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봄이 온 것 같은데,
황사 탓인지 세상이 뿌옇다. 

봄이면 몸이 좀 개운했으면 좋겠는데, 몸살인지 피곤하구나.
민우도 건강 잘 챙기면서 생활하기 바란다. 

오늘은 시조를 주로 쓰던 시인 이근배의 조금 어려운 시를 한편 읽어 보자.
제목은 '겨울 자연'이야.
겨울이면 자연이 모두 숨죽인 듯한 계절이잖아.
꽁꽁 얼어붙으면 아무 것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막막한 세상.
그렇지만, 그 자연 속에선 끊임없이 생명력이 약동한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
우선 이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시를 한번 읽어 보자.

나의 자정에도 너는
깨어서 운다.
산은 이제 들처럼 낮아지고
들은 끝없는 눈발 속을 헤맨다.
나의 풀과 나무는 다 어디 갔느냐.
해체되지 않은 영원
떠다니는 꿈은 어디에 살아서
나의 자정을 부르느냐.
따순 피가 돌던 사랑 하나가
광막한 자연이 되기까지는
자연이 되어 나를 부르기까지는
너의 무광의 죽음,
구름이거나 그 이전의 쓸쓸한 유폐
허나 세상을 깨우고 있는
잠 속에서도 들리는 저 소리는
산이 산이 아닌, 들이 들이 아닌
모두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쁨 같은 울음이 달려드는 것이다. <이근배, 겨울 자연> 

시조 시인이라 그런지,
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영원, 무광, 유폐' 같은 단어들이 그렇지. 
그러다 보니 금세 의미가 전달되진 않아. 

한 문장씩 의미를 풀어가면서 살펴 보자.
전체가 의미가 잘 안 들어오면, 부분으로 나눠보면 의미가 들어 오기도 하니 말이다. 

우선 첫 부분. 

나의 자정에도 너는/ 깨어서 운다. 

화자는 '자정'이 되었대.
밤 12시면 잠들 시각이잖아.
화자는 잠들어 쉴 시각인데, 겨울 자연은 깨어서 우는 거야.
여기 이미 화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다 들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불현듯 느끼기를,
나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들려는 이 시각에도,
어떤 존재인가는 아직도 깨어서 맹렬하게 울고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는 것. 
그러면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화자를 발견하게 되는 것.
다음 부분을 계속 보자. 

산은 이제 들처럼 낮아지고 / 들은 끝없는 눈발 속을 헤맨다.  
나의 풀과 나무는 다 어디 갔느냐.

겨울 산.
눈으로 하얗게 덮인 겨울 산은
푸르른 잎사귀로 자신을 장식하거나,
붉고 누른 단풍으로 스스로를 장엄하지 않는다.
하얀 눈 덮은 겨울산은 들처럼 납작 엎드리고,
들에는 끝없이 눈이 내린다.
세상엔 풀과 나무가 다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말았구나.
이런 느낌일까. 

해체되지 않은 영원
떠다니는 꿈은 어디에 살아서
나의 자정을 부르느냐.

해체되지 않은 영원.
좀 멋진 말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의미가 쉽게 와 닿지는 않는 구절이다.
이런 말로 읽어 보자. 

해체는 흩어지는 것이고 풀어지는 것이고 없어지는 것이잖아.
영원은 영원히~ 이런 말이고.
겨울 자연은 지금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있는 존재고,
눈 좀 쌓인다고 해체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야. 

겨울 자연의 '꿈'.
겨울 자연은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히 해체되지 않는 거라고 했어.
그 겨울 자연의 꿈은 떠다니고, 어딘가에 살아 있어서,
매운 겨울 바람이 겨울 나무를 가르는 소리로
자정에,
편히 잠들려는 나의 자정에 나를 부르는 거지.  

대조적으로 설명하자면,
겨울 자연은 영원히 깨어있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존재로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데,
화자는 자정이 되면 금세 잠들어 버리는,
꿈 같은 것 정도야 금세 잊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스스로 돌아보게 만드는 시란다.

이 정도 들어 보고 앞부분을 다시 읽어 보렴.

나의 자정에도 너는
깨어서 운다.
산은 이제 들처럼 낮아지고
들은 끝없는 눈발 속을 헤맨다.
나의 풀과 나무는 다 어디 갔느냐.
해체되지 않은 영원
떠다니는 꿈은 어디에 살아서
나의 자정을 부르느냐.

요기까진 조금 이해가 가니?
그럼 뒷부분을 마저 보자. 

따순 피가 돌던 사랑 하나가
광막한 자연이 되기까지는
자연이 되어 나를 부르기까지는
너의 무광의 죽음,
구름이거나 그 이전의 쓸쓸한 유폐

'따순 피가 돌던 사랑 하나'는 '광막한 자연'이 되었대.
'따뜻한 피가 흐르던 사랑 하나'는 평범한 존재, 일상적인 자연의 하나겠지만,
<광막한 자연>은 겨울인데도 쉬이 얼어붙지 않는 생명력으로 충만한 존재로 변화한 것 같구나. 

일상적이던 자연이,
겨울 자연이 되어 나에게 깨우침을 주기 까지,
너, 겨울 자연은 '무광(無光)'의 죽음을 무수히 겪었을 것이래.
무광의 죽음은 빛도 없이, 영광스런 순간도 누리지 못하고 죽어감을 의미하겠지.
그리고 구름처럼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는 채로,
쓸쓸하고 유폐(아주 깊숙히 가두어 둠)되어 있었던 존재였다고 하는구나.  

파릇파릇 새싹돋고 꽃피우고 광합성하던 나무들이,
한 겨울 광막한 <겨울 자연>이 되기까지는,
그 <겨울 자연>이 자정이 되어 편히 쉬려는 나를 부르기까지는,
영광을 누리지 않고, 쓸쓸하게 걸어왔던 <무욕>의 시간들을 거쳤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뒷부분도 계속 보자. 

허나 세상을 깨우고 있는
잠 속에서도 들리는 저 소리는
산이 산이 아닌, 들이 들이 아닌
모두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쁨 같은 울음이 달려드는 것이다. 

그러나,
잠들려는 화자를 깨운 저 소리,
겨울 자연의 매서운 소리는
푸르던 산도 산이 아닌 것처럼 만들고,
풍요롭던 들판도 들이 아닌 것처럼 만들고,
그리하여,
온 세상이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고 하는구나. 

화자는 자신의 삿된 욕망과 잡다한 일상사에 파묻혀 살고 있었는지도 몰라.
집을 새로 사야하는데,
융자도 얻어야 하는데,
딸내미는 성형수술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외국에 가서 공부하는 아들 녀석도 돈이나 부쳐달라고 해서 속이 시끄러운데, 
그래서 도무지 머릿속이 복잡해서 사는 게 뭔지 모르겠을 때, 

산도 변하고,
들판도 변하고,
세상 만사는 원래 그렇게 변하는 것.
<무상(無常)>한 것임을 겨울 자연이 세찬 바람 소리로 가르쳐 준 건지도 몰라. 

그렇게 겨울 자연한테서 배우고 보니,
융자 얻어서 갚을 걱정은 미리 할 필요가 없고,
딸내미 성형수술할 돈도 그리 큰 돈도 아니고,
아들 녀석에게도 이제 일 년만 부쳐주면 되니 금세 끝날 거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맘이 편안해 지는 거지. 

뭐,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살고,
그러다 보면 한 세월 훌쩍 지나는 것이 삶인데,
맨날 바뀌고 변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뭐,
거기 끄달려서 고민하고 맘 조릴 것 있겠냐는 좀 똥배짱이 생기더라는 이야기인지도... 

그래서 화자는 
<모두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쁨 같은 울음이 달려드는 것이다>라고 표현했는지도 몰라. 

꽁꽁 얼어붙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겨울 자연에서도 생명력은 존재하듯,
모두는 돌고 도는 것.
사라지면 다시 태어나는 것.
이런 생각을 하니,
기쁜 마음이 들어 삶의 시련이나 고난의 울음도 한결 후련하게 풀리는 건지도 몰라. 

화자가 잠들려는 순간 들려온 <저 소리>
그것은 화자가 일상 속에 매몰될 때,
단순한 삶의 오밀조밀한 귀퉁이에 부딪혀 고민할 때,
화자의 마음을 넓고 넓게 만들고,
부드럽고 매끄럽게 만들어 주는 그런 소리인 것 같구나. 

겨울 자연의 저 소리를 통해서 새로운 모습의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노래.
겨울 자연.



민우도 겨울 자연의 소리를 들어 봐.
지금 세상은 누구도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 없어 보이지만,
가만가만 겨울 자연의 소리를 듣노라면,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흘러감을,
순간순간 변화하고 변화하는 것임을,
그래서 너무 깊이 고민만 할 필요는 없고, 
다만 때가 되었을 때 생명력을 꽃피우며 살면 되는 것임을 생각해 보자꾸나. 

이 시는 다소 복잡하지만,
화자인 <나>와
화자를 일깨워주는 존재, <겨울 자연>의 심상에 집중하면서 읽노라면,
그래서 여러번 읽게 되면,
서늘한 겨울 바람같은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시이기도 하단다.
몇 번 읽어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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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다.
31년 전.
우리가 사는 반도의 한 끝에서 독재의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던 날이 5.17의 밤이었다. 

전에 '화려한 휴가'란 영화를 본 적 있지?
이번에 '오월愛'란 영화도 나왔더구나.
잊을 수 없는 오월에 대한 다큐멘터리 같은데,
언제 시간이 되면 같이 보러 가자. 

오늘은 계단을 통해서
기다리는 마음을 간절히 드러낸 곽재구 시인의 시를 한 편 보자. 

강변에서
내가 사는 작은 오막살이집까지
이르는 숲길 사이에
어느 하루
마음먹고 나무계단 하나
만들었습니다
밟으면 삐걱이는
나무 울음소리가 산뻐꾸기 울음
소리보다 듣기 좋았습니다
언젠가는 당신이
이 계단을 밟고
내 오막살이집을 찾을 때
있겠지요
설령 그때 내게
나를 열렬히 사랑했던
신이 찾아와
자, 이게 네가 그 동안 목마르게 찾았던 그 물건이야
하며 막 봇짐을 푸는 순간이라 해도
난 당신이 내 나무계단을 밟는 소리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신과는 상관없이
강변 숲길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곽재구, 계단> 

화자는 강변 오막살이에 살고 있어.
거기 맘먹고 계단을,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하나 만들었다는구나. 

그 삐걱이는 나무 울음소리는,
언젠가
당신이 그 계단을 밟고
내 오막살이를 찾을 때를 위하여
마련해 둔 것이지. 

만약에 당신이 삐걱이는 계단에 찾아오신 그 날에,
화자가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던 신이 찾아오신다 해도,
화자는 그 나무 계단을 밟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구나. 

그리고 신이고 뭣이고,
강변 숲길을 따라 당신을 맞이하러 달려 내려갈 거래. 


아, 이 시만 가지고도
화자가 얼마나 외로운지,
그리고 외로운 공간에서도 얼마나 임을 기다리는지 간절히 느껴지지 않니? 

그 기다림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또 청각적으로 표현한 소재가 뭐겠어? 

그렇지, 계단이지. 

그런데, 여기 '신'이 나오잖아.
신이 내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
그건, 뭐 정확히 단정지어 말할 순 없지만,
신이 내게 주시는 생명이거나 삶의 활력 같은 것일 수 있겠지. 

어쩌면 당신이 오신다고 한다면,
나는 신을 버리고라도
당신을 만나러,
그 계단 소리를 들으며 뛰어갈 거라는 화자의 기다림. 

화자가 간절히 원하는 기다림은 단순히 남녀간의 기다림만은 아닐 수도 있단 생각을 해 보았다.
깜깜해 앞이 한 치도 보이지 않던 어두운 시절.
임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들이 놓고 싶던 계단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의 생명의 샘을 버리고서라도,
당신을 만나러 기쁘게 기쁘게 달려갈 거라는 데서 화자의 진실성이 가득 담겼다. 

다음엔 고3 여학생이 쓴 '그 날'이라는 시를 한편 보자.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경기여자고등학교 3학년 정민경(18), '그 날')


80년 광주에서 있었을 법한,
그 날의 한 사건을 겪은 화자의 독백을 늘어 놓고 있어. 

상황은 이렇지.
자전거를 끌고 출근하고 있는 아저씨의 뒤에서,
어떤 꼬마가 훌렁 뒷자리에 올라타서 자꾸 가자고 그래.
근데, 뒤를 돌아 보니,
총을 든 진압군이 아이를 겨누고 있어. 

아이는 겁에 질려서 눈물 콧물이 나오면서 사촌 형님이라고 둘러대고,
화자는 아니라고 부정했지.
아이는 진압군이 잡아가고 화자는 도망가다가 뒤돌아봤대. 

그 아이가 학생임을 봤고,
그리고는 죄책감에 휩싸여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듣지 못했대.
그래도 자꾸 뒤에서 갑시다~ 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고... 

이렇게 무서운 환경에서 충격을 입어 생긴 심리적 상처를 <트라우마>라고 그런대.
광주 사람들에게 80년 오월은 하나의 큰 트라우마였지.
그리고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 모두에게 광주는 또 트라우마였고... 

이번에 <오월愛>란 영화가 나왔는데,
오마이 뉴스에 이런 기사가 실렸어.
한번 읽어 보렴.

"'피의 일요일'에 일어난 사건은 정당하지 않고, 정당화될 수도 없습니다. 먼저 시위대에 총을 쏜 것은 영국군이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군의 행동에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는 정부를 대신해 그리고 이 나라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지난 2010년 데이비드 캐머론 영국총리가 하원에서 '영국판 광주항쟁'이라고 할 수 있는 '피의 일요일'에 대해 공식 사과한 대목 중 일부입니다. 이후 당시 영국 공수부대 여단장이 사과하면서 무장폭도들의 폭동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피의 일요일'은 38년 만에 명예를 회복하였습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보고문학적 관점에서 철저한 조사와 고증을 통해 충실히 재현한 영화가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블러디 선데이>입니다.

침략과 저항의 역사가 서로 빼닮은 한국과 북아일랜드에서 공교롭게 같은 일요일에 일어난 5·18 광주항쟁과 '피의 일요일'. 하지만 북아일랜드와 달리 오월 광주는 발포 명령자와 행방불명자, 미국의 역할 등 가장 핵심적인 사실들이 1980년 5월 18일 그 날에 여전히 밀봉되어 있습니다. 핏빛 진실로 역사를 기록했던 광주의 그 날을 '주먹밥'과 '공동체'로 재현하며 가장 낮은 곳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다큐멘터리 <오월愛>를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무명씨'들을 위한 영화

<오월愛>는 광주의 안과 밖에 있었던 두 사람, 김태일 감독의 아내와 항쟁 당시 시민방위군으로 활동했던 김춘국(관광버스 기사)씨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당시 이름 없이 참가했던 분들의 기억과 지금의 모습을 통해 30년이 지난 현재 5월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는 김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무명씨'들을 통해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띄웁니다.  

<오월愛>의 사람들은 정치인도 지식인도 종교인도 그리고 행세깨나 하는 민주투사도 아닙니다. 역사가 시민군이라고 부르는 그들은 전남도청 취사조 여고생, 구두닦이 총각, 과일행상 아줌마, 자장면집 아저씨, 택시운전사, 전파상 주인, 시장통 할머니 등 말 그대로 '무명씨'들입니다.

얄팍한 머리보다 일상의 노동으로 오월 광주를 기억하는 무명씨들의 증언은 생생합니다.

"전남방직 어린 여공들이 거리로 나서는데 내 가슴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해서 들어갔제"

"정의를 외치다 피 흘리는 걸 보면 사람은 강해져"

"동네 사람들이 죽어나가니까 이래선 안 되겠다…"

"아이고 말도 못해 사람들이 다쳐가꼬. 그라니까 아줌마들이 열이 바치는 거예요. 어느 아줌마는 물통을 가져다주고…"

"어린 학생들이 배고파 죽겠다고 난리야"

"솥단지 걸어 놓고 금남로에 나갔당께. 주먹밥을 뭉쳐갔고…"

"전두환이 TV에 나올 때마다 울화통이 터져. 속이 뒤집어진다니까."

하지만 기억할수록 오월 광주의 상처가 덧나 고통스러운 것도 그들입니다. "엄마 쪼금만 고생해. 돈 벌어 행복하게 해줄게. 통금 때까지 집에 갈게"하던 아들을 잃은 김길학 어머니는 "제일 마음 아픈 게 도청철거와 (광주가) 잊혀지는 거예요"라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시민군의 시체를 부모들에게 확인시켜주던 당시 기동타격대원은 "저녁이면 한 번씩 기억이 떠올라. 나이 어린 학생들의 주검이 지금도…"라며 지워지지 않는 고통을 증언합니다. 그렇게 광주는 오월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결같이 가난한 삶이지만 그들의 기억은 여전히 다부집니다. '5월의 꽃' 기동타격대원으로 망월동 구 묘역 앞에서 '5월 화원'을 하는 이세영씨는 "그런(주먹밥 공동체를 꾸렸던 5·18 항쟁 10일간의) 세상이 있을까? 우리 가족 묘 같아"라며 그 날의 기억을 가슴에 담은 채 광주에서 살고 있으며, 중국집 주인 양인화씨는 "무엇이 민주주의고 무엇이 독재라는 것을 5·18 항쟁을 겪고 알았다는 거요. 그래서 내 인생이 완전히 디 바뀌었지요"라며 5월 광주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5·18 31주년인 올해 주제는 '관심'입니다. 이 대목과 관련해 김 감독은 양동시장에서 과일노점상을 하는 이영애 어머니를 통해 세상과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아무 씨잘데기 없어.  씨잘데기 없는 소리 때레치고 언능 가브러야. 너도 똑같은 놈이니 다시 오지 마!"

시민군의 존재조차 가물거리며 박제가 되어가는 5월 광주와 우리들의 무관심을 향한 어머니의 일갈은 서슬 퍼런 비수가 되어 아프게 가슴을 파고듭니다.

'가장 완벽한 세상'이었던 5·18항쟁의 주먹밥 공동체

<오월愛>는 5월 광주를 '주먹밥 공동체'로 재조명합니다. "워디 전쟁이 있난는데 지기집 쌀퍼다가 밥해 갖고 밖에다가 뿌리는 놈들이 어디가 있어요. 세계적인 역사를 봐도 그런 데가 없잖아?" 나명관씨가 들려주는 이 말은 학살의 한복판에서도 땀과 피와 웃음으로 희망의 공동체를 일구던 그날의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증언해 줍니다. 공수부대에 의해 고립무원의 지대로 전락한 광주에서 폭력과 공포와 죽음의 아가리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던 때에, 영화는 무명씨들의 증언을 통해 '주먹밥 공동체'의 실체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시민들 스스로 주머니를 털어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고, 상점 주인들은 팔 물건을 나눠주고, 쌀이 있는 집은 쌀을 가져와 주먹밥을 만들고, 심지어 자동차까지 자발적으로 동원하는 등 양인화씨의 말처럼 "니꺼 내꺼가 없"이 '우리 것'만 있는 공동체를 구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랬기에 "도둑도 강도도 항쟁기간 동안은 한 마음"이어서 단 한 건의 범죄사고도 없었으며, 총에 맞고 칼에 찔려 신음하면서도 더 위급한 이들을 위해 병상을 내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어머니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거리에 내놓으면 청년들이 그 주먹밥을 먹고 싸웠으며, 양동이째 길어 온 물로 타는 목마름을 적셨습니다. 그 주먹밥은 아들만 같았던 청년들이 무사하기만 바랐던 어머니들의 애간장과 눈물이 녹아있는 밥이었고, 1980년 5월 27일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마지막 결사항전을 벌이던 전남도청에서 여고생(영화는 김영희라는 가명으로 대신했고, 그녀는 "살아 나왔다는 죄책감, 미안함에 견딜 수가 없더"라며 하염없이 오열했다)들이 핏물로 지어 시민군들에게 나르던 밥이었습니다.

그 낱알 하나하나를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고 건네던 밥이 주먹밥입니다. 주먹밥은 군홧발에 맞선 무명씨들이 생명과 상생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만든 밥이었으며, 저항과 나눔과 자치의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대동 세상을 상징하는 밥이었습니다. 무명씨들의 곁에서 모든 두려움과 분노와 소망을 한데 모아 한솥밥을 지어먹으며 5월 광주를 사수하려던 공동체의 표상이 그 주먹밥이었습니다. 항쟁 다시 문화선전대원으로 활동했던 5월의 화가 홍성담 선배가 보았다던 "가장 완벽한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철거 앞둔 역사의 현장 '전남도청 별관'... "시민의 힘으로 지켜주십시오" 

올해 초 수원지법 안양지원에서는 희한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5월 광주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고 주장했다가 5·18 단체에 의해 명예훼손 등으로 고발된 지만원씨가 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법리해석을 떠나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이 판결은 극우세력들이 5·18 광주항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입니다.

최근에는 5·18 기록물 3만 5000여 건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가운데 한미우호증진협의회 한국지부가 "탈북자들이 600여 명의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서 광주시민을 칼빈으로 죽였다고 진술했는데, 5·18 자료가 기록유산에 등재되면 광주사건의 진실이 은폐된다"며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토록 광주를 훼손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5·18 당시 미국의 역할을 희석시키기 위한 물타기로 읽힙니다.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미국이 훼손되는 것만큼 이들에게 절체절명의 위기는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화에서 유일하게 계엄군 증인으로 나온 당시 20사단 소대장 출신의 이은재 산돌학교 교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광주를 알면 알수록 죄의식이 더 커지고 나는 역사에 빚진 자다, 죄송하고 고마워요. 광주가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줬어. 이분들 대신해 열심히 사는 게 역사적으로 속죄하는 길이에요."

"언제부턴가 광주가 우리 안에 고립되어 있다"는 시민군의 말은 우리 안의 광주에 대해서도 톺아보게 합니다. 영화는 "우리 동지들이 우울증에 밤에 악몽을 꾸다 자살하는 것이 사는 게 아니야. 이게 잊는다고 잊혀지는 게 아니거든"이라는 시민군들과 함께 옛 전남도청 별관 철거를 놓고 5월 단체들 간에 막말과 욕설이 난무하고 있는 5월 광주를 동시에 비춥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5월의 '주먹밥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이겠냐고.

망자들의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기 위해 하나로 뭉쳐야 할 5월 단체들이 스스로 공동체 정신을 파괴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광주로부터 멀어진 우리들의 '무관심한 일상' 또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 무관심은 우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별관'을 철거한 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건설해 '주먹밥 공동체'를 붕괴시키려는 이명박 정부의 들러리 노릇을 해왔으니까요.

시민들의 광장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촛불을 드는데도 연행을 각오해야 하고, 4대강으로 국토가 도륙당하며 민주주의가 신음하는 이명박 정부에서 '별관'은 원형 보존돼야 합니다. 윤상원과 150여 구의 시민군 사체가 나온 그 별관은 주먹밥을 먹고 치켜들었던 민주주의의 횃불이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1987년 6월 항쟁으로 되살아났고 2008년 촛불대행진으로 타오른 5월의 정신이며,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철거 직전의 '별관'을 지키고 있는 무명씨들이 내건 펼침막을 한동안 클로즈업합니다.

'이곳을 철거한답니다. 1980년 5월 그 날의 핏빛 절규를 기억하십시오. 이제 시민의 힘으로 지켜주십시오.'

늙은 어머니들의 노래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영화의 후반부에서 내레이터는 "배운 사람도 배우지 못한 사람도 10일간 모두들 평등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늙은 어머니들은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고 처연히 부릅니다. 30년의 세월도 가로막지 못한 모정의 노래는 "5월의 기억이 우리 안에서 계속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럴 때, 망자에 대한 추모를 넘어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다시 광장에 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수 있다고. 그럴 때, 승자의 역사가 패자의 역사가 되고, 패자의 역사가 사실은 승자의 역사이자 진보의 역사가 된다고.

깨인 새벽 눈 비비고 일어나 잊혀진 이름을 다시 세우는 <오월愛>가 광주를 다시 복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으며, 광주를 넘어 '5·18 정신'의 전국화를 다시금 요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출처 : "전두환이 TV 나올 때마다 울화통 터져" - 오마이뉴스 

아빠는 80년 광주의 학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저 지점이 아닌가 한단다. 

<배운 사람도 배우지 못한 사람도 모두들 평등한 시간과 공간>
그런 곳을 '코뮨'이라고 부르지.
모두가 공동체여서 소외되지 않는 시간과 공간.  

어쩌면 영원히 이뤄지지 못할 꿈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시공간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그런 기회를 만났을 때,
정말 신이 자신을 찾아와서 가장 소중한 것을 선물이라고 내려놓는다손 치더라도,
임을 만나러
그 계단을 밟으며 뛰어내려갈 수도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드는구나. 

5월이 되니 마음이 무거워 몇 자 적는다.
하늘은 맑고 푸르지만,
어디선가 바람은 설렁거리고 우리를 흔든다.
바람은 어쩌면 우리더러
흔들리지 말라고 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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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1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먹먹해지는군요....

글샘 2011-05-18 16:39   좋아요 0 | URL
518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저도 하나의 트라우마죠. ㅠㅜ

마녀고양이 2011-05-1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걱대는... 이라는 단어에서,
이상하게 울리는거예요.
삐걱대는 계단이라는 심상이 희안하게도 그리움, 해묵은 반가움, 슬픔과 함께 다가오네요.

그러게요, 5월, 가정의 달 5월, 슬픔의 달 5월 이예요.
저는 전두환에게 1년 경비 비용 8억 들어간다는 뉴스에 울화통 터져 죽을뻔했습니다. ㅠ

글샘 2011-05-18 16:40   좋아요 0 | URL
그래요.
이 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어가 삐걱대는...이죠.
삐걱대는 계단이 아니라면,
이 시의 계단은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 삐걱대는 계단의 여린 소리만으로도 온갖 심상을 다 부르죠.

pjy 2011-05-19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는것만으로도 울컥 눈물이 납니다...
 

비님,
장엄스레 내리셨다. 

빗방울이
창틀에,
유리창에
톡,
톡,
부딪는 소리는 참 아름답다. 

솨~아~~~
샤워처럼 들리는
천지를 뒤덮는 빗줄기는
답답한 마음을 조금은 시원하게 만들어 주곤 한다. 

오늘은 '가을의 시'를 주로 쓰는,
김현승의 시로 시작해 보자.
우선 <가을>을 한번 읽어 보렴.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김현승, 가을>

가을의 기도에서는 '가을이 되면 호올로 사색적인 기도'를 드리겠다고 했는데,
이 시 <가을>에선 어떤 이야기가 기억에 남니?
아빠는 마지막 연의 <고요한 밤에 고르는 언어의 뼈마디>가 인상적이었어. 

그리고 1연에서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었고,
2연에서 <가을>은 '머나면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고 했지. 

이렇게 봄과 가을을 대조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이 시의 특징이야.
봄은 인생에서 청춘이라면, 가을은 좀 시들해가는 결실의 중년이겠지. 

청춘이란 건,
봄이란 건, 말이야.
숨가쁜 호흡처럼,
조금은 달뜬 호흡으로,
뭔가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아직 이뤄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 뛰는,
이런 거라면 말이지. 

가을, 곧 중년이란 건,
왠지 조금은 쓸쓸하고 서럽게,
외롭고 시들하게,
저 푸른 하늘 멀리서,
찬물결처럼 한 순간에 밀려오는,
왠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이 드는구나. 

3연에선 <봄>은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계절이었는데,
<가을>은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드'는 계절이래. 

청춘은,
심장의 박동 소리가 빨리지는 기대감으로 가득차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
꽃과같이 건강하고 싱그러운 모습으로 가득찬 시기란다.
그래서 버스를 타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쏠려
자기 이야기를 하곤 한대.
건강한 청춘은 꽃잎처럼 아름다운 살결이
그 특징이겠지?
싱그럽고 매끈한 살결이 보드레한 느낌으로 가득한 것이 청춘의 특권이란다. 

반면, 가을은
싱그러운 살결의 희망보다는,
저 멀리 비추이는 별을 바라보면서,
골똘한 생각으로 가득차는 시기를 맞게 된단다. 
그래서 마음 속에 하나의 보석을 깎아 만들듯,
그렇게 정신적인 성숙을 기하는
원숙의 계절이겠지. 

4연에서 봄의 특징은 '눈동자 먼' 것이고, 가을의 특징은 '다문 입술'이래. 
청춘은,
사랑에 빠지면 눈멀어 버리고,
불의를 보게 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곤 하지.
가을은,
자신의 삶의 중심을 잡는 중년의 나이엔,
입을 다물고 마음 속에 하나의 보석을 가꾸는 시기란다.
사랑에 눈멀기엔 많이 원숙해 졌고,
삶 속의 불의도 한순간에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는 나이겠지.  

마지막 연은 조금 까다로워 보인다.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던 시기라면,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르'는 때라는구나.
화자가 '고르던' 시기라고,
과거 회상 선어말 어미 '-더-'를 넣은 걸로 봐서, 지금은 <가을>임을 드러내고 있어.  

이 부분은 시인 자신의 시작(詩作) 태도를 돌아본 것 같아.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른다'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국어로 시를 쓰기 시작하는 사람의 자세지.
어떤 시어를 쓰는 게 더 좋을까?
이런 단어가 좋을까, 저런 구성이 좋을까,
이런 단계의 시인이 <봄>의 시인이었다면,
이제 원숙한 경지에 다다른 <가을>의 시인은,
이적지 써온 노래들을 뒤적거리면서,
<내 언어의 뼈마디>를 추려내는 사람이란다.
'언어 가운데서'의 '언어'는 누구나 다 쓰는 말이지만,
<내 언어의 뼈마디>는 자신만의 사고 과정을 드러내는
철학적인 의미가 담긴 언어가 되겠지. 

이렇게 이 시는 <봄>과 <가을>의 시인을 상정하고,
두 시기에 자신은 어떤 시를 적어 왔던가를 돌아보고 있어.
이렇게 쓰자니,
아빠가 이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가을>의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떻게 가르쳐 왔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니 말이야. 

시인은 <봄>에 공간적으로 가까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땅에 속하는 숨결, 꽃잎, 살 등의 심상을 써 왔대.
그런데 <가을>에는 공간적으로 먼 하늘, 별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먼 곳에 속하는 철학적 <토대>를 형상화하려고 한다는 이야길 하고 있단다. 

이 시를 단순하게 <가을이 주는 그윽한 느낌>으로 읽어도 좋겠지만,
아빠처럼 <인생의 본질>에 대한 의미를 담아서 대조적으로 읽어도 괜찮겠다. 

다음엔 인생이란 어떤 것일지
화려한 것만 인생인지,
하루하루 뚜벅뚜벅 걷는 것도 괜찮은 인생인지,
생각해보는 시를 한 편 읽어 보자. 

드문 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고
가이 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김혜순, 납작납작 ―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이 시의 화자는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고 시를 시작한다.
뭘 걸어 놓고 바라볼까?  
제목으로 봐서, 화가 박수근의 그림이라도 걸어놓고 보는 모양인데,
<드문 드문 세상을 끊어 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고 본단다. 

자신의 삶을,
세상 살이를 드문 드문 - 아주 꼼꼼하고 세밀하지는 않게 - 대충대충... 
시일이 촉박하게 깝치는 것이 아니라,
며칠 내버려 뒀다가... 바라본대. 

그러면 그림속에서 사람들이 살아나지.
그 그림속 인물들은
어쩌면 화자의 생활 속 인물들인지도 몰라. 

흰 하늘,
쭈그린 아낙네 둘.
박수근 화백이 납작납작 물감을 눌러 붙이듯 그렸듯이,
거기 존재하는 인물들은
푸른 하늘을 향한 꿈과도 거리가 있어 보이고,
쭈그리고 앉아 높이 도약하는 삶과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벽위에 납작하게 뻗어있는 물감들 속의 아낙네들.
그들의 삶 역시 푸르르고 솟구치는 삶은 아니었을 거야.
오히려 납작납작 엎드린 볼품없는 삶이었을 거다. 

화자는 가끔,
심심할 때
아내와 아이들도
한 며칠 벽에 붙여 놓는대.
상상이겠지.
자기 아내와 아이들 역시
꿈과 희망보다는
찌든 나날 속에서,
흰 하늘 아래서,
팍팍한 생활을
납작납작 엎드려 살아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 조심스럽게 물어.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아~
하나님은, 대답하실 수 있을까?
대답하시기 민망하지 않을까?
하나님,
도대체 이 인생들은 무슨 재미로 삽니까?
얼마나 초라합니까?
왜 세상을 멋지게 꾸며 주시지 않으십니까?
그래,
이렇게 초라하게 사는 사람들 보니, 어떻습니까? 

건방져 보이는 질문이지만,
화자는 조금 소심하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2연에서는 그림에 대한 묘사가 더 자세해.
발바닥도 없는 인물들이 서성서성 거리는 그림.
서성이는 것은 안정되지 못한 불안감을 드러내지.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삶에 자신감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니 무표정할 수밖에... 

슬그머니 웃다가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서민들의 고단한 삶. 

그리고 다시 물어.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이 납작해진 사람들이
이 볼품없는 사람들과 현실이
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는
끝 간데 모르도록 한없이 펄렁펄렁 날리게 창조하시곤, 

보시기에 마땅합니까?
역시 화자에게 돌아올 하나님의 대답은 긍정적이지 않겠지.   

이 시는 박수근의 <세 여인>을 보고 쓴 시라고 알려져 있어.
여인들은 소외된 서민들이지.
삶의 무게에 짓눌린 서민의 이미지.
과연 이들이 이런 부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니 더 행복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문을 강하게 제기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단다. 

이 시는
'힘겨운 세상살이에 대한 서글픔과 연민'을 박수근의 그림을 통해 드러내는 멋진 시란다.

설의법을 사용한 질문은,
시를 읽는 사람에게,
납작납작 사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골고루 돌아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는 느낌이
<서성서성>, <납작납작>, <펄럭펄럭>을 통해
마구 달려와 닿는 느낌이 들지 않니?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가이 없이 한없이 펄렁펄렁'하는 구절이 입에서 맴돈단다. 

힘없이 세파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어쩌면 펄렁펄렁 하는 의태어를 사용해서
고단하지만 나부낄 수밖에 없는 모양으로 형상화한 것이 기막히지 않니?

 

박수근이란 화가는
생활에 충실한 시골 사람들의 꾸밈없는 모습,
빨래를 하거나 농악놀이를 하는 사람 등을 주로 그렸어. 
그는 사실주의적 화풍을 외면하고,
극도로 평면화시킨 화폭에서 단순한 형태를 절제미 가득하게 형상화하지.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서민의 건강함이 잘 드러나는 그림,
또는 서민의 고달픔이 잘 묻어나는 그림 등으로 평가되곤 한단다.


피곤한 삶의 반복이 우리의 하루하루임은 변함없단다.
그렇지만,
그 하루를 행복한 하루로 만드는지,
불행한 하루로 만드는지는,
그림을 그리는 우리의 몫도 조금 있지 않을까 싶다.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기 귀찮지만,
어린아이들은 빗방울 듣는 소릴 듣기 좋아하고,
장화 신고 물웅덩이에서 첨벙거리기 좋아하고,
우산을 돌리면,
우산살 타고 날리는 물방울 가는 곳을 바라보길 좋아하기도 하잖아.  

김현승의 <가을>에서 삶을 관조하는 냉철한 시인의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면,
김혜순의 <납작납작>에선 구체적인 삶의 모습 속에 따스한 시선을 던지는 시인의 온기도 느낄 수 있었어.
시란 건,
이렇게 때론 날카롭게 세상을 보게 하고,
때론 둥글둥글 세상을 감싸안아 보게 하는 요상한 안경이란다.
그러니 어찌 아니 읽을 수 있으랴~ 하고 읽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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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햇살이 따갑다.
금세 여름이 될 듯 한 날씨더니,
밤이 되자 어디서 스멀스멀 안개가 가득 밀려와 시야를 가득 메운다. 

화단에 예쁜 봄꽃을 가득 사다 심었더니 세상이 다 환해 보이더구나.
그렇게 조그만 변화로도 칙칙하던 화단이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바뀌는 걸 보면 신기해.
그리고 깨끗하게 단장된 화단에선 매일 떨어진 낙엽도 줍게 되고 그렇다. 

관심을 가지고 쓰다듬는 것과
아무런 관심도 없이 처박아 두는 것은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보여줄 수도 있겠다. 
오늘은 딱딱한 시,
딱딱한 것들에 대한 시를 두 편 보자.
딱딱한 것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부드러운 시선을...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海溢)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졌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김기택, 멸치>

이 시는 좀 길어 보이지만,
멸치가 어떤 존재였는지, 지금 어떤 존재이며, 그 속에 어떤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지를
화자의 생각이 옮겨감에 따라 보여주는 '서술어' 중심으로 읽어 보면 쉽게 뜻이 보이는 시야. 

'물결 - 무수한 갈래의 길' - 이었던 멸치.
그러나 인간은 그 멸치의 자연스런 삶을 바꿔버렸어. 

'떼어내 - 긿을 잃고 - 굳어졌던 - 접시에 담긴' - 멸치를 만들어 버렸지. 

그러나, 그 멸치는 지금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지만'
멸치를 상상하면 '바다 - 물결 -  파도 - 해일'을 부를 수도 있는 생명력을 느끼게 된다는 시야. 

딱딱한 것은 죽은 멸치, 반찬으로서의 멸치, 곧 <죽음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그러나 '물결'은 부드럽지. <생명력>을 말하려는 것이겠지. 

멸치떼가 다녔던 바닷속의 길,
그 길은 멸치떼가 만들어가는 것이었지.
그렇게 멸치떼는 길을 만드는 창조적 생명력이었대.
그물에 걸리기 전까지는...

그물은 생명에 반하는, 자연에 반하는 인간의 문명이겠지.
부드러운 물결과 멸치의 길의 물결치는 곡선에 반대된,
꼿꼿한 직선들의 햇빛은 멸치에게서 생명성을, 수분의 부드러움을 탈취해 간단다.
물기의 생명력을 모두 빼앗긴 멸치는
마치 <모래더미>처럼 무기력하게 쌓여있게 되지.

현실 속의 멸치는 이렇게 무기력한 존재지만,
화자는 멸치의 본래적 생명력을 상상하는 힘을 발휘한단다.
굳어져버린 멸치의 뒤틀림 속에 생명력이 약동하는 바닷물의 선율을 추가하는 것이지. 

문명으로 뒤틀려가는 자연의 부드러움을
회복하려는 화자의 상상력이 멸치를 바다로 되돌려 보내는구나. 

교실에서 늦은 시각까지 문제들과 싸우는 전사같은 학생들을 매일 보는 아빠도
그런 생각을 한단다.
원래 들판에서 자라던 이 아이들은
말타기도 하고 뜀뛰기도 잘 하던 아이들이었을 터인데,
교실에서 늘 형광등 불빛에 얼굴이 파리해져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문명은 그렇게 자연 속의 인간도
비정하게 만드는 건지 몰라.
또한 인간의 탐욕은 그런 구조 속으로 자연스럽게 말라비틀어져 가기를 바라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지.  

아빠는 민우가 공부로 꼭 선두에 서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단다.
열심히 살기는 바라지만,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어울리고 장난도 치고 그렇게 사는 평범한 사람이 되길 바란단다.

바퀴벌레에 대한 시도 배웠을 거야. 한번 읽어 보렴.
같은 시인의 시니깐 말이야.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과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러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에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사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어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꺼운 얼음 속 어디 수만 년 썩지 않을 금속의 씨를 감추어 가지고 있었을까.

 로봇처럼, 정말로 철판을 온몸에 두른 벌레들이 나올지 몰라, 금속과 금속 사이를 뚫고 들어가 살면서 철판을 왕성하게 소화시키고 수억 톤의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면서 불쑥불쑥 자라는 잘 진화된 신형 바퀴벌레가 나올지 몰라. 보이지 않는 빙하기, 그 두껍고 차가운 강철의 살결 속에 씨를 감추어 둔 채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 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뜬 채 잠들어 있는지 몰라.  <김기택, 바퀴벌레는 진화 중> 

이 시의 바퀴벌레는 '변화하는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여 생존하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존재'다.
인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살아왔던 바퀴벌레.
아직도 온갖 살충제를 뿌린다고 해도 멸종되지 않는 바퀴벌레.
어쩌면 인류보다 훨씬 더 오래오래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농후한 바퀴벌레에 대한 놀라움으로 시작한다. 

 

살충제와 거친 시멘트 같은 <자연 파괴>에 인간은 휘청거리지만,
바퀴벌레는 까딱도 않아 보이지. 

바퀴벌레의 표면은 금속성의 철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퀴벌레는 아무리 오염된 미래 사회에도 잘 적응할 것 같다는 비판적 시선이 이 시의 기본 기조지.  

인간에겐 치명적인 암회색 스모그, 폐수들이 아직도 바퀴벌레를 멸종시키기엔
너무 깨끗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반어를 쓰면서,
인류가 만들어낸 문화에 대한 비판적 어조를 드러내는 것이란다.

현대 문명이 초래한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해,
화자는 어디에나 보이는 바퀴벌레를 소재로 삼았단다. 

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오염된 종류의 벌레인지도 몰라.
인류가 문화란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온갖 사물들은,
지구에게서 빼앗은 것들인데,
그 수량은 한정적이고,
인간의 문화는 한 순간에 뻥~~하고 터질 수 있는 무기도 만들고 있으니 말이지. 

환경에 대한 관심은 아무리 지나쳐도 넘치지 않을 정도라고 볼 수 있단다.
어쩌면 미래 산업의 대부분은 환경에 관련된 것일지도 몰라.
병주고 약주고... 이런게 어리석은 인간의 삶이니 말이지. 

이제 미끈하면 지나가 버릴 5월이 앞에 섰구나.
모레는 휴일이고, 여러 가지 행사로 바쁘겠지만,
나름대로 시간계획 잘 세워서 보람찬 날들을 챙기기 바란다. 

교실은 멸치처럼 너희를 옥죄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너희들은 나름대로 멸치가 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니 재미있는 고3을 만들어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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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중간고사가 다 끝났구나.
사는 게 그런 것 같아.
세상사는 그저 그런 하루가 반복될 뿐인데,
사람은 늘 그 세상을 분절적으로 바라보는 것. 

1년은 그대로 더워졌다 추워졌다 날씨가 변할 뿐인데,
봄인데 춥다는 둥, 금세 더워졌다는 둥, 인간의 변덕이 쉽게 변할 따름이지. 

오늘은 시인에 대한 시를 두어 편 보자.
전에 김광균 시인의 '노신'이란 시에서,
시인의 고달픈 살림살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있었고,
정희성의 '길'이란 시에서도,  
시인으로서의 삶이 주는 가난한 복을 보여주고,
함민복의 '긍정적인 밥'에서도,
굳이 애써 힘든 삶을 긍정적으로 보려했던 구절이 등장한단다.  

무수히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김광균, '노신' 중>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정희성, '길' 중>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긍정적인 밥)

시인은 남들에 비해서 눈이 밝은 사람일게다.
그러다보니, 남들의 눈에는 쉽사리 보이지 않는 것,
잘 들리지 않는 것들이 보이고 들리는 사람.
그러니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사람.  

관세음보살처럼 세상 사람들(세)의 고난이 보이고(관)
힘겨워하는 소리가 들리는(음) 사람이 시인일 거야.
그저 책을 읽어도 남들은 읽어내지 못하는 구절들을 아파하며 읽어내는 사람들 말이지.

우선 김광섭의 <시인>을 한번 읽어 보렴.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아름 팍 안아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篇)에 2천원 아니면 3천원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天職).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 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 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국은 있는데
타는 놀에 가고 없다. <김광섭, 시인>

제목이 '시인'이다.
화자는 도대체 시인은 뭐하는 사람이지? 이런 의문에서 시작했을 거야.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에 대한 답변이 이 시의 내용을 이루고 있단다. 

1연에서 시인이란 ~~한 '천직'이라고 하고 있구나.
천직이란 하늘이 내려준 직업이란 뜻인데,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거나 힘든 일을 일컬을 때 쓰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업이나, 사람을 가르치는 교직, 성직자 같은 사람들. 
화자는 시인을 그래서 '소중하지만 힘든' 직업이라고 생각한다고 봐도 좋겠지? 

꽃은 피는 대로 보는 시인.
<보는> 행위가 나왔잖아. 관세음의 볼 <관 觀>
관조한다 할 때 그 '관'이야.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지. 시인의 일이란.
이렇다 저렇다 자신의 판단을 억지로 우겨넣지 않고 바라보기.
꽃은 이래서 핀다 저래서 핀다고 욱대기지 않고,
꽃이 피면 피는 대로 보는 시인의 역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는 시인.
여기선 <노래하는> 행위가 나온다.
시인은 '노래부르는' 사람이지.
세상의 모든 힘든 소리<세음 世音>을 다 듣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 
사설 시조 중에 이런 시조가 있단다. 

 

 '이흠'의 시존데... 뜻은 이런 거야.
노래를 만든 사람, 걱정도 많기도 많았나 보구나.
말로 일러서는 다 못 일러서, 노랠 불러서나 풀었던가.
(노래로 불러) 진실로 풀릴 것이라면 나도 불러 보리라. 
노래는 즐거운 노래보다는 힘겨운 시름의 노래가 더 많은 것도 그런 사연인가 보다. 

그 다음 구절에선 세상 가득한 물건도 다 안지 못하여,
전신을 다 시에 담는 시인이 등장해.
세상의 모든 것을 시 안에 담기 위해서는 온몸을 불사르는 노력이 필요하단 이야기겠지.
그렇지만 한 편에 몇 천 원밖에 주지 않는 세상.
시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원망의 마음도 내지 못하고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게 시인이래.

시인은 늙을 때까지 언어를 아끼는 사람이래.
어리석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부터
세상의 슬픔을 다 껴안아 볼 수 있는 늙음까지,
마라토너처럼 장거리의 고독을 안아보는 시인. 
그렇다고 힘겨워하지 않고 '터덜터덜' 꾸준히 가는 자세를 보여주는 시인. 

<쌀알 만한 빛>이라도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 희망의 씨앗을 영원처럼 품고서 사는 시인.
신이 안 날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땐 보는 척도 안 하는
먼산바라기도 좀 하는 시인. 

나무와도 하나가 될 수 있고,
돌과 냇물과도 일체가 될 수 있는,
나무의 소리도 듣고,
돌과 냇물의 마음도 읽어낼 수 있는 <관세음>의 눈과 귀를 가진 사람, 시인. 

연애를 하면 시인이 된다는 말도 있잖아.
그건, 그만큼 세상의 모든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섬세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말일 거야.
아빠가 민우와 시를 읽자고 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란다.
시를 통해 녹아든 세상 이야기를
민우와 나눠보고 싶었던 그런 이유지. 

시인의 삶은 <타는 저녁 놀>처럼 금세 지나가고 없지만,
그의 <시>는 <자국>으로 남아있다는 그런 이야긴가봐.
자국은 있는데/ 타는 놀에 가고 없다... 

 

시인을 드러내기 위해서 '꽃'과 '사랑'을 들먹이고 있지.
시인은 아름다움과 진실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세속적 욕망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그래서 깊은 고독의 늪에서
자신과 싸우는 사람들,
그리하여 평생 오직 인생의 진실이 아로새겨진 시 한 편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르는 사람들임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거란다.

이흠의 '평시조'와 형식은 다르지만,
뭔가 통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지 않니?



다음엔 나희덕의 '귀뚜라미'를 감상해 보자.
이 시는 화자를 귀뚜라미로 설정하고 있어.
지금은 미미한 소리지만,
언젠가는 감동적인 소리로 울려나는 시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담긴 시란다.
한번 읽어 보렴.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나희덕, 귀뚜라미>

1연에서 <매미소리>에 묻힌 귀뚜라미 소리는 아직 노래가 아니라고 했어.
아직은 자신의 시가 세상을 울리는 감동적 시가 아니란 거지. 

2연에서도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할 뿐인 울음.
풀잎도 없고 이슬도 내리잖는 지하도 차가운 바닥,
콘크리트 벽 좁은 틈의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들어주는 사람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은 <숨막힐 듯>한 노랫소리지.
아직은 인정받지 못하는 무명 시인의 처지를 노래한 것 같아 보이는구나. 

한국의 시단은 어쩌면,
능력있고 시 잘 쓰는 사람보다는 서로서로 자기들끼리 편먹고 인정해주는 시인을 쳐주는지도 몰라.
그래서 이런 시를 썼는지도.
어쩌면 가수가 되고 싶은 꿈으로 가득하던 허각 같은 이가,
노래도 제대로 못하는 가수들을 보면서, 이런 시를 읊은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내 소리로 세상을 울릴 수 없어.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이라서...
매미는 높은 나무 위에서
온 세상 사람 다 들으라고
매웁게 매웁게 울어대는 곤충이잖아.
그렇지만, 세상은 늘 한결같지 않은 거야. 수시로 변하는 것. 

가을이 오면,
지금은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겠지?
됐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가득 담긴 노래란다. 

화자 자신이 귀뚜라미로 변신하게 되지.
자신의 울음이 누군가의 가슴에 실리기를,
시인이 자신의 시가 누군가의 가슴에 감동으로 묻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쓴 시겠지.

누구나 지금 자신은 부족한 사람이지만,
언젠가,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바라면서 살아가는 것 같아.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라고 알지?
소파는 '작을 소, 물결 파, 小波'라고 일본의 유명한 어린이 운동하던 분의 이름이래.
고가와라고 읽었을 거야. 아마도... 

엊그제가 어린이날이었잖아.
방정환 선생님이 쓴 동시중에 귀뚜라미 소리란 노래가 있단다.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면서,
어쩌면 더 추워질 겨울을 대비해야 한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셨는지도 모르지.
일제 강점기를 살기는 참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요즘 인기인 아이유란 가수가 있지?
영어론 IU라고 쓰지만, 중국어로 '아이'는 '사랑한다'는 뜻의 동사니깐,
너를 사랑한다는 뜻의 의미도 담고 있겠다. 

어린 나이의 가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음색으로 새로운 음악 세계를 개척해 보이는 모습이 이쁘더구나.
민우도 뭘 하든
자신의 세상을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살자꾸나.
세상은 넓어 보이지만,
또 매미나 귀뚜라미 한 철이듯,
시절은 금세 지나가는 것이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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