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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눈물이 난다
읽기가 고통스럽다.
1985년의 구로동맹파업을 87년 노동자대투쟁과 97년 민주노총 총파업을 거쳐 2008년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 책을 읽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다.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더욱이 서평을 부탁받은 책을 무려 석 달이 넘게 읽었다.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 5년째에 접어들며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허전했던, 불법파견투쟁의 패배 이후 정규직과의 연대는 그 어려움만을 확인한 채 답보상태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패배의식에 갇혀 오히려 정규직노동조합에 더욱 의존하고 있는 현장 상황 속에서 연초부터 사내하청업체의 폐업으로 인한 투쟁을 속절없이 패배한 이 겨울, 그래서인지 책을 손에 들고 몇 줄 읽기만 하면 준비된 눈물이 자꾸만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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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삶의 기록들, 모두 기억해야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는《아름다운 연대》라는 구로동맹파업 백서와 함께 나온 쌍둥이 책이다. 구로동맹파업 백서를 정리하며 그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수많은 선배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구술한 것을 정리해 얻은 일종의 부록이랄까. 물론 내용적으로 《아름다운 연대》에 기대어 있는 것도 아니고 덜 중요한 것도 아니다.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 삶을 말하다’라는 부제처럼 각각의 다른 위치에서 파업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자기역사 쓰기, 자서전쓰기이다.
자서전형식으로 씌어져 좋은 점은 한 사람의 삶을 다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서움도 없이 빛나고 뜨겁게 투쟁했던 딱 그때만을 쓴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태어난 동네와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공순이, 공돌이로 취직해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그때는 모르고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그 중요한 구로동맹파업을 했던, 그리고 패배의 상처, 잘 감당되지 않는 무거운 시간을 버티어 살아낸 후, 아직도 생각하면 눈물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기억을 썼다.
이 모든 것을 다 보여준다.
운동에 있어서 의미나 성과보다 하루하루 먹고살아야 하는 삶이 더 고단했던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했던 수많은 조합원들. 역사적 의미로 평가되는 그 행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은 해명되지 않는 울분과 한숨과 절망까지 우리는 통째로 다 기억해야한다.
또한 역사는 투쟁을 조직한 지도부 몇 명만의 것이 아니므로 구로동맹파업 역시 몇몇 명망가의 배경으로만 기억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사업장의 다양한 위치에서 참여했던 여러 사람의 다른 이야기들이 반갑다. 그런 철학으로 기획된 책이라 반갑다.
투쟁에 대한 책임이란 무엇인가
비정규직 투쟁을 하며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어떻게 책임질 거냐?’이다. 구로동맹파업의 역사적 의미를 현실에서 살리도록 노력하자고 하면 아무도 반대할 사람이 없겠지만 아마도 그런 투쟁을 지금 현실에서 조직하자고 하면 이런 소리를 할 것이다.
“질게 뻔한데, 그 다음 수는 뭐냐? 어떻게 책임질 거냐? 수천 명 조합원들의 생계를 어떻게 할 거냐?”
노동조합 투쟁이 다 그렇지만, 비정규직 노동조합들은 더욱 그렇다.
단지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현재 자본의 통제전략과 딱 맞부딪히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은 아주 사소한 것조차 양보하지 않는다. 공공사업장인 KTX 승무원들의 투쟁이 그렇고 이랜드ㆍ뉴코아 투쟁이 그렇다. 그리고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을 하는 사내하청노동조합에도 그렇다. 자본은 사내하청노조가 요구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들어줄 때도 결코 사내하청노조와 협상하지 않는다. 정규직 노조와 협상하고 우리의 요구를 들어준다. 사내하청노조의 존재를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기는 싸움만 할까? 민주노조 운동의 후퇴로 현재 비정규직들의 삶은 마치 노예와 같다. 수십 년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거둔 성과를 ‘비정규직’이라는 형태로 통째로 넘겨주었다. 이기고 싶다. 제발 이겨봤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기는 싸움이란 어떤 것인가? 이기는 싸움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본은 우리가 준비하고 대응할 수 있는 미래의 어떤 날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결국 현재 벌어지는 생존권 투쟁을 최선을 다해서 조직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기는 싸움을 위한 준비이고 책임이다. 그 속에 조합원들의 피해가 있다. 해고되고, 가끔은 수배되고, 어렵고 힘든 삶을 살도록 한다. 그 삶에 대한 책임을 왜 감히 소수의 지도부가 다 지려고 하는가?
구로동맹파업의 성과가 그 당시 투쟁을 조직한 지도부 뿐 아니라 함께 했던 조합원 모두의 힘으로 가능했다면 그 책임 또한 조합원들과 함께 지는 것이다. 오만하게 소수의 지도부가 그것을 다 책임지려하는 순간 비겁해지고 싸움은 해보지도 못하고 끝없는 후퇴를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이럴 때, 마땅히 해야 하는 투쟁을 제때 하지 않아 싸움 해볼 기회조차 조합원들에게서 빼앗고 후퇴하는 것을 지도부는 책임져야 한다.
누가 감히 구로동맹파업을 실패한 투쟁이라 할까
그런 의미에서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에서 선배들이 말해주는 목소리가 반갑다. 투쟁의 패배에 대해서, 그리고 그 후 운동적 성과와는 무관하게 남루한 삶을 힘겹게 살아야 했던 것까지 포함해서 그 책임을 지도부에 돌리고 있지 않다. 열심히 살았고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노동자라는 말에 자부심을 알게 됐고, 그래서 더욱 열심히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비록 패했고 그 뒤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긍정하며 우리가 올바랐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당연함에도 고맙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것 그 자체가 독재국가의 통치전략과 딱 부딪히던 시기. 그저 임금인상 요구와 단협을 위한 투쟁을 하는 것만으로도 빨갱이라고 내몰리던 시기에 지역총파업을 했던, 어찌 보면 그 무모한 싸움을 ‘당연히’ 생각하며 했던 선배들의 패배한 투쟁의 역사위에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있고 90년대의 민주노총이 있다. 누가 감히 구로동맹파업을 실패한 투쟁이라 하겠는가?
노동자들의 삶, 잊히기 전에 더 많이 기록해야 한다
그래서 값진 책이 나왔으니 부디 과거의 한때에 대한 회고만으로가 아니라 지금 벌어지는 투쟁에 대한 고민으로 많이 읽히고 고민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아직 기록되어야 할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동지들이 있다. 80년대부터, 혹은 90년대부터 이 땅의 노동자로 살다보니 노동조합 활동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크고 작은 싸움을 통해 단련되어온 많은 선배 동지들이 부디 그 아픔과 고통의 순간 뿐 아니라 기쁨과 행복했던 순간까지 동지들과 함께 더불어 나누며 때론 이기기도 하고 패하기도 하며 겪었던 그 모든 것들이 잊혀지기 전에 마땅히 기록되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과거와 현재의 노동자 투쟁의 경험들이 온전히 기록되어 빛나야 한다.
그 기록은 평등한 세상을 향한 우리의 꿈을 현실에서 이루는 길의 소중한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