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가 조금 길었다. 아침에 들기름 메밀국수를 해먹고(홍게백간장으로 간 조금 하고 들기름 낫게, 삶은계란, 깨 손바닥으로 부셔서 넣고 열무김치랑) 진하게 드립해주는 커피 한잔 마시고. 습도는 높고 오른발목은 시원찮고 밍기적거리다 벌떡 일어나 머리 감고 준비하는데, 아베, 총, 어쩌고 라디오에서 뉴스가 들렸다. 요즘 참 1분이 멀다하고 놀라운 뉴스가 들리는데 이건 또 뭔가. 마음은 부리나케 발은 더듬더듬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시낭송과 감상 수업이 있는 날이다. 도서관 가는 길에 ebs 북카페 듣는 거 너무 좋다. 김소연, 김상혁 시인이 오늘 소개한 시 두 가지 중, 여는시로 '1분 후의 세계'를 낭송해드렸다. 지긋이 눈 감고 귀 기울이시는 분들 얼굴이 또 참 좋다. 마치고 저녁엔 이곳 광안리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홀에서 한 문학행사에 참여했다. 그간의 사정을 알고 안부와 염려의 말을 주시는 글벗들 덕에 마음 촉촉.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꼭 잡아주신 교수님, 많은 말 하지 않아도 마음이 느껴졌다. 그동안눈에 띄게 여윈 것 같아 마음 쓰인다. 난 반대로 통통해지고. 1분 후의 세계는 잘 모를 일이지만, 다들 오래 건강하면 좋겠다. 집에 들어오니 남편 혼자 앉아 추도예배 간단히 보고 그대로 앉아 있다. 증조부(증조모까지) 기일이었다. 해마다 내가 한 지 좀 되었다. 올해는 좀 생략했으면 싶었는데 그러기 싫어해서 꼭 생선 굽고 탕국 끓여야겠냐고 메뉴를 바꿔도 마음이 중요하지 않겠냐고 아침에 말했더니 쌀밥 짓고 과일에 소고기 굽고 술 한 잔 올려놓았네.
1분 후의 세계 / 박용하
사람 만나는 게 돌 만나는 것보다 흥미 없어
젊은 시인들 시를 읽네
돌에는 무늬라도 있지
천 년 물결 기억 무늬
천 년 어둠 추억 무늬
그렇다고 나는 돌 수집가가 아니라네
사람들 만나는 게 커피 만나는 것보다 깊이 없어
젊은 시인들 시집을 밤늦도록 읽네
거기엔
하나 마나 한
제자리 높이뛰기 말들이
헛바퀴 돌기도 하지만
처음 듣는 목소리가
피부를 뚫고 들어와 피와 함께 돌기도 하네
가장 좋은 시는
지금 쓰고 있는 시
가장 나쁜 시도
지금 쓰고 있는 시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을 당신도 모르듯이
오늘의 삶은 오늘도 모르고
내일의 시는 내일도 모른다
보이는 풍경 너머
보는 풍경
더 멀리
끝끝내 안 보이는 풍경 앞에서
다음이 없는 만남이
가장 좋은 만남이라는 것을 두고두고 모르는
이번 만남처럼
1분 후의 세계가 어떻게 변할지
3분 후의 내가 어떻게 돌변할지
1시간 후의 저 자두나무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듯
내 속으로 들어가는 데만도 일생이 걸리고
내 밖으로 들어가는데 또 일생이 걸리고
그렇게 나는 너를 지나가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나 몰라라 하네
매일 초면인 해와 달
매일 창세기인 바닷가
매일 새로운 파도
매일 다른 바다
초록 잎사귀는 다 다른 초록 잎사귀
빨간 앵두는 제각각 빨간 앵두
눈물은 제각각 명암 눈물
나무가 자라는 곳까지 가서
뿌리는 나무를 박고
나무가 자라는 곳까지 가서
잎은 나무를 떠나고
한 번 떠나간 머리카락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여벌이 없는 생사처럼
인생은 한 번조차도 많다
1분이면 과분한가
헛살았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1분이면 부족한가
삶의 경이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우리가 알고 있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을 겨우 아는 것
아무리 멀리 가도
발바닥에 닿는 것들을 노래하고
머리카락에 연결된 것들을 상상한다
인간을 말하되
인간만 말하지 않는다
플라스마 / 임경섭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그의 아내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고장에선 오로라를 볼 수 없었다
같은 고장에서 나고 자란 아내 역시 한번도 보지 못한 그것을 끔찍이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결혼 3주년이 되던 날 근교로 나간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멀찍이 샛노란 해넘이가 한눈에 들어오는 까페 테라스에 앉아 아내에게 말했다
죽기 전에 너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어
그러자 아내는 검붉은 가을 수수밭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아내 혼자서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도 된다는 말이야?
아내의 질문에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한쪽 머리가 아파왔다
그렇지 나는 분명 아내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지
그렇지만 일찍이 스스로 오로라를 보고 싶단 마음도 갖고 있었어
그렇다면 내 말은 내가 오로라를 보기 위한 수단으로 아내를 이용하겠단 뜻일까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꼬았던 다리를 반대로 다시 꼬는 동안 상체를 아내 쪽으로 은근히 숙이며 말했다
죽기 전에 너와 오로라를 보러 가고 싶어
그러자 아내는 푸르르 떨리는 진보랏빛 유성 같은 입술로 물었다
당신은 오로라가 보고 싶은 거야,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은 거야?
아내의 질문에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 오로라를 보는 일은 검색으로도 가능한 일이지
그래도 나는 태양의 입자와 지구의 자기장이 부딪는 곳에 서서 그것들의 발광을 목격하고 싶은 마음이었어
그래서 내 말은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되 거기서 오로라를 보지 못해도 된다는 뜻일까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의자에서 일어나 아내에게로 걸어가 그녀의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다시 말했다
죽기 전에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 너와 함께 오로라를 바라보고 싶어
그러자 아내는 북극점으로부터 불어오는 텅 빈 바람 같은 눈빛으로 물었다
생애 단 한번 맞이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왜 당신과 함께해야 하지? 지치도록 평생을 함께할 당신과 말야
아내의 말에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한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며 웃기 시작했다
다시없을 이 밤 아내와의 귀갓길은 그에게 아프지도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고 허전하지도 않았고 가득하지도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헤르베르트 그라프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지나가버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 임경섭 시집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에서
임경섭 시인
1981년 강원도 원주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