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동안 작은딸 중학교 학부모독서동아리도 방학이었다.
오늘에야 가을 들어 첫 모임을 했는데, 지정책은 안소영이 지은 <책만 보는 바보>.
나는 이 책을 2006년 1월 15일에 처음 읽었다.

그때 그 책을 읽던 때의 심경과 시각과 공간까지 너무나 훤히 기억되는 특별한 책이었는데 
5년 반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문체와 작가의 따스한 상상력이
사실에 근간을 두고 직조되어 그 자체로 위로가 되었던 책이다.
나는 그 때 내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의 조용한 시각 새벽 세시에 식탁불만 오롯이 켜놓고
식탁에 앉아 이 책을 읽었다. 동양화로 그려진 삽화도 참 아름다운 책이다.
당시 착잡한 심정으로 책을 펼쳤는데 한장한장 읽어나가면서 나도 모르는 새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얼굴을 폰셀카로도 찍어뒀는데 아직도 내 폰에 있다.
야밤에 나 혼자 참 별짓 다한다 싶으면서 이 책이 참 고마웠다.
이덕무와 백탑파 벗들의 우정만큼이나 이 책이 따스했다.


도서관 사서샘은 미혼의 얌전한 샘인데 책 선정에서부터 모든 걸 주관한다.
나는 사실 우리가 주체적으로 끌고 가길 바랐는데 이 선생님 의욕이 대단해서 그냥 따라가기로 마음 먹었다. 나쁘지 않다.
오늘 책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서평을 써와서 서로 짧은 글도 달아주자고 제안하셔서 모두 음음...^^ 
독후감 비슷한 거 시킬까봐 어머니들이 많이 안 오시는 것 같다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한 편은 제출해야겠단다.
사서 교육에서 받은 서평쓰기 양식을 나눠줬는데 내용을 보니까 독후감이라해야 맞을 듯.
아무튼 나는 오년 전 여기 써놓은 서평에 살을 좀 붙일 생각이다. ^^
늘 그렇듯 그냥 편안한 분위기에서 다과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책 4권을 또 대출해왔다. 하여간 얼른 다 보지도 못하면서 욕심은.  ㅎㅎ
두시간 하고 중앙현관으로 내려오는데 새로 부임한 교감선생님과 뜻밖의 상면. 뭐 학교에서 도와줄 부분이 없냐고
물으신다. 회원이 좀더 많을 수 있도록 인센티브나 홍보전략을 좀 강화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사서샘 의욕에 부합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소설은 7년의 밤 동안 아버지와 아들에게 일어난 슬프고 신비로우며 통렬한 이야기들을
치밀한 사전 조사와 압도적인 상상력에 힘입어 펼쳐놓은 작품이다.
작가 고유의 짜릿한 문장과 탄탄한 캐릭터 설정, 물 샐 틈 없는 세계관으로 직조된 이 작품은
심해에서 수면으로 솟구치는 잠수부의 헐떡이는 심장처럼 숨 가쁜 서사적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작가는 강렬하고 장대한 스토리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동시에
사실과 진실 아시의 어두운 협곡을 들여다보는 날카로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도
성공하고 있다. 

 

- 책날개에서 

  

 

좀 늦은감이 있지만 이 책!!
얼마전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의 명강연 중 '죽음'과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와 인식에 대한
그의 말은 상당히 감명깊었다. 죽고 싶다, 혹은 죽겠다, 죽을 것 같이 아프다, 등의
말을 다시는 쓰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하던 지인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그녀는 20년 전 엄청난 교통사고로 온몸이 부서져 거의 일년을 침상에 매달려 지내면서
정말 이대로 죽고싶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죽을 것처럼 아픈데도' 죽지 않더란다. 죽어지지가 않더란다.
그녀는 그렇게 갱생을 하고 지금은 잘 살고 있는데, 그 때 이후 다시는 '...해서 죽겠다'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단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 너무 가볍다. 좀 진중할 일이다.

'마지막 강의'의 주인공 랜디 포시 교수는 많은 이들의 간절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주에
있는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2008년 7월 25일 새벽에. 

  

 

  

요즘, 무슨무슨 심리학,이라는 제목의 책이 참 많다.
이 책은 독일 심리학자 마르틴 슈스터의 책.
'사진 심리학'이란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와 그 결과물을 어떻게 심리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으며, 그것을 사진 촬영에 응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학문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막 몇몇 학자들에 의해 개척되고 있는 신생 학문이다.
과연 사진을 찍은 사람과 찍히는 대사을 서로 연결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이나 타인의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이 책은 이미지와 사고의 관계를 흥미롭게 탐색하며,
사진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인다. 

- 책날개에서  

 

 

    

영화 평론가 이동진의 영화와 여행 이야기.

- 다른 공간을 찾아 떠나는 여정에서 절실히 다가오는 것은 다른 시간이다.
결국 여행은 공간 감각을 시간 감각으로 바꾸어 남긴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발밑에서
생생히 지각되는 길의 질감은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일거에 휘발되어
기억 속 아득한 신기루의 잔영이 된다. 다녀온 나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떠나기 전의 나와
돌아온 후의 나만 오롯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삶 자체는 또 어떨 것인가. 
......
이 책은 3년 전에 펴냈던 <필름 속을 걷다> 이후의 여행기 열두 편을 담았다. 
- 프롤로그 중에서

 사실 <필름 속을 걷다>는 별 셋 정도였는데 대체로 여행기가 그렇듯 아쉬움은 있다.
그럼에도 또 여행기에 손이 가는 건 영화와 접목해서이기도 하지만, 갈망하는 어떤 게 있어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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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13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동진 씨 책은 말씀하신 책들을 모두 보기는 했는데, 그냥저냥 가볍게 읽을만하기는 하더라구요. 근데, 읽다보면 어느덧 부럽고 쓸쓸하게 되서 뒷마음이 별로 안좋아요. 아..나도 저 계단 걸어보고 싶다거나, 저기 저 구도에서 한 번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거나..국내 영화 촬영지라도 찾아다녀 볼까..하는 생각도 들구요.^^

프레이야 2011-10-13 19:31   좋아요 0 | URL
외국촬영지는 안 가봐서 잘 모르겠지만 국내 촬영지는 실제 가보면
영화에서 본 것만큼의 흡족함이 안 드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여행기, 뭐니뭐니해도 직접 가보는 거엔 비할 수 없겠지요.

소나무집 2011-10-1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이 되니 잔잔한 책들이 참 좋네요.
저도 죽음에 대해 생각의 전환을 한 사람 중 하나예요.

프레이야 2011-10-13 19:32   좋아요 0 | URL
죽음을 가까이서 본 사람은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될 것 같아요.
가을이네요 정말.

치니 2011-10-13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만 보는 바보>를 읽지는 않았지만, 프레이야 님이 그 책을 읽을 때 부드럽고 아름다운 문체에 편안하게 마음을 풀 수 있었던 그 심경이,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느껴지네요. :)

언젠가 외국 생활을 오래 했던 노학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독하게 사는 이유가 말버릇에 있다면서, ~ 해서 죽겠다, 라는 말을 너무나도 자주 한다고 어떻게 그리 죽겠다는 말을 말끝마다 함부로 다는지, 자기로서는 무서울 지경이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어제 올려주신 시도 참 좋았어요, 요즘 페이퍼가 가을 분위기 물씬 ~ :)

프레이야 2011-10-13 19:34   좋아요 0 | URL
치니님, 책은 참 그런 위안이 되어요.
그 노학자의 말씀, 참 새겨볼 말이네요.
그렇게 극과 극의 말을 어렵지 않게 하는 저도 돌아보게 됩니다.
갈수록 뭐든 확신할 수 있는게 적어지는데 말에요.

비로그인 2011-10-1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프레이야님 :)

[책만 보는 바보]에 대한 글이 마음에 와닿네요. 좋은 책을 읽을 때 마음이 안정이 되는 경험... 최근에는 없었던 것 같아요. 저도 요 책을 읽어볼까봐요. 나중에 다시 들려서 리뷰 읽고 갈게요! ㅎㅎ

프레이야 2011-10-13 19:35   좋아요 0 | URL
그 책은 청소년용으로 참 편안하게 나왔는데
5-6년이 지나서 요즘 붐이더군요.
알라딘에 5년 전 리뷰도 썼어요. 뒤져보면 있어요.^^ 수다쟁이님.

아이리시스 2011-10-1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사서샘이 주관하는 학부모 독서모임은 좋아요? 미혼쌤이 학부모들을 '관리'하려는 느낌은 별로일 것 같기도 한데.. 뭐! 목적이 '책'이라면야.. 괜찮을 것도 같아요!

<책만 보는 바보> 저도 제목을 많이 봐서 읽은 느낌인데, 안 읽었어요.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는 리뷰 써주세요. 예전에 참 궁금한 책이었거든요.^^

프레이야 2011-10-13 19:37   좋아요 0 | URL
교육청 주관으로 학교마다 그런 활동을 하게 해요.
사서와 학교방침, 동참하는 학부모의 성향에 따라 성질이 달라질 것 같은데
우리 학교는 좀 아쉽긴 해요. 올해 처음이라 그렇겠죠. 점점 나아질 거에요.^^
 

 

 

 

 

 

 

 

 

 

 

 오늘 저녁 배캠에 나온 촌철시인 김경주가 소개한 시인은 김사인님이다.
유명한 <가만히 좋아하는> 외에도 꾸준히 시집을 내고 있는 그는 홍대 앞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김경주 시인은 거의 매일 그곳에 가는데 오늘도 갔다왔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한다.^^ 
오늘 소개한 시는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과 '참새'였다.
철수씨는 '참새'의 '가난하기에 참 좋은 계절'이라는 구절이 참 좋다고 말하네.
'참새'는 찾을 수가 없어서 김사인 시인의 다른 시를 몇 찾아보았다.

일년 중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 같은 요즘, 이런 계절, 하루하루가 가는 게 아까워 안달이 난다.
너무 빨리 가는 것도 너무 충만한 것도 겁이 덜컥 나는...
너무 빨리 다 먹어버리면 밥그릇이 외로울 것 같은,
너무 좋은 책은 휘리릭 다 읽어버리지 않고 몇 장 남겨둬야 내 곁에 영원히 있을 것만 같은, 딱 그런 기분.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  김사인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제가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안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 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 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싶어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 "  " 연전에 작고한 이성선 시인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 첫 부분을 빌리다 

 

 

 

늦가을


-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을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른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시간들 
  
 

- 김사인
 
 
 
48년 9개월의 시간 K가 엎질러져 있다
시원히 흐르지 못하고
코를 골며 모로 누워 있다
액체이면서 한사코 고체처럼 위장되어 있다
넝마의 바지 밖으로
시간의 더러운 발목이 부었다
소주에 오래 노출되어 시간 K는 벌겋다
끈끈한 침이 흘러
얼굴 부분을 땅바닥에 이어놓고 있다
시간 K는 옆구리와 가려운 겨드랑이 부위를 가지고 있다
잠결에 긁어보지만 쉬 터지지는 않는다
흘러갈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더러운 봉지에 갇혀 시간은 썩어간다
비닐이 터지면 시간 K도
힘없는 눈물처럼 주르르 흐를 것이다
시큼한 냄새와 함께 잠시 지하도 모퉁이를 적시다가
곧 마를 것이다 비정규직의 시간들이
밀걸레를 가지고 올 것이다
 
허깨비 같은 시간들, 시간 봉지들 

 

-------
  

김사인 시인(金思寅, 1955년 ~ )
충북 보은, ,1981년 ‘시와 경제’ 동인으로 시 활동.
1977년 11월 18일 ‘서울대 반정부 유인물 배포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1987년 이후 조정환, 박노해와 더불어 1989년 3월에 ‘노동해방문학’ 창간
평론《한국문학의 현단계 》〈지금 이곳에서의 시〉
시집 《밤에 쓰는 편지》(도서출판 청사),《 가만히 좋아하는 》 (창비시선)
2006 제14회 대산문학상 시부문수상 ,2005 제50회 현대문학상 시부문수상
1987 제6회 신동엽창작기금 수상
1996 ~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 ,스토리뱅크 편집위원
-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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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10-12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사인 시, 저도 가만히 좋아하는 시입니다. ^^

아이리시스 2011-10-1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엉, 나 때문에 하늘이 더럽혀진다니,ㅠㅠ 별이 더럽혀질지도 모른다니,ㅠㅠ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 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싶어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갑자기 슬퍼져요.
 
조금만 더 가까이 - Come. Clos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사랑을 하고 잃었네 그리고 알았네. 불구일 수밖에 없는 사랑의 집요한 다섯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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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 Ston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죄가 있어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라 죄를 짓는 인간들, 선과 악의 경계에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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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이 소리없이 간 것 같다.
  어느새 기온이 확 달라졌다. 얇은 옷으론 바람이 제법 차게 느껴진다.
  시월도 벌써 다섯째날. 감기몸살을 며칠 앓았다. 마음을 더 앓았다. 마음간수가 잘 안 된다.
  목 아픈 데는 페퍼민트차를 계속 마시면서 지끈거리는 머리 싸매고 동면하듯 실컷 잤다.
  오늘은 좀 정신도 차리고 가까운 바다를 끼고 차를 달려가 상쾌모드로 갈까하는데
  오랜만에 또 명치가 아프다. 아마도 탐앤탐스 프레쯜과 커피 과잉 섭취인듯. ㅠ
  목은 아직 따끔거리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좋다.
  맑고 푸른 하늘에 두둥실 무념으로 떠있는 구름을 바라보며 
  구업이라도 짓지 말고 좋은 말 좋은 생각으로 살자고 다시한번 다짐해본다. 
  작심삼일이라도 계속 삼일씩하면 된다고 누가 말했지. 
  
  그저께 큰딸을 해거름에 학교로 데려다 주면서 물어봤다.
  하루중 어느 시간대가 제일 좋으냐고.
  밤이 제일 좋단다. 해가 짧은 겨울이 그래서 좋다고도 곁들인다.
  엄마는 이런 해거름이 제일 좋아.  해거름은,
  세상의 하늘이 조금은 낮게 엎드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해거름이면 내 안의 어린애
  가 좀 순해지는 것 같다.  울고 보채는 그 아이가 좀 잦아드는 시간이다. 
  허허롭지만 어딘지 또 충만해지기도 하는, 알 수 없는 깊이의 회색시간이 해거름이다.
 
  오늘저녁 배캠의 철수씨는 시인 김경주와 함께 또 두 명의 시인과 세 개의 시를 소개했다.
  먼저 장이지 시인의 시집 <안국동울음상점>에 실린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과 그 시를 읽기 전에
  김경주 시인이 더 좋아해서 꼭 소개해 주고 싶다고 말하며 들려준 '시인의 말'.
  그리고 최치언 시인을 소개했다. 김경주 시인의 낭송 목소리가 오늘은 저번주보다 듣기에 좋았다.
  자신은 컴맹에다 무척 아날로그적이라 스마트폰을 갖고는 있어도 전화 걸고 받는 용도 이외엔
  쓰는 게 없어 무늬만 스마트폰이란다. 자신이 스마트하니 스마트폰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썰렁한 시인의 개그 ㅎㅎ 그럼 왜 스마트폰을 사서 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안국동울음상점 / 장이지

 

   나선형의 밤이 떨어지는 안국동 길모퉁이, 밤 푸른 모퉁이가 차원의 이음매를 풀어주면, 숨쉬는 집들, 비칠대는 길을 지나 안국동울음상점에 가리

  고양이 군은 바닐라 향이 나는 눈물차를 끓이고 나는 내 울음의 고갈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진열장에 터키석처럼 놓여 있는 울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양이 군은 '혼돈의 과일들'이니'그믐밤의 취기'니 '진흙 속의 욥'이니 '거위 아리아'니 '뒤집힌 함지'니 하는 울음의 이름들을 가르쳐 주겠지

  나그네가 자신의 그림자에게 말하듯 내가 고양이 군에게 무언가 촉촉한 음악을 주문하면 스탄 게츠의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가 바다 밑처럼 깔리리. 나는 내 안의 함지에서 울음을 길어다 주는, 이 세상에서 내 울음을 혼자만 들어주는 소녀 같은 것을 상상하며 그 아이가 아픈 것은 아닌지 어떤지 걱정을 하게 되리

  밤이 깊도록 나는 눈물차를 이백처럼 마시리 내가 등신대의 눈물방울이 되는 철없는 망상에 빠져.

  그러나 새벽이 오기 전에는 돌아가야 하리 내일의 일용할 울음을 걱정하며 내가 일어서려 하면 고양이 군은 '엇갈리는 유성들과도 같은 사랑'을 짐짓 건넬지도 모르리 손에 가만히 쥐고 있으면 론도 형식의 화상이 은은히 퍼지는.

  지갑은 텅 비었지만 울음을 손에 쥐고 고양이 군에게 뒷모습을 들키면서, 보석비가 내리는 차원의 문을 거슬러 감동 없는 거리로 돌아와야겠지 비가 내린다면 맞아야 하리 비의 벽 저편 어렴풋 내 울음을 듣는 내 귀가 아닌 내 귀의 허상을 응시하면서 비가 내린다면 역시 맞아야하리.



 '시인의 말'을 먼저 들려주었는데 그걸 못 찾겠다. 아무래도 시집을 사야할 듯. 

  

장이지 시인 : 1976년 전남 고흥출생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성균관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2007년 시집 <안국동울음상점> 랜덤하우스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 장이지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 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 푸른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너를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있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네가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 사진도 있는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포옹이 지나가  겁이 난다는 너의 말이 지나가
                                 너의 사진이 지나가
                                 너는 파티용 동물모자를 쓰고 눈물을 씻고 있더라
                                 눈밑이 검어져서는 야윈 그늘로 웃고 있더라
                                 네 웃음에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막혀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울음 자국들이 오로라로 빛나는,
                                 바보야,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김경주 시인이 두번째로 소개한 시인은 최치언.
극작가로 더 유명한 학자풍의 시인이란다. 두명의 시인을 알게 되어 오늘도 기쁨.

  

최치언 / 1970년 전남 영암 출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200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시화집 『레몬트리』, 희곡 『코리아환타지』『밤비내리는영동교를홀로걷는이마음』『충분히애도되지못한슬픔』『언니들』등. 극작가 및 총체극 연출가로 활동 중. 2009년 대한민국연극대상 희곡상 수상. 

 

 

 

 

우리는 먼 곳에서 만나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 최치언 



 우리는 먼 곳에서 만나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서로에게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사랑을 하였다.
홀로 남아 썩는 것들아!
내가 아니었으면 오직 너였을, 혼자되지 않을 것들아.
어떻게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사랑을 할 수 있었는지
내가 본 하늘은 온통 핏덩어리처럼 흘러내리는데 
 

그리고 우린, 다시 각자가 되어 먼 곳으로 떠났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 최치언

 


우리는 모두 우측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듣지 마라
소리는 계속해서 우리들의 귓전을 때렸다
귓속에서 시뻘건 태양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좌측은 연필의 힘을 믿는다
나무의 치졸함을 믿는다
의사당의 순결을 믿는다
좌측은 형제들의 오만을 믿는다
그러므로 좌측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너희들이 여자이었다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여자로 사랑하는 나약한 방식을 믿는다

 귀를 도려내라

 그리고 우리는 귀 없이 계속 걸었다. 그때 좌측에서 움직였다
보지 마라
움직임은 계속해서 우리들의 눈꼬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담장의 덩굴이 눈알을 휘감아 낚아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좌측은 우리들 반대쪽으로 기울어 있다
높은 담장을 드리우고 좌측은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좌측의 말이
칼처럼 우리 몸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많이 순진해졌다
우리가 더 이상
선한 꿈을 꾸지 못한다는 건 좌측에게 우리들의 악몽을 맡겼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있을 때
눈알을 파라

눈알 없이 우리들은 우측으로 걷는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측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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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0-0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에 특히 시 읽기 좋은 것 같아요, 프레이야님. 시는 잘 못 읽고 여전히 잘 모르지만 시를 많이 배웠어요, 알라딘에서. 저도 이제는 시집 한 권 뚝딱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 처음 왔을 때 저도 처녀자리라 너무 반가웠는데 여전히 따뜻하고 정겨워요, 프레이야님 서재는.

프레이야 2011-10-06 00:03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처녀자리 ^^
배캠의 저 코너 김경주시인이 시 소개해주는 코너 수욜마다 하는데 참 좋으네요.
저도 몰랐던 시인과 시, 반가운 만남이에요.

June* 2011-10-05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경주라는,
 이름 석 자만 보아도 마음이 뭉클해지는 동시에 강해지고 있다고 느껴요.
 응, 저도 아이리시스님의 말마따라 가을에는 소설보다야 시가 더 좋을듯해요.
 

프레이야 2011-10-06 00:05   좋아요 0 | URL
김경주 시인의 시 소개가 꾸밈없이 자분자분 괜찮더군요.
김경주 시인의 시는 시집 한 권밖에 안 봐서 잘은 몰라도 느낌이 좋은 시인이에요.
가을에 모두 시인, 아니 시인의 벗이라도 되어볼까나요.^^

진주 2011-10-06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먼 곳에서 만나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페이퍼 제목만 보곤,
'아아 가을이 되니 ㅎㄱ님이 상당히 시적이시다'라고 감탄했어요.
아닌게 아니라 제가 시 제목이란 건 맞혔네요~ㅎㅎ


프레이야 2011-10-07 08:17   좋아요 0 | URL
진주님 더없이 좋은 하늘, 시월 잘 보내고 계신지요?
시적이기로 말하자면 진주님의 두줄시를 따를까요? ㅎㅎ
가을이라 그런지 시가 자꾸 걸어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