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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2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7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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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부정부패로 끌어모은 더러운 돈으로 박정희는 민주 공화당을 창당한다. 박정희는 쿠데타 세력인 송요찬, 유원식, 김동하 등이 공화당을 비난하자, 2월 18일 눈물을 흘리며 대통령 출마를 포기하겠다고 밝힌다.
박정희는 김재춘을 중정부장으로 앉힌 뒤 이른바 ‘알래스카 토벌작전’을 벌인다. 김동하를 비롯한 함경도 출신들 군인들이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것. 역시나 조작이었다.
3월 13일 ‘국민자유연맹’이라는 유령 단체가 ‘쿠데타 음모를 처벌하라’와 같은 삐라를 살포하면서 데모를 한다. 수방사 장교 80명 등은 민정 불참선언 철회와 군정 연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다. 이는 박정희 경호실에서 조직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3월 16일 오후 2시 군정 4년 연장을 전격적으로 제의한 뒤 이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효한다.
3월 22일 윤보선 등은 백조그릴에서 군정 연장에 반대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한다.
육사 11기, 전두환 노태우 등은 친위 쿠데타를 계획한다. 박정희가 11기를 체포하라고 명령하지만 김재춘은 11기를 봐달라며 박정희에게 부탁한다. 이에 김재춘 대신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으로 교체된다.
8월 8일 송요찬은 <동아일보>를 통해 박정희가 380억 원을 부정 대출 증권파동을 일으켰다는 폭탄 선언을 한다. 박정희는 곧장 보복한다. 11일 송요찬을 살인 및 살인교사 혐의로 구속한 것. 8월 30일 퇴역식을 가진 박정희는 다음날 31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한다.
박정희를 설득해 김재춘이 창당한 자민당은 설 자리를 잃게 되지만 9월 3일 자유민주당(자민당) 창당대회를 개최한다. 박정희는 석방 11일 만에 자민당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된 송요찬을 재구속한다.
9월 5일, 이후락에게 납치된 김재춘은 가족과 작별인사조차 못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태워진다.
개발 독재 지지자인 미 하버드대 교수 새무얼 헌팅턴은 그의 저서 <변화하는 사회에서의 정치질서>에서 민주공화당을 찬양한다.
박정희는 8기 세력이 커지자 11기 세력을 정치군인으로 키운다. 민정 불참 선언을 한 직후 박정희는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 손영길, 박갑룡 등에게 자신을 도와달라며 조직 결성을 지시한다. 그렇게 해서 결성된 조직이 하나회다. 전두환 그룹은 전부 다 영남출신이었다. 이들은 16년 후 또 다른 쿠데타를 유감없이 발휘할 것이다.
10.15 대선을 앞두고 민정당은 윤보선을, 국민의 당은 허정을 대통령 후보로 결정한다. 그밖에도 여러 명의 야당 후보들이 난립했다.
9월 22일 여수 유세에서 윤보선 찬조연사 윤재술은 “이곳은 여순반란사건이란 핏자국이 묻은 곳이다. 그 사건을 만들어 낸 장본인들이 죽었느냐, 살았느냐? 살았다면 대한민국에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여러분은 아는가, 모르는가? 여러분이 모른다면 저 종고산은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 윤재술은 연단 뒤쪽 우뚝 서 있는 야산을 가리키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종고산아, 너는 알고 있다, 종고산아 말해다오, 너는 분명 알고 있다, 종고산아 말해다오”
윤재술의 종고산 타령에 대해 무슨 말인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여순 사건때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했던 박정희의 빨갱이 경력을 직접 말 못하고 애꿎은 종고산만 부르짖은 것)
윤보선은 직접적으로 여순반란사건을 물고 늘어진다. 박정희는 영남지역에서 지역감정을 선동한다. 대구 수성천변 유세에서 찬조연사로 나온 이효상은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며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년만년의 임금님을 모시자”고 선동한다.
허정이 후보를 사퇴하고 선거는 윤보선과 박정희의 2파전으로 굳어진다. 윤보선은 색깔 공세에만 치중했을 뿐 정책 경쟁에선 박정희에게 밀리고 있었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시작되었다. 개표 초반엔 윤보선이 앞선다. 한때 23만 표차로 박정희를 앞서기도 했다. 최종 개표 결과는 박정희 472만 2천 표, 윤보선 454만 6천 표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불과 15만 표 차이. 장리석 19만 8천 표, 오재영 40만 8천 표, 변영태 21만 6천 표였다. 어느 한 후보라도 윤보선과 합세했더라면 윤보선이 당선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 후보가 뒤로 처졌을 때, 쿠데타 세력들은 개표를 중단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군을 출동시켜 비상사태를 만들어 선거무효를 선언케 해야 한다는 이도 있었다.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 전재구는 선거를 전복할 만한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다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박정희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만 승리했다. 영남에서의 표 차이는 66만 표였고, 호남에서의 표 차이는 35만 표였다. 진보계는 윤보선이 아니라 박정희에게 투표했다. 진보계 인사들은 앞으로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것이었다.
박정희와 방일영은 ‘기생파티’에서는 죽이 잘 맞는 사이였다. 훗날 카지노 황제 전락원은 방일영을 가리켜 “권번 출신 기생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이라고 칭송했다.
11. 26 총선에서 공화당은 전체 의석 175석 가운데 지역구 86석, 전국구 24석을 보태 110석을 얻는 압승을 거둔다. 김종필은 12월 2일 공화당 의장 자리로 복귀한다.
12월 17일 박정희는 제 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군사정권은 경제사절단을 서독에 파견해 차관 제공을 요청한다. 지급보증이 문제였는데, 인력 수출로 해결된다. 인력 수출 직종은 광부와 간호사였다.
63년 이만희가 연출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23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다. 신상옥 감독의 <쌀>, 박상호 감독의 <또순이>도 인기를 끌었다. 김수용 감독,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청춘교실>이후 많은 청춘 영화가 양산되기도 했다.