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의 무지를 알게 되는 날이 온다.”
누가 했던 말이었더라. 가슴을 후벼 파는 구절이었지만 이 말은 반쪽 진리에 불과하다. 독서는 끊임없이 나의 무지를 까발긴다. (매일 만나는 나의 무지!) 24인의 파워 라이터 중 내게는 금시초문의 작가가 8명이나 있었다. 이름을 안다하더라도 책을 읽어보지 않은 작가는 9명. 내 목으로 곧장 죽비가 내려친다.
철학자 강신주 : 삶이든 글이든 자기 감정에 당당하라
어렵다는 철학을 이렇게 쉽게 설명해 낼 수 있다니! 그러면서도 그는 ‘인문학 장사꾼’들은 감히 엄두낼 수도 없는 경지에 닿아있다. 한국지성사의 쾌거.
철학자 강신주에게 시인 김수영은 특별한 존재다. 인문학의 본질이 민주주의라는 것,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깨달음을 준 이가 바로 김수영이다. 김수영이 당대 문인들에게 내뱉은 “지금 문단은 언어의 고통 이전의 고통이 부족하다”는 일갈은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하여 ‘언어 이전의 삶의 심화’를 얼마나 충실히 수행했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는 김수영의 산문을 통해 시뿐만 아니라 산문도 온몸으로 밀어 붙여야 완성되는 것임을 배웠다. 아울러 상처와 치부를 감추지 않는 정직한 글이 가장 큰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배웠다.
글쓰기에서 지향점을 제시해준 외국 작가로는 발터 베냐민을 꼽았다.
“베냐민의 산문을 통해 사물, 인간 혹은 사건에 대해 어떻게 거리를 두며 글을 써야 하는지를 배웠어요.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안 돼요. 너무 가까우면 신변잡기식 글이 되고, 너무 멀면 리얼리티가 떨어지거든요.”
그가 열정적으로 쏟아낸 많은 말들 가운데 가장 크게 공감이 갔던 부분은 인문학의 목적이 민주주의의 완성에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 인문학은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나 기업가들의 경영 마인드 개선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렸다. 인문학의 목적은 자본에 인간의 얼굴을 덧씌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강신주의 말대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각자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어야 한다.
사회학자 고병권 : 제도권 밖에서 ‘현장’을 이야기하다
수잔 손택을 떠올릴 정도로 고병권의 글쓰기는 ‘현장’을 바탕으로 한다.
사유를 밀고 나가는 고병권의 글쓰기 방식은 니체를 다룬 책 <언더그라운드 니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라운드는 ‘토대’, ‘근거’라는 뜻인데, 고병권은 ‘근거들의 근거 없음’의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금권정치든 귀족 정치든 각각의 근거나 원리가 있는데, 민주주의는 그런 근거의 근거 없음을 드러낼 때 시작된다는 것이다.
고병권은 리영희 선생을 한 예로 들었다. 리 선생은 독재정권의 근거 아래로 뚫고 내려가 근거 없음을 폭로한 이다. 그는 언더그라운드 개념을 정치체에 적용하면 민주주의를 사유할 수 있다고 했다. 고병권에게 이런 아이디어를 준 게 니체의 <서광>이다.
“가난은 ‘찢어진 팔꿈치’가 아니라 그걸 신경 쓰게 되는 상황이에요. 단지 재화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갖게 되는 복잡한 감정인 거죠. 저는 ‘빈곤’이라는 말과 ‘가난’이라는 말을 나누려고 해요. 원래 빈곤이 결핍과 관계된다면 가난은 고생과 관계된 말이죠. 결핍이나 궁핍에서는 빨리 벗어나야 해요. 하지만 고생이나 고통에서는 그저 도망치려 해선 안 됩니다. 거기에는 우리를 일깨우고 성숙케 하는 뭔가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난학을 공부하고 싶기도 하고요.”
법학교수 김두식 : 내부자로서의 양심적 고백
그는 책을 써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보다도, 책 한 권 한 권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공부한 결과물이라는 데 의미를 둔다. 그가 출판사의 기획에 의한 책 쓰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자신의 문제의식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 <헌법의 풍경>이 4만 부가 넘게 팔리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자 수많은 출판사에서 ‘청소년을 위한 법률교양서’와 같은 책을 제안해왔지만 거절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그는 ‘고통쓰럽게 쓰되, 쉽게 읽혀야 한다’를 원칙으로 글을 쓴다. 이는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최일남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체득한 원칙이다. 최일남 선생은 독자로 하여금 인터뷰이가 어떤 사람인지 훤히 알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는 스스로 바보가 아닐까 의심이 들 만큼 이해되지 않는 책들을 많이 봐왔는데,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그런 마음을 고쳐먹었다.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책은 잘못된 책이 아닐까’라고 말이다. 자기 위로만은 아니다. 그는 진짜 대가들을 만나면 어떤 분야든지 한 시간만 같이 얘기를 나눠도 그 분야에 대해 눈뜰 수 있게 해준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정작 어려운 이야기를 계속하고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인용한다는 것이다. 자기 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전문가일수록 읽기 쉬운 책을 쓰는 법이다.
정치학자 김원 : ‘독한 글’로 시대의 통념을 깨다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여공1970 그녀들의 반 역사>는 김원을 무서운 신예로 떠오르게 했다. 1960~1970년대 현대사를 관통하며 주목받지 못한 사람과 사건을 담아낸 일련의 작업들은 그의 말대로 ‘보통 사람들의 삶을 복원해내고 싶은 열망“에서 움텄다.
자료 수집 과정에서 만나는 이들의 인간적 고뇌, 숨소리까지 깃들어 있는 한 권 한 권의 책들은 방대한 사료와 저자의 깨달음까지 더해져 세상에 나온다. 모든 글이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그는 좋은 글이란 무엇보다 독자가 저자의 고민을 읽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격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좀 힘들고 마음이 무거워지더라도 작가의 글 쏙에 담긴 고민을 독자가 엿보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군사평론가 김종대 : 기록하지 않으면 망각되는 군대 문제
김종대는 지금까지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와 <시크릿파일 서해전쟁> 두 권의 단독저서를 비롯해 <김종대 정욱식의 진짜 안보>, <저항하는 평화>, <봉인된 천안함의 진실>등 여러 권의 공저를 냈다.
<시크릿 파일 서해전쟁>을 쓸 때는 2년 동안 육해공 고위 장교 31명을 만나 총 250여 회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오래 들어주는 자세다.
김종대는 스스로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초창기에 쓴 글들을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란다. 그러나 글쓰기는 노력으로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말과 술과 글은 많이 할수록 늘어나죠. 다작으로 유명한 강준만 교수를 보세요. 활자 중독증이에요. 글을 쓰려면 글에 중독돼야 합니다. 저는 뭔가를 쓰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들은 페이스북에라도 꼭 씁니다.”
셰프,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 재료가 좋으면 과정이 즐겁다
박찬일은 자신의 글이 음식 사회사 혹은 음식 문화에 대한 잡담이라며, 평소 얼마나 읽고 공부하느냐가 글쓰기의 질을 좌우한다고 말했다. 한 음식이 음식 사회사나 문화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밝히기 위해서는 일단 자료 취재를 꼼꼼히 해야 한다.
이런 공력이 그대로 드러난 책이 <백년 식당>이다. 그는 이 책에서 설렁탕과 육개장, 냉면 추어탕 등 우리 음식의 연원에 대한 독창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다.
하나의 음식이 생기고 모습을 바꿔가는 데는 당대의 경제적 조건이나 유행 등 인간 세상의 모든 것들이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점에서 박찬일은 “요리는 이미 인문의 영역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쓴 마이클 폴란이나 <대구>의 작가 마크 쿨란스키처럼 요리나 음식 재료를 가지고 경제, 사회, 문화적 요인을 분석하는 작가도 유명하다.
역사 저술가 박천홍 : 근대 사료를 포착해 현재에 다리를 놓다
박천홍은 2003년 철도를 통해 한국 근대사의 문명을 다룬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을 내놓으며 단박에 주목을 받았다. 그 밖에 <여행하며 읽는 우리 고전>시리즈와 <인간 이순신 평전>을 냈고, 지금은 근대 지식의 형성사를 담아낼 책을 한 권 집필 중이다.
글쓰기란 자신이 무엇을 알고 싶은지 정확히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료는 그다음에 찾으면 된다. 한번 시작한 ‘사다리 타기’처럼 하나의 자료가 또 다른 자료를 찾게 만들고 길을 안내해줄 것이다. 질문을 제대로 던져야 제대로 된 답을 얻듯, 자기만의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제의식만 확고하면 그에 필요한 자료가 발견되기 마련이고, 홀리듯 이야기가 써집니다. 역사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영역이에요. 전문 역사학자가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거든요.”
디자인연구자 박해천 ; 논픽션의 새로운 기법, ‘비평적 픽션’
박해천은 카이스트 학부와 석사과정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하고 영국 미들섹스대학에서 공간문화연구 석사과정을 마쳤다. 앞서 그는 2011년에 아파트 문제를 다룬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책을 출간한 바 있다.
박해천은 2015년 9월쯤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아파트 게임>을 잇는 3부작의 마지막 책을 펴낼 예정이다. ....그는 앞선 두 책과 새로 나올 책을 묶어 ‘콘크리트 유토피아 3부작’이라고 이름 붙였다. “디자인과 관련해 모디니티를 상징하는 독특한 재료들이 있어요. 플라스틱, 유리, 콘크리트 같은 것들이죠. 그 가운데서도 한국 중산층의 성장과 다자인 문화의 형성에서는 콘트리트가 핵심적인 키워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