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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에는 무엇이 있을까?
헌책방이 있다. 마크스 & Co.라는 작은 헌책방. 아니 있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지금은 사라지고 이 곳에 한때 그런 이름의 서점이 존재했었노라고 알려주는 작은 동판만이 남아 있다니까...
세월의 더께가 묻고 수많은 전주인들의 흔적이 책갈피마다 배어 있는 고서들이 천장까지 하늘까지 쌓여 있는 작은 헌책방. 영국인들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값싼 양서를 구하고자 하는 수많은 책벌레들이 채링크로스 84번지로 편지를 띄운다. 가난하지만 책과 배움에 대한 열망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희곡 작가 헬렌 한프도 채링크로스 84번지에서 일하는 FPD(프랭크 도엘)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꿈에 그리던 책들을 하나하나 손에 넣는다.
헌책방 직원과 고객이 주고받은 편지 묶음. 그러니 이 책은 사실 사고자 하는 책 목록과 청구서의 숫자들만 나열되어 있어야 마땅할 듯하다. 그러나 저자의 재기발랄하고 따뜻한 마음씀씀이와 고객의 만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헌책방 직원의 정성,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 합쳐져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관계가 싹트면서 책의 내용, 즉 오고간 서신 내용도 놀랍도록 풍성해진다.
이들이 처음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 것은 1949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화에 휩싸였던 모든 나라들이 복구에 한창일 무렵이었다. 그러나 연합군 편에 서서 치열하게 싸우며 국토의 많은 부분이 손상된 영국은 적국인 일본이나 독일에 비해서도 원조를 제대로 받지 못해, 국민들이 최소한의 배급만으로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헬렌은 단순히 책을 주문하는 고객의 입장을 넘어서, 미국을 대표해 영국인들에게 따뜻한 원조의 손길을 베푸는 친구의 역할을 자청한다.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낡은 아파트에 살면서 주급 40달러의 대본교정 일을 하는 젊은 아가씨, 새 책이나 비싼 책을 사볼 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어 헌 책을 찾는 이 아가씨가 얼굴도 모르는 먼 나라 사람들에게 작지만 따뜻한 마음을 담아 보내기 시작하면서, 이 책은 단순한 도서 주문 목록을 뛰어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헬렌이 편지에 언제나 정다운 얘기만 쓰는 건 아니다. 때로는 주문한 책을 빨리 보내주지 않는다고 앵앵거리며 독촉하기도 하고, 원하던 책이 아닌 엉뚱한 책이 오면 화를 내면서 항의도 한다. (이런 대목에서 나와 알라딘과의 관계가 오버랩되기도.. 사사건건 따지는 고객과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는 서점 직원;) 하지만 그런 그녀의 불평은 어디까지나 책을 사랑하는 마음에 기반하여 '좋은' 책을 '빨리' 손에 넣고자 하는 책벌레들의 공통된 소망 때문인 것을 서점에서도 잘 알고 있으므로 어떻게든 그녀의 까다로운 요구에 맞추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때로는 몇 년에 걸쳐 영국 전역을 뒤져서라도 원하는 책을 찾아주는 수고도 아끼지 않는다.
이 책 속에는 내가 학창시절 이후 한동안 잊고 살았던 존 던, 애디슨, 키츠 등의 이름이 등장해서 반가움을 일게 하고, '부드러운 고급 피지와 뽀얀 상앗빛 책장', '은은하게 빛나는 가죽과 금박 도장과 아름다운 서체', '금박 누른 가죽 장정에 금띠 두른 마구리' 등 고급스럽고 아름답게 장정된 책을 묘사하는 대목들이 곳곳에 나와서 애서가들을 한없는 부러움과 열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책을 사고 파는 사람들로서가 아니라, 책을 사랑하는 마음과 인간애를 매개로 해서 이어진 20년간의 우정. 도엘의 때이른 죽음으로 아쉽게 마무리되긴 했지만, 이렇게 둘이 함께 나눈 편지가 책으로 묶여 나와 그 시대적 분위기와 코끝까지 찡하게 하는 고서의 향기를 온 세계의 책벌레들이 마음 가득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책을 좋아하고, 원하는 책을 찾아 수없이 발품을 팔고 인터넷의 바다를 헤매본 사람이라면 이 책의 주인공들과 십분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내용과 책을 읽는 동안의 기쁨만 생각한다면 별 다섯 개를 줘야 마땅하지만, 여백의 미를 지나치게 살린 편집과 그에 비해 비싼 가격 때문에 별 하나 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