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가 지나가는데도 아빠는 몹시 정신이 없이 산다.
지난 주에 수련회를 다녀오고 나니 더 바쁜 것 같아.
리듬을 잃어서 그런지, 아니면 진짜 바쁜 건지...
바쁘다는 핑계 속에서 하루하루가 가고,
집에 오면 픽 쓰러져 자고 그랬구나. 

아들도 피곤하긴 마찬가지겠지만,
아빠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힘을 덜어주는 활력소가 되면 좋겠다. 

요즘엔 수업 시간에 '정체성' 이야기를 하게 돼.
윤동주의 시 비평문을 가르치는데, 정체성이란 말이 나오거든.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알려고 노력하면서 평생을 보내는 존재인 거 같아.
그렇지만, 그 정체, 자신의 본모습을 알긴 참 어렵지. 

오죽하면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의 본모습을 알라. 너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존재 아니냐?" 이러고 물었을까.
자기 점수를 보면 20점 같고, 옆사람 점수를 보면 100점 같아 보여.
내 재산을 보면 100원 같은데 옆사람 재산은 수십 억원 같아 보여.
그렇지만, 아빠는 이런 비유를 쓴단다.
20점과 100원을 가진 사람의 가치는,        1,000,000,000,000,000,000,000,000,000,120이고,
100점과 수십 억원을 가진 사람의 가치는, 1,000,000,000,000,000,000,000,100,000,100인 거라고. 
아랫 사람이 과연 훨씬 더 가치있는 사람일까?
과연 인간의 정체성을 <분별>할 수 있을까?
그 낫고 모자람을? 

성경에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부끄럼을 알고 스스로의 몸을 가렸다고 그래.
과연 '선악과'를 먹은 것이 왜 잘못됐을까?
하느님의 명령을 어겨서?
'선악'을 구별하게 된 것이 무슨 잘못이지?
그것은 바로 '인간의 분별이나 구별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일 거야. 

인간의 불완전하고 미흡한 구별. 차별. 그런 시를 한 편 읽어 볼게.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 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 나갈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 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 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경림, 장자를 빌려 - 원통에서> 
**노령노래 : 러시아 노래, 생활을 위해 러시아 영토로 떠나가는 참담한 실정을 노래한 함경도 민요. 조선 말기 함경도 남자들은 생활이 어려워 흔히 러시아 지방으로 품팔이를 나갔는데, 이 민요에는 그러한 절박한 상황, 즉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 떠나야만 하는 애달픔, 남편을 보낼 수밖에 없는 여인들의 슬픔, 조국에서 살 수 없어 국외로 가야 하는 현실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어.
첫 부분은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바라본 세상.
다음은 <속초에 내려와> 본 세상.
그리고 <잘못보는 인간>에 대한 비판 내지 반성. 이렇게... 

높은 관점에서 잘난 체하면서 보면
인간의 모든 삶의 원리를 다 알 것 같기도 하지.
그렇지만 또 낮은 곳에서 인간의 땀냄새 고름냄새를 맡노라면,
인간에 대해 다 알 것 같던 그 생각이 조금 달라지기도 한단다. 

그래서 마지막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서만, 혹은 너무 가까이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비판을 하고 있어. 

인생을 멀리서만 보고,
"인생, 까짓거 뭐 있어~ 즐기다 가는 거지."하고 까부는 것도 우습고,
인생을 너무 좁게 보고,
"아이고, 공부 끝나니 취직 걱정이고, 취직 끝나면 결혼 걱정이고,
다시 진급 시험봐야 하고, 아이고, 세상은 걱정 투성일세."
이렇게 비관하는 일도 어리석은 일이지.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보고,
그 중간의 관점을 유지하는 일.
이런 일을 '중용'을 지킨다고 하겠지. 

제목이 '장자를 빌려'인 이유는,
[장자] '추수편'에 '큰 앎은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살핀다.'는 글귀가 있대.
진정한 앎은 먼 곳에서도 보고, 가까운 곳에서도 보는 지혜가 있다는 거지. 

아들아.
네 삶을 너는 어디서 보고 있니?
하루하루의 삶의 반복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쉽게 지치고 있나,
아니면, 긴 삶 속의 좁은 지점이라 쉽게 생각하고 있나,
하루를 백년처럼 지겹게나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지,
이런저런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안심도 한단다.
아들을 철석같이 믿는 것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엄마와 아빠는 너를 응원할 것이기 때문이야.
최선을 다해서 사는 아들을 응원하는 일은 당연한 거지.

세상은 이렇게 단순해 보이면서도 복잡하고, 거꾸로이기도 한 거야.
암튼, 아빠는 영원히 아들의 편이고 팬이기때문에
네가 잘 되기를 바란단다.
잘 되는 건,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살고,
재미있는 일 찾아서 즐겁게 살고,
이쁜 아내 귀여운 아기들과 즐겁게 사는 그런 일이겠지. 

물론 멀리서 보면,
세상이 험악한데 혼자서 즐겁게 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또 가까이서 보면,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일의 소중함도 결코 가볍지 않단다. 

오늘은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는 관점들이 보여주는 모순,
그리고 그 모순 사이의 진실을 느껴보는 시를 한 수 읊었어.
바빠도 한 수씩 읊으려 노력할게.

설악산 대청봉을 읽노라니 오세영의 <강물>이 떠오르는구나.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오세영, 강물>
 

너무 전진만을 위한 삶을 살지도 말고,
너무 서두르는 삶을 살지도 말라는 이야기야.
무심하고 텅 빈 마음이 목표에 도달하게 할 때도 있다는 거지. 

신경림의 시나 오세영의 시나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죽자사자 뛰는 삶'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
<통념 속의 정답>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오답>이거나 <답과 거리가 먼 답>일 수도 있는 거야.
이런 시를 통해 마음도 좀 너그럽게 가지고 그러자.
그럴 수 있다면,
매일이라도 시를 읊어야지. ^^
동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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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는 지진으로 깊은 시름에 빠진 이 시각에도,
열사의 중동에선 유럽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침범하는 포성이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왜 저렇게도 피흘리며 싸워서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 하는지... 

리비아라는 작은 나라는 카다피라는 독재자가 오랫동안 집권하고 있었는데,
2월 중순에 민주화 시위를 카다피가 진압하면서 민간인을 살상했던 모양이야.
그런 틈을 타서 국제사회의 돈많은 나라들은 리비아를 이라크처럼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고 있단다. 

맨날 '세계 평화를 위해서 폭탄을 쏘는 미국'은 '민간인을 위해서 폭격'을 감행한단다.
미국 폭탄은 민간인은 안 죽이는 모양이야. 훌륭한 폭탄이지.
왜 세상은 늘 똑같은 식으로 돌아가는지...
어쩌면 미국은 이렇게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나란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대나 힘 가진 자는 더 먹으려 하고,
자기가 <질서>라고 외치지.
못 가진 자는 그 <질서>가 맘에 안 들고, 대들면 다치고...
그 와중에 산중에 들어가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고,
조국을 위하여 충성을 다 바치겠습니다.  하고 아부하는 사람도 있어. 

전자처럼 조용히 살면서 술이나 마시려던 시인 '이백'은 시선으로 떠받들고,
후자처럼 우국충정의 시를 쓰던 시인 '두보'는 시성으로 존경하지만,
막상 조선이라는 나라는 '두보의 시'는 엄청 번역해서 뿌렸지만, 이백의 시는 괄시했단다. 

조선은 왕국이라고 했지?
오로지 왕의 행복만이 중요한 나라.
그러니, 조용히 술마시고 즐기는 삶은 널리 가르칠 <유교>적 질서와 무관한 거야.
오히려 유교적 질서처럼 '말 좀 잘 들어라~'하는 것과는 다르지.
그래서 '두시언해'는 엄청 번역해서 돌린 거란다.  

조지훈의 산중문답을 한 편 보자.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가 아능가)

(마당 가 멍석자리 쌉살개도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 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낚는 맛을
자네 태고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나간 사람
잘 되어 오는 놈 하나 없네
소원이 뭐가 있능고
해마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 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라일이나 잘 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맘을 아능가)

노인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뤄 주신다.

(예 이 맛은 알만합니더)

청산 백운아
할 말이 없다. <조지훈, 산중문답(山中問答)>


이 시는 두보보다는 이백의 시에 가깝겠지?
이백의 '산중문답'이란 시도 있으니 패러디한 거나 마찬가질거야. 

이 시에서 괄호의 역할은 따옴표 " "와 같은 구실일거야.
대화를 말하는 거지. 

앞부분에서 '노인'이 다섯 마디를 했어.
1. 조용히 농사짓는 맛, 자네는 아는가?
2. 그저 조용히 먹고 자는 맛, 자네는 아는가?
3. 늙은 아내와 아이와 조용히 사는 맛, 비웃겠는가?
4. 출세보다 소원은 평화로이 추수하는 거야.
5. 마음 편하게 살도록 정치가가 잘 하길 바래. 이 마음 아는가? 

노인은 '입신양명'하려는 사대부들의 욕망따위는 '그들'의 것으로 치부하고 있단다.
사실 누구나 잘 살고 귀하게 되는 일은 바라고 있는 거잖아.
그렇지만, 누구나 부귀영화를 누릴 수는 없는 거고 말이야.
그러니, 마음 편하게 즐겁게 사는 일에서 '행복'을 찾는 일이 지혜로운 것이지,
굳이 애써 네잎 클로버처럼 '행운'만을 좇는 일은 드문 확률에 기대는 어리석은 일임을 조용히 말하는 거겠지. 

노인과 손님은 막걸리 한 잔만을 권할 뿐.
예, 이 맛은 알 만 합니다.
그 맛이 막걸리 맛인지,
아니면, 산중에서 고요히 사는 삶의 맛인지... 

그런 것을 구태여 밝혀야 쓰겄는가?
청산에 졸고 있는 뜬 구름아. 무어라 꼭 말해야 알겠느냐? 

하~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으랴만,
화자도 <정치가들에게 잘 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세상은 늘 어지러운 곳이란다.
일본처럼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인간 만사 정치와 얽히는데, 그것에 너무 마음쏟다보면 참 허무하고 더럽지. 

오늘은 일요일 밤이니, 간단하게 이백의 원시 <산중문답>을 한번 읽자.

문여하사서벽산(問余何事棲碧山)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
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왜 푸른 산중에 사느냐고 물어봐도
대답 없이 빙그레 웃으니 마음이 한가롭다.
복숭아꽃 흐르는 물 따라 묘연히 떠나가니
인간세상이 아닌 별천지에 있다네. <이백, 산중문답(山中問答)>

전에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서 '왜 사냐건, 웃지요'가 나온 적 있지.
그 원 작품이 이백의 이 시다.  

왜 이렇게 사느냐?
남자라면, 공맹을 본받아 입신양명하여야하거늘...
이렇게 말하는 것이 유교를 공부한 선비들의 이야기지.
그런데, 화자는 그저 웃는대. 

산중에 사는 것이 마음이 한가로우니 말이지.
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인간세계처럼 추하지 않은 별천지가 있다는구나. 

이렇게 7자로 짝이 맞은 정형시를 7언절구라고 한단다.
넉 줄이니 기승전결의 형식을 이루고 있지. 

탈속적인 시의 대표자로 이백을 꼽는다.
그래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는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국가 체계를 왕조체계로 만드는 자들 이야기고,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은 두보따위를 술집에서 읊진 않았겠지.  

고3이라고 맨날 공부만 하라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시기니만큼 성실성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최선입니까?
하는 물음에 그렇다는 답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 

암튼, 우리 최선으로 살자.
최고...보다는 최선을 목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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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2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백의 '월하독작'이 생각난다는~^^

글샘 2011-03-21 01:02   좋아요 0 | URL
자작하지 마시고, 수작합시다. ㅎㅎ

pjy 2011-03-2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중문답 좋습니다..그렇죠~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면 되는게 제 맘인거죠^^; 근데 왜 전 여자 팔자는 뒤웅박으로 들리는지ㅋ
 

내년부터는 토요일이 모두 쉬는 날이 된다던데,
올해까진 아무래도 토요일이 좀 어정쩡한 날이구나.
제대로 공부하기에도 좀 어색한 날.
날씨까지도 하늘이 찌푸렸다.
오늘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난 사람들의 시를 몇 편 보자꾸나.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머언 미개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비, 바람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 그는 치욕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즘생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쏘냐. <유치환, 일월>

이 시의 제목은 <일월>이다.
해와 달, 이것은 인류 역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자로는 날 일(日)과 달 월(月)을 합친 ‘바뀔 역(易)’을 제법 오래 생각해왔어.

인간에게는 늘 바뀌는 환경이 문제였지.
더워졌다가 추워지고, 다시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고,
그 환경에 적응하는 모양이 곧 인류의 역사였단다.
그래서 주(周)나라때 생긴 역(易)을 주역(周易)이라고 부른단다.
주역이란 책에는 ‘막힐 때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 간다’는 말이 나와.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남으려면 스스로를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고,
그래야 오래 견딜 수 있다는 인류의 지혜가 담긴 상징적 책이 주역이란다.  

화자는 어딘가를 찾아가는구나.
그 어디에나 태양이 뜬대.
어느 곳에서든 광명의 세계를 기대하는 화자.

‘미개적 유풍’이 남아있는 곳은 낙후된 곳이라기보다는
화자가 어떠한 곳에 살아도 좋다는 열린 마음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비, 바람, 별들과 잠자고, 근심하고, 열애하는 삶을 살고자하는 화자.
고난, 고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마음이 드러난다.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생명이 사는 땅)을 사랑하되
애련(불쌍하게 생각함)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사는 일은 치욕이기 때문이래.
일제 강점기에 만주 벌판으로 쫓겨가 사는 사람의 마음치곤
독한 구석이 있어 보이지.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
곧, 일제 강점기와 친일파가 존재하던 시대임을 보여주지.
화자는 증오를 예비하고 있어.
그리고 마지막 날,
일본놈들에게 짐승처럼 죽음을 당한대도,
두 눈동자에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우러르며 죽어가기에
살아온 세상에 아무 후회가 없을 거라는구나.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의와 대결 정신이 느껴진다.

일제 강점기 말기(1939년)의 작품이니 그럴만도 해.
아빠도 대학생 시절, 군사독재 하에거 이런 비장한 일기 제법 썼거든.  



치열한 내면의식이 돋보이는 시, 일월.
이 시의 후편으로 불리는 ‘광야에 와서’를 한번 읽어 보렴.

흥안령 가까운 북변의
이 광막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함이러뇨
이미 온갖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의 길에
내 열번 패망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할 사념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차장도 이백 리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 같은 절망의 광야! <유치환, 광야에 와서> 

이 작품은 유치환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가족과 만주로 탈출해서 생활할 때의 경험을 노래한 시래.
'흥안령 가까운 북변의 광막한 벌판 끝'은 '만주'로 볼 수 있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조국을 등지고 만주로 탈출할 때의 심정을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어.
이 시에선 조국을 등지고 새로운 각오로 찾아온 만주 땅이 암울한 곳임을 깨닫고 절망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단다.

'자학·패망·회오'와 같은 관념어가 많이 쓰여서 구체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다시 조국에 돌아가고자 하나 돌아갈 수 없는 처지와
조국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기도 해.
'망나니'는 조국을 등진 행위가 아니라
'광야'에서의 순탄치 못한 자신의 삶을 표현한 말로,
무기력한 화자 자신을 자책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시어야.
'자학의 길'로 연결되어 새로운 삶에서 느끼는 좌절감과 절망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시어지.
조국에 대한 작가의 사랑은 '회오의 삶', '탈주할 사념'에서 보이지.

'미개적 유풍'을 따르며 '성신'과 '비바람'과 더불어 사는
자연적 삶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노래한
그의 '일월'이라는 작품의 후편에 해당하는데,
새로운 삶의 근거지에서 느끼는 생의 절망감을 잘 표현했어.

만주에 가서 미개적 유풍을 따르며 자연적 삶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작가의 믿음과 달리
이 시에서는 '패망의 인생', '절망의 광야' 등에서 보이듯 현재의 삶에 대한 좌절감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어.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단다.
1~9 행에서는 ‘만주에서 겪는 고달픈 생활’을,
10~17 행에서는 자신의 생활에 대한 좌절감과 회한을 쓰고 있지.

유치환의 이 시들은 그의 만주에서의 삶이 잘 반영된 시들이라고 보면 돼.
힘들지만 의지를 가지고 살려는 화자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지.
다음엔 화암사란 절에 가서 깨달음을 얻는 연탄재의 시인 안도현의 시를 만나 보자. 

 

 

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안도현, 화암사, 내 사랑>


화자는 세상살이의 힘겨움을 3연에서 <마음의 흙먼지>란 말로 표현했어.
마음에 흙먼지를 피해서 화자는 ‘화암사’로 떠난단다.
그런데, 그 절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화자는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었어.

그건 바로,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 때문이었다는구나.
세상 살이가 참 힘들고 짜증나는 일 투성이지만,
또 거기엔 화안한 햇빛이 내리쬐이는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지. 



우리가 찾는 행복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지만,
그래서 현실에서 도피하여 어디론가 멀리 가버리려고도 하지만,
우리 삶의 행복은 늘 우리 곁에 있다는 그런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시다. 

이 시는 1연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회의’를 느낀 화자가,
2,3연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한 탐색을 시작하고,
4,5연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발견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구조로 되어 있단다.

화암사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해준 소중한 곳이기에
‘내 사랑, 화암사’란 말로 표현했겠지.
화자가 창작 노트를 남겼다면 이렇게 남길 수도 있었을 거야. 

 

인생에 있어서 행복이란 자는 먼 데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 인생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인생에 있어서 행복이 무엇일까 궁금해져 행복이란 자를 찾아 나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행복이란 자는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더군요.
그 자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으나 그래도 묵묵히 가다 보니 조금씩 실체가 보이더군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정체를 보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운 우리 현실 속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 대답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다음엔 죽도란 섬에 가서 자신을 만나는 화자를 한번 만나 보렴.

오징어는 낙지와 다르게
뼈가 있는 연체 동물인 것을
죽도에 가서 알았다
온갖 비린 것들이 살아 펄떡이는
어스름의 해변가
한결한결 오징어 회를 치는 할머니
저토록 빠르게, 자로 잰듯 썰 수 있을까
옛날 떡장수 어머니와
천하 명필의 부끄러움
그렇듯 어둠 속 저 할머니의 손놀림이
어찌 한갓 기술일 수 있겠는가
안락한 의자 환한 조명 아래
나의 시는 어떤가?
오징어 회를 먹으며
오랜만에 내가, 내게 던지는
뼈 있는 물음 한마디 <유하,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이 작품의 화자는 죽도에 갔어.
가서 회를 먹으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성찰해 보는 거지.
화자는 척박한 현실에서도 삶의 완숙성을 보여 주는 횟집 할머니의 모습과
안락한 삶 속에서 기술자처럼 시를 써 내고 있는 자신을 대조하여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자신의 시가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시란다.  



앞부분에선 오징어 회치는 할머니를 보면서,
오징어에 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뒷부분에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거지.

연체동물은 뼈가 없는데, 오징어엔 뭔가 딱딱한 뼈같은 것이 있는 걸 보고
호기심으로 시를 시작하고 있어.
그러면서 ‘오징어의 뼈’와 ‘뼈 있는 물음’이 맞물리면서,
무언가 오징어보다 못한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내용이 드러나 있지.

'어스름의 해변가'와 '환한 조명'은 대조가 되어
화자가 부끄러워하는 이유를 시각적으로 불러내고 있어.
환한 조명 아래,
마치 홀딱 벗은 것처럼 화자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지.

'오징어 회를 치는 할머니'는 '옛날 떡장수 어머니'로 연결되어
화자에게 깨달음을 주는 계기가 되어준다.
한석봉 어머니의 떡 써는 이야기와 연관지어서,
'천하 명필의 부끄러움'이 '나의 시'에 대한
화자의 반성적 인식으로 이어지고 있고 말이야.

이렇게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는 일을 할 줄 아는 존재라서
다른 동물에 비하면 조금은 고귀한 존재일 거야.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른다면 동물과 다를 게 없는 거지.
자, 다시 주말이다.
지난 주를 돌아보고, 새로운 한 주를 계획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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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잘 흘러 간다.
간절히 기다리면 시간은 더디 가지만,
좀더 잡고 싶어할 때면 시간이 여지없이 물흐르듯 흐르곤 하지. 

민우랑 우리가 만난 것도 벌써 20년이 가까워 오는구나. 
오래오래 함께 살 수는 없는 일이니,
같이 사는 동안 즐겁게 살자. 

오늘은 좀 인생에 대한 자세를 한번 생각해 볼까 한다.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올라 나래 떠는 금성(金星),
쪽빛 하늘에 흰 꽃을 달은 고산식물(高山植物),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굽이굽이 돌아 나간 시름의 황혼(黃昏) 길 위 ―
나 ―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정지용, 그의 반>

처음부터 의문문을 씀으로써 호기심을 부른다.
그를 뭐라고 부를까?
영혼 안에 불을 피워 환하게 비춰주는 존재는 도대체 뭐라고 부를까.
내 눈보다 세상을 더 밝혀 볼 줄 아는 존재를 뭐라고 부를까?  

달, 금성, 고산식물... 이런 것들은 순수함, 멀리 있음의 의미를 담았다.

아마도 그런 존재는 하느님이나 절대적인 힘을 가진 이일 것이다. 
'항상 머언 이'는 화자가 얼마나 하느님을 공경하는지 보여준다.
이렇게 멀리 대하면서 공경하는 것을 <경원>한다고 하지.
외경의 자세로 바라보는 것 같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할 존재가 못 된다.
오로지 수그릴 수 있을 뿐.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을 경건하면서도 겸손하게 감춘다. 
무조건적인 복종의 자세. 그것이 화자에겐 즐거움이겠다.  

절대적이고 완전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대적이며 불완전한 인간의 존재를 <그의 반>이라고 함으로써,
그가 있어야 상대적으로 나는 존재할 수 있음을 표현한 시로 보인다.

다음엔 황지우의 <출가하는 새>를 읽어 보자.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황지우, 출가하는 새>

이 시에서 '새'는 '자취를 남기지 않는 존재'인 반면,
인간인 화자는 '자취를 남기는 존재'임을 자각하며 시작하는 시란다. 

새는 앉았다 간 자리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날아간 자리에도 기척이 남지 않았다.

그걸, <과거가 없는 탓>이라고도 생각해 본다. 

반대로, 화자 자신은 살아온 과거를 보면
자랑스런 일보다 부끄러운 일, 감추고 싶은 과거가 많이 보였나 보다.
그래서 이런저런 부끄러운 과거가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 자취를 부끄러워하며, 새의 과거 없음을 부러워한다. 

체취도 남기지 않고, 눈물도 없이, 빈 몸뚱아리로 살아온 새.
그러나 그 새는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갈 줄 안다.
세상 삶의 바람에 휘둘리는 화자는
새가 자신의 의지대로 바람을 거슬러 가는 기상을 부러워한다.  

태어난 이후의 꿈으로 미래를 읽을 줄 아는 새.
그러나 거센 바람 속에서 미래를 잃어버린 화자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시.

사람이 어떻게 내일의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으랴마는,
새처럼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화자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세속적인 가치에 붙들려 살다보면 온갖 추잡한 흔적만 가득 남기게 되고,
진정한 미래지향적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나는 <그의 반>인 존재이지만,
또 이렇게 현실에서 미약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화자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면서,
<미래를 꿰뚫어보는 눈>을 간직하며 살고자 한다.
그 눈만이 미래지향적 삶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우야, 너의 삶을 네 스스로 설계하는 데 게으르지 않기 바란다.
우리 속에는 모두 <부처>를, <그의 반>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느냐.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가진 삶의 집을 짓는 데 힘을 아끼지 말기 바란다.
그런 것이 아빠의 희망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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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여지없는 봄인데도
기온은 제법 손바닥을 차게 만든다.
겉모습은 이쁘장한게 눈길을 끌지만
성격은 새초롬한 미인같은 쌀쌀한 날씨. 

오늘은 스스로가 쓸모없다고 생각된 김광규 시인이
자신을 어떻게 재탄생시켰는지,
<르네쌍스>가 재탄생의 의미라는데, 그 과정을 한번 읽어 보자.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이 시는 대충 다섯 문장으로 되어 있어 부분별로 보자면,
첫부분에서 <자기 반성>을 하고 있다.
버스에서 뛰어내리는 건, 바로 인생은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다.
어떨 때?
스스로 싸구려 일회용 물건처럼 가치없는 삶으로 느껴질 때.

그럴 때 화자는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대.
현대아파트는 말 그대로 <현대의 문명>이고
털보네대장간은 <전통적 삶의 양식>이겠지.
전통적 삶의 방식이 현대적으로 바뀌면서 잃어버린 인간성, 인간의 가치를
되찾고 싶다는 이야기야. 

풀무질은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야.
무쇠를 불린 시우쇠를 달궈
모루(쇠받침대)위에서 두드려서 날을 만들고(벼리고)
숫돌에 간 '낫'처럼 변신하고 싶대.  

 

현대인으로 살아가면서
모두들 똑같은 표준의 시계 속에서
똑같은 매뉴얼에 맞춰 사느라 가슴이 막힌 화자는
스스로 노동의 도구인 <낫>, 그것도 잘 드는 <시퍼런 무쇠낫>이 되고 싶다는구나. 

다음 부분에선 <꼬부랑 호미>로 변신하여
대장간 벽에 걸리고도 싶다고 하고. 

<무쇠낫>과 <호미>는 노동의 건강함을 대표하는 도구겠지.
농부들은 잔머리를 많이 굴릴 것도 없이,
그저 땀흘려 일하다 보면 결실을 얻던 시대를 살았잖아.
그런 시대가 그리운 화자겠지. 

스스로 부끄러워,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가던 길을 - 남들은 아직도 다들 가는 길을, 멈추고,
어딘가 멈춰선 채 걸려있고 싶대.
그 걸려있는 도구는 생활에 쓰임이 많은 낫이나 호미라면 더 좋겠단 것이고. 
해우소(解憂所)는 '근심을 푸는 곳'이란 뜻으로 불가(佛家)에서 이르는 변소(便所)란다. 

이 시의 화자는 좀더 가치있는 존재로 살고 싶은 소망을 반성과 함께 드러내고 있어.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처럼 여겨질 때,
가치가 재창조되는 <털보네 대장간>에서
자신을 달구고 벼려 쓸모있는 <낫, 호미>로 바꾸고 싶어한단다.
가치있는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고 싶은 것이지. 

이런 삶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자아의 본질을 찾기 위한 의지가 강하게 드러난 작품으로 읽는다. 

담엔, 오세영의 <열매>를 읽어 보자.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땀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 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러운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오세영, 열매>


딱 읽어 보니 <열매를 관찰하고 쓴 시>지?
그럼 이제 <관조>란 말은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화자는 열매가 둥긂을 관찰했단다.
가시나무조차도... 그렇대. 

또 뿌리는 날카롭고, 가지도 뾰족하지만,
열매는 모나지 않고 둥글다는구나.
그러고 보니 그렇지?
그 이유를 뭐라고 가져다 붙이는지 화자의 관찰력을 보자.  

 

스스로 익어 떨어지는 열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열매지. 둥근 열매.
먹는자의 이빨은 예리한데, 열매는 둥글고 부드럽대. 

마지막에 주제를 드러내고 있어.
화자가 독자에게 <그대는 아는가?> 이러고 있지.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대.
먹힐 줄 아는, 희생하는 존재는 모가나지 않는대.

이 시에서 '열매'는 단순한 '결과물, 결실'은 아니지.
원만함, 가득한 충만감의 사랑을 느끼게하는 소재란다.
반대로 가시나무, 가지, 뿌리, 이빨은 해치고 날카로운 소재고. 공격적이고... 

자연을 관찰하면서 인생의 섭리를 깨닫는 거야.
자기 희생적이고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의 성격은 <모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공격적이고 남을 해치는 사람의 성격은 <둥글지 않다>는 것. 

그럼 독자는,
너 아니? 했으니 알아 들어야겠지.
마음을 모나지 않게 궁글려야겠단 것을 말이지. 

자연물 속의 '둥긂'과 '모남'의 대립적 이미지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면서
자연물 속에서 삶의 진리를 깨우치는 <관조>의 시. 열매... 

선생님들이 민우가 수업 잘 듣는단 말을 들으면 나도 기분이 좋단다.
성격이 모나다는 것은 사람들과 잘 부딪친다는 의미도 되지.
친구들과도 선생님들과도 둥글게 사는 민우의 모습을
오래오래 유지하기 바란다. 

간혹 스스로 좀 부족하다고 느끼면,
마음 속 <털보네 대장간>에 가서 좀 벼리기도 하고 말이다.
누구나 마음 속에
<털보네 대장간 하나쯤> 간직하고 살면 삶의 활력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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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3-16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께서는 오세영 시인의 좋은 시를 참 잘 골라내시네요.

글샘 2011-03-17 08:40   좋아요 0 | URL
제가 골라내는 게 아니라, 좋은 시가 많은 거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