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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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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대화로 정리한다는 것은,
읽기 전에는 좀 낯설고 적절하지 않은 방법인듯이 느껴졌었다.
자기 삶을 돌아본는 것은 사람마다 다른 의미 이겠지만,

과거 거짓말하거나 사기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의 한 표상인
리영희의 삶을 대화로 돌아본다니.

그런데 그것이 진검승부의 느낌이다.

임헌영과 리영희의 대화는 충분히 서로 존중함에도 아부하지 않고 옳바로 한 시대를 평가하는 방법으로 적절했다. 리영희 삶, 그 자체가 가지는 정의의 힘과 임헌영의 적절한 질문과 대화가 절묘하다. 피해가지 않는 철학에 대한 동의기반이 있어 그럴거야.

2.
옳고 그른것과 무관하게 철학과 무관하게
오직 욕망과 권력을 쫓아다니며 그 권력의 떡고물을나누기 위한 도서관속의 지식은 흔히
서구의 지식을 번역하기에 급급하고
독일의 어느 대학 어느 교수에게서 수학하는 것만을 자랑하는 잘난 지식이 넘칠때

언론사 기자로 일하며 사실확인을 하며 구체적인 상황에 구체적으로 사색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한 이영희의 삶에 그가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있어 더욱 다행이다.

3. 어쩌면 이렇게 늘 성실하고 늘 진지했을까? ^^

타협하지 않고 학자의 양심으로 평생을 살아낸 노학자의 열정과 고집, 고민

그를 통해서 보는 한국현대사

 

4. 그래도 나는 동시대에 같은 하늘아래서

'역사는 한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의 허영철 에게 2%더 고개를 숙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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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시대 - 에릭 홉스봄 자서전
에릭 홉스봄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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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끔 프랑스나 영국의 새들은 우리보다 넓은 하늘을 날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그 동네 사람들이 무턱대고 부러울 때가 있다.
마치 그들은 늘 지성과 토론에 자유롭고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 논리적인 판단을 하며 사회를 꾸려가는듯이 느껴질 때마다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 와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생각한다.
자본주의를 고도로 발전시켜 그 모순의 폭발을 격고 자본과 임노동의 계급적 갈등을
식민지에서 수탈한 초과이윤으로 잠재운 그들은
물론 노동자계급에게 이윤을 조금 더 나누어주기까지 아주 많은 젊은 피와 열정이 아낌없이 바쳐졌다는 것을 기억하려 한다.

혹시 영국이나 프랑스의 하늘이 더 넓다면 공짜가 아니라는 얘기지.^^


2.
그리하여 홉스봄은 차분하게 서두르지 않으며 소박하고 깊은 노인의 직관과 지혜를 들려준다.
피로 얼룩진 20세기는 또한 극단적인 배신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 한세기 공사당을 배신하지 않으며 배신해야 할 이유를 모르며, 혹은 배신할 시기를 놓치며
우직하고 성실했던 자신의 삶에 대해 교만하지 않은 자부심은 타당하다.

오래동안 성실하게 산 노인이 자기 삶을 돌아보며 이만큼 낮은 목소리로 당당할 수 있다니. 부럽다.


3.
똑같은 시기 우리 땅의 젊음들은 훨씬 날카로운 좌우대립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밑에 숨죽여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위해 헌신한 선배들의 육성을 대부분은 듣지 못한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이미 죽임을 당했으므로.

오직 욕망에 의해 더 많이 더 노골적으로 착취하려는 자들의 피묻은 입술과
한때 민주를 외쳤던 것을 명함삼아 권력을 향한 욕심을 감추지 않는 천박한 자들의 자서전이 넘쳐난다.
드러운 것들.


4.
그러나 홉스봄에게 부끄럽지 않을 선배들이 많다. 
지식인의 삶으로 본다면 리영희 선생의 '대화'를 함께 보면 동시대를 다른 곳에서 살아간 두 사람의 현인을 비교할 수 있다.
순전히 우연에 의해 어느 곳에 태어나는데 이렇게 다르다!!! 
내가 백년 쯤 산다면 나에게는 어떤 세기일까? 혹시 지긋지긋하고 지루하다면 내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겠지.^^

'흥미로운 시대'를 산 홉스봄 오래 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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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노먼 베쑨 역사 인물 찾기 1
테드 알렌 지음, 천희상 옮김 / 실천문학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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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신뢰할 만한 평전이 많지 않다.

어릴적에 학교에서 전기문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숙제를 지겨워했던,  그때의 나쁜 기억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박홍규의 전기문을 좋아하고, 실천문학의 역사인물들은 신뢰할 만 하다.

의사라면,  양신적인 의사라면 의술을 상업의 수단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은 진실이다.

우리는 잊고지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도 건강할 권리가 있는것이다.

의료행위가 돈을 버는 고급수단이 되어, 가난한 사람은 의료를 기대할 수 없는 사회에 아직도 우리는 살고있다. 불행하게도.

적어도 교육과 의료는 모든 국민에게 무상으로 공급되어야 한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이러한 인식을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이런 의사를 매우 특별한 정신을 지닌 어떤 사람으로 보도록 만든다.  돈버는 것에만 몰두하는 의사를 우리는 상식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인간적인 사회 상식이다.

베쑨 뿐 아니라 이 책에는 누구도 시비걸 수없는 인물들이 많다.

일제에 저항하는 중국공산당의 전투 속에서,

참혹한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적 낙관을 갖고 신념에 몰두했던 모든 인물들에게 존경을.....

특수한 상황에서 특별히 정의로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데, 그것이 억지스럽지 않은 것은, 그 사람들이 모두 실수하고 아파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 때문이다.

테드 알렌과 시드니 고든이라는 두사람의 작자가 어떻게 역할 분담을 하고 책을 서술했는지 알 수없으나

소박하고 정직한 문체가 좋다.  세련된 글을 위해 굳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어리석음이 없이 진솔하며 편안한 글로 서술되어 있다.

글에 대한 철학과 인문학적인 소양이 깊은 사람들이다. 겸손하고.

베쑨의 전기를 쓰기에 적당한 사람들에었던 게지. 그래서 한번 더 감탄했다.

좋은 전기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평범한 사람이 시대의 고민을 느끼고 공감하며 최선을 다할때 어떻게 뛰어난 삶을 사는지 보여준다.

베쑨의 철학을 가진 의사가 우리 시대에도 있나?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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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교육학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 아침이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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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가 너무 많이 쏟아지고, 보고싶은 책도 많고, 그러면서 시간없다고 말하며 게으르기도 하고, 새책 평이 나오는 신문을 보고 메모하고 알라딘을 돌아다니니며 쇼핑을 하며,

그런데, 정말 이 많은 책을 내가 다 읽을 수 있을까?  그런데, 때론 두번 세번 읽고 싶은 책이 있기도 하다.  아주 느리게.

"민중이 자신의 언어로 억압자의 세계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상상하도록 하는것" 이 프레이리가 말하는 희망의 교육이다.

꼬장꼬장하고 깐깐한 노인네라는 생각이 드는데, 삶과 정의에 대해 깊이있게 고민하며 엄격하다. 탐욕적인 보수정치를 바꾸기 위해 대다수 헐벗은 민중을 '교육' 한다는 것에 참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한다. 그러나

'투쟁의 윤리와 저항의 미학'에 대해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프레이리를 보며, 우리는 모두 더 맣이 겸손해져야 한다는 반성을 했다.

무엇보다 좋은건 글이 쉽다는 거다. 평소 문체나 말투에는 이미 그 사람의 철학과 화제에 대한 판단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어려운 말로 해방과 혁명을 말하는 글에 대한 짜증 -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한 글들이 왜그렇게 민중과 멀게 있는지) 지식인만 알아볼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은 이미 다수를 소외시킨다. 이론의 엄밀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다수 민중의 논의수준이 상향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작자는 자기가 쓰는 글을 읽을 사람을 누구로 선정할지 쓰면서 이미 결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프레이리의 편안하고 적절한 문체가 감동적이다.

민중을 교육하고, 모순된 세상을 전복하기 위해 제일 먼저 자기자신에게 엄밀함의 자를 들이대고 실천하는 사람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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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의 옥중 19년
서승 지음 / 역사비평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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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다. 일본에서 태어나 차별받으며 민족에 대한 자각을 하고,'적극적 민족주의'를 인식하며 그 애정으로 유학을 와서 형 서승은 19년, 동생 서준식은 17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20대에 감옥에 갇혀 40대에 세상으로 나왔다. 난감하다. 젊은날을 온전히 감옥에서 폭력과 폭행을 당하고 살았으면서도 세상에 대해 비관한다거나, 누구를 원망한다는 느낌이 없다. 심지어 고문을 했던 사람과 폭행을 했던 천박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차분하게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남다른 성품도 있겠지만, 비전향 장기수들이 대부분 그러하게 느껴진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생존의 위협을 일상적으로 받으며 짐승처럼 살았지만, 또한 세상 어디에도 그만한 공간에 그만한 품성과 인격과 열정을 지닌 인간들이 한꺼번에 많이 가깝게 지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서로 존재에 희망을 걸고 있었겠지. 그리고 서로서로 사상과 정당성과 용기와 지혜를 나누며 누구보다 정의롭게 버티어냈겠지.

정말 그랬을까? 모욕적인 폭력에 방치되어 죽고싶을때를 경험한 그들에게 역사는 어떻게 보상할까. 어머니. 두형제의 어머니 또한 일본에서 살며 두달에 한번씩 감옥을 면회하는 마음은 또 어땠을까. 네가 생각해서 판단하는 대로 하라고 말하는 어머니는,아들의 얼굴이 화상으로 일그러지고, 사형수가 되고, 폭행을 당해 죽어가는 아들을 감옥에 둔 어머니는.

우리는 참 강심장이다. 감히 인권을 유린하는 독재정권은 말할것도 없고. 옳바르지 않은 것을 태연히 살아가는 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은 참 강심장이다. 절제되고 냉정하며 객관적인 말투로 19년 동안 비전향장기수로 살면서의 개인적인 것 뿐 아니라, 그 세월을 함께 살아낸 다른 분들에 대한 표현들도, 모두 정성으로 씌어져 있다. 그들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느껴진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 우리의 현대사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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