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은 싫어요. 남자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툭하면 논쟁을 벌이더군요. 아무런 결론도 없는 얘기를 어쩜 그렇게 지치지도 않고 주고받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모님의 말은 약간 매서웠다. 하지만 어감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사모님은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인정받고 거기서 자부심을 느낄 만큼 현대적인 분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더 소중히 여기시는 것 같았다.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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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마음앓이 하는 십대 딸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관심과 애정을 쏟을 대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여러해 전, 친구는 업둥이로 아기고양이를 데려왔다. 사실 데려왔다기보다 어느 집 담벼락 아래 길냥이 어미 고양이가 낳은 여섯 마리 냥이들 중 한 마리를 훔쳐온 거다. 그때 어미냥이와 친구는 눈빛을 교환하였고 냥이는 덤벼들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눈빛을 생각하면 무섭기도 죄스럽기도 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 그 친구는 지금 그 어린 냥이와 썩 잘 어울리는 동거를 하고 있다. 오늘이라고 이름 지어주고 딸아이보다 친구가 더 가까워져서 이젠 오늘이 없는 날은 생각할 수 없는 것 같다. 친구딸은 데려온 냥이한테 관심도 안 보여서 목욕이니 뭐니 친구가 돌보아야 하는 몫이 하나 더 늘어났던 거다. 화분이며 소파며 다 흩어놓고 뜯어놓고 정신없다고 투덜대던 말은 언제부턴가 냥이를 자랑하는 말로 바뀌었다. 사진 찍어서 한번 보여줘봐라 했더니 길냥이는 대체로 이쁜데 이 애는 안 이쁜 편이라고 친구 특유의 한발 빼기를 하더니 사진을 연거푸 보여줬다. 고양이들의 특성과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말할 때, 눈이 반짝이고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언제 왔는지 발치에서 간질거리고 있다고, 안으면 얼마나 폭신한지, 애절하게 쳐다보는 눈빛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알러지 있는 남편이 안방에서 밀려나긴 했다지만.
아직 마음이 낫지 않은 친구딸도 오늘이한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열차 안이다.
매거진에 묘연으로 유명한 고양이시인 이용한과 마당고양이들에 대한 기사가 있어 반갑다.

[어쩌다 보니 고양이작가라 불리게 됐지만 그 역시 이전엔 고양이를 몰랐다. 알게 되니 사랑하게 됐고 사랑하다 보니 슬픈 일도 불편한 일도 많아졌다. 마당 고양이가 열 마리가 넘으니 연출하지 않아도 순간순간이 마당극이다. ]
- 매거진 기사 중에서

슬프고 불편한 일을 감내하기 싫다는 건 진정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는 나도 읽은 책이고 나머지 두 권은 읽지 않았지만 한 권은 가지고 있고. 고양이 사진과 담백한 이야기에 눈꼬리가 흐물흐물해지는 책. 무더운 여름도 시원하게, 아니면 더위를 즐기며, 이것도 저것도 선택인데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는 것 자체도 감사할 일 아닐까 싶다. 삶에는 선택이 불가한 경우들이 어쩌면 더 많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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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02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동물농장’에서 파이프에 낀 새끼고양이 사연이 나온 걸 봤어요. 파이프 밖으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새끼고양이의 모습이 안쓰러웠어요.

프레이야 2015-08-02 12:30   좋아요 0 | URL
에구 불쌍해라. 동물이 제대로 보호 받는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하더군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5-08-03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분은 대단하시네요.
전 한겨울 애기 고양이의 눈빛을 외면했단 이유로 종종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도저히 길냥이들을 데려다 키울 생각은 들지 않네요.
스스로 모질고 못된 여자가 되는 한이 있어도. 정 주고 마음 주고 노력과 시간까지 줄 수는 없다고 다짐해 봅니다.(ㅎㅎ)
혹여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뭔가 제게도 아주 큰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싶네요.
더운데 건강히 잘 지내세요~^^

프레이야 2015-08-03 19:43   좋아요 0 | URL
저도 사진으로 보는 정도만 좋지요 그 이상은 못할 것 같아요. 자신도없구요. 고양이한테 두려움을 느꼈던 구체적 경험이 있어서 더 그렇구요. 그런데 더 본질적인 건 그만한 책임을 지기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큰 게 아닐까 해요. 감당하길 거부하는‥ 더위랑 적절한 거리 두시고 잘 지내세요^^
 

카잔차키스 전집을 사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똘레도와 부르고스, 그외 스페인 곳곳을 일찌기 여행하며 사유한 기록인데 문장에도 통찰에도 격이 있다. 오늘날의 여행기 트랜드에 비교하자면 클라식한 느낌이랄까. 그러면서도 날렵하다.

그는 스페인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슬픈 얼굴의 기사라는 돈키호테의 열정적이면서도 긴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실용주의자인 산초의 멍청한 얼굴이라고. 특히 부르고스와 똘레도에 관한 문장을 따라 기억을 훑는다. 아는 만큼 느끼는 만큼 여행의 진폭이 달라진다는 건 진리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 흔히 창작은 가장 정확하고 고상하게 고백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행과 고백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이었다. 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 그것은 새로운 땅과 바다들, 새로운 사람들과 사상들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마음껏 음미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오랫동안 머뭇거리며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시간이 그것들을 고운 체로 걸러서 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의 정수로 정제시킬 때까지, 내 안에서 조용하면서도 격렬한 결정화가 일어나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보기에 이런 마음의 연금술이야말로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커다란 기쁨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
(프롤로그 중)



똘레도의 은세공사201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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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7-27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 저는 지금 영국기행 읽고 있어요~ 쉽지 않은데 곱씹게하는 그런 맛이 있어요~
팬이 될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5-07-27 21:34   좋아요 0 | URL
그쵸그춍. 지중해, 러시아, 일본 중국 기행 등등‥ 그옛날에 이분은 참 ! 책날개에 전집목록 보니 안정효 번역도 제법 있어요

지금행복하자 2015-07-27 21:42   좋아요 0 | URL
까뮈도 전집 지르고 싶은데.. 이 분까지 왜 이러실까요 ~~ 이럴땐 은행이라도 털고 싶어요 ㅎㅎ
애들 학원을 끊어서 라도 사야하는지...심각하게 고민해야겠어요 ㅎㅎ

프레이야 2015-07-27 22:15   좋아요 1 | URL
ㅎㅎ 까뮈 전집은 작년에 질렀어요

북다이제스터 2015-07-27 21: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창작과 여행의 공통점을 생각하고 있는데요. 둘 모두 과연 대상에 직접 들어 가는 것일까 아님 한 걸음 비켜 관조하는 것일까 란 것에 궁금하더라구요. ^^

AgalmA 2015-07-27 23:47   좋아요 3 | URL
경험하되 그 속에 안주하지 않고 안팎을 모두 살피는 것, 둘 다겠죠^^
우리가 우주로 나아가듯이, 삶에서 삶으로 나아가듯이.

책읽는나무 2015-07-27 23:28   좋아요 2 | URL
댓글들도 멋지네요
한 걸음 비켜 관조하다!
경험하되 안주하지 않고 안팎을 모두 살핀다!
삶에서 삶을 살핀다!
음~~이밤 곱씹게 되는 문장들입니다^^

프레이야 2015-07-27 23:29   좋아요 1 | URL
그쵸그쵸 이래서 알라딘이지요^^

세실 2015-07-27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연금술... 가끔 화가 치밀어 오를때 기억해야겠어요.
카잔자키스 전집이라....저도 고민하렵니다^^

프레이야 2015-07-27 23:10   좋아요 0 | URL
연금술도 세공기술도 필요한 거 같아요. 세실님은 센스쟁이 연금술사에 세공사에요^^

책읽는나무 2015-07-27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카잔차키스 참 좋더라구요!
전집 저도 구입하고 문장들을 곱씹고 싶네요^^
좋은 밤 되세요!!♡

프레이야 2015-07-27 23:52   좋아요 0 | URL
책나무님도 좋은꿈 꾸시는 굿밤요^^

transient-guest 2015-07-30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전집을 한 권씩 사들여 읽고 있지요.

프레이야 2015-07-30 07:25   좋아요 0 | URL
역시! 그렇군요 트란님
 

이타미 준의 작품, 수풍석미술관에 당도한 건
그 아래에 있는 방주교회를 먼저 본 후였다. 아직은 여름의 열기가 대단했던, 하지만 바람결이 확실히 달랐던 작년 9월 첫 주.
홀로 사흘간의 여행을 하기로 마음 먹고 훌쩍 제주로 떠났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만 골라
손수 운전해서 다녔던 맛을 지금 떠올려본다.

수풍석미술관은 최대한 자연의 모습과 성정을 담아낸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맑은 물이 파란하늘을 담고, 바람은 그 소리 한가운데에 나를 서게 하고, 돌은 침묵하며 오히려 한줄기 태양빛에 집중하게 한다. 자연 속에 호젓하게 서 있는 건축물, 수풍석미술관의 안팎은 고요와 평화 그리고 미세하게 감지되는 모종의 흔들림이 공존한다. 세 가지 미술관에 각기 들어서면 오롯이 나만 남아 내가 그곳의 일부가 된다.

수.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 사진기를 맨 폼이 심상치않아 보였다. 수업하는 제자들에게 텍스트로 보여줄 사진을 찍는데 내게 모델이 좀 되어달라고 해서 굳이 딱딱하게 구는 것도 우습고 하여 응낙하고 찍힌 사진들이다. 그러고 나와서 풍.미술관에 갔는데 그곳에선 정말 나 혼자일 수 있었다. 수수한 바람결이 지금도 피부에 닿는 듯하다. 나무문살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소리와 바람냄새, 연한 햇살의 온기로 따뜻해졌다.

다시 나와서 석.미술관을 찾지 못해 뱅뱅 돌고 있자니 아까 그분이 자기차를 따라오라고 했다. 세번째로 온 거라며‥ 그리하야 석.미술관에서는 다시 잠시 사진연출에 가담하게 되었다. 나는 그냥 자연스럽게 나의 시선을 담고 있고 그분은 그런 나를 나도 모르게 담는 식이었다.
석.미술관은 철제로 만든 주황색 단단한 외관에 입구가 오픈되어 있는 수,풍.미술관과 달리 묵직한 철제문을 밀고 들어가게 돼있다. 내부는 어둠 속에 반들반들하고 납작한 돌 하나와 그걸 비추는 태양빛이 묘한 느낌을 준다. 밖으로 나와 우측으로 가니 또다른 돌 하나가 뎅그러니 놓여 있다.


ps : 사람이 들어 있지 않은 사진은 내가 찍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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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26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도 다다오만 생각했었는데, 이타미 준도 대단하군요! 제주갈 때 잊지 말아야 겠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이렇게보니 새롭습니다

프레이야 2015-07-26 16:41   좋아요 1 | URL
수풍석을 나와 조금 더 위쪽으로 가면 안도 다다오의 미술을 감상할 수 있어요. 그날 비행기 시간이 촉박할 듯해 그건 패스했어요

AgalmA 2015-07-2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가깝네요. 전시 인상이 어디 외진 곳에 있는 것 같아 겁먹었는데, 가깝다니 다행입니다!
정보 감사드립니다(꾸벅)

안도 다다오 못 보신 건 좀 안타깝네요...안도 다다오도 제치고 이타미 준을 보시다니 프레이야님도 참...ㅎ

수미술관 사진 프로필 사진 쓰셔도 좋을 정도입니다...사람이 너무 작나;;;

프레이야 2015-07-26 16:49   좋아요 1 | URL
ㅎㅎ저는 수풍석에 한표를 더요!! 안도는 다음기회 있겠지요. 방주교회도 권유합니다

비로그인 2015-07-26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회가 된다면 꼭 가보고 싶네요!

프레이야 2015-07-26 19:04   좋아요 0 | URL
네, 기회 만들어 가보시길 권유해요. 계절별로 시간대별로 다른 느낌일 것 같아요. 저는 오후였습니다.

책읽는나무 2015-07-26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멋있어요^^
님이 담긴 사진이나 담기지 않은 사진이나 모두요!!

프레이야 2015-07-26 19:04   좋아요 0 | URL
호호 고맙습니다. 추억을 부르는 사진들

지금행복하자 2015-07-26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너무 멋있어요~~ 엄지 척!!

프레이야 2015-07-26 19:05   좋아요 0 | URL
엄지 척! 쌩유에요

단발머리 2015-07-26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주도에 여러번 갔다온 저는 제주도 가서.... 도대체 뭘 하고 온 건가요?
사진이 하나 하나 모두 멋있습니다.
제주도 가게 된다면, 꼭 가봐야겠어요!!!

프레이야 2015-07-26 19:13   좋아요 0 | URL
그쵸. 저도 갈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게 제주에요. 제주에 이타미 준의 다른 작품, 포도호텔도 있어요. 자연친화적 건축미로 명품호텔로 유명해요. 숙박비가 좀 고가인 거로 알고 있어요. 다음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랍니다.

양철나무꾼 2015-07-26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으로 글로 두루두루 눈이 호사를 누리네요~^^
게을러서 갈 엄두는 못내고 대리만족하고 갑니다~^^

프레이야 2015-07-26 21:03   좋아요 0 | URL
휴가는 집나간책!으로. ㅎㅎ 리뷰 보고왔어요. 탁월한선택 같아요

수퍼남매맘 2015-07-27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다시 제주도 복습하다가 님이 올려주신 미술관에 대한 소개글을 보게 되었답니다.
반갑더라고요.
제주도에 다시 가게 되면 이 곳에 꼭 가봐야겠어요.
혼자 떠다는 여행도 멋지고, 사진도 정말 감동입니다.

프레이야 2015-07-27 23:12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제가 다 반갑네요. ㅎㅎ 하나씩 또 소개할게요. 겹치거나 다르거나‥ 모두 좋지요. 경험과 느낌을 나눌 수 있어서요.
 

■ 사과를 내밀다



1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담장 가에 달려 있는 사과들이 불길처럼
나의 걸음을 붙잡았다

남의 물건에 손대는 행동이 나쁜짓이라는 것을
가난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만
한번 어기고 싶었다

손 닿을 수 있는 사과나무의 키며
담장 안의 앙증한 꽃들도 유혹했다

2

콧노래를 부르며 골목을 나오는데
주인집 방문이 열리지 않는가

나는 깜짝 놀라 사과를 허리 뒤로 감추었다

마루에 선 아가씨는 다 보았다는 듯
여유있는 표정이었다

3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다시 놀랐다

젖을 빠는 새끼를 내려다보는 어미 소 같은 눈길로
할머니는 사과를 깎고 있었다

나는 감추었던 사과를 내밀었다, 선물처럼



■ 국수



젓가락을 구멍 속에 넣고 눈을 감은 채
국수 가락을 건져 올리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집는 양만큼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으로
친구들이 마련한 생일 행사였다

나는 눈을 감고
손에 힘을 주었다
하나, 둘, 셋, 친구들의 외침에 따라 젓가락을 모았다

어쩌나...... 젓가락이 헐거웠다

됐네, 친구들의 만류에
흔들리는 그림자 같은 마음으로 눈을 떠보니
젓가락이 커다란 그릇에 담겨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눈감고 젓가락에 힘을 주는 순간
친구들이 그릇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나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친구들은 박수를 쳐댔다
나는 부끄러웠지만 그득한 국수 한 그릇에 마음이 놓였다




□ 눈썹이라니까요
-아라비안나이트


1

아픈 마음에 쓸 약초를 구하러
어느 산골에 이르렀는데
한 사내가 마을 어귀에 헌병처럼 서서
사람들을 잠깐씩 제지했다가 들여보내고 있었다
살짝 다가가서 보니
소꿉장난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어디가 잘생겼나요
코지요

어디가 잘생겼나요
입술이지요

사람들이 자신의 잘생긴 곳을 말하면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코도 낮고 입술도 두껍고 눈도 작고 피부도 거친데
서로 인정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2

어디가 잘생겼나요
눈썹이지요

사내는 내 눈썹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3

어느덧 날이 저물어
막아섰던 사내는 일과를 끝냈다는 듯
자리를 뜨려고 했다

나는 다가가 외쳤다, 눈썹이라니까요!



- 맹문재 시집 / 사과를내밀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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