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무들을 보았니?
나무들은 비썩 마른 가지들로만 이뤄진 것 같지만,
전혀 바싹 마르지 않았단다.
나뭇가지들은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눈'들을 살찌우고 있더구나.
'겨울눈'이라고 이름붙은 것들이 곧 새싹으로 변신하려고
무대 뒤에서 옷을 갈아입고들 있는 풍경이란다. 

독서실 오가는 길에서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도 한번 쳐다보기 바란다. 
오늘은 아빠가 고등학교 들어가서 배웠던 시 '봄비'를 한번 읽어 보자.
그러면서 '창의적 사고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볼게.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이수복, 봄비)

4연으로 되어있지?
넉 줄로 되어있는 한시를 <절구 絶句>라고 부르는데,
그 각 행을 기, 승, 전, 결구라고 부른단다.
기구는 일어설 起, 곧 상상력을 불러 일으킴을,
승구는 이을 承, 곧 첫번째 기구의 생각을 이어 나감을,
전구는 구를 轉, 좀 어려운데, 이제까지의 생각이나 표현 형식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게 아니라,
                      멀리뛰기에서 '구름판'에서 도약하듯, 상상의 양식을 '비틀어 보는' 의미를,
결구는 맺을 結, 당연히 생각이 전개된 것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구실을 하는 거야. 

이 시도 기승전결의 4단 구성으로 볼 수 있겠다.
4단 구성은 어쩌면 모든 문학의 '종결자' 노릇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을지 몰라.

1연에서 상상력을 불러 온단다.
봄비가 그치면 마음 속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게 아니라,
'서러운 풀빛'이 짙어올 거래.
도대체 화자에게 어떤 서러운 일이 있었던 걸까? 

2연에선 그 상상력을 이어서 더 넓게 펼치는 거야.
화자는 서러운데,
보리밭은 푸르게 변해가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종달새는 조잘거리며 생동감 넘치는 세상을 연출하겠지.
화자가 왜 서러운지 더 궁금하게 만드는 것 같지 않니? 

3연에서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흘러 나가는 듯 보이게 할까?
봄비가 그치면 시샘하며 벙글어져 피어날 고운 꽃밭을 배경으로
처녀애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새로이' 선다고 하고 있단다.
꽃이 피면 원래 여학생들은 몇 명씩 모여서 사진을 찍곤 하잖아.
그래서 어머니들 학창시절 사진 보면 꽃밭에 몇 명 모여 찍은 사진들이 다 있단다.
아빠들은 잘 없어. 아빠들은 돌 위에서 폼생폼사하던 사진들이 더 많거든. ㅋ
나는 서러운데, 그 이야기는 어디로 가고,
봄이 되면 꽃밭에 여학생들이 새로이 서서 사진을 찍을 광경을 상상해 본단다.  

여기까지는 상상이 펼쳐지긴 했지만, 도무지 뭔 얘길 하는겨? 이렇게 되고 있는데,
드디어 4연. 종결을 지어야 겠지?
화자가 '서러운 이유'도 등장하고,
꽃밭의 여학생들이 '새로이' 서는 이유도 등장하면서,
마치 폭포가 그 높은 절벽을 주저하지 않고 뚝! 떨어져 내리듯,
급전 낙하하는 연이란다. 

그 여학생들 또래의 임이 죽은 거잖아.
임은 영정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고,
그 사진 뒤에는 화안한 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데,
현실 속의 임 앞에는
봄이 되면 땅에서 피어오르던 아지랭이처럼,
향 연기만 가득 피어오를 뿐이니... 
생각이 갑자기 아득해지면서 먹먹해지는 느낌이야.  

1연에서 등장한 '마음 속 강나루의 서러운 풀빛'은
고려때, 시를 가장 잘 써서 김부식의 질투를 받아 죽게 되었다던 정지상의 시,
송인(임을 보내며)에서 등장하는 구절이란다.
사물에 화자의 감정을 <이입>한 구절로 유명하지.
정지상의 '송인'도 한번 감상해 보자.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정지상(鄭知常), 송인(送人)>

비 갠 긴 언덕 풀빛 푸른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할 것인가,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이규보의 파한집(破閑集) 수록>

이 시의 기구(제1행)에서 '봄비'의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의 서러운 풀빛'을 가져온 거야.
대동강 가의 가장 큰 도시가 '평양'이고 좀더 하류로 내려가면 '남포'란다.
임을 보내는데 왜 이렇게 펑펑 눈물이 날까?
속된 말로 하면 '뻥'이 좀 심하잖아.
대동강물은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더해져서' 영원히 마르지 않을 거라고 하니 말이야. 

인도에 가면 '갠지즈 강'을 '강가'라고 부르면서 인간의 고향, 어머니처럼 여긴대.
거기에 가면 좀 깨끗지 않은 물인데도 사람들은 성스러운 강물에 몸을 담그고 정화한다는구나.
그런데, 그 옆에서는 나무토막을 쌓아 놓고 시신을 태우기도 한대.
돈이 없어 장작이 부족하면 시신이 다 못타고 남는데, 그걸 짐승이 물고 가기도 한다더구만.
지금은 강물에 유골을 뿌리는 것을 '수질오염'을 우려하여 금지하고 있다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신은 화장해서 강에 뿌리는 것이 일상적이었단다. 

고려 시대는 불교가 왕성하던 시대였어.
불교에서는 고승들도 죽으면 화장해서 들판이나 강가에 뿌리곤 했겠지.
대동강 가에서 '영원한 이별'을 한 사람들의 눈물은 얼마나 슬픈 그것이었을까. 

이수복의 '봄비'의 이별처럼,
정지상의 '송인'의 이별 역시 '사별'이라고 아빠는 생각한단다.
인간들의 '이별'은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옅어지는 것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금세 잊기도 하는 거거든.
김소월의 '진달래 꽃'의 이별도 '사별'일 거라고 쓴 적 있지?
헤어지는 사람에게 꽃을 뿌리고는 밟고 가라는 상황은...
글쎄, 사별의 경우에나 시적으로 어울리는 거란 말이지.

정지상의 '송인'의 이별부터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이별을 계승한 시인으로,
섬세한 한국적인 정감을 '한(恨)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시인으로 이수복을 평가하기도 한단다. 

어제 '상상력'을 이야기하면서
관계적 거리가 '먼 것'을 연결하는 것이 '창의적 상상력'이라고 했던 기억 나니?
오늘은 어쩌면 한국 시 역사상 가장 '이질적인 것 - 그러니깐 둘 사이의 질적 차이가 큰 것'을
바로 은유법으로 가져다 붙인, 그런 시를 한편 읽어 보자.
우선,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을 읽고 이야기 나눠 보자꾸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 김춘수, 나의 하나님>

어떤 느낌이야?
혹시 교회다니는 친구라면,
이 페이지를 확 찢어버리고 싶을지도 모를 일 아닐까?
일반적인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이 아닌,
유일신으로서 절대자인 '하나님'이라고 불렀으니 기독교의 하나님인 것은 틀림이 없는데 말이지. 

이 시를 이해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이 시를 이해하려는 일도 의미가 없는 시란다.
전에 '꽃을 위한 서시'에서 '본질이나 의미 탐구는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이야길 한 적 있지?
우리는 겉보기(현상)만을 할 수 있을 뿐이지,
현상의 본질의 의미를 안다는 일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는 시였단다. 

그렇지만 시를 감상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창의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이니...
우선 이 시의 첫 구절.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이
신도들이 열렬히 믿고 따르면서 인생의 기둥으로 삼고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신성 모독일 수 있겠지.
그렇지만, 화자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신도요, 제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시작하는구나.
그러려고,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을 맨 앞에 얹었겠지?  

세 가지의 은유를 늘어 두고,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 것도 화자는 독실한 신자임을 강조하는 의미라고 볼 수 있겠다.
결코 나의 이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니다!'라고나 할까?

그 다음은 'A는 B다'와 같은 '은유'가 주주룩 나열되어 있다.
그걸 우선 도표로 그려 보자. 

하느님 당신은
= 늙은 비애(悲哀)
=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
=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 놋쇠 항아리
=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 순결(純潔)
= 삼월(三月)에 /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 연두빛 바람

이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할 수 없단다.
도저히 말로는 통하지 않는 지경이 있단다. 

부처님이 제자들을 모아 두고는 연꽃을 한 송이 손으로 들어 올렸다.
아무 말도 없이.
그러자 제자들은 멀뚱멀뚱 쳐다보기도 하고,
서로 마주보며 의아해하기도 했지.
그러던 중, 부처님의 제자 종결자인 '가섭'이 빙긋이 웃었다고 한다.
바로 '염화미소'라는 것이다.
말이 없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이심전심'의 지경이고,
언어가 없어도 소통이 가능했던 '불립문자'의 수준이었지. 

이 시가 이뤄지게 된 배경을 먼젓번 '승무'의 스토리처럼 상상해 보는 일이
어쩌면 염화미소, 불립문자의 가르침을 얻어듣는 길이 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1974년 3월 27일 수요일 날씨 : 흐리고 꽃샘추위로 바람이 맵찬 날

나는 밤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학기 초라, 새로운 학생들을 받아서 가르치느라 매일이 고단합니다.
3월은 '프레시'한 신입생들이 들어와서 학교가 어수선합니다.
새싹은 언제나 그렇게 제맘대로인 것 같다는 생각을 시로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수요엘에는 대학 강의까지 저녁 시간에 겹쳐 몹시 피곤하였던 모양으로,
발바닥이 성냥의 황덩어리라도 된 듯, 불이 일 것처럼 화끈거립니다.

공자님은 주역을 가죽 끈이 세 번 떨어져 다시 묶어가며 읽으셨다지만,
내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읽고 있는 '릴케'의 시집은 다행히 떨어지지 않습니다.
릴케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릴케의 마음 속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끊어지지 않는 기도에 대하여 마음 속 가득히 감동을 느끼게 되는 이유로,
나는 릴케의 시집을 읽고 또 읽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 오셨다 갔는지도 모르는 뒤숭한 인간이지만,
릴케의 시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집니다.
사물 안에서 정확하고도 치밀하게 팽창하는 하나님의 존재가
익어가는 열매 속에서나
여물어가는 곡식 속에서 탄탄하게 보이거든요. 

잠시 쉬어가려 공원 구석 나의 낡은 벤치를 찾아갑니다.
그 벤치 옆엔 가로등이 있어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지만,
의외로 연인들은 가로등 저편에서 속삭이길 좋아하지요.
아뿔싸! 나의 낡은 벤치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벤치는,
어떤 늙은이가 가마니때기를 하나 덮고 이미 점령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들려주신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이를 당신으로 여기라고 하셨다던 말씀입니다.
저 벤치에,
자기 키보다도 짧은 벤치에,
자기 키보다도 훨씬 짧은 가마니를 덮은 늙은 거지에게도 예수님이 내려오신 걸까요?
아, 하나님. 당신은 <늙은 거지의 슬픔>과 함께 하여 주실 건가요? 

안식의 장소인 벤치를 도난당한 듯 빼앗긴 마음은 더 허전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마니 덮은 거지 노인 위에서
예수님, 당신을 만난 이후로 내 발은 화끈 거리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 속에 가득하셨던 당신은,
내 눈을 가로등 아래 활짝 팔을 펼치고 만세를 부르고 섰던
느릅나무 잎새를 우러러보게 하셨습니다.

늘 가로등 밑 벤치에서 릴케의 작은 글자들을 쓰다듬던 제가 안쓰러우셨던 걸까요?
그 가로등 아래 아직도 검은 빛의 느릅나무 그 속에서 당신은 웃고 계셨더랬어요.
아, 하나님, 당신은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으로
어두운 제 눈을 화안한 신록으로 개안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공원을 거쳐 돌아오는 늦은 밤.
구멍가게에서 환희 담배를 한 갑 사서 돌아설 때,
가게들은 문을 닫고 있는데,
내 셋방의 건너편 정육점엔 아직도 벌건 형광등을 켜놓고 있습니다.
아, 거기에는
그 벌건 형광등 불빛 아래에는
내 새끼손가락보다 굵직해 보이는 쇠꼬챙이에 꿰인 커다란 살점들이
굳어져서 덜렁거리지도 않고 매달려 있더군요. 

인간들이 제 배를 불리겠다고,
동물의 시신을 오래오래 보관했다가 먹어 보겠다고,
냉장고 안에 넣어둔 차가운 살점 위로 비치는 붉은 빛의 형광등은,
당신의 존재를 날마다 일깨워주는 교회 첨탑의 붉은 십자가의 불빛 그것이었습니다.
날마다 동물의 비린내를 떠올리던 그 붉은 형광등 조명을 불쾌해 하던 난,
십자가의 붉은 빛이 내 동공을 지나면서 경건함을 불러 일으키듯,
인간 욕망의 제물이 된 돼지의 넓적 다리를 위하여,
또는 소의 심장 옆 갈빗살이나 자유롭던 꼬리를 위하여,
하나님, 당신께서 거기 함께 하고 계셨음을 이제야 보았습니다. 

어젯밤의 내 발걸음과
오늘밤의 내 발걸음은 똑같은 길을 따라 지나온 것이었는데도,
어젯밤에 앉았던 공원 벤치와, 릴케의 시와, 정육점의 붉은 빛 속에선 당신을 만나지 못했지만,
오늘밤 빼앗긴 나의 벤치 덕분에,
<늙은 비애> 위로,
그 벤치를 이불처럼 덮고 있던 <신록의 느릅나무 새싹> 사이로,
정육점 붉은 빛에 얼어 붙은 <커다란 살점>그 빛으로 당신은 제게 오셨습니다. 

아니, 당신은 날마다 제게 오신 것이지만,
그래서 저를 일깨우고 가르치고 옳은 인간으로 살도록 이끌어 주려 하셨지만,
학생들이 우러러보는 실력파 교사로,
대학 강단에까지 선다는 우월감으로,
시인 릴케를 사랑하는 시인이라는 잘나빠진 욕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외면했던 저를 발견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
진정으로 저의 발걸음을 따라서 하나 하나 제 발자국을 따라서
어디에나 함께 임해주셨던 당신의 진심을,
인간의 죄를 대속하려 모든 고통을 짊어지신 예수님 덕택으로, 
죄 사함을 받았지만 당신을 믿지 못했던 저 자신을 그래도 사랑으로 늘 안고 오셨던 당신의 진심을,
이제 십분의 일, 백분의 일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 릴케가 그토록 사랑하였던 러시아 여인 루 살로메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릴케가 모든 사랑을 바쳤으나 결국 완전한 사랑을 위하여 이별을 택한 슬라브 여인을...
릴케가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놋쇠 항아리'같은 슬라브 여인 루 살로메를 말입니다

나는 당신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꿈도 꾸고 싶지 않으며,
당신이 동의하시지 않는 어떤 소망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영광되게 하지 않는 어떤 행위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의 심장은 마리아 상 앞의 한 램프처럼,
아름다운 당신 앞에서 불타고 있습니다. <릴케, ‘루 살로메에게 보낸 편지’ 중>

아아, 하나님.
제가 그렇게도 완벽한 추구의 대상으로 삼는 시인 릴케의 심장을 사로잡아버린 이 여인,
루 살로메에게 바치는 릴케의 이 노래는,
어쩌면 하나님 당신께 바치는 릴케의 사랑과 존경의 표현은 아니었을는지요.
그리고 릴케가 결코 얻을 수 없을 거라고 비탄에 빠져 노래부른,
루 살로메의 마음 속에 가라앉은 <놋쇠 항아리>에는,
닦고 닦노라면 윤기가 반들거리는 놋쇠 그 안에 당신이 계셨던 것이 아니었을는지요. 

꽃샘추위의 바람이 길거리를 쓰다듬고 다니는 깊은 밤입니다.
하느님, 제 차가운 잠자리 곁에서도 함께 하심을 알게 해주신 오늘 밤.
제 기도는 오로지 당신을 위한 감사 뿐입니다. 
당신께 드리는 영광 뿐입니다.  

다음날.  날씨 : 오전에 봄비가 내리고 기온이 많이 올라 포근하게 느껴지는 날 

어제 늦게까지 찬바람을 쐰 탓인지, 삼월의 격무 탓인지,
침을 삼키기 힘든 통증에 깨어 새벽을 지냈습니다.
약국이 문을 열기를 기다려 진통제를 사고, 학교에는 하루 결근을 통보하였습니다.
약이 강했는지, 내가 약했는지,
하나님, 당신의 손길 덕분이었는지, 참으로 단잠을 푹 잤습니다. 

꿈 속에서 루 살로메가 릴케의 사랑을 받아들여 환하게 웃는 즐거움도 맛보았답니다.
슬라브 여인의 놋쇠 항아리는 릴케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고,
윤기가 반들거리며 즐거운 노래라도 부르는 듯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지요. 

좀 원기가 돋았지만, 담배 연기는 삼킬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당에선 주인집 아주머니가 풀린 날씨를 기념하여 송희 목욕을 시키나 봅니다.
송희는 이제 여섯살 난 아가씬데 나랑도 제법 친합니다.
샌샌님~ 하면서 제법 따라붙으면 뽀빠이라도 하나 얻어 걸린다는 재미를 느꼈나 보지요. 

봄비가 살푼 내린 대기는 세상을 더 윤기나게 합니다.
장독대 위에 조금 고인 연못에서도,
부불어 오른 처녀 가슴 같은 목련 나무 꽃봉오리에서도,
하나님, 당신은 반짝이는 웃음으로 세상을 가득 환하게 하십니다. 

송희 년은 물이 뜨겁다는 둥 온갖 소리를 재잘대면서,
목욕통 안에서 떠들어 대고 있나 봅니다.
미닫이 문을 열고 잠시 내어다 보니,
아, 하나님.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목욕통 위로
우리 귀연 송희가 하마나 찬바람에 다칠세라...
화안한 햇살을 가득가득 머금고,
대낮에도 옷을 홀라당 벗고도 너무도 즐거운
뽀얀 속살마다 여리디 여린 순결
함으로 가득찬 송희의 온몸 위로
당신은 가득 뿜어져 내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릴케를 읽으면서도 날마다 그의 고독을,
예술가의 외로움이 뿜어내는 표독스런 언어의 표창들을,
저는 마치 하나님의 은총인 양 자랑하곤 했던 지난 날들을 돌아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어젯밤과 오늘 아침 사이에 제게 내려 앉으셨던 그 모든 순간을
제가 감히 시로 쓸 수 있을까요? 
제 연필의 흑심 위로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의 손을 함께 얹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나의 하나님 

                                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시가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이라고 상상한다면 어떨까?
각자가 만들어낼 수 있는 <나의 하나님> 스토리는 다양하겠지.
그렇지만, 창의적 상상력이란 이렇게 머~얼~~~리 떨어진 것들을,
그 거리를 뛰어넘는 <관계 부여>에 성공하는 일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수학 시간에 배웠던 '뫼비우스의 띠'의 원리를
소설에 넣어 봤던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어느 이동통신 회사의 로고처럼 말이다.  

아빠가 상상하려고 했지만,
저 날짜의 요일이 뭔지는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하겠기에
인터넷에서 '요일 찾기'를 검색해서 알아본 거란다.
이렇게 세상은 상상만으론 안 되는 거고,
연구해야 할 것도 많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 1974년 3월 27일의 요일을 알아보게된 원리... 


 

1. 1974년의 뒷부분 2자리 '74'를 취한다. 
2. 74를 4로 나누어 몫인 '18'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3. 월건수표에서 3월의 월건수 '4'를 취한다.
4. 날 수가 27일이므로 '27'을 취한다.
5. 앞의 네 수를 모두 더하면 '74+18+4+27=123'인데 이 수를 7로 나누어 몫(17)은 버리고 나머지 '4'를 취한다.
                                         (만약, 나머지가 0이면 7을 취한다.)
6. 세기수표에서 1974년은 '0'이다. 이 수를 5.에서 구한 나머지 '4'와 더하여 '4'를 얻는다. 
7. 요일수표에서 4에 해당하는 요일은 <수요일>이다.


댓글(2) 먼댓글(1)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낮에나온반달 2011-02-1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 위의 글이 글샘님만의 <나의 하나님>이란 말이지요?
늘 감탄하지만 또 한번 더 감탄!

봄은 아직이지만 겨울 기운도 스러진 요즘같은 환절기...건강하셔요.

글샘 2011-02-19 17:22   좋아요 0 | URL
도무지 가르칠 수가 없을 때, 제가 쓰는 방법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