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 아저씨의 딱새 육아일기 산하어린이 145
박남정 지음, 이루다 그림 / 산하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 내가 기르는 아기딱새를 잡아먹고 천연덕스럽게 퍼져서 낮잠을 자고 있는 뱀이 있다면 어떻게 할래? 아이들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선 낯을 찌푸린다.

 정말 권하고 싶은 이 책은 4학년 아이들과 수업한 했는데 의외로 별로 안 알려져 있나 보다. 어린이 책이 갖추었으면 좋겠다 싶은 점들이 모두 들어가 있는 맛있는 책이다. 따뜻하고 유쾌하고 호기심을 자극하고 대리만족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정보와 지식의 측면도 소홀히 하지 않고 쉬운 말로 넣어둔 솜씨도 만족스럽다. 글자크기나 행간의 배열도 눈이 피로하지 않게 잘 편집되었다. 삽화는 물론 실제 찍은 사진과 콜라주를 이용한 곁들이 삽화까지 초등 4학년 정도가 읽기에 지루하지 않는 독서시간이 될 것이다.

 곰이 딱새를 키웠다고? 신기하지?

우직한 곰아저씨는 실제로 이흥기라는 총각아저씨다. 이 책의 이야기는 그 아저씨가 지난 봄 실제로 겪은 일이다. 단양에서도 더 들어가는 산골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일을 많이 하여 힘도 센 이 아저씨의 직업은 철근 기술자. 하지만 곰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블로그도 운영하며 실제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부분은 자연지킴이 역할이다. 미련곰탱이처럼 한 길만 밟고 온 이분은 동강에 댐을 건설하려고 했을 때 해남에서 서울까지 걸어가며 ‘동강은 흘러야 한다!’ 라고 외치기도 했다. 지금도 초등학생 자연체험단을 이끌며 아이들에게 '함께 사는 자연에 대한 사랑'을 몸소 느끼게 해 주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 책의 글은 이분이 직접 적은 건 아니고 박남정님의 글로 신나게 풀린다. 몇년 전 4월, 곰아저씨가 지인을 만나러 단양 적성초등학교로 갔을 때에서부터 곰아저씨와 딱새의 소중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때 아저씨는 폐교를 빌려 새한서점이라는 헌책방의 서고로 쓰고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간 것이다. 운동장에 세워둔 트럭에 딱새 부부가 둥지를 틀기 시작하는 모습을 목격한 아저씨는 그로부터 한 달간 트럭을 꼼짝도 하지 않고 그들이 새끼를 낳아서 기르도록 배려한다. 딱새부부의 지혜로운 집짓기 과정과 알을 품고 있을 때 수컷이 암컷에게 베푸는 헌신적인 모습, 그리고 알을 낳고 나서의 애틋하고 조심스러운 심정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아저씨의 외모처럼 어찌나 소박하고 흥미로운지 책을 읽는 사람이 딱새육아에 공동 참여하는 느낌마저 든다. 찍어둔 사진들을 실어놓아 볼거리 때문에 더욱 그렇다. 곰아저씨의 블로그로 찾아가면 여기 실린 사진들을 고스란히 다 볼 수 있는데 새한서점을 하는 그 지인이 찍고 올려준 사진이라고 한다. 아기딱새들이 고 작은 입을 크게 벌리고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바둥거리는 모습은 귀엽기보다 감동이다. 재미난 육아일기와 정보부분은 블로그에 모두 실려 있지 않으니 책에서만 볼 수 있다. 육아일기는 모두 13꼭지로 나누어 시간 순으로 이어지는데 각 꼭지의 끝에 새와 관련된 지식을 실어놓아 알차다.

 딱새는 4월 초순쯤부터 알을 낳고 5월 말경에 부화되어 날아가는 대표적인 새로 몸길이는 약 15cm, 몸무게는 17~18g이다. 번식기에는 깊은 산속에서만 볼 수 있지만 겨울에는 인가 근처나 시가지 공원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겨울도 아닌데 곰아저씨의 트럭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은 걸 보면 트럭이 무척 안전해 보였던가 보다. 아니면 절대 내치치 않을 사람의 트럭인줄 알았던지..

안타깝게도 그리 조심했는데도 뱀이 어느 날 조금만 있어면 날아갈 아기딱새들을 잡아 먹어버렸을 때 곰아저씨는 과연 그 뱀을 어떻게 했을까? 호기심을 유도하는 질문을 먼저 던지고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며 책을 읽게 하면 더욱 재미있는 책읽기가 될 것이다. 곰아저씨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도 충분히 공감하며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곰아저씨가 육아에 참여한 방식도, 딱새부모의 자리를 넘보거나 넘치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이 눈여겨보인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원하는 식으로 지켜보고 기다려준 것 뿐이다. 우리 어른들의 육아도 그래야할텐데 너무 많이 끼어들고 보호하려드는 경우가 많다.

“새는 새대로 뱀은 뱀대로..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의 이치야.”

그나저나 트럭을 못 움직여 그해 어버이날에는 어머니를 찾아뵙지도 못했다는 이 곰탱이 아저씨는 마흔셋인데 아직 총각이다. 인연이 어디 숨어계실까. 지금은 혹시 찾으셨을까. 딱새가 트럭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새끼들을 키웠던 한 달 남짓한 시간을 생애 최고로 행복한 순간들이라고 말하는 곰아저씨! 


(딱새는 암컷과 수컷이 다른 색인데 다른 새들처럼 이녀석도 수컷이 더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한다. 아래 사진은 암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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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2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는 새대로 뱀은 뱀대로 사는 것이...자연의 이치야"라는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누구든지 '-답게'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라는 '자연'의 말뜻도 바로 그런 의미겠지요.
그나저나 곰아저씨가 궁금하네요.ㅎㅎ

프레이야 2007-08-21 12:59   좋아요 0 | URL
네, 스스로 그러함이요.^^
곰아저씨는 실물사진을 보니 참 소박하고 우직하게 보이더군요.
텁수룩한 구레나룻에 듬직한 체구에.. 노총각이라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이런 사람도 있구나, 유쾌하게, 그랬어요^^

대한민국곰 2008-01-31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곰아저씨 딱새 육아일기 실제 주인공인 이흥기입니다 책에대해서 좋은설명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프레이야 2008-02-15 00:00   좋아요 0 | URL
이흥기 님 찾아주셔서 반갑습니다.
정말 좋은 책이고 즐거운 독서시간이었어요.
지금도 그렇게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시고, 실천하며 살고 계시겠지요?
블로그에도 아이들과 함께 찾아가보고 그랬어요.
또 다른 책도 기대할게요^^

대한민국곰 2008-02-14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은 딱새를 키우던 학교에 와 있 읍니다 이곳은 인터네 헌책방이구요 약15만권을 책을 부유 하고 잇답니다

프레이야 2008-02-15 00:01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인터넷 헌책방 그곳 인터넷주소 가르쳐주시겠어요?

대한민국곰 2008-04-2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각 포털검색창에서 새한서점을치시면됩니다
 
내가 찾은 암행어사 우리 역사 속의 숨은 일꾼 이야기 1
정명림 지음, 김수연.박재현 그림 / 풀빛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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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까닭 없이 나를 괴롭힌다면 무척 속이 상할 거에요.

작가의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 이 책은 흥미로운 소재와 내용, 알찬 정보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잘 어울려있는 책이다. 초등 4학년 아이들과 수업한 책이고 독후활동으로는 ‘암행일보’ 라는 신문을 만들어보았다.

 누군가 나 대신 괴롭히는 나쁜 사람을 혼내주는 상상을 하는 어린이들의 바람을 실제로 해낸 사람들은 없었을까?, 하는 아이다운 호기심에서 조선시대의 암행어사로 유도하여 간다. 과거의 암행어사 정신을 오늘날에 이어받아 좀 더 행복한 사회와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함께 고민하자는 작가의 의도도 건전하다.

 이야기는 새 학년이 되어 모든 게 어리둥절한 우진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펼쳐진다. 담임선생님의 제안으로 암행어사놀이가 실시되고 아이들은 아주 특별하고 흥미진진한 놀이체험을 한다. 바로바로 암행어사를 임금이 임명할 때처럼 ‘봉서’를 통해 아무도 몰래 단 한 명이 암행어사로 뽑혀 한 달 동안 선생님의 눈과 귀가 되어 활동하는 놀이다. 고자질이나 감시가 아니라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고 어려운 친구는 돕게 하고 무언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분위기는 없는지도 살펴야한다. 이달의 멋진 친구를 뽑아 보이지 않게 선행을 베푼 친구를 공개적으로 칭찬해야한다. 그리고 모든 활동상황을 조리 있게 써서 발표해야 한다.

 처음엔 심드렁했던 우진이가 이 활동을 하면서 따돌림 당하고 있었던 정호를 발견하게 되고 몰랐던 면을 보고 우정을 쌓게 되는 모습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지식정보의 소득이 쏠쏠하다. 선생님은 반 아이들 모두에게 암행어사를 탐구주제로 하여 탐구조사보고서를 쓰게 하여 모둠을 만들어주었다. 우진이가 암행어사로 활동하는 시기와 맞물려 11모둠의 아이들이 암행어사에 대한 소주제를 스스로 정하고(모두 11가지의 소주제가 나옴) 자세히 조사하고 정리하여 발표하는 과정을 함께 엮는다. 그 내용들은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는데 삽화를 섞어 필요한 자료와 함께 쉽게 이해되도록 정리해두었다. 낯선 용어들이 두루 나오지만 암행어사와 관련된 옛 제도와 조상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용어들이니 알아두는 것이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감사원을 소개하며 암행어사 정신을 이어받은 감찰제도로, 그 정신을 오늘날과 미래로 발전하게 한 점이 돋보인다.

‘우리 역사 속의 숨은 일꾼 이야기’ 시리즈의 첫 편으로 나온 이 책에서 추사 김정희도 충청도에서 암행어사로 활동한 적이 있다는 건 나도 처음 알았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암행어사는 역시 박문수였다. 수령을 한 두 번 한 과거급제자를 임명하는 원칙을 깨고, 수령경험이 전혀 없었던 박문수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정조는 해마다 거르지 않고 가장 많이 암행어사를 보낸 왕이었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아 나도 한 번 암행어사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책은 내용면으로 보면 전체가 하나의 탐구보고서 같은 형식을 띈다. 책의 뒷부분에는 ‘탐구조사를 마치며’에서 반 아이들의 재치발랄한 후기가 적혀있고,  ‘암행어사와 함께 한 걸음 더’라는 꼭지에서는 앞에서 논의되지 않은 탐구주제와 부연설명이 실려 있어 역사와 관련하여 시대상을 좀 더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갖가지 이름을 단 일련의 부정부패감시단으로 관심을 나아가게 한다. 암행어사제도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암행어사도 힘을 잃어갔다는 걸 알 수 있다. 명종 때 이르러 조선팔도에 보냈던 암행어사 제도는 마침내 고종 35년(1898)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오늘날에 그 정신을 부활하여 제대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은 <성종실록> 20년 11월 7일(1489)의 기록이다.
“..... 옛사람의 말이, ‘가혹한 행정은 호랑이보다도 맹렬하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수령들의 나쁜 짓을 모조리 알아내어 우리 백성이 잔학한 행정에 시달리지 않게 할 수 있겠는지 말해 보거라.”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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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07-08-20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두"가 맞는 표현 같습니다만.. ^^;
저는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 아니라서 그런지 아이 책을 보는 일이 거의 없는데, 알라딘 분들이 소개하시는 책들 보면 좋은 책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7-08-20 12:34   좋아요 0 | URL
좌회전님, 저도 그렇게 알고있었는데 이 책의 저자가 밝혀두기로는,
조사결과 두가지 표현을 다 써왔는데, 출도로 쓰인 경우가 더 많아서
출도로 표기하기로 한다고요.. 저도 새로이 알았답니다.
네, 요즘 어린이책은 내용이나 형식이나 너무 좋은 책들이 많아요.
우리 어릴때와는 아주 다르게요.. 그래도 별로인 경우도 있구요..^^

turnleft 2007-08-20 13:05   좋아요 0 | URL
엇.. 그렇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뽀송이 2007-08-20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재미있어 보입니다.^^
우리의 옛것과 현대의 색다른 만남??
한번 찾아서 읽어볼게요.^.~ 추천!!

프레이야 2007-08-20 20:23   좋아요 0 | URL
네, 우리가 암행어사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 수 있고 흥미로워요.^^ 줄거리를 이루는 이야기도
좋구요^^ 뽀송이님, 오늘도 무지 더웠죠??

마노아 2007-08-20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약용도 암행어사로 나간 적 있어요. 이 책 재밌을 것 같아요. 보관함에 쏘옥이에요~

프레이야 2007-08-20 23:30   좋아요 0 | URL
네, 마노아님 물론이에요. 정약용과 함께 목민심서의 내용도 구체적으로 일부분이 나와요. 박규수 등 다른 암행어사 이야기도 나오구요.
전, 김정희 암행어사는 첨 알았네요.ㅎㅎ 역사샘이시라 어린이책도
역사관련이면 읽으시는군요, 역시 마노아님!

ㅇㅇㅇ 2007-08-3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ㄳㄳㄳㄳㄳㄳㄳㄳㄳㄳㄳㄳ
해요

프레이야 2007-08-31 21:09   좋아요 0 | URL
뉘신지요? 흠칫.^^

와우~~ 2007-10-09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와~~ 제가지금 읽고잇는 책인데
딱떨어지네요 ㅋㅋ

프레이야 2007-10-09 18:56   좋아요 0 | URL
혹시, 초등학생인가요? 4,5학년 쯤이면 아주 재미있게 읽을 것 같아요.
로그인하고 오셔도 되는데요.^^

anias 2008-10-17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고 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어요. 감사감사!!

프레이야 2008-10-17 19: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8월 초, 광안리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홀에서 수상자의 아내가 대신 상을 받으러 무대에 올라왔다. 민소매조끼를 걸치고 있는 모습에 입을 삐죽거리는 어르신들이 좀 있었는데(여성분) 나는 시원해 보여 좋기만 했다. 그녀의 남편은 제 11회 한국해양문학상 대상을 받은 시인 이윤길이다.

 그는 19살, 주문진 수산고등학교를 졸업도 못한 채 원양현장 실습이라며 그해 10월 라틴아메리카의 수리남으로 갔다. 그렇게 시작된 원양어선의 승선이 근 30여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자를 만났고 결혼을 했고 딸아이 둘을 낳았고, 실습항해사에서 3등, 2등, 1등 항해사를 거쳐 선장이 되었다. 그의 시집 속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동안 난 삼각파도를 뚫는 괭이갈매기처럼 씩씩하게 한 끼의 밥값을 위하여 이 바다 저 바다를 해파리처럼 부유하며 외로움과 고독을 삭혀왔다.”고 했다. “소금물에 절인 마음과 달빛에 부서진 마음, 태양 볕에 달구어진 마음들, 태풍 속에서 오금저린 마음도 있었다. 그런 마음들을 모아 놓은 것이 오늘의 영광이 되었다. 존재는 말 그대로 환상인 것이다.”라고도 했다. 책날개에 있는 그의 사진을 다시 넘겨보았다. 희끗한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풍채 좋은 59년생 남자였다.

 아내 차미선은 지금 러시아 해역 바다 한 가운데에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헌책 냄새를 세상에서 제일 좋은 냄새라고 말하는 두 딸 자랑도 했다. 단칸방 가득 책을 쌓아두고 읽어대고 배움의 갈증을 못 이겨 시인을 찾아가 스승으로 삼고, 수많은 날들을 습작하고, 그런 세월을 오래도록 지켜본 아내는 경남 통영 사람이었다. 그녀는 특유의 억양으로 적어온 걸 읽어갔다. ... 새벽에 만취해 들어오는 남편은 아파트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자기존재를 확인하려했다고...

 

 

 난 그 대목에 가슴이 아렸다. 술 취해 객기와 난동을 부리는 남편, 아버지, 시아버지...  이 시인이 스스로를 칭한 말처럼 ‘황금빛 찬란한 유산이 없어 흔들리는’ 우리의 그들을 봐주는 눈이 조금은 유연해지고 있다면 나도 정말 중년의 여인인가. 뱃놈이 무슨 시를 쓰냐고 주위에서 말했다고 겸양을 떨어놓았지만, 화기애애한 시상식장에 앉아 그의 시들을 죽 읽어보니 망망대해의 생명력이 꿈틀대며 달려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대양의 품에조차 안겨보지 못한 나이지만... 

 

 

 바다에 몸을 담고 부딪히며 쓴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시들, 그 중 표제시 하나를 옮겨본다. 다른 시들보다 여성적인 감성이 느껴진다. 떨어져있는 시간이 더 긴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것 같다. 우리는 늘 사랑하는 일에 서툴고 어리석게 마련인가. 그래도 실러갠스의 새로운 비늘 하나를 꿈꾸며..



진화하지 못한 물고기 한 마리

-이윤길




눈 뜰 때 포프라기 되어 매달리는
세월 갑옷을 걸친 마흔 여자의
스물아홉 의식으로 사랑은
심연에서 화석이 되었고
백만 년 동안이나 변화하지 않고
화석으로 살아있는 물고기 한 마리
비늘에다 그리움을 빗금으로 남기다
뻐끔하고 세상 밖에 숨 뱉어놓은 날
기포에 쌓여진 지난, 사랑 하나가
수묵처럼 번지는 파문 만든다
계절이 바뀌면 꽃들도 달라지는데
바닷물에 절여진 마음이라
백만 년 전의 사랑이나
현재의 사랑이나 변하지 못한다
말들의 통로를 따라 연비 되어진
아줌마가 간직한 눈물에 슬픔들이
아저씨 가슴에 비 되어 흐른다
진화하지 못한 지느러미로
앞 보며 앞으로만 뒷걸음 걸었는데
어찌하여, 여인 만나게 된 걸까
창 너머 바다에 달빛이 부서진다
실러갠스* 새로운 비늘이 생긴다.

* 실러갠스 : 화석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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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8-2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문진 수산고등학교...저희 동네에 있던 학교인데...
뱃내음, 바다내음이 비릿한 그의 시가 어떨런지 사뭇 궁금해지네요.

프레이야 2007-08-20 12:54   좋아요 0 | URL
어머, 잉크님 주문진이 고향이세요?
전 주문진까진 못가봤지만 그 부근 속초까지 가봤지요.
왠지 오늘은 잉크냄새 대신 바다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

twinpix 2007-08-20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닷물에 절여진 마음이라, ^^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프레이야 2007-08-20 23:21   좋아요 0 | URL
트윈픽스님, 네^^ 화석이 되어버린 변하지 않는 마음,
부패되지 않는 마음이요..^^ '진화하지 못한 지느러미로 앞보며 앞으로만
뒷걸음 걸었는데' 이 구절도 좋지요.^^
 

전에는 한 권을 들면 끝을 내고 다른 책으로 넘어갔는데 언제부터인가 동시다발로 펼치고 있다.

수업하는 아이들 책에, 선물 받은 책에, 구입한 책까지 다 하면.. 집안 곳곳에 두고 찔끔찔끔..

이거 언제 끝나냐.. 집중도 안 되고.. 일단 책갈피 꽂아둔 것들만 우선..

날씨 탓으로 돌릴까 보다.^^


14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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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원태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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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맘에 드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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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철.김영주 지음 / 명상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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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7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지금 한꺼번에 읽고 계신가요?

스킨이 바뀌었어요.
마룻바닥이 나오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것도 님의 분위기와 어울려요.마음이 잔잔해지는 느낌입니다.

프레이야 2007-08-17 10:59   좋아요 0 | URL
책갈피와 연필을 꽂아두고 그러고 있네요. 찔끔거리며..
스킨이 좀 시원해 보이나요, 민서님! 잔잔해지셨어요? ^^
오늘도 더위와 함께...

백년고독 2007-08-1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스킨이 시원스럽게 바뀌었네요.
저도 요즘 이 책 저 책 한꺼번에 쌓아놓고 읽고 있답니다. 이거보다 저거보다 ㅎㅎㅎ
제가 좋아하는 '가재미'와 '반고흐, 영혼의 편지'가 보이네요 ^^

프레이야 2007-08-17 11:00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잖아도 님의 서재에서 그 페이퍼 봤어요.
두개 공통, 반가워요^^

가시장미 2007-08-1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그래요.. 왜이리 독서가 안 될까요. 집중이 안되고.. 리뷰도 안서지고. ㅠ_ㅠ
혜경님.. 좋은 책 많이 주문하셨네요? 멋진 리뷰를 보고, 저도 지르겠습니다. ㅋㅋ

프레이야 2007-08-17 11:00   좋아요 0 | URL
그죠? 가시장미님, 다 날씨 탓으로 우리 몰자구요.ㅎㅎ

네꼬 2007-08-17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리뷰 기대되어요!!

프레이야 2007-08-17 11:01   좋아요 0 | URL
네꼬님, 에고.. 시집리뷰는 정말 어려워요 홍홍..
사실 전 시집은 한번에 다 안 읽고 생각나면 한 편씩 뒤져 읽는 버릇이^^

Jade 2007-08-17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선우의 사물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책이예요 ㅎㅎ 생활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오는, 혜경님과도 잘 맞을 것 같아요 ㅎㅎ

프레이야 2007-08-17 15:03   좋아요 0 | URL
네 제이드님, 좋은분에게 선물 받은 책이에요. 아마 그분도 저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보내주셨겠지요 ㅎㅎ
한 장씩 읽는 게 더 좋은 책 같아요. 님도 좋아하시는군요.^^

다가섬 2007-08-18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러느라 여기저기, 여러 형태로 두었더니
아들녀석이 친구에게 ...
'이방은 들어오지마, 좀 너저분하거든...'이러네요.^^

프레이야 2007-08-18 10:42   좋아요 0 | URL
ㅎㅎ 아들이요? 아직 어릴텐데요, 깜찍!

twinpix 2007-08-19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마구잡이로 독서 중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정작 끝내는 책이 없는 것 같아서 한 권을 진득하게 잡아야하겠다고 결심 중이에요.^^

프레이야 2007-08-19 21:53   좋아요 0 | URL
트윈픽스님도 그래요? ㅎㅎ
읽고 싶은 책들이 산재해있는 까닭이기도 하겠죠.
같이 아자아자.. 결심합시다!
 
당신이 외우는 시 한 편

요사이 어떻게 지내시나요 近來安否問如何


사창에 달빛이 비치니 첩의 한은 깊습니다. 月到紗窓妾恨多

 
몽혼에게 흔적을 남기게 한다면 若使夢魂行有跡


당신 앞 돌길 반은 모래가 되었을 것을. 門前石路半成沙

 

                                              - 이옥봉 '몽혼'

 

묻노니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달이 사창에 이를 때면 저의 한은 깊어지곤 한답니다.
만약 꿈길의 걸음에 자취가 생긴다면
문 앞의 돌길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겁니다


(검색을 해보니 이렇게 번역한 시도 있네요. 전 위의 것이 더 마음에 듭니다)

--------------

 

어느 날, 남편이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옥봉의 몽혼이란 신데 들어봐."  그러곤 위의 시를 들려주었습니다.  

"여보, 난 이 시가 요즘 참 좋아."

이옥봉은 조선시대 여류시인인데 연도가 불확실하지만 선조때 양반 '봉'의 서녀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생을 마감한 조한의 소실이기도 했습니다. 32편의 시를 담은 <옥봉집>이 후손에 의해 전합니다. 평생 멀리 떠나있는 남편을 그리워 했다고도 합니다. 읊을수록 입에 착착 감기는 운율에 애잔한 정서가 첩으로서의 스산한 그리움을 잔뜩 배어 나오게 하는 싯구. 그믐달의 맵시마냥 처연합니다.

옆지기는 홈페이지에 한옥의 나무문을 찍어두고 이 싯구를 실어놓았더군요. 사십 고개를 고되게 넘어가는 남자. 일에 지치고 가족의 무게에 버거워하면서도 거뜬히 이고지는 어깨가 때때로 쓸쓸해 보입니다. 그리움은 욕망으로 생겨나는 거라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그걸 어쩌지 못해 가눌 길 없이 그리워하고, 잡을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며 삽니다. 저는 이제 그리움을 버리기로 합니다. 사실 허울좋은 감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일까요.

대신 첩의 마음으로 살기로 합니다. 본처의 오만함과 무감각함과 텃새기질보다는 부족함에 안달하고 조바심 내면서도, 가끔은 환청에 시달릴 정도로 귀 밝히며 내게 다가오는 것들에 예민한 촉수를 세워보렵니다. 물수제비 번져가는 공명과 반향의 무늬처럼, 신경줄 같은 현의 감각처럼, 때로는 손톱 밑의 작은 떨림으로도 온몸의 감각이 작동하는 첩으로 살까합니다. 숨죽여서 낮게, 욕심없이.. 작은가슴, 새가슴으로.. 하지만 그런 까탈스러운 성정이 거추장스러울 때면 혹여, 곰처럼 아무것도 모른 척 겨울잠도 잘 겁니다.

 

요사이는 당신 어찌 지내시온지요?

달빛 살빛 비치는 창 두드릴 때면 새가슴에도 그리움 사무쳐와요

몽혼의 걸음으로도 발자욱 남길 수 있다면

돌같은 당신 마음 문전의 반은 모래가루 되었을 겝니다.

 

 (이건 제가 무례하게 재해석한 몽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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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 길(夢魂)
    from 한사의 서재 (휴식 중입니다) 2007-08-16 21:10 
                             동짓달 긴 밤 - 김원숙 作 1992 Oil on Linen 122x56cm          
 
 
조선인 2007-08-16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제가 30대에 외우게 된 시가 있다면 이 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07-08-16 18:57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저 3번 참여했어요. 호호~
1번은 음냐음냐.. 어려워요..
꾸벅^^

글샘 2007-08-16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가 한시로 고등학교 한문 교과서에 있었거든요.
좋지 않냐고? 애들에게 한참 설명을 했더니...
시험에 나올 것만 새카맣게 적고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남학생 반만 수업해서 그런 거였나 모르지만...
그 중에 이 시를 정말 좋다고 생각한 녀석들이 있었을는지도...^^

프레이야 2007-08-16 18:5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런 시를 좋아하는 옆지기는 저보다 더 감성적인 건가요?
한시로도 읊어주더군요. 이옥봉의 다른 시들도 참 맑고 고아하더이다.
그나저나 시커먼 남학생들이 과연?? ^^
걔들이 이런 맘을 알까요? ㅎㅎ

마노아 2007-08-1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도, 시도, 재해석도, 아... 너무너무 좋아요(>_<)

프레이야 2007-08-16 18:26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좋게 봐 주셔서 넘 고마워요~~~ ^^

비자림 2007-08-1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재해석이 더 좋군요. 잘 읽고 가옵니다.

프레이야 2007-08-16 18:27   좋아요 0 | URL
아니, 시인 비자림님 와락~
재해석시를 더 좋다고 봐주시니 기분 좋아요.
전 님의 재해석시가 더 멋지게 나올 거라 믿는데요. 님의 시를 읽고파요..
넘 오래 되었다구요..ㅎㅎ

향기로운 2007-08-16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외우고싶네요^^ 조선인님덕분에 좋은 시 알게되어 기뻐요^^ 혜경님의 재해석 시도 좋아요~

프레이야 2007-08-16 18:28   좋아요 0 | URL
향기로운님, 전 시 잘 못 외우는데 이건 짧으니까 ^^
조선인님 덕분에 저도 한 번 적어보고 좋았네요. 헤헤..

비로그인 2007-08-16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치는 마음을 일으켜주는 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8-16 18:29   좋아요 0 | URL
민서님, 덥기도 하고 여러가지로 지치는 요즘이죠.
조금 일으켜 세워드렸다니 기쁘지요^^

비로그인 2007-08-16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께서도 이 시를 암송하시는군요..
제가 읽었던 몽혼(=꿈길)을 소개합니다.


프레이야 2007-08-16 21:29   좋아요 0 | URL
한사님, 아직 휴식중이신거에요?
너무 반갑습니다. 가서 보고 추천 누르고 왔어요.
김원숙의 그림이 서늘합니다.
저를 위한 특별한 그림과 시, 감사합니다.^^

Jade 2007-08-17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봤을때는, "돌이 모래가 된다는"표현이 참 유치하게 느껴졌었어요... 좋은 경험(!)을 한 지금은, 제 마음을 투영해서 읽게 되네요 ㅎㅎ

프레이야 2007-08-17 12:06   좋아요 0 | URL
어머, 제이드님 고등학교때 배우셨군요.^^
그 좋은 경험이 뭔지 대략 알 것 같아요. 덥지만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