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지나고 그 주 금요일에 점자도서관에서 하는 테마가 있는 시 수업을 마치고 약속 장소로 갔다. 앗, 그전에 엄마집에 잠시 들러 추석 때 못 찾아뵌 딸 노릇을 사들고 간 꽃등심으로 좀 하고 가느라 약속시간보다 20분 늦게 도착했다. 빈대떡집에서는 이미 세 분이서 한 순배 돌리고 계셨다. 나는 안주 킬러라 맥주는 한 잔만 받고 배가 엄청 부르도록 먹고 말았다. 

이런저런 근황을 이야기하다 협회 하반기 행사 일정 조율을 하는 중에 우리 동인 및 협회를 16년째 이끌고 계신 대장님 입에서 '이연실 편집자'가 나왔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를 만든 그분이고 에세이 편집자로 상당한 분이라며 한번 강연을 모시고 싶다는 요지였다. 11월 초로 모시려면 이미 강연 섭외나 그분 일정으로 바쁠텐데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내가 말했고 나중 연락을 취해 보셨는지 아무튼 강연은 다음에 하기로 되었다.


 그러고 이름을 새겨듣지는 않고 이 자리는 지나갔는데 며칠 전 우연히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제목이 먼저 보였고 유유출판사, 저자 이름은 나중에 보였는데 이력을 보니 그분이 맞다. 이미 유명한 에세이들이 이 분 손에서 나왔더라.  


조목조목 경험에 비추어 쉽고도 정확하게 쓴 이 책을 읽어보면 에세이를 쓰겠다는 작가와 삶, 원고를 대하는 편집자의 태도와 현실적으로 '일반 독자'를 향해 책의 방향을 모색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낌이 확 온다. 늘 공부하고 수집하고 작은 것에도 잘 느끼며 살아야 되는 직업 같고, 밝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 같다. 책은 유유출판사다운 그 만듦새이니 읽기에 실용적이다. 제목의 중요성부터 표지, 다른 장르와는 다른 에세이 보도자료의 어조, 저자와의 좋은 관계, 디자인팀과의 지치지 않는 조율까지, 일을 하며 배우고 느끼게 된 경험을 바탕으로 내용이 구체적이고 알차다. 겸손하고, 확고함에 유연성도 잃지 않는 좋은 태도를 지닌 사람 같아 호감이 간다. 게다가 좋은 책을 몇 권이나 건지게 되었다.


<에세이 만드는 법>을 읽고 끌려서 주문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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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국적도 생소한 벨라루스의 작가다. 이연실 편집자는 어느 날 신문에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두고 '실제 사람들을 인터뷰한 논픽션인데 동시에 소설이기도 한 책'이라는 기사를 읽고 달려들었다. 인터뷰집과 르포의 성격을 한 권에 품은 책이다. 게다가 문학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점이 끌렸던 건데, 편집자로서 좋은 책을 알아보는 눈이 있는 거다.


이 책을 발간한 후, 알렉시예비치는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수상을 미리 알고 메이저급 출판사에서 미리 당긴 거 아니라는 류의 소문과 달리 이 책은 2년간의 시간이 번역과 편집에 소요된 결과물이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그보다 전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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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랑의 서 


 '이연실 갤러리'에는 유난히 '책 읽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과 사진이 많다고 한다. 편집자 선배들은 오랫동안 풍요롭고 단단한 '자기만의 미술관'을 가슴에 꾸려온다고. 이렇게 이미지를 의식적으로 모으고 채운 갤러리, 그중 아꼈던 중국 출신의 화가 '원우'의 유화를 표지에 올린 책이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유명한 작가들의 사랑과 연애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긴 이 책의 원제는 '책 표지 속의 작가들Writers Between the Covers'인데 한국어판 제목을 다소 자극적으로 바꾸고 표지는 최대한 우아하고 고상하게 가야겠다는 작전을 세워 두고 시작했다고! 

김훈은 이 책을 40금이라고 했단다.

(페이퍼 쓰는데 이 책 벌써 도착했다. 오호 표지그림 정말 멋지다.)

목차를 보니 아는 이야기도 좀 있고, 당연하게도 보부아르가 있네. 

보부아르가 나오는 챕터 제목은 '섹스의 즐거움'. 



원우의 그림에는 친근한 동양인과 책이 등장하지만, 어딘가 좀 낯설고 독특한 기운이 감돈다. 원우의 그림 속 인물들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책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을 머리에 이고 있거나 책에 파묻혀 있거나 때론 책을 애무하는 것 같다. 책을 데리고 살아가다가 약간 미쳐 버린 사람들 같달까. 나는 언젠가 환장할 것 같은 열기가 배어 있는 원고를 만나면, 원우의 그림을 꼭 표지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 59~60쪽 



무엇보다 에세이를 문학이 아니라고 보고 홀대하는 풍토를 지적하며 '잡문'으로 말하는 사람에게 모멸감을 느꼈다가 정여울 작가가 하는 말에서 힘을 얻었다는 마지막 대목은 편집자로서 저자의 일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에세이는 흔히 자기고백적인 글이라 신변잡기에 머무르기 쉬운 함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좋은 편집자 이전에 좋은 작가라면 그 함정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편집자로서만이 아니라 글을 쓰고 구성하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 될 내용이 알토란 같다. 


저자가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에서 들었다는 정여울 작가의 말은 아래 인용문에서...

타인이 에세이를 '잡문'이라 부를 때는 이 장르를 가볍게 보는 편견이 들어 있을 것이나, 스스로 나의 장르를 '잡문이라 말할 때 그것은 자기비하도, 겸손도 아닌 단단한 자신감이 된다고. '잡스럽다'는 것은 반듯하게 그어진 경계나 선 따위는 뛰어넘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고. 


나는 잡종 편집자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과 좋은 사람을 책으로 만들 수 있는 잡종 에세이 편집자이다. 앞으로도 매일 고민하고 가끔 실패하고, 종종 잘 팔면서 나는 계속 '잡문' 편집자로 살아갈 것이다. - 175쪽


나는 2014년부터 동인지와 계간지, 개인수필집 등을 만드는 일을 했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모든 걸 믿고 맡겨주신 대장님에게 감사드린다. 지난 해에는 이런저런 한시적인 걸 더 맡아 한 달에 한 권 꼴로 만들었던 셈이다. 이연실 편집자처럼 메이저 편집자가 아니고 문단의 말석에서 글을 쓰며 삶의 의미를 찾는 수많은 글벗들의 글을 모두 읽고 교정교열하고 이쁘게 앉히는 일이었지만 나름의 보람과 의미가 있었다. 일을 하며 사람을 알게 되었고 모르던 면면을 보고도 마음에서 내치지 않을 수 있는 너그러움도 배우게 되었고 착오나 오차가 생겼을 때 능숙하게 서로 다치지 않고 해결하는 유연성과 여유도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2019년부터는 두 군데를 맡아 하다가 올 겨울호를 마지막으로 만기제대할 생각이다. 여기까지!


그런데 진짜 좋은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이 책 <에세이 만드는 법>을 읽고 나서 불끈 생기고 말았다. 이 동네는 거의 자비출판이라 시중 마케팅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좀 다르긴 하지만 팔리는 책이 아니면 어떤가,라고 말하면 이연실 편집자 같은 분에겐 안 통할 이야기가 되겠다. 아무튼 이 동네 사람들은 무용한 일에 열정이 많다. 나도 그렇고. ^^

계간지는 표지와 특집 기획하고 회원의 글을 마감기일 안에 받아 편집교정하고 발간, 전국배부까지 일련의 과정이 한 계절을 앞서 반복해 이어졌고, 개인수필집 발간하는 일을 도맡아 도와드리면서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일생과 생각이 담긴 주옥같은 스토리를 제대로 문장으로 앉히고 목차를 짜고 표지와 표제, 전체 구성에 모두 개입했다. 믿고 맡기니 처음부터 마지막 절차까지 성심껏 도와드렸다고 생각한다. 80세 전후 그보다 더, 미수의 나이에 돌아보는 한 사람의 인생은 눈물겹고 거룩하기에 내 글인 듯 감정이입해 내 책인 듯 만들었다. 


나는 쓰지 않으면 숨 쉴 수 없기에 계속 뭐든 쓸 것이고 좀더 다양한 시선을 두어야겠다고도 생각한다. 이 일을 하며 속으로 묵혀두었던 여러가지 소소한 일들을 좀전에 후임 선생님과 두 시간이 넘도록 통화했다. 다른 일로 통화했지만 이야기를 시작하니 줄줄이 사탕처럼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그건 그렇고 나라는 사람은  "미친듯이 쓸 것이다. 기다려라." 이런 메모를 7,8년 전인가 어디다 해뒀더라.ㅎㅎ 한잔했던가 보다. 이제 기억이 마저 나는데 2013년 9월에 작은딸이 내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다 뭔가 다 통째 날려먹어 문서도 왕창 사라졌다. 나라는 사람은 그걸 백업도 해두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이삭 줍듯이 하며 들었던 생각이 '그냥 다시 쓰자'였다. 그냥 날려버리고 새로 하자고. 그리 될 운명의 문서라 날아간 거라고 위안하고 아이한테는 별말도 안 한 걸로 기억하는데 아이의 기억은 달라서 엄마가 미친듯이 화를 냈다고 했다. 다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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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0-16 2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멋지세요. 공감합니다 돌아보면 개개인 모두 눈물겹고 거룩한 인생 ~~ 글 쓰고 싶어하는 분들 도움 많이 주시면서 본인의 글도 열심히 쓰시는 모습 응원합니다 *^^*스베툴라나 전쟁은 여자의~~ 정말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안목있는 편집자님 덕분이군요.~~

프레이야 2021-10-16 22:24   좋아요 2 | URL
<전쟁은....> 그랬더라구요^^ 이연실 편집자, 대단! 문학동네 편집팀장인데 강의도 잘 할 거 같아요. 내년이나 여기서 초청해 들을 수 있을지도요.
저 책은 글을 에세이를 쓰거나 쓰려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거에요.

새파랑 2021-10-16 2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책 오늘 서점에서 봤었는데 살껄 그랬군요 ㅜㅜ 프레이야님도 출판일을 하시는군요. 어떤 책인지 궁금하네요. 멋집니다~!!

프레이야 2021-10-16 22:28   좋아요 2 | URL
아니에요 출판일 아니어요. 그냥 이곳 글쓰는 동네 말석의 조용한 편집일을 했을 뿐이에요 에구.

새파랑 2021-10-16 22:34   좋아요 2 | URL
편집도 출판이라 생각했는데 다른건가 보군요~ 제가 잘 몰라서 😅 편집이 더 멋진 일이죠~!!

프레이야 2021-10-16 22:51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 ^^ 제가 많이 배우게 된 일이고 믿고 맡겨주신 문우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지요. 내년에는 뭔가 제 일상의 방향을 새로 잡아야 할 거 같아요. 어찌될지 모르지만요^^

scott 2021-10-17 0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단의 말석이라도
좋은 글 아름다운 글 엮는 일을 하시는 것
멋집니다!
언젠가
프레이야님의 글솜씨가 담긴 책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 ^^

프레이야 2021-10-17 09:4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스캇님 ^^ 따뜻한 말씀에 힘을 얻어요. 미숙한 사람이라 늘 고민하며 홀로 또 같이 가려구요.

책읽는나무 2021-10-17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응원하겠습니다^^
존경의 마음이 샘솟아...아...하며 읽다가 마지막 편에서 사람 냄새가 나 혼자 빵~터졌습니다.ㅋㅋㅋ
저희도 애들이 옛날 이야기를 할 때, 얼굴이 붉어지도록 지네들 혼났었던 이야기를 디테일하게 얘기 하더라구요??
나는 정말 그렇게 혼낸 기억 없이 조금 인상쓰면서 타일렀던 것 같았었는데?????ㅋㅋㅋㅋ
기억이 각자 달라서 참 이상하다????
싶었었는데.....저만 이상한 게 아녀서 위안 받았습니다ㅋㅋㅋㅋ
사람 냄새가 나서 프레이야님 더 리스펙입니다♡♡

프레이야 2021-10-17 15:07   좋아요 1 | URL
그니깐요 ㅎㅎ 화를 미친듯이 한번 내긴 했지만 아이한테 대놓고 하진 않았는데 딱 기억하곤 ㅋㅋ 엄마들 다 글쵸. 갑자기 둥이 민이 요즘 모습이 궁금해지네요. 귀여운 둥이 잘생긴 민이. 저는 보기보다 허당이라 빈구석도 많고 그런 사람입니다요. ^^ 오늘 날씨 쨍하네요

2021-10-17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17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17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17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17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11-05 16: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프레이야님의 글은
무조건 책으로 나와야 함
아무튼 ^ㅅ^

프레이야 2021-11-05 17:27   좋아요 1 | URL
에궁 고맙습니다 ~^^

그레이스 2021-11-05 16: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쓰지 않으면 숨쉴 수가 없고....!
멋지세요~
저는 아직은 읽지 않으면 숨쉴 수 없는 단계!^^
그 경지는 못이를 듯요
쓰려고 하면 서두가 생각나지 않아서 숨쉴 수 없을 때가 가끔 있죠 ㅋㅋ
축하드려요~

프레이야 2021-11-05 17:29   좋아요 1 | URL
ㅋㅋ 서두가 생각나질 않을 땐 해찰하기요 !! 고맙습니다.

mini74 2021-11-05 16: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와닿는 따뜻한 글, 항상 감사합니다. 당산도 무지무지 축하드랴요 *^^*

프레이야 2021-11-05 17:31   좋아요 3 | URL
미니님 ~ 고맙습니당 ^^

서니데이 2021-11-05 18: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프레이야 2021-11-05 18:44   좋아요 4 | URL
고맙습니다 ^^

새파랑 2021-11-05 18: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멋진 페이퍼 당선 축하드려요~!! 저도 멋진 에세이 써보고 싶네요😁

프레이야 2021-11-05 18:45   좋아요 4 | URL
새파랑 님 고맙습니다. ^^

모나리자 2021-11-05 23: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프레이야님~
굿밤 되세요.^^

프레이야 2021-11-06 00:06   좋아요 3 | URL
모나리자 님 고맙습니다 ~^^

thkang1001 2021-11-06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1-11-06 13:5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멋진 가을 보내세요. 날씨가 넘 좋으네요 ~~

초딩 2021-11-0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
즐거운 가을 일요일 되세요~

프레이야 2021-11-07 12:00   좋아요 0 | URL
초딩 님 고맙습니다 ^^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