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과 그림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김지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은 대개 평론가라는 부류를 싫어한다. 몇 년에 걸쳐 피땀 흘려 쓰거나 작곡하거나 만들어낸 것을 단 몇 시간 또는 몇 분 동안 읽거나 듣거나 일별한 후에 써내는 몇 줄의 글로, 공들여 쌓아온 그 모든 것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는 사람. 누가 그런 사람을 반기겠는가? 아니, 물론 눈앞에서는 반기며 미소지어야겠지. 내 작품에 대한 보다 나은 평을 위하여. 그러나 뒤돌아서서는 모두들 욕하고 되도록 가까이하지 않으려 하며 겁내고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평론가 중의 한 사람이다. 현대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노평론가. 게다가 평론가답게 그 독설이 장난 아니라 하니 독일 문학계 전체가 그의 날카로운 눈초리 앞에서 몇 십년 동안 바르르 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러나 이 책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그다지 무섭지 않다. 아무래도 자기가 애정을 가지고 대하는 작가들을 선별했기 때문인지 날카로운 비평 속에서도 한가닥 애정이 묻어나고, 현재에 와서 잊혀져버린 먼 시대의 작가들에 대해서는 애타는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한다.

제목처럼 이 책 속의 글들은 한 장의 그림, 즉 작가들의 초상화를 기본 소재로 해서 얘기를 풀어나간다. 초상화 주인공에 대한 일화나 그의 작품세계, 초상화를 손에 넣은 과정, 그에 담긴 추억 등등 그림과 책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려나오면서,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독일 문학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일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사실 외국의 문학작품이라 봐야 아주 유명한 작가들의 책 이외에는 제대로 번역 출간되지 못한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작가 상당수의 작품명은 커녕 이름조차 낯설기만 하다. 독일문학 전공자나 되어야 고개를 끄덕이며 반가이 읽을 수 있을까.. 그러나 비록 모르는 작가더라도 이렇게 짧은 글을 통해서나마 익혀뒀다가 언젠가 진짜 그의 작품을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책 전체를 통해 작가들을 분류하는 한 가지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유태인 작가냐 아니냐' 하는 것. 저자 라니츠키 본인이 유태인으로서 나치 치하의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야 했고 부모 형제를 수용소에서 잃은 처참한 기억을 갖고 있으니 이 문제가 그의 골수 깊이 각인되어 있으리란 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덕분에 유태인 작가를 거론하면서는 그의 유태인으로서의 행적, 사회로부터 받은 핍박, 그에 대한 대처, 문학 속에 나타나는 유태인 정체성 등을 주로 논하고 있다. 좀 집요하다 싶을 정도이긴 하지만 요사이 계속 문제시되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와 연계하여 생각하면 더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잘 모르는 작가에 대한 글까지 끈기 있게 다 읽고 나면, 아직 페이지 수가 꽤 많이 남았는데 벌써 역자후기와 편집후기나 나온다. 아니 그럼 남은 페이지는 뭘까 싶어 들쳐 보면 약 50페이지에 걸쳐 빼곡히 적혀 있는 '인명해설'. 오, 이런 기대 이상의 자상함이라니.. 위에 말한 대로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한 이름들이 많이 등장하는 본문의 특성상 독자들의 독서 편의를 위해 편집자가 공을 들여 마련한 섹션인 것이다. 목차에 등장하는 작가들 뿐 아니라 본문 내용에 잠깐 스치듯이 언급된 인물들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달아두었다. 또 거명된 작가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저서명과 출판사, 출판년도, 번역자까지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고..

이런 부분을 봤을 때 독자들은 감동하면서 이 책은 '정말 잘 만든 책'이라고 일컫게 된다. 이렇게, 잘 팔리는 책보다는 잘 만든 책에 대한 편집자들의 욕심을 기대하고 싶다. 그리고 이 책 덕분에 지난번 이 출판사(씨앗을 뿌리는 사람)에서 나왔던 <헌책방마을 헤이온와이>에 대한 실망감을 씻고 세 번째 '책에 대한 책'을 기다려본다.

마지막으로 마음에 들었던 문장 하나. 안톤 체호프에 대한 글 중 일부인데, "고골리가 사회를 고발한 고소인이었다면, 톨스토이는 재판관이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스스로 피고인을 자처하였던 반면, 체호프는 그저 증인의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러시아 4대 문호에 대한 독일 최고 평론가의 짧지만 직관적인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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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6-1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도 이런 리뷰를 쓰고 싶어요. 책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함께 자신의 느낌을 생생히 전해주는... 님의 리뷰를 자주 읽다보면 그렇게 쓸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그리고 저자라고 평론가를 다 싫어하는 건 아닐 듯 싶습니다. 제가 저자라면, 평론가가 자기 책에 대해 한줄이라도 언급해 주기를 바랄 것 같아요. 유명한 평론가의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superfrog 2004-06-1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재밌게 잘 읽었어요..^^ 저도 님 리뷰를 읽다보면 멋진 리뷰를 쓸 수 있겠죠..? ^^

반딧불,, 2004-06-17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동감합니다.
외투^^전 소름이 끼쳤었지요.

starrysky 2004-06-17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그런 과찬의 말씀은 부디 삼가주시옵소서. 님이시야말로 남들 다 아는 리뷰의 귀재이신데 다만 알라딘 관계자라는 이유로 인해 리뷰상을 못 타시는 것 뿐 아닙니까. 저는 늘 님의 리뷰를 프린트해놓고 하루 12번씩 되풀이 읽으며 공부하고 있사옵니다.. 싸부님!!! ^-^ (살짝 과장;) 그리고 평론가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는 물론 저도 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다만 너무나 막강한 힘을 가진 평론가에 의해 휘둘려버리는 힘없는 신인 예술가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가끔..
물장구치는금붕어님. 님까지 이러시깁니까? ㅠㅠ 역대 마이리뷰 당선자들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저를 땅에 묻고 흙까지 꽉꽉 밟아 다져주시는 격이옵니다. 흐흑.. (눈물 닦고) 네, 칭찬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알고.. (켁. 음악캠프 1등 수상 소감을 말하는 듯한..;)
반딧불님. 마지막 문장 멋지죠? 책 내용 중에서 제일 와닿더라구요. 제가 많이 무식해서 저렇게 쉽게 비유를 해줘야 아항 그렇구나~ 하면서 알아듣거든요. ^^

플레져 2004-06-18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쿨한~ 달콤한~ 쌉싸름한~ 리뷰여요!
감동 먹었음...
스타리님 믿고 당장 책 주문 하겠습니당 ^^*

starrysky 2004-06-18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 감동씩이나.. 부끄럽사옵니다 플레져님.. ^///^
근데요.. 리뷰에 쓴 것처럼 워낙에 모르는 작가들이 많이 나와서 어느 정도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지루하실 수도 있다는 점, 꼬옥 염두에 두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