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좀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시,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을 풀어 보았다.
시를 쓸 때 반드시 필요한 비유의 상황이
그 거리가 가까울 때는 이해가 쉽지만,
관계의 거리가 멀 때... 상상력을 집어 넣어야 한다고 했지. 

오늘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경지.
죽음을 미리 상상하면서 자기 생을 돌아보고는 한 마디로 자신의 <묘비명>을 적는다면
과연 어떤 말을 적는 것이 자기 앞의 생에게 적절할지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스 작가로서 '자유인'을 외친 작가가 있다.
그의 유명한 소설로 '그리스인 조르바'가 있는데 나중에 한번 읽어 보렴.
조르바는 아주 터프한 남자로 뱃사람인데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꿈꾼다.
작가 카잔차키스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런 묘비명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황동규 시인이 그의 무덤 앞에서 읊은 시를 한번 읽어 보자.

꽃 속에 꽃을 피운 부겐빌레아들이
성근 바람결에 속 얼굴을 내밀다 말다 한다.
오른 팔을 삐딱하게 치켜든 큰 검은 나무 십자가 뒤에
이름대신 누운 자가 '자유인'이라는 글발이 적힌 비석이 있고
생김새가 다른 열 몇 나라 문자로 제각기 '평화'라고 쓴
조그만 동판(銅版)을 등에 박은 무덤이 앉아 있다.
인간의 평화란 결국 살림새 생김새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정성들여 새기는 조그만 판인가?
내려다보이는 항구엔 크기 모양새 다른 배들이
약간은 헝클어진 채 평화롭게 모여 있다.
한눈팔며 떠나가는 배도 두엇 있다.
뒤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나직이,
그래, 자유는 참을 수 없이 삐딱한 거야. <황동규, 카잔차키스의 무덤에서……> 

 

그리스는 사파이어빛 푸른 바다와 함께 하얀 건축물들의 대비로 유명하다.
그 건물들을 <카사 비앙카> 또는 <카사 블랑카>라고 한단다.
'카사'는 '집'이란 뜻이고 '블랑카나 비앙카'는 '하얀~'이란 뜻의 형용사지.
왜 해운대에도 '언덕 위의 하얀 집'같은 카페가 그런 뜻이야.
거기 피는 붉은 꽃이 <부겐빌레아>란 꽃이지.
우리집 화단에서 겨울에도 열심히 피고 지는 꽃이 부겐빌레아란다.
분홍빛 꽃받침이 아름다운 그 꽃. 

이 꽃들을 보면 꽃잎 속에 또 꽃잎이 든 것처럼 보인단다.
사실은 꽃받침이 화사하게 붉은 것인데 말이지. 

황동규 시인은 자유를 꿈꾸던 조르바를 만나기 위해 카잔차키스의 무덤엘 갔나 보다.
그렇지만 그곳엔 '자유'와 '평화'가 새겨진 비석과 동판만이 덩그렇게 놓였을 뿐.
정말 자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시인에게 생각하게 만든다.

항구를 내려다보며 평화로운 바다를 음미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나직하게. 그러나 그 낮은 음성이 가슴을 울리는 느꺼움이 있다.
자유는 참을 수 없이 삐딱한 거야. 

똑바로 줄을 설 자유라든지,
오랜 시간 정해진 자세를 유지할 자유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과학에서 '엔트로피 법칙'이란 것이 있단다.
'열역학 제2 법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든 것은 '자유분방한 무질서 쪽으로 운동한다'는 것이 엔트로피 법칙의 개념이란다. 

그렇다면 인간의 속성도 그러한 것일는지...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싶지만,
작은 욕심때문에 현실에 얽매여 살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간혹 그 얽매임을 훌훌 털어 버리고 자유인을 지향하기도 한다.
꿈은 꾸지만, 쉽지 않은 꿈이다.
오죽하면, 죽어서 거기 누운,
말로만 자유인과 평화를 노래한 카잔차키스의 무덤 따위까지 가 보았겠는가. 

그렇지만 그의 무덤에 꽃다발 하나 바치는 것도 자유를 향한 작은 몸짓임까지 부정하긴 어렵다.
다음엔 이성부의 '슬픔에게'를 한번 읽어 보자. 

섬 하나가 일어나서
기지개 켜고 하품을 하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느냐.
바다 복판에 스스로 뛰어들어
그리움만 먹고
숨죽이며 살아남던 지난 십여년을,
파도가 삼켜버린 사나운 내 싸움을,
그 깊은 입맞춤으로
다시 맞이하려 하느냐.
그대,
무슨 가슴으로 견디어 온
이 진흙투성이 사내냐 ! <이성부, 슬픔에게> 

화자가 있는 곳은 어딜까
섬이 내려다 보이는 해변이겠지.
거기서 섬을 바라보고 있다. 

제목은 <슬픔에게>이다.
화자는 <슬픔>에게 무슨 말인가를 던지려 한다.
그런데, '슬픔'은 그 말을 들어줄 귀가 없다. 슬픔은 이야기를 들을 대상이 아닌 것이다.
화자가 하는 이야기는 결국 '슬픔'에 대한 이야기이다.
누군가의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 짐짓 <슬픔에게> 털어놓는 이야기처럼 꾸민 것이다. 

3행까지, 의인법이 제법 멋지게 표현되고 있다.
섬 하나가 일어나고 하품도 기지개도 켜고, 걸어나온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은 화자다. 

그 섬의 내력이 다음 문장에서 진술되고 있다.
<미스터 섬>은 바다 복판에 스스로 뛰어들었다.
그리움을 먹고 숨죽이며 지난 십여 년을 살았다.
파도에 맞서 사나운 싸움을 벌인 십여 년.
이제 다시 새로운 싸움을 앞에 두고 있다. 자못 긴장된다. 

<미스터 섬> 그대는,
온 가슴에 진흙투성이로 남은,
상처투성이 가슴으로 어떻게 견디어 온
힘겨운 투쟁조차도 강인함 하나로 견디어낸, 그런 사내인 것이냐!  

 

한국 현대사에서 이런 단단한 '섬'같은 존재는 여럿 있었다.
그 섬의 상처투성이 가슴이 슬펐던 일도 참 여러 번 있었다.
그렇지만, 이 시를 읽으면 마음에 떠오르는 인물 중에 '고 노무현 대통령'이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를 떠올리면 가슴 한 구석이 아스라히 쓰라려 온다.
그런 사내의 삶에 대한 화자의 감상이 <슬픔>이기에 <슬픔에게> 편지보내듯 시를 쓴 모양이다. 

이 진흙투성이 사내 대신에
앞서 노래한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그 자유를 갈구하던 사람을 대입해 보아도 멋진 그림이 그려진다.
다음엔 김광규의 '묘비명'을 읽어 보자.
묘비석에 새겨둔 글귀란 뜻이다.

한 줄의 시(詩)는 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김광규, 묘비명(墓碑銘)>

이 시를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앞부분은 <훌륭한 비석>에 대한 이야기이고,
뒷부분은 <시인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사를 가장 고귀하게 노래한 시는 커녕,
잡담 같은 소설도 읽은 바 없지만,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 있었고, 그는 <훌륭한 비석>을 남겼단다.
문학도 몰랐던 속된 사람에게 '훌륭한'을 붙였으니 비꼬는 <반어법>이 되겠다.
겉만 번지르르한 그 비석은 사실 보잘것 없는 '저급한' 비석일 뿐이다.
그렇지만 세상이 추구하는 바는 그렇게 돈과, 명예와, 번지르르한 비석으로 흘러감을 비평한 것이겠다. 

그리고 유명한 문인 하나가 물론 많은 돈을 받고서는
그 번지르르한 무덤의 주인을 위해 '묘비명'을 썼다. 
유명세를 타고 세상에 아첨하여 돈버는 자를 일러 <곡학아세>라 한다. 

돈 많이 받은 문인이 읊은 것은 이러하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그렇지만 화자는 그 묘비에 새긴 것(묘비명)이 못마땅하다.
이 묘비는 오래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가치가 없는 것인데도,
세상은 돈으로 칠갑한 그 묘비를 추구하며 달려간다. 

마지막 부분의 목소리는 화자의 목소리겠다.
역사는 무엇을 기록하고, 시인은 어떤 무덤을 남길 것인가 하고...
역사는 과연 승자의 기록만을 미화할 것인지,
시인의 보잘것 없는 무덤은 퇴색하고 말 것인지... 

지나치게 <물신 숭배>, <세속적 부와 지위 숭상>으로 흘러가는 세태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시를 쓰기위하여,
김광규는 <묘비명>을 이용하여 반어적 표현을 하고 있다. 

유명한 노래로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묘비명(EPITAPH, 에피타프)이란 곡이 있다. 
그 노래 가사를 한번 음미해 보면 좋겠다.

예언자들이 그들의 예언을 새겨 놓았던 벽에 금이 가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악기 위에 햇빛은 밝게 빛납니다 

The wall on which the prophets wrote Is cracking at the seams.
Upon the instruments of death The sunlight brightly gleams. 

모든 사람들이 악몽과 꿈으로 분열 될 때
아무도 월계관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침묵이 절규를 삼켜버리듯이...

When every man is torn apart With nightmares and with dreams,
Will no one lay the laurel wreath As silence drowns the screams 

금이가고 부수어진 길을 내가 기어갈 때
혼란이 나의 묘비명이 될 것입니다 

Confusion will be my epitaph.As I crawl a cracked and broken path

우리가 모든 것을 할수 있다면 뒤에 앉아서 웃기나 할텐데
울어야 할 내일이 두렵습니다.

If we make it we can all sit back And laugh.
But I fear tomorrow I’ll be crying, Yes I fear tomorrow I’ll be crying.

운명에 철문 사이에 시간의 씨앗은 뿌려졌고
아는 자와 알려진 자들이 물을 주었습니다.

Between the iron gates of fate, The seeds of time were sown,
And watered by the deeds of those Who know and who are known;

아무도 법을 지키지 않을 때 지식이란 죽음과도 같은 것
내가 볼 때 모든 인간의 운명은 바보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Knowledge is a deadly friend When no one sets the rules.
The fate of all mankind I see Is in the hands of fools.

바보같은 인간들이 권력을 잡고 세계를 뒤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서,
운명의 씨앗은 이미 뿌려졌고,
비극적인 미래가, 울어야만 할 미래가 두려울 뿐이란 노래지. 

어쩌면 비극적인 가사보다도 더욱 심금을 울리는 음악이 듣는 사람을 전율하게 만든다.
이런 음악을 들을 때,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는 격언이 실감난단다.


 

유명한 묘비명 몇 개 소개하고 오늘은 고만~~ 

    

릴케는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뭐니뭐니 해도 묘비명의 종결자는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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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2-20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계의 거리가 멀때...상상력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말, 공감합니다.
전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읽으면서 무한한 상상력을 봤어요~^^

글샘 2011-02-21 17:16   좋아요 1 | URL
요즘 저도 이책을 읽고 있습니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대하여 알려진 것도 워낙 얼마 안 되지만요.
세종대왕, 정조의 르네상스... 날조된 느낌이 크죠. 지네 관점에서 보면 그렇단 건데 말입니다.

양철나무꾼님 리뷰에도 무한한 상상력은 가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