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조지훈의 시를 살펴 보자.
우선 지지난해 수능에도 등장했던 '승무'를 보자.
이 시는 정말 유명한 시여서 줄줄 외울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란이 깎은머리
박사(薄紗)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닢 닢새 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하늘 한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여저 감기우고 다시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 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조지훈, 僧舞>

뭐, 교과서에도 실려서 다들 알고 있는 조지훈의 승무란다.
익숙한 시인데, 학생들에게 이 시를 이해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더구나.
그래서 아빠는 이 시 수업하기 전에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단다.
애들이 다들 긴가민가 하고 듣는데, 사실은 지어낸 이야기야.

화자는 30대 중반쯤의 신문 기자쯤 됩니다.
절간에 어떤 스님과 승무에 대한 취잿거리를 만들 일이 있어서 절에 하루 묵습니다.
초저녁에 개울에 나가 땀을 식히고 있는데,
조용조용한 걸음의 한 비구니를 만나죠.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이었는데,
저녁을 먹고 나서도 마음 속에 계속 비구니의 표정이 남아있습니다.
무슨 사연으로 스님이 되었을까...
괜히 마음 속이 짠해집니다.

그러다 밤이 이슥해서 부처님께 바치는 공양으로 '승무'가 펼쳐집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이 기자는 줌렌즈로 당겨가면서 승무를 촬영하곤 하는데요.

아,
승무를 준비하는 스님이 아까 그 비구니인 거예요.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왜인지...

얇은 비단으로 하이얀 고깔을 접어 쓴 모습,
뷰파인더로 보인 그 모습은 한 장의 나비였어요.
아, 중력의 지배에 개의치않고,
공기의 저항을 최대한 이용해 나풀거리며 공기 속의 계단을 찾아가는 나비 말이죠.  



스님의 두 뺨으로 불빛이 비치는데, 왠지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그 눈물은 여승의 눈물인지, 뷰파인더를 바라보고 끔쩍이는 기자의 눈물인지, 분간도 안 가지만요.

텅 빈 무대에 노란 촛불 둘이 말없이 녹고 있습니다.
고요,
원시적인 고요함이 지배하고 있어요.
아주 정적이죠.
뷰파인더 안에서 간혹 한들 흔들리는 촛불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정지한 상태 같습니다.

오동잎 잎새에 달빛이 비친 배경으로, 드디어,
승무가 시작됩니다.
긴 한삼자락을 휘감아 하늘을 가리웁니다.
어쩌면 나비처럼 중력감이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에요.
이제 뷰파인더에 스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아름다운 알록달록 의상에
화려한 손동작이 아름다웁게 가득 찼습니다.

그러다, 작가는 찍었어요.
새초롬하게 내민 외씨같은 버선발 한 쪽.
여승은 동작을 줄이고,
천천히 슬로우 슬로우... 데드 슬로우로...
여리게 여리게 피아니시모로...
먼 하늘 한개 별빛을 응시합니다.

작가는 다시 비구니의 얼굴에 초점을 맞춰요.
아~ 그러다 보고 말았어요.

그 이쁜 복사꽃 두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 맺힌 것을...
찰칵찰칵찰칵, 연속 사진으로 그 방울을 잡아내려 계속 찍습니다.
세상사에 시달린 한 가냘픈 인생이,
어쩌다 머리를 밀고, 번뇌를 별빛으로 보내는 승무를 추고 있는 것이냐!
아, 인생의 사닥다리는 어디에서 끊어져있는지 알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다시 동작은 이어집니다.
나어린 여승의 동작치고는 무척이나 유연하고 장엄해요.
그래서 그 동작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합장이라도 해야할 듯 한 느낌이랄까?

시간은 점점 흐르고 밤이 깊어 귀뚜라미 소리도 어디선가 들리는데요.
다시 스님의 모습으로 가득한 뷰파인더 안에는,
한 마리 나비로 정지한 여승의 모습이 잡힙니다.
처음의 나비와는 조금 다른 나비죠.

번뇌를 별빛에 의탁하고 난 후라서 그런 걸까요?
뭔지 모를 애상감에 젖어들게 만드는 장면입니다.

이런 이야기야. 어때?
조지훈의 승무,가 그림으로, 아니, 사진으로 가득 마음에 들어차지 않니?

이런 시를 그냥,
주제 : 승무를 통한 속세의 번뇌의 종교적 승화
이렇게 외워버리면 재미없잖아.

빈 칸을 조금 메워보고,
그러면서 시를 익숙하게 끌어안고 쓰다듬고 그 부드러운 언어의 결을 느끼는 거야.
그게 시를 읽고 감상하는 법이란다.

좀 느껴지니?
매끈거리면서 보들보들한
어쩌면 어린아이 젖살에서 나는 향기라도 맡아질 것 같은 시의 냄새가...  



아빤 이렇게 눈을 감고 마음 속 시각적 심상으로 시를 감상하다 보면,
시가 마음 속 가득 들어차는 것 같단다.
지어낸 이야기 부분을 읽고 다시 <승무>를 읽어 보렴.
왜 이 시의 주제가 <승무를 통한 속세의 번뇌가 종교적으로 승화됨>인지...
그 여승의 눈에서 굴러 떨어지는 눈물의 의미가
그 아름다움 속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의 <역설>이 어떤 마음일지 말이야. 

고와서 서러워라...
번뇌는 별빛이다... 이런 게 모두 역설적이잖아.
다음엔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하나 들어 보렴.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
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
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
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石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돌문이 생긴 곳들이 있겠지.
그 돌문을 보고 이 사람은 이런 상상을 한 거야. 

이 시는 조지훈이 그의 고향 경북 영양 일월산 황씨 부인 사당에 전해지는 전설을 소재로 하여
풀리지 않는 원한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야.
그 전설의 내용은 이렇대.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처녀는 그녀를 좋아하던 두 총각 중 한 사람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신혼 첫 날 밤 잠들기 전 화장실을 다녀오던 신랑은 신방 문에 비친 칼 그림자를 보고 놀라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 칼 그림자는 다름 아닌 마당의 대나무 그림자였대요.
그런데도 어리석은 신랑은 그것을 연적(戀敵)이 복수하기 위해 숨어 든 거라고
그 그림자가 자신을 죽일 거라고 오해한 거였대요.
신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족두리도 벗지 못한 채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답니다.
결국 신부는 깊은 원한을 안고 죽었는데,
그녀의 시신은 첫날 밤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오랜 후에 이 사실을 안 신랑은 잘못을 뉘우치고 신부의 시신을 일월산 부인당에 모신 후
사당을 지어 그녀의 혼령을 위로하였답니다. (일월산 황씨 부인당 전설)

돌문을 보고 시인은 기다리던 여인을 떠올린단다.
<창의적 상상력>이란 가까운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먼 것을, 유사점을 발견하여 관계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창의적인 것이지. 

그래서 누구나 경치 좋은 곳의 돌문을 보고 '아, 경치 좋다~'하고 말면, 그건 꽝의적인 거지.
그 돌문을 보고, 전설 속의 <기다림>을 떠올리는 사람. 이런 게 창의적이야.
미래 세계에 가장 필요한 속성이라는 창의력. 

창의적 사고력에는 '논리적 사고, 관계적 사고' 등등이 있는데,
논리적 사고는 뭔가를 분류해서 늘어놓는 거래.
근데, 분류하는 데도 창의적인 분류가 필요하고,
관계를 맺는데도 거리가 먼 것의 유사성을 <유추>해 내는 능력이 창의적 논리력이 되는 거지. 

그렇게 보면,
미래를 준비하는 데 시만한 것도 없을 것 같구나.
시를 읽고,
이 시를 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한 건지... 생각해 보는 것이 창의적 사고력의 발단이거든.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 같은 구절도 멋지잖아.
다른 사람들은 절벽에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위의 부분을 보고 캬~ 하고 말 것을
시인은 전설과 관련시켜서 신방(新房)이 있는 계단 위를 상상하잖아.
거기 '검푸른 이끼가 앉'은 건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임이 오지 않았음을 연상시키고 말이야. 

상상 속 신방에서 촛불을 켜고 기약 없이 신랑을 기다릴 신부의 마음을 상상하는 시인의 눈엔
화강암 단단한 돌문이 얼마나 안타까이 보였겠니?
아, 저 돌문이 열리려면, 그 신랑이 와서 살포시 보듬어 줘야 할텐데 말이다... 이러고...
아이고, 짠한 사람 눈에는 짠한 사람만 보인다더니... 

천년이 지나도 눈감지 않는 데서 '한'이 서서히 응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길숨한 속눈썹의 방울 이슬은 상상 속의 신부가 기다림에 지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야.

'돌문이 있습니다'로 시작해서
중간 부분에 전설을 삽입하고
마지막 부분에 '돌문이 있습니다'를 반복하면서 아련한 여운을 만드는 효과를 만들고 있구나.

이 시에선 시인과 화자의 시점이 다르지.
화자는 신부의 시점이란다.
'당신'과 '저희'에 표시해 두었으니 한번 느껴 보렴.
당신이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신부, '나'의 슬픔을 말이야.

이 시의 주제라면 '석문을 보고 느낀 전설 속의 끝없는 기다림과 한, 풀리지 않는 원한' 같은 것이지.
이 시와 유사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 시로 서정주의 '신부'도 한번 읽어 보렴.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
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알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
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
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신부)

이 두 이야기에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꼬마 신랑의 어리석음과,
신부의 어리석을 정도의 기다림이 그런 것이겠지.
한 살이라도 어릴 적에 며느리를 얻어 들여야 식구가 늘어 노동력이 늘었던 농경 사회의 모습일 것이고,
삼종지도(三從之道, 어려서는 아비를, 혼인한 후엔 남편을, 늙어서는 아들을 따르라)를 지키라고 배운
어리석은 여성이 추구하던 바가 <현모양처>였단다.
그야말로 대가리에 아무 개념이 없는 바보 여자를 원했던 거지.
현모양처는 똑똑하고 지혜로운 여자가 아니란다.
그저 바보처럼 '소나 키우는 여자'라고 보는 편이 고전에선 가깝겠다. 

저 여성들이 결코 '지혜'나 '똑똑함'과 상관있어 보이진 않잖아? 

돌쩌귀는 여닫이문에 다는 경첩의 구실을 하는 것으로
문짝의 아래위로 톡 튀어나온 쇠를 박아 <수돌쩌귀>로 이름붙이고,
문틀의 위아래에에 홈을 파고 쇠를 넣어 <암돌쩌귀>로 이름붙인 부속품이란다. 

이야기가 들어있으니 <서사적>이라고 할 수 있지.
그 이야기의 시간 구조가 펄쩍 뛰는 부분이 문단을 바꾼 부분이 될 거야.
앞문단과 뒷문단의 마지막 부분은 '버렸습니다'로 반복되어서 대칭을 이루고 있단다. 

'매운 재'란 것은 '매캐한 냄새'가 나는 재가 되었음도 의미하지만,
'매울 렬(烈)'자를 쓰는 <열녀>를 상징하기도 한단다.
<열녀>는 한 서방만을 섬기기를 목숨걸고 지키는 어리석은 여성이 되라고 조선이 여자들에게 가르친 덕목이지.
그래서 남편이 병으로 죽고 여자 혼자 살면,
가족들이 며느리나 형수가 '자살'하기를 원하면서 미워했다고 그래.
'열녀'가 되면(자살해 주면) 국가에서 포상도 있고, 혜택도 있고 그랬다더구나. 

'초록 재와 다홍 재'는 신부의 의복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신부의 영적 존재의 신비로움을 떠올리게 하지.
이런 상상을 통해서 독자는 한 차원 상승된 전설을 시를 통해 접할 수 있는 거란다. 

산문시의 구조에 토속적 이야기가 들어간 시다.
'전통적 여인의 슬픈 정절' 정도면 주제가 되겠지?

암튼 시인의 눈을 통해 우리는 <창의적 사고력>, <창의적 판단력>을 배울 수 있겠다.
조지훈은 '지조의 시인'으로도 불리는데, 그가 쓴 <지조론>이란 수필의 덕을 보았겠다. 

세상에는 제 뜻을 굽히지 않는 절개를 가진 사람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는 변절자가 있단다.
그런데 옳음을 위하여 그름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지조'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익을 위하여 그름을 행하는 사람은 <악인>일 것이고,
'지조를 가졌던 자'가 '이익을 위하여 악인이 되는' 인간을 '변절자'로 보면 되겠지.
우선 조지훈의 '지조론'의 일부분을 읽어 보자꾸나.

신단재(申丹齋)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제 강점기라서)
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들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다.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談)의 한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 있는 백성을 속여 야당(野黨)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 교활한 지혜)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박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란
뜻이 깃들여 있다. <지조론(志操論) ―변절자(變節者)를 위하여, 1960년 3월 '새벽'지 수록>

일제 강점기의 단재 신채호나 만해 한용운처럼 꼿꼿한 지조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 글은 누구를 대상으로 쓴 것일까? 

야당의 투사에게 던진 말이다.
야당이라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체 하며 백성을 속이다가,
감옥에 가서 온갖 고통을 참고 견딜 힘도 없으니 싸우는 체만 하다가,
권력자가 미끼로 무슨 장관이나 무슨 특별위원회에서 일하라고 줄을 던지면,
잽싸게 낚아 채는 더러운 족속에게 던진 말이다. 

제대로 된 야당이라면, 여당(권력을 잡은 당)의 잘못을 엄하게 질책하고,
감옥에 가거나 고난을 입을 각오를 해야할 터인데,
슬그머니 저항의 대열을 이루는 체 하다가,
선거만 지나면 다시 부르조아의 전선으로 합류하고 마는 야당은 <지조도 없는 변절자>라는 말이다. 

아, 한국의 정당정치는 아직도 이렇게 부끄럽다.
물론 이 시는 요즘의 것이 아니라 1960년 3월,
4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이니 참 어둡던 시절이다.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다 했으니 그 당시 인사들이야 얼마나 한심했으랴.

세상은 변하는 것 같지만 또 이렇게 변하지 않기도 한다.
어제 오늘, 조지훈의 시 몇 편을 공부했다.
시를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지혜로운 사람들이 바라보던 창의적인 세상을 배우는 일도 재미있을 것임을 몇 번 강조했다.
그러니 그리 하여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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