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
카릴 처칠 지음, 이지훈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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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알았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작가들이 있다. 카릴 처칠(Caryl Churchil)도 그런 이들 중에 한 사람이다. 1972<소유자들(The Owners)>로 런던에서 극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처칠은 1970~1980년대 작품들로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 극작가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전쟁, 혁명, 환경, 여성, 노동, 신자유주의, 팔레스타인 문제 등 국제 이슈와 역사적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최근 <넘버>를 비롯해 <미친 숲>이 지만지 희곡 시리즈로 선보이고 있는데, 사실 나는 이 두 작품보다 과거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클라우드 나인><최고의 여성들> 같은 작품이 더 궁금하다. 터무니 없는 가격에 중고로 판매되고 있던데 그걸 사볼 생각은 없고 지만지 같은 곳에서 다시 나온다면 바로 사서 읽으려고 한다.

 

<넘버>2002년 발표한 매우 짧은 희곡으로, 배우도 딱 두 사람만 필요하다. 아버지와 아들, 그런데 이 아들은 한 배우가 세 명의 아들을 연기해야 한다. B1, B2, 그리고 마이클. 한 배우가 세 아들을 연기해야 하는 까닭은 아들 B1은 오리지널이지만, B2와 마이클은 B1의 복제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희곡을 보면 세 아들은 생김새는 똑같아도 성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꽤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이 역할을 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처칠이 이 극을 발표한 2002년 영국에서는 인간 복제 문제에 대해 찬반 논쟁이 뜨거웠고, 카릴 처칠은 시의적절하게 그 주제를 자신의 작품에 담아냈다.

 

넘버라는 말과 함께 극이 시작하면 아버지 솔터와 아들 버나드’(B2)가 등장한다. 무대는 솔터의 집. 아버지는 60대 초반이며 아들 버나드는 35. 그들은 서로 무뚝뚝하게 대화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아버지는 엄마 없이 이 아들을 혼자 온갖 애정을 주며 길러온 것 같은데, 지금 아들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병원에서 자신과 똑같은 존재들을 맞닥뜨리고 온 것이다. 자기가 유일한 아들이라고 믿고 살아온 그는, 자신은 오리지널의 복제품일 뿐이며, 게다가 자신을 닮은 여러 명의 버나드, 그러니까 B3, B4, B5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더 있음을 알게 되고 충격과 혼란에 빠진 상태이다.

 

아버지 또한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자신이 원한 것은 B2 아들 하나뿐인데, 더 많은 복제인간, B3, B4, B5……가 존재하다는 것을 그 또한 이제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충격 받은 아들에게 말한다. “그건 계약에 없었어. 그들은 너 하나만 만들기로 했어. 그런 다수의 아이를 만드는 게 아니고 그들이 훔쳤어. 우린 이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해.” 그러니까 솔터는 애초에 아들 하나만을 복제하길 바랐는데, 그들이 계약을 어기고 수많은 복제인간 그러니까 숫자로 명명할 수 있는 인간들을 더 만들어 낸 것이다. 솔터는 그들에게 소송을 할 뜻을 밝힌다.

 

그런데 이쯤에서 독자는 궁금해진다. 독자뿐만 아니라, 복제인간인 아들 버나드(B2)도 궁금하다. 그렇다면 원본, 오리지널 아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솔터는 아들 B2보다 조금 먼저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 아들은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를 대체하고 싶었기에 B2를 복제했노라고 말한다. “그냥 또 다른 애를 하나 더 가지기 보다는 꼭 그 애를갖고 싶었다고. 그런데 이 말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울까 의심이 든다. 그 첫 아들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런데 그 바로 뒤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네 엄마도 죽었으니까.” 오호, 뭔가 이상한 느낌이 온다. 원본인 아들도, 그리고 그 엄마도 사고로 죽었다는 그의 말은 왠지 진실이 아닐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죽었다고 하던 그 첫 아들이 살아서 등장한다. 그가 곧 원본, 오리지널 아들 B1이다. B1은 복제한 아들 B2와 달리 사납고 공격적이며 분노에 휩싸였고, 아버지 솔터에게 무척 적대적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자신이 살지 못한 인생을 살고 있는 복제인간 B2에 대한 질투로 비뚤어져 있다. B2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는 있지만 아버지를 사랑하고, 온순하며 공격성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정서를 갖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음에도 자라온 환경, 양육 환경에 따라 이토록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 원본 아들 B1은 왜 이토록 아버지를 적대시하며, 죽었다던 솔터의 말과 달리 어찌하여 살아 있는 것일까? 그리고 솔터의 아내이자, B1의 엄마는 어떻게 된 것일까? B2 또한 그 엄마의 존재가 궁금한데, 이어지는 솔터의 고백, “네 엄마 엄마에 관한 것 한 가지, 엄마는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어. 엄마는 아주 행복한 그런 사람은 아니었어. 엄만 자살했어.”라는 고백으로 그가 그의 첫 번째 가족(오리지널 아들 B1과 그의 아내로 이루어진) 사이에서는 그다지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작가는 이렇게 <넘버>에서 복제인간 문제를 논하면서도 그 안에서 사라진 어머니(여성)의 존재를 부각시키면서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서 생명과 양육, 본성과 양육 문제를 돌아본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다룬 희곡은 꽤 많다. <오이디푸스 왕>, <햄릿>, <세일즈맨의 죽음> 같은 작품들이 쉽게 떠오른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다룬 오늘날의 이 희곡에서 아들은 복제인간이다. 이 설정부터가 신선하다. 그리고 이 복제인간 아들은 순종적이지만 무기력하다. 원본인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인해 아버지는 물론 복제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런 데다가 여기서 여성은 배제되어 있다. 그동안 남성 작가들이 자신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부자 관계 극을 창조해왔다면 처칠은 그런 관계를 여성의 눈으로 그린다. 그러면서 극에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역할을 오히려 두드러지게 연출한다.

 

사라진 어머니는 권위적인 가부장 솔터에 의해 불행한 결혼 생활의 희생양이 되었음을 보여주면서 첫째로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폭로한다. 또한 어머니 없이 황폐한 가족의 모습(솔터와 아들 B1의 가정)과 어딘가 정서적 결함이 있는 가족(솔터와 아들 B2의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여성이 배제된 세계에서의 비극과 모순을 보여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아들 B2와 또 다른 복제 아들인 마이클의 탄생 과정을 통해, 여성의 몸은 임신과 출산의 기능으로만 그 존재 가치가 있는지 질문하기도 한다. 오리지널 아들을 제외하고는 복제기술로도 생명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은 여성의 몸이 임신과 출산의 도구로 쓰이지 않아도 인류의 지속은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리모라든가, 자궁이 대여의 기능으로만 축소될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솔터는 혼자 아들 B1을 키운다. 그리고 그 실패를 통해 아들 B2는 다른 방식으로 키우는 데 얼마쯤 성공한다. 이런 설정으로 양육과 돌봄은 과연 여성만의 의무인지, 정녕 그들만의 특화된 영역인지 묻기도 한다. 작가가 어디에 더 방점을 두었을지 판단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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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6-21 12:2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가도 작품도 몰랐는데 이렇게 잠자냥 님의 리뷰를 통해 알게 되어서 너무 좋네요. 아 세상에 이런 책도 있구나, 하고 알아가는 게 너무 즐겁습니다. 그리고 보관함에 넣습니다. 슝-

잠자냥 2021-06-21 12:40   좋아요 3 | URL
저는 이 작가 작품 <최고의 여성들>하고 <클라우드 나인> 등이 담긴 희곡집을 원서로 사려고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번역본이 절판이라면! 원서로라도 읽고 싶게 만드는 작가네요. ㅎㅎ

Falstaff 2021-06-21 12:4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젠 희곡으로 한 발 더 딛으신 모냥입니다. 이 작품도,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근데, 지만지, 아 책값이 너무 공포예요. 딱 한 작품인데도 가격이.... 상대적으로 덜 올려서 다른 지만지보단 충격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비싸요. 희곡 하나짜리면 정가 8천 원, 할인가 7.600원 정도가 적당할 텐데 말입죠. 정가, 판매가 12,800원. 지만지는 할인도 안 해줘요, 흥!

잠자냥 2021-06-21 12:45   좋아요 5 | URL
흐흑, 맞습니다. 지만지 책 정말 비싸요. 드문 작품 소개해주는 건 좋은데(특히 희곡 쪽에서)... 이 책도 본문은 100페이지도 안 된 거 같은데 가격은 ㅋㅋㅋㅋㅋ 전 그래서 이 작가의 다른 지만지 희곡 <미친 숲>은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하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한 가지 알려드리자면, 교보는 10% 할인해줍니다. 지만지 사실 거면 교보에서! 예스랑 알라딘은 노 할인.... 근데 전 여기서 샀네요. 그놈의 플래티넘이 뭔지 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6-21 13: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봐도 완전 재미있을거 같아요 ^^ 곧 나의 장바구니로 이동시켜야 겠네요. 역시 희곡 마니아 잠자냥님 이군요😌
알라딘은 플래티넘 보다 상위 맴버십이 필요합니다~!!

잠자냥 2021-06-21 14:20   좋아요 2 | URL
희곡은 또 금방 읽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ㅎㅎㅎ
플래티넘보다 더 상위라면 더 사야한다는 말인가요?! 오 그건 안돼요. ㅋㅋㅋㅋ

독서괭 2021-06-21 13: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희곡은 관심분야가 아니었는데.. 잠자냥님이 많은 사람들을 희곡의 세계로 이끌고 계시네요. 희곡은 오디오북으로 많이 제작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잠자냥 2021-06-21 14:21   좋아요 3 | URL
아하, 오디오북으로 들으면 어린 시절 들었던 구연동화 테이프 듣는 기분이 날 것도 같습니다. ㅎㅎ 아니면 라디오 드라마? ㅋ

syo 2021-06-21 14: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아시아를 정복하고 유럽 방향으로 달려간 징기스 칸처럼 소설을 정복하신 잠자냥 님이 극문학마저 정복하러 출정하셨군요....거침없는 잠자냥님의 말발굽... 😱

Falstaff 2021-06-21 14:50   좋아요 1 | URL
원래 국문학은 정복을 하셨고, 이제 장르 불문입니다. ㅎㅎ

잠자냥 2021-06-21 15:05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 님 노안이다 노안! ㅋㅋㅋㅋㅋ syo 님은 ‘극문학‘이라고 했는데 ‘국문학‘이라고 답 ㅋㅋㅋㅋㅋㅋ 이 양반아, 눈 떠!!ㅋㅋㅋㅋ 어제 소주가 과하셨는감? ㅋㅋㅋㅋ

syo 2021-06-21 15:07   좋아요 1 | URL
잠자스 칸님은 눈도 밝다. 나도 못봤는데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6-21 15:09   좋아요 2 | URL
저는 스무살이니까요.

Falstaff 2021-06-21 15:11   좋아요 2 | URL
아하, 극문학..... 맞아요, 맞아. 노안이 맞습니다!
더구나 마스크 때문에 김 서리는 거 드러워서 안경도 안 끼고 맨눈으로 댕기거든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6-21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복제에다 여성 문제까지 새롭네요. 섬뜩한 디스토피아 분위기네요.

잠자냥 2021-06-21 17:10   좋아요 2 | URL
어찌보면 인간복제 문제는 이제 새롭지 않은 소재이기는 한데, 역시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새로워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아요!

mini74 2021-06-21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내용이 무서운데요. 저 희곡입문. 혼자 대사 중얼거리니 남편이 무섭답니다. 불만 있음 똑비로 이야기하랍니다 ㅎㅎㅎ

잠자냥 2021-06-21 21:5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혼자 대사 상상하니 재미납니다! ㅎㅎ
 
물망초 을유세계문학전집 112
요시야 노부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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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도 근대 문학 시기를 보면 남성 작가들 이름만 주르륵 쏟아진다. 그러다 보니 이제까지 나 역시, 한국 근대문학이나 일본 근대문학을 접할 땐 주로 남자 작가들의 이야기가 이 세상의 모습을 담고 있으려니 생각하며 읽었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예전보다는 그 무렵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종종 만날 기회가 생기고 있다. 덕분에 히구치 이치요, 하야시 후미코에 이어 요시야 노부코의 <물망초>를 읽는다. 이 작품은 서문부터 말랑말랑하다.
 


시냇가 기슭에 홀로 피어난
은은한 하늘빛 작은 물망초
물보라 밀려와 입맞춤하고
아무도 모르게 잊히어 가네.


작가는 이 책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쓰려 한다고 밝힌다. ‘이 세상의 여자아이가 한 번은 지났을 법한, 그런 날도 있었지-하고 미소 지을 법한 혹은 멀리 떠나온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쓸 법한’ 그런 이야기들. 실제로 <물망초>는 여고시절을 거쳐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나 또한 그 시절을 잠시 돌아보기도 했다. 그때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작품 초입은 온건파, 강경파로 나뉘어 한 학급을 소개하고 있다. ‘온건파’란 한마디로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을 말한다. 공부보다는 영화나 음악, 연극을 즐기고 로맨스를 꿈꾸는 아이들로 학급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그에 비해 ‘강경파’란 공부밖에 모르는 아이들이다. 한눈도 팔지 않고 교과서만 판다. 강경파의 머릿속에는 학교의 자랑이라든가 모교의 명예 같은 관념으로 꽉 차 있는 것만 같다. 재미를 찾는 온건파 아이들이 보기에 강경파는 앞뒤 꽉 막힌 답답한 종족이다. 물론 중립지대도 있다. 온건파와 강경파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이들로 그들은 ‘자유주의자’이다. 이들은 평소에는 온건파 아이들처럼 영화든, 연극이든 종종 보러 간다. 그러나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어느새 강경파로 돌변해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교과서와 노트로 달려든다.

학창시절을 지나온 이들이라면 지금쯤 난 이 세 무리 가운데 어디에 속했을까 생각해 볼 것이다. 나는 굳이 따지라면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완벽히 그렇다고도 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할 때쯤 ‘자유주의자 말고도 극소수의 개인주의자’가 있다고 소개한다. 그들은 어떤 모임에도 가입하지 않고 고독한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딱히 이것도 아니었다. 자유주의자와 개인주의자 그 중간쯤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이런 학급 분류가 이어지고는 그 파의 대표격인 아이들이 소개된다. ‘아이바 요코’는 온건파의 여왕으로 예쁜 수다쟁이이다. 수업 말고도 프랑스어와 피아노를 따로 배우며, 아버지는 사업가로 집안이 부유하다. 닉네임은 클레오파트라인데, 줄여서 ‘클레오’라고 부른다. 강경파의 대장은 ‘사에키 가즈에’로 으뜸 모범생이다. 닉네임이 무려 ‘로봇’- 인조인간이 아닐까 싶을 만큼, 피도 나오지 않을 것처럼 공부만 한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로 세 남매를 키우고 있으며, 집안도 넉넉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걸출한 개인주의자인 ‘유게 마키코’가 있다. 말이 없고 개성 있는 성격으로, 모 대학교수 이학박사인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 어린 남동생과 함께 산다. 닉네임은 따로 없고, 다만 반 아이들은 유게 마키코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엄숙해진다. 이 작품은 이 개성 넘치는 세 소녀의 우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가면서 그 시절 소녀들이 겪은 집안에서의 억압과 성차별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강경파의 대장인 ‘가즈에’와 걸출한 개인주의자 ‘마키코’는 둘 다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인 데다 개성도 뚜렷하고 자기만의 꿈이 있다. 그런데 이 두 소녀가 저마다 자기의 꿈을 이뤄나가기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 앞에 놓여 있다. 돌덩이처럼 무겁다. 그런데 그 돌덩이는 집안에서, 그것도 가장 가까운 가족이 두 소녀에게 안겨줬다. 앞서 가족 구성원을 소개했는데, 눈치 빠른 분이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두 소녀는 저마다 한 집안의 장녀이고, 둘 다 남동생이 있다. 그리고 그들 집안에서는 그 어린 남동생을 신처럼 떠받든다. 가즈에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마키코처럼 아버지가 살아있어도 아들이 집안의 가장 소중한 존재인 것은 다르지 않다.

가즈에의 아버지는 직업이 군인으로, 만주 수비대 있을 때 병을 얻어 퇴직 후 소령으로 진급했다가 병사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죽으면서 아이들 앞으로 남긴 유서가 참으로 가관이다. 가즈에에게 그는 이런 편지를 남긴다. ‘너는 장녀다. 내가 죽은 후 어머니를 도와 열심히 집안일을 해다오 아버지 뒤를 이을 아들 미쓰오를 위해서나 어린 막내 동생 유키에를 위해서 평생 좋은 누나와 언니가 되어주길 바란다. 때에 따라서는 동생들을 위해 네가 희생하겠다는 각오로 임해다오.’(45쪽) 이런 막중한, 말도 안 되는 돌덩이를 남긴 것이다. 그 하나뿐인 아들에게는 너는 집안의 소중한 아들이므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군인이 되라는 말을 남긴다. 이처럼 죽은 아버지가 떠받든 아들을 어머니 또한 충실히 맹목적으로 따라서 섬긴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미쓰오를 훌륭한 군인으로 만들어 아버지 뒤를 잇게 하겠다는 목적에만 정신이 팔린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미쓰오가 일가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받들었고, 아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들어준다. 가즈에가 보기에는 마치 ‘아들에게 복종’(76쪽)하는 것 같다. 로봇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집안의 아들, 남동생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밑거름으로 쓰여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러나 가즈에는 이런 집안 분위기에 얼마쯤은 이미 체념한 것 같다.

살아있는 또 다른 아버지도 별반 다를 바 없다. 마키코의 아버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학박사이면서도 여성들의 지식 성장에는 관심이 없다. 딸이 학교를 다니는 것도 시집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뿐인 아들은 자기 뒤를 이을 든든한 학자로 여긴다. 그에게 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자식이다 마키코의 학교 성적이 좋은 걸 기뻐하는 사람은 어머니뿐이다. 본인의 전공인 과학 말고는 음악이니 미술, 문학에 아무 흥미도, 관심도 없는 이 꽉 막힌 아버지는 소중한 외아들이 무심히 피아노를 두드리는 데에도 불쾌함과 불안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마키코에게 만에 하나 병약한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는 와타루의 누나이자 어머니 대신’이라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신신당부한다. 그런 주제에 비열하게 성공하고자 하는 혐오스러운 속물근성까지 갖추고 있다.

온건파 여왕인 아이바 요코가 어느 날 마키코를 자신의 생일 파티에 초대하는데, 개인주의자인 마키코는 그답게 그 초대를 거절한다. 친하지도 않은 아이가 초대한 것이 의아할 뿐만 아니라, 그런 자리가 영 마뜩치 않은 것이다. 그런데 식탁에서 이 이야기를 듣던 마키코의 아버지는 ‘아이바 요코’라는 이름에 떡하니 입이 벌어진다. 알고 보니 아이바 씨는 그가 앞으로 세우려는 과학연구소에 막대한 기부금을 약속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비굴한 아버지는 감히 그런 분 따님의 생일 파티초대를 거절하느냐며 성을 낸다. 미친놈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부모, 현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마키코가 거절하고 안가면 아버지 겐스케 씨 기분이 어떻겠냐고 딸을 윽박지른다. 아니, 초대한 당사자 요코의 기분이 아니라 왜 그 아버지 겐스케 기분을 생각하는지? 참으로 역겨운 인간이 아닐 수 없다. 마침내 그는 엉겁결에 자기 본심을 털어놓기까지 한다. “나중에 내가 궁지에 처할 수도 있어.” 오오, 너무 싫다. 영리한 마키코는 이런 아버지의 속물근성을 꿰뚫어보고 그를 싫어하고 어려워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령과 협박에 못 이겨 마키코는 결국 요코의 생일파티에 참석한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요코-마키코-가즈에 세 사람의 우정과 연애, 그 중간 어디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엄마들은 잔소리만 해대잖아. 생각도 고리타분하고, 따지고 보면 엄마한테서 해방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래서 나 벌써 각오했어. 엄마가 돌아가신 대도, 아빠가 돌아가신 대도, 소녀 소설 속에 나오는 애들처럼 울거나 우울해 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담담해질 거야. 근대에는 여자애들의 심리도 옛날과 다르게 진보해야 해.”(132쪽)


이 작품에서 빛나는 캐릭터는 단연 ‘아이바 요코’이다. 요코는 공부보다는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그렇기에 마키코에게도 서슴지 않고 다가가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고, 그 애정공세를 할 때도 주변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여자애들의 심리도 옛날과 다르게 진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요코는 가즈에나 마키코와 달리 집안이 부유하고, 그렇기에 누구도 어린 요코에게 남동생 같은 타인을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요코가 그럴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물론, 엄마한테서 해방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 깜찍한 소녀의 말은 한번쯤 귀 기울여 볼만하지 않은가? 오늘날에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짐 지운 장녀 콤플렉스와 착한 딸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요코의 이 말은 통쾌하게 다가올 것이다. 아마도 이 요코는 작가의 분신은 아닐까? 그 오래전,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숏 컷을 하고 남성이 아닌 여성을 평생 동반자로 삼아 50년을 함께 살아온 작가의 당당함은 이 캐릭터에 집약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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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6-09 10: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딱히 땡기지 않는 소설이었는데 역시 잠자냥님 리뷰는 독서욕구를 불러 일으키네요. 요즘은 딸을 더 원하는 부모가 많고 딸이라고 대놓고 차별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만, 딸과 아들이 둘다 있으면 대하는 태도 차이가 은근히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어르신들.. 제 남동생이나 아들에게 ˝장손˝이라는 표현 쓰는 거 너무 싫어요.

잠자냥 2021-06-09 11:28   좋아요 6 | URL
이 책은 180쪽 남짓한 가벼운 분량이라 아기 잘 때 한 번에 쭉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요즘 딸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기는한데, 그 심리 한쪽엔 나중에 돌봄 노동을 은근 기대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듭니다. 저는 그것도 성차별이라고 생각해서요. 아무튼 옛날 사람들 정말 그놈의 아들타령 장손타령... 진짜 싫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요즘엔 온 나라가 이십대 남자 우쭈쭈하고 있는 꼴이라니..........에휴.

잠자냥 2021-06-09 11:32   좋아요 3 | URL
전 이 책으로 알게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더 궁금해지더라고요. <도쿠가와의 부인들>을 썼던데 이게 더 재미날 거 같기도 합니다.

다락방 2021-06-09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즈에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편지 딥빡이네요. 다들 그 힘든 시간들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온걸까요 ㅜㅜ

잠자냥 2021-06-09 11:37   좋아요 3 | URL
책 읽다가 정말 쌍욕이 절로 튀어나왔습니다. 근데 그 엄마도 너무 싫어요;;;; 하......

바람돌이 2021-06-09 14: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국이나 일본이나 저놈의 가부장제. 에휴!! 근데 한국보다 일본이 좀더 심한거 같더라구요.

잠자냥 2021-06-09 14:10   좋아요 2 | URL
네, 제 생각에도 일본이 좀더 심한 거 같아요. 뭐 영화나 소설 보다 보면 엄마가 자기 아들한테 아드님 하면서 절할 분위기;; 으윽..... -_-

레삭매냐 2021-06-11 09: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애정해 마지 않는
을유문화사 하드커버 세문
이 새로 나왔나 보네요...

요즘 읽을 책들이 너무 많
아 즐거운 비명을 내질러
봅니다 꺄오 ~~~

잠자냥 2021-06-11 09:37   좋아요 3 | URL
저도 신간 사제끼고 있으면서 그 와중에 어제 또 도서관 가서 책 빌려오고 미쳤나봐요;; -_-;;
 
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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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들뜨게 하는 작가 윌리엄 트레버의 신간이 나왔다. <펠리시아의 여정>. 소외되고 연약한 이들의 삶을 담담하고 서정적 문체로,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온 윌리엄 트레버. 제목을 보니 이번에는 ‘펠리시아’라는 이름의 한 인물의 삶을 따라가는가 보다 싶다. 그의 신간 소식에는 늘 마음이 들뜨지만, 실제로 책장을 펼치면 그 들뜨던 마음은 곧 차분히 가라앉는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녀는 계속 멀미를 한다. 화장실에서 어떤 여자가 말한다.’ 멀미 중인 여인, 펠리시아. 갑판에 올라가 신선한 바람을 쐬라는 다른 여자의 말을 보면, 그녀가 배를 타고 어딘가 여행을 떠나는 중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다음 문장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여행을 위해 고른 옷들은 초록색 쇼핑백 두 개에 들어 있고, 돈은 핸드백에 있다. 쇼핑백은 초크스에서 돈을 주고 사야 했다. 하나에 50펜스씩.’ 여행을 떠났는데, 짐을 여행 가방도 아닌 초록색 쇼핑백에 넣었다니? 뭔가 좀 이상하다. ‘환전소에서 아일랜드 지폐를 영국 돈으로 바꾸었다’는 문장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펠리시아는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그다음 장을 펼쳐보니 여행을 떠나면서 옷을 고작 쇼핑백 두 개에 담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바로 설명된다. 지난밤에 그녀는 증조할머니와 함께 쓰는 침실에서 살그머니 쇼핑백을 들고 나와 뒷마당 창고로 가서는 대충 쌓아둔 오래된 나무판자들 뒤에 숨겨놓았던 것이고, 날이 밝자 할머니 몰래 침실을 빠져나와 아버지에게 들키기 전 집을 나온 것이다. 버스를 타기 전에도 펠리시아는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붙잡힐까봐 신경을 곤두세운다. 여행이 아니라, 가출, 그것도 가족들을 피해 달아나는 모양새다. 그러니 당연히 여행 가방을 챙길 리가 없고, 쇼핑백에 남몰래 옷을 챙겨 도주하듯이 집을 탈출한 것이다.

펠리시아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다음 장은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힐디치 씨’로 십여 년 넘게 124킬로그램을 유지하고 있는 50대의 중년 남자이다. 두껍고 동그란 안경을 썼으며 비둘기색 머리카락을 짧게 유지하고 단정한 차림과 광을 낸 구두 등 이웃이 보기에 흠잡을 데 없는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이다. 그는 1979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듀크 오브 웰링턴 로드 3번지의 커다란 집에서 혼자살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에도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는 어느 공장의 구내식당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데, 먹는 것과 식료품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는 아주 적절한, 즐거운 일자리이다. 회사에서도 선량하고 자기 일에 열심인 그는 동료나 나이 어린 직원들에게 깍듯한 대접을 받고 있으며 그런 자신을, 자기의 일을 기꺼이 즐긴다.

이제 막 10대를 벗어난 게 틀림없는 이 나이 어린 ‘펠리시아’와 50대의 중년 남자 ‘힐디치’- 어찌 보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 두 사람이 번갈아 소개되자 나는 다시 궁금해진다. 이 두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엮일 것인지. 윌리엄 트레버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아마도 펠리시아는 어떤 견디지 못할 상황이 있어 힘들게 집을 벗어나 영국 땅으로 왔고, 가진 것도 없는 이 젊은 여자가 현실의 온갖 어려움에 부딪히자 영국의 중산층인 이 마음씨 좋은 힐디치 씨가 그녀를 돕게 되면서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꼭 그것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로 인해 서로의 상처라든가 아픔을 치유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닐까 상상하게 된다. 나의 이 예상은 얼마쯤은 맞지만 얼마쯤은 완전히 빗나간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펠리시아의 고되었던 생활이 얼핏 스쳐지나간다. 사실 <펠리시아의 여정>의 미덕 중 하나는 아일랜드와 영국의 그 오랜 뿌리 깊은 반목을 비롯해 1980년대 아일랜드와 영국의 암울한 사회상을 자연스럽게 엿볼 수 있다는 점인데, 펠리시아가 다니던 통조림 공장도 느닷없이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며 폐업을 했고(이 무렵 영국에서 처음 광우병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상태였다. 모아둔 돈도 다 써버렸고, 일자리를 잃으면서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 있을 자유, 비용을 따지지 않고 여가 시간을 보낼 자유도 빼앗긴 상태이다. 게다가 집으로 들어오는 실업수당은 모조리 가족의 식비와 생활비로 들어갔다. 홀아버지가 이끄는 집안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는데,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펠리시아가 파트타임으로 일하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실직 상태를 벗어나면서도 계속 집안일을 그녀 혼자 도맡아 하고, 증조할머니를 돌보는 것도, 아버지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오빠들을 위해 식사 준비를 할 수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만으로도 펠리시아의 처지가 몹시 갑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펠리시아에게 사랑 운운하며 다가왔던 한 남자, ‘조니’가 주소는 남기지 않은 채, 그녀 뱃속에 새 생명만을 남겨주고는 영국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서는 낙태가 불법이다. 아이 아버지는 잔디 깎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는 말만 남기고는 영국으로 날아가버린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 배는 불러오고 펠리시아는 다급해져 집을 떠나 영국에 무작정 온 것이다. 서울 사는 김서방 찾기도 아니고 이 순진한 아가씨가 조니를 찾을 리가 만무하다. 게다가 펠리시아는 알지 못하지만 독자도, 펠리시아의 아버지조차도, 아니 조니의 엄마조차도 다 알고 있다. 조니는 기회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깜빡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일부러 주소를 주지 않고 떠나버린 것임을.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영국의 경제상황도 꽤 좋지 못해 공장마다 문을 닫거나 업종 변경을 했기에 아무리 찾아봐도 잔디 깎기를 만드는 공장을 발견할 수가 없다. 이런 펠리시아를 힐디치 씨는 우연히 보게 되고 그녀가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한눈에 알아본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를 돕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펠리시아도 처음에는 그를 경계하지만 이 덩치 크고 순박하면서도 깍듯하고, 따뜻한 남자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그의 도움을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까지는 트레버의 기존 작품들의 설정과 보면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힐디치 씨는 왜 펠리시아를 도와주려고 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걸까? 그는 평생 혼자 살았는데, 갑자기 아내가 펠리시아를 도와주라고 했다면서, 아내 ‘에이다’라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발견되면서 나는 잔뜩 긴장한다. 게다가 그는 거짓말을 너무나 능수능란하게 잘 한다. 조심해, 펠리시아 그 남자는 겉보기랑 달라. 뭔가 이상해! 덫에 걸린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아니면 그는 진심으로 펠리시아를 돕고 싶은데, 경계를 풀어주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그럼에도, 거짓말은 뭔가 석연치 않고, 그 능수능란함은 더욱 소름이 끼친다.


여자아이들은 엉망진창이 된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혹은 그냥 뭔가 다른 것을 원해서 길을 떠난다. 여정 중인 그들을 본 이들은 알다가도 모를 아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도시나 여자를 사고파는 일이 있을 만한 큰 동네에서는 랜드로버나 폭스바겐, 도요타의 차 문이 열리며 아이들을 태운다.
콘스 씨 집에 그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들은 상점 입구에 머물러보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다 처음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하며 노상의 잠자리에 자리 잡는다. 한동안은 실종으로 처리되지만 나중에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밑바닥 인생. 이제 그들은 그렇게 불린다. (306~307쪽)


<펠리시아의 여정>이라는 제목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문학 작품에서 집을 떠나 여행길에 오른 주인공은 온갖 고난 끝에 성장해서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펠리시아도 자의반 타의반 집을 떠났고 여러 고난을 맞닥뜨린다. 그런데 펠리시아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길에서 맞닥뜨린 그 수많은 어려움을 과연 성장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펠리시아 앞에 놓인 그 길들이 너무나 험난하고 위험하며 안타까워 보여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여자는 어쩌면 이토록 세상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트레버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은 선함에 관한 이야기”라 말했다고 한다. 처음 이 책을 받아들고 휘리릭 훑다가 책 뒷부분에 있는 이 문장을 읽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이 작품을 여행길에 오른 펠리시아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녀를 돕는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보다 했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펠리시아를 도우려는 손길은 여럿 등장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존재인 펠리시아에게 처음 다정하게 다가선 조니를 비롯해 힐디치 씨는 물론이요. ‘캘리거리’ 같은 종교단체 일원도 그렇다. 모두가 선한 마음으로 펠리시아에게 다가온다. 문제는 그 선함이 과연 펠리시아에게도 선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자기들에게는 선(善)일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다들 상대를 위하기보다는 자기 잇속을 차리려는 목적이 강했다. 이런 것도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분명 이 작품 속에 선함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 선을 마주하기까지 너무나 지난한 악을 만나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그렇다는 것을 이 거장은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삶에 존재하는 선은 지극히 드물지만, 반드시 존재하고 바로 그렇기에 삶을 살아갈 희망이 거기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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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6-01 10: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읽으셨구먼요. ㅋㅋㅋ
저도 기대 엄청 하고 있습니다.
고이 집으로 돌아오면 트레버가 아닐 터이고, 궁금증을 풀려면 천생 책을 다 읽어봐야겠군요.
분위기는 여전히 쓸쓸한 거 같고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1-06-01 10:11   좋아요 7 | URL
네 맞아요. 분위기는 역시 캬... 소리가 나오고요,
트레버 작품 중에(번역된)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냉큼 읽으세요~!!
트레버 정말 거장입니다. 찬탄 또 찬탄.

레삭매냐 2021-06-01 10: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교보에서 쿠폰 할인권 기타
등등 탈탈 털어서 반값에 질렀습니다.

내일이나 오려나 모르겠네요.
격찬에 조바심 발동.

잠자냥 2021-06-01 10:41   좋아요 1 | URL
책 받으시면 아마 금방 읽으실 거예요. 스토리가 너무 흡인력 있어서...
매냐 님의 리뷰도 기대하겠습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6-01 11: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리뷰도 늘 멀고 먼 길이라는 ㅋ 후루룩 삼키다, 이 문장에서 걸렸슴다. <비용을 따지지 않고 여가 시간을 보낼 자유> ^^;;; 돈 있으면 시간 없고 시간 있음 돈 없고 머 그렇더라구요.ㅋㅋ
선함에 대한 잠자냥님 생각, 완전일체형 공감^^ 찜합니다. 이 책은 언젠고 읽겠어요^^

잠자냥 2021-06-01 11:11   좋아요 2 | URL
제 리뷰가 좀 길긴 길죠? ㅎㅎㅎ 네, 이 책은 꼭 읽으세요-

새파랑 2021-06-01 11: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거 서점에서 앞부분만 잠깐 읽었는데 재미있더라구요. 완전 신상이던데요 ㅎㅎ 표지에 극찬이 가득해서 완전 기대됩니다^^
(이미 장바구니에 ㅋ)

잠자냥 2021-06-01 11:20   좋아요 3 | URL
아니, 이걸 읽다가 끊고 집에 오셨다니! 대단하십니다. ㅋㅋㅋㅋ
새파랑님은 곧 읽으시겠죠? ㅎㅎㅎ

mini74 2021-06-01 1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서평 읽고나니 더 두근거립니다. 저는 오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알라딘 요물입니다 떡 하니 문자를 주더군요. 사라 살거지? 하고요 ㅎㅎ

잠자냥 2021-06-01 17:59   좋아요 1 | URL
ㅋㅋㅋ 미니 님이 살 거 다 알고 있는 알라딘 지니~ ㅋ 재미나게 읽으세요~

독서괭 2021-06-23 2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펠리시아의 여정 리뷰대회 하는데요?? 잠자냥님은 리뷰가 이벤트기간에 앞서서 자동응모 안 될 것 같은데 다시 올려서 응모해보세요

잠자냥 2021-06-23 22:20   좋아요 1 | URL
아 그러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새파랑 2021-07-07 17: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읽으려고 해서 리뷰를 실눈뜨고 봤는데 당선작이었군요~! 축하드려요 👍😄

그레이스 2021-07-07 17: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초딩 2021-07-08 0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모나리자 2021-07-08 1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7월도 즐거운 시간 되세요~^^

thkang1001 2021-07-08 14: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7월도 좋은 시간 되세요!

thkang1001 2021-07-08 14: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모두 좋은 시간 되세요!

thkang1001 2021-07-08 15: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쟈냥님! 감사합니다! 7월도 좋은 시간 되세요!

얄라알라 2021-07-21 15: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축하드립니다!!!^^
 
나는 고백한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9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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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바이올린 음악을 많이 듣는다. 이제껏 바이올린 연주는 주로 가을이나 겨울처럼 쓸쓸한 계절에 들었는데, 요즘은 출퇴근길에도, 산책을 나가서도 바이올린 음색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고백한다>를 읽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것이다. ‘비알’이라는 이름의 스토리오니 바이올린 한 대에 얽힌 시공을 초월한 ‘악’의 연대기라고 이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이 책이 지닌 가치의 극히 일부만 알려주는, 어쩌면 너무나 소박하고 불성실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는 고백한다>는 스토리와 플롯, 서사 기법, 주제 모든 면에서 탁월하다, 아니 완벽하다. 거의 신의 경지에 가깝다고나 할까. 만일 소설의 신이 존재한다면 이 작품을 쓴 ‘자우메 카브레’가 바로 그 신일 것이다.

3권이라는 무게감 때문에 섣불리 읽기를 시작하지 못하고 몇 달은 집에 묵혀만 두었었다. 그런데 그건 실수였다. 좀 더 일찍 만났어야 했다. ‘어젯밤 발바르카의 비에 젖은 거리를 걸으며 비로소 나는 내 가족 중 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실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점점 커 가면서 나의 생각과 행동을 정확하지 않은 믿음들과 잡스러운 독서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지만 언제나 나는 혼자였으며 믿고 의지할 부모도, 인생의 답을 내려 주는 신도 내 곁에 없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 이렇게 시작하는 첫 구절부터 나를 사로잡더니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100쪽 남짓 읽었을 때 나는 흥분했다. 이런 작품을 이제야 읽다니! 370권에 달하는 민음사 세계문학시리즈, 나는 모든 작품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많이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 많은 작품들을 떠올리다보니 장담하게 된다. <나는 고백한다>는 단연 으뜸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가, 이 책을 읽지 않고 죽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울지 몸서리가 처질 정도이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작품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이제 주저하지 않고 이 책을 권하겠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을 때는 쓸쓸하고 슬펐다. 허전했다. 며칠 동안 나를 사로잡은 이 빼어난 이야기를 멀리 떠나보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처음, 이 책에 눈길이 간 것은 표지 때문이었다. 어린아이, 그것도 왠지 부잣집 도련님 같은 아이가 옛날 책으로 가득한 서가에서 책을 빼내려고 애쓰는 뒷모습. 그 매혹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작품이 궁금해진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표지를 장식한 소년은 주인공 ‘아드리아 아르데볼’의 이미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표지의 아이처럼 작품 속 ‘아드리아 아르데볼’은 책에 미친 소년이다. 아니, 언어와 책, 음악 등 예술이 주는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소년으로 아주 이른 나이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어, 히브리아어, 아람어 등등 13개 언어에 통달한 영재이다. 집안도 유복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소년은 불행하다. 도무지 애정이라곤 느낄 수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그저 언어와 책, 바이올린과 시간을 보내며 외롭게 자라난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어릴 때부터 온갖 언어를 익혀 마침내 고문서학자로 명성을 얻지만 세월은 무심하게도 이 천재의 머릿속을 갉아먹는다. 아드리아는 이제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일 뿐이다. 그는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들며 글을 남긴다. 그러나 자신을 무턱대고 믿지는 말라고 한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기록이므로. 무엇보다 ‘단 한 명의 독자만을 염두에 두고 쓰인 기록물은 거짓으로 가득하기 마련’이므로. <나는 고백한다>는 그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해 쓴 절절한 고백이며 참회이자, 기나긴 러브레터이다. 이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뼈아픈 사랑의 고백.

그의 기억에 따라 소년 아드리아의 이야기가 순서대로 펼쳐지는가 싶은데, 느닷없이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인가 싶어 다시 앞장으로 돌아간다. 아드리아의 이야기에서 시간과 공간, 화자를 건너뛰어 그의 아버지 ‘펠릭스 아르데볼’의 사연이, 그의 청년 시절 이야기가 펼쳐진다. 펠릭스, 그 또한 자기 아들처럼 영재에 가까웠고 사제로서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젊은 시절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사제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사제가 되지 않더라도 그 좋은 머리와 재능으로 다른 삶을 살 기회도 많았을 텐데, 하필이면 그는 사제를 꿈꾸던 시절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길을 걸어간다. 골동품 상점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어쩌면 그리 동떨어진 선택이라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펠릭스 아르데볼 또한 고문서와 오래된 물건들이 뿜어내는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이므로. 그렇게 큰돈을 벌게 된 그는 점점 더 희귀한 옛 물건에 집착하게 되고 그러다가 결국 문제의 바이올린 ‘비알’을 손에 넣게 된다. 그리고 이 바이올린은 그 오랜 비극의 시간들, 악(惡)에서 악(惡)으로 이어진 과정을 거쳐 펠릭스는 물론 그의 아들 아드리아까지 비극으로 몰아간다. 그가 결코 원하지 않았음에도.

문제의 바이올린 ‘비알’은 태생부터가 악의 씨앗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 가치가 날이 갈수록 높아져만 갔기에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인간의 탐욕은 더욱 커져만 가고 그 탐욕은 끊임없이 악을 낳는다. 거기에는 광기와 집착, 살인이 있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이 있으며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있다. 피해자의 복수와 가해자의 참회도 있지만 그것이 진실한 참회인지, 그저 양심의 가책을 덜어보려는 행동인지, 구원을 바란 이기적 욕망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평생을 그리워한 사랑 앞에서도 차마 바이올린을 포기하지 못하는 집착이 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는 고백한다’를 되뇔 뿐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아르데볼 부자(父子)와 그 주변 인물뿐만이 아니라, 중세 수도원의 수사, 바이올린 장인, 나치 친위대 중령 등등 수많은 인물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독창적인 서술 방식은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이다. 시간과 공간, 화자를 가리지 않고 빠르게 변화하는데, 놀랍게도 그런 변화가 한 문장, 또는 문단 안에서 뒤섞여 이뤄지기도 하고, 하나의 물건이나 배경을 공통으로 삼아 장면 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인형인 카슨 보안관과 검은 독수리와 소통하며 자란 아드리아는 이제는 알츠하이머 영향으로 시공간뿐 아니라 작품 속 수많은 인물의 시점을 빠르게 넘나들며 고백을 이어나간다. 독백에서 대화로, 일인칭에서 삼인칭으로, 중세에서 2차 세계대전 때로, 중세에서 현대로, 화자도 시점도, 이야기도 급작스럽게 변화한다. 그런데도 그 변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독자는 더 그 미궁 같은,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구조에 빨려 들어가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이 놀라운 서술 방식에 전율하게 된다(특히 2권의 24장은 전율이 일정도로 압권이다).


“대학살 이후…… 잔인함은 수 세기 동안 도처에 존재해 왔고, 그걸 생각해 본다면 인류 역사는 ‘무엇무엇 이후 시의 불가능’에 대한 역사가 될 거야. 그렇지만 실제로 역사는 그렇게 흘러오지 않았어. 왜냐하면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겠어?”
“그것을 겪은 사람들.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들. 학자들.”
“맞아. 그 모든 것들이 역사를 말해 주겠지. 그 기억들을 위해 박물관도 세워졌고. 다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어. 살아있는 경험의 진실 말이야. 이것은 학술적인 연구로 전해지지 않아. 예술만이 그것을 전할 수 있지. 문학 작품을 통해서 말이야, 생체험에 가장 가까운 장르라고나 할까.” (2권, 343쪽)


무엇보다도 이 책이 매혹적인 이유는, 악의 근원과 그것이 어떻게 인간 사회에 뿌리내려 이어지는지 추적하는 가운데, 문학과 음악, 그림 등 예술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독자는 수많은 문학 작품을 비롯해 작가, 사상가, 철학가들을 만날 수 있으며(실제로 ‘이사야 벌린’이 작품 속 인물로 등장한다), 음악가, 화가 등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예술가들과 그 작품들이 종종 언급된다. 아드리아 아르데볼과 그의 유일한 친구 ‘베르나트’는 그런 예술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사랑하며 늙어가는 인물들이다. 사실 아드리아가 온갖 언어를 익히게 된 것은 아들을 고문서를 읽을 줄 아는 골동품상으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욕심 때문이었으나, 아드리아는 어느 틈엔가 그런 언어들을 통해 여러 작가들의 문학을, 철학을, 사상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데 매료당하고 마침내 책과 글쓰기에 파묻혀 살아가게 된다. 거기서 기쁨을 얻는다. 베르나트 또한 바이올린과 문학의 세계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인물이며, 아드리아가 그토록 사랑한 연인 ‘사라’도 그림으로 자신을, 자기가 속한 사회의 아픔을 표현하는 여인이다. 그들은 그렇기에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할 줄 알며 자신이 겪은 일이 아님에도 지나간 역사에 공감할 줄 안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자기 욕망 앞에서는 한계를 보이고 말기도 한다. 펠릭스 아르데볼이 그 좋은 머리로 고문서를 수집하고, 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쌓는 데만 몰두하지 않았다면, 예술 작품을 수집하는 것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아들 아드리아처럼 그것을 진심으로 느끼고 향유할 줄 알았다면, 그러한 비극을 불러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악을 자신들 이전에 끊을 수는 있었으리라.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기에 예술은 한 사람을 구원할 수는 있어도 인류는 구원하지 못하고, 그 바이올린은 계속해서 악을 낳으며 누군가의 손에서 손으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고백한다>를 읽기 전에 사둔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와 <비코 자서전>, 이 책을 읽으니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왜 그런지는 읽은 분만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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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5-26 09:54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아, 잘 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책입니다. 만백성은 유대인 과부 땡빚을 내서라도 이 책을 사 읽고, 보관했다가, 다시 읽고, 또다시 읽은 다음에 누군가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잠자냥 2021-05-26 09:59   좋아요 5 | URL
맞습니다. 옳습니다. 빚을 내서라도 사야합니다. ㅋㅋㅋㅋ 제 친구들에게 사서 뿌리고 싶은 책이기도 합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삼 백 몇 권준다고 해도 저는 이 한 작품을 선택할 겁니다!!

잠자냥 2021-05-26 09:59   좋아요 4 | URL
전 3권에서 울었어요. 흐흐흐흑.... 이 작품은 사라와 아드리아의 사랑이야기로만 읽어도 훌륭합니다. ㅠㅠ

Falstaff 2021-05-26 10:05   좋아요 3 | URL
근데요, 비알과 악의 이야기가 너무 장대해, 사라와의 사랑이 지고하고 애절해도 그걸 독후감에 쓰게 되질 않더라고요. 저도 끝내 ‘그것도 있다‘ 수준으로 처리하고 말았습지요.
아,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크고 아름다운 악의 이야기였습니다.
간혹 남자들도 책을 읽다가 쿨쩍인답니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5-26 10:07   좋아요 4 | URL
역시 잠자냥 님의 서평은 책을 읽고 읽어야 제 맛입니다.
(처음에 이렇게 댓글 달았다가, 먼저 책 읽었다고 자랑하는 거 같아서 지웠더랬지요. ㅋㅋㅋ 소심한 폴)

잠자냥 2021-05-26 10:19   좋아요 2 | URL
네, 저도 폴스타프 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사라와 아드리아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도 큰 축을 이루는데, 악의 연대기가 워낙 장대해서 이 두사람의 사랑까지 언급하기엔 지면이(?) 부족(?)한 느낌입니다. ㅎㅎㅎ

제 서평뿐만이 아니라 모든 서평이 사실 책을 읽고 나서 보는 게 가장 좋지요. 아, 그리고 이 책은 먼저 읽은 거 자랑해도 좋은 그런 책입니다. 만방에 자랑하세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1-05-26 12:42   좋아요 4 | URL
아 어쩐지 이 책 읽고 여러분이 뒤로 제껴둔 사랑이야기를 저는 가장 크게 부각시켜 리뷰 쓰고 싶어집니다!!!

잠자냥 2021-05-26 13:12   좋아요 1 | URL
다락방 님 기대하겠습니다! 이 책은 진짜 쓸쓸한 사랑이야기이기도 합니다.

Falstaff 2021-05-26 13:14   좋아요 2 | URL
다락방 님을 격동시키기 위해 한 마디 하자면....
근데, 다락방 님 스타일의 사랑은 아닐 듯해서 말입죠.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5-26 13:1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공감해욬ㅋㅋㅋㅋㅋㅋㅋ 아, 이제 책에서 잠시 멀어진 다 부장님 당장 이 책 읽겠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5-26 13:38   좋아요 2 | URL
제 스타일의 사랑이 아니라니.. 정신적 사랑만 하나요?????????

잠자냥 2021-05-26 14:11   좋아요 1 | URL
다락방 / 빵 터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건 아닙니다. ㅋㅋㅋ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5-26 16:39   좋아요 3 | URL
아. 증말 열붕 대화는 진짜 재미집니다. 큰 소외감을 동반하는 웃음 유발 톡방이어요. 지는 댓글만으로 빚내 집사라 아니고 빚내 나는 고백한다 사라 강권하겠슴다.^^

blanca 2021-05-26 10: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헉, 이거 당장 읽어야 할 것 같은 강박 발생....우짜죠?

Falstaff 2021-05-26 10:12   좋아요 2 | URL
이런 책은 민음사에서 독후감 경연대회를 해도 좋습니다.
우짜긴 우짜세요, 걍 사 읽으세요. 그것도 후딱! ㅋㅋㅋ

잠자냥 2021-05-26 10:19   좋아요 2 | URL
그 강박을 받아들이세요. 이 책은 당장! 읽으세욧~

바람돌이 2021-05-26 10: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도서관에서 빌려보려고 했는데 말이죠.... 요즘 가능하면 집에 책을 더 이상 쌓지말자라고 결심만 하고 있어서... 그런데 잠자냥님 이 글 보면 도서관에서 빌려읽고 후회하고 소장용으로 살 것 같은 느낌이 팍팍 오네요. 안 그래도 집에 그런책이 잔뜩....ㅠ.ㅠ 다음 주문에 주문하려고 장바구니 넣어둡니다. ^^

잠자냥 2021-05-26 10:20   좋아요 3 | URL
네 이 책은 소장용입니다. 집에 있는 민음사 세계문학 몇 권 중고시장에 내보내시고, 이 책을 들이세요.

미미 2021-05-26 10:2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이 재밌다는 책은 믿고 읽어야하는데(게다가 폴스타프님이 강추하셨던 책) 이 책에 대한 극찬은 정말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책 읽고 이 리뷰를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비코 자서전등도 주섬주섬ㅋㅋ

잠자냥 2021-05-26 10:37   좋아요 2 | URL
네, 이 책은 104%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일단 재미가 있습니다. 책에서 멀어진 카탈루냐 사람들을 책 앞으로 불러왔다니 말다했죠? ㅎㅎ

독서괭 2021-05-26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잠자냥님이 이 정도 단언하시는 강추책이라니.. 다음 주문 때는 무조건 사야겠네요ㅜㅜ 땡투는 잊지 않고 하겠습니다 ㅎㅎ

잠자냥 2021-05-26 11:49   좋아요 1 | URL
네, 이 책은 ˝꼭˝ 사시고, ˝꼭˝ 읽으시고, 나중에 물려주세요~ 땡투는 꼭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해주신다면 미리 감사합니다! ㅋㅋ

페넬로페 2021-05-26 12:5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요즘 눈 닫고 귀 막으려고 하는데 ㅠㅠ
잠자냥님께서 꼭 사서 읽으시라고 하고 폴스타프님께서 그 악명높은 유대인 과부 땡빚을 내서라도 사라고 하셨으니 또 제 손가락이 저의 것이 되지 않겠군요~~
왜 또 하필 오늘 알라딘 레전드이신 ㄹㅅㅁㄴ님께서 신간 소식을 전해주시는지요? ㅠㅠ

잠자냥 2021-05-26 13:13   좋아요 3 | URL
알라딘 개미 지옥에 빠진 페넬로페 님, 이건 유대인 과부 땡빚이라도 내서 사야합니자. 그 케익 뭐시기는 나중에 ㅋㅋㅋㅋㅋ

stella.K 2021-05-26 13:2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거 세상에 난다 긴다하는 소설가들이 잠자냥님의 이 리뷰 읽으면
질투하겠는데요? ㅎㅎ
저도 막 사고 싶게 만드네요. 저는 언제부턴가 민음사의 이 시리즈는 손이 잘
안 가던데 이 책마는 꼭 사 봐야겠네요. 잘 읽었슴다.^^

잠자냥 2021-05-26 13:26   좋아요 2 | URL
난다긴다하는 소설가들이 이 책 읽으면 다 절필하고 싶어질지도 몰라요. 그만큼 훌륭한 소설입니다.
꼭 사보세용!

단발머리 2021-05-26 13: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번에 잠자냥님이 1권 읽으시다가 중간에 올린 평 보고 도서관에 있나 검색했던 나를 채찍질하며… 사러 갑니다 (터벅터벅)

잠자냥 2021-05-26 13:26   좋아요 1 | URL
찰싹찰싹 *더 채찍질 중*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5-26 13: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정도면 민음사에서 잠자냥 님한테 상장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상장 대신 무료 도서구입 열 권도 괜찮고 말이지요.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5-26 14:12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폴스타프 님하고 저한테 주면 좋겠어요-
제가 트이타에서도 이 책 영업하고 있거든요.

Falstaff 2021-05-26 14:31   좋아요 3 | URL
ㅋㅋㅋ 전 빼주세요!
하여튼 좋은 책만 찍으면 광고는 알아서 해주니 얼마나 좋은 독잡니까!!!!

coolcat329 2021-05-26 14: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언젠가는 꼭 사겠습니다...지금은 참아야 합니다...ㅠ

잠자냥 2021-05-26 14:13   좋아요 2 | URL
담달에 사세요- ㅋㅋㅋㅋ (담달 D-6일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6-01 15:57   좋아요 2 | URL
사셨어요? 담달임. ㅋㅋㅋ (아, 담달에 산다는 말은 없었군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6-01 17:57   좋아요 2 | URL
헉,아직 안 샀습니다 ㅋㅋㅋ 검사까지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ㅋㅋ
사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잠자냥 2021-06-01 17:59   좋아요 1 | URL
철썩철썩 *채찍질* ㅋ

초딩 2021-06-05 15: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잠자냥 2021-06-05 16:1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북극곰 2021-07-02 09: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과 플스타프 님의 뿜뿌 쌍두마차 덕에 신나게 읽었습니다.
3권 몇 페이지 남겨둔 상황인데 흑.. 출근함서 읽다가 훌쩍훌쩍.. ㅠ.ㅠ
잠자냥 님 리뷰 보면서 (한동안 소설을 안 읽었었는데) 간만에 새로운 소설들을 담으니 좋네요. ^^

잠자냥 2021-07-02 09:4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이 작품 마지막에 정말 마음을 또 뒤흔들죠... ㅠㅠ 하...
전 이 작품 읽고 나서 한동안 정말 다른 책이 다 재미없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ㅎㅎ
마지막 몇 쪽까지 완벽하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코요테의 놀라운 여행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13
댄 거마인하트 지음, 이나경 옮김 / 놀 / 2021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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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다보면 좋은 추억도 여럿 쌓이지만 괴롭고 잊고 싶은 기억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고통스러운 기억은 덮어두고 잊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한다. 현재에, 순간에 충실한 삶이 최선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과연 그게 최선일까? <코요테의 놀라운 여행>을 읽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꽤 발랄하게 시작한다. ‘코요테라는 조금 특이한 이름의 열두 살 소녀가 아주 자유로운 복장으로 어느 주유소에서 슬러시를 사고 있다. 그런데 소녀는 자기보다 어린 한 꼬마에게 그날 선행을 베풀어 슬러시 한 컵을 사준다. 꼬마는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자기가 갖고 있던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소녀에게 선뜻 선물한다. 소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자기의 동행인 몰래 차에 고양이를 태워야 하는데, 꼬마가 보기에 소녀의 동행인은 참 이상하다. 다 떨어진 청바지에 맨발, 셔츠도 안 입었고, 장발에 덥수룩한 수염. 얼핏 보면 노숙자 같다. 그런데 슬러시를 사준 소녀 말한다. 저 사람 이름은 로데오’, “우리 아빠야.” 아빠라고? 심지어 이 두 사람은 노란색 스쿨버스를 타고 여행 중이다. 소녀는 꼬마의 도움을 받아 로데오, 그러니까 아빠 몰래 버스 뒤쪽 창문으로 고양이를 들여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나는 그들- 코요테와 로데오, 두 사람만의 여행길에 또 다른 생명체가 더해진 것이다.

 

이 발랄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처음부터 몇 가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코요테라는 이상한 이름은 정말 본명일까? 로데오라는 기묘한 이름도? 게다가 두 사람은 부녀지간이라고 하는데, 서로 절대 이나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빠가 딸을 코요테하고 부르는 건 이해하겠는데, 딸이 말끝마다 제 아빠를 로데오라고 부르는 건 어째 좀 이상하다. 게다가 왜 50인승 스쿨버스로 여행을 하는 걸까? 이 두 사람은 사실 부녀지간이 아니라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다른 관계는 아닐까? 혹시 납치범?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그런데 유괴범과 유괴된 소녀라고 생각하기엔 코요테와 로데오 사이가 너무나 좋다. 그러니, 일단 납치범은 아니고 부녀지간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책장을 넘긴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 집도 절도 없이 떠돌이 생활 중일까?

 

한눈에 보기에도 자유로운 영혼인 로데오가 딸을 데리고 정처 없이 미국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는 즐거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열두 살 소녀에게도 과연 그럴까? 실제로 코요테에게는 친구다운 친구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지에서 친구가 될 만한 아이를 만나도 내일이면 작별을 해야 한다. 물론, 그 전에 친구(가 될 뻔한 아이)의 부모는 멀리서 로데오의 겉모습을 보고는 이상한 사람일 것이라고, 그래서 아이가 학대당하는 건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를 치켜세우며 자기 아이가 코요테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한다. 때문에 코요테는 매일 작별하는 삶을 벌써부터 체득하고 있다. 그렇기에 슬러시 한 잔의 선행을 베풀고 얻은 고양이 아이반이 코요테에게는 무척 소중하다. 그렇게 정처 없는 여행 중에 코요테에겐 한 가지 엄청난 미션이 주어진다. 5,793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공원에 나흘 만에 도착해서 불도저가 공원을 싹 밀어버리기 전에 한 나무 아래 묻어둔 추억 상자를 건져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버스를 운전하는 로데오는 행선지를 몰라야 한다!

 

대체 왜 그래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당연히 든다. 사실 코요테와 로데오가 전국을 떠도는 이유는 이 추억 상자와도 관련이 있다. 코요테는 자동차 사고로 엄마와 언니, 동생을 잃었고, 그 후로 집을 떠나 아빠와 단 둘이 여행하며 지내는 것이다. 부녀는 잊고 싶은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는 집을 버리고 늘 여행하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때문에 잃어버린 가족과의 추억이 담긴 이 상자를, 다시 집으로 돌아가 되찾는 일은 로데오에겐 금기나 다름없다. 그에게 고향 집과 얽힌 일들은 이제 입에 올려서도, 추억해서도, 기억해서도 안 되는 금기이자 고통스러운 과거이다. 코요테가 아빠를 아빠라 부르지 못하고 로데오라고 부르는 것도, 코요테와 로데오라는 기이한 이름을 갖게 된 것도 모두 이 고통스러운 기억과 관련 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과거를 피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과거를 돌아보는 건 아무 소용없는 일이야. 코요테. 로데오는 늘 말했다. 안 돼 거기로 돌아가지마, 네 행복은 여기, 지금에 있어. 예전 일은 다 잊어야 해. 하지만 나는 로데오처럼 할 수 없었다. 감추는 실력이 좋아진 것뿐이다. 금지된 추억을 몰래 꺼내보는 실력이 좋아진 것뿐이다. (72)

 

코요테의 삶은 현재로 충만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늘 떠나는 삶 속에서는 친구도 사귈 수 없다. 매일 새로운 것을 만나지만 그 새로운 것과도 곧 작별해야 한다. 로데오는 과거를 돌아보는 건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코요테가 어제 만난 친구도 곧 과거가 되고 만다. 행복은 정말 지금 여기에만 있을까? 만사를 때려치우고 달려가야 하는 소원인 만때달소원처럼 지극히 현재진행형이고 순간적인 기쁨에만 행복이 있는 걸까? <코요테의 놀라운 여행>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두 사람의 짧고도 기나긴 여행을 통해 보여준다.

 

코요테는 로데오가 만든 금지 리스트를 깨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해서 달려간다. 그 추억 상자를 열면 닫아두었던 고통스러운 기억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소녀는 그 선택을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한때 자신을 눈부시게 만들어준 아름다운 사람들과 얽힌 소중한 추억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소녀는 뜻하지 않게 동행하게 되는 친구들을 여럿 만난다.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고양이 아이반은 물론, 흑인 음악가인 레스터’, 폭력적인 아버지를 떠나 엄마 에스페란사와 함께 이모를 만나러 가는 살바도르’, 그리고 결국 만나게 된 살바도르의 이모 콘셉시온’, 커밍아웃했다가 부모에게 상처받고 집을 나온 ……. 어찌 보면 하나같이 제 나름의 상처가 있고 소외된 이들이다. 그들과 함께 하는 이 결코 길지 않은 여행은 코요테를, 로데오를, 그리고 이 노란 스쿨버스에 오른 그 모든 이들을 조금씩 자라게 한다.

 

노란 스쿨버스를 타고, 여행길에서 사람들을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어떤 의미로든 조금씩 자기의 생각을 고치고, 삶을 돌아보면서 조금은 성장한다는 내용은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만나는 타인들은 모두 삶의 승객이며 함께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라는 말도 그래서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면하고 회피하기만 했던 그 지난날의 고통스러운 기억도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데 꼭 필요한, 외면할 수 없는 하나의 역사였음을 이 발랄하고 유쾌한 책은 소박하지만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코요테와 로데오가 잊고 싶고, 피하고 싶기만 했던 과거의 한때와 정면으로 마주해 고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새롭게 다시 길 위에 서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이 두 사람의 여행길은 이제 그 전과는 확실히 다를 것이다. ‘뭔가를 향해 달려가는 건 뭔가로부터 달려가는 것보다 낫다.’(357)는 코요테, 이 어린 소녀의 말도, 살아가는 동안 이따금 들춰보면 꽤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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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5-20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청소년 문학이라니.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표지만 보고 어? 잠자냥 님이 읽으실 것 같지 않은 표지인데..라고 생각했는데 저도 보관함에 넣어버리네요.
저는 결국은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아이든 어른이든)가 참 좋더라고요. 아마도 제가 사람은 계속 성장해야 한다고 성장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나저나 이런 책은 또 어떻게 앍고 읽으신겁니까?!

잠자냥 2021-05-20 11:06   좋아요 1 | URL
재미있었어요. 약간 눈시울 찡해진 부분도 있고. ㅋ 제가 성장 소설 좀 좋아해서....ㅎㅎ
10대에 있는 조카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 같아요. 다락방 님 읽고 나면 타미에게~ ㅎㅎ
아참, 이 책은 5월에 조카들 주려고 책을 좀 샀는데, 마침 리뷰대회 하기에 부랴부랴 읽었습니다.
근데 다락방 님 리뷰대회에 낚여서 사지 마시고 ㅋㅋㅋ 걍 맘 편히 읽으세요.

다락방 2021-05-20 12:44   좋아요 1 | URL
아, 이 책 리뷰대회 합니까?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5-20 13:07   좋아요 0 | URL
그냥 10명 똑같이 준다니까 함 도전해보심은??

단발머리 2021-05-20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청소년 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 책은 끌리네요. 그냥 봤으면 넘겨봤을 책인데 잠자냥님 리뷰 읽고 나니 읽고 싶어졌어요.
책내용 알고 혹은 책내용 아는데도 찾아서 읽는 우리들만의 마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5-20 12:31   좋아요 1 | URL
아니 그런 과찬을! ㅎㅎ 책 내용 알아도 찾아서 직접 읽어보면 또 다른 맛을 알게 되니까 또 굳이 찾아 읽는 게 아니겠습니까?! ㅎㅎ

psyche 2021-05-21 02: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실 이 책이 조금 불편했어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알겠고 사람들이 칭찬하는 이유도 알겠는데 저는 계속 코요테가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아빠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하지만 2년정도가 아니라 5년을 저렇게 다니는 건 또 다른 형태의 학대가 아닌가? 싶었어요. 코요테가 넘 어른스러운 것도 마음 아프고, 마땅히 가져야 하는 친구, 할머니와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 것도 슬펐어요.

잠자냥 2021-05-21 09:36   좋아요 0 | URL
그렇죠. 본문에 썼듯이 저도 그렇게 생각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아빠 마음대로 끌고 다니면 저 아이의 삶은? 친구도 사귈 수 없는 삶은? 학교도 안 간다고? 이것도 학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마도 그건 작가가 코요테 나이 또래 아이가 아니라, 로데오와 비슷한 어른 남성이라 그런 한계가 있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