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계를 신자유주의 세상이라고 한다.
자유주의가 국가가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라면,
신자유주의는 국가간의 관계에서 기업의 이윤 획득을 국가가 끼어들지 말라는 것일 수도 있겠다.
물론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는 부유한 나라에 가서 힘든 노동을 떠맡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전에는 '국가의 1인당 국민 소득(GNP)'이라는 개념을 썼는데,
언제부턴가 '국가의 총 생산(GDP)'라는 개념을 쓰게 되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생산과 소비의 국가간 장벽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한국 기업은 노동력이 저렴한 중국으로 더 넘어 베트남으로 진출했으니, 그건 한국 국민의 소득은 아니지만,
한국의 생산에는 들어가는 것이다. 

무서운 것은 저런 계산 속에 무기가 수입되고, 전투기가 수입되는 것까지 포함된다는 것이지.
어쩌면 일제 강점기라는 <제국주의 시대>의 드러나는 폭력이 나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
일제나 독재처럼 드러나는 폭력은 때가 되면 민중의 저항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자유주의 경제 활동은 시나브로 민중을 메마르게 만들고 마는 세상이란다. 

오늘 살펴볼 일제 강점기의 <전원 시인> 신석정을 염두에 두고 시작하다 보니 무겁게 시작했다. ^&^
신석정의 가장 순수한 시, '어린 짐승'을 한번 읽어 보자.
옛날엔 교과서에도 실렸던 시였단다.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작은 짐승)

난이는 어릴적 화자의 친구인 모양이다.
아담과 이브가 순수하던 시절에는 옷벗고 살아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고 하더라.
근데, 선악을 구별하게 되는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부끄러워 몸을 가렸다고 하지.
'구별'이란 것은 인간을 순수하지 못하게 하는 측면도 많다는 생각이 들어.
전에 고은 시인의 '어둠'이 <순수와 평화의 경지>라고 한 '눈길'이란 시도 있다고 했지? 

난이와 화자는 어린 시절, 바다가 잘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서 자주 놀았던 모양이다.
이런 시를 <전원>적이고 <목가>적이라고 그래.
시골 이야기고, 목동의 이야기란 이야기지.

반복되어 등장하는 푸른 바다는 서해의 <부안 앞바다>란다.
지금은 새만금방조제가 들어서서 갯벌은 다 벌판으로 변해버린 땅이지.
신석정씨가 지금 살아온다면, 고향 앞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할지도 모르겠다.
이 시의 주제는 <어린 시절의 평화와 순수에 대한 동경>이 되겠다.
어른이 되고 보니 어린 시절의 평화로웠던 생각이 아름답게 떠올랐던 거겠지.

1930년대 식민지 치하의 암울한 현실에서
전원에 의탁해 나름의 울분을 삭이며 저항을 모색했던 시인의 땀과 회한이 그의 시에는 잘 드러나.

김기림은 그를 두고 "현대문명의 잡답을 멀리 피난한 곳에 한 개의 에덴을 음모하는 목가 시인"이라고 평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이 그의 시를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음엔 그의 '들길에 서서'를 읽어 보자.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어니......(들길에 서서)

화자는 자신과 푸른 산을 같은 위치에 놓고 견주어 보았다.
푸른 산에게 구름이 있듯,
자신에게도 푸른 하늘이란 <이상과 희망>이 있다는 거다.
희망이 솟구친다.
옛말에도 <청운의 꿈>이란 말도 있다.
청춘의 젊은 시절에 하늘까지 솟고 싶은 꿈을 이르는 말이리라. 

산삼은 '풍기 인삼' 같은 산삼 말고, <산의 삼림>을 뜻하는 것이다.
산에 나무들이 하늘향해 가지를 뻗듯, 화자도 하늘향해 두 팔을 펼칠 기상이 남아있다.

푸른 산도 산맥으로 지구를 딛고 살고,
화자도 연약한 다리로 부단히(부절히) 도는 지구를 딛고 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일제 강점기. 뼈에 저리도록 슬픈 생활이다.
그러나, 그 슬픔마저 좋단다. 역설적 표현이지.
뼈저리게 슬픈 걸 좋아할 리가 없잖아.
푸른 별, 곧 이상과 희망을 생각하면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비록 현실은 뼈저린 세상에 두 연약한 발 딛고 서 있지만... 

이 시의 주제는 <굳센 삶의 의지와 이상 추구> 정도면 되겠지.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별을 바라보며 살려는 굳센 마음의 다짐이 잘 드러나 있단다.
일제 강점기가 가장 가혹하던 1939년 정도의 시야. 

다음은 그의 아주 유명한 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보자.
맞춤법은 '아십니까'가 옳지만, 그 시대엔 한글 맞춤법이 없던 시대니 그러려니 하고 읽어 보자.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 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로이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이 시를 세 부분으로 나누는 일은 식은 죽 먹기지?
노란 색 칠한 부분이 반복되니 말이야.  

그 첫부분도 역시 세 연으로 이뤄져 있어 총 9연으로 된 시구나.
첫부분에서 역시 중간 부분은
<아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그 나라가 나온단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거기 가서 비둘기를 그리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냈다. 

두번째 부분에서도
<염소, 옥수수, 바다 물 소리 들리고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나라가 나온다.
일본 놈들때문에 못살겠으니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겠지.
거기서 이젠 <어린 양>을 기르자는구나. 

세 번째 부분에서
<비둘기 날고 꿩도 울고 은행잎이 날리는> 그 평화로운 나라가 나오고,
과수원에서 새빨간 능금을 따잔다. 

'또옥 똑' 따는 일은 얼마나 느릿하고 평화로워 보이느냐.
민우도 나중에 아빠가 할아버지가 되어 기르고 있는 과수원에 아이들이랑 놀러 와서,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고 싶은 생각이 드니?
만약 그렇다면...
지금 사는 게 너무 힘들다는 것일 수도 있는데... (아님 말고 ㅋㅋ) 

이 시는 <어머니>라는 청자를 상정하고 <독백>을 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어.
그 어머니와 <이상향, 탈속적 세계, 평화로운 곳>에 가서 살고 싶은 것이지.
현실 세계가 너무 부정적이어서 그런 것이다.
이렇게 다툼을 싫어한 사상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노자>다.
노자는 춘추전국 시대의 피바람을 부정하며 <다투지 말라!(不爭, 부쟁)>이란 주제를 내세웠지.

이 시는 전체적으로 첫부분의 <자유로운 삶>
가운뎃부분의 <순결한 삶>
마지막 부분의 <보람있는 삶>에 대한 소망이 잘 드러났다고 보면 되겠다.
주제는 바로 그런 삶, <이상향의 자연에 대한 동경>이라 보면 되지. 

신석정의 시 중에 그 어두운 시대가 검게 강물로 흐르는 시가 있다.
'어느 지류에 서서'를 읽어 보자.
'지류'는 본류에 흘러들기 전에 흐르는 작은 강을 부르는 말이겠지.
화자의 선 곳이 '중심'이 아닌 '주변, 지류'임을 일컫고 있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어느 지류(支流)에 서서)

강물의 흐름은 보통 <역사>의 상징으로 많이 본단다.
첫 연에서는 (강물아래로) (강물아래로) (한줄기어두운) (이강물아래로)가 반복되는
AABA 구성이 보인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새야 새야 파랑 새야
가시리 가시리 바리고 가시리... 

이렇게 자주 등장하는 패턴이지. 

어두운 강물, 검은밤, 은하수...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상징이겠다.
2연의 '낡은 밤'과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도 마찬가지다.

3연은 다시 반복이 나오고, 드디어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시절로 친다면 <해방>이 가까운 시간에,
자신은 '본류'가 아닌 '구석'에서
다시 푸른 하늘, 해방의 밝은 햇빛을 우러러보겠느냐는 한탄이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어두운 시대였다. 

그러나, 이런 암울함은 조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월드컵 열릴 때, 궁금했던 것은,
한국, 일본, 중국 등은 <국가>가 출전하는데,
<아일랜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는 <클럽>이 출전한다.
지금은 UK(United Kingdom of England)라고 하지만,
아일랜드 사람에게 '잉글리시맨'이라고 부르는 일은,
해방 전의 조선인이게 '일본놈'이라 부르던 일처럼 기분 나쁜 일이라는구나.  

그 아일랜드 출신 중에 '예이츠'란 시인이 있었대.
그의 <이니스프리의 호수섬>을 한번 읽어 보자.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나뭇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들이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으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빛
한낮엔 보라빛 환한 기색
저녁엔 홍방울색 날개 소리 가득한 곳.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예이츠, 이니스프리의 호수섬> 

화장품 브랜드에도 '이니스프리'가 있다.
자연주의~나 비슷한 의미로 붙인 이름이지. 

이 시가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와 유사하지 않니?
벌들이 윙윙대는 숲 속과 평화로운 곳.
아, 나라잃은 것들의 마음은 지구 반대편 아일랜드 사람이나
동쪽 끝의 조선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아일랜드의 시인이 읊조린 노래를 들었을 때, 조선의 시인이 눈물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거야. 

이니스프리는 시인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호수 속에 있는 작은 섬이란다.
이 곳은 히스꽃이 보라빛으로 피어나고 한낮에 햇빛을 받아 이 꽃들이 호숫가에 비침으로써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섬으로 시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래. 

 

                                                               <히스 꽃>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城)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 여섯 해가 지내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噴水)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꽃덤불)

이 시도 역시 일제 강점기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태양>을 의논하던 거룩한 이야기는 물론 <독립>에 대한 것이고,
그것은 '태양을 등진 어두운 곳'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지.

달빛이 비오듯 환하게 쏟아지던 밤.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잃어버린 조국을 슬퍼했겠지.
언제쯤이면 우리 하늘에 온전한(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냐고...
해방의 그 날은 언제나 오는 거냐고... 
가슴이 터지도록 답답해 했더랬지.

그러는 동안에 목숨을 잃어버린 벗도 있고,
먼 타국으로 망명한 벗도 있고,
몸과 마음을 판 배신자들도 생겼단다.

그러다 드디어 1910~1945년의 36년간의 식민지 생활이 끝났다.
그렇지만, 해방이 되었다고 새 세상이 온 것은 아니지.
다시 되찾은 조국의 이 하늘엔
아직도 겨울밤 달이 차갑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이룬 것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연합군이 일본을 궤멸시켰고,
결국 조선을 반으로 나눠가지는 데 합의했기 때문이지.
돌아오는 봄에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가슴가득 안고
어느 아늑한 꽃덤불에서 마음 편하게 지내고 싶다는 바람을 담은 시다. 

군사독재 정권이 무너지면 새세상이 올줄 알았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더라.
일제 강점기에 돈을 가지고 있던 친일세력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땅부자고 알부자다.
그 시대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독립군의 후손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버림받고 살고 있고 말이야. 

이 시는 1946년 6월에 쓴 시라고 한다.
광복을 맞은 기쁨과 새로운 민족국가 수립의 과제를 간절히 노래했지.
이 노래에 담긴 <차가운 겨울밤 달>은 결국 <한국 전쟁>을 일어나게 하고 말았단다.
아직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눈물 속에 살고 있고 말이야.

신석정은 그 어둡던 시대에 이렇게 시로써 작은 등불을 밝히려던 시인이었단다.
누군가는 배신을 하고, 누군가는 도망을 하던 그 시대에 말이지.
자. 이제 일주일 뒤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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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1-02-14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질문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여쭤보고 싶었던 것인데요. 보통 시를 쓸때, 제목을 쓰고, 시인을 쓰고 그 다음에 시 내용을 쓰는데요. 글샘님께서 시를 인용할 때는, 제목을 시 맨 뒤에 괄호 안에 쓰십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글샘 2011-02-18 21:48   좋아요 0 | URL
음... 그건 특별한 이유가 아니구요.
시를 한 편 감상할 땐 시 제목이 맨 앞에 있기도 하지만,
시를 여러 편 해설할 땐, 저처럼 맨 뒤에 제목과 시인을 두기도 합니다.

세실 2011-02-17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으십니까.' 마치 극존칭같은 느낌이예요. 맘에 드는데요.
이니스프리가 그런 뜻이었군요. 아 가고 싶어라 이니스프리~~

글샘 2011-02-18 21:4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시는 눈으로 읽어선 맛이 안 납니다.
입으로 읽어 봐야 '알으십니까'같은 멋스런 느낌이 살아 나죠.
공무원에게 이니스프리는 좀... ㅋㅋ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아닐까요?
화장품 가게나 가시든지... ㅎㅎ

세실 2011-02-19 10:29   좋아요 0 | URL
오홋 그나저나 이니스프리 화장품도 알고.ㅋㅋ
뭐라구욧!! 간다구욧. 퇴직금 받아서..히

글샘 2011-02-19 11:13   좋아요 0 | URL
음... 퇴직금 받아서 아일랜드로 날아가시려면...
건강을 젤 먼저 챙기셔야 할 듯 싶네요. ㅎㅎ
지금은 건강해 보이셨지만, 그리고 관계적 성격은 좋아보이긴 했는데요.(관상쟁이 ㅍㅎㅎ)
세실 님이나 저나 '일'에 대한 성격은 좀 별로인 것 같더라구요.
이니스프리 가시려면, '선배'를 본받진 못할지언정(아마, 그이는 이니스프리 가고도 남을 듯)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이 시간을 잘 살펴야 겠단 생각입니다.

2011-02-17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8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