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소리없이 간 것 같다.
  어느새 기온이 확 달라졌다. 얇은 옷으론 바람이 제법 차게 느껴진다.
  시월도 벌써 다섯째날. 감기몸살을 며칠 앓았다. 마음을 더 앓았다. 마음간수가 잘 안 된다.
  목 아픈 데는 페퍼민트차를 계속 마시면서 지끈거리는 머리 싸매고 동면하듯 실컷 잤다.
  오늘은 좀 정신도 차리고 가까운 바다를 끼고 차를 달려가 상쾌모드로 갈까하는데
  오랜만에 또 명치가 아프다. 아마도 탐앤탐스 프레쯜과 커피 과잉 섭취인듯. ㅠ
  목은 아직 따끔거리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좋다.
  맑고 푸른 하늘에 두둥실 무념으로 떠있는 구름을 바라보며 
  구업이라도 짓지 말고 좋은 말 좋은 생각으로 살자고 다시한번 다짐해본다. 
  작심삼일이라도 계속 삼일씩하면 된다고 누가 말했지. 
  
  그저께 큰딸을 해거름에 학교로 데려다 주면서 물어봤다.
  하루중 어느 시간대가 제일 좋으냐고.
  밤이 제일 좋단다. 해가 짧은 겨울이 그래서 좋다고도 곁들인다.
  엄마는 이런 해거름이 제일 좋아.  해거름은,
  세상의 하늘이 조금은 낮게 엎드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해거름이면 내 안의 어린애
  가 좀 순해지는 것 같다.  울고 보채는 그 아이가 좀 잦아드는 시간이다. 
  허허롭지만 어딘지 또 충만해지기도 하는, 알 수 없는 깊이의 회색시간이 해거름이다.
 
  오늘저녁 배캠의 철수씨는 시인 김경주와 함께 또 두 명의 시인과 세 개의 시를 소개했다.
  먼저 장이지 시인의 시집 <안국동울음상점>에 실린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과 그 시를 읽기 전에
  김경주 시인이 더 좋아해서 꼭 소개해 주고 싶다고 말하며 들려준 '시인의 말'.
  그리고 최치언 시인을 소개했다. 김경주 시인의 낭송 목소리가 오늘은 저번주보다 듣기에 좋았다.
  자신은 컴맹에다 무척 아날로그적이라 스마트폰을 갖고는 있어도 전화 걸고 받는 용도 이외엔
  쓰는 게 없어 무늬만 스마트폰이란다. 자신이 스마트하니 스마트폰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썰렁한 시인의 개그 ㅎㅎ 그럼 왜 스마트폰을 사서 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안국동울음상점 / 장이지

 

   나선형의 밤이 떨어지는 안국동 길모퉁이, 밤 푸른 모퉁이가 차원의 이음매를 풀어주면, 숨쉬는 집들, 비칠대는 길을 지나 안국동울음상점에 가리

  고양이 군은 바닐라 향이 나는 눈물차를 끓이고 나는 내 울음의 고갈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진열장에 터키석처럼 놓여 있는 울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양이 군은 '혼돈의 과일들'이니'그믐밤의 취기'니 '진흙 속의 욥'이니 '거위 아리아'니 '뒤집힌 함지'니 하는 울음의 이름들을 가르쳐 주겠지

  나그네가 자신의 그림자에게 말하듯 내가 고양이 군에게 무언가 촉촉한 음악을 주문하면 스탄 게츠의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가 바다 밑처럼 깔리리. 나는 내 안의 함지에서 울음을 길어다 주는, 이 세상에서 내 울음을 혼자만 들어주는 소녀 같은 것을 상상하며 그 아이가 아픈 것은 아닌지 어떤지 걱정을 하게 되리

  밤이 깊도록 나는 눈물차를 이백처럼 마시리 내가 등신대의 눈물방울이 되는 철없는 망상에 빠져.

  그러나 새벽이 오기 전에는 돌아가야 하리 내일의 일용할 울음을 걱정하며 내가 일어서려 하면 고양이 군은 '엇갈리는 유성들과도 같은 사랑'을 짐짓 건넬지도 모르리 손에 가만히 쥐고 있으면 론도 형식의 화상이 은은히 퍼지는.

  지갑은 텅 비었지만 울음을 손에 쥐고 고양이 군에게 뒷모습을 들키면서, 보석비가 내리는 차원의 문을 거슬러 감동 없는 거리로 돌아와야겠지 비가 내린다면 맞아야 하리 비의 벽 저편 어렴풋 내 울음을 듣는 내 귀가 아닌 내 귀의 허상을 응시하면서 비가 내린다면 역시 맞아야하리.



 '시인의 말'을 먼저 들려주었는데 그걸 못 찾겠다. 아무래도 시집을 사야할 듯. 

  

장이지 시인 : 1976년 전남 고흥출생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성균관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2007년 시집 <안국동울음상점> 랜덤하우스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 장이지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 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 푸른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너를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있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네가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 사진도 있는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포옹이 지나가  겁이 난다는 너의 말이 지나가
                                 너의 사진이 지나가
                                 너는 파티용 동물모자를 쓰고 눈물을 씻고 있더라
                                 눈밑이 검어져서는 야윈 그늘로 웃고 있더라
                                 네 웃음에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막혀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울음 자국들이 오로라로 빛나는,
                                 바보야,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김경주 시인이 두번째로 소개한 시인은 최치언.
극작가로 더 유명한 학자풍의 시인이란다. 두명의 시인을 알게 되어 오늘도 기쁨.

  

최치언 / 1970년 전남 영암 출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200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시화집 『레몬트리』, 희곡 『코리아환타지』『밤비내리는영동교를홀로걷는이마음』『충분히애도되지못한슬픔』『언니들』등. 극작가 및 총체극 연출가로 활동 중. 2009년 대한민국연극대상 희곡상 수상. 

 

 

 

 

우리는 먼 곳에서 만나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 최치언 



 우리는 먼 곳에서 만나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서로에게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사랑을 하였다.
홀로 남아 썩는 것들아!
내가 아니었으면 오직 너였을, 혼자되지 않을 것들아.
어떻게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사랑을 할 수 있었는지
내가 본 하늘은 온통 핏덩어리처럼 흘러내리는데 
 

그리고 우린, 다시 각자가 되어 먼 곳으로 떠났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 최치언

 


우리는 모두 우측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듣지 마라
소리는 계속해서 우리들의 귓전을 때렸다
귓속에서 시뻘건 태양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좌측은 연필의 힘을 믿는다
나무의 치졸함을 믿는다
의사당의 순결을 믿는다
좌측은 형제들의 오만을 믿는다
그러므로 좌측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너희들이 여자이었다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여자로 사랑하는 나약한 방식을 믿는다

 귀를 도려내라

 그리고 우리는 귀 없이 계속 걸었다. 그때 좌측에서 움직였다
보지 마라
움직임은 계속해서 우리들의 눈꼬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담장의 덩굴이 눈알을 휘감아 낚아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좌측은 우리들 반대쪽으로 기울어 있다
높은 담장을 드리우고 좌측은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좌측의 말이
칼처럼 우리 몸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많이 순진해졌다
우리가 더 이상
선한 꿈을 꾸지 못한다는 건 좌측에게 우리들의 악몽을 맡겼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있을 때
눈알을 파라

눈알 없이 우리들은 우측으로 걷는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측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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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0-0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에 특히 시 읽기 좋은 것 같아요, 프레이야님. 시는 잘 못 읽고 여전히 잘 모르지만 시를 많이 배웠어요, 알라딘에서. 저도 이제는 시집 한 권 뚝딱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 처음 왔을 때 저도 처녀자리라 너무 반가웠는데 여전히 따뜻하고 정겨워요, 프레이야님 서재는.

프레이야 2011-10-06 00:03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처녀자리 ^^
배캠의 저 코너 김경주시인이 시 소개해주는 코너 수욜마다 하는데 참 좋으네요.
저도 몰랐던 시인과 시, 반가운 만남이에요.

June* 2011-10-05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경주라는,
 이름 석 자만 보아도 마음이 뭉클해지는 동시에 강해지고 있다고 느껴요.
 응, 저도 아이리시스님의 말마따라 가을에는 소설보다야 시가 더 좋을듯해요.
 

프레이야 2011-10-06 00:05   좋아요 0 | URL
김경주 시인의 시 소개가 꾸밈없이 자분자분 괜찮더군요.
김경주 시인의 시는 시집 한 권밖에 안 봐서 잘은 몰라도 느낌이 좋은 시인이에요.
가을에 모두 시인, 아니 시인의 벗이라도 되어볼까나요.^^

진주 2011-10-06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먼 곳에서 만나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페이퍼 제목만 보곤,
'아아 가을이 되니 ㅎㄱ님이 상당히 시적이시다'라고 감탄했어요.
아닌게 아니라 제가 시 제목이란 건 맞혔네요~ㅎㅎ


프레이야 2011-10-07 08:17   좋아요 0 | URL
진주님 더없이 좋은 하늘, 시월 잘 보내고 계신지요?
시적이기로 말하자면 진주님의 두줄시를 따를까요? ㅎㅎ
가을이라 그런지 시가 자꾸 걸어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