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이리스 > 사진작가 셀리 만, 작품들

셀리 만 (Sally Mann 1951~ )

사진이 발명된 이후 지금까지 가장 많이 찍혀진 대상은 아마 가족사진일 것이다. 사진이 발명된 이유가 궁극적으로 우리의 기억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한 개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기억될만한 역사적인 기록들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나를 포함한 그 자신의 가족들이 아닐까.

Shiva at Whistle Creek, 1992
시대에 따라 신체를 바라보는 관점은 변한다. 특히 현대사회의 이미지 중심의 시선은 인간의 신체를 바라보고, 기록하는 방식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세밀화 되었고, 더 깊숙이 고도화 되었다. 사진의 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신체는 잠시도 그대로 놓여 있지 않았다.

자신의 신체를 담은 사진은 이제 더 이상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거울의 반사된 이미지가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거울에 투사된 욕망이며, 통제와 감시의 시선에 결코 자유롭지 못한 위태로운 모습이다.

특히 요즘 같은 이미지 시대에는 시각 이미지를 통해 더 많은 것을 파악하게 한다. 비록 그 것이 자신의 신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통제 밖에 놓여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주민등록사진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 해주는 기능을 하지만 동시에 감시와 통제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우리자신은 잘 알고 있다. 하물며, 가족사진조차도 그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주체의 분열을 경험하는 증거이다.

Jessie at Five, 1987 (왼쪽) At Twelve, 1989 (오른쪽)
자신의 신체를 담은 사진은 이제 더 이상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거울의 반사된 이미지가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거울에 투사된 욕망이며, 통제와 감시의 시선에 결코 자유롭지 못한 위태로운 모습이다.

가족사진은 대부분, 그 가족 구성원들의 능동적인 입장에서 찍혀진다. 요즘처럼 집집마다, 카메라가 있는 경우에는 가족 중 누군가가 손쉽게 사진을 찍을 것이고, 비록 타인이 찍어주는 경우에도 가족들의 입장이 반영되게 마련이다. 전문적인 사진관 아저씨가 찍어주는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인데, 가족들 간의 숨겨진 갈등이라든가,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비밀스러운 장면, 이야기들에 대해서 찍혀지기 만무하기 때문이다.

사진관 아저씨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 이다. 즉, 그가 가족들에게 포즈를 요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족이 품고 있는 욕망에 딱 들어맞는 것들이다. ‘빅터 버긴’의 말을 빌려 표현 하자면, 가족사진은 사진가와 가족간에 긴밀한 공모 관계를 형성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가족사진의 형태는 가족구성원의 사회적 욕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문화적인 코드가 덧씌워져 있는 상태이다.

결국, 사진이 이 사회에 출현한 이후 이제 까지 모든 가족사진앨범 속에는 가정의 행복과 화목을 보여주기 위한 연대의식의 보관 창고이자 증표였다. 때문에 가족 구성원은 사진 찍힐 때 수동적인 상태로 사진가의 시선에 결코 압도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사진은 사진가의 주관적인 의식이 비교적 개입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역 이용 했을때, 가족사진이야 말로 기존의 코드에서 쉽게 벗어나는 영역이 있지 않을까?



Candy cigarette, 1989

아마추어 사진가에서 출발하여 현재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셀리 만 (Sally Mann)은 버지니아의 벽촌에서 오두막을 짓고 자신의 두 딸과 아들과 함께 살면서 자녀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사진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이다.

즉, 가족사진을 찍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그녀는 가족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가족사진 형태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찍은 사진은 가족간의 친밀한 유대감이나, 화목한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기 위해서 가족 구성원들이 스스로 연기하는 듯한 그런 상투적인 스타일의 사진이 아니다.

찍혀진 대상이 가족일 뿐 형식적인 면에서는 가족사진의 스타일에서 완전히 이탈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사진들이 가족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가족사진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



Immediate Family,1992
셀리 만은 1951년 미국 버지니아 렉싱턴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곳에서 작업을 하며 살고 있다. 그의 초기 사진들은 <직계가족"Immediate Family">라는 이름의 시리즈로 그녀의 세 아이와 남편을 찍은 사진들 이었다. 그 시리즈 중에 특히 그녀의 세 아이를 피사체로 촬영한 사진은 8"x10" 대형 구식 카메라를 사용해 주변부가 어둡고 흐려진 효과(비네팅 효과)로 인해서 그녀가 자신의 자녀들을 은밀히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보이고 있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자녀들에게 투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아이들이 어머니의 욕구에 맞추어 잘 훈련된 연기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거기에는 에로틱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만든다.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사회적인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그 어디에도 없음에도 말이다.



Immediate Family,1992
셀리 만의 사진은 보통 어머니들이 자녀들의 귀엽고, 예쁜 모습을 담으려는 의지와는 다른 것 이었다. 공통적으로 일반적인 어머니들이 찍는 아이들의 모습은 거의 비슷하다. 아이들은 언제나 천사와 같이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다. 그들의 고통이나, 심리적인 갈등이 들어날리 없다. 적어도 아이들이 성적인 욕망의 대상이 대거나, 기묘한 분이기를 자아내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찍혀져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다.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만을 원하는 어머니들의 욕망은 결국 사회적인 코드에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베이비 포토가 성행하는 요즘, 아이들 사진을 전문으로 찍어주는 사진관에 가보면, 거의 환상 그 자체 이다. 만화 주인공들이 꿈꾸는 미래의 판타지를 과장된 의상과 무대 속에서 배우처럼 연출을 해가며 찍는 아이들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이를 바라보는 어머니들은 흐뭇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들의 세계를 통해서 어른들이 꿈꾸는 간절한 환상인 셈이다.

베이비 포토의 천편일률적으로 찍혀져 나온 아이들의 사진에서 내 아이의 진정한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어딘가 찝찝하다. 사실 환상이란 욕망에 의해 생겨나게 되는데, 자크 라캉에 의하면 욕망은 결핍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한다.

그런 결핍에 의해 생겨난 욕망은 실제적인 충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항상 가상의 충족, 즉 환상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셀리 만의 사진은 엿보기 형태의 은밀한 시선으로 개인적인 욕망의 투사로 보인다는 점에서 탈 코드화 되어있다.


Virginia, Emmet and Jessie, 1989
셀리 만은 촬영 시 “결코 두 번 포즈를 취하게 하지 않는다.”고 그의 작품집 열 두살[At Twelve]의 서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즉, 미리 염두에 둔 포즈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의 작업이 자신의 아이들과 일정한 교감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자연스러움을 찍겠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자신의 아이들을 피사체로 해서 물장난 이라든지 낮잠 이라든지, 일상의 아무렇지도 않은 풍경을 찍고 있었지만 이 작품들은 열 두 살의 아이들이 갖는 느낌들 예를 들면, 친구에 대한 질투와 물건에 대한 소유욕 그리고 그들만이 세계에서 보여지는 원초적인 본능(성인들과 비교하기 어려운) 등.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상태를 섬세하고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를테면 보통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먼, 이질적인 세계가 담겨 있지만, 보다 더 아이들의 세계가 극명하게 들어난다는 점에서 어른들의 시선이 배제된 상태 즉, 어른들의 아이들에 대한 환상을 제거한 것이다.


At Twelve, 1989

[At Twelve]는 셀리 만의 공식적인 데뷔작에 속한다. 1977년에 워싱톤 D.C. 코오코란 미술관(Corcoran Gallery of Art)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그녀의 가장 대표적인 사진들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그녀는 시골인 남서부 버지니아를 배경으로 그녀의 세 자녀를 찍은 ‘구성적 다큐멘터리’인 <직계가족“Immediate Family”> (1992) 연작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여기에는 [워싱톤 포스트]지를 비롯한 보수적인 언론매체들이 비평가들을 통해서, 맹비난한 것에 힘입은바 크다.

그녀는 아이들이 보통 성장기의 겪게 되는 일상적인 면을 진솔하게 그려냈다고 주장 한다. 그러나 미국의 보수적인 단체에서는 그녀의 사진 대부분이 “아이들의 누드나 다친 모습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아이들이 순수성이 결여된 유년시절의 모습을 찍은 셀리 만의 작품은 그녀의 사진을 위해서 아이들이 잠재적인 폭력과 외부의 충격을 앞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Immediate Family]가 [아파추어]을 통해 작품집으로 출간되고, 그해 필라델피아 현대 미술관(Institute of Contemporary Art)을 출발로 순회전이 시작되자 그녀의 작품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 본격화 되었다. 그것은 아이들을 관능적이거나, 위험에 처한 상태에서 찍은 사진들은 아동학대에 관한 혐의가 있다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러한 논쟁이 들어내는 사실은, 가족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뒷받침하는 논리가 숨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 내 보수층들의 절대가치인 가족주의를 지켜 내고자 하는 집단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좀 과장되게 표현하면, 현대사회에서 상실된 전통적 가족의 가치를 가족사진에서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벽한 가족이나, 화목한 가정이라는 실체가 과연 존재 하는가?



한편 초기에 그녀의 가족과 주변을 촬영하던 샐리 만은 최근 알라바마, 미시시피, 버지니아의 풍경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대형 포맷의 필름이 주는 섬세한 디테일과 깊은 피사계 심도를 사용하여 정밀한 표현을 주로 하는 기존의 풍경 사진과는 크게 다르다.


Mother Land series
[Immediate Family]사진들이 직접적이고, 솔직한 다큐멘터리 형식에 가깝다면, 어머니의 땅[From the, Mother Land series, 1996.]은 스크래치가 있고 빛을 먹어 포그가 있거나 초점 까지 심하게 흔들려 있어 마치 기억을 더듬는 인상을 받는다.

어머니의 땅[Mother Land]사진은 그녀의 아이들이 뛰 놀았을 것 같은 집 주변의 환경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전에 가족을 찍은 사진과는 어떤 연관성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이이들을 찍었던 초기 사진의 충격성은 여기서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서정적이다 못해 몽환적이기 까지 하다. 필자는 여기서. 혹시 그녀는 아이들 사진을 통해서 자신이 잃어버린 과거의 모습을 보려 했던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져 본다.

그녀의 사진은 현실에서 만들어내는 환상을 꿈꾸는 가족사진이 아니다. 결코 어울리지 않고,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장면을 포착해 낸다. 그리고 그것은 포장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없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글: 이영욱(중국 연변대학교 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rxli@ybu.edu.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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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슬비 > '오만'한 남자와 '편견'에 빠진 여자의 결혼기


[오마이뉴스 임흥재 기자]
 
ⓒ2006 민음사
제인 오스틴의 원작을 영화화한 <오만과 편견>이 상영 중입니다. 이 작품은 제인 오스틴이 1813년에, 자신의 소설 '첫인상'을 개작해 출간했습니다.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영국 BBC 등을 통해 네 차례나 미니시리즈로 제작됐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고전입니다.

오늘의 고전독법

 
사형수에서 성공회대 교수로 신분이 바뀐 신영복님('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의 저자)은 자신의 고전강독을 정리하여 출간한 <강의>(돌베개)의 머리말에서 고전을 읽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고전을 읽는 이유가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고전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단순히 그 시대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암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굳이 E.H. Carr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정의를 빌지 않아도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들여다보고 미래의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여야 한다는 점에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고전을 읽는 우리의 자세가 그와 같습니다. 고전에서 배우는 값진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고전은 새로운 현대의 정신과 풍속을 이어받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는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몫이고, 독자들에겐 열린 정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음사가 야심 차게 준비해 내놓은 세계문학선은 새로운 고전 독법의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어엿한 우리문학으로 읽히리라 자부하면서 새로운 감동과 전율을 고대하는 젊은 독자들에게 떳떳이 이 책들을 추천한다."(출판사의 추천사 중에서)

<오만과 편견>은 88번째 결실입니다. 지난 3월 영미문학회의 '번역작품 샘플평가'에서 당당히 대상을 수상하며 번역문학의 최고봉을 차지했습니다. 윤지관, 전승희 두 영문학자의 10년에 걸친 수고가 고스란히 작품 속에 녹아 있고 당대 인물들이 오늘의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 성큼 우리 앞으로 걸어 나옵니다.

제인 오스틴 문학의 묘미라 할 수 있는 '묘출화법'(직접화법과 간접화법 사이의 중간화법으로 인물의 심리 상태 등이 잘 드러난다)의 적절한 구사와 풍자, 현대 풍속에 맞는 어휘의 선택 등은 독자들을 단박에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다양한 인물들과 소위 '신데렐라 플롯'이라 할 수 있는 줄거리 그리고 사랑과 결혼에 이르는 연인들의 탁월한 심리묘사는 두터운 책의 무게를 거의 느낄 수 없도록 합니다.

오만과 편견을 넘어선 우여곡절 결혼 이야기

 
▲ 영화 <오만과 편견>의 포스터, 신성 키이라 나이틀리(엘리자베스 베넷 역)의 청순한 외모가 어디선 본 듯 하다.
ⓒ2006 UIP 코리아
하트퍼드셔작은 마을에 사는 베넷가에는 다섯 자매가 있습니다. 위 두 딸이 결혼 적령기에 이르렀습니다. 근처 네더필드에 귀족출신 빙리가 세를 얻어 이사 옵니다. 딸들을 결혼시키기 위해 안달하는 어머니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입니다. 큰 딸 제인은 온순하고 사려 깊으며 내성적인 예쁜 아가씨인 반면에 동생 엘리자베스는 쾌활하고 인습에 구애받지 않는 재기 발랄한 처녀입니다.

빙리와 제인은 서로 호감을 갖지만 내성적인 제인은 쉽사리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빙리의 친구인 다아시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청년 귀족입니다만 남을 관찰하고 냉정하게 평가하기를 즐기는 엘리자베스의 눈에는 자부심만 강하고 남에 대한 배려에는 인색한 오만한 청년으로 비칠 뿐입니다.

사랑에는 운명의 장난이 깃드는 법이어서 제인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 빙리는 제인을 떠나고, 오만하고 신분의 우월을 고집하는 다아시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게 됩니다. 베넷가의 어머니와 아래 세 동생의 천박성을 이유로 내세우며 우유부단한 빙리를 제인에게서 떼어놓은 오만한 청년 다아시가 말입니다. 그것은 다아시에게 견디기 힘든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엘리자베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그는 결코 즐겁거나 행복해보이지 않습니다.

"그녀의 신분이 열등하다는 것, 그런 결혼은 집안에 수치라는 것, 그녀의 집안을 생각하면 이성은 언제나 감정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 등을 하나하나 열심히 설명했는데, 그렇게 열을 올리는 것은 지금 자신이 스스로 손상시키고 있는 그 신분 때문인 듯했지만, 그의 청혼에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268쪽)

"애를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 봤자 안 될 것 같습니다. 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열렬히 사모하고 사랑하는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267쪽)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해서 알 수 없지만 이 장면에서 다아시의 표정이 너무나 궁금해집니다. 신분과 교양의 차이에서 오는 회피하고 싶은 대상에게 사랑의 감정을 고백해야 하는 다아시의 곤혹스러움은 활자만으로도 충분히 그려집니다. 엘리자베스의 당돌한 거절은 또 얼마나 당당한가요?

그런 연인들이 오만과 편견을 넘어서 우여곡절 끝에 결혼합니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사랑은 제인과 빙리의 사랑을 이어지게 하는 가교이기도 하답니다. 결코 첫인상이 그 사람의 진면목이 아니라고 깨닫는 과정에서 갈등과 오해를 풀어가는 연인들의 심리가 무척이나 세심하고 재미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경박하고 젠체하는 사촌 콜킨스에서부터 위컴과 사랑의 줄행랑을 치는 막내 리디아에 이르기까지 적절한 인물 배치는 소설의 재미를 잘 살립니다.

▲ 영화 <오만과 편견>의 한 장면
ⓒ2006 UIP 코리아
전근대와 근대 사이

<오만과 편견>을 젊은 남녀의 연애와 사랑이야기로만 읽는다면 앞서 말한 참다운 고전독법은 되지 못합니다. 그들이 살던 시대는 근대 여명이 동트기 시작한 무렵으로 보입니다. 중세의 신분질서인 귀족 출신 두 청년, 콜킨스가 성직 임명될 때부터 후견인 역할을 하는 캐서린 영부인, 베넷가의 이웃인 월리엄 경 등은 전근대 사람들입니다.

베넷가는 귀족은 아니지만 생활하는데 크게 부족하지 않은 중간계급의 지주 정도로 보입니다. 그의 삼촌들은 런던에서 제법 알려진 상인이거나 변호사입니다. 군인으로 등장하는 피츠 윌리엄 대령이나 위컴 등은 아마도 몰락한 귀족가문 자제들 같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상속재산이나 노리는 걸 보면, 위컴을 전근대의 인물이라 불러야 할지 의문이 듭니다.

이처럼 귀족계급이 존재하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몰락한 귀족이 등장하고 한편에선 한참 번성하기 시작한 상업과 기술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상인(시민)계급과 변호사를 비롯한 독립자영업자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서서히 여물고 있는 근대의 봉우리들이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럼에도 구시대의 신분질서가 강하게 남아 있고 새로운 질서의 형성이 미성숙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시대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가는 중간쯤으로 여겨집니다.

베넷 자매를 결혼시키려는 어머니의 안달은 특별한 생계수단이 없었던 그 시절 여성들의 위치를 단적으로 설명합니다. 돈 많은 사람과의 혼인이 내일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지요. 특히 베넷가처럼 아버지의 재산이 한정 상속(저도 이 제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릅니다)으로 사촌 콜킨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제도의 피해자들에게는 더욱 절박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베넷 자매, 특히 둘째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청혼을 거절하고, 미모와 집안이 아니라 활달한 재치와 지성 같은 근대 미덕으로 결혼을 성취한다는 면에서 이 시기는 근대의 밀물에 발을 담근 때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재산이나 신분, 교양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이끌려 결혼을 하는 두 귀족자제의 선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산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연애를 성취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그대로 전근대와 근대로 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그밖에도 소설 속에는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짐작하게 하는 많은 징후들이 나옵니다. 외적 조건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규범과 개인의 성품과 선택을 중시하는 새로운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충돌하는 모습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제인 오스틴의 업적은 바로 전근대와 근대, 구질서와 새로운 정신의 대립과 충돌이 일어나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시각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역자의 표현처럼 영국적 중용일 수도 있을 것이며 합리성에 근거한 타협의 산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람이 봄을 시샘하는 어수선한 계절에 영화관 옆 문학카페에 들러 제인 오스틴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보고 읽으며, 때로는 무심한 시선을 창밖으로 던지며 마시는 커피 한잔,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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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oni > 3월의 마지막 날

가까운 곳의 책잡기놀이

1. 가장 가까운 책을 집으세요.
2. 그 책의 23쪽을 펼치세요.
3. 다섯 번째 문장을 찾으세요.
4. 이 지시문과 함께 그 문장을 블로그에 적어 보세요. 

이미지 출처 : http://www6.plala.or.jp/un-sui_tei/

 

오늘의 문장 : 그러나 요괴의 감각은 역시 사람과는 미묘하게 달라서, 오늘처럼 곤란해질 때가 있다.
- 하타케나카 메구미, <샤바케>

요즘 계속 끼고 살고 있는 <샤바케>. 잠잘 때도 머리맡에 두고 잡니다.
알라딘 마을에 '23쪽의 다섯째줄' 놀이가 유행하는 모양이네요. '미묘하게 달라서' 어리둥절.

그리고 조금 다른 이 놀이의 포인트는 그 한 줄로 책이름을 맞추는 것.
왕래가 활발한 서재라면 그런 놀이가 더 재미있겠죠.
게다가, 책이름을 맞추는 놀이라니, 과연 대단한 내공들이라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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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4-0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자연이 만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길 원하지 않는다.(장 자크 루소/에밀)
 

아름다운 열두 달 우리말 이름

 

아름다운 열두 달 우리말 이름

1월 해오름 달 - 새해 아침에 힘 있게 오르는 달 2월은 시샘 달 - 잎샘추위와 꽃샘추위가 있는 겨울의 끝 달 3월은 물오름 달 - 뫼와 들에 물오르는 달 4월은 잎 새 달 - 물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 돋우는 달 5월은 푸른 달 - 마음이 푸른 모든 이의 달 6월은 누리 달 - 온 누리에 생명의 소리가 가득 차 넘치는 달 7월은 견우직녀 달 - 견우직녀가 만나는 아름다운 달 8월은 타오름 달 - 하늘에서 해가 땅 위에서는 가슴이 타는 정열의 달 9월은 열매 달 - 가지마다 열매 맺는 달 10월은 하늘연 달 - 밝달 뫼에 아침의 나라가 열린 달 11월은 미틈 달 - 가을에서 겨울로 치닫는 달 12월은 매듭 달 - 마음을 가다듬는 한 해의 끄트머리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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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4-01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예쁘네요

세실 2006-04-0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참 아름다운 우리말 입니다~

水巖 2006-04-0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쁜 우리 말이 멋진 그림과 함께 있군요. 추천하고 퍼 갑니다.
 

벚꽃에 대한 오해와 편견   
<퍼온글>

23379[20050421085038].jpg

 

올해에는 개화 시기가 조금 더디기는 하지만 북상하는 꽃소식들과 더불어 남녘에서는 벌써 벚꽃축제 준비가 한창 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 화사한 봄에 전령인 벚꽃에 대해 몇가지 막연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중에는 벚나무 원산지가 일본이라는 오해와 벚꽃이 일본의 국화라는 잘못된 편견이다.


우선 일본인들이 벚꽃을 좋아해 도시 미화용으로 벚나무를 많이 심은 것은 사실이지만 원산지는 엄연히 우리나라이다.

예로부터 우리 산야에는 벚나무 개 체수가 많았고 지금도 시골 야산에서는 자생하는 개 벚나무가 흔히 발견되고,  희귀종인 참 벚나무도 많이 분포돼 있다.


여러 종류의 벚나무 중에서도 꽃이 가장 화려하고 풍성해 가로수로 애용되는 왕벚나무의 경우  원산지는 단연 제주도다.

 

이러한 사실은 1932년 일본인인 코이즈미 (小泉) 박사에 의하여 일본 학계에도 보고되었다.

그런데 일부 일본의 국수주의적 학자에 의하여 이설이 제기되어 널리 일반화 되지 않아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와는 별도로 2003년에는 우리나라 산림청 임업 연구원에서 왕벚나무를 대상으로 DNA 지문 분석을 수행한 결과  왕벚나무의 원산지는 제주도 한라산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도 밝혀졌다.


또한 일본의 국화가 (國花) 가 벚꽃(사꾸라)가 아니냐  하는 설도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예중 하나이다.

과거 일본은  왕실의 상징과 문장(紋章)이었던 국화(菊花)가 사용되고 있었을 뿐 일본의 국화로 벚꽃이 따로 정해진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


벚꽃의 열매인 “버찌”[cherry]라는 말도 현재 일본어로 알고 있기 쉬우나 이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한마디로 벚꽃은 일본인들이 좋아해  많이 증식하여 심고 가꾸었을 뿐이다.


벚나무는 모두 17종으로 '한국동식물도감'에도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순수하게 자생하는 토종 벚나무는 5종이다.

특히 한라산 신예리에  자생하는 왕벚나무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56호로도 지정되었다.


따라서 벚꽃을 막연히 일본 국화라고 생각하고 멀리하거나 색안경을 끼고 싫어할 이유는 없다

 

올 봄에도 여전히 만개한 벚꽃은  눈송이처럼 화려한 자태를 뽐낼 것이다.

 

언제나 설레임으로 다가오는 봄,  우리의 산야에 핀 진달래와,개나리처럼 벚꽃에 대한 오해을 버리고 연인 , 가족과 함께 마음껏 벚꽃을 감상 하여도 좋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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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6-04-0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에 제멋대로 금을 긋고 이런저런 굴레를 씌워 좋아했다 싫어했다... 인간이란 참 제멋대로인 존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토종 벚나무의 존재에 새삼 안심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