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sie at Five, 1987 (왼쪽) At Twelve, 1989 (오른쪽) 자신의 신체를 담은 사진은 이제 더 이상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거울의 반사된 이미지가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거울에 투사된 욕망이며, 통제와 감시의 시선에 결코 자유롭지 못한 위태로운 모습이다.
가족사진은 대부분, 그 가족 구성원들의 능동적인 입장에서 찍혀진다. 요즘처럼 집집마다, 카메라가 있는 경우에는 가족 중 누군가가 손쉽게 사진을 찍을 것이고, 비록 타인이 찍어주는 경우에도 가족들의 입장이 반영되게 마련이다. 전문적인 사진관 아저씨가 찍어주는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인데, 가족들 간의 숨겨진 갈등이라든가,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비밀스러운 장면, 이야기들에 대해서 찍혀지기 만무하기 때문이다.
사진관 아저씨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 이다. 즉, 그가 가족들에게 포즈를 요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족이 품고 있는 욕망에 딱 들어맞는 것들이다. ‘빅터 버긴’의 말을 빌려 표현 하자면, 가족사진은 사진가와 가족간에 긴밀한 공모 관계를 형성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가족사진의 형태는 가족구성원의 사회적 욕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문화적인 코드가 덧씌워져 있는 상태이다.
결국, 사진이 이 사회에 출현한 이후 이제 까지 모든 가족사진앨범 속에는 가정의 행복과 화목을 보여주기 위한 연대의식의 보관 창고이자 증표였다. 때문에 가족 구성원은 사진 찍힐 때 수동적인 상태로 사진가의 시선에 결코 압도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사진은 사진가의 주관적인 의식이 비교적 개입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역 이용 했을때, 가족사진이야 말로 기존의 코드에서 쉽게 벗어나는 영역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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