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바람이 몹시 불었다. 약한 머리카락이 바람 부는 날이면 형편없이 날려 엉킨다. 아직 봄기운을 느끼기엔 성급하다싶었는데 그런 바람 사이로 햇살이 살짝 봄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볕이 좀 다르다. 어느새 3월3일이다! 또 어디로든 가야한다.

지난 금요일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서면서 차를 받아 오늘 정비공장에 맡겼다. 문짝 하나를 갈아야한다. 뭐야 아마추어같이. 아무튼 급하게 다니면 안 된다. 봄맞이 액땜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좀 여유있게 느긋하게 가지라는 뜻으로 접수하자. 그래도 동생이 아는 곳으로 데려가서 견적이 상당히 적게 나왔다. 오랜만에 버스 타고 전철 타고 다시 택시 타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희령이 좋아하는 타코야끼 사서 급히 왔다. 그걸로 영어학원 좀 쉬겠다는 걸 다독여주고 좀 어려워졌다고 포기하지 말고 그 고개를 잘 넘어보자고 격려도 해줬다. 그런데 반응은 시큰둥하다. 6학년인데 덩치는 나보다 훨씬 크다. 오늘 대학교 입학식이 있었는지 거리에 학생들이 부쩍 많았다. 피할 수 없는 상황들, 마음과 같지않게 돌아가는 것들, 냉정히 내치기가 쉽지않은 것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희미하고 아득한 것들... 마음도 스산한데 저녁바람이 꽤 차다. 

김훈의 <공무도하> ,

낭독을 하기에 부드러운 문장이 아니고 어떤 문장은 너무 길어 호흡이 힘들었지만 오늘 다 읽고 나니 역시 독특한 여운이 있다. 이게 김훈 소설의 매력이라는 생각도 든다. 분명 묘한 개성이 있다.      

                                        강의 저편으로 가지 못하고 기어이 강의 이편에서 살아남아, 살아나가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신문 사회부 기자 문정수, 전직소방관 신부전증 환자 박옥출, 악력이 부족한 노학연대 장철수, 그와 소맷부리가 닮은 타이웨이 교수 그리고 그의 글을 연모하는 노목희. 1등이 아닌 자들의 이야기. 그외, 베트남 여인 후에, 크레인 무한궤도에 깔려 죽은 여고생 방미호, 그의 아비 방석천, 키우던 개에 물려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는 오금자. 홍수, 화재, 매립, 미군기지, 철거 등등의 상황. 감정이 최대한 거세되어 있는 냉정한 문장.

 기자라는 직업의 특수성과 현장감이 잘 살아있는 대목들, 김훈 특유의 가슴 서늘한 표현들, 강직한 문장, 툭툭 치고 나가는 거두절미한 상황전개, 매력적인 관념어들로 이어지는 사유 부분. 특히 파미르고원이 원산지라는 '파'에 대한 사소하지만 깊은 사유. 라면과 김밥과 파. 때로는 치열하고 때로는 느긋하게.

 뒷표지의 글과 작가의 말이 또 가슴에 남는다.  

 

   
 

"나는 인간 삶의 먹이와 슬픔, 더러움, 비열함, 희망을 쓸 것이다." 

'공무도하'는 옛 고조선 나루터에서 벌어진 익사사건이다. 봉두난발의 백수광부는 걸어서 강을 건너려다 물에 빠져 죽었고 나루터 사공의 아내 여옥이 그 미치광이의 죽음을 울면서 노래했다. 이제 옛노래의 선율은 들리지 않고 울음만이 전해오는데, 백수광부는 강을 건너서 어디로 가려던 것이었을까. 백수광부의 사체는 하류로 떠내려갔고, 그의 혼백은 기어이 강을 건너갔을 테지만, 나의 글은 강의 저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강의 이쪽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가의 말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나는 맑게 소외된 자리로 가서, 거기서 새로 태어나든지 망하든지 해야 한다. 시급한 당면문제다. 

나는 왜 이러한가. 이번 일을 하면서 심한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쓰기를 마치고 뒤돌아보니, 처음의 그 자리다. 남은 시간들 흩어지는데, 나여, 또 어디로 가자는 것이냐. 

2009년 가을에  김훈 쓰다

 

 다음 녹음할 책은 <희망을 심다>이다.   

박원순이 당신께 드리는 희망과 나눔,이라는 부제가 적혀있다.

박원순 변호사의 지승호 인터뷰집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대화가 궁금하다. 

 

 

 

 

 

 

 


댓글(2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10-03-03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저 '아'라고 할 수밖에 없는 페이퍼네요. 김훈 글은 읽다 보면 나도 같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 좋아요. 그런데 프레이야님 낭독, 녹음이라는 대목에서 음? 프레이야님은 무얼 하실까? 하고 주제넘은 호기심이 치밀어 올랐답니다.^^;;

그리고 작가의 말 너무 좋죠! 저는 저 부분 읽고 역시 김훈은 우리와는 다른 비범한 족속임에 분명하다고,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참, 그리고 저도 처녀자리예요! 괜히 공통점 하나 찾아서 반가워하고 갑니다.~

프레이야 2010-03-03 22:42   좋아요 0 | URL
네, 김훈은 그런 족속임에 분명할 거에요.ㅎㅎ
저에게도 시급한 당면문제에요.
앗, 별자리 같군요.
그럼 취향이나 성격도 얼추 비슷한 부분이 많겠어요. 반가워요^^
낭독녹음은 점자도서관 봉사일이에요. 무조건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좀더 멋지게 하고 싶은데, 사실은 그냥 편하게 읽는답니다.

마녀고양이 2010-03-04 08:24   좋아요 0 | URL
와,, 프레이야님 대단하시네요.
게으른 저로서는 그런 봉사일을 하시는 프레이야 님께 감탄하고 있습니다.
멋지게 낭독하실 듯 해요,, '천국의 책방' 낭독자처럼.

프레이야 2010-03-04 11:36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천국의 책방,은 읽지못했어요.
그 책에 낭독자가 나오나보군요.^^
멋지게 하고싶은데 마음만요.^^

꿈꾸는섬 2010-03-03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망을 심다> 저도 궁금해요.^^

프레이야 2010-03-03 22:40   좋아요 0 | URL
그죠? 읽어보고 말씀드릴게요^^

춤추는인생. 2010-03-03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김훈하면 춤인생이죠^^
살아남기 위해서 불가피 하게 더렵히 지는 인간이 아름답지 인간은 반드시 더럽혀지게 돼 있으니까. 더렵혀 지지 않아 보이는 아름다움을 보면 신뢰가 가지 않죠. 살아 있다는건 더러운 세계와 타협하고 흥정했다는 거니까...
전 김훈이 말하는 혐오가 연민으로 읽혀지곤 해요...

사춘기 들어 사진찍기 싫어하던 희원이처럼 희령이도 그럴나이가 왔겠어요.. 희령이 궁금해요. 혜경님.
늦게 왔지만 봐주세요.. 보고싶었어요^^

프레이야 2010-03-04 01:19   좋아요 0 | URL
와락~ 암요암요^^
김훈에 대한 님의 애정은 따라갈 사람이 없죠.
혐오는 연민의 다른 이름일걸요.
공무도하에도 역시 혐오와 연민이 동시에 읽혀요. '던적스러운' 인간들.
령인 많이 컸어요. 사진 보시면 아마 깜짝 놀랄거에요.ㅎㅎ

라로 2010-03-04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어떤 지기님이 댓글을 다셨는데 3월 3일이니 삼겹살 많이 먹었냐고,,,ㅎㅎ
대전은 바람이 오후 늦게부터 불었는데 역시 바다가 가까운 부산은 바람이 먼저 인사를 하는군요!!
님과의 만남 이후로 님을 떠올리며 의식적으로 아이들에게 잔소리 안하려고 노렸했더니
잔소리가 아주 쪼금 줄어든것 같긴해요~.ㅎㅎㅎ
오늘 제 딸아이에게 웨이브 파마를 해주고 커트를 쳐줬더니 아주 행복해 하네요~.ㅎㅎㅎ
내일 학교에가서 생활지도선생님께 어떤 말을 듣게 될지 모르지만,,;;;

프레이야 2010-03-04 01:09   좋아요 0 | URL
그래요? 전 어제 그거 먹었어요.ㅎㅎ
사실 산사춘 마시고 싶었지만ㅋ
착한 딸, 만치님 같은 그런 펌 됐나요?
행복해 한다니 아주 잘 어울렸나 봐요.
근데 중학생인데 웨이브파마 괜찮나요? 학교에서요?ㅠ.ㅠ



자하(紫霞) 2010-03-04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이라 프레이야님 페이퍼보고 급땡기네요.히히~

프레이야 2010-03-04 02:44   좋아요 0 | URL
베리님, <공무도하>는 그닥 '재미'는 없구요,
(재미,라는 말이 여러가지 의미가 되겠지만 뭐랄까..)
<강산무진> 안 읽어보셨으면 권해드리고 싶어요.^^

순오기 2010-03-05 17:44   좋아요 0 | URL
강산무진은 중년의 인생들이 공감할 내용이라 아가씨에겐 어떨지...

후애(厚愛) 2010-03-0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산무진>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프레이야 2010-03-04 14:38   좋아요 0 | URL
'언니의 폐경'과 '화장'이 특히 맘에 들었어요.^^

순오기 2010-03-05 17:45   좋아요 0 | URL
언니의 폐경, 화장~ 콕 짚어서 맘에 든다니 더 좋아요.^^
김훈씨한테 내가 물어봤었죠. 여성 폐경기를 어찌 그리 리얼하게 그렸냐고...^^

프레이야 2010-03-05 18:53   좋아요 0 | URL
뭐라 답하던가요? 저도 그 대목이 참 궁금했거든요.
오기언니 그 때 그 페이퍼 어딨어요?

순오기 2010-03-06 22:15   좋아요 0 | URL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기 있어요.^^
http://blog.aladdin.co.kr/culture/3225328

무스탕 2010-03-0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게 힘든 분들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프레이야님.
늘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멋진 일이세요.
언제고 계란 한 판 보내드릴께요 ^^

프레이야 2010-03-04 14:39   좋아요 0 | URL
우힛~ 전 날달걀은 못 먹어용.
삶아서 먹을게요. 목 메이지 않게 소금 찍어서요.ㅎㅎ
참, 읽어주면서 저도 읽는다지요. 일석이조. 꿩먹고 알먹고야요^^

같은하늘 2010-03-04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순오기님의 페이퍼에서 <강산무진>을 보아갸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나저나 저렇게 긴 책을 몇시간만에 녹음할까요?
전 잠자리에서 아이에게 짧은 동화책 세권 정도 읽어주면 혀가 꼬이던데...ㅎㅎ

프레이야 2010-03-04 18:44   좋아요 0 | URL
저도 애들 어릴 때 많이 읽어줬어요.
같이 읽기도 했구요.^^
몇시간 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루만에 되는 건 아니구요.
전 좀 빨리 읽는 편이에요.^^

2010-03-05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7 0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