다는 쉰이넘은 사업가가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집으로 찾아온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에 연행되었다는 글을 보았다. 

과거에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를 받았거나 그 법으로 징역을 살았던 사람들이 청와대로도 가고 국회의원도 되는 시대에 

여전히 그 법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촛불밝혀 박근혜를 끌어내리고 대통령을 문재인으로 바꾸었으나, 국가보안법 그거하나 폐기하지 못하니 

과거의 군사독재에 있었던 국가폭력이 이제 없다고 장담할수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국가의 보안이 시민의 인권보다 중요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정의가 아직 오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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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미술관을 걷다 - 13개 도시 31개 미술관
이현애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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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그로피우스를 제외하면, 이 책에서 주목한 예술가들은 나치에게 이른바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힌 이들이다. 나치는 요시찰 인물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렸으나, 하나의 이름표로 싸잡이 부르기에 그들의 삶과 예술은 구름처럼 다양했다. 그 각양각색을 보여주는 데 이 책의 목적이 있다. 


독일 미술가를 처음 만나며 나치에게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힌 이들을 보는 것은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첫번째 소개되는 화가는 여자는 아직 미술학교에도 갈수없던 시절의 자의식 강한 파울라 

파울라는 다작을 남겼지만, 생전에 고작 석점을 팔았다. 구매자는 전부 친구나 지인이었다. 그중에는 이러한 말을 남긴 릴케가 있었다. "모든 예술작품과 더불어 새로운 것이 나온다. 세상에 한 가지가 더 나온다." 

파울라 편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페이지를 넘기면 두번째 소개되는 조각가 렘브루크 편의 제목이 보인다. 


정확한 자세로 좌절하기 

이현애의 책을 처음 읽는데, 인문학척 기본소양이 탄탄해 보이는 문장이다. 신뢰가 생긴다. 

1차세계대전 당시 그는 감독관이 제안한 것처럼 전투를 마친 군인이 비장한 자세로 칼집에 칼을 집어넣는 형상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전몰장병 묘지가 애국심과 영웅의식을 고취해야 한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1916년 그는 <목락한 사람>을 제작한다. 

그는 무릎과 팔이 꺽이고 고개를 땅에 처박고 넘어져 있다. 

상승과 몰락 사이에서 정확하게 좌절하기 

그리고 독일 언론은 혹평한다. 


뜨거운 열정과 병적인 몰입은 구분이 힘들다. 그는 손이 잘려서 그림을 그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환각에 빠졌으며, 군인들이 스위스 산골 마을까지 쫓아와 자기를 잡아갈 거라는 망상에 시달렸다. 그는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과 함병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화창한 6월 어느날 들판으로 달려나가 가슴에 총을 겨누었다. 향년 58세였다. 

키르히너의 청년시절 공동체 다리파는 1906년 첫 단독 전시를 드레스덴의 전기램프 공장을 빌려 열며 

지역 신문에 프로그램을 발표한다. 

우리는 창작하고 향유하는 신세대가 발전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모든 청년을 부른다. 우리는 미래를 짊어질 청년으로서, 안락함을 추구하는 앍은 힘들에 대항하여, 가난과 삶의 자유를 얻고자 한다. 창작의 욕구를 격정적이고 거짓없이 표현하는 자라면 누구나 우리 편이다. 

패기있는 선언이다. 이 소박한 모임은 그러나 다리파 이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작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모더존-베커와 콜비츠에서 여성의 시각으로 마땅한 해석을 해주어 편안하다. 

여성, 노동자를 주로 배제하는 남성들의 책에서 좀처럼 얻기 힘든 편안함이다. 

콜비츠이전에 누가 이토록 세심하게 여성노동자가 처한 현실에 형태를 부여했던가? 노동하는 남성은 콜비츠이전에 다수 그려졌지만 노동한느 여성은 타자 중의 타자였다. 


그는 하고 싶은데로 했고, 되고 싶은 대로 되었으며, 하고싶은 것과 되고싶은 것을 일치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삶은 저절로 오지 않았다. 가족과 국가는 한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함부로 펼칠까봐 온갖 저항을 아끼지 않는다. 에른스트는 이와 같은 저항을 반기듯 즐기며 마찰을 일으켰으니, 그에게 마찰은 예술이요, 예술은 마찰이었다. 


그렇다면 다다는 뭇엇을 했을까? 다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했다. 규율, 관행, 도덕, 질서, 합리가 시키는 것이라면 아무것도. 다다이스트들은 시인과 미치광이가 되어서 떠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했다. 그들은 카페나 주점에 모여서 떠들었을 뿐이다. 그들은 전쟁과 군대와 경찰을 저주했고, 작시법에 해방된 시를 주절 댔고, 이것도 예술가인가 싶은 음악과 그림을 지어냈다. 그것이 다다.

몇명 안되는 청년들이 전쟁을 경험한 후 카페나 주점에서 떠들었을 뿐인데, 백년이상 화자되는 이야기가 되었다. 

전후 시대정신을 외쳤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그런것이다.  


나찌시대에 퇴폐미술로 찍혀 탄압받았던 미술가들이 

전후 <카셀 도쿠멘타> 전시를 통해 나찌를 반성하며 부활하지만 

건강과 퇴폐의 이분법이 냉전시대에 추상과 구상의 이분법으로 바뀌엇을 뿐 

이를테면 추상표현주의는 반공 및 자유이데올로기를, 리얼리즘은 전체주의와 계획경제를 옹호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뭘 반성한거니. 


1966년 [뉴욕 타임스]지가 마침내 미 중앙정보국이 벌인 첩보 활동을 폭로했다. 이로써 자유주의 진영의 자유 이데올로기가 '선전선동을 위한 엔진' 이었음이 만천하에 그러났다. 추상 미술이 보편적인 예술언어이며, 정치에 관해서 침묵한다는 믿음은 주입된 이데올로기에 불과햇다. 

마치 사회주의 국가의 미술과문학만 선전선동의 도구였던 것처럼 주장하는 저 이데올로기는 지금도 횡횡한다. 

순수문학은 정치에 침묵 한다는 주입된 믿음 말이다. 

최근에는 좀 바뀌는 것 같아 다행이다. 

광화문에서 우리가 든 촛불이 혁명이었다면, 이제 시작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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