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 김도현 / 메이데이

1. 
고백하건데 나는 장애를 모른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임금노동자로 살며 착취당해야 하는 사회 시스템이 가져오는 폭력과 야만이 싫고, 더많은 이윤을 위한 자본의 욕망이 더 많은 착취를 감당하라고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는 뻔뻔스러움이 싫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는 적어도 임노동과 자본의 모순으로 인한 인간소외와 불평등은 사라지는 사회를 만들고 싶고 투쟁하고 있다. 그 투쟁의 과정이돈을 목표로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는 과정이므로 그저 막연하게 여성, 민족, 그 외 온갖 차별받아온 소수자들이 자기권리를 찾는 과정과 함께 할 거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먼미래 아닌 지금 현실에서 차별은 구체적이며, 폭력적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임금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장애인들의 삶이 끝없이 격리되어 비참하고, 갖은 것이라고는 몸뚱이 밖에 없어서 늘 온몸으로 저항하는 투쟁을 해온 역사가 눈물겹다.

 투쟁을 하다가 국가권력에 의해 구속되어 징역사는 불과 몇 달의 기간에 나는 이 사회에서 격리되는 인간들에 대한 정신적 육제척 폭력에 화가 났으며 절대 굴복하지 않고 이 질서를 바꾸기 위한 투쟁을 할 거라 생각했었다. 사회에서 격리되는 자들의 심리와 인갑답게 존중되지 못하는, 혹은 범죄자 이므로 인간답게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다.

그런데 임금노동자로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해서 살 수 없을 거라는 낙인이 찍힌 장애인들의 삶은 평생이 감옥과 다름아니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 권리가 이동권이다. 장애인에게 이동권은 곧 생존권이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활동이 노동으로 인정되는 기준은 ‘자본을 위해 이윤을 창출하거나 그에 도움을 주는가’의 여부이다. 그렇지 않다면 마찬가지로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거나 헐값에 활용된다.... 또한 현재 최저임금법에서 명시적인 예외조항으로 남아있는 것은 장애인(정신 또는 신체의 장애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자)이 유일하다. 장애인 보호 작업 시설에 일하는 장애인들은 2004년도에 평균 15만 7천원의 ‘임금’을 받고 노동해야 했다.”

15만 7천원?
15만 7천원!!! 
겨우 15만 7천원의 임금을 합법적으로 받는 노동자들을 인정하는 사회에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 매년 해온 최저임금을 높이기 위한 투쟁에서 소외된 장애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에 경악했다.

책을 읽으며 여러대목에서 반성했으나 여전히 무겁다.

2.
김도현은 더 평등한 세상에 대한 고민을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한다. 그 자신이 장애인이동권투쟁을 한 활동가로서 격은 생생한 투쟁의 과정, 그 모든 고민의 과정이 책속에 온전히 담겨있다.

매우 쉽게 서술되어 있고, 나처럼 장애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조목조목 차분하게 설명한다.
장애를 사회적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근대이후 개념화된 장애에 대한 설명,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장애를 규정하고 장애인을 절멸시키거나 치료해서 없애려고 노력해왔는지, 그것이 장애인을 어떻게 비장애인과 격리하는지. 그리고 현실에서 장애문제와 장애인운동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반자본 운동으로서의 진보적 장애인 운동까지.

철학부터 현실운동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까지 낮은 목소리로 친절하게 설명한다.
오랜시간 장애인투쟁을 하며 느꼈을 분노와 어려움을 호소하기위해 목소리를 높일 법도 한 대 그렇지 않다. 다만 행간에서 읽히는 분노가 차분하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김도현을 칭찬해주고 싶다. 내가 당장 어쩌지 못하지만 나의 무식함을 일깨워주어 고맙고 내가 당장 어쩌지 못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우리가 덜 부끄러운 세상을 사는데 일조하는 그에게 고맙기도 하다. 물론 말로 인사만 할만큼 뻔뻔스럽지는 않으려 한다. 

내가 비정규직 투쟁을 열심히 하는 것이 장애인들의 투쟁에 즉각 연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겠다. 먼미래를 인간답게 바꾸려는 비젼을 갖으려면 현실에서 벌어지는 장애인들의 투쟁에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최저임금에서 장애인이 소외되지 않도록 정부에 요구하고 투쟁해야 하는 것이고,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을 위해 노동자들이 파업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모든 연대가 그렇듯이 공동의 요구를 걸고 투쟁하는 동지로 만나야 한다.

무겁고 고민스럽다. 김도현과 그의 장애인동지들에게 너무 오랫동안 미안한 부채의식을 갖지 않아야 한다. 이미 충분히 외롭게 투쟁해온 동지들이다.

무겁고 고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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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눈물이 난다

읽기가 고통스럽다.
1985년의 구로동맹파업을 87년 노동자대투쟁과 97년 민주노총 총파업을 거쳐 2008년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 책을 읽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다.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더욱이 서평을 부탁받은 책을 무려 석 달이 넘게 읽었다.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 5년째에 접어들며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허전했던, 불법파견투쟁의 패배 이후 정규직과의 연대는 그 어려움만을 확인한 채 답보상태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패배의식에 갇혀 오히려 정규직노동조합에 더욱 의존하고 있는 현장 상황 속에서 연초부터 사내하청업체의 폐업으로 인한 투쟁을 속절없이 패배한 이 겨울, 그래서인지 책을 손에 들고 몇 줄 읽기만 하면 준비된 눈물이 자꾸만 났다.

 

 

 

 

고단한 삶의 기록들, 모두 기억해야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는《아름다운 연대》라는 구로동맹파업 백서와 함께 나온 쌍둥이 책이다. 구로동맹파업 백서를 정리하며 그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수많은 선배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구술한 것을 정리해 얻은 일종의 부록이랄까. 물론 내용적으로 《아름다운 연대》에 기대어 있는 것도 아니고 덜 중요한 것도 아니다.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 삶을 말하다’라는 부제처럼 각각의 다른 위치에서 파업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자기역사 쓰기, 자서전쓰기이다.

자서전형식으로 씌어져 좋은 점은 한 사람의 삶을 다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서움도 없이 빛나고 뜨겁게 투쟁했던 딱 그때만을 쓴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태어난 동네와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공순이, 공돌이로 취직해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그때는 모르고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그 중요한 구로동맹파업을 했던, 그리고 패배의 상처, 잘 감당되지 않는 무거운 시간을 버티어 살아낸 후, 아직도 생각하면 눈물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기억을 썼다.

이 모든 것을 다 보여준다.

운동에 있어서 의미나 성과보다 하루하루 먹고살아야 하는 삶이 더 고단했던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했던 수많은 조합원들. 역사적 의미로 평가되는 그 행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은 해명되지 않는 울분과 한숨과 절망까지 우리는 통째로 다 기억해야한다.

또한 역사는 투쟁을 조직한 지도부 몇 명만의 것이 아니므로 구로동맹파업 역시 몇몇 명망가의 배경으로만 기억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사업장의 다양한 위치에서 참여했던 여러 사람의 다른 이야기들이 반갑다. 그런 철학으로 기획된 책이라 반갑다.

투쟁에 대한 책임이란 무엇인가

비정규직 투쟁을 하며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어떻게 책임질 거냐?’이다. 구로동맹파업의 역사적 의미를 현실에서 살리도록 노력하자고 하면 아무도 반대할 사람이 없겠지만 아마도 그런 투쟁을 지금 현실에서 조직하자고 하면 이런 소리를 할 것이다.

“질게 뻔한데, 그 다음 수는 뭐냐? 어떻게 책임질 거냐? 수천 명 조합원들의 생계를 어떻게 할 거냐?”

노동조합 투쟁이 다 그렇지만, 비정규직 노동조합들은 더욱 그렇다.
단지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현재 자본의 통제전략과 딱 맞부딪히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은 아주 사소한 것조차 양보하지 않는다. 공공사업장인 KTX 승무원들의 투쟁이 그렇고 이랜드ㆍ뉴코아 투쟁이 그렇다. 그리고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을 하는 사내하청노동조합에도 그렇다. 자본은 사내하청노조가 요구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들어줄 때도 결코 사내하청노조와 협상하지 않는다. 정규직 노조와 협상하고 우리의 요구를 들어준다. 사내하청노조의 존재를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기는 싸움만 할까? 민주노조 운동의 후퇴로 현재 비정규직들의 삶은 마치 노예와 같다. 수십 년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거둔 성과를 ‘비정규직’이라는 형태로 통째로 넘겨주었다. 이기고 싶다. 제발 이겨봤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기는 싸움이란 어떤 것인가? 이기는 싸움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본은 우리가 준비하고 대응할 수 있는 미래의 어떤 날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결국 현재 벌어지는 생존권 투쟁을 최선을 다해서 조직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기는 싸움을 위한 준비이고 책임이다. 그 속에 조합원들의 피해가 있다. 해고되고, 가끔은 수배되고, 어렵고 힘든 삶을 살도록 한다. 그 삶에 대한 책임을 왜 감히 소수의 지도부가 다 지려고 하는가?

구로동맹파업의 성과가 그 당시 투쟁을 조직한 지도부 뿐 아니라 함께 했던 조합원 모두의 힘으로 가능했다면 그 책임 또한 조합원들과 함께 지는 것이다. 오만하게 소수의 지도부가 그것을 다 책임지려하는 순간 비겁해지고 싸움은 해보지도 못하고 끝없는 후퇴를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이럴 때, 마땅히 해야 하는 투쟁을 제때 하지 않아 싸움 해볼 기회조차 조합원들에게서 빼앗고 후퇴하는 것을 지도부는 책임져야 한다.

누가 감히 구로동맹파업을 실패한 투쟁이라 할까

그런 의미에서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에서 선배들이 말해주는 목소리가 반갑다. 투쟁의 패배에 대해서, 그리고 그 후 운동적 성과와는 무관하게 남루한 삶을 힘겹게 살아야 했던 것까지 포함해서 그 책임을 지도부에 돌리고 있지 않다. 열심히 살았고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노동자라는 말에 자부심을 알게 됐고, 그래서 더욱 열심히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비록 패했고 그 뒤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긍정하며 우리가 올바랐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당연함에도 고맙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것 그 자체가 독재국가의 통치전략과 딱 부딪히던 시기. 그저 임금인상 요구와 단협을 위한 투쟁을 하는 것만으로도 빨갱이라고 내몰리던 시기에 지역총파업을 했던, 어찌 보면 그 무모한 싸움을 ‘당연히’ 생각하며 했던 선배들의 패배한 투쟁의 역사위에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있고 90년대의 민주노총이 있다. 누가 감히 구로동맹파업을 실패한 투쟁이라 하겠는가?

노동자들의 삶, 잊히기 전에 더 많이 기록해야 한다

그래서 값진 책이 나왔으니 부디 과거의 한때에 대한 회고만으로가 아니라 지금 벌어지는 투쟁에 대한 고민으로 많이 읽히고 고민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아직 기록되어야 할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동지들이 있다. 80년대부터, 혹은 90년대부터 이 땅의 노동자로 살다보니 노동조합 활동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크고 작은 싸움을 통해 단련되어온 많은 선배 동지들이 부디 그 아픔과 고통의 순간 뿐 아니라 기쁨과 행복했던 순간까지 동지들과 함께 더불어 나누며 때론 이기기도 하고 패하기도 하며 겪었던 그 모든 것들이 잊혀지기 전에 마땅히 기록되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과거와 현재의 노동자 투쟁의 경험들이 온전히 기록되어 빛나야 한다.
그 기록은 평등한 세상을 향한 우리의 꿈을 현실에서 이루는 길의 소중한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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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다 아는 구전 동화 하나

옛날옛날 하늘나라에 옥황상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옥황상제에게는 어여쁜 딸이 있었는데 베를 잘 짜서 이름이 직녀였답니다. 직녀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으니 소를 잘 키우는 목동 견우였습니다. 봄날 꽃같은 사랑을 나누던 견우와 직녀가 그만 베 짜는 일과 소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견우와 직녀의 마음을 저는 알 것도 같습니다만 옥황상제는 사랑 놀음에 일을 게을리 한 두 사람에게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아 만날 수 없는 벌을 내립니다.
다만 일 년에 한 번 칠월칠석날,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만날 수 있도록 허락했지요. 그러니 일 년에 한 번 사랑하는 견우를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려 사랑하는 직녀를 만난다 해도 강 건너 아스라이 손짓 하고 있으려니 통곡하는 울음이 멈추지 않을 밖에요. 마르지 않고 흐르는 눈물이 폭포가 되고 강이 되어 하늘아래 땅위 세상을 휩쓸었습니다. 홍수 때문에 당최 여름만 지나면 먹을 것이고 뭐고 쓸어가 버려 살 수가 없던 동물들이 대책회의를 합니다. ‘이 일을 우찌하면 좋으냐.’ 이때 까마귀와 까치가 ‘우리가 저 위 은하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 주겠다’며 총대를 멥니다. 이름하여 오작교입니다. 견우와 직녀는 칠월칠석날이면 은하수 오작교 위에서 지난 일 년 동안의 그리움을 풀어 끌어안고, 황혼이 질 무렵이면 다시 헤어져 있는 일 년 동안 건강하라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꼭 잡고 놓기 싫은 손, 놓아주며 눈물이 흐르니 아직도 해마다 칠월칠석이면 아침저녁 만나고 헤어지는 연인들의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립니다.

“선배노예들의 뜻을 절대 잊지 말자.”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이야기에는 그것을 구전한 공동체 사람들이 동의하고 승인한 매력이 있는 법이다. 자연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옥황상제면 하늘나라의 왕인데 그 딸이 베를 잘 짜서 직녀이고, 옥황상제의 딸이면 공주인데 그 공주의 사랑하는 연인이 귀족이나 높으신 양반이 아니라 소치는 목동이라니.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는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입에서 입으로 서로 전한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 봄볕처럼 화사하다.

안타깝게도 지배계급이 판정리해서 남기는 역사는 베 짜는 아낙네도, 소치는 목동도 남기지 않았다. 왕들이 뭘 했는지, 귀족들이 어떻게 살았고 얼마나 잘났는가만 기록한다. 거역할 수 없는 핏줄로 면면히 세습되는 권력의 독점. 그 오만한 논리의 반복적 배열이 역사이다. 또한 역사는 아무나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양에서는 왕실의 사관, 서양에서는 신의 영광을 살아있는 교황에게 바치는 수도원의 수사들이나 ‘기록’이라는 신성한 일을 할 수 있었다. 사실 글을 배울 만큼 한가한 사람들, ‘천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지배계급이었다.

가끔 나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조선 초기 세종이 왕실의 정당성을 위해 만든 《고려사》의 <최충헌전>은 ‘만적의 난’을 기록하고 있다. 무인정권으로 집권한 최충헌의 노예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슬로건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 어찌 노예라고 채찍 아래서 천대만 받겠는가!’였다. 만약 당시 반란에 참가한 노예가 이 일을 기록했다면 마땅히 ‘난亂’이 아닌 ‘노예해방투쟁’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비록 패한 투쟁이지만 비천한 노예로 사느니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우리들의 꿈과 결의는 비장했다. 적들에게 어떻게 교란당했는가! 동지들의 싸늘한 시체를 뒤로하며 후퇴한  발걸음의 억울함과 한을 담아, 부디 살아남은 노예들은 그 뜻을 결코 잊지 말고 반드시 복수해 주자. 저 높은 신분 질서의 장벽 아래 다시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말자. 우리 비록 쓰러져 죽어갔지만 해방의 날 꽃으로 피어 만나자.”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정신을 기리며 해마다 전투했던 들판, 선배들의 피로 물들였던 땅을 딛고 만나 해방을 이루기 위해 먼저 가신 노예선배들에게 묵념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결의를 하진 않았을까?


남기고 싶은 것

- 이름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마음


얼마 전 막스 갈로의 로마인물 시리즈 중 첫 번째인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이라는 책을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입맛이 쓰다.

막스 갈로라는 작가를 잘 모르는데 기특하기는 하다.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하게 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새로운 로마’를 나날이 정복한 제국.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찬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거느린 로마의 황제나 귀족이 아니라 노예를 그 시리즈의 첫 번째로 선택한 만큼의 양심이 그에게 있다. 또한 다음 시리즈 책들의 주인공인 네로에게는 ‘비밀’을 티투스에게는 ‘승부수’라는 단어를 주었으면서 스파르타쿠스에게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짝지어준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유인즉슨 말하는 짐승으로 원형경기장에서 서로 죽일 때까지 싸워야하는 비참한 노예로 살 수가 없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싸운 스파르타쿠스는 죽음으로써 이름을 남겨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다. 막스 갈로는 스파르타쿠스에게 죽음은 곧 삶이었다고 말한다.

나름대로 양심적이고 진보적일 수 있으나 오히려 교묘하게 입맛이 썼던 가장 큰 이유는 스파르타쿠스만 있고 노예반란은 없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수백만 노예들이 2년이 넘도록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휩쓸며 전쟁을 하는 장면들에서조차 다른 노예들은 대부분 그저 스파르타쿠스의 뛰어남을 확인하기 위한 배경으로만 쓰일 뿐이다. 참으로 제국 로마스러운 서술이 아닌가 말이다.

만약 스파르타쿠스의 노예해방투쟁에 함께 한 노예가 역사를 남겼다면 어떤 방식으로 살고 싸우다 죽어갔는지, 그들 하나하나가 어떻게 감히 거대한 로마제국을 상대로 싸움을 결의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기록할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의 아주 많은 고민이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폭발했을 테니 말이다. 더욱이 마지막 한 명의 전사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절대로 등을 보이지 않았으며 기어코 무릎이 꺾이고 쓰러질 때까지 적을 향한 칼날을 놓을 수 없었던 동지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눈물겹게 고맙고 소중했겠는가. 로마의 귀족들에게 그 징글징글한 전투에 대한 기억을 저주하게 만들고, 단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보기만 한 노예까지도 다 죽여서 기억을 없애려고 했다는데, 이 싸움이 어찌 뛰어난 스파르타쿠스 하나의 이름으로 끝날 것인가 말이다. 

남기고 싶은 것은 이름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함께 투쟁을 결의한 헐벗은 동지들 외에 아무리 둘러봐도 아군은 없고, 고립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싸움을 이를 악물고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을 지배계급은 죽어도 모른다.

노동자의 해방투쟁은 노동자가 기록해야

그러므로 우리가 써야 한다. 노예반란을 노예가 기록하지 못했지만, 노동자의 해방투쟁은 노동자가 기록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를 노동자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노동자의 투쟁의 역사와 삶의 역사를 우리는 부지런히 써야 한다. 늘 중요하다고 말만 하면서 막상 날마다  날마다 벌어지는 투쟁의 현장에서 바쁜 우리는 기록해서 남기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투쟁이라는 것을 자꾸 까먹는다.
이러다가 천 년 뒤 우리의 후세들이 2008년을 검색해 이명박과 박근혜, 노무현만 알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화가 나서 땅속에서도 벌떡 일어나 ‘아니야!’라고 바락바락 소리지르고 싶어질 것이다.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는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옥황상제가 사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나와 내 아이들이 살 이 땅위에 굳건하게 건설하기 위해 우리의 투쟁을 쓰고 읽자.

노동자가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 책,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는 그래서 값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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