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좀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시,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을 풀어 보았다.
시를 쓸 때 반드시 필요한 비유의 상황이
그 거리가 가까울 때는 이해가 쉽지만,
관계의 거리가 멀 때... 상상력을 집어 넣어야 한다고 했지. 

오늘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경지.
죽음을 미리 상상하면서 자기 생을 돌아보고는 한 마디로 자신의 <묘비명>을 적는다면
과연 어떤 말을 적는 것이 자기 앞의 생에게 적절할지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스 작가로서 '자유인'을 외친 작가가 있다.
그의 유명한 소설로 '그리스인 조르바'가 있는데 나중에 한번 읽어 보렴.
조르바는 아주 터프한 남자로 뱃사람인데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꿈꾼다.
작가 카잔차키스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런 묘비명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황동규 시인이 그의 무덤 앞에서 읊은 시를 한번 읽어 보자.

꽃 속에 꽃을 피운 부겐빌레아들이
성근 바람결에 속 얼굴을 내밀다 말다 한다.
오른 팔을 삐딱하게 치켜든 큰 검은 나무 십자가 뒤에
이름대신 누운 자가 '자유인'이라는 글발이 적힌 비석이 있고
생김새가 다른 열 몇 나라 문자로 제각기 '평화'라고 쓴
조그만 동판(銅版)을 등에 박은 무덤이 앉아 있다.
인간의 평화란 결국 살림새 생김새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정성들여 새기는 조그만 판인가?
내려다보이는 항구엔 크기 모양새 다른 배들이
약간은 헝클어진 채 평화롭게 모여 있다.
한눈팔며 떠나가는 배도 두엇 있다.
뒤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나직이,
그래, 자유는 참을 수 없이 삐딱한 거야. <황동규, 카잔차키스의 무덤에서……> 

 

그리스는 사파이어빛 푸른 바다와 함께 하얀 건축물들의 대비로 유명하다.
그 건물들을 <카사 비앙카> 또는 <카사 블랑카>라고 한단다.
'카사'는 '집'이란 뜻이고 '블랑카나 비앙카'는 '하얀~'이란 뜻의 형용사지.
왜 해운대에도 '언덕 위의 하얀 집'같은 카페가 그런 뜻이야.
거기 피는 붉은 꽃이 <부겐빌레아>란 꽃이지.
우리집 화단에서 겨울에도 열심히 피고 지는 꽃이 부겐빌레아란다.
분홍빛 꽃받침이 아름다운 그 꽃. 

이 꽃들을 보면 꽃잎 속에 또 꽃잎이 든 것처럼 보인단다.
사실은 꽃받침이 화사하게 붉은 것인데 말이지. 

황동규 시인은 자유를 꿈꾸던 조르바를 만나기 위해 카잔차키스의 무덤엘 갔나 보다.
그렇지만 그곳엔 '자유'와 '평화'가 새겨진 비석과 동판만이 덩그렇게 놓였을 뿐.
정말 자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시인에게 생각하게 만든다.

항구를 내려다보며 평화로운 바다를 음미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나직하게. 그러나 그 낮은 음성이 가슴을 울리는 느꺼움이 있다.
자유는 참을 수 없이 삐딱한 거야. 

똑바로 줄을 설 자유라든지,
오랜 시간 정해진 자세를 유지할 자유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과학에서 '엔트로피 법칙'이란 것이 있단다.
'열역학 제2 법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든 것은 '자유분방한 무질서 쪽으로 운동한다'는 것이 엔트로피 법칙의 개념이란다. 

그렇다면 인간의 속성도 그러한 것일는지...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싶지만,
작은 욕심때문에 현실에 얽매여 살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간혹 그 얽매임을 훌훌 털어 버리고 자유인을 지향하기도 한다.
꿈은 꾸지만, 쉽지 않은 꿈이다.
오죽하면, 죽어서 거기 누운,
말로만 자유인과 평화를 노래한 카잔차키스의 무덤 따위까지 가 보았겠는가. 

그렇지만 그의 무덤에 꽃다발 하나 바치는 것도 자유를 향한 작은 몸짓임까지 부정하긴 어렵다.
다음엔 이성부의 '슬픔에게'를 한번 읽어 보자. 

섬 하나가 일어나서
기지개 켜고 하품을 하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느냐.
바다 복판에 스스로 뛰어들어
그리움만 먹고
숨죽이며 살아남던 지난 십여년을,
파도가 삼켜버린 사나운 내 싸움을,
그 깊은 입맞춤으로
다시 맞이하려 하느냐.
그대,
무슨 가슴으로 견디어 온
이 진흙투성이 사내냐 ! <이성부, 슬픔에게> 

화자가 있는 곳은 어딜까
섬이 내려다 보이는 해변이겠지.
거기서 섬을 바라보고 있다. 

제목은 <슬픔에게>이다.
화자는 <슬픔>에게 무슨 말인가를 던지려 한다.
그런데, '슬픔'은 그 말을 들어줄 귀가 없다. 슬픔은 이야기를 들을 대상이 아닌 것이다.
화자가 하는 이야기는 결국 '슬픔'에 대한 이야기이다.
누군가의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 짐짓 <슬픔에게> 털어놓는 이야기처럼 꾸민 것이다. 

3행까지, 의인법이 제법 멋지게 표현되고 있다.
섬 하나가 일어나고 하품도 기지개도 켜고, 걸어나온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은 화자다. 

그 섬의 내력이 다음 문장에서 진술되고 있다.
<미스터 섬>은 바다 복판에 스스로 뛰어들었다.
그리움을 먹고 숨죽이며 지난 십여 년을 살았다.
파도에 맞서 사나운 싸움을 벌인 십여 년.
이제 다시 새로운 싸움을 앞에 두고 있다. 자못 긴장된다. 

<미스터 섬> 그대는,
온 가슴에 진흙투성이로 남은,
상처투성이 가슴으로 어떻게 견디어 온
힘겨운 투쟁조차도 강인함 하나로 견디어낸, 그런 사내인 것이냐!  

 

한국 현대사에서 이런 단단한 '섬'같은 존재는 여럿 있었다.
그 섬의 상처투성이 가슴이 슬펐던 일도 참 여러 번 있었다.
그렇지만, 이 시를 읽으면 마음에 떠오르는 인물 중에 '고 노무현 대통령'이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를 떠올리면 가슴 한 구석이 아스라히 쓰라려 온다.
그런 사내의 삶에 대한 화자의 감상이 <슬픔>이기에 <슬픔에게> 편지보내듯 시를 쓴 모양이다. 

이 진흙투성이 사내 대신에
앞서 노래한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그 자유를 갈구하던 사람을 대입해 보아도 멋진 그림이 그려진다.
다음엔 김광규의 '묘비명'을 읽어 보자.
묘비석에 새겨둔 글귀란 뜻이다.

한 줄의 시(詩)는 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김광규, 묘비명(墓碑銘)>

이 시를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앞부분은 <훌륭한 비석>에 대한 이야기이고,
뒷부분은 <시인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사를 가장 고귀하게 노래한 시는 커녕,
잡담 같은 소설도 읽은 바 없지만,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 있었고, 그는 <훌륭한 비석>을 남겼단다.
문학도 몰랐던 속된 사람에게 '훌륭한'을 붙였으니 비꼬는 <반어법>이 되겠다.
겉만 번지르르한 그 비석은 사실 보잘것 없는 '저급한' 비석일 뿐이다.
그렇지만 세상이 추구하는 바는 그렇게 돈과, 명예와, 번지르르한 비석으로 흘러감을 비평한 것이겠다. 

그리고 유명한 문인 하나가 물론 많은 돈을 받고서는
그 번지르르한 무덤의 주인을 위해 '묘비명'을 썼다. 
유명세를 타고 세상에 아첨하여 돈버는 자를 일러 <곡학아세>라 한다. 

돈 많이 받은 문인이 읊은 것은 이러하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그렇지만 화자는 그 묘비에 새긴 것(묘비명)이 못마땅하다.
이 묘비는 오래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가치가 없는 것인데도,
세상은 돈으로 칠갑한 그 묘비를 추구하며 달려간다. 

마지막 부분의 목소리는 화자의 목소리겠다.
역사는 무엇을 기록하고, 시인은 어떤 무덤을 남길 것인가 하고...
역사는 과연 승자의 기록만을 미화할 것인지,
시인의 보잘것 없는 무덤은 퇴색하고 말 것인지... 

지나치게 <물신 숭배>, <세속적 부와 지위 숭상>으로 흘러가는 세태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시를 쓰기위하여,
김광규는 <묘비명>을 이용하여 반어적 표현을 하고 있다. 

유명한 노래로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묘비명(EPITAPH, 에피타프)이란 곡이 있다. 
그 노래 가사를 한번 음미해 보면 좋겠다.

예언자들이 그들의 예언을 새겨 놓았던 벽에 금이 가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악기 위에 햇빛은 밝게 빛납니다 

The wall on which the prophets wrote Is cracking at the seams.
Upon the instruments of death The sunlight brightly gleams. 

모든 사람들이 악몽과 꿈으로 분열 될 때
아무도 월계관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침묵이 절규를 삼켜버리듯이...

When every man is torn apart With nightmares and with dreams,
Will no one lay the laurel wreath As silence drowns the screams 

금이가고 부수어진 길을 내가 기어갈 때
혼란이 나의 묘비명이 될 것입니다 

Confusion will be my epitaph.As I crawl a cracked and broken path

우리가 모든 것을 할수 있다면 뒤에 앉아서 웃기나 할텐데
울어야 할 내일이 두렵습니다.

If we make it we can all sit back And laugh.
But I fear tomorrow I’ll be crying, Yes I fear tomorrow I’ll be crying.

운명에 철문 사이에 시간의 씨앗은 뿌려졌고
아는 자와 알려진 자들이 물을 주었습니다.

Between the iron gates of fate, The seeds of time were sown,
And watered by the deeds of those Who know and who are known;

아무도 법을 지키지 않을 때 지식이란 죽음과도 같은 것
내가 볼 때 모든 인간의 운명은 바보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Knowledge is a deadly friend When no one sets the rules.
The fate of all mankind I see Is in the hands of fools.

바보같은 인간들이 권력을 잡고 세계를 뒤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서,
운명의 씨앗은 이미 뿌려졌고,
비극적인 미래가, 울어야만 할 미래가 두려울 뿐이란 노래지. 

어쩌면 비극적인 가사보다도 더욱 심금을 울리는 음악이 듣는 사람을 전율하게 만든다.
이런 음악을 들을 때,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는 격언이 실감난단다.


 

유명한 묘비명 몇 개 소개하고 오늘은 고만~~ 

    

릴케는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뭐니뭐니 해도 묘비명의 종결자는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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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2-20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계의 거리가 멀때...상상력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말, 공감합니다.
전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읽으면서 무한한 상상력을 봤어요~^^

글샘 2011-02-21 17:16   좋아요 1 | URL
요즘 저도 이책을 읽고 있습니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대하여 알려진 것도 워낙 얼마 안 되지만요.
세종대왕, 정조의 르네상스... 날조된 느낌이 크죠. 지네 관점에서 보면 그렇단 건데 말입니다.

양철나무꾼님 리뷰에도 무한한 상상력은 가득합니다. ^^
 

요즘 나무들을 보았니?
나무들은 비썩 마른 가지들로만 이뤄진 것 같지만,
전혀 바싹 마르지 않았단다.
나뭇가지들은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눈'들을 살찌우고 있더구나.
'겨울눈'이라고 이름붙은 것들이 곧 새싹으로 변신하려고
무대 뒤에서 옷을 갈아입고들 있는 풍경이란다. 

독서실 오가는 길에서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도 한번 쳐다보기 바란다. 
오늘은 아빠가 고등학교 들어가서 배웠던 시 '봄비'를 한번 읽어 보자.
그러면서 '창의적 사고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볼게.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이수복, 봄비)

4연으로 되어있지?
넉 줄로 되어있는 한시를 <절구 絶句>라고 부르는데,
그 각 행을 기, 승, 전, 결구라고 부른단다.
기구는 일어설 起, 곧 상상력을 불러 일으킴을,
승구는 이을 承, 곧 첫번째 기구의 생각을 이어 나감을,
전구는 구를 轉, 좀 어려운데, 이제까지의 생각이나 표현 형식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게 아니라,
                      멀리뛰기에서 '구름판'에서 도약하듯, 상상의 양식을 '비틀어 보는' 의미를,
결구는 맺을 結, 당연히 생각이 전개된 것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구실을 하는 거야. 

이 시도 기승전결의 4단 구성으로 볼 수 있겠다.
4단 구성은 어쩌면 모든 문학의 '종결자' 노릇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을지 몰라.

1연에서 상상력을 불러 온단다.
봄비가 그치면 마음 속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게 아니라,
'서러운 풀빛'이 짙어올 거래.
도대체 화자에게 어떤 서러운 일이 있었던 걸까? 

2연에선 그 상상력을 이어서 더 넓게 펼치는 거야.
화자는 서러운데,
보리밭은 푸르게 변해가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종달새는 조잘거리며 생동감 넘치는 세상을 연출하겠지.
화자가 왜 서러운지 더 궁금하게 만드는 것 같지 않니? 

3연에서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흘러 나가는 듯 보이게 할까?
봄비가 그치면 시샘하며 벙글어져 피어날 고운 꽃밭을 배경으로
처녀애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새로이' 선다고 하고 있단다.
꽃이 피면 원래 여학생들은 몇 명씩 모여서 사진을 찍곤 하잖아.
그래서 어머니들 학창시절 사진 보면 꽃밭에 몇 명 모여 찍은 사진들이 다 있단다.
아빠들은 잘 없어. 아빠들은 돌 위에서 폼생폼사하던 사진들이 더 많거든. ㅋ
나는 서러운데, 그 이야기는 어디로 가고,
봄이 되면 꽃밭에 여학생들이 새로이 서서 사진을 찍을 광경을 상상해 본단다.  

여기까지는 상상이 펼쳐지긴 했지만, 도무지 뭔 얘길 하는겨? 이렇게 되고 있는데,
드디어 4연. 종결을 지어야 겠지?
화자가 '서러운 이유'도 등장하고,
꽃밭의 여학생들이 '새로이' 서는 이유도 등장하면서,
마치 폭포가 그 높은 절벽을 주저하지 않고 뚝! 떨어져 내리듯,
급전 낙하하는 연이란다. 

그 여학생들 또래의 임이 죽은 거잖아.
임은 영정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고,
그 사진 뒤에는 화안한 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데,
현실 속의 임 앞에는
봄이 되면 땅에서 피어오르던 아지랭이처럼,
향 연기만 가득 피어오를 뿐이니... 
생각이 갑자기 아득해지면서 먹먹해지는 느낌이야.  

1연에서 등장한 '마음 속 강나루의 서러운 풀빛'은
고려때, 시를 가장 잘 써서 김부식의 질투를 받아 죽게 되었다던 정지상의 시,
송인(임을 보내며)에서 등장하는 구절이란다.
사물에 화자의 감정을 <이입>한 구절로 유명하지.
정지상의 '송인'도 한번 감상해 보자.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정지상(鄭知常), 송인(送人)>

비 갠 긴 언덕 풀빛 푸른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할 것인가,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이규보의 파한집(破閑集) 수록>

이 시의 기구(제1행)에서 '봄비'의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의 서러운 풀빛'을 가져온 거야.
대동강 가의 가장 큰 도시가 '평양'이고 좀더 하류로 내려가면 '남포'란다.
임을 보내는데 왜 이렇게 펑펑 눈물이 날까?
속된 말로 하면 '뻥'이 좀 심하잖아.
대동강물은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더해져서' 영원히 마르지 않을 거라고 하니 말이야. 

인도에 가면 '갠지즈 강'을 '강가'라고 부르면서 인간의 고향, 어머니처럼 여긴대.
거기에 가면 좀 깨끗지 않은 물인데도 사람들은 성스러운 강물에 몸을 담그고 정화한다는구나.
그런데, 그 옆에서는 나무토막을 쌓아 놓고 시신을 태우기도 한대.
돈이 없어 장작이 부족하면 시신이 다 못타고 남는데, 그걸 짐승이 물고 가기도 한다더구만.
지금은 강물에 유골을 뿌리는 것을 '수질오염'을 우려하여 금지하고 있다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신은 화장해서 강에 뿌리는 것이 일상적이었단다. 

고려 시대는 불교가 왕성하던 시대였어.
불교에서는 고승들도 죽으면 화장해서 들판이나 강가에 뿌리곤 했겠지.
대동강 가에서 '영원한 이별'을 한 사람들의 눈물은 얼마나 슬픈 그것이었을까. 

이수복의 '봄비'의 이별처럼,
정지상의 '송인'의 이별 역시 '사별'이라고 아빠는 생각한단다.
인간들의 '이별'은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옅어지는 것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금세 잊기도 하는 거거든.
김소월의 '진달래 꽃'의 이별도 '사별'일 거라고 쓴 적 있지?
헤어지는 사람에게 꽃을 뿌리고는 밟고 가라는 상황은...
글쎄, 사별의 경우에나 시적으로 어울리는 거란 말이지.

정지상의 '송인'의 이별부터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이별을 계승한 시인으로,
섬세한 한국적인 정감을 '한(恨)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시인으로 이수복을 평가하기도 한단다. 

어제 '상상력'을 이야기하면서
관계적 거리가 '먼 것'을 연결하는 것이 '창의적 상상력'이라고 했던 기억 나니?
오늘은 어쩌면 한국 시 역사상 가장 '이질적인 것 - 그러니깐 둘 사이의 질적 차이가 큰 것'을
바로 은유법으로 가져다 붙인, 그런 시를 한편 읽어 보자.
우선,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을 읽고 이야기 나눠 보자꾸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 김춘수, 나의 하나님>

어떤 느낌이야?
혹시 교회다니는 친구라면,
이 페이지를 확 찢어버리고 싶을지도 모를 일 아닐까?
일반적인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이 아닌,
유일신으로서 절대자인 '하나님'이라고 불렀으니 기독교의 하나님인 것은 틀림이 없는데 말이지. 

이 시를 이해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이 시를 이해하려는 일도 의미가 없는 시란다.
전에 '꽃을 위한 서시'에서 '본질이나 의미 탐구는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이야길 한 적 있지?
우리는 겉보기(현상)만을 할 수 있을 뿐이지,
현상의 본질의 의미를 안다는 일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는 시였단다. 

그렇지만 시를 감상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창의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이니...
우선 이 시의 첫 구절.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이
신도들이 열렬히 믿고 따르면서 인생의 기둥으로 삼고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신성 모독일 수 있겠지.
그렇지만, 화자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신도요, 제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시작하는구나.
그러려고,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을 맨 앞에 얹었겠지?  

세 가지의 은유를 늘어 두고,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 것도 화자는 독실한 신자임을 강조하는 의미라고 볼 수 있겠다.
결코 나의 이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니다!'라고나 할까?

그 다음은 'A는 B다'와 같은 '은유'가 주주룩 나열되어 있다.
그걸 우선 도표로 그려 보자. 

하느님 당신은
= 늙은 비애(悲哀)
=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
=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 놋쇠 항아리
=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 순결(純潔)
= 삼월(三月)에 /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 연두빛 바람

이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할 수 없단다.
도저히 말로는 통하지 않는 지경이 있단다. 

부처님이 제자들을 모아 두고는 연꽃을 한 송이 손으로 들어 올렸다.
아무 말도 없이.
그러자 제자들은 멀뚱멀뚱 쳐다보기도 하고,
서로 마주보며 의아해하기도 했지.
그러던 중, 부처님의 제자 종결자인 '가섭'이 빙긋이 웃었다고 한다.
바로 '염화미소'라는 것이다.
말이 없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이심전심'의 지경이고,
언어가 없어도 소통이 가능했던 '불립문자'의 수준이었지. 

이 시가 이뤄지게 된 배경을 먼젓번 '승무'의 스토리처럼 상상해 보는 일이
어쩌면 염화미소, 불립문자의 가르침을 얻어듣는 길이 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1974년 3월 27일 수요일 날씨 : 흐리고 꽃샘추위로 바람이 맵찬 날

나는 밤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학기 초라, 새로운 학생들을 받아서 가르치느라 매일이 고단합니다.
3월은 '프레시'한 신입생들이 들어와서 학교가 어수선합니다.
새싹은 언제나 그렇게 제맘대로인 것 같다는 생각을 시로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수요엘에는 대학 강의까지 저녁 시간에 겹쳐 몹시 피곤하였던 모양으로,
발바닥이 성냥의 황덩어리라도 된 듯, 불이 일 것처럼 화끈거립니다.

공자님은 주역을 가죽 끈이 세 번 떨어져 다시 묶어가며 읽으셨다지만,
내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읽고 있는 '릴케'의 시집은 다행히 떨어지지 않습니다.
릴케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릴케의 마음 속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끊어지지 않는 기도에 대하여 마음 속 가득히 감동을 느끼게 되는 이유로,
나는 릴케의 시집을 읽고 또 읽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 오셨다 갔는지도 모르는 뒤숭한 인간이지만,
릴케의 시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집니다.
사물 안에서 정확하고도 치밀하게 팽창하는 하나님의 존재가
익어가는 열매 속에서나
여물어가는 곡식 속에서 탄탄하게 보이거든요. 

잠시 쉬어가려 공원 구석 나의 낡은 벤치를 찾아갑니다.
그 벤치 옆엔 가로등이 있어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지만,
의외로 연인들은 가로등 저편에서 속삭이길 좋아하지요.
아뿔싸! 나의 낡은 벤치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벤치는,
어떤 늙은이가 가마니때기를 하나 덮고 이미 점령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들려주신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이를 당신으로 여기라고 하셨다던 말씀입니다.
저 벤치에,
자기 키보다도 짧은 벤치에,
자기 키보다도 훨씬 짧은 가마니를 덮은 늙은 거지에게도 예수님이 내려오신 걸까요?
아, 하나님. 당신은 <늙은 거지의 슬픔>과 함께 하여 주실 건가요? 

안식의 장소인 벤치를 도난당한 듯 빼앗긴 마음은 더 허전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마니 덮은 거지 노인 위에서
예수님, 당신을 만난 이후로 내 발은 화끈 거리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 속에 가득하셨던 당신은,
내 눈을 가로등 아래 활짝 팔을 펼치고 만세를 부르고 섰던
느릅나무 잎새를 우러러보게 하셨습니다.

늘 가로등 밑 벤치에서 릴케의 작은 글자들을 쓰다듬던 제가 안쓰러우셨던 걸까요?
그 가로등 아래 아직도 검은 빛의 느릅나무 그 속에서 당신은 웃고 계셨더랬어요.
아, 하나님, 당신은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으로
어두운 제 눈을 화안한 신록으로 개안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공원을 거쳐 돌아오는 늦은 밤.
구멍가게에서 환희 담배를 한 갑 사서 돌아설 때,
가게들은 문을 닫고 있는데,
내 셋방의 건너편 정육점엔 아직도 벌건 형광등을 켜놓고 있습니다.
아, 거기에는
그 벌건 형광등 불빛 아래에는
내 새끼손가락보다 굵직해 보이는 쇠꼬챙이에 꿰인 커다란 살점들이
굳어져서 덜렁거리지도 않고 매달려 있더군요. 

인간들이 제 배를 불리겠다고,
동물의 시신을 오래오래 보관했다가 먹어 보겠다고,
냉장고 안에 넣어둔 차가운 살점 위로 비치는 붉은 빛의 형광등은,
당신의 존재를 날마다 일깨워주는 교회 첨탑의 붉은 십자가의 불빛 그것이었습니다.
날마다 동물의 비린내를 떠올리던 그 붉은 형광등 조명을 불쾌해 하던 난,
십자가의 붉은 빛이 내 동공을 지나면서 경건함을 불러 일으키듯,
인간 욕망의 제물이 된 돼지의 넓적 다리를 위하여,
또는 소의 심장 옆 갈빗살이나 자유롭던 꼬리를 위하여,
하나님, 당신께서 거기 함께 하고 계셨음을 이제야 보았습니다. 

어젯밤의 내 발걸음과
오늘밤의 내 발걸음은 똑같은 길을 따라 지나온 것이었는데도,
어젯밤에 앉았던 공원 벤치와, 릴케의 시와, 정육점의 붉은 빛 속에선 당신을 만나지 못했지만,
오늘밤 빼앗긴 나의 벤치 덕분에,
<늙은 비애> 위로,
그 벤치를 이불처럼 덮고 있던 <신록의 느릅나무 새싹> 사이로,
정육점 붉은 빛에 얼어 붙은 <커다란 살점>그 빛으로 당신은 제게 오셨습니다. 

아니, 당신은 날마다 제게 오신 것이지만,
그래서 저를 일깨우고 가르치고 옳은 인간으로 살도록 이끌어 주려 하셨지만,
학생들이 우러러보는 실력파 교사로,
대학 강단에까지 선다는 우월감으로,
시인 릴케를 사랑하는 시인이라는 잘나빠진 욕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외면했던 저를 발견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
진정으로 저의 발걸음을 따라서 하나 하나 제 발자국을 따라서
어디에나 함께 임해주셨던 당신의 진심을,
인간의 죄를 대속하려 모든 고통을 짊어지신 예수님 덕택으로, 
죄 사함을 받았지만 당신을 믿지 못했던 저 자신을 그래도 사랑으로 늘 안고 오셨던 당신의 진심을,
이제 십분의 일, 백분의 일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 릴케가 그토록 사랑하였던 러시아 여인 루 살로메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릴케가 모든 사랑을 바쳤으나 결국 완전한 사랑을 위하여 이별을 택한 슬라브 여인을...
릴케가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놋쇠 항아리'같은 슬라브 여인 루 살로메를 말입니다

나는 당신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꿈도 꾸고 싶지 않으며,
당신이 동의하시지 않는 어떤 소망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영광되게 하지 않는 어떤 행위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의 심장은 마리아 상 앞의 한 램프처럼,
아름다운 당신 앞에서 불타고 있습니다. <릴케, ‘루 살로메에게 보낸 편지’ 중>

아아, 하나님.
제가 그렇게도 완벽한 추구의 대상으로 삼는 시인 릴케의 심장을 사로잡아버린 이 여인,
루 살로메에게 바치는 릴케의 이 노래는,
어쩌면 하나님 당신께 바치는 릴케의 사랑과 존경의 표현은 아니었을는지요.
그리고 릴케가 결코 얻을 수 없을 거라고 비탄에 빠져 노래부른,
루 살로메의 마음 속에 가라앉은 <놋쇠 항아리>에는,
닦고 닦노라면 윤기가 반들거리는 놋쇠 그 안에 당신이 계셨던 것이 아니었을는지요. 

꽃샘추위의 바람이 길거리를 쓰다듬고 다니는 깊은 밤입니다.
하느님, 제 차가운 잠자리 곁에서도 함께 하심을 알게 해주신 오늘 밤.
제 기도는 오로지 당신을 위한 감사 뿐입니다. 
당신께 드리는 영광 뿐입니다.  

다음날.  날씨 : 오전에 봄비가 내리고 기온이 많이 올라 포근하게 느껴지는 날 

어제 늦게까지 찬바람을 쐰 탓인지, 삼월의 격무 탓인지,
침을 삼키기 힘든 통증에 깨어 새벽을 지냈습니다.
약국이 문을 열기를 기다려 진통제를 사고, 학교에는 하루 결근을 통보하였습니다.
약이 강했는지, 내가 약했는지,
하나님, 당신의 손길 덕분이었는지, 참으로 단잠을 푹 잤습니다. 

꿈 속에서 루 살로메가 릴케의 사랑을 받아들여 환하게 웃는 즐거움도 맛보았답니다.
슬라브 여인의 놋쇠 항아리는 릴케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고,
윤기가 반들거리며 즐거운 노래라도 부르는 듯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지요. 

좀 원기가 돋았지만, 담배 연기는 삼킬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당에선 주인집 아주머니가 풀린 날씨를 기념하여 송희 목욕을 시키나 봅니다.
송희는 이제 여섯살 난 아가씬데 나랑도 제법 친합니다.
샌샌님~ 하면서 제법 따라붙으면 뽀빠이라도 하나 얻어 걸린다는 재미를 느꼈나 보지요. 

봄비가 살푼 내린 대기는 세상을 더 윤기나게 합니다.
장독대 위에 조금 고인 연못에서도,
부불어 오른 처녀 가슴 같은 목련 나무 꽃봉오리에서도,
하나님, 당신은 반짝이는 웃음으로 세상을 가득 환하게 하십니다. 

송희 년은 물이 뜨겁다는 둥 온갖 소리를 재잘대면서,
목욕통 안에서 떠들어 대고 있나 봅니다.
미닫이 문을 열고 잠시 내어다 보니,
아, 하나님.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목욕통 위로
우리 귀연 송희가 하마나 찬바람에 다칠세라...
화안한 햇살을 가득가득 머금고,
대낮에도 옷을 홀라당 벗고도 너무도 즐거운
뽀얀 속살마다 여리디 여린 순결
함으로 가득찬 송희의 온몸 위로
당신은 가득 뿜어져 내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릴케를 읽으면서도 날마다 그의 고독을,
예술가의 외로움이 뿜어내는 표독스런 언어의 표창들을,
저는 마치 하나님의 은총인 양 자랑하곤 했던 지난 날들을 돌아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어젯밤과 오늘 아침 사이에 제게 내려 앉으셨던 그 모든 순간을
제가 감히 시로 쓸 수 있을까요? 
제 연필의 흑심 위로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의 손을 함께 얹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나의 하나님 

                                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시가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이라고 상상한다면 어떨까?
각자가 만들어낼 수 있는 <나의 하나님> 스토리는 다양하겠지.
그렇지만, 창의적 상상력이란 이렇게 머~얼~~~리 떨어진 것들을,
그 거리를 뛰어넘는 <관계 부여>에 성공하는 일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수학 시간에 배웠던 '뫼비우스의 띠'의 원리를
소설에 넣어 봤던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어느 이동통신 회사의 로고처럼 말이다.  

아빠가 상상하려고 했지만,
저 날짜의 요일이 뭔지는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하겠기에
인터넷에서 '요일 찾기'를 검색해서 알아본 거란다.
이렇게 세상은 상상만으론 안 되는 거고,
연구해야 할 것도 많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 1974년 3월 27일의 요일을 알아보게된 원리... 


 

1. 1974년의 뒷부분 2자리 '74'를 취한다. 
2. 74를 4로 나누어 몫인 '18'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3. 월건수표에서 3월의 월건수 '4'를 취한다.
4. 날 수가 27일이므로 '27'을 취한다.
5. 앞의 네 수를 모두 더하면 '74+18+4+27=123'인데 이 수를 7로 나누어 몫(17)은 버리고 나머지 '4'를 취한다.
                                         (만약, 나머지가 0이면 7을 취한다.)
6. 세기수표에서 1974년은 '0'이다. 이 수를 5.에서 구한 나머지 '4'와 더하여 '4'를 얻는다. 
7. 요일수표에서 4에 해당하는 요일은 <수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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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나온반달 2011-02-1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 위의 글이 글샘님만의 <나의 하나님>이란 말이지요?
늘 감탄하지만 또 한번 더 감탄!

봄은 아직이지만 겨울 기운도 스러진 요즘같은 환절기...건강하셔요.

글샘 2011-02-19 17:22   좋아요 0 | URL
도무지 가르칠 수가 없을 때, 제가 쓰는 방법이죠. ^^
 

어제에 이어 조지훈의 시를 살펴 보자.
우선 지지난해 수능에도 등장했던 '승무'를 보자.
이 시는 정말 유명한 시여서 줄줄 외울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란이 깎은머리
박사(薄紗)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닢 닢새 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하늘 한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여저 감기우고 다시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 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조지훈, 僧舞>

뭐, 교과서에도 실려서 다들 알고 있는 조지훈의 승무란다.
익숙한 시인데, 학생들에게 이 시를 이해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더구나.
그래서 아빠는 이 시 수업하기 전에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단다.
애들이 다들 긴가민가 하고 듣는데, 사실은 지어낸 이야기야.

화자는 30대 중반쯤의 신문 기자쯤 됩니다.
절간에 어떤 스님과 승무에 대한 취잿거리를 만들 일이 있어서 절에 하루 묵습니다.
초저녁에 개울에 나가 땀을 식히고 있는데,
조용조용한 걸음의 한 비구니를 만나죠.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이었는데,
저녁을 먹고 나서도 마음 속에 계속 비구니의 표정이 남아있습니다.
무슨 사연으로 스님이 되었을까...
괜히 마음 속이 짠해집니다.

그러다 밤이 이슥해서 부처님께 바치는 공양으로 '승무'가 펼쳐집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이 기자는 줌렌즈로 당겨가면서 승무를 촬영하곤 하는데요.

아,
승무를 준비하는 스님이 아까 그 비구니인 거예요.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왜인지...

얇은 비단으로 하이얀 고깔을 접어 쓴 모습,
뷰파인더로 보인 그 모습은 한 장의 나비였어요.
아, 중력의 지배에 개의치않고,
공기의 저항을 최대한 이용해 나풀거리며 공기 속의 계단을 찾아가는 나비 말이죠.  



스님의 두 뺨으로 불빛이 비치는데, 왠지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그 눈물은 여승의 눈물인지, 뷰파인더를 바라보고 끔쩍이는 기자의 눈물인지, 분간도 안 가지만요.

텅 빈 무대에 노란 촛불 둘이 말없이 녹고 있습니다.
고요,
원시적인 고요함이 지배하고 있어요.
아주 정적이죠.
뷰파인더 안에서 간혹 한들 흔들리는 촛불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정지한 상태 같습니다.

오동잎 잎새에 달빛이 비친 배경으로, 드디어,
승무가 시작됩니다.
긴 한삼자락을 휘감아 하늘을 가리웁니다.
어쩌면 나비처럼 중력감이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에요.
이제 뷰파인더에 스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아름다운 알록달록 의상에
화려한 손동작이 아름다웁게 가득 찼습니다.

그러다, 작가는 찍었어요.
새초롬하게 내민 외씨같은 버선발 한 쪽.
여승은 동작을 줄이고,
천천히 슬로우 슬로우... 데드 슬로우로...
여리게 여리게 피아니시모로...
먼 하늘 한개 별빛을 응시합니다.

작가는 다시 비구니의 얼굴에 초점을 맞춰요.
아~ 그러다 보고 말았어요.

그 이쁜 복사꽃 두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 맺힌 것을...
찰칵찰칵찰칵, 연속 사진으로 그 방울을 잡아내려 계속 찍습니다.
세상사에 시달린 한 가냘픈 인생이,
어쩌다 머리를 밀고, 번뇌를 별빛으로 보내는 승무를 추고 있는 것이냐!
아, 인생의 사닥다리는 어디에서 끊어져있는지 알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다시 동작은 이어집니다.
나어린 여승의 동작치고는 무척이나 유연하고 장엄해요.
그래서 그 동작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합장이라도 해야할 듯 한 느낌이랄까?

시간은 점점 흐르고 밤이 깊어 귀뚜라미 소리도 어디선가 들리는데요.
다시 스님의 모습으로 가득한 뷰파인더 안에는,
한 마리 나비로 정지한 여승의 모습이 잡힙니다.
처음의 나비와는 조금 다른 나비죠.

번뇌를 별빛에 의탁하고 난 후라서 그런 걸까요?
뭔지 모를 애상감에 젖어들게 만드는 장면입니다.

이런 이야기야. 어때?
조지훈의 승무,가 그림으로, 아니, 사진으로 가득 마음에 들어차지 않니?

이런 시를 그냥,
주제 : 승무를 통한 속세의 번뇌의 종교적 승화
이렇게 외워버리면 재미없잖아.

빈 칸을 조금 메워보고,
그러면서 시를 익숙하게 끌어안고 쓰다듬고 그 부드러운 언어의 결을 느끼는 거야.
그게 시를 읽고 감상하는 법이란다.

좀 느껴지니?
매끈거리면서 보들보들한
어쩌면 어린아이 젖살에서 나는 향기라도 맡아질 것 같은 시의 냄새가...  



아빤 이렇게 눈을 감고 마음 속 시각적 심상으로 시를 감상하다 보면,
시가 마음 속 가득 들어차는 것 같단다.
지어낸 이야기 부분을 읽고 다시 <승무>를 읽어 보렴.
왜 이 시의 주제가 <승무를 통한 속세의 번뇌가 종교적으로 승화됨>인지...
그 여승의 눈에서 굴러 떨어지는 눈물의 의미가
그 아름다움 속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의 <역설>이 어떤 마음일지 말이야. 

고와서 서러워라...
번뇌는 별빛이다... 이런 게 모두 역설적이잖아.
다음엔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하나 들어 보렴.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
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
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
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石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돌문이 생긴 곳들이 있겠지.
그 돌문을 보고 이 사람은 이런 상상을 한 거야. 

이 시는 조지훈이 그의 고향 경북 영양 일월산 황씨 부인 사당에 전해지는 전설을 소재로 하여
풀리지 않는 원한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야.
그 전설의 내용은 이렇대.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처녀는 그녀를 좋아하던 두 총각 중 한 사람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신혼 첫 날 밤 잠들기 전 화장실을 다녀오던 신랑은 신방 문에 비친 칼 그림자를 보고 놀라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 칼 그림자는 다름 아닌 마당의 대나무 그림자였대요.
그런데도 어리석은 신랑은 그것을 연적(戀敵)이 복수하기 위해 숨어 든 거라고
그 그림자가 자신을 죽일 거라고 오해한 거였대요.
신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족두리도 벗지 못한 채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답니다.
결국 신부는 깊은 원한을 안고 죽었는데,
그녀의 시신은 첫날 밤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오랜 후에 이 사실을 안 신랑은 잘못을 뉘우치고 신부의 시신을 일월산 부인당에 모신 후
사당을 지어 그녀의 혼령을 위로하였답니다. (일월산 황씨 부인당 전설)

돌문을 보고 시인은 기다리던 여인을 떠올린단다.
<창의적 상상력>이란 가까운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먼 것을, 유사점을 발견하여 관계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창의적인 것이지. 

그래서 누구나 경치 좋은 곳의 돌문을 보고 '아, 경치 좋다~'하고 말면, 그건 꽝의적인 거지.
그 돌문을 보고, 전설 속의 <기다림>을 떠올리는 사람. 이런 게 창의적이야.
미래 세계에 가장 필요한 속성이라는 창의력. 

창의적 사고력에는 '논리적 사고, 관계적 사고' 등등이 있는데,
논리적 사고는 뭔가를 분류해서 늘어놓는 거래.
근데, 분류하는 데도 창의적인 분류가 필요하고,
관계를 맺는데도 거리가 먼 것의 유사성을 <유추>해 내는 능력이 창의적 논리력이 되는 거지. 

그렇게 보면,
미래를 준비하는 데 시만한 것도 없을 것 같구나.
시를 읽고,
이 시를 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한 건지... 생각해 보는 것이 창의적 사고력의 발단이거든.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 같은 구절도 멋지잖아.
다른 사람들은 절벽에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위의 부분을 보고 캬~ 하고 말 것을
시인은 전설과 관련시켜서 신방(新房)이 있는 계단 위를 상상하잖아.
거기 '검푸른 이끼가 앉'은 건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임이 오지 않았음을 연상시키고 말이야. 

상상 속 신방에서 촛불을 켜고 기약 없이 신랑을 기다릴 신부의 마음을 상상하는 시인의 눈엔
화강암 단단한 돌문이 얼마나 안타까이 보였겠니?
아, 저 돌문이 열리려면, 그 신랑이 와서 살포시 보듬어 줘야 할텐데 말이다... 이러고...
아이고, 짠한 사람 눈에는 짠한 사람만 보인다더니... 

천년이 지나도 눈감지 않는 데서 '한'이 서서히 응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길숨한 속눈썹의 방울 이슬은 상상 속의 신부가 기다림에 지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야.

'돌문이 있습니다'로 시작해서
중간 부분에 전설을 삽입하고
마지막 부분에 '돌문이 있습니다'를 반복하면서 아련한 여운을 만드는 효과를 만들고 있구나.

이 시에선 시인과 화자의 시점이 다르지.
화자는 신부의 시점이란다.
'당신'과 '저희'에 표시해 두었으니 한번 느껴 보렴.
당신이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신부, '나'의 슬픔을 말이야.

이 시의 주제라면 '석문을 보고 느낀 전설 속의 끝없는 기다림과 한, 풀리지 않는 원한' 같은 것이지.
이 시와 유사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 시로 서정주의 '신부'도 한번 읽어 보렴.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
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알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
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
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신부)

이 두 이야기에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꼬마 신랑의 어리석음과,
신부의 어리석을 정도의 기다림이 그런 것이겠지.
한 살이라도 어릴 적에 며느리를 얻어 들여야 식구가 늘어 노동력이 늘었던 농경 사회의 모습일 것이고,
삼종지도(三從之道, 어려서는 아비를, 혼인한 후엔 남편을, 늙어서는 아들을 따르라)를 지키라고 배운
어리석은 여성이 추구하던 바가 <현모양처>였단다.
그야말로 대가리에 아무 개념이 없는 바보 여자를 원했던 거지.
현모양처는 똑똑하고 지혜로운 여자가 아니란다.
그저 바보처럼 '소나 키우는 여자'라고 보는 편이 고전에선 가깝겠다. 

저 여성들이 결코 '지혜'나 '똑똑함'과 상관있어 보이진 않잖아? 

돌쩌귀는 여닫이문에 다는 경첩의 구실을 하는 것으로
문짝의 아래위로 톡 튀어나온 쇠를 박아 <수돌쩌귀>로 이름붙이고,
문틀의 위아래에에 홈을 파고 쇠를 넣어 <암돌쩌귀>로 이름붙인 부속품이란다. 

이야기가 들어있으니 <서사적>이라고 할 수 있지.
그 이야기의 시간 구조가 펄쩍 뛰는 부분이 문단을 바꾼 부분이 될 거야.
앞문단과 뒷문단의 마지막 부분은 '버렸습니다'로 반복되어서 대칭을 이루고 있단다. 

'매운 재'란 것은 '매캐한 냄새'가 나는 재가 되었음도 의미하지만,
'매울 렬(烈)'자를 쓰는 <열녀>를 상징하기도 한단다.
<열녀>는 한 서방만을 섬기기를 목숨걸고 지키는 어리석은 여성이 되라고 조선이 여자들에게 가르친 덕목이지.
그래서 남편이 병으로 죽고 여자 혼자 살면,
가족들이 며느리나 형수가 '자살'하기를 원하면서 미워했다고 그래.
'열녀'가 되면(자살해 주면) 국가에서 포상도 있고, 혜택도 있고 그랬다더구나. 

'초록 재와 다홍 재'는 신부의 의복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신부의 영적 존재의 신비로움을 떠올리게 하지.
이런 상상을 통해서 독자는 한 차원 상승된 전설을 시를 통해 접할 수 있는 거란다. 

산문시의 구조에 토속적 이야기가 들어간 시다.
'전통적 여인의 슬픈 정절' 정도면 주제가 되겠지?

암튼 시인의 눈을 통해 우리는 <창의적 사고력>, <창의적 판단력>을 배울 수 있겠다.
조지훈은 '지조의 시인'으로도 불리는데, 그가 쓴 <지조론>이란 수필의 덕을 보았겠다. 

세상에는 제 뜻을 굽히지 않는 절개를 가진 사람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는 변절자가 있단다.
그런데 옳음을 위하여 그름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지조'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익을 위하여 그름을 행하는 사람은 <악인>일 것이고,
'지조를 가졌던 자'가 '이익을 위하여 악인이 되는' 인간을 '변절자'로 보면 되겠지.
우선 조지훈의 '지조론'의 일부분을 읽어 보자꾸나.

신단재(申丹齋)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제 강점기라서)
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들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다.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談)의 한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 있는 백성을 속여 야당(野黨)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 교활한 지혜)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박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란
뜻이 깃들여 있다. <지조론(志操論) ―변절자(變節者)를 위하여, 1960년 3월 '새벽'지 수록>

일제 강점기의 단재 신채호나 만해 한용운처럼 꼿꼿한 지조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 글은 누구를 대상으로 쓴 것일까? 

야당의 투사에게 던진 말이다.
야당이라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체 하며 백성을 속이다가,
감옥에 가서 온갖 고통을 참고 견딜 힘도 없으니 싸우는 체만 하다가,
권력자가 미끼로 무슨 장관이나 무슨 특별위원회에서 일하라고 줄을 던지면,
잽싸게 낚아 채는 더러운 족속에게 던진 말이다. 

제대로 된 야당이라면, 여당(권력을 잡은 당)의 잘못을 엄하게 질책하고,
감옥에 가거나 고난을 입을 각오를 해야할 터인데,
슬그머니 저항의 대열을 이루는 체 하다가,
선거만 지나면 다시 부르조아의 전선으로 합류하고 마는 야당은 <지조도 없는 변절자>라는 말이다. 

아, 한국의 정당정치는 아직도 이렇게 부끄럽다.
물론 이 시는 요즘의 것이 아니라 1960년 3월,
4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이니 참 어둡던 시절이다.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다 했으니 그 당시 인사들이야 얼마나 한심했으랴.

세상은 변하는 것 같지만 또 이렇게 변하지 않기도 한다.
어제 오늘, 조지훈의 시 몇 편을 공부했다.
시를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지혜로운 사람들이 바라보던 창의적인 세상을 배우는 일도 재미있을 것임을 몇 번 강조했다.
그러니 그리 하여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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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지?
아빠가 일 주일간 다녀온 곳은 충북 청원군의 한국교원대학교란 곳이다.
원래 사범대학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교사들의 연수기관으로 쓰이고 있다.
물론 사범대학은 있긴 한데, 너무 시골이라 별로 인기는 없다. 

요즘 아이들을 적게 낳는다고 하잖아.
그러니 사범대나 교육대가 점점 줄어들고 인기도 없다.
국가란 제도가 유지되려면 국민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처럼 국민이 급격히 줄어든다면
위기가 닥칠 날도 올지 모르겠다. 

오늘은 '청록파' 시인으로 유명한 조지훈 시인의 시를 몇 편 살펴 보자.
청록파 시인이 유명해진 것은, 독재정권 시절 워낙 비판적 시를 교과서에서 제거하다 보니,
교과서에는 별로 저항적이지 않은 시인들의 시로 채워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는 것이 아빠의 의견이다. 

우선 그의 '낙화'를 한번 읽어 보렴.
꽃이 지는 걸 보고 눈물이 나는 아저씨의 마음을...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 낙화)



이 시를 읽고 나면 입 안에 어떤 운율이 남는단다. 특히 중간 이후 부분...
뭐뭐가 뭐뭐하니 뭐라뭐라고... 이렇게 3음보의 7.5조가 입에 짝 붙는다.
7.5조의 음률은 일본에서 인기를 얻은 시들에서 쓰이던 것들의 영향을 받은 거지.
일본을 죽어라 싫어하는 교수들은 굳이 <3음보>라고 우기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 영향 받은 거를 변명할 필요는 없을 거로 보인단다. 

슈퍼마리오 같은 만화영화에 보면 '나는 나는 마리오 / 마리오 박사' 이런 구절이 나와.
바로 7.5조지.
일본 시 중에 '하이쿠'라고 해서 5.7.5의 짧은 시가 있단다. 

낙화란 시는 별 내용 없어.
그저 꽃이 지는 걸 보고 느낀 감상을 적은 거야.
1연에서, 낙화의 상황을 상정하고 있어. 그런데, 바람 탓은 하지 않는다. 자연의 섭리지.
2연에서 별이 스러지는 저녁이 되고 있다.(주렴은 구슬로 엮은 발이란다.)
3연에선 귀촉도(소쩍새) 울음과 함께 조금 감상적(센티멘탈, 슬픈 생각이 드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4연에선 촛불마저 끄고 싶단다. 꽃이 지는 모습을 더 감탄하려고...
5연에서 꽃지는 그림자가 뜰에 어리는 모습은 전통 한옥의 창호지에 비치는 모습같구나.
6연은 하이얀 미닫이 창이 우련(보일듯 말듯 은은하게) 붉게 비친다. 

7연은 은일사(묻혀사는 이)임을 드러내고,
8연에서 계속 묻혀 살고 싶음을 드러낸다. 아는 이 있을까 두렵다(저어한다)고 하니 말이야.
9연, 아~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더 설명하면, 옥에 티를 묻히는 꼴이 되겠구나.
근데, 아빠는 이 시를 조금 다르게 배열해 보고 싶다.
그러면, 마치 이 시는 3연의 연시조처럼 보일 수도 있거든. 아래처럼.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 낙화) 

가장 한국적인 노래의 형식이라면 '시조창'이 아닐까 싶어.
시조창은 노래로 부르던 거였더든.
가장 한국적인 배경인 창호지 바른 미닫이문 앞에서
붉게 비친 꽃이 뚝뚝 지는 모습.
그리고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화자는 '사라지는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삶의 비애'를 적고 싶었던 거겠지.
그게 주제지. '소멸되어 가는 것의 아름다움에 대한 슬픔' 이런 것.
이런 것이 한국적 은사의 체념과 달관의 멋이라고 한단다.
체념은 마음을 접은 상태고, 달관은 매달리지 않는 것이지.

먼저 읽었던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는
꽃의 떨어짐을 보면서 격정적인 슬픔을 노래했다면,
이 시에서는
꽃이 떨어짐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절제된 입장에서 노래하고 있단다. 

다음은 같은 화자의 '봉황수'란 시를 읽어 보자.

  벌레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鳳凰)
새를 틀어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泉)에 호곡(呼哭)하리라. (봉황수) 

한 연으로 이뤄진 시다.
제목이 '봉황수'이니 조선과 관련된 시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이성계가 세운 나라에 '조선'이란 이름을 내려 주었단다.
그리고 중국의 상징인 '용'보다 한 끗발 아래인 '봉황'을 조선 왕의 상징으로 쓰게 했다.
지금도 대통령 하사품 주변에 봉황이 그려진 것도 있단다.

   


<중국 자금성 태화전 용 조각>

'벌레먹은 둥근 기둥'과 '빈 바랜 단청'은 몰락하는 조선의 풍경이다.
둥근 기둥은 '궁전'이나 '왕가' 또는 '사찰'에나 쓰던 고급한 건축 양식이다.
조선 후기엔 조금 건방진 양반들도 두리 기둥을 쓰기도 했단다.
경주 양동마을 같은 곳에 가면 양반가에 둥근 기둥이 나타나기도 해. 

추녀 끝에는 새들이 둥주리를 마구 치지 못하도록 망을 설치하기도 한단다.
큰 나라 섬기던 사대주의로 용상(옥좌)엔 거미줄이 가득하다.
쌍룡 대신에 봉황새를 틀어올린 사대주의 조선이 망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이런 구절로 보면, 봉황은 울지 않는 새인 모양이다. 전설 속의 새.
그런데, 궁궐의 추석(궁궐 바닥을 깔던 돌조각)을 밟고 가는 화자는 울음이 난다.
궁궐에 신하들의 권위를 상징하던 패옥소리도 나지 않는다.
품계석 어디에도 화자는 몸둘 곳이 바이(전혀) 없었다. 

나라가 망해서 탄식하는 것을 '맥수지탄' 이라고 한단다.
원래 보리는 '춘궁기'를 지나서 자라기때문에
보리가 익자마자 베어 먹는 것이 정상이래.
그러다 보니, '보리가 쑥 자란 것(맥수)'은 곧 먹을 사람이 전쟁에서 다 죽고 나라가 망했음을 뜻하게 되었지.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아까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울고 싶어라>하던 화자는 이제 <곡을 하리라>고 하는구나.
봉황새(죽은 나라)야, 눈물이 속된 것만은 아니다.
이제 나라가 망해버린 이 마당에, 눈물이 속되다고 참지 말고,
꺼어이 꺼어이, 목놓아 울어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이런 의미겠지.
이렇게 두 시를 읽노라니,
자못 조지훈이 울음의 시인이 되기도 하겠구나.

이 시를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눠본다면, 선경후정이 되겠구나.
앞부분에선 퇴락한 궁궐 모습이,
뒷부분에선 쓸쓸한 화자의 감회가 드러니고 있어.
그러니 앞부분은 <사실>이 뒷부분은 <감상>이 드러난다고 봐도 되겠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길재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계워 하노라. - 원천석

이런 시조들 역시 맥수지탄(麥秀之歎)이 잘 드러난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은 조지훈의 시를 두어 편 시조들과 묶어서 살펴 보았다.
보통 시조를 '정형시'라고들 하는데
시조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노래>였단다. 시조창이라고 부르지. 

느릿느릿 부른 것인데, 종장 첫구절 석 자 부분은 악곡이 부르기 어렵고 변화가 많아.
그래서 글자를 석 자로 묶어 두었다고 그러더구나.
다른 부분은 얼마든지 글자 수를 바꿀 수 있지. 

내일은 조지훈의 유명한 시 '승무'와 '석문'을 한번 읽어 보자.
조지훈의 '석문'은 서정주의 '신부'와도 묶어서 읽을 만 할 거야.
오랜만의 강의나 너무 길어지지 않게 여기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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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계를 신자유주의 세상이라고 한다.
자유주의가 국가가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라면,
신자유주의는 국가간의 관계에서 기업의 이윤 획득을 국가가 끼어들지 말라는 것일 수도 있겠다.
물론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는 부유한 나라에 가서 힘든 노동을 떠맡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전에는 '국가의 1인당 국민 소득(GNP)'이라는 개념을 썼는데,
언제부턴가 '국가의 총 생산(GDP)'라는 개념을 쓰게 되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생산과 소비의 국가간 장벽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한국 기업은 노동력이 저렴한 중국으로 더 넘어 베트남으로 진출했으니, 그건 한국 국민의 소득은 아니지만,
한국의 생산에는 들어가는 것이다. 

무서운 것은 저런 계산 속에 무기가 수입되고, 전투기가 수입되는 것까지 포함된다는 것이지.
어쩌면 일제 강점기라는 <제국주의 시대>의 드러나는 폭력이 나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
일제나 독재처럼 드러나는 폭력은 때가 되면 민중의 저항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자유주의 경제 활동은 시나브로 민중을 메마르게 만들고 마는 세상이란다. 

오늘 살펴볼 일제 강점기의 <전원 시인> 신석정을 염두에 두고 시작하다 보니 무겁게 시작했다. ^&^
신석정의 가장 순수한 시, '어린 짐승'을 한번 읽어 보자.
옛날엔 교과서에도 실렸던 시였단다.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작은 짐승)

난이는 어릴적 화자의 친구인 모양이다.
아담과 이브가 순수하던 시절에는 옷벗고 살아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고 하더라.
근데, 선악을 구별하게 되는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부끄러워 몸을 가렸다고 하지.
'구별'이란 것은 인간을 순수하지 못하게 하는 측면도 많다는 생각이 들어.
전에 고은 시인의 '어둠'이 <순수와 평화의 경지>라고 한 '눈길'이란 시도 있다고 했지? 

난이와 화자는 어린 시절, 바다가 잘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서 자주 놀았던 모양이다.
이런 시를 <전원>적이고 <목가>적이라고 그래.
시골 이야기고, 목동의 이야기란 이야기지.

반복되어 등장하는 푸른 바다는 서해의 <부안 앞바다>란다.
지금은 새만금방조제가 들어서서 갯벌은 다 벌판으로 변해버린 땅이지.
신석정씨가 지금 살아온다면, 고향 앞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할지도 모르겠다.
이 시의 주제는 <어린 시절의 평화와 순수에 대한 동경>이 되겠다.
어른이 되고 보니 어린 시절의 평화로웠던 생각이 아름답게 떠올랐던 거겠지.

1930년대 식민지 치하의 암울한 현실에서
전원에 의탁해 나름의 울분을 삭이며 저항을 모색했던 시인의 땀과 회한이 그의 시에는 잘 드러나.

김기림은 그를 두고 "현대문명의 잡답을 멀리 피난한 곳에 한 개의 에덴을 음모하는 목가 시인"이라고 평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이 그의 시를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음엔 그의 '들길에 서서'를 읽어 보자.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어니......(들길에 서서)

화자는 자신과 푸른 산을 같은 위치에 놓고 견주어 보았다.
푸른 산에게 구름이 있듯,
자신에게도 푸른 하늘이란 <이상과 희망>이 있다는 거다.
희망이 솟구친다.
옛말에도 <청운의 꿈>이란 말도 있다.
청춘의 젊은 시절에 하늘까지 솟고 싶은 꿈을 이르는 말이리라. 

산삼은 '풍기 인삼' 같은 산삼 말고, <산의 삼림>을 뜻하는 것이다.
산에 나무들이 하늘향해 가지를 뻗듯, 화자도 하늘향해 두 팔을 펼칠 기상이 남아있다.

푸른 산도 산맥으로 지구를 딛고 살고,
화자도 연약한 다리로 부단히(부절히) 도는 지구를 딛고 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일제 강점기. 뼈에 저리도록 슬픈 생활이다.
그러나, 그 슬픔마저 좋단다. 역설적 표현이지.
뼈저리게 슬픈 걸 좋아할 리가 없잖아.
푸른 별, 곧 이상과 희망을 생각하면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비록 현실은 뼈저린 세상에 두 연약한 발 딛고 서 있지만... 

이 시의 주제는 <굳센 삶의 의지와 이상 추구> 정도면 되겠지.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별을 바라보며 살려는 굳센 마음의 다짐이 잘 드러나 있단다.
일제 강점기가 가장 가혹하던 1939년 정도의 시야. 

다음은 그의 아주 유명한 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보자.
맞춤법은 '아십니까'가 옳지만, 그 시대엔 한글 맞춤법이 없던 시대니 그러려니 하고 읽어 보자.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 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로이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이 시를 세 부분으로 나누는 일은 식은 죽 먹기지?
노란 색 칠한 부분이 반복되니 말이야.  

그 첫부분도 역시 세 연으로 이뤄져 있어 총 9연으로 된 시구나.
첫부분에서 역시 중간 부분은
<아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그 나라가 나온단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거기 가서 비둘기를 그리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냈다. 

두번째 부분에서도
<염소, 옥수수, 바다 물 소리 들리고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나라가 나온다.
일본 놈들때문에 못살겠으니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겠지.
거기서 이젠 <어린 양>을 기르자는구나. 

세 번째 부분에서
<비둘기 날고 꿩도 울고 은행잎이 날리는> 그 평화로운 나라가 나오고,
과수원에서 새빨간 능금을 따잔다. 

'또옥 똑' 따는 일은 얼마나 느릿하고 평화로워 보이느냐.
민우도 나중에 아빠가 할아버지가 되어 기르고 있는 과수원에 아이들이랑 놀러 와서,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고 싶은 생각이 드니?
만약 그렇다면...
지금 사는 게 너무 힘들다는 것일 수도 있는데... (아님 말고 ㅋㅋ) 

이 시는 <어머니>라는 청자를 상정하고 <독백>을 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어.
그 어머니와 <이상향, 탈속적 세계, 평화로운 곳>에 가서 살고 싶은 것이지.
현실 세계가 너무 부정적이어서 그런 것이다.
이렇게 다툼을 싫어한 사상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노자>다.
노자는 춘추전국 시대의 피바람을 부정하며 <다투지 말라!(不爭, 부쟁)>이란 주제를 내세웠지.

이 시는 전체적으로 첫부분의 <자유로운 삶>
가운뎃부분의 <순결한 삶>
마지막 부분의 <보람있는 삶>에 대한 소망이 잘 드러났다고 보면 되겠다.
주제는 바로 그런 삶, <이상향의 자연에 대한 동경>이라 보면 되지. 

신석정의 시 중에 그 어두운 시대가 검게 강물로 흐르는 시가 있다.
'어느 지류에 서서'를 읽어 보자.
'지류'는 본류에 흘러들기 전에 흐르는 작은 강을 부르는 말이겠지.
화자의 선 곳이 '중심'이 아닌 '주변, 지류'임을 일컫고 있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어느 지류(支流)에 서서)

강물의 흐름은 보통 <역사>의 상징으로 많이 본단다.
첫 연에서는 (강물아래로) (강물아래로) (한줄기어두운) (이강물아래로)가 반복되는
AABA 구성이 보인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새야 새야 파랑 새야
가시리 가시리 바리고 가시리... 

이렇게 자주 등장하는 패턴이지. 

어두운 강물, 검은밤, 은하수...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상징이겠다.
2연의 '낡은 밤'과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도 마찬가지다.

3연은 다시 반복이 나오고, 드디어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시절로 친다면 <해방>이 가까운 시간에,
자신은 '본류'가 아닌 '구석'에서
다시 푸른 하늘, 해방의 밝은 햇빛을 우러러보겠느냐는 한탄이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어두운 시대였다. 

그러나, 이런 암울함은 조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월드컵 열릴 때, 궁금했던 것은,
한국, 일본, 중국 등은 <국가>가 출전하는데,
<아일랜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는 <클럽>이 출전한다.
지금은 UK(United Kingdom of England)라고 하지만,
아일랜드 사람에게 '잉글리시맨'이라고 부르는 일은,
해방 전의 조선인이게 '일본놈'이라 부르던 일처럼 기분 나쁜 일이라는구나.  

그 아일랜드 출신 중에 '예이츠'란 시인이 있었대.
그의 <이니스프리의 호수섬>을 한번 읽어 보자.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나뭇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들이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으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빛
한낮엔 보라빛 환한 기색
저녁엔 홍방울색 날개 소리 가득한 곳.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예이츠, 이니스프리의 호수섬> 

화장품 브랜드에도 '이니스프리'가 있다.
자연주의~나 비슷한 의미로 붙인 이름이지. 

이 시가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와 유사하지 않니?
벌들이 윙윙대는 숲 속과 평화로운 곳.
아, 나라잃은 것들의 마음은 지구 반대편 아일랜드 사람이나
동쪽 끝의 조선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아일랜드의 시인이 읊조린 노래를 들었을 때, 조선의 시인이 눈물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거야. 

이니스프리는 시인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호수 속에 있는 작은 섬이란다.
이 곳은 히스꽃이 보라빛으로 피어나고 한낮에 햇빛을 받아 이 꽃들이 호숫가에 비침으로써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섬으로 시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래. 

 

                                                               <히스 꽃>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城)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 여섯 해가 지내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噴水)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꽃덤불)

이 시도 역시 일제 강점기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태양>을 의논하던 거룩한 이야기는 물론 <독립>에 대한 것이고,
그것은 '태양을 등진 어두운 곳'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지.

달빛이 비오듯 환하게 쏟아지던 밤.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잃어버린 조국을 슬퍼했겠지.
언제쯤이면 우리 하늘에 온전한(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냐고...
해방의 그 날은 언제나 오는 거냐고... 
가슴이 터지도록 답답해 했더랬지.

그러는 동안에 목숨을 잃어버린 벗도 있고,
먼 타국으로 망명한 벗도 있고,
몸과 마음을 판 배신자들도 생겼단다.

그러다 드디어 1910~1945년의 36년간의 식민지 생활이 끝났다.
그렇지만, 해방이 되었다고 새 세상이 온 것은 아니지.
다시 되찾은 조국의 이 하늘엔
아직도 겨울밤 달이 차갑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이룬 것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연합군이 일본을 궤멸시켰고,
결국 조선을 반으로 나눠가지는 데 합의했기 때문이지.
돌아오는 봄에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가슴가득 안고
어느 아늑한 꽃덤불에서 마음 편하게 지내고 싶다는 바람을 담은 시다. 

군사독재 정권이 무너지면 새세상이 올줄 알았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더라.
일제 강점기에 돈을 가지고 있던 친일세력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땅부자고 알부자다.
그 시대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독립군의 후손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버림받고 살고 있고 말이야. 

이 시는 1946년 6월에 쓴 시라고 한다.
광복을 맞은 기쁨과 새로운 민족국가 수립의 과제를 간절히 노래했지.
이 노래에 담긴 <차가운 겨울밤 달>은 결국 <한국 전쟁>을 일어나게 하고 말았단다.
아직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눈물 속에 살고 있고 말이야.

신석정은 그 어둡던 시대에 이렇게 시로써 작은 등불을 밝히려던 시인이었단다.
누군가는 배신을 하고, 누군가는 도망을 하던 그 시대에 말이지.
자. 이제 일주일 뒤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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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1-02-14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질문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여쭤보고 싶었던 것인데요. 보통 시를 쓸때, 제목을 쓰고, 시인을 쓰고 그 다음에 시 내용을 쓰는데요. 글샘님께서 시를 인용할 때는, 제목을 시 맨 뒤에 괄호 안에 쓰십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글샘 2011-02-18 21:48   좋아요 0 | URL
음... 그건 특별한 이유가 아니구요.
시를 한 편 감상할 땐 시 제목이 맨 앞에 있기도 하지만,
시를 여러 편 해설할 땐, 저처럼 맨 뒤에 제목과 시인을 두기도 합니다.

세실 2011-02-17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으십니까.' 마치 극존칭같은 느낌이예요. 맘에 드는데요.
이니스프리가 그런 뜻이었군요. 아 가고 싶어라 이니스프리~~

글샘 2011-02-18 21:4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시는 눈으로 읽어선 맛이 안 납니다.
입으로 읽어 봐야 '알으십니까'같은 멋스런 느낌이 살아 나죠.
공무원에게 이니스프리는 좀... ㅋㅋ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아닐까요?
화장품 가게나 가시든지... ㅎㅎ

세실 2011-02-19 10:29   좋아요 0 | URL
오홋 그나저나 이니스프리 화장품도 알고.ㅋㅋ
뭐라구욧!! 간다구욧. 퇴직금 받아서..히

글샘 2011-02-19 11:13   좋아요 0 | URL
음... 퇴직금 받아서 아일랜드로 날아가시려면...
건강을 젤 먼저 챙기셔야 할 듯 싶네요. ㅎㅎ
지금은 건강해 보이셨지만, 그리고 관계적 성격은 좋아보이긴 했는데요.(관상쟁이 ㅍㅎㅎ)
세실 님이나 저나 '일'에 대한 성격은 좀 별로인 것 같더라구요.
이니스프리 가시려면, '선배'를 본받진 못할지언정(아마, 그이는 이니스프리 가고도 남을 듯)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이 시간을 잘 살펴야 겠단 생각입니다.

2011-02-17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8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